* * *

이나는 기구가 종착지에 도착하자마자 팔을 풀고 폴짝 뛰어내렸다. 그리고 도기가 따라오는 걸 확인하지도 않고 그냥 혼자 성큼성큼 걸어갔다. 도기가 옆에 붙어 섰을 때도 이나는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설렌 마음에 더 실수할까 봐 최선을 다해 스스로를 다스리는 중이었다.

도기 역시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이나가 만들어준 거리를 굳이 침범하지 않고 조용히 이나를 따라 걷기만 했다. 애초에 계획한 기구를 전부 다 탔음에도 이제 그만 돌아가자는 말조차 꺼내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목적 없이 걷던 이나가 갑자기 우뚝 멈춰 서서 간식을 파는 매대를 가리켰다.

“도기 씨, 나 구슬 아이스크림 먹고 싶어요.”

이번에도 도기는 군말 없이 매대 앞에 섰다. 도기가 무슨 맛을 할 거냐고 묻기도 전에 이나가 빠르게 말했다.

“나는 초코맛.”

“초콜릿으로 하나 주세요.”

“왜 하나만 사요? 도기 씨 것도 사야죠.”

그 말에 도기가 웃으며 소곤거렸다.

“돈은 내가 내는 건데.”

“네? 손님 뭐라고 하셨어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두 개 주세요.”

결국 도기는 생각에도 없던 구슬 아이스크림을 양손에 하나씩 들게 됐다. 이제는 이나 혼자 이 정도는 쉽게 들 수 있었지만, 구슬 아이스크림이 둥둥 떠다니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게 분명했다. 아니 이상하게 생각만 하면 다행이지, 잘하면 소동이 날 수도 있었다. 그래서 도기가 두 개 다 들고 놀이공원 구석에 있는 벤치로 향했다.

막상 손에 들면 가리는 것 없이 대부분 잘 먹는 도기는 아이스크림 컵 하나는 이나와 제 사이에 내려두고 하나는 제 손에 들고 아이스크림을 먹기 시작했다. 어차피 먹을 수 없는 이나는 옆에서 숟가락으로 애꿎은 아이스크림만 쿡쿡 찔렀다.

“아, 진짜 먹고 싶다. 괜히 샀나 봐요. 사니까 더 먹고 싶어지기만 하네.”

“어떤 맛인지 궁금해요?”

“맛이야 다 알죠. 그래서 더 먹고 싶은 거라고요.”

“맛보는 기분이라도 내볼래요?”

“어떻게요? 입에 넣어볼까요? 근데 허공에 숟가락질하면 되게 웃길 거 같은데. 조금 비참할 거 같기도 하고.”

이나는 휘휘 젓던 숟가락을 아이스크림에 푹 찔러 넣었다. 이렇게 만질 수는 있는데 먹을 수 없다니 이건 너무 부당한 처사 같았다. 괜한 억울함에 조금 화가 나려는 참이었는데 도기는 보란 듯이 구슬 아이스크림을 한 숟갈 떠 입안에 넣었다.

“지금 도기 씨 먹는 거 보면서 먹는 기분 내라는 건 아니죠?”

이나가 설마 하는 눈으로 도기를 들여다보는데 도기는 아무 말도 없었다. 다만 저를 쳐다보는 이나에게 천천히 다가갈 뿐이었다. 얼굴이 점점 가까워져 오자 놀란 이나가 입을 꽉 다물고 참을 숨이 없으니 참는 시늉이라도 했다. 그렇게 입술끼리 거의 맞닿기 직전 이나는 결국 눈까지 꽉 감아버렸다.

“이건 누구 거예요?”

그리고 입술끼리 닿는 대신 들려온 목소리에 이나는 감았던 눈을 한쪽씩 떴다. 그 목소리의 주인은 키가 이나의 허리도 안 올 법한 어린 여자아이였다. 조금 전까지 이나를 설레게 했던 도기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이나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아이의 물음에 답해주고 있었다.

“아저씨 건데.”

“엄마가 그러는데 아이스크림 두 개나 먹으면 배탈 난댔어요.”

“꼬마야, 엄마는 어디 있니?”

“잃어버렸어요. 찾아주세요.”

아이가 아주 당당하게 대답했다. 조금 전까지 긴장하고 있던 이나는 푸핫 하고 웃어버리고 말았다.

“아, 어떡해. 너무 귀여워. 도기 씨가 믿음직스러워 보였나 봐요.”

사실 그보다는 벤치에 놓여있는 아이스크림에 대한 욕망이었지만 두 사람이 알 리는 없었다.

“이거 애 줘요.”

“이거 먹으면서 엄마 찾으러 갈까?”

아이는 의심 하나 없이 도기가 내민 아이스크림을 받아서 들었다. 야무지게 엄마를 찾아 달라고 했지만 역시 애는 애였다. 도기와 이나는 아이를 데리고 미아보호소로 향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보호소였는데 아이가 아이스크림에 정신이 팔려 걷는 둥 마는 둥 하는 바람에 결국 도기가 아이를 안아 들 수밖에 없었다.

아이는 도기의 품에 안겨 편하게 아이스크림을 먹다가 반쯤 남겨두고 이나를 쳐다보았다. 처음에 이나는 아이가 제 너머로 엄마를 발견한 건가 싶어 고개를 두리번거렸는데 아이를 찾는 것 같은 행동거지의 사람은 없었다.

“근데 언니는 왜 아무 말도 안 해요?”

그 말에 도기가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이나 역시 조금 놀라 입이 벌어졌다. 두 사람이 그러거나 말거나 아이는 평온하게 아이스크림 한 숟갈을 입에 넣고 입을 앙다물었다.

“꼬마야, 너 이 언니가 보이니?”

아이가 숟가락을 입에 넣은 채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거 언니 거예요? 내가 먹어서 화난 거예요?”

이나가 보이기는 해도 목소리는 들리지 않아 조금 걱정이 됐던 모양인지 아이가 눈치를 보면서 물었고 도기는 그런 아이를 다정하게 달래주었다.

“그런 거 아니야. 언니가 먹으라고 한 거야.”

“움, 감사합니다. 언니.”

안심시키는 도기의 말에도 아이는 이나를 똑바로 바라보지는 못하고 웅얼거리면서 대답했다. 어쩐지 이나를 조금 무서워하는 기색이었다. 그런데 이나는 그 모습마저 귀여워서 저도 모르게 미소 짓고 말았다. 그제야 아이가 안심한 듯 따라 웃었다.

한결 마음이 편해진 모양인지 아까보다 밝아진 얼굴을 한 아이가 아이스크림을 다 먹었을 무렵, 두 사람은 보호소에 도착했다. 이나는 보호소에서 나오는 길에 아이에게 손을 흔들어 주면서 뒷걸음질을 쳤다. 이윽고 아이가 보호소 직원의 손을 잡고 안쪽으로 들어가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자 손을 내리고 도기를 불렀다.

“도기 씨, 저 무섭게 생겼어요?”

“갑자기 그건 왜요?”

“아니, 애가 내 눈치를 좀 보는 거 같아서요.”

확실히 아무 말도 하고 있지 않으면 조금 날카로워 보이는 인상이기는 했다. 이나는 이런 제 인상이 좋을 때도 있었고 그렇지 못한 때도 있었다. 쓸데없는 시비가 붙지 않으니 좋았고, 한편으로는 그 인상 때문에 쓸데없는 시비가 붙기도 했으니 나쁘기도 했다. 물론 도기는 이나의 인상이 어떻건 아무렴 상관없는 쪽이었다.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

도기가 이나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렇게 진지하게 물어본 건 아니었는데 도기가 워낙 진지하게 반응을 하니 이나가 다 민망해질 지경이었다. 심지어 계속 눈을 맞추고 있자니 아까 벤치에서 아이가 나타나기 전 있었던 일도 떠올랐다. 먼저 고개를 돌린 건 이나였다.

“아, 근데 보통 저런 애들이 남자랑 여자랑 이렇게 같이 있는 거 보면 잘 어울린다, 뭐 이런 말 해 주지 않나?”

그리고 농담을 내뱉었는데 농담의 주제가 전혀 분위기를 환기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이나는 제 멍청함에 머리를 박아주고 싶었다. 아무래도 요즘 로맨스 드라마를 너무 많이 본 것 같았다. 이제는 로맨스 드라마 따위 끊어버려야겠다는 생각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후회는 항상 늦는 법이었다. 이미 나간 말은 주워 담을 수 없었고 옆에서 계속 뚫어지게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도기 씨, 그냥 농담이니까 그만 쳐다봐요.”

참다못한 이나가 말했다.

“진짜 농담이에요?”

“네. 순도 백 퍼센트 농담.”

실상은 불순물이 백 퍼센트 섞인 농담이었지만 그렇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나는 일부러 휘휘 팔을 앞뒤로 저으며 빠르게 성큼성큼 걸어갔다. 이나보다 다리가 좀 더 긴 도기가 금방 그 뒤를 따라붙었다. 마음이 영 싱숭생숭한 이나와 달리 굉장히 평온한 도기는 아무렇지도 않게 이나에게 물었다.

“이제 뭐 탈래요?”

그 덕에 이나도 어색함이 조금 가시기는 했다. 그래도 여전히 마음 한편은 불순한 생각으로 물들어 있었지만 이나 역시 아무렇지 않은 듯 노력하며 대답했다.

“탈 건 다 탔으니까 그냥 구경해요. 저 원래 이렇게 사람 많은 데 별로 안 좋아하는데 오랜만이라 그런가. 그냥 보고 있는 것도 좋네요. 아니면 남들이 날 못 봐서 그런가?”

이나가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놀이공원을 메우고 있는 사람들을 살펴봤다. 아까보다 시간이 더 지나서 그런지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제법 많이 늘어있었다. 개 중 이나를 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확인할 방도는 없지만 아무래도 아까 만났던 아이가 좀 특이한 성질의 사람이었던 것 같았다. 아무 목적 없이 한참 사람 구경을 하면서 걷고 있는데 어디선가 나온 직원들이 갑자기 길에 줄을 치기 시작했다. 놀이공원에 아주 오랜만에 온 도기도 그 줄이 뭔지는 알고 있었다. 도기가 마냥 앞으로 걷고 있는 이나를 불러 세웠다.

“좀 있으면 퍼레이드할 시간이네요. 볼래요?”

“에이, 도기 씨도 참. 내가 무슨 애도 아니고 그런 거 볼 나이긴 하죠. 볼래요. 무조건 앞에서 볼래요. 저 앞에 앉아요.”

애당초 싫다고 할 생각이 없었던 이나는 도기의 팔을 잡고 줄이 쳐진 쪽으로 향했다. 누구보다 빠르게 줄 맨 앞으로 향하는 이나의 옆을 소풍 나온 유치원생들도 열을 맞춰 걷고 있었다. 도기의 눈에는 그 유치원생들과 이나가 일행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처럼 보여서 가볍게 웃어버렸다.

“이나 씨, 천천히-”

그 순간이었다. 날카롭게 귀를 찢는 호각 소리가 들린 것은. 이나가 맨 앞에 자리를 잡고 앉기 무섭게 비슷하게 줄 맨 앞에 도착한 유치원생들을 이끌고 있던 선생님 한 명이 호각을 불어 아이들을 멈춰 세운 것이었다.

“도기 씨?”

저를 부르던 말소리가 갑자기 끊겨 이상함을 눈치챈 이나가 고개를 휙 돌렸다. 저 뒤에서 천천히 몸이 기우는 도기가 보였다. 생각하고 말고 할 것도 없이 이나는 그대로 도기에게 뛰어갔다.

“도기 씨! 왜 그래요?”

속절없이 무너진 도기의 무릎이 바닥에 닿고 목에 핏대가 섰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나는 빠르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침, 유치원 교사가 짧게 끊어가며 계속 호각을 부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 호각 소리를 멈춰야겠다고 생각한 건 오로지 감이었다.

“죄송합니다!”

이나는 들리지도 않을 사과를 외치며 교사의 손에서 호각을 뺏어 멀리 던져버렸다. 교사가 어리둥절하게 날아간 호각을 쳐다보았는데 이나는 뒤도 보지 않고 다시 도기에게 다가와 도기를 부축하려 했다. 이나의 행동으로 인해 사람들이 이상한 눈으로 도기를 쳐다보는 건 지금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도기를 거의 끌다시피 조금 한적한 곳으로 데려온 이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도기의 어깨를 어루만졌다.

“도기 씨, 정신 차려봐요. 누구라도 데려올까요?”

지금이라면 그 정도 물리력은 행할 수 있었다. 어떻게든 데려오면 도기를 보고 누군가 신고라도 해주겠지 싶었다. 당연히 도기는 이나의 그 물음에 대답할 여력이 없었다. 벤치 위에는 앉지도 못하고 바닥에 앉아 벤치에 등을 기댄 도기가 힘겹게 품에서 약통을 꺼냈다. 손가락이 뻣뻣해 약통을 놓칠 뻔했는데 이나가 받아서 아예 뚜껑까지 열어주었다.

이윽고 도기는 익숙한 고통에서 벗어나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고통은 한결 가셨으나 정신은 여전히 혼미했다. 옆에 누가 함께 있다는 것도 잊고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는데 이나가 그런 도기의 얼굴을 두 손으로 살며시 감싸 잡고 눈을 맞췄다. 마주 본 도기의 눈에는 눈물이 잔뜩 고여있는 데다 코끝이 빨갰다.

“도기 씨. 이제 괜찮아요. 괜찮아. 내가 옆에 있잖아.”

이나는 안정감을 주는 낮은 목소리로 도기를 달래며 도기의 머리를 꼭 끌어안아 주었다.

“집에 돌아가요. 같이 돌아가요. 응?”

그 품에 안긴 도기의 숨소리가 점차 고르게 바뀌었다. 전신에 다시 제대로 피가 도는 것을 느끼며 도기는 저도 모르게 자신을 위에서 끌어안고 있는 이나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이나가 그랬던 것처럼 도기 역시 사람들이 자신을 이상하게 쳐다볼 거라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럴 겨를은 없었다. 더 이상 도기를 괴롭게 하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고 주변에서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 또한 들리지 않았다. 이 순간만큼은 온 세상이 고요했다.


* * *

“도기 씨.”

이나가 미닫이문을 스윽 열고 침실로 고개를 밀어 넣었다.

“들어가도 돼요?”

안에서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아 그냥 문을 닫으려다 슬그머니 방에 들어갔다. 침대에 걸터앉아 있는 도기가 보였는데 도기는 이나가 침실에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조용히 침대로 다가간 이나는 어차피 흔들릴 일 없는데도 조심스레 도기 옆에 앉았다. 도기는 여전히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 침묵 속에서 선뜻 뭐라 말하기 어려워 이나는 한참을 손만 꼼지락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미안해요, 도기 씨. 나 때문에······.”

그제야 도기가 이나를 쳐다봤다.

“사실, 드라마는 핑계였어요.”

“알아요.”

도기는 전날 이나가 본 드라마가 뭔지 알고 있었다. 드라마를 얼마나 재밌게 봤는지 퇴근한 도기 옆에 붙어 앉아 도기가 잠들기 전까지 내내 드라마 이야기를 했는데 모를 수가 없었다. 그냥 속아 넘어 가주고 싶었을 뿐이었다.

“이나 씨 잘못 아니잖아요.”

도기가 잔뜩 잠긴 목소리로 도리어 이나를 달랬다. 그게 이나로 하여금 더 죄책감이 들게 만든다는 것도 몰랐다. 그 바람에, 이나는 자꾸만 미안한 마음이 솟아나서 시선을 피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거의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동생이, 다나가 나한테 이렇게 해줬거든요. 내가 쉴 틈 없이 앞만 보면서 가고 있으면 옆에서 한 번씩 날 환기해 줬어요. 내 일상을 찾아준 거죠. 나는 그게 너무 좋았어요. 그래서 살아갈 여유도 생겼고.”

동생의 이름을 말하는 목소리에서 다정함이 묻어나는 것이 느껴져서 지친 와중에도 도기는 미소를 띠었다.

“그래서 나도 그냥 도기 씨한테 그렇게 해주고 싶었어요.”

그냥 그뿐이었다. 도기와 데이트 놀이를 할 생각도 없었고 그냥 도기가 평소에 해보지 못했을 일들을 경험시켜 주고 싶었을 뿐이었다. 적어도 그런 사소한 것들이 이나에게는 삶의 이유가 될 수 있었다.

“사실 난 어릴 때 기억이 많이 없어요. 꽤 오래전부터 엄마가 돌아가신 날까지. 한 번은 다나가 하도 우겨서 병원에 간 적도 있는데 일종의 방어 기제? 뭐 그런 거 같다고 하더라고요.”

이렇게 옛날이야기를 하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입안에 쓴맛이 감도는 기분이 들었다. 셋이 놀이공원에 갔던 날도 다나가 울고 웃고 한 것은 기억나는데 엄마는 연기가 깔린 것처럼 인상마저 흐릿했다.

“딱 하나 제대로 기억나는 건 내가 엄마한테 되게 못된 말을 했다는 거?”

이나는 마저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한참을 고민했다. 그 와중에 의지와 상관없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말들을 속으로 꾹꾹 눌러 담아내려 애쓰다가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결국 느릿하게 말을 이어갔다.

“우리 집은, 그렇게 화목한 가정은 아니었어요. 우리 엄마는 매일 맞고 살았거든요. 우리를 생각한다고 꽤 오래 참으셨죠. 그러다 딱 한 번 저한테 힘들다고 하셨던 거 같아요. 근데 제가 거기다 대고 엄마만 참으면 되지 않겠냐고 그랬어요. 우리 엄마는 그러고 얼마 후에 돌아가셨고요.”

말하고 나면 조금 마음이 편해질까 싶었는데 도기에게 자신의 나쁜 부분을 보여준 것 같다는 생각이 마음 한구석을 차지하자 영 껄끄러웠다. 그리고 이나는 그런 생각을 하는 본인을 이기적이라 생각했다. 자신이 상처 준 사람은 기억도 하지 못하면서 도기에게 좋은 점만 내비치려는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하지만 이미 시작한 말은 중간에 멈출 수가 없었다.

“그때 내가 어떤 기분으로 그런 말을 내뱉었는지, 엄마는 그 말을 듣고 어떤 얼굴을 하셨는지 이런 건 전혀 기억나질 않아요. 그날만 그런 게 아니라 평소에 엄마가 나한테 무슨 말을 해줬는지, 날 보면서 어떻게 웃어주셨는지 이런 것도 하나도 기억이 안 나요.”

애초에 기억할 자격조차 없다고 생각했지만 직접 말을 하고 보니 여간 착잡한 것이 아니었다. 이나는 그걸 숨기기 위해 그저 웃으며 가볍게 얘기하려고 애썼다.

“도기 씨, 난 비겁한 사람이에요. 아픈 기억을 잊겠다고 좋은 기억까지 다 버렸잖아요. 그래서 악몽 같은 것도 꿔본 적이 없어요. 꿈에서 기억할 게 없거든요. 근데 도기 씨는 다 기억하잖아요. 물론 그중에는 아픈 기억도 있겠죠. 그러니까 종종 그런 기억들이 떠오르고 안 좋은 꿈도 꾸는 걸 테고요. 하지만 분명 좋은 기억도 있을 거예요. 그렇죠?”

도기는 이나에게 언제나 좋은 청자였다. 이나의 말을 끊어본 적도 없고 이나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은 적도 없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아무런 대답 없이 듣고만 있었다.

“그건 도기 씨가 나랑 다르게 너무 올곧은 사람이라서 그래요. 그래서 그걸 다 간직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억지로 이겨내려 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해요. 약점 없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어요? 누구는 금방 딛고 일어설 수 있는 일이 누구한테는 굉장히 오래오래 가슴에 박혀있는 상처가 될 수도 있잖아요. 근데 그걸 쌓아 두고만 있으면 그 상처는 곪아서 터져버리겠죠.”

이나가 도기의 손을 살그머니 잡았다.

“내가 언제까지 도기 씨 곁에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동안은 언제나 도기 씨 편일 거고 도기 씨랑 함께 있을 거예요. 그러니까 그렇게 쌓아 두고 혼자서 아프지 말아요. 어차피 나는 도기 씨 비밀 알아도 어디 가서 말 못 하잖아요. 날 대나무 숲이다, 생각하고 다 말해요. 그럼 내가 옆에 없는 것처럼 조용히 듣기만 할게요. 그러다 보면 그 아픈 기억들이 흉터로 남을지언정 더 이상 곪아버리진 않을 거니까. 그래서 언젠가는 그 기억들이 도기 씨 마음을 헤집지 않는 때가 올 테니까.”

얼핏 도기의 눈에서 눈물이 방울져 내리는 게 보였지만 이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옆에 앉아 도기의 손을 더 꼭 잡아주는 것 말고는 이나가 더 이상 해줄 수 있는 말은 없었다. 그때 도기가 낮지만 아주 선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마워요, 이나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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