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드 오브 히어로즈 (암)요한X여로드

※ 동인설정 및 캐해석 주의

※ 엘리트 스포일러 주의

※ 암요한X로드를 쓰고 싶었는데 어쩌다보니 빛요한도 나오고 요한로드요한처럼 되어버렸는데 또 로드는 대사가 한마디도 없습니다.

※ 짧습니다. 결제선 이하에는 사담과 새해 인사뿐이에요!




그날의 꿈을 꾼다. 첫 대면에 저를 통해 다른 사람을 보고 있던 그 표정, 강단이나 신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놀라움에 떨리던 그 눈동자를 기억한다. 처음으로 눈이 마주쳤을 때 그 눈빛에 스치던 반가움을 비웃었다. 그러나 자신은 당신이 아는 그자가 아니라 광명의 이름을 이어받은 자라 밝혔을 때, 검은 눈동자에 체념이 머무른 순간은 아주 짧았으며 머지않아 결단이 깃들었다. 그것이 몹시 불쾌했다.

하지만 어째서? 얼굴도 알지 못하고 바란 적도 없는데, 원래 제 삶을 가져 마땅한 이라고 했다. 이 삶은 이미 대제 폐하께 구원받았고 온전히 그분께 바쳐진 것인데도. 요한 발켄슈트는 제 마지막의 마지막 숨까지 이 갈루스에, 카르티스 클라우디스 황제에게 바치리라 결심했었다. 그가 가진 것이라고는 자기 자신이 전부였기에 제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준 이에게 제 모든 것을 바치는 건 당연했다. 그리하여 제국의 검을 자처하며, 제국의 광휘에 달려드는 모든 것을 베어냈는데도 이 삶은 원래 대제 폐하도, 자신의 것도 아니라 했다. 그리하여 감히 이 삶의 참된 주인이라는 존재를 그토록 부정하고 싶었는데도, 체념 끝의 결단 속에 일말의 망설임도 보이지 않는다는데 충격을 받았다. 그자는 자신을 참 쉽게도 부정한 것이었기 때문에.


너, 요한 테일드가… 아닌가?


눈을 떴다. 그날의 꿈을 꿀 때, 요한 발켄슈트는 늘 그자가 유일하게 동요하며 냈던 그 목소리를 들으며 잠에서 깼다. 당신이 바라는 이가 아니라 유감이라고 비웃어주었다면 조금은 덜 불쾌했을까. 그러나 그 여자의 행동은 똑같았을 테다. 발켄슈트가 자신이 바라던 ‘요한’이 아님을 확인하고, 체념하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실행하기 위해 변함없이 제게 칼끝을 겨누었을 것이다. 그 한결같은 사실이 그를 수틀리게 했다. 그 가당찮은 결심으로 인해 그 여자에게 자신이, 자신에게 그 여자의 존재가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는다는 게 증명되었는데도, 그리하여 거리낌 없이 서로의 목적에 충실할 수 있게 되었는데도 그랬다.

그가 몸을 일으켰다. 이제는 매일같이 그 여자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서, 그 여자의 목소리로 꿈에서 깨어나는 데에 의문을 갖는 것은 얼마나 무의미한가. 방금까지 곱씹던 일은 모조리 과거가 되었으며 더는 갈루스의 영광 따위 존재하지 않는데. 요한 발켄슈트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빛은 물론 찬 공기조차 들어오지 못하도록 쳐놓은 두꺼운 커튼을 걷자 왕궁의 내실 정원이 바로 보였다. 아직 빛에 적응하지 못한 눈이 부셔 미간을 찌푸렸다가 오늘은 바깥이 유난히 더 밝다는 걸 깨달았다. 습기를 머금은 바람이 찼다. 이 시간이면 누군가는 나와 있을 내실 정원이 오늘은 텅 비어있었다. 밤새 내린 눈이 정원을 가득 덮었는데도, 진작에 하루를 시작했을 사용인 누구도 눈을 치우지 않았다. 요한은 그 흰 풍경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무감한 시선이 늘 그녀가 나오던 입구 쪽으로 향한다. 아발론의 왕은 주말이 되면 평소보다 침실에서 조금 더 늦게 나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데도.

 “…….”

그러나 그는 제 시선이 닿은 공동을 채우며 들어온 두 사람의 모습에 미미하게 인상을 구겼다. 두껍게 옷을 갖춰 입은 그녀가, 제 새로운 군주이자 이번 생에도 제 생명줄을 쥐게 된 아발론의 왕이 정원으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섰다. 그 뒤를 따르는 금발의 기사는 자신이 가장 잘 알기에 가장 좋아하지 않는 자다.

 “……개나 다름없군.”

왕이 넘어지지는 않을까 염려하던 얼굴은, 왕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자 그린듯한 미소를 지어낸다. 무어라 말을 주고받는 아발론의 왕과 그녀의 가장 충성스러운 기사를 요한 발켄슈트는 가만히 바라보았다. 몇 마디 말이 오가고 금발의 기사, 요한 테일드가 왕을 향해 왼팔을 들어 보인다. 그러면 왕은 장갑 낀 손을 그의 왼팔에 얹고 두 사람은 함께 눈 위로 발을 딛는다. 아직 아무도 밟지 않는 눈 위로 함께 발자국을 새긴다. 이를 위해 아무도 눈을 치우지 않았을 것이다. 아발론의 군주에게는 퍽 낭만적인 구석이 있었으니까.

활짝 연 창문을 통해 방 안에 한기가 가득 들어차도 요한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나란히 눈을 밟는 두 사람이 고개를 들어 자신을 볼 리가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어서, 자신과 같은 얼굴을 한 저 남자에게는 있고 자신에게는 없는 게 무엇인지를, 저자가 그녀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볼 때마다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어 그는 움직이지 않는다. 조심스레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에 내려앉은 눈송이를 녹여 없애는 남자를 본다. 감히, 그 몸에 손을 대며 가질 수 없는 것이나마 가지고자 하는 저 얼굴을 알고 있다. 충정으로 가린 연정을 알고 미소 속에 숨긴 갈망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자신은 그이고 그가 자신이니 모를 수가 없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가슴 속에 뜨겁게 치미는 무언가가 있어 요한 발켄슈트는 창가에서 돌아섰다. 창을 닫지 않은 채 커튼을 쳤다. 두꺼운 천으로 저를 가리려는 것처럼. 짙은 자줏빛 커튼을 절반만 쳤을 뿐인데도 방 안이 어두워졌다. 그 반쪽짜리 어둠 속에서 요한은 생각한다.

자신의 실존은 ‘요한’이라는 이름을 가진 자의 본질, 저 여자를 지키고, 따르고, 갈망하는 것에 선행하지 못하는 게 아닐까. 체자렛 알티온의 손을 잡고 카르티스 클라우디스를 따른 이후로 제게는 존재보다 목적이 우선이었다. 자신의 전 존재는 대제 폐하의 소망을 이룬다는 목적을 위해 이 세상에 나오게 된 거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원래 저를 가져야 했다던, 그리고 결국 정말로 자신을 가지게 된 아발론의 왕은 그 선후관계를 뒤바꿔 놓았다. 그대의 목적, 본질보다 존재가 우선하며 진정한 목적을 찾는 건 그대가 온전히 실존할 때만 가능하다고 했다. 그런 궤변을 늘어놓는 여자를 새 군주로 택한 것은 순전히 변덕이자 자신의 선택이었다. 운명의 수레바퀴, 전생의 굴레, 주박 같은 말로 태어나기도 전에 그녀에게 예속된 제 존재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아발론에서 그대의 본질을 찾아갔으면 한다는 그 말을 믿어보기로 했다. 자신을 보며 그녀가 바라던 ‘요한’ 테일드도 돌아왔으니, 비록 아발론의 기사가 되었을지언정 자신은 독립된 개체로 살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저 아래서 그녀와 함께 눈을 밟는 자가 자신이 될 수도 있었다는 가정 하나, 되감을 수 없는 시계태엽을 꿈속에서 계속해서 되감으며 그 마도사의 손을 잡지 않았더라면, 당착한 갈망과 탐심, 질투에 휩싸여 반쪽짜리 어둠 속에 몸을 숨기는 대신 단단하고도 부드러운 눈빛을 마주하고, 저 남자를 부르듯 다정하게 저를 부르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그 가정이 요한을 비참하게 했다. 그토록 부정하고 싶었던 사실이 저의 전 존재를 흔들고, 있는 줄도 몰랐던 욕망을 움트게 했다.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고 했다. 그러므로 자신은 이곳에서 제 존재의 의미를 깨닫고, 진정한 목적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그녀의 그리운 눈빛과 망설이는 목소리로 꿈에서 깨어나는 날이 잦아질수록 요한 발켄슈트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삶 역시 요한 테일드의 삶과 같이 그녀를 만나기 위한 저당에 불과했다는 것을. 그녀의 존재를 부정하고, 그녀에게 예속되어야 마땅했던 제 본질을 부정하고, 그녀의 부재로도 제 삶이 온전할 수 있다고 되뇌며 번민하던 날의 끝에 결국 맞닥뜨리게 되는 것은 불가항력의 끌림 뿐임을 그는 더는 부정할 수 없었다. 수많은 부정의 끝에 오롯이 남은 연정(戀情)은 핏빛이어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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