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정신이 들고 나니 오늘은 그만하자는 이세진의 말이 들려온다. 괜찮으니 더 하자고 말하기에는 제 꼴이 처량 맞았다. 배세진은 대답 대신 입술을 깨물었다. 어차피 대답을 바라고 한 말도 아닌 것 같았다.

 

“일어날 수 있겠어요?”

 

습관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려던 배세진이 멈칫했다. ……몸에 힘이 안 들어갔다.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고개를 까딱이는 이세진이 유난히도 재수 없었다.

곧 눈앞에 손이 내밀어졌다. 잡기 싫은데. 그렇다고 안 잡고 버티고 있을 수도 없고, 어쨌든 방금 도움을 받은 처지라 별수 없이 배세진은 손을 맞잡았다. 잡고 나니 희미한 기억이 떠오른다. 방금 이 손으로 깍지를 꼈지……. 좋게라도 부드럽다거나, 감촉이 좋다거나 말할 수 있는 손은 아니었다. 거칠고 단단한 게 누가 봐도 운동깨나 했고, 무기 좀 만져봤고, 아무튼 험하게 굴러온 손이다.

단단한 손에 끌려가듯 몸이 일으켜진다. 거의 넘어지다시피 일어날 뻔했다. 이 이상 볼품없는 꼴을 보이기 싫어 얼마 안 되는 힘을 바짝 주어 버텼다. 이세진은 붙잡은 손을 놓고 배세진의 팔 아래로 제 팔을 끼워 넣었다. 갑자기 닿아온 몸에 움찔하는 움직임을 이세진은 놓치지 않았다. 바로 뒷말이 따라붙는다.

 

“싫으시면 업고 갈까요?”

“……아니.”

 

이세진에게 업혀 가는 꼴을 동네방네 보일 수는 없었다. 이세진은 아무렇지 않을지 어떨지 몰라도, 배세진으로서는 절대. 안 됐다. 결국 배세진은 최대한 이세진에게 기대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다리에 힘을 주었다. 물론, 바로 이세진에게 걸려서 또 한 소리를 들었다.

 

“괜히 애쓰지 마시고 파트너가 저처럼 체격 좋은 가이드라는 거에 감사하면서 편하게 가세요~”

 

움찔. 이세진의 말에 또 배세진이 흠칫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세진은 그 큰 몸을 숙여가며 배세진을 부축하고 태연하게 걸어갔다. 다행히도 숙소까지 가는 길에 아무도 마주치지 않았다.

 

“쉬고 계세요. 첫 부작용이라 놀라신 거지 좀 쉬면 금방 나아질 거예요.”

“아, 응……. 고마워.”

“뭘요~ 일단 저는 마저 운동 하고 올 테니까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전화 주세요.”

 

이세진이 문을 닫고 나가자 배세진은 곧장 한숨을 내쉬며 눈꺼풀 위로 팔을 올렸다. 완전한 어둠이 찾아왔다. 고요 속에서 아까처럼 또 한 번 심호흡을 해본다. 이번에는 별 무리 없이 호흡할 수 있었다. 내심 안도했다.

태어난 이래 처음 겪는 감각이었다. 눈앞이 캄캄해져 아무것도 뵈는 게 없고, 숨을 쉬려고 애써 봐도 쉬어지지가 않고, 몸에는 조금도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온몸이 불에 타는 듯 뜨겁다가도 금세 냉동 창고에 들어간 듯 차가워졌다. 그야말로 무엇 하나 정상인 구석이 없었다. 이런 걸 센티넬들은 평생 겪어왔고 평생 겪을 거라 생각하니 아찔해졌다. 그러니 한 명씩 가이드들을 필수로 붙여주는 거겠지. ……나 역시도 이렇게 살아가야 할 것이다. 아마도, 평생. 가이드 하나에만 의존해서.

무엇 하나 정상인 구석이 없는 몸 상태 속 유일하게 느껴진 것이 있었다. 이세진이 맞잡은 손. 이세진이 쓸어내리던 등. 이세진과 닿은 곳만이 멀쩡했다. 뜨겁던 몸은 이세진이 붙잡은 손부터 차게 식어갔고, 차갑던 몸은 이세진이 쓰다듬던 등부터 따뜻해져 갔다. 이게 가이딩…….

왜 가이드가 없으면 센티넬이 죽을 수밖에 없는지 온몸으로 체감했다. 이세진 선에서 가볍게 해결한 걸 보면 그리 심한 부작용이 아닐 텐데도 이러다 죽겠다는 본능적인 감각이 생생했다. S급 가이드만이 가라앉힐 수 있을 정도의 더 심한 부작용은 어느 정도인 걸까. 그걸로도 쿨링이 안 돼서 의료기술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정도는 대체 어느 정도일까. 생각하는 것만으로 인상이 찌푸려진다.

 

“신인류는 무슨.”

 

삶에 별 도움도 안 되는 이상한 능력이나 생겼지, 혼자서는 살아가지도 못하는 게 무슨 신인류라는 건데. 능력이 없으면 없는 대로 어떻게든 살아갈 방도를 찾았을 거면서. 배세진은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썼다. 잠이나 더 자고 싶었다.

 

 

 

 

“이제 얼추 조절하실 수 있으시다면서요? 하고…… 많이 좋아지셨네요. ……그렇게 말할 거야.”

“오.”

 

이세진은 눈을 깜빡였다. 두 번째는 몰라도, 첫 번째는 확실했다. 바로 오늘 아침, 배세진이 교사에게 ‘오늘은 깜짝 시험을 볼 거예요, 라고 말씀하시려고…… 했죠?’라고 말했다는 소식을 지금 막 듣고 오는 길이었다. 뭐, 이런 답을 듣고서야 많이 좋아지셨다고 말할 법 하기는 하다.

두 가지를 의미했다. 첫째는 말을 하기도 전에 먼저 말을 하니, 예지 속도가 더 빨라졌다는 것. 둘째는 예지하는 텀이 짧아졌다는 것. 전에는 대뜸 문장을 내뱉는 일이 그래도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런데 지금은 조금 전에 해놓고도 또 튀어나왔다. 이게 제어가 되어야 좋은 거지. 자기가 원하지도 않는데 하루에 몇 번이고 튀어나오는 거면 좀…….

 

“오전에는 옛날처럼 툭 튀어나왔던 건데, 지금은 아니야. 지금은 머릿속에 네 목소리가 들려서 내 의지로 말한 거야.”

“……혹시 독심술은 아니죠?”

“뭐?”

“아닙니다~”

 

그렇게 말하는 배세진의 얼굴이 살짝 뿌듯해 보였다면 기분 탓인가. 아무튼, 좋은 일이었다. 이세진은 빙긋 웃으며 책상 앞 의자를 끌어 내 앉았다. 더 할말이 있나? 배세진은 이세진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아무런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번에는 안 들리시나 보네요.”

“……응. 아직 완전히 내 맘대로는 안 되네.”

“겨우 한 달 지났는데요. 한 달 만에 그게 맘대로 되면 C급이 아니라 S급으로 시작했겠죠.”

“그건 그렇지…… 그래서, 무슨 말 하려고?”

“오, 무슨 말 할지는 예지하지 못하지만 무슨 말을 할 거라는 건 예지하시는 군요.”

 

이세진의 시답잖은 농담에 배세진의 눈썹이 일렁였다. 어휴, 농담이에요, 농담. 배세진은 대답하는 대신 가만히 이세진을 쳐다보기만 했다. 사족 그만 붙이고 어서 하려는 말이나 하라는 거다. 당연히 알아들은 이세진은 웃는 얼굴 그대로 자세만 살짝 고쳤다.

 

“오후에는 수업 대신 견학 같은 걸 할 거예요.”

“견학?”

“아까 사이렌 소리 들으셨죠?”

 

배세진이 ‘아.’ 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에덴에서 사이렌은 거의 매일, 하루에 한 번은 기본으로 울렸고 잦은 날에는 하루에 두세 번도 울리곤 했다. 사이렌이 울리면 방송이 함께 나왔고, 해당되는 페어는 즉각 출동해야 했다. 괴물의 종류, 수에 따라 출동을 요하는 신인류 페어의 등급이나 수가 달랐다. 오늘 방송은 상황 등급 특급에, 열 페어나 요구해서 점심시간인데도 센터 분위기가 꽤 분주했었다. 웬만하면 함께 밥을 먹던 선아현과 박문대도 없었고……. …이 정도로 큰 상황은 처음인가? 뒤늦게 생각이 거기까지 미쳤다.

 

“형님이 낄 만한 상황은 아니지만 봐두면 좋을 만한 상황이니까요. 그거 보러 가는 거예요.”

“혀, 현장으로?”

“에이~ 그럴 리가요. 통제실에서 보는 거죠. 한 번도 안 가보셨죠? 갈 일도 없었고.”

“응… 어디에 있는지도 몰라.”

“통제실은 다른 건물에 있어요. 한 층 전체를 다 쓰는데 아무래도 상황이 한 번에 한 개만 일어나는 건 아니라 여러 층 있고요. 저도 거의 갈 일 없기는 해요~ 위에서 견학시키라고 하니 오랜만에 가보는 거지.”

 

특급 상황에 요구 페어 수 열 페어. 흔히 오는 상황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주 위험한 것도 아니니 보여주기에 딱 좋다고 판단했을 거다. 나쁘지 않은 판단이었다. 물론, 이세진 역시 그렇게 생각했으니 순순히 따른 거였고.

만약 이세진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면? 살살 긁고 결국 정곡을 찔러 어떻게 됐든 철회하게 만들었겠지. 이세진은 충분히 그럴 깜냥이 됐다.

 

“짐작하시겠지만, 아현이랑 문대 둘 다 현장 갔어요.”

“……그렇겠지.”

“마음 단단히 먹고 계세요. 들어온 지 겨우 한 달 된 사람이 볼 만한 광경은 아닐 거예요.”

 

이세진의 말에 배세진이 습관처럼 고개를 끄덕이려다 멈췄다. 묘하게 얕보이는 것 같아 기분이 나빴던 탓이다. 물론 실제로 전투하는 광경을 본 적은 없기에 괜한 자존심이라는 걸 알아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문제는 이세진이 더럽게 눈치가 빨랐다는 건데.

 

“하하, 형님,”

“말하지 마.”

“넵.”

 

이세진이 뭔가 말하려는 듯 웃으며 입을 열자마자 배세진이 냉큼 다음 말을 차단했다. 다행히 이세진은 순순히 입을 닫아주었고, 배세진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반응해놨으니 실전을 보고도 멀쩡해야 할 텐데.

 

 

 

배세진은 통제실 한복판에서 구토하지 않기 위해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전투는 구인류에게 최대한 피해를 주지 않을만한 상공에서 벌어졌다. 전투 초반까지는 이론상 배운 것과 비슷했다. 제트기 비슷한 기체를 타고 중간권까지 올라가 허공에 발판을 깐다. 땅도 없이 허공에서 싸울 수는 없으니 전투가 벌어질 필드를 설치하는 것이다. 기체에서 뻗어 나온 발판이 순식간에 넓은 필드를 형성하고 나면 그제야 본격적으로 전투가 시작된다. 여기까지는 배운 것 그대로였다.

그 후는…… 그래, 사실상 전쟁이나 마찬가지니 당연히 피가 낭자하고 뭉개진 살점이 튀겠지. 생각을 못 한 건 아니다. 아닌데…… 막연히 15세 관람가의 액션 영화 정도를 생각했던 걸까. 그저 히어로가 빌런을 시원하게 때려눕히고, 맞을 땐 적당히 맞고 마는 블록버스터 액션 영화.

 

“괜찮으세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입을 틀어막고 화면을 바라보고 있는 배세진의 어깨 위로 이세진의 손이 내려앉는다. 부작용을 염려한 접촉이었다. 배세진은 그것까지 생각하진 못했다. 눈앞의 처참한 광경을 하나하나 담기 바빠서.

 

“힘드시면 그만 보세요.”

“…….”

 

이세진의 말에 입을 막았던 손이 위로 올라가 눈을 가린다. 찰나였다. 잠깐 고동색 눈동자를 가렸던 손이 도로 내려온다. 입을 막지도 않고, 아예 내려와 허벅지 옆에서 작게 주먹을 쥐었다.

 

“언젠가 내가 설지도 모르는 곳이잖아.”

“그럴지도 모르죠. 아무리 직접적으로 공격에 관련 없는 능력이라도 보통은 구인류보다 신체 능력이 좋으니까요.”

“지금 박문대랑 선아현이 저기 나가 있는 거고.”

“맞죠.”

“……그러니까 끝까지 보고 싶어.”

 

선아현, 박문대 페어가 최근 한 달 동안 전장에 나간 건 오늘이 처음은 아니었다. 다만 배세진이 제 눈으로 보는 게 처음이었다.

 

‘선아현은 회복실에 있어요. 오늘 전투에서 좀 무리했거든요.’

 

무리했다는 말을 박문대를 통해 듣는 것과, 무리하게 싸우는 선아현을 직접 보는 건 차원이 달랐다. 확실히 선아현은 실제 전투를 보는 건 오늘이 처음인 배세진이 보기에도 무리하고 있었다. 쓰러지는 선아현에게 달려간 박문대가 몸으로 안아 받은 게 몇 번째인지. 지금도 선아현은 일어나자마자 날카롭게 빚어낸 가느다란 물줄기를 쏟아내고 있었다. 선아현에게서 뿜어져 나온 물줄기들은 오색으로 빛나며 괴물 한 마리에게로 쇄도했다.

 

“형. 쟤들한테 이런 건 자주 있는 일이에요.”

“알아. 그래서 더 그런 거야.”

 

나는 아무것도 몰랐으니까……. 괴물은 배세진의 중얼거림이 묻힐 정도로 고약한 소리를 내며 몸을 뒤틀었다. 물줄기가 꽂힌 수백 개의 구멍에서 역겨운 핏물이 쏟아졌다. 그나마 붉은색 피가 아니라 덜 잔인해 보였지만, 덜 역겹지는 않았다. 배세진은 어깨를 들썩이며 다시 손을 입으로 가져가려다, 뭔가를 의식한 듯 도로 내렸다.

 

“ㄷ, 뒤!”

 

반사적인 행동이었고, 아주 빠른 행동이었다. 배세진의 비명 같은 소리를 듣고서야 이세진이 발견을 했으니. 저 멀리, 시야의 아슬아슬한 경계선쯤에서 괴물이 선아현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아, 이건 좀…… 이세진이 한쪽 눈썹을 찡그렸다.

 

“선아현, 뒤!”

 

‘선아현 센티넬, 뒤를 주의하세요.’라고 방송했어야 할 서포터는 모든 걸 생략하고 다급하게 외쳤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달려오는 속도가 워낙 빨라 배세진이 ‘뒤’를 외쳤을 때 괴물은 이미 한참 앞까지 튀어나온 뒤였고, 서포터가 마이크에 대고 외쳤을 때는 이미 선아현의 바로 뒤였기 때문에.

이세진이 움찔했다. 배세진은 기어코 한 걸음을 내디뎠고. 하얗게 질린 주먹이 바르르 떨렸다. 화면 너머로 총성이 울렸다. 박문대였다. 선아현의 위로 올라탄 괴물이 흉측스럽게 아가리를 벌리자 우선 박문대가 취한 행동이었다. 좋은 판단이었다고, 냉철하게 평가하고 싶었지만 지금 이건 명백한 실전이었고, 지금 이세진은 그 정도까지 이성적이지도 못했다. 물론 선아현, 박문대가 아닌 다른 페어였다면? 실전이 아니라 모의전인 것처럼 냉철하게 재고 평가했을 것이다.

찰나였지만 괴물이 주춤했고, 찰나라지만 근처의 다른 센티넬이 도우러 올 만한 시간 정도는 됐다. 다시 선아현을 물어뜯으려고 덤비던 괴물은 저항할 새도 없이 허공에 떠올랐다. 그리고는 이리저리 괴이한 각도로 몸이 뒤틀렸다. 마치 걸레를 쥐어짜는 것처럼. 듣기 괴로울 정도의 끔찍한 비명이 쏟아지고, 기분 나쁘게 검고 찐득거리는 액체가 쏟아졌다. 난도질당한 살점이 넓게 흩뿌려지며 렌즈에 엉겨 붙은 탓에 시야의 절반이 가려졌다. ‘B-5 카메라 렌즈 세척 필요.’ 서포터가 방송하자 바로 다시 시야가 트였다.

박문대가 선아현의 상태를 살피고 있었다. 굳이 확대해볼 필요도 없이 중상이었다. 배세진이 비틀거렸다. 이세진은 렌즈 너머 선아현에게서 겨우 눈을 떼고 억지로 배세진에게 시선을 붙였다. 선아현은 박문대가 어떻게든 하겠지. 지금 제 센티넬은 눈앞의 배세진이었다. 이 꼴로 봐서는 분명히 또 발작이 올 것이다.

 

“선아현, 박문대 페어. 복귀하세요. 긴급 복귀 시스템을 개방합니다.”

 

허공에서 들려오는 명령에 박문대가 고개를 들었다. 박문대가 고개를 들자 선아현의 처참한 상태가 더욱 잘 드러났다. 괴물에게 짓밟힌 몸과 팔이 엉망으로 뭉그러져 있었다. 그나마 정통으로 밟히진 않아 장기의 손상 없이 살만 좀 우그러진 정도 같기는 했다. 이세진은 안도하며 배세진의 어깨 위로 손을 올렸다. 이쪽은 전혀 안도하지 않고 있는 것 같아서. 방금 정말 죽을 뻔한 상황이었다고, 안 죽은 게 어디냐고 말해주려고 했다. 그러나 배세진과 닿는 순간, 이세진은 직감했다. 무슨 말을 해도 못 들을 상태겠구나.

불규칙적으로 몸을 떨고 있었다. 첫 번째 부작용이 나타났던 그날과 비슷한…… 어쩌면 더 심할 상태. 이세진의 손이 어깨에 닿은 것이 신호라도 된 것처럼 배세진이 무너져 내렸다. 이세진이 붙들기도 전에 와르르 무너진 배세진은 바닥에 쓰러진 채로 온몸을 덜덜 떨어댔다. 이리저리로 몸을 비틀어대며 발작을 일으키는 배세진의 위로 이세진이 급히 올라탔다.

 

“형!”

 

배세진의 위로 올라탄 이세진은 능숙하게 양 손목을 쥐어 움직이지 못하게 붙들었다. 멈칫한 틈을 타 양손 모두 깍지를 껴잡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내 말 들려요?”

 

들리는 건데 무시하는 건지, 혹은 반응을 못하는 건지, 아니면 아예 들리지 않는 건지. 정답을 알 수 없는 발작만 이어졌다. 단번에 들릴 거라고는 기대도 안 했다. 이세진은 익숙하게 몸을 숙여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알죠, 그때처럼. 마시고, 뱉고. 천천히요.

몇 번 귓속말로 심호흡을 유도했지만 아무 소용도 없었다. 아무래도 그때보다 훨씬 강한 부작용인 모양이다. 이세진은 인상을 쓰며 몸을 일으켰다.

아니 근데, 이 새끼들은 사람이 눈앞에서 쓰러졌는데 왜 다 구경만 처하고 있어. 평소의 배세진이었다면 제압하는 것 정도야 일도 아니었겠지만, 부작용이 발생했을 때는 말이 다르다. 제법 온 힘을 다 써서 날뛰지 못하게 누르고 있는데…… 의료팀이라고 하는 것들은 죄다 우두커니 서서 구경이나 하고 있었다.

 

“저기요! 진정제 투여해요!”

“아직 그 정도 단계가 아닙니다.”

“뭐?”

 

일어나겠다고 날뛰는 배세진을 힘으로 누르며 눈을 치켜떴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세진에게 대답한 의료진은 눈 하나 깜짝 안 했다. 하, 씨발. 되지도 않을 걸 붙잡고 있을 필요는 없었다. 이세진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아마 시험하는 게 분명했다. 곧장 의료팀이 투입될 수 없는 전장도 아니고, 바로 앞에 있으면서 진정제 하나 못 놔줄 이유가 따로 뭐가 있겠어. 위에서 저를 시험하고 있는 거다. 기분 나쁘게…….

이세진은 무표정으로 의료진을 쳐다보던 시선을 거두고 제 밑의 배세진을 내려다보았다. 송골송골 땀이 맺혀 상기된 얼굴 위로 고통스러운 표정이 생생했다. 헐떡이던 배세진이 입술을 깨문다. 아랫입술 위로 핏방울이 올라오는 꼴을 본 이세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언젠가는 필히 거쳐야 할 일이었지만, 부디 이게 이 사람의 첫 키스가 아니기를 빌며.

이세진은 깍지 낀 손에 최대한 힘을 주어 단단하게 붙들고 고개를 숙였다. 혹시라도 혀가 깨물릴까 조심스레 배세진의 입술을 제 입술로 문다. 말랑하고 뜨거운 감촉 사이로 비릿한 맛이 느껴졌다. 일순, 배세진의 발작이 멈췄다. 금세 다시 파득대기는 했다. 효과가 있다는 사실을 인지한 이세진은 깍지 낀 손을 놓고 자유로워진 양손으로 배세진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따뜻하다 못해 뜨거운 볼은 부드러웠고, 입안은 타들어가기 딱 좋다 싶게 뜨거웠다. 불구덩이 같은 입안을 헤집고 훑을수록 배세진은 얌전해져 갔다. 수도 없이 많은 키스를 해봤지만 이렇게까지 뜨거운 건 처음이라, 이세진은 천천히 식혀나가기로 했다. 시간을 제법 들여야 하니까, 눈을 감았다. 볼을 감싼 한쪽 손을 떼어 배세진의 눈 위를 덮었다. 당신도 감으라는 뜻으로. 캄캄해진 세상 속 뜨거운 입맞춤이 이어졌다.

 

 

 

 

의식을 잃은 배세진을 회복실로 보내놓은 후 문제의 그 의료진을 찾아갔다. 맘에 차는 답이 돌아오지 않을 걸 알고서도 찾아갔다지만, 맘에 차지 않다 못해 짜증이 나는 답이었다. 적응하라고 그랬댄다. S급 가이드인 나더러. 그것까지 물으니 배세진의 부작용은 별로 없지 않았냐며 역으로 되묻는데…… 뻔뻔하고 당당한 태도에 할말이 없었다. 그래, 뒤에 아주 든든한 걸 업고 있나 보지. 굳이 크게 벌일 일도 아니라 그렇게 생각하고 말기로 했다.

박문대는 생각보다 멀쩡해 보였다. ‘보인’ 거라는 걸 알아서 그냥 가볍게 등을 툭 쳐줬다. 야, 아현이 안 죽었어. 왜 네가 죽상이냐. 그렇게 말하는 이세진 본인도 심장이 제법 철렁했다는 건 당연히 말하지 않고서. 그 말에 박문대의 표정이 평소처럼 돌아왔다. 그 정도면 됐다 싶었다. 선아현도 나쁘지 않은 상태였고.

선아현은, 역시 다행스럽게도 장기의 손상은 없었다. 팔과 옆구리가 뭉개졌는데 그것도 용케 뼈와 장기를 피해 살만 우그러진 상태였다. 회복실에서 한나절이면 다 재생될 수준이라 했으니, 정말로 별것 아니었다. 그럼에도 박문대의 표정이 저렇게 죽상인 건, 뭐, 뻔했다. 쿨타임이 찼겠지. 신인류에 대한 회의감이 고개를 쳐드는 쿨타임.

 

“네, 이세진입니다.”

 

전화 너머 들려온 말은 배세진이 눈을 떴다는 소식이었다. 이세진은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생각보다는 오래 잠들어있었나. 네, 지금 갈게요. 가볍게 대답하고는 발걸음을 돌린다.

 

 

 

배세진은 침대 위에서 몸을 일으켜 앉아 있었다. 쯧. 혀를 한 번 찬 이세진이 침대 옆 의자를 빼 앉았다.

 

“일어나있지 마세요.”

“…….”

 

대답이 없다. 다른 때면 무시하는 건가 싶어서 슬슬 짜증이 났겠지만, 이세진은 관용을 베풀기로 했다. 몸 상태도 안 좋을 거고, 여러모로 충격도 받았을 거고. 뭐라도 말이 튀어나오기를 기다리며 이세진은 다리를 꼬고 팔짱을 꼈다. 잔뜩 상기되어 뜨겁게 타올랐던 얼굴은 언제 그랬냐는 듯 핏기 없이 창백하기만 했다.

욱,

배세진이 입을 틀어막았다. 이세진은 살짝 몸을 뒤로 빼고 콜 버튼을 누를 준비를 했으나 헛구역질이었는지 금방 가라앉았다. 가만히 지켜보던 이세진은 옆에 놓인 물병을 들어 배세진에게 건넸다. 배세진은 순순히 받아들고 몇 모금 홀짝였다. 몇 모금이라지만 한 모금이나 될 법한 양이었다.

 

“……나는.”

 

물을 마시고 나니 조금 진정이 됐을까. 드디어 배세진이 갈라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세진은 몸을 뒤로 깊게 기댄 채 팔짱을 풀지 않았다.

 

“저, 전혀 몰랐어.”

 

뭐를요. 대답하는 대신 입을 다물었다. 지금은 가만히 놔두는 게 더 나을 것 같다.

 

“그런… 그런 상황에 던져진 것까지는…… 전혀 몰랐어.”

“…….”

“한 달이나 넘게 같이 지냈으면서……”

“…….”

“이론으로나 배웠지, 저렇게… 저렇게 최악인 줄은……”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말이었지만, 말 속에 담긴 뜻은 명확했다. 이세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내가 살아온 삶을 ‘최악’으로 칭해버린 것에 대해 화를 내야 할지, 이제라도 알아줘서 고맙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마땅히 할말이 없었다.

 

“……미안해.”

“뭐가요.”

 

결국 참지 못하고 튀어 나간 답에도 배세진은 당황하지 않았다. 들리기는 하는지 모르겠다.

 

“내가… 너무……”

“…….”

“편안하게…… 지내왔던 삶이… 전부 미안해. 밖에서든, 여기서든…….”

 

미안해…….

흐트러진 말끝에 울음소리가 머문다. 점점 커져가는 울음소리를 들으며 이세진은 배세진을 바라만 보았다. 뒤로 기댔던 몸이 앞으로 기울어지고, 굳게 끼고 있던 팔짱이 허물어졌다. 살아온 삶에 사과를 받는 건 처음이라,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좋은 기분도 싫은 기분도 아니었다. 애매모호했다. 허공에서 애매모호하게 맴도는 손을 괜히 쥐었다 펴길 반복하던 이세진은 결국 짧은 한숨과 함께 손을 허벅지 위로 내렸다.

형님이 사과할 일 아니라고, 겉치레에 가까울 말은 입안을 맴돌기만 하고 끝내 바깥으로 나가지 못했다. 두 손에 얼굴을 파묻은 배세진 위로 애매모호한 시선만 떨어졌다.

 

 



‣ 센티넬-가이드 페어는 상황의 등급에 따라 출동 우선순위가 정해져 있다. 상황의 등급은 특급, 1급, 2급, 3급, 4급, 5급으로 나뉜다.

‣ 통제실은 벽면 전체가 통으로 디스플레이인 구성으로, 전장을 360도 전부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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