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유 - Blueming

슈갈님 :)

민윤기에겐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22 [完]




카톡방의 없어지지 않는 1을 보며 여주가 초조하게 입술을 씹었다. 어어, 1 없어졌다. 여주가 기대에 찬 눈빛으로 새로운 대화가 올라오길 기다렸다.

안된다고 하면 어떡해? 승완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물었다. 안 된다고 하면, 되게 해야지. 백퍼 안 된다고 하지. 나라도 안 보내겠다. 호석이 옆에서 초를 쳤다. 여주와 승완이 동시에 호석을 노려보자 금방 깨갱거렸다.



>( ღ'ᴗ'ღ )

: 알았어

: 대신 연락 꼬박꼬박



나이스! 여주와 승완이 하이 파이브를 했다. 와, 윤기형... 유여주를 엠티에 보낸다고? 호석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엠티 가는 게 뭐 어때서."

"술만 먹으면, 아니. 술 안 먹어도 사고뭉치인 유여주를 보내는데 그게 안 신기하겠냐. 너 작년에 헤어졌을 때도 형이 엠티 때 따라왔었잖아."



호석의 말에 여주가 작년 1학기 엠티를 떠올렸다. 맞다, 그랬었다. 여주가 깨달은 표정을 지었다. 그때는 툭하면 헤어지자는 말을 내뱉던 때라 윤기에게 호되게 혼나던(?) 시기였다. 윤기는 막 학년임에도 불구하고 엠티를 따라왔다. 헤어진 사이였는데도.





"그만큼 오빠가 날 사랑하는 거지. 오빠는 언제나 내 마음속에 있으니까."

"그럼 넌 마음속에 있는 윤기형 몫까지 회비 두 배로 내."



호석이 인상을 구기며 학생회실을 빠져나왔다.








남준의 뒤를 이어 학회장이 된 호석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남준이 아직 4학년에 재학 중이기 때문에 물어볼 것이 있으면 편하게 연락할 수도 있었지만, 이제 졸업반인 남준은 마치 좀비와도 같아 귀찮게 할 수도 없었다.

45인승 버스가 대운동장에 줄지어 섰고 집채만 한 배낭을 멘 여주가 생명공학과라고 적힌 버스를 향해 총총 걸어갔다. 버스 앞에서 출석 체크를 하던 호석이 여주의 가방을 보고 피난 가냐며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이 가방에 뭐가 들었는지 알고 그리 면박을 줘."

"뭐가 들었는데."

"너한텐 안 알려줄 거야. 승완이랑만 할 거야."



가자, 승완아! 여주가 승완이의 손을 꼭 잡고 버스에 올라탔다. 일부 4학년을 제외하고 전 학년이 가는 엠티다 보니 인원이 많아 버스를 나눠 탔다. 여주가 탄 버스에는 2학년들이 있었다.



"여주 누나. 피난 가요?"



여주의 좌석에 턱을 받친 지민이 놀리듯 물었다. 너도 여기에 뭐가 들은 줄 알고 그런 말을 해. 여주가 퉁명스럽게 말하자 지민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누나. 가방 위로 올려드릴까요?"

"앗. 그럼 고맙지."

"태형아, 내 것도."

"주세요."



태형이 여주와 승완의 가방을 받아 좌석 위로 올려주었다. 역시 태형이밖에 없어. 여주가 엄지를 치켜세우자 태형이 미소 지었다.

몇 시간 후 엠티 장소에 도착했고, 여주가 느릿하게 강당으로 들어섰다. 목걸이 명찰을 매고 설렌다는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학생들은 전부 신입생이 확실했다. 개강 이후 시간이 맞지 않아 신환회를 비롯한 과 행사에 참석하지 않았던 여주는 신입생 후배들을 처음 봐서 같이 두리번거렸다.

강당 위로 올라선 호석이 마이크를 켜고 능숙하게 학생들을 인솔하기 시작했다. 짜아식…. 여주는 승완과 함께 팔짱을 끼고 호석을 지켜봤다.



"피난 가방에 들었다는 게 이거였어요...?"

"왜? 전에 여주가 이렇게 해줘서 먹었는데 진짜 맛있었어."

"맛은 있는데 어떻게 이걸 가져오실 생각을 하셨을까요. 여주 누나는."

"맛있으면 됐지, 뭐."



오뎅탕을 조리하는 2학년들 사이에 단연 이슈는 유여주였다. 호석을 포함한 학생회는 신입생들을 모아놓고 레크리에이션을 진행 중이었고, 여주는 벌써 술판이 벌어진 방에서 비장의 무기를 갈아내고 있었다.

산더미 같은 배낭 속에서 여주가 꺼낸 건 통후추였다. 오뎅탕에 통후추를 갈아 넣어 부족한 2퍼센트를 채우니 완벽한 요리가 완성되었다. 원래도 핵인싸였지만 약 세배쯤 여주의 인기가 많아지기도 했다. 지민은 기겁했다.



"여기는 대체 왜 이렇게 시끌, 아하. 유여주 방이구나."



신입생들 방 배정을 위해 인솔을 자처한 호석이 유난히 시끄러운 방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기도 잠시 그 중심에 있는 여주를 보곤 금방 수긍했다. 뒤돌아서 신입생들에게 특별히 주의사항을 추가하기도 했다.



"이 방은 특히 저 선배를 조심해야 돼. 알았지? 저기 가운데에 소주병 돌리는 여자 있잖아."





"너 주글래. 내가 뭘 어쨌다고."

"저 봐봐…. 어쨌든 이 방에 들어가는 인원들 빨리 들어가라."



호석이 여주의 방에 배정된 신입생들을 밀어 넣고는 옆방으로 나머지 학생들을 데리고 사라졌다. 오늘 호석이랑 술 먹기는 그른 것 같다, 그치. 승완이 혀를 쯧쯧 차며 말했다.

여주의 방에는 태형과, 지민, 그리고 순희를 포함해 인원이 가장 많았다. 다들 핵인싸 여주와 함께 술을 먹고 싶어 해서 그랬다. 후추가 들어간 오뎅탕이 한몫하기도 했고.

4학년이 대부분 참여하지 않은 엠티에서 여주는 학번이 높은 편에 속했다. 그러니 술판에서 영향력이 가장 센 사람은 여주와 승완임을 뜻하는 거였다. 만약 4학년인 남준이 참여했다더라도 크게 달라지진 않았겠지만.



"누나 술 더 필요하세요?"

"으음. 조치."

"안주는 더 안 필요하세요?"

"있으면 조오치."

"남자친구는 안 필요하세요?"




그중 여주의 심기를 거스르게 하는 신입생이 있었다. 처음 방에 들어왔을 때부터 살갑게 굴더니 아예 여주 옆에 딱 붙어 플러팅을 거는 거였다. 사람이 너무 황당하고 어이가 없으면 말도 안 나온다고. 여주가 잔뜩 인상을 쓰며 신입생을 돌아봤다.



"안 필요한데."

"왜요. 저 같은 남친 완전 필요하실 것 같은데."

"있어서 안 필요해."

"아... 남자친구 있으세요?"

"응."

"에이. 결혼한 것도 아닌데요, 뭐."




"미친 거 아냐?"



야. 패기가 꼭 옛날 너 같다. 지민이 태형을 쳐다보며 말했다.

…쟤 저러면 안 될 텐데. 태형이 픽 웃으며 신입생을 쳐다봤다. 왜? 지민이 물었다. 내가 알기로는, 태형이 말끝을 흐렸다. 지민이 더 캐물으려는 순간 현관 쪽에서 소리가 났다. 계속해서 신입생에게 괴롭힘(?)을 받는 여주를 제외한 모두의 시선이 돌아갔다.





"..."



오늘 엠티 윤 교수님 오셨잖아. 거기 대학원생 선배들 다 온다고 들었거든.

…윤기형도.








윤갸! 여주가 벌떡 일어나 윤기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응. 윤기가 여주를 받아주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윤기의 등장에 다들 놀란 얼굴이었다. 여주도 마찬가지였다.

기타 일을 돕기 위해 석사 저년차들이 교수들과 동행했고, 석사 1학기인 윤기는 필참이었다. 여주도 처음에는 윤기가 오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출발할 때 머리카락 한 올도 보이지 않길래 포기한 지 오래였다. 윤기는 실험을 끝내고 늦게 출발하는 후발대였다.



"잠깐 얼굴 보러 왔어. 교수님한테 가야 돼."

"금방 와?"

"음…."

"못 오는구나…. 알아써."



여주가 나름 의젓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한 건물 안에 윤기와 함께라니 기쁘기 그지없었다. 윤기가 널브러진 테이블 위에 들고 온 커다란 봉투를 내려놓았다. 여주가 궁금한 표정으로 봉투에 코를 박았다.



"떡볶이 사 왔어. 술은 적당히 먹었으면 좋겠는데 안 그럴 거지?"

"웅."

"그래. 이따 빠져나올 수 있으면 올게."



윤기가 여주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방을 빠져나갔다. 헤헤. 내 남친 멋있징. 우리 과 과탑이었고 지금은 석사 하는 중이야. 완전 멋있지. 여주가 떡볶이를 풀어내며 신입생들에게 자랑하기 바빴다. 조금 전까지 여주에게 플러팅을 걸던 신입생은 금방 풀이 죽었다. 고의라고 확신은 못했지만, 윤기가 방을 나가며 실수인 척 제 발을 꾹 밟았기 때문이었다.



"진짜 우리 과 사람들 왜 이렇게 술고래가 많냐……."



열두시가 지나고 나서야 호석이 죽은 눈으로 여주 옆에 착석했다. 중간 정산을 위해 영수증을 펼쳐 계산하는 호석의 입안으로 여주가 조금 식은 고기를 넣어주었다.



"그나마 윤기형이 와주셔서 살았지…."

"오빠가 왜?"

"대학원생 형들이 교수님들 잡아주고 있어서 겨우 휴식 시간 좀 생긴 거야."

"뭐야. 그럼 오빠가 지금 술을 먹고 있다는 거야?"

"윤기형 차 끌고 와서 술 못 먹는다던데?"

"뭐? 윤기가 차를 끌고 왔어?!"



몰랐어? 호석이 코를 긁으며 심드렁하게 되물었다. 안 그래도 나가시려는 눈치던데, 201호 한번 가봐. 호석의 말에 여주가 벌떡 일어나 2층으로 향했다.

2층은 교수님들과 학생회 임원들의 숙소가 있는 층이었다. 201호에 고개를 빼꼼 내미니 교수님들과 윤기를 포함한 대학원생 몇몇, 그리고 얼마 오지 않은 4학년이 모여있었다.



"어? 여주니? 윤기 있어서 왔구나. 들어와."




"안뇽하세요………."



정호석의 계략이었나. 여주가 속으로 구시렁대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다들 술을 꽤 마셔서 얼굴이 새빨갰다. 윤기만이 예외였다. 여주가 앉으니 윤기의 지도 교수인 윤 교수가 술을 따라주었다.



"여주는 대학원 생각 없어?"

"…예?"

"내가 전에 여주 답안지 한번 본 적 있는데 기억에 남았거든. 대학원 오면 좋을 것 같은데~ 남자친구랑 서로 으쌰으쌰하면 얼마나 좋아."

"아하하."

"생각 있으면 꼭 나한테 컨택하기야~"

"예……."



여기 뭐 하러 왔어. 윤기가 작은 목소리로 여주에게 말했다. 오빠 나간다고 호석이가 그러길래. 여주의 말에 윤기가 피식 웃었다. 윤기가 잡혀서 괴로워하니 호석이 돌파구를 마련해 준 거였다.



"저 내일 아침 일찍 실험이 있어서 먼저 가보겠습니다, 교수님."

"아니, 벌써? 오후부터 출근해도 되는데."

"약을 쳐놓은 게 있어서요."

"그래서 차를 끌고 왔구만. 여주도 같이 가나?"

"네. 그러려고요."

"좋을때구만…. 여주는 진지하게 대학원 한번 고민해 보고."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교수에게서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다. 윤기는 정말로 올라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여주가 아쉬운 얼굴로 윤기를 쳐다봤다.



"진짜 가게...?"

"응. 진짜 그래서 차 가져온 거야."



윤기는 학교와 자취방이 가까워 웬만해서는 차를 타지 않았다. 몇 번 보지도 못한 운전하는 모습을 놓칠 수는 없는데…. 여주가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 승완이한테 집에 갈 거냐고 물어보고 올게! 여주가 빠른 걸음으로 숙소로 향했다. 그러나 방에 있어야 할 승완과 호석이 보이지 않았다.




"호석이형이랑 승완누나 찾으세요?"

"애들 어디 갔는지 봤니?"

"보긴 했는데…."

"어디 갔어? 나 윤기랑 같이 집 가려고 하거든. 승완이도 갈 거냐고 물어봐야 돼."



안 갈 거면 인사라도 해야 하는데. 여주가 발을 동동 구르니 태형이 웃음기를 머금은 얼굴로 팔짱까지 끼었다. 그냥 전화를 해보려는 심산으로 여주가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전화 안 받으실걸요."

"왜?"

"두 분이 아이스크림 먹으러 나가서 삼십분째 안 돌아오세요."

"헐."

"그리고 좀 전에 화장실 갔다 오면서 보니까 뒤에 벤치에 앉아계셨어요."

"헐!!!"

"그러니까 그냥 윤기형이랑 조용히 올라가셔도 될 것 같아요."

"미쳤나 봐. 걔네 둘이 썸 타?"

"아무래도 그런 것 같지 않아요?"



태형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미쳤어, 미쳤어. 흥분한 여주가 태형의 팔을 퍽퍽 때렸다. 셋이서 술을 먹다가 여주는 윤기가 데리러 오면 항상 먼저 자리를 뜨곤 했다. 둘이 남아 언제부터 그런 역사를 쌓아 올렸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엠티 끝나고 만나서 확실히 이야기를 들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승완에게 집에 간다는 카톡만 남겼다. 왠지 내일이나 되어야 연락이 올 것 같다는 생각은 지울 수가 없었다.



"누나는 더 놀다 가시지 왜 벌써 가세요."




"윤기가 차를 끌고 왔어. 그건 몇 없는 희귀한 일이거든. 내 눈에 담아야 돼."



아하. 태형이 수긍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여주라면 그게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대로인 여주의 모습에 웃음이 났다.



"아까 누나 귀찮게 하던 놈은 승완이 누나가 술 엄청 먹이시더라고요."

"그으래? 역시 우리 승완이. 너는? 술 많이 먹었어? 선배 되니까 어때. 막 뿌듯하고 그렇지~?"



시간이 지나도 여전한 사랑스러움은 일 년 전을 떠올리게 했다. 아까 괜히 지민이 했던 말 때문에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여주가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하고는 헉 소리를 냈다.



"윤기가 한참 기다리겠다. 나 이제 가봐야 돼."

"저도 들어가 볼게요. 순희가 연애 상담해달라고 아까부터 찾더라고요."

"순희가? 대박. 나도 궁금한데."

"별거 없어요. 실패담 들어주러 가는 거예요."

"그래도 원래 남 연애가 제일 재밌는 거야. 나중에 호석이랑 승완이 얘기도 엄청 재미있을 것 같아. 그치."



여주가 신난 표정으로 킥킥거렸다. 이제야 완전히 제자리를 찾은 기분이었다.



"그럼 학교에서 봬요, 누나."



여주를 보는 태형의 표정도 예전과 다르게 편해 보였다.








본인만 한 짐가방을 메고 나온 여주를 보고도 윤기는 크게 놀라지 않았다. 여주가 낑낑대며 가방을 내려놓자 가볍게 받아서 든 윤기가 뒷좌석에 넣어두었다.



"가방이 왜 이렇게 커."

"애들이 피난 가냐고 놀렸어."

"누가."

"애들 다!"

"6·25 때 태어나지도 않은 것들이."

"그러니까 말이야!"



둘 역시 태어나지 않았다는 건 그리 중요치 않은 문제 같았다. 윤기의 반응에 만족한 여주는 조수석에 올라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쇼핑백을 뒤로 던졌다.



"뭐야, 이건."

"그거 엄마가 반찬 보내주신 건데."



여주가 빠른 속도로 냅다 뒤로 넘어가 쇼핑백을 다시 가져와 제 무릎 위에 올려두었다. 여기 다시 앉혔어, 윤갸. 어머님께 말씀드리면 안 돼. 알았지. 여주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 절대 말 안 할게."

"진짜야. 나 점수 깎이면 안 돼."

"이미 높아서 깎여봤자야."

"그래도 안 된단 말이야."

"알았어."



윤기가 계속 웃으며 차를 출발시켰다. 깜깜하고 구부정한 산길을 한참 벗어나니 고속도로가 나왔다. 여주는 엠티 때 있었던 일을 재잘재잘 얘기했다.



"지민이가 그랜드 캐니언 갔다가 너무 멋있어서 울었다잖아. 진짜 그럴까? 그런 멋진 자연경관 보면 눈물이 날까?"

"너무 멋있으면 감동받는다고 하더라."

"근데 나도 예전에 알프스에 스키 타러 갔을 때 산꼭대기에서 울었어. 근데 그게 추워서인지 감동 먹어서인지는 잘 모르겠어."





"보통은 자기가 왜 우는지 알지 않아?"

"뭐. 시비 거는 거야?"

"아냐. 중학생 때 간 거라며. 오래돼서 기억 안 날 수도 있지."

"그치. 그런 거야."



여주가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무릎 위에 올려둔 쇼핑백을 열어보았다. 윤기 어머님이 해주시는 반찬은 여주의 입맛과 안성맞춤이었다. 대부분의 반찬이 여주의 입으로 들어가는 건 모르시겠지만.

자취방 계약이 끝난 여주는 재계약을 하지 않았다. 윤기는 막무가내로 제집에 짐을 싸 들고 온 여주를 이기지 못했다. 혼자의 흔적이 가득했던 집은 어느덧 여주의 물건으로 가득 찼다. 냉장고에는 여주가 좋아하는 음료수가 부족함 없이 채워져 있었고, 전신거울 앞에는 쪼그려 앉은 여주의 눈높이에 맞는 작은 화장대가 생겼다.



"내일 아점으로 이거 먹어야징. 오빠는 아침 일찍 출근해?"

"아니."

"엥. 실험 때문에 이 새벽에 가는 거라며."

"거짓말인데."

"머? 그래도 돼?"

"아무도 몰라. 걱정 마."

"그치만……. 그럼 왜 실험해야 한다고 거짓말 쳤어?"

"너 거기서 못 자게 하려고."



폭탄 같은 말을 던진 윤기가 오피스텔 주차장에 들어섰다. 잠시 멍하게 있던 여주가 속사포로 말을 뱉어냈다.



"오빠 그럼 내일 몇 시에 출근해? 나랑 놀아? 오늘 잠 안 잘 거야?"

"내일 점심 먹고. 너만 안 졸리면 놀자."

"아싸! 오빠 그러면 맥주 사서 들어가자. 나 술 많이 못 마셨단 말이야."



윤기가 귀여운 계략을 부려 엠티를 막았다는 사실보다, 함께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 여주의 머릿속을 지배했다. 방방 뛰며 편의점에 들어가 바구니를 든 여주가 맥주를 포함해 이것저것 담기 시작했다. 걸음이 멈춘 곳은 콘돔 매대였다.



"오빠 이거…."

"집에 많아."

"앗. 그럼 패스."



사야 하는 거면 부끄러워서 도망가려고 했는데. 다행이라 생각하며 여주가 바구니를 올려두었다. 먼저 카드를 내민 윤기는 여주가 열심히 물건을 담은 봉투를 뺏어 들었다. 그리고는 다른 손으로 여주의 손을 잡았다.

윤기의 집 앞에는 택배가 와있었다. 어! 여주가 먼저 뛰어가 택배 박스를 낑낑대며 들어 올렸다. 며칠 전에 주문하고 오매불망 기다리던 조립형 책상이었다. 현관을 열어 편의점 봉투를 집안에 넣어둔 윤기가 여주가 들어 올린 택배 박스를 대신 들어 집으로 들어갔다.




"조립이 좀 어렵네."



여주가 씻고 나오니 윤기는 반쯤 조립하다 만 책상 앞에서 심각하게 설명서를 읽고 있었다. 알바해서 모은 돈으로 큰맘 먹고 구매한 여주의 공부용 책상이었다. 여주 혼자 자취할 때는 밥 먹는 간이 책상을 펼쳐 공부하는 게 다였다. 공부할 때는 웬만하면 도서관을 갔으니 책상을 살 필요성도 크게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윤기와 함께 살게 되니 생각이 바뀌었다. 윤기는 온종일 실험실에서 일하고 집에 돌아오면 공부를 했다. 매일 그 모습을 보니 물이 드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윤기가 집에 있는데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것도 말이 안 되는 일이고. (여주 생각).

그래서 윤기 책상 옆에 둘 접이식 책상을 구매했다. 공부하다 모르는 거 물어보기도 안성맞춤이었다. 고급 필기가 가득한 윤기의 전공 책을 훔쳐 읽기도 딱이었다.



"윤갸. 어차피 나 오늘 공부 안 할 거니까 빨리 씻구와. 내가 해볼게."

"이거 완성품 보고 싶잖아."

"그치만, 괜찮아. 나도 할 수 있어."



여주가 윤기 손에서 설명서를 뺏어 들었다. 단호한 태도에 윤기가 마지못해 화장실로 들어섰다. 바깥에서 크게 뚝딱거리는 소리가 몇 번이나 나서 뛰쳐나갈 뻔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빠르게 씻은 윤기가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나왔다. 그리고 보인 건 책상다리 하나를 붙잡은 채 침대에 얼굴만 엎어져 잠든 여주였다.



"유자야. 누나 또 잠들었네. 못 자게 하지."



제 방석 위에 몸을 웅크리고 앉은 유자가 답 없이 꼬리만 탕탕 쳤다. 윤기가 여주를 조심스럽게 안아 들어 침대에 눕혔다. 잠결에 기분이 좋은 건지 여주가 코를 찡긋거렸다. 여주의 손에서 책상다리를 빼든 윤기가 바닥에 널브러진 설명서를 주워들었다. 먹겠다며 사 온 맥주도 냉장고에 집어넣었다.

윤기가 씻으러 들어가기 전과 달라진 게 없는 책상 앞에 앉았다. 여주가 깰까 소리를 죽여가며 조립하니 유자가 윤기를 빤히 쳐다봤다. 시끄럽다는 듯 고개를 쳐들며 야옹거리기도 했다.



"시끄러워도 좀만 참아. 거의 다 했어. 다 해놔야 누나가 내일 일어나서 좋아하지."



기지개를 켜고 일어난 유자가 총총 걸어가 여주의 팔 안에 비집고 들어갔다. 그렇게 좋아하는 유자가 품에 안겼는데도 여주는 세상모르고 자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고무까지 끼우니 얼추 큰 책상이 완성되었다. 윤기가 뿌듯한 얼굴로 일어서 허리를 쭉 폈다. 그렇게 기다리던 책상이니 내일 일어나면 분명 좋아하겠지. 그리고 잠들어버린 자신을 탓하며 윤기의 팔을 깨물어 버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 생각을 하니 윤기의 얼굴에 절로 웃음기가 묻었다.

잠든 여주의 뺨을 쓰다듬은 윤기가 불을 끄고 누웠다. 미눈기…. 잠이 덜 깬 여주가 칭얼대며 윤기를 향해 팔을 뻗었다. 안겨있던 유자가 귀찮은지 일어나 베개 위에 자리를 잡았다.



"깼어?"

"……."

"다시 자네."



잘 자. 윤기가 가볍게 여주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뗐다. 언제나 자기 전이면 윤갸. 좋은 꿈 꿔. 라며 말해주던 여주의 굿나잇인사가 없었지만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민윤기에겐 그 누구보다 특별한 유여주가 있었으니까.





그동안

민윤기에겐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를

사랑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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