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허도영 요즘에는 좀 잠잠하지?”
“그러니까. 무슨 일이래? 자기한테 선물 전해달라는 사람도 없지?”
“네, 없어요.”
“계속 차니까, 이제 고백할 사람이 안 남은 거겠지.”
“눈 진짜 높아.”
“마음에도 없는 사람 사귀는 게 더 이상하지 않아요?”
요즈음 같이 식사를 하는 무리에서의 대화가 상당히 불편하다. 예전엔 외면했을 대화들을 이제는 그냥 넘길 수 없는 사이가 됐다. 술 몇 번 마시고 밥을 몇 번 먹었다고 해서 친해졌다는 건 아니다. 그건 이 사람들하고 먼저 했던 것들이니까. 그저 그런 적당히 친해지기 위한 행위가 주된 이유가 아니란 말이다. 무슨 말이냐? 허도영은 인간적으로 정말 좋은 사람이라는 걸 매번 느꼈기 때문이다. 정말 다정하고 사람 좋고 의외로 순진하고, 때로는 좀 바보 같은 면도 있다. 게다가 허도영은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자기 파트너라고 편들어?”
“도영 씨 진짜 사람 괜찮아요. 이 모든 말들이 어이가 없게 느껴 질만큼?”
“어머, 사실은 설아 씨가 도영 씨랑 사귀는 거 아냐?”
“와, 편견 없는 편견이네요. 열림 교회 닫힘?”
“우리가 먼저 친해졌으니까 너무 멀리 가지 마.”
“맞아, 요즘에 친해져서 그래요. 그런데 사람이 진짜 괜찮으니까.”
“알았어, 알았어. 그보다 설아 씨 개발팀 김 주임이랑 썸탄다는 소문 있더라? 본인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어…, 아직 커피도 안 마셔봤어요.”
정말, 2년 만에 이게 다 무슨 일인지. 계약직으로 회사 다니면서 오로지 평범함만을 꿈꾸던 나는 요즘 이래저래 주목을 받고 있다. 첫 번째로 그냥 파트너로서만 존재하던 내가 요즘 허도영과 너무 붙어 다녀서 본의 아니게 주목을 받게 된 거, 그리고 오는 사람은 죄다 거절하는 허도영이라 농담처럼 어느새 내가 허도영의? 무언가처럼 취급받고 있다는 것. 그리고 며칠 전 회계팀의 박 대리를 마지막으로 잠잠하던 허도영의 선물 셔틀을 하는가 싶었는데, 그 선물이 허도영이 아니라 정말 나였다는 것. 2년 동안 착각한 적도 여럿 있었던 나이지만 뭐랄까 이번은 크게 와닿지 않는 느낌이다.
“커피 마시면, 오늘부터 1일. 꺄아아!”
“하이고.”
“거절할 거야?”
“고민해봐야죠. 누군지도 잘 모르고.”
“하긴, 맞는 구석을 찾아봐야지. 말부터 섞어 봐야지.”
“그래, 그래. 맞으면 다른 것도 섞어보고.”
“아이, 진짜. 왜 그러세요?”
***
“저, 설아 씨 좋아합니다.”
“네?”
“이거, 받아주세요!”
허도영의 선물을 전해달라고 불러세우는 장소는 다양하다. 책상 앞에서부터 건물 계단, 구내식당, 옥상의 흡연실까지. 그중 이 개발팀 김 주임이라는 남자는 내가 개발팀을 지나갈 때 입구에서 불러 세웠다. 아, 또. 문득 파트너의 당혹스러워하는 잘난 얼굴이 떠올라 귀찮긴 하지만 하던 일이니 어쩔 수 없지 하는 기분이었는데, 웬걸. 그게 나였다니?
개발팀 입구에서 생긴 헤프닝은 눈에 잘 띄는 장소인 만큼 사내메신저를 통해 소문이 났다. 심지어 이 주 정도 답장에도 뜸을 들이는 동안 꽤 부풀려졌다. 내가 허도영이랑 다니더니 눈만 높아져서 김 주임을 찼다는 말부터 당일에 고백을 받아주고 벌써 잤다는 소문도 있는 모양이다. 참 남의 이야기 하길 좋아한단 말이야 사람들은. 아침부터 한숨을 푹 내쉬며 자리에 멍하니 있자니 파트너가 따끈한 자판기 우유를 건넸다.
“설아 씨 고민 있어요?”
“요즘 들어 부쩍 언니가 대단하다고 느끼고 있어요.”
“에?”
“언니, 이번 주말에도 시간 괜찮아요?”
“괜찮아요. 이번 주말엔 뭐 할까요?”
“언니 집에서 영화 볼까요? 나 고민 있는데…, 한잔하고 자고 가고 되죠?”
“어…, 그럼요. 언제든지요.”
“무슨 고민인지는 안 물어봐요?”
“개발팀 김 주임?”
“뭐야, 언니까지 알 정도로 소문났어요? 미치겠네.”
***
고작 3개월이다.
대화 한번 제대로 나누지 못했던 설아 씨와 친해진 게 이게 겨우 3개월이다. 그동안 우정이라는 이름으로 좋아하는 사람과 해보고 싶은 걸 잔뜩 했다. 여전히 야근은 많았음에도 하루라도 야근하지 않는 날이면 저녁이라도 먹고 헤어졌고, 주말은 설아 씨와의 시간을 위해 무조건 비워두고 항상 핑계를 대고 약속을 잡았다. 드라이브도 가고, 산책도 하고 세차를 하기도 했다.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은근히 좋아하는 티를 내기도 했다. 뭐, 굳이 의식하지 않아도 티가 나긴 했으리라. 다만, 상대가 뼛속까지 평범한…, 여자 사람 친구일 뿐이었다.
고작 3개월인데, 벌써 위기가 닥쳤다. 아예 소문의 김 주임 이야기를 꺼내지 않으려고 의식하고 있었다. 평소처럼 굴자 싶어서 따끈한 자판기 우유를 건네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랬는데.
“언니 집에서 영화 볼까요? 나 고민 있는데…, 한잔하고 자고 가고 되죠?”
“어…, 그럼요. 언제든지요.”
“무슨 고민인지는 안 물어봐요?”
“개발팀 김 주임?”
“뭐야, 언니까지 알 정도로 소문났어요? 미치겠네.”
그 남자 때문에 난처한 표정을 보는 내 가슴이 쓰리다. 칼로 도려낸 상처에 설아 씨가 소금을 뿌리는 것만 같다. 말할수록 상처가 빨갛게 짓무르는 걸 알면서도 뿌리는 상대가 좋아서 어쩔 줄 몰라 그저 참을 수밖에 없다. 난처한 설아 씨에게 난처한 표정을 들킬 수는 없다. 입에 담기도 싫은 남자를 입에 올렸다. 설아 씨는 확인 사살을 했다. 아.
“어, 그렇죠.”
“연애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건 아닌데…, 뭐랄까 이런 적은 처음이라. 언니는 고백 많이 받아봤으니까 제 마음 알겠죠?”
“연애는, 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랑…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역시 그렇죠? 그런데 그러려면….”
“설아 씨, 저 오늘은 외근 나가봐야 해서….”
“아 맞아. 주말에 마저 상담해주세요. 언니.”
“네….”
“오늘 야근?”
“없어요.”
“언니 그럼, 나랑 저녁에 파스타 먹으러 가요.”
“오늘은… 쉬고. 주말에 봐요. 좀 피곤해서.”
Tictac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