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팀장아. 요 앞에 일식집 새로 생겼다는데 오늘 다 같이 가는 거 어때?" 

"헐. 누나 완전 좋아요!" 

 

센터에서 5분거리도 안 되는 곳에 일식집이 새로 생겼다. 맛있다는 소문이 퍼진 탓에 생각만으로도 군침이 돌았다. 초롱초롱한 눈으로 허락을 바라는 강이나와 하재훈을 한심하게 바라보던 백현이 나직한 숨을 뱉으며 대답한다. 

 

"지금 두사람 보고서는 다 쓴 건가?" 

"....."

"....." 

 

백현의 입에서 '보고서' 란 단어가 나오자 두 사람의 입이 마치 짜 맞춘 것처럼 꾹 다물렸다. 순식간에 조용해진 사무실 내부로 픽, 가벼운 웃음이 터져 나온다. 강이나의 고개가 매섭게 돌아갔다. 웃음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윤도영이었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윤도영은 웃음을 삼키고 서둘러 고개를 숙인다.  

 

"지금이 11시니까.." 

 

시계를 확인한 백현이 말을 흘렸다. 

 

"앞으로 10분."

"예?!!" 

"뭐? 십부운-?" 

 

망아지 같은 두 사람에게 자유를 주면 안 된다는 사실을 백현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앞으로 10분 안에 보고서 작성해서 내 책상 위에 올려놔. 짤막하게 통보하자 투덜대는 하재훈의 음성과 더불어 10분 안에 쓰고 맛있는 거 먹자고 눈에 불이 켜진 강이나가 키보드를 열심히 두드린다.  

 

사무실에서 타닥타닥, 키보드 누르는 소리가 연신 울렸다. 

 

"....." 

 

잔뜩 몸을 옹송그린채 보고서에 열중하는 두 사람을 뒤로한 백현의 시선이 한 곳에 머문다. 진득한 눈빛이었다. 시선의 주인공은 펜 끄트머리를 입에 물고 무언갈 생각하는 민석이었다. 느슨하게 입매를 풀며 동글동글한 뒤통수를 바라본다.  

 

요새들어 민석이 이상하다고 생각한 건.. 

 

'흐읏...' 

'혀 내밀어봐 민석아.' 

 

"씨발..." 

 

민석과 차에서 키스를 한날. 그날을 기점으로 이상해졌다. 아니, 이상해진 게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어색해졌지.

 

"으아아! 보고서 다 썼다!" 

"아싸. 그럼 우리 거기 일식집 가는거죠?" 

"참나. 거기가 뭐 얼마나 맛있다고." 

 

보고서를 다 썼다고 소란을 피우는 강이나와 그저 일식집 갈 생각에 기뻐하는 하재훈을 뒤로하며 윤도영은 고개를 저으며 한심해했다. 그런 세 사람을 보며 민석이 웃음을 터트린다. 그러다 문득 저와 눈이 마주쳤는데. 

 

"...!" 

"...." 

 

마치 못볼것 봤다는 듯이 후다닥 눈을 피하는 게 아닌가. 올라선 입꼬리가 딱딱하게 굳는다. 백현은 저도 모르게 손을 올려 뺨을 매만졌다. 시무룩해진 눈꼬리가 퍽 애처롭다. 

 

.. 내가 뭐 잘못했나.

 

 

 

 

 

강이나의 추천으로 온 일식집은 퍽 만족스러웠다. 점심시간 무렵쯤 가서 빈자리는 없었지만 다행히 회전율이 빨라 오래 기다리진 않았다. 자리에 앉자마자 앞다투어 음식을 시켰고 한상이 거하게 차려졌다. 센터 근처에 있어 식당 안의 손님들 대부분이 이능력자 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하나같이 먹성 좋게 전투적으로 음식을 섭취했다. 

 

만족스러운 식사를 끝마친 후 부른배를 통통 두들기며 다 함께 식당에서 나왔다. 날씨도 따뜻해서 다들 표정이 좋은 건 덤이었다. 

 

"2차는 저어기-디저트 카페 어때?" 

 

길게 뻗은 손가락이 길 건너편에 우뚝 선 카페를 가리켰다. 하재훈과 윤도영이 좋다고 앞장섰고 강이나는 웬일로 너희가 내 말을 잘 듣냐며 신기해했다. 평소엔 원수도 이런 원수가 없을 만큼 무엇하나 맞지 않건만 음식 앞에선 틀린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렇게 세 사람이 앞장을 서고 자연스럽게 그 뒤를 백현과 민석이 따랐다. 

 

"......" 

 

기회는 이때 뿐이다. 코트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은 채 무심히 걷던 백현이 슬그머니 주머니에서 손을 빼낸다. 괜히 주먹을 쥐었다 피며 요란스러운 행동을 이어가다 이내 민석의 손가락을 살며시 감싸 쥔다. 

 

"?!" 

 

아무것도 모른채 앞장서는 일행을 따라 걷던 민석이 제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는 온기에 놀라 얼어붙었다. 빳빳해진 고개를 틀자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똑같은, 지극히 평온한 표정의 백현이 제 옆에 서 길을 걷는다. 재빨리 고개가 내려갔다. 휑했던 손이 전부 백현의 손에 감싸진 상태였다. 

 

"티, 팀장님.." 

 

미쳤나봐. 이 모습을 행여 팀원은 물론이고 백현을 아는 누군가가 본다면! 그 생각이 미치자 머리털이 쭈뼛서고 놀릴거리가 생겼다며 신나 하는 세 사람의 얼굴이 동동 떠다닌다. 

 

민석이 안절부절 못하며 자신을 부르자 백현이 어깨를 으쓱이며 덧붙였다. 

 

"왜, 민석아?" 

"소, 손을..." 

 

이 손 좀 놔주라고요! 있는 힘껏 비틀며 빠져나가려 했지만 상대는 센티넬이었다. 심지어 어찌나 힘을 줬는지 무슨 짓을 해도 손이 빠지질 않았다. 체급차이를 느끼긴 했지만 이 정도 일 줄은 몰랐다. 허망함에 다시 한번 손을 비틀었지만 무의미한 짓이었다. 도리어 백현은 민석의 행동이 작은 '앙탈'로 느껴졌는지 훅, 몸을 붙여 지분거리기 시작했다. 

 

"자꾸 빼면.."

"....." 

"확, 뽀뽀해 버린다." 

 

불타는 고구마 마냥 얼굴이 서서히 달아오르기 시작한다. 팀장님이 드디어 미치신걸까? 당혹스러움에 눈을 깜빡였다. 마주 잡은 손은 어느덧 백현의 코트 주머니 안으로 들어간 상태였다. 그 바람에 주머니가 볼록 튀어나왔다. 이능력자가 출몰한 시대였기에 남남커플에 대한 인식이 부정적이진 않지만 그래도 곱게 보지 않는 시선들은 더러 있었고 민석은 행여 저 때문에 백현이 욕을 먹을까 봐 그게 무서웠다. 

 

"팀장님 그래도 누가 보면.." 

 

저는 아니지만 백현은 메스컴에 어느 정도 노출이 된 상태였으니까.  

 

"누가 보면? 보라고 해."

"......"

"민석이가 자꾸 나 피해서 얼마나 속상했는지 알아?" 

 

꼼질대는 손을 간질이며 백현이 말한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나온 '속상'이란 단어에 민석의 입이 꾹 다물린다. 불현듯 하재훈이 나불댔던 말들이 떠오른 탓이었다. 저와 백현의 진지한 사이를 방해하는 방해꾼! 

 

"그러니까 나 피하지마. 아까도 슬퍼서 울뻔했어." 

 

횡단보도를 함께 발 맞춰 걸으며 백현이 장난기 가득한 어조로 말했다. 저러니 미워하고 떨어지려고 해도 떨어질 수가 없었다. 잉잉 급기야 우는 시늉을 하는 백현 때문에 심란하던 표정이 빠르게 허물어지며 웃음이 새어나갔다.  

 

삐비비빅. 

 

보행자 신호인 초록불이 깜빡이며 빨간불로 바뀐다. 신호에 맞춰 정지했던 차들이 거북이 마냥 느리게 움직였다.  

 

 

 



강이나가 말했던 디저트 카페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2층으로 이루어진 카페는 지어진지 꽤 된듯 군데군데 칠이 벗겨진 모습이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카페의 간판은 환하게 빛이 나고 있었다. 민석의 손을 놓지 않은 채 백현은 빛이 나는 카페 간판을 느릿하게 읽었다. 

 

"카르페..." 

 

디엠. 

 

[Carpe diem] 

현재를 즐겨라   

 

카페 이름 치곤 꽤 올드하다고. 이런 곳을 알아낸 강이나가 대단하다고 생각할 무렵이었다.  

 

"..어?" 

 

백현의 눈이 커지며 재빠르게 민석을 제 뒤로 숨긴다.

 

유독 깨끗해 수상하다고 생각한 카페 간판의 글씨들이 벌레처럼 꾸물대더니 순식간에 몸집을 부풀려 허름한 카페를 집어삼키는 것이 아닌가! 변종 균열인가? 아니면 괴수? 세 사람이 카페에 먼저 들어갔는데 그러면 저기에 사람들이..

 

"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간 모양인지 낮게 신음이 터져나왔다. 아차 한 백현이 주머니 속에 잡힌 손을 서둘러 놓아준다. 그러자 그가 얼얼 해진 손을 접었다 피곤 글자에 삼켜져 뻥 뚫린 카페를 보며 중얼댔다. 

 

"에휴, 씨발.." 

 

순진하고 욕이라곤 모를듯한 민석의 입에서 난데없이 욕설이 튀어나오자 백현의 눈이 두배로 커진다. 놀란 그가 민석을 쳐다보자 새치름하게 눈을 치켜뜨며 물었다. 

 

"뭘 봐. 이제 깰때 되지 않았냐?" 

".. 너, 누구야." 

 

고개를 좌우로 꺾으며 현 상황을 지루해하며 하품하는  인물은 민석이 아니다. 아니, 얼굴은 민석이지만 그의 탈을 쓴 괴수다. 순간 손이 덜덜 떨렸다.  

 

저는 분명 1팀의 팀장이고 자랑스러운 센티넬이니까 ..

 

"씁. 대가리 한대 치면 깨려나." 

 

어디를 때리면 정신이 들지 진지하게 고민을 하는 민석의 앞에 잔뜩 혼란스러운 얼굴의 백현이 중얼댄다. 

 

".. 내가 누구지?" 

 

1팀의 팀장이자 센티넬이었다. 누가 물어도 항상 자신 있게 따라붙던 수식어였다. 그러나 이상하게 머릿속이 마구 엉킨 듯 정상적인 생각이 이어지지 않았다. 그가 숨을 헐떡인다. 강이나 하재훈 그리고 윤도영. 말은 안 했지만 제가 아끼고 묵묵히 저를 따라와 주던 팀원들이다.

 

그런데 걔들이.. 

 

"누구야." 

 

누구지? 누구지? 누구지? 

 

"야 변백현." 

 

공포에 질려 애꿎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현실에서 혼란스러워하는 백현이 엉망이 된 머리를 한채 번쩍 고개를 든다. 그러자 한 번도 저를 그런 눈으로 본 적이 없던, 냉기가 흐를 만큼 싸늘해진 눈빛으로 훑어보는 시선에 자연스레 눈을 내리깔았다. 

 

"...." 

"미안하다."

 

꿀 먹은 벙어리 마냥 입이 열리지 않았다. 누군가가 일부러 목구멍을 틀어막은 듯 단전 밑으로 콱 막힌 답답함을 느꼈다. 이어지지 않는 정신을 간신히 붙잡고 서있자 의미모를 말을 남긴 민석이 눈을 감는다. 멍하니 그를 따라 하던 백현은 뒷목을 내리치는 강렬한 냉기에 그만 정신을 잃었다.  

 

 

 

 

***

 

 

 

 

'팀장님.' 

 

붉은 입술이 속삭인다. 흐릿한 인영이었다. 안개가 낀 듯 뿌옇던 머릿속에 누군가의 음성이 둥둥 실체 없이 떠다닌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누구의 목소리인지 얼굴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무의식에 조금 더 집중을 했다. 

 

'.. 장님.' 

 

이윽고 장면이 바뀌며 저를 애타게 부르던 목소리는 사랑을 속삭이듯 달콤한 목소리로 바뀌었다. 그러나 대상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속이 탔다. 앞에 있는 게 분명한데 잡히지 않고 보이지 않는다. 허공에 헛손질을 수십 번 할 때 즈음이었다. 

 

"나와봐." 

 

... 응? 

 

"아이고, 팀장님."

"쯧쯧.. 근데 저 방법밖에 없지." 

 

감긴 눈꺼풀이 움찔 인다. 그러나 미세한 움직임이었기에 그것을 눈치챈 이는 아무도 없었다. 

 

"도와드려요?"

"됐어. 너희는 뒤로 물러나." 

 

척척- 일정한 굽소리와 함께 제 앞에 어른거리던 잔상들이 서서히 걷어진다. 백현은 물먹은 솜처럼 무거운 눈꺼풀을 있는 힘껏 들어 올렸다.  

 

촤악-! 

 

"으앗!!" 

 

그리고 눈을 뜸과 동시에 물세례를 받았다. 그것도 온몸이 흠뻑 젖을 만큼 강렬하게. 

 

 

 

 

호로록. 

 

"어이 도련님. 내 말 듣고 있는 거야?" 

 

끄덕끄덕. 따뜻하지만 풀 맛이 나는 차를 홀짝이던 백현이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인다. 

 

"아직 정신이 안 돌아온 것 같은데.." 

 

정복을 차려입은 하재훈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잘 모르는 제가 보기엔 아직 애 정신이 백 퍼센트 돌아온 게 아닌 듯 보였는데.. 

 

'옷 갈아입히고 차 한잔 내줘.' 

 

부득불 팀장인 민석은 철 모르는 도련님의 정신이 돌아왔다고 짧게 일갈하며 부하인 제게 명령을 내렸다. 그리하여 백현을 샤워실에 집어넣어 샤워를 하게끔 하고 그나마 멀끔한 옷을 던져준 후 풀떼기 맛이 나는 이름 모를 차를 내준 게 10분 전이었다. 

 

"그러니까 여기가.." 

 

호로록. 맛이 없어 토악질이 나는 차를 도련님은 잘도 마셨다. 입맛이 고급일 텐데 신기하단 말이야. 하재훈의 호기심 어린 눈빛이 잠시 스쳤지만 그뿐이었다. 본인들은 이 도련님을 안전하게 지구, 아니 이제는 지구라 불리는 알파성에 무사히 데려다주고 임무를 완수하면 되니까. 

 

"뭐 지금 계신 곳은 우주이긴 하죠." 

 

탁- 어느새 차를 전부 흡입한 그가 녹슨 찻잔을 철제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행성을 떠돌다 우연히 고물상 행성을 발견해 다행이지 아니면 잘 자란 도련님이 홀딱 발가벗고 있을 뻔했다. 그런데 명색이 도련님이어서 그런지 허름한 옷을 입어도 옷태가 그럴싸했다.

 

해진 소매 끝을 매만지며 백현이 주변을 둘러본다. 커다란 내부, 귀에 거슬릴 만큼 큰 엔진 소음, 그리고 어깨엔 꽃이 그려진 훈장 한 개를 달고 있는 덩치 큰 사내까지.  

 

".. 하재훈." 

"....?" 

 

틀림없이 그는 '하재훈'이었다. 제 부하이자 1팀의 팀원이었던, 민석이 막내로 오기 전 막내역할을 했던.. 

 

"분명 1팀이었는데.." 

 

심각한 표정의 그가 중얼대기 시작했다. 이 모든 상황이 쉽게 이해되지 않고 납득이 안 갔다. 왜 저는 1팀의 팀장이 아닌 거고, 지상이 아닌 우주선을 타고 우주를 떠다니는 거고 도련님이라는 우스꽝스러운 이름으로 불리는 건지. 

 

그러나 제일 이해가 되지 않는 건 팀장, 그러니까 제가 아닌 민석이 팀장으로 불린다는 것이다.

 

".. 아직 안 돌아왔구만. 잠시만 기다리세요. 또 사고 치지 말고." 

 

안타까운 눈빛으로 저를 내려보던 하재훈이 깊게 숨을 내뱉으며 자리에서 일어선다. 온전치 못한 정신을 가진 저를 이해시키고 설득하기 위해 적합한 인물은 어느 정도 권력을 지닌  한 사람뿐일 것이다. 하재훈 또한 그것을 알고 도움을 청하려는 듯 보였다. 그가 나간 빈자리에 홀로 남은 백현이 나직이 숨을 쉬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다. 

 

"사고 치지 말라니.." 

 

그건 제가 사고를 여러 번 쳤다는 말인가. 







벌써 12월이네요! 감기 걸리지 않게 몸 조심하세요 ㅜ.ㅜ(이미 걸린 1인)

내연비가 17화 까지 연재가 됐는데 18화부턴 관계가 역전된 두사람을 볼 수 있을거예요ㅎㅎ 

그간 백현이한테 있었던 일은 차차 풀어나갈 생각입니다~ 

항상 그렇듯 부족한글 재미나게 읽어주시는 독자님들께 너무 감사합니다  ◟( ˘ 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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