멱리(羃䍦)를 드리워 가려진 시야가 불안하여 자연히 걸음이 느려졌다. 조심스럽게 밤길을 걷느라고 발치만 내려다보고 있었더니, 금세 손을 붙잡혔다. 허리 근처로 가까이 닿아오는 체온은 여름밤의 서늘함을 몰아낼 정도로 따뜻했다. 고개를 들면, 가늘고 설핀 천 자락 너머의 얼굴을 흐릿하게나마 확인할 수 있었다. 또렷한 콧대와 짙은 눈썹, 그 아래의 새카만 눈동자.

“앞에 계단을 지날 테니, 조심해야 하오.”

주변 사람들에게 다 들릴 정도의 목소리에 선명한 다정이 묻어났다.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거짓임을 알면서도 귓바퀴에 나직하게 감겨드는 목소리에, 어쩔 수 없이 숨결이 흐트러지는 동요가 마음에 일었다. 이달재는 뭐라 말할 것처럼 입을 떼었다가 얼른 다물었다. 겉모습을 꾸며낼 수는 있어도 목소리는 도무지 무리였다. 하여 이미 ‘산왕비’는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것으로 말을 맞춰두었다. 이달재는 그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이명헌이 이끄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놀잇배가 지나다니는 작은 강을 건너는 다리 앞에는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북산에서는 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사람들은 화려한 등불을 걸어둔 좌판을 지나면서 웃음 지었고, 거리는 이미 해가 져버린 저녁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소란스러웠다.

물결치듯이 움직이는 인파 속에 녹아들어 움직이던 도중에 이달재는 아기자기한 연등을 걸어 놓은 가게 앞에서 잠시 멈춰 섰다. 자연스럽게 이명헌이 따라붙으며 뒤를 지나는 사람들 사이에 틈을 만들어 준 덕분에, 이달재는 편히 좌판을 구경했다.

북산의 작은 축제에서 보았던 것과 별로 다르지 않은 연등이었지만, 이 가게 주인의 솜씨가 좋은 탓에 오늘따라 유독 관심이 갔다. 이달재가 몇 가지 연등을 손끝으로 건드리며 구경하자, 가게 주인이 힐끗 눈치를 살피며 말을 붙였다.

“마음에 드시는 것으로 골라 보십시오, 아가씨.”

아가씨라는 호칭에 잠시나마 움찔했던 이달재는 곧 작은 토끼 모양의 연등을 손끝으로 가리키고는 소맷자락을 더듬었다. 하지만 이달재가 소매 안에 넣어두었던 전낭을 채 꺼내기도 전에 옆에 있던 이명헌이 동전을 먼저 내밀었다.

가게 주인이 넙죽 받아 가려는 동전을 급히 손으로 가리는 이달재의 행동에, 내내 조용하던 이명헌이 고개를 돌렸다.

“이런 건 내가 사게 해주어야지요. 부인.”

“아이고, 두 분이 부부셨군요. 금슬이 아주 좋으십니다.”

가게 주인이 넉살 좋게 떠들어대면서 얼른 다시 손을 내밀자, 결국 이명헌이 직접 값을 치렀다. 가게 주인이 꺼내준 연등은 금세 이달재의 손에 들렸다. 새빨간 눈을 달고 있는 흰토끼 모양의 연등은 안에 품은 불빛이 흔들릴 때면 가끔 노랗게 빛났다.

졸지에 선물을 받은 모양새라 감사를 전하고 싶어도 입을 뗄 수가 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이달재는 다시 제 앞으로 다가온 이명헌의 손바닥에 손가락을 세웠다. 손끝을 움직여서 몇 글자로 적어낸 인사에 이명헌은 여전히 부드러운 어조로 대꾸했다.

“별것 아닙니다. 부인의 기쁨이 내 기쁨이니.”

“…….”

번드르르한 거짓말이 한껏 고집스러워 보이는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게 몹시 신기했다. 이달재는 잠시 이명헌을 쳐다보았다가, 채근하듯 멱리 아래로 들어와서 흔드는 그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다리를 오르는 사람들 틈에서 이명헌은 몇 번이나 말을 걸었다. 성도의 거리를 설명하는 나직한 목소리는 저 멀리에서 흘러나오는 음률보다 듣기 좋았다. 그 탓인지 좁은 길목을 벗어났는데도 묘하게 두 사람 주변에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멀찍이 떨어진 자리에서 몇몇이 입가를 가리고 수군거리는 것이, 이명헌을 알아본 것처럼 보였다.

그의 뜻대로 사람의 눈에 들었으니 괜찮은 부채질이 되었을까 싶었던 찰나, 갑작스럽게 등을 치고 지나가는 영문 모를 손길에 이달재가 비틀거렸다. 깜짝 놀라서 잡고 있었던 손마저 놓아 버린 채, 사람들 틈에서 이리저리 휘청거리던 몸을 다시 붙잡은 건 이명헌이었다. 이대로 성도 길바닥에 코를 박고 엎드리게 될까 염려했던 탓인지, 이달재는 황급히 이명헌의 팔에 매달린 채로 쿵쾅거리기 시작한 심장을 다스렸다. 잠시의 소란으로 머리에 쓰고 있던 멱리가 비틀어져, 와르르 쏟아지듯 기울어진 천 밑으로는 이명헌의 옷자락만 겨우 보였다. 감색의 옷자락 위를 수놓은 은사가 연등의 불빛을 받아 은은하게 빛나는 모습을 멍하니 쳐다보던 이달재의 시야가 갑자기 밝아졌다.

어느새 허리를 숙인 이명헌이 성긴 천을 들춰낸 탓이었다.

화장하지 않은 맨얼굴을 내보인다면 분명히 사람들은 ‘산왕비’가 사내가 아닌지 의심할 텐데. 순간 심장이 덜컹거린 이달재가 호흡을 멈춰버린 틈에, 이명헌이 멱리 아래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갑자기 훅 가까워진 이명헌에게서는 옅은 백단향이 풍겼다. 그의 어깨 너머는 여전히 멱리에 가려져 거리를 밝힌 화려한 불빛이 은은하게 비칠 뿐이었다. 몹시 이질적인 광경에 넋을 놓고 눈을 깜빡거리는 사이, 이명헌이 조금 급한 어조로 물었다.

“다친 곳은?”

“……. 없, 없어요.”

무심중에 소리 내어 대꾸했던 이달재가 주변을 둘러보고는 화들짝 놀라 입을 다물어버리자, 이명헌이 다시 속삭였다.

“소란해서, 들리지 않을 테니 걱정할 필요 없다.”

“…….”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입을 꾹 다문 채인 이달재의 얼굴을 살피던 이명헌은 곧 뒤로 물러났다. 그는 비틀어진 멱리를 바로 잡아 주며, 다른 손으로는 이달재의 허리를 가볍게 휘감았다.

“이리하면, 다시 넘어질 일은 없을 테지.”

졸지에 반쯤 끌어안긴 채로 거리를 걷게 된 이달재는 이게 맞는 건가 싶다는 듯 머뭇거렸으나, 이명헌은 아무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이달재는 흰 천 자락 너머로 비치는 반듯한 얼굴에 담겼을 의중을 읽어내기 위해 고심하면서도 착실하게 그의 손길을 따랐다.

이대로 오래도록 성도를 거닐어 다녀야 하는 건 아닌지, 다소 걱정스러웠던 의문은 금세 가라앉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두 사람은 다루(茶樓)에 앉을 수 있었다. 오늘 외출의 연유를 따지자면 사람들 눈에 들기 좋은 문가에 자리를 잡아야 하지 않을까 싶었지만, 이명헌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이달재를 데리고 이층으로 올라갔다.

자리에 앉아서 가벼운 간식과 차를 주문한 뒤에 이달재는 조금 얼떨떨한 낯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근처에 사람은 없었다. 저녁 시간이니만큼, 지금은 다루보다 주루(酒樓)가 붐빌 때였다. 창을 모두 활짝 열어두었지만, 거리를 지나는 사람의 말과 발소리는 아래에서 넘실거리기만 할 뿐, 발치를 넘지 못했다.

귀에 거슬리지 않을 정도의 소음을 들으면서 따뜻한 차를 입에 물자, 뒤늦게 야트막한 한숨이 쏟아져 나왔다. 따뜻한 찻잔을 손에 쥐고 잠시 숨을 고르는 이달재에게 이명헌은 접시를 밀어주며 간식을 권했다. 모양새가 예쁜 월병을 손에 쥐고 멱리 아래로 들여 오물거리는 틈에 별다른 대화는 없었다. 이명헌은 느긋하게 다관을 기울일 뿐이었고, 이달재는 당장 함부로 목소리를 낼 수 없는 탓이었다.

진득한 침묵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소란한 말소리와 함께 끊어졌다. 이달재는 거의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계단에서 몰려오는 사내 무리는 마치 이곳이 주루라도 되는 것처럼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그러면서 별다른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라 그저 목청만 돋우고 있을 뿐인 것이, 보아하니 이미 어디에선가 술을 거나하게 들이켜고 온 게 분명해 보였다.

괜히 어울렸다가는 낭패를 보겠다 싶어, 얼른 자세를 고쳐 앉은 이달재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등 뒤에서 누군가가 이명헌에게 알은체하며 말을 걸었다.

“어허, 세상에나. 저희가 오늘 운이 좋은 모양입니다. 이런 곳에서 산왕 전하를 뵙다니요. 어찌, 그간 강녕하셨는지요?”

그다지 공손하지 않은 말투도 문제였지만, 사내가 다가서며 술 냄새가 확 풍겨온 탓에 이달재는 얼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이달재가 손에 쥐었던 찻잔을 탁자에 내려놓음과 동시에 이명헌이 한쪽 손을 들자, 2층 난간을 밟으며 뛰어 들어온 산왕군의 호위가 이달재의 등을 가리고 섰다.

이 호위의 이름은 정우성로, 이달재와 동년배인 산왕군의 어린 백부장(百夫長)이었다. 그는 특별히 이명헌의 명을 받아 성도 안에서 이달재의 호위를 맡는 중이었다. 앞으로 어디를 가든 곁을 지키며 따라다닐 거라는 설명을 듣긴 했다. 하지만 그가 이런 식으로 등장할 줄은 몰랐던 터라, 이달재는 조금 놀라웠다. 무공을 익히지 않은 군인이 이 정도로 민첩하게 다루 이층으로 들이닥칠 수 있으리라고는 미처 알지 못했다. 이달재가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조금 감탄하는 사이, 이명헌은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은 채로 고개를 까딱여 인사를 대신했다.

그 모습은 친왕(親王)으로서 빼거나 부족할 게 없었으나, 뒤에 늘어선 주정뱅이들은 조금 생각이 달랐던 모양이었다. 쓸데없이 헛기침하는 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이곳은 다루이니, 목이 막힌다면 차를 시키면 되는 일이거늘. 아무래도 저들은 술을 마신 탓에 정신이 맑지 않은 것 같아, 이달재는 조금 망설이다가 다관을 슬쩍 건드려서 탁자 가장자리로 밀어냈다.

그 모습이 뒤에 있는 이들에게 보였을지는 알 수 없었다. 어쨌든 말없이 제 뜻을 피력해 본 이달재는 만족한 낯으로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는데, 돌연 이명헌이 피식 웃었다. 그다지 웃음이 나올 상황은 전혀 아니었다. 의아한 낯으로 쳐다보고 있으려니, 이명헌이 정우성을 돌려세우며 말했다.

“내 왕비께서 뒤에 서 계신 공자들이 목이 상할까 용려하시니, 네가 왕비를 대신해 저들에게 차를 한 잔씩 내주어야겠다.”

정우성은 거의 곧바로 탁자 끝에 있던 다관을 손에 들어 입을 열었다.

“말씀 들으셨을 테니, 각자 잔을 알아서 구해 오시지요.”

“뭐라?”

“구해오지 않으시면 어쩔 수 없이 공자의 머리에 차를 따라드려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달재는 이어지는 정우성의 말에 화들짝 놀랐다. 차를 머리에 따른다니. 그런 뜻이 전혀 아니라는 의미로 손을 내저으려던 이달재는 이명헌이 지긋이 바라보는 시선에 짓눌려 잠자코 손을 내렸다. 아무래도 이명헌이 따로 생각한 바가 있는 모양이었다. 이달재는 당황하여 머뭇거리던 손으로 다 식은 찻잔을 괜히 끌어당겼다. 빈 잔을 만지작거리는 틈에 내려앉은 정적 사이로 뱀처럼 느른한 목소리가 들렸다.

“……, 이런. 앞에 계신 분이 소문의 산왕비 전하인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산골에서 자랐다고 들었는데, 과연 시골은 성도보다 인심이 좋다더니. 산왕비 전하께서도 마음이 참 넓으십니다. 한데 어찌 인사를 건넬 기회조차 주지 않으시는지요?”

이명헌이 따로 손짓하지 않았기에, 이달재는 구태여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자 뒤에서 퍽 안타까운 듯한 침음이 들렸다.

“노파심에 여쭙니다. 혹, 산왕비 전하께서는 말을 전혀 못 하십니까?”

“맞다.”

내내 입을 다물고 있었던 이명헌의 대답이 떨어지자, 누군가 가볍게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설마하니 산왕 전하가 말 못 하는 시골 아가씨를 왕비로 삼을 줄은 몰랐다는 뜻일까. 이달재는 그저 가만히 앉아서 이명헌의 눈치만 살폈다. 혹여 이달재가 나서야 할 때가 된다면 그가 알려줄 수 있을 테니까.

“드디어 황실의 어른께서 혼례를 올리셨다는 소식에 기대가 많았는데, 참으로 아쉽습니다.”

“그러니까요. 아니, 어찌 이런 혼사를 치르셨습니까? 황실의 근심이 백성의 근심인 것을 산왕 전하께서 모르실 리도 없을 텐데.”

삐죽한 말이 뒷덜미를 쿡쿡 찌르는 걸 모르는 척하던 이달재는 이명헌이 시선을 옮기는 모습에 어깨를 굳혔다. 새카만 눈을 들어 이달재의 어깨 너머를 향하는 그의 시선은 몹시 공허하고 무감(無感)하여 차갑기만 했다. 평소에도 그다지 안색의 변화가 두드러지지 않는 사람이긴 했지만, 그가 오늘처럼 삭풍(朔風) 같은 기세를 내뿜었던 적은 없었다.

이달재는 조금 불안한 낯으로 애꿎은 찻잔을 꼭 쥐었다.

“글쎄. 마음은 고맙지만, 그다지 달갑지는 않군. 호부상서의 금지옥엽에게 염려를 받는 편이 더 본왕의 평판을 상하게 하여 황실의 근심이 되지 않을까 싶은데.”

“금지옥엽……, 이라니요. 가문에 손이 귀하긴 하지만, 모두 옛말입니다.”

“그래? 호부상서(戶部尙書)가 약관(弱冠)을 앞둔 적장자를 마치 대여섯 살 난 어린애처럼 귀하게 여기고 품에 안아 어르고 달랜다는 소문을 내가 분명히 지난번에 들었는데.”

“…….”

갑작스러운 침묵 탓에 이달재는 자리에 옴짝달싹 하지 못한 채로 굳어 있었다. 이명헌은 날카로운 기세를 숨길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처럼 정적을 가르며 내키는 만큼 떠들었다.

“음, 매사 걱정 많은 아비 탓에 학당에서 공부를 마치지 못했다던가. 만일 소문이 틀린 거라면 공자의 능력이 부족하여 제대로 수학할 수 없었던 모양이 틀림없겠군. 이런 거짓 소문에 대해서는 천천히 바로 잡아 보지. 황족으로서 어찌 백성이 부당한 일을 당하는데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있겠어. 소문의 주모자를 찾아서 소송을 할 생각이라면 내가 증인으로 나서주지.”

결론적으로는 등 뒤에 모여 있는 공자 중에 누군가는 그리 똑똑하지 못하여 학당에서 제대로 배우지도 못했으면서 괜히 황실의 일에 백성의 근심이니, 뭐니 하면서 말을 얹어 봐야 소용없다는 뜻이었다.

사실 이달재는 이런 식의 언행에 그리 익숙하지 않았다. 상단에서도 말을 제법 에둘러 표현하는 경향이 적지는 않았지만, 기본적으로 거래를 우선하는 집단이라 필요할 때는 명확하게 말하는 경우가 더 잦았던 탓이었다.

그런가, 이런 게 황실과 성도의 분위기인가. 이달재가 잠자코 감탄하는 사이에 이명헌이 자세를 삐딱하게 바꾸면서 손을 까딱거렸다.

“그리고 형부주사(刑部主事)는 슬슬 친구를 가려 사귀는 편이 좋겠군. 공신을 아비로 두어 음서직(蔭敍職)으로 자리를 잡았더라도, 거기서 만족해서야 되겠나? 언제까지 서리(胥吏)들 앞에서만 나서며 지낼 게 아니라면 말이야.”

“……. 전하, 어찌 그리 매정하게 말씀하십니까. 저희는 모두 어린 시절 전하의 곁에서 머물던 놀이 친구였던 것을 잊으셨습니까.”

“그럴 리가. 작금의 황제께서 태자에 봉해지셨던 그 경사로운 날에 화들짝 놀라서 꽁무니를 빼던 그 재밌는 모습을 내가 어찌 잊겠어.”

“그건……!”

누군가 발끈한 듯이 언성을 높였지만, 곧 자리에서 일어난 이명헌이 움직임에 반사적으로 입을 닫아버렸다. 짧은 침묵을 지르밟아 이달재의 곁으로 다가온 그는 나직하게 말했다.

“물론 자네들은 아버지의 뜻을 따랐을 테지. 열세 살 남짓한 사내가 뭐 그리 정치적인 행동을 할 수 있겠어. 그러니 집에 돌아가서 오늘 정말로 본왕을 찾아오고 싶었던 이들에게 말을 좀 전하게.”

그 정도는 할 수 있잖아. 하고 중얼거린 이명헌의 말에 대꾸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패기 좋게 들어와서 빈정거리며 헛기침하던 초반의 기세를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변화가 의아했지만, 곧 이달재는 어깨를 감싸는 이명헌의 행동에 놀라서 머릿속을 하얗게 비웠다.

가까워진 몸에서는 예의 백단향이 풍겼다. 종일 맡았던 그 향이 어찌하여 지금에서야 유독 강하게 느껴지는지 알 수 없었다. 당황한 어깨를 부드럽게 쓸어내리던 이명헌은 어느새 북풍한설(北風寒雪) 같은 기세를 거두어 낸 채로 평소 이달재에게 말하듯 여상스럽게 말했다.

“이미 치른 혼례는 무를 수 없다. 그리고 집안일에 간섭하는 건 좌시하지 않을 생각이니. 소식을 기다리고 계실 폐하께 멋대로 전해도 좋아. 본왕이 허락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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