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별 불쾌감(性別不快感)(영어: gender dysphoria 젠더 디스포리아)은 출생시 지정된 자신의 신체적인 성별이나 성 역할에 대한 불쾌감을 뜻한다.” - 위키피디아

 현 시점에서 트랜스젠더가 자신이 원하는 성별로 살아가기 위해 절차적으로 밟는 첫 단계는 정신과 진단이다. 이 정신과 진단에서 판정받는것이 성주체성장애(Gender Identity Disorder), 질병코드 F64.0, 즉 디스포리아이다. 진단 과정에 다양한 문제가 있다는 사실은 언급만 하고, 이 글에서는 디스포리아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만 소개하도록 한다.

 디스포리아는 불쾌감이다. 자신에게 강요된 양식이 자신에게 맞지 않는다는 감각의 총칭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트랜스젠더 정체화의 첫 실마리는 이 강력한 불쾌감인 경우가 많다. 이정도로 강력한 불쾌감을 세상 모두가 지닌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 비로소 스스로가 시스젠더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곤 한다. 물론 디스포리아의 발현 방식은 너무나도 다채롭고, 디스포리아가 전무한 트랜스젠더도, 디스포리아를 느끼는 시스젠더까지도 있을 수 있긴 하지만. 

 가장 대표적인 것은 성별 특징적인 신체에 대한 미움이다. 자신의 튀어나온 골반, 넓은 어깨, 큰 가슴, 큰 발, 작은 키, 수염, 턱 뼈, 눈썹 뼈, 목소리, 생식기 등. 그것이 자신에게 주어져 있다는 것이 어색하고 이상하다. 그리고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느낀다. 생리를 하는 자신의 몸을 미워하는 사람은 시스젠더중에서도 많겠지만, 고통스러움과 번거로움에 더해 이것이 내게 일어난다는 사실 자체가 억울하고 내가 해서는 안될 생리활동을 하고 있다는 종류의 괴리감과 공포심을 느끼곤 한다. "뭐야? 왜 여기서 피가나와? 왜 여기가 아파?" 페니스가 있는 경우에는 발기를 할 때마다 고여있는 피가 주는 통증이 고스란히 느껴지고, 스스로가 남성으로 지칭되는 것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며, 이대로 페니스를 도려내고 싶은 생각만 가득해진다. 가슴에 달린 지방이 달려서는 안될 것이 달려있다고 느껴지며, 골반과 어깨 넓이가 유독 두드러져 보인다. 목소리가 싫어 말조차 크게 하지 못한다.

 내가 동질감을 느끼는 집단은 이런 신체적 특질을 지니지 않았는데, 나는 왜 이런 특징을 가지고 있을까? 혹은 이런 특질을 가지고 있지 않은 걸까? 이것들을 볼 때 마다 내게 매겨진 성별이 떠오르고, 이것들이 나를 그 성별로 만들어 버리는 것 같다. 케이트 본스타인의 말을 빌리지만, “나는 페니스가 싫었던 적이 없다. 그저 그것이 나를 남자로 만든다는 사실이 싫었다.” 그 자체가 자연히 밉고 거부감이 든다기 보다는, 그것들이 나의 성별을 특징지어버리는 감각이 싫은 것이다. 어떤 신체를 갈구한다의 개념보다도 동질감을 느끼는 집단과 나 사이의 괴리감이 괴로운 것이다. 모두가 공통으로 가진 것을 나 홀로 가지지 못하면 생기는 괴리감에서 디스포리아는 출발한다. 

 물론 여기까지 도달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자신의 욕구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해체하길 거듭해야 나올 수 있는 결론이다. 언어가 그다지 주어지지 않은 사람의 입장에서는 이렇게 생각하면 편하다. “나는 잘못된 몸에 태어났다.” “이 몸은 진정한 내 몸이 아니다.” “ㅁㅁ가 되고 싶다.” 하지만 이런 기술들이 결국 독이라는 것을 안다. 스스로의 몸이 잘못되었다는 생각, 가짜 몸이라는 생각들은 가뜩이나 괴로운 마음을 더욱 더 피폐하게 만든다. 이런 말들은 존재를 부정하고 정체성을 부정하며 스스로를 나쁜것, 거짓된 것으로 치부하는 일이다. 그때문에 ‘당신의 신체가 어떻든, 당신이 어떤 생식기를 가지고 있든 당신이 정체화했다면 당신의 몸은 그 정체화한 젠더의 몸이다’라는 기술이 등장한다. 이런 기술은 어떤 전형적 특질을 지닌 신체만이 해당 젠더의 신체라는 정상성 프레임을 깨부수는 효과도 준다. 

 이렇게 미운 신체는 사회적 행동으로도 자연히 연결된다. 자신을 성별화된 인칭대명사로 부를 때마다 잘못 부르고 있다는 감각을 느낀다. 형 누나 언니 오빠등의 호칭이 꼴보기 싫고, 내가 부르기도 싫다. 그런 호명을 들을때마다 몸이 얼어버리곤 한다. 혐오자들에게는 안타까운 일이겠지만, 의도적인 미스젠더링이나 일상에 있는 사람의 말 한마디보다는 길에서 만나는 낯선 사람의 해맑은 미스젠더링에 주로 이런 거대한 공포를 느끼곤 한다. 입고있는 옷이 맞지 않다고 생각되며 자신이 원하는 옷, 나와 동질감을 지닌 사람들이 입는 옷에 관심을 가지고 쇼핑 사이트를 뒤진다. 장신구에 과한 관심을 가지거나 기피하기도 한다. 모든 또래가 화장을 하는데 나만 하지 못한 상태, 그리고 거기서 발생한 소외감과 나도 화장을 하고싶어서 화장품을 가지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 있는 시스여성은, 그 감각이 트랜스여성이 가지고 있는 감각과 거의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아두었으면 한다. 치마를 입고싶고 화장을 하고싶은 감각은 그것이 섹슈얼하다는 감각이 동기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소외감이 동기가 된 욕구이다.

 이런 소외감은 성별화된 놀이 문화에서도 드러난다. 운동부에 가입해서 운동을 하고싶지만 여자 운동부가 없는 경우가 있고 그나마 가입해도 매니져를 시킨다. 퀼트 등 실로 하는 놀이를 하고싶지만 남자는 받아주지 않는 특별활동반이 있다. 로봇 이야기를 하는 옆 아이들에게서 벗어나 마법소녀 이야기를 하는 저 아이들과 함께 대화하고싶다. 물론 이것은 취향의 문제이고, 개인차가 있는 이야기이다. 공을 좋아한다고 남자이고 공을 싫어한다고 여자가 되지 않는다. 남자면 모두 공을 좋아하고 여자면 모두 공을 싫어하지도 않는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성별을 무엇보다도 기본적인 중심 요소로 잡고 친구를 사귀는데다가, '이성'과 대화를 하거나 신체접촉을 했다는 이유로 놀림감이 되고 공식 커플이 되어버리는 세계에서, 또래 집단 내에서 당당하게 나는 홀로 취향에 맞는 저 집단을 향해 떠나겠다고 했을 때 받게 되는 시선과 거절들, 그리고 그 거절에 들어있는 이질감 가득한 시선의 무게가 없어지지 않는다. 게다가 어린시절 취향이 또래집단의 강한 영향으로 형성된다는 지점 역시 무시할 수 없는 지점이다. 그리고 그 초기 취향이 성인이 된 후의 취향에도 큰 영향을 준다는 사실도. 

 이런 감각들은 단지 '남자면 근육도 잘 붙고, 안전할 것이고, 어쩌구 이므로 나는 남자가 되고싶다'라는 감각과는 매우 다르다. 그런 감각들은 소외감에 기반하지도 않으며, 자신이 여성인 것과 여성으로 대해지는 것에 대한 불쾌감은 있을지언정 이질감과 괴리에 시달리지는 않는다. (물론 일정수준의 소외감, 괴리, 이질감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궤가 다른 방식이다.) 더군다나 트랜스젠더의 감각은 잘 살펴보면 무엇이 되고싶다보다는 나는 이것인데 왜 사람들이 나를 저것으로 부르지?라는 종류의 혼란이다. 정체화를 마친 트랜스젠더에게 혼란이 있다면 내가 남자인가 여자인가? 라는 혼란이 아니라 쟤는 왜 나를 저렇게 부르지? 가 된다.

 그래서 자신의 신체가 미운 사람은 무엇을 할까? 자학한다. 자해한다. 자책한다. 때론 자살하기도 한다. 남에게 내 몸을 보여줄 수 없다. 그때문에 내가 어떻게 패싱이 되든, 트랜지션을 전혀 진행을 하지 않았든 몸을 드러내는 장소에 가는 것이 꺼려지기도 한다. 내 취향을 밝히지 못한다. 나는 고작 내가 좋아하는 색을 긍정하기까지 십년이 넘게 걸렸다. 내가 좋아하는 색은 이 색이지만, 사회적으로 이 색은 내 성별의 색으로 인정받지 못하기에, 나는 당당하게 이런 색을 좋아한다고 말하기 꺼려졌다. 그렇게 자신의 모든 것들을 한번씩 부정한다. 

 나의 그릇된 취향이 어떤 문제라고 생각하여 자기혐오를 내재화하고, 오히려 자신의 지정된 성별의 것에 집착한 적이 있다. 정상성에 어떻게든 편입되려고 노력하였다. 그냥 힘을 주고 살아가면 이 모든 고통을 웃어넘기고 평범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디스포리아는 그런 방식으로 해소되는 것이 아니었고, 그렇게 묻어둘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 다음에는 조금 솔직해 졌다. 내 성별의 것이라고 믿는 것들에 마음껏 집착하고 지정된 성별의 것들을 배척했다. 극단적인 취향으로 자신을 꾸며보았다. 하지만 개중에는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 있었고, 자신을 긍정하기 위한 과정에서도 괴리감이 커져갔다. 그렇게 나는 신체 자체를 갈아엎고싶은 욕망에 가득 찼고, 그렇게 의료적 트랜지션을 시작했다.

 지정된 성별과 지정되지 않은 성별 모두를 미워해보았고 모두에 집착해보았다. 남성성을 수행하는것도 여성성을 수행하는것도 기피한 적이 몇번씩 있었다. 그러면서 균형을 잡았다. 그중 어떤것을 내가 원하고 어떤 것을 내가 원하지 않는지 정확하게 알았다. 논바이너리로서, 신체와 관련해서도 어떤 것을 필요로 하고 어떤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지도 알게 되었다. 나는 큰 가슴이 싫다. 다행히도 절제할 정도로 자라나지 않았다. 수염도 싫다. 골반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애매한 목소리를 가지고 싶지만 테스토스테론이 흐른적이 있는 이상, 어릴때에도 낮았던 목소리는 매우 낮고 굵다. 긴 머리가 좋고 피어싱, 그리고 근육이 좋다. 치마, 레이스, 분홍색 옷을 좋아하지 않는다. 치마는 가끔 편하긴 하지만. 화장을 하면 좋지만 자주 하지 않는다. 셔츠가 좋고 운동화만 신는다. 남자치고는 작은 키고 여자치고는 큰 키인 내 키를 매우 좋아한다. 그렇게 20년에 걸친 탐구 끝에 이제야 나는 무언가에 젠더가 매겨져있다는 이유로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다.  

 디스포리아를 해소하고 자신을 찾아내는 것은 자신을 바라보기 위한 시도이다. 그리고 자신을 받아들이고 사랑하기 위한 시도이다. 그 방법은 천차만별이다. 그저 자신의 각종 신체 사이즈가 패싱되기 바라는 성별의 평균 사이즈와 괴리감이 적다는 사실을 알게 되거나, 나와 같은 사이즈의 사람이 실존한다는 사실, 그것도 많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만으로도 디스포리아가 덜어지기도 한다. 키가 큰 여자연예인이나 키가 작은 남자연예인을 보고 안도하기도 한다. 하지만 전반적인 특질이 더없이 밉고, 타인이 나를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서는 의료적 조치만큼 '편한' 것이 없다. 몇년이 걸리고 몇천만원이 들고, 가족에게 버림받는 작업이지만, 그것이 현재로선 가장 편하고 확실한 방법이다. 나 하나의 노력으로 단숨에 세상 전체의 인식을 바꾸고 사물과 행위에 매겨진 젠더를 재조정하며 젠더를 중심으로 뭉치는 사람들의 습성을 뒤엎을 수 없으니까. 이 시점에서 '만약 세상이 이렇게 구성되어있다면...'을 가정하는 일은 죽음이 도처에 깔려있는 트랜스젠더들에게는 너무도 힘들고 어려운 이야기가 되곤 한다. 의료적인 트랜지션, 그리고 사회적인 트랜지션 작업을 통해 마침내 트랜스젠더는 더이상 자신의 몸을 덜 미워해도 된다. 불을 켜고 샤워를 하고 거울을 볼 수 있다. 고작 거울을 보고 증오심이 차올라 몸을 뒤틀지 않아도 된다. 그렇게 어느정도의 트랜지션을 거치고 나면, 거기서부터 시작이다. 거기서부터 시스젠더들이 자신을 사랑하기 위해 하는 많은 작업들을 비로소 시작할 수 있다. 이제야 고작 출발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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