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만난 사이지만 인사도 없이 본론으로 들어가는 건, 영재다웠다. 문성그룹의 이영재는 겁이 없었고 배려도 없었다.

동주는 입을 달싹 거리다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 동주를 보자, 손에 들고 있던 서류들을 테이블에 내려 놓고, 손바닥으로 소파 옆자리를 탁탁 두드렸다.

자신의 옆으로 오라는 영재의 손짓에 동주는 그냥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이펀스코리아에 근무했었어. 몇개월."

무심한 듯 동주가 처음 말을 꺼내었다.

"뭐?!"

"지금 시위하는 사람들도 다 나처럼 일하다 아픈.."

말하려던 동주의 입을 막듯, 영재가 말을 앞서 했다.

"네가 아프다고?"

"...응"

약간의 인상을 쓰며 영재가 동주의 곁에 앉았다.

"왜 나한테 먼저 말 안 했어?! 이펀스코리아가 우리 하청인 거 몰랐어? 왜 얘길 안 해서 날 당황하게 하냐고!?"

"내가 이펀스에 다녀서 불만인 거야? 아니면 시위에 같이 참가해서 불만인 거야?"

영재가 동주를 노려보면서 물었다.

"진심이야? 장난해? 최실장에게 말해 둘 테니, 병원 가"

"하... 갔다 왔어. 어제."

"심각해?"

"나보다는 거기 박씨 아저씨랑.."

"그냥 입원해서 진료 받아."

전화기를 들고 버튼을 누르려던 영재의 손을 동주가 막았다.

"됐어. 진료 받을 필요 없어. 검사도 다 받았고, 따로 받은 약도 있고..."

"..."

동주는 영재가 간혹 자신을 불쌍한 듯 바라본다고 느꼈는데, 지금이 그랬다. 동주가 잡은 영재의 손은 늘 차가웠다. 계절과 상관없이. 놓으려던 동주의 손을 영재가 다시 잡았다.

"어떻게 지냈어?"

영재의 낮고 다정함이 묻어나는 말투가 느껴지자, 동주는 질끈 눈을 감았다 떴다.

"그냥 그렇지 뭐... 너는? 너는 잘 지냈어?"

"회사 바쁜 거 빼고는."

영재가 동주의 손을 놔줄 생각이 없는지 더 꽉 쥐고 있었다.

"더 마른 거 같다. 동주야."

동주를 살피며 영재가 말하자, 동주가 살짝 붉어진 얼굴로 영재를 보았다. 영재는 자신도 모르게 동주의 얼굴을 만지고 있다는 걸 느꼈다. 거칠어진 동주의 얼굴에서 왠지 모를 섹시함이 느껴졌다.

영재의 입술이 동주의 입술을 향하자, 동주가 이내 고개를 돌렸다.

"... "

"..."

조용한 순간이 찾아왔지만, 둘의 심장은 좀 전보다 더 빠르게 뛰었다. 공기는 그 뜨거움을 감당하지 못하는 듯 무겁게 느껴졌다. 그 순간을 먼저 깬 건 동주였다.

"내 인생... 함부로 휘젓지 마."

골치 아픈 일이 생긴 거처럼, 영재는 한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리고 약간 체념이 섞인 말투로 대답하였다.

"...그래. 미안해... "

영재의 말에 동주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답답함을 느낀 동주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화난 말투로 공기 중에 말을 쏟았다.

"그때... 미국에서 헤어지고 다시 만나지 말았어야 했어!"

영재도 지지않고 따라 일어나, 동주에게 따지듯 말하였다.

"오늘 회사로 온 건 너잖아! 너를 봤는데 내가 어떻게 모른 척을 해? 어?!"

"나도 안 가려고 했었어! 박씨 아저씨만 아니었다면. 그래서 너는 어쩔 건데? 이펀스 사람들 어떻게 할 건데?"

이펀스라는 말에 영재가 다시 소파에 앉았다.

"왜 얘기가 그쪽으로 튀어?"

"아무렇지 않아?"

"뭐가?"

"사람들이 그렇게 모여서 시위하는 거. 회사 갈 때마다 매일 보잖아."

소파에 등을 기대며 다리를 꼬고 앉은 영재는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투다.

"처음 있는 일도 아니고. 신경 안쓰였지. 네가 거기에 있는걸 몰랐을 때 까지는 말이야."

"해결... 할거지?"

"아니"

동주의 질문에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영재는 대답했다. 그의 의사는 왠지 확고해 보였다. 

"그럼 나 왜 보자고 한 건데?"

동주 또한 영재와 이펀스관련 이야기를 하기 위해 온 것은 아니었다. 단지, 이 만남에 아무런 명분이 없어서 물어본 거 뿐이었다. 둘의 만남에는 명확한 이유가 있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 만남에 이유는 하나이기 때문이었다.

"..."

하지만, 그 단 하나의 이유를 누구의 입에서도 나오지 않을 것이다. 쉽게 뱉을 수 없는 단어이고, 이미 10년 전에 끝났던 상황이었으니깐. 적어도 이성적인 판단에서는 말이다.

영재가 소파에 앉아서 동주를 올려다보고 있었고, 동주는 그런 영재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영재의 이마에 자리한 옅은 주름을 보자, 동주는 둘 사이에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고 느꼈다.

"할 말 없으면 나 갈게."

돌아서는 동주의 손을 잡은 영재에게 아쉬움이 묻어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최실장 붙여줄 테니까, 입원해. 진료받아."

"아까 얘기했잖아. 그럴 필요 없다고. 간다."

자신을 잡은 영재의 손을 뿌리치고 출입문 쪽으로 향하는 동주의 뒤를 영재가 뒤따랐다.

"동주야, 내가 이제부터 뭘 할 거 같아?"

뒤에서 들려오는 영재의 말에 동주가 걸음을 멈추고 문 앞에 서서 뒤돌아보았다. 센서등이 동주의 머리 위에서 빛을 냈다.

"무슨 말이야?"

"네가 이렇게 그냥 가버리면, 내가 어떻게 할 거 같냐고?"

서서히 자신 앞으로 걸어오는 영재를 응시하는 동주의 눈에는 약간의 체념이 드러났다.

"... 어떻게 해서든 병원에 입원 시키겠지."

동주의 대답에 영재가 약간의 쓴 웃음을 지어 보였다. 마주 보는 두 눈에는 10년이란 시간이 무색할 정도로 낯설지도 어색하지도 않았다.

그 둘은 그게 너무 무서웠는지도 모른다. 마치 그때 멈춰있던 시계가 지금 다시 움직이는 거처럼. 

"최실장 내일 집으로 보낼게. 그렇게 알아."

또 다시 영재로 인해, 동주의 삶이 움직여지기 시작했다. 벽에 기대어 자신을 지그시 바라보며 무덤덤하게 그러면서도 다정하게 말하는 영재의 입술이 달싹 거릴 때 마다 도망치고 싶으면서도 다가가고 싶은 동주였다.

10년을 어떻게 버텼던 걸까. 죽었다 생각하고 있었던 걸까. 아니다. 언젠가 다시 만날 거란 걸, 아니, 언제든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냥. 그 시기를 계속 서로가 미루고 있었을 뿐.

동주가 작별 인사를 하는 듯한 영재의 몸짓에 성큼 다가가 좀 전에 못다 한 키스를 나누었다. 자신보다 살짝 도톰한 영재의 입술이 부딪치듯 맞물려 거친 동주의 입술과 만났다.

감싸 안은 영재의 어깨는 동주 자신보다 좀 더 작았는데, 이 어깨가 그 큰 기업을 짊어지고 있다고 생각하니 말도 안 되게 강하게 느껴졌다. 숨을 참는 듯한 영재를 눈치챘는지, 동주가 물러났다.

영재가 늘 키스할 때 물에 빠진 사람처럼 숨을 참고 있다는 걸 동주는 알고 있었다.

"...나보고... 휘젓지 말라며?"

좀 전에 자신의 키스를 거절당한 영재가 동주를 놀리는 마음으로 묻자, 동주는 무심히 달달한 말을 던지고 문밖으로 도망치듯 나갔다.

"괜찮아... 내가 한 거니깐."


 방을 나와 호텔 복도까지 아무렇지 않게 걷던 동주는 갑자기 풀린 다리 때문에 한 손으로 벽을 짚어야 했다.

'너는 나의 약점이야.'

순간 예전에 영재가 자신에게 한 말이 생각났다. 동주는 쓴 웃음을 지었다. 내가 너의 약점이라면 너는 나의 ...


 늦은 밤이었다. 사가정역 가로등 불빛 아래에 서성이던 정기자는 가끔 고개를 들어 이리저리 동주가 올지도 모를 길을 살피고 있었다.

멀리 검은색 후드를 뒤집어쓰고 걸어오는 사람이 어쩌면 동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정기자는 주시하며 보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온 그에게서는 고기 탄 냄새가 났다. 대충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알 거 같았다.

"죄송해요. 오래 기다리셨어요...? 오늘 사장이랑 이야기 할게 있어서 좀 늦었네요."

시간을 보니 새벽 2시였다. 정기자는 별말 없이, 24시간 열려있는 햄버거 집으로 가자고 했다. 동주의 인터뷰가 흥미 있게 느껴진 게 분명했다.

"뭐 드실래요?"

"제가 늦었으니, 제가 살게요. 햄버거 드실래요?"

낯선 기계 앞에서 동주가 우물쭈물하고 있자, 정기자가 터치화면을 눌러 주문을 하였다. 테이블에 앉은 둘 중, 동주는 정기자의 눈치를 살피는 듯했다. 주머니에서 슬그머니 녹음기를 꺼낸 정기자는 멋쩍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원래 인터뷰할 때, 녹취는 해야 해서.."

"..네.."

노트북을 키자 화면에 불이 들어오면서 일본라멘이 스크린을 장식했다.

"라멘... 좋아하시나 봐요?"

처음으로 동주가 먼저 말을 걸었다. 그게 나름 분위기가 나쁘지 않은 상황이라고 느꼈는지, 정기자가 웃으며 답변하였다.

"네. 제가 또 라멘 매니아 입니다. 웬만한 서울 라멘집은 제가 다 알고 있죠~"

"아... 예전에 저 라멘집에서 잠깐 알바 했었는데.."

"오~ 그래요? 어디요?"

"합정역 근처에 '후지이라멘'이요."

눈을 열심히 굴리던 정기자는 뭔가를 알아챘다는 식으로,

"아! 거기 돈코츠라멘 유명했었죠? 대학생 때 자주 갔었던 거 같은데... 지금은 없어졌죠?"

"글쎄요... 저도 잠깐 일한 곳이라.."

노트북을 만지작 거리던 정기자는 인터뷰 준비가 끝났다는 제스처를 취하고는 녹음기의 녹음 버튼을 눌렀다.

"이펀스에 언제부터 근무하셨나요?"

"어떤 업무를 하셨죠?"

"업무와 관련해서 문제 되는 부분을 안내 받았나요?"

...등등... 통상적이고 의례적인 인터뷰였지만, 나름 동주는 열심히 답변하였다. 동주 또한 이 인터뷰가 처음은 아니었다. 

문제가 커지면서 몇몇 기자들이 인터뷰를 했지만, 더 큰 일들이 뉴스에 나오고는 했었다. 그래서 인터뷰에 큰 의미가 없다고 희망이 없다고 느낀 건 동주나 다른 동료들도 동일했으리라.

"이영재씨 어떻게 생각하세요?"

"네?"

불쑥 지금까지와 다른 이야기가 전개되는 거처럼, 생뚱맞았지만, 연관이 없는 건 아니었다.

"문성그룹 사장이니 당연히 싫어하시겠네요."

"..그런... 감정적인 질문을 왜 하세요?.."

"인터뷰 끝날 때 다른 분들께도 물어보고는 하는데. 불편하면 말씀 안 하셔도 돼요."

덤덤히 이야기하였지만, 정기자는 속으로 동주의 대답을 절실히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입에서 어떤 대답이 나올지... 숨죽이면서 말이다.

"... 싫다기 보다는... 상황이 안 좋은 거죠. 그리고 회사 일이고..."

"그래서, 이해 하신다?"

"네? 그런 말은 아니고요..."

약간의 당황스러움이 동주의 얼굴에 드러났다. 지금 정기자는 그런 동주의 당황스러움 너머의 무언가를 파고들고 있었다.

"회사적인 일이니, 그 사장 개인 입장과는 상관없이 회사 이익을 위해 그럴 수도 있었겠죠."

"... 그렇다는 게 아니라... 제 말은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중인지도 모르잖아요."

정기자는 뭔가를 잡았다는 표정이었는데, 동주는 그런 상황을 살피지는 못하였다.

"그쵸... 지금 이펀스랑 이야기 중일 수도 있고요. 그렇죠?"

"..."

정기자가 검지로 콧등에 걸쳐진 안경을 끌어 올리자, 동주는 정기자가 자신을 예의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 이만 늦어서 가봐야겠어요. 집에 동생이 기다리고 있어서."

동생이 집에 있는 건 맞지만, 자신을 기다릴 리는 없었다. 하지만, 우선 동주는 자리를 피할 생각이었다.

"집까지 바래다 드릴게요."

"제가... 여자에요? 바래다 주게."

일어서는 동주의 손목을 잡은 정기자는 손의 압력과는 다르게 얼굴은 웃고 있었다.

"물론 여자는 아니죠. 그냥 인터뷰가 아직 마무리가 안되었으니깐. 가는 길에 더 이야기 할까 했죠."

"제 생각보다 오래 걸리네요. 제가 더 할 얘기는 없을 거 같은데요."

동주가 자신을 잡은 정기자의 손을 보며 이야기하자, 정기자는 멋쩍게 손을 놓은 뒤 동주를 따랐다.

"그럼, 가는 길에 인터뷰 하는 거로 마무리하죠. 집이 여기서  멀어요?"

동주는 속으로 끈질기다 생각은 했지만,  이번이 마지막이란 반가움에 고개를 끄덕였다.


 차도를 지나 골목길을 거닐고 있었다. 약간의 어색함이 공존하면서 대화가 이어졌다.

"가족은 동생분뿐인가요?"

"..네. 형이 한명 있는데, 결혼해서 충주에 살고 있어요."

"아~"

정기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주의 말을 잘 듣고 있다는 식이었지만, 사실은 직접 물어 보고 싶은 말을 아끼고 있던 중이었다.

"기자님은... 왜 그렇게 이 일에 목을 매세요?"

"네? 그야... 누군가는 도와야 하고. 저는 사실을 밝히는 기자이고. 기자는.."

기자의 대답에 약간의 웃음기 있는 미소가 동주의 얼굴에 잠시 있다가 사라졌다.

"저희 이런 인터뷰 많이 했어요. 근데 겨우 몇줄의 인터넷 기사가 다였던 거 같아요."

"그래서 저한테 그렇게 까칠 하신 거에요?"

정기자의 말이 틀리지는 않아, 동주는 약간 머쓱해졌다.

"그런... 건..아니에요. 성격이 사교적인 편이 아니라서.."

처음으로 입꼬리를 올리는 동주의 모습에 정기자도 어느 정도는 마음을 놓았다. 하지만, 역시 정기자는 참지 못하고 불쑥 말을 꺼내버렸다.

"이영재 아시죠?"

"네...? 무슨..제가 문성그룹 사장을 어떻게 알겠어요?! 저는 이펀스 사장 얼굴도 본 적 없는데."

"그러니깐요. 저도 그게 의문이에요. 제 촉은 동주씨가 이영재사장과 아는 사이 같은데, 개연성이 없단 말이죠!"

"낮부터 정말... 그만하시죠. 억지 부리지 마세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로... 그딴 이야기를 쓰고 싶어서 저한테 인터뷰 신청하신 거라면 거절하겠습니다."

기분이 상한 듯한 동주는 서둘러 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닫힌 철문 앞에 정기자는 너무 일찍 다그친 자신을 탓했다.

"아씨... 진짜 아닌가...? 쳇"


 현관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와서야 한숨을 돌리며 문에 기댄 동주였다. 자신을 주시하는 듯한 정기자와 인터뷰 따위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박씨 아저씨도 있고 다른 동료들 때문에 거절만은 할 수 없었는데...

"그래... 이제 끝났으니깐."

"뭐가?"

자신을 이상하게 쳐다보고 있던 동생 동완이 캔콜라를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안 잤어? 늦은 시간까지 게임 하는 거야?"

"병신, 친한 척 하지 마"

동생을 뒤따라 동주는 방으로 들어갔다. 어두컴컴한 방 안은 동완이 켜 놓은 컴퓨터 모니터 화면만 눈부시게 빛을 뿜어 내고 있었다. 동주는 서둘러 형광등 스위치를 켰다.

"아씨.."

갑자기 밝아진 불빛에 인상을 찡그리는 동완이는 퉁퉁한 몸에 배 부분으로 윗옷이 살짝 올라가 있었고, 겨울 날씨에도 아래는 팬티만 걸치고 있었다.

컴퓨터 주변으로는 다먹은 컵라면 쓰레기와 과자 봉지, 부스러기가 흩어져 있었고 좀 전에 부엌에서 가지고 온 캔콜라를 단숨에 들이켰다.

"동완아 잠깐 이쪽으로 와봐"

"나 지금 게임 하는 거 안 보여?"

"보여, 중요한 얘기라서 그래."

"그냥 해. 이씨."

타자기를 두드리며 마우스를 움직이는 동완이는 동주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나, 병원에 입원할 거 같아"

"근데?"

타자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방안을 울렸고 동주는 모니터만 보고 있는 동완이를 바라보았다. 자신과 어느 부분이 닮은 걸까? 엄마는 왜 저런 아이를 나에게 남겨준 걸까?

무덤덤하게 받아드렸던 운명이 정말 자신의 것인지, 그게 맞는다면 부정하고 싶은 순간이었다. 가족을 부정할 수 있을까? 

왜 조금도 달라지지 않는 걸까. 이 모든 건 영재때문인 걸까.

동주는 순간이었지만, 자신이 영재를 원망한다고 생각하니 얼굴이 화끈거렸다. 자신의 나이 43세였다. 인생의 한탄을 누군가의 탓으로 원망할 나이는 아니었다. 그런 투정은 어릴 때나 할 수 있는 게 아닌가?!

"동완아, 나 병원에 들어가면 언제 퇴원할지 몰라. 가서 검사 받고 하다 보면.."

"알았어. 돈 주고가. 너 때문에 굶어 죽을 수는 없잖아."

동완이 자신을 보지 않는다는 걸 알았지만,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인 동주였다. 동완이는 모니터를 계속 주시하고 있었다.


 동주의 벨소리가 울렸다. 아침 9시 30분이었다. 동주는 웅크려 자고 있는 동완이에게 이불을 덮어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최실장의 전화였다. 뭘 갖고 입원해야 할지 몰라서 속옷만 가방에 넣고 집을 나왔다.

계단 아래쪽에는 최실장이 차에서 내려 담배를 피고 있었다. 동주도 알고 있었다. 최실장이 딱히 자기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가 영재 부인의 심복임을 모르는 게 아니니깐.

동주가 탄 차는 한강을 건너 문성병원으로 향하고 있었다. 창밖으로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옷을 여미는 사람들이 보였다. 오늘도 문성그룹 건물 앞에서 시위할 동료들을 생각하니 마음 한편이 불편했다. 이래저래 연관이 없는 게 아니니깐.

이런 저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동안 어느새 병실 앞까지 도착했다. 병원 호실 앞에는 'VIP' 밑에 '서동주'라고 표기되어있었다.

병실은 지금까지 자신이 입원했던 병실보다 2, 3배나 컸으며 침대에 간이 테이블과 소파까지있었다. 동주가 병실로 들어가자, 간호사가 뒤따라 들어와 환자복과 몇 가지 진료 안내를 알려주었다.

하루 종일 정밀검사를 받았다. 검사 결과는 2, 3일 뒤에 나오지만, 퇴원이란 말은 없었다. 동주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게 없어서 마냥 침대에 누워있었다.

문득문득 자신이 누리고 있는 이 호사가 영재의 덕이란 생각에 오묘한 감정이 들었다. 왜 불편할까.


드르륵

밤 9시쯤이었나. 병실 방문이 열리고 영재가 회사 업무를 마치고 온 사람처럼 정장 차림으로 나타났다. 문 열리는 소리에 동주가 누운 몸을 일으켰다. 입원한 이후로 정말 아픈 사람처럼 침대에 가만히 누워만 있었다.

"어쩐... 일이야?"

영재가 입원을 시켰지만, 자신을 찾아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동주는 반가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도 되었다.  그런 동주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영재는 겉옷을 벗어 소파에 걸쳐두고는 동주가 앉아있는 침대로 향했다. 

"안 심심해?"

가까이 동주 곁으로 다가온 영재의 손에는 책 한 권이 들려있었다.

"심심할 때 읽어봐, 내가 좋아하는 시인이야."

영재가 내민 책은 윤동주의 시집이었다. 자신과 같은 이름의 유명한 시인인 줄은 알았지만, 영재가 좋아하는 줄은 몰랐다. 하지만 왠지 자신의 얼굴이 붉어졌다. 

침대가 넓어도 더블은 아닌데, 동주의 침대로 영재가 파고들었다. 

"..뭐 하는 거야? 좁아."

"나 좀 피곤해. 조금만 누웠다 갈게."

어리광 아닌 어리광이 느껴지는 영재의 행동에 동주는 하는 수 없이 옆을 내주었다. 영재의 몸에서는 쿨한 향수 냄새가 났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흐트러짐 없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마치 9살 어린아이처럼 보였다.

정말 눈을 감고 잠이 들었는지 숨 쉬는 소리만 새근새근 들리자, 동주는 알 수 없는 괘씸함이 느껴졌다.

이마라도 콩 쥐어 박을 생각에서 자고 있는 영재를 찬찬히 보고 있는데, 자연스럽게 넘겨진 앞머리, 그 아래에 자리한 이마, 그리고 왼쪽 눈썹 근처에 아직도 있는 작은 흉터 자국을 만졌다.

영재가 반응하듯 눈을 떴다. 동주의 손끝은 천천히 영재의 콧등을 지나 자연스럽게 입술과 턱까지 훑었다.

"잠든 거 아니었어?"

나지막한 동주의 목소리에 영재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너를 두고 잠이 오니..."

영재의 말에 많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지만, 동주는 무뚝뚝한 답변만 했다.

"자..."

하지만 끌어당겨 영재를 안는 건 동주였다. 서로의 온기가 전해졌다. 모든 신경이 포개져 있는 옷깃 끝에 몰려있었다. 간질거리면서 두근거렸다.

이후 아무런 제스쳐도 없었지만, 둘은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영재는 동주의 인생을 또 다시 휘젓을 까 두려웠고, 동주는 영재가 자신으로 인해서 곤란해질까 두려웠다.

지금 여기가 서로가 갈 수 있는 한계지점이라면, 그렇다 해도 충분히 행복하다고 느꼈다. 오랜만에 가까이에서 듣는 서로의 숨소리에 템포를 맞추는 자연스러움과 코끝에서 느껴지는 서로의 익숙한 살냄새.


그대로 잠들었는지, 아침이 되어서야 눈이 떠진 동주는 어느새 사라져버린 영재의 부재에 한없이 그리움이 쌓이는 거 같았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침대에 걸터 서서 창문의 밖 풍경을 보고 있는데, 어제 영재가 두고 간 윤동주의 시집이 떠올랐다. 첫 장부터 천천히 읽어 가고 있는데,

드르륵

의사의 회진인가 해서 문 쪽을 본 동주는 적지 않게 당황하였다. 정기자가 문 앞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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