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눈앞의 으리으리한 저택을 올려다보며 순수한 의문에 사로잡혔다. 도대체 어쩌다 일이 이 지경까지 왔담? 아니, 내가 한 짓이 맞긴 한데, 당최 어떤 과정을 거쳐 지금과 같은 결론을 맺게 되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시몬의 손에 이끌려 저택으로 발을 들이면서도 얼떨떨했다. 드물게도 기분이 고조된 시몬은 흥분을 미처 감추지 못한 채 내 손을 잡고 거침없이 저택을 누볐다.

이 방은 침실로 꾸미고, 이 방엔 운동기구를 두고, 이 방에서는 차를 마시고…… 방대한 저택의 크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소꿉장난 같은 계획을 들어가며 들른 방만 여덟 칸에 이르렀다. 심지어 다른 방은 미처 둘러보지도 못하고 지하로 내려갔는데, 지하에는 홈 시어터와 수영장이 있었다. 야외에는 기가 막히게도 또 수영장이 있었고, 테니스 코트, 농구 코트, 심지어는 온실까지 있었고, 호화찬란한 트리 하우스까지 마련되어 있었다.

시몬이 저 너머 지평선에 펼쳐진 아름다운 라벤더 밭이 고스란히 내다보이는 온수욕조를 보여주었을 때, 비로소 이 모든 사건의 발단이 떠올랐다.

질문 하나 때문이었다.

어떤 질문이었는고 하면, 양말의 값을 묻는 평범하기 짝이 없는 질문이었다.


***


“이건 뭐야?”

퇴근하고 돌아왔을 때였다. 빨래를 개는 시몬을 발견하고 무심코 질문을 던졌다. 시몬의 발치에 양말 한 무더기가 쌓여 있었다. 그는 소파 한 쪽에 세탁을 마친 옷가지를 쌓아두고 차곡차곡 개켰는데, 이따금 양말을 발견하면 유심히 살피다 발치에 툭툭 떨어뜨리곤 했던 것이다. 시몬은 부지런히 손을 놀리며 대답했다.

“전부 구멍 난 거야.”

“아.”

구멍 난 양말만 다섯 켤레였다. 물론 전부 내 것이었다. 시몬 옆에 털썩 앉아 양말을 집어 들고 살폈다. 전부 축구 때문이었다. 축구를 할 때 운동화를 신었더니 금세 구멍이 나버렸던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다섯 켤레는 좀 심하지. 당장 내일 신을 양말도 없을 판이었다. 나는 무심코 중얼거렸다.

“양말 좀 사야겠다.”

“응. 사둘게.” 시몬이 재빨리 대답했다.

“됐어. 내일 퇴근하면서 사올 테니까.”

“아냐. 당신 양말 늘 사던 데서 사서.”

“어딘데? 내가 가서 사오면 되지.”

“좀 멀어.”

“어딘데?”

“5번가.”

“5번가?”

시몬 말대로 5번가는 멀었다. 우리가 사는 한적한 외곽과 달리 명품 숍이 즐비한 5번가는 도심지 한가운데에 있었던 것이다. 특히 5번가는 명품 숍만큼이나 살인적인 물가로 유명했다. 우리 동네에서는 0.3달러짜리 물이 그 동네로 가면 3달러로 둔갑한다거나, 커피 값만 해도 서너 배로 펄쩍 뛰는 터무니없는 일이 흔히 벌어졌다. 때문에 내가 던진 질문은 순전히 농담에 가까웠다.

“양말 하나 사자고 거기까지 가? 한 켤레에 100달러는 하는 거 아냐?”

“259달러.”(*한화 30만원)

시몬이 부지런히 빨래를 개면서 대답했다. 순간 잘못 들은 줄 알고 되물었다. “어?”

시몬도 되물었다. “응?”

“아니…… 뭐? 얼마라고?”

“이백오십……”

고분고분 대답하던 시몬이 불현듯 입을 다물었다. 내 표정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턱이 빠질 것 같은 얼굴로 시몬을 쳐다보고 있었다. 뭐라고? 얼마라고? 동네 아저씨들이랑 축구나 하다가 구멍 낸 양말이 얼마짜리였다고? 얌전히 빨래를 개던 시몬이 눈을 피했다.

“259달러?”

“…….”

“양말 한 켤레에 259달러라고?”

“…….”

시몬은 눈을 굴려 눈치를 쓱 보고는 침묵을 고수했다. 그러면서도 손은 꿈질꿈질 빨래를 개며 부지런을 떨었다.

지금 저 조그만 머리통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손바닥 보듯 훤히 들여다보이는 것 같았다. 무슨 잘못을 한 걸까, 뭐가 잘못된 대답이었을까, 짧은 대화를 곰곰이 복기하며 소용돌이치는 불안에 휩쓸려가기 일보 직전이리라. 당연하게도 시몬이 잘못한 건 없었다. 그는 묻는 말에 대답했을 뿐이다. 단지 그 대답이 내 상상을 초월했을 뿐이지.

우리가 무슨 얘길 떠들어대든 제롬은 소파에 드러누운 채 아이패드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출근할 때도 저러고 있었는데 퇴근해서도 똑같은 자리에 똑같은 자세로 드러누워 있었다. 게으른 고양이처럼 꼼짝도 않는 그에게 양말을 던졌다. 제롬은 가슴팍에 떨어진 양말을 흘끔 보더니 다시 액정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는 양말을 하나 더 던졌다.

“들었어? 얼마짜리 양말인지?”

제롬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얄밉도록 태평한 얼굴로 또 한 번 양말을 던졌다. 제롬은 쳐다보지도 않고 피했다.

“너도 알고 있었어?”

고개만 꺾어 양말을 피한 제롬이 그 자세 그대로 대꾸했다.

“아니.”

“근데 놀라지도 않아?”

“놀랐어.”

“그게 놀란 얼굴이야?”

“네가 놀랐다는 데 놀랐어.” 제롬이 액정을 건드리며 대꾸했다. “네 계좌에 처박아둔 돈을 감안하면 2500달러짜리 양말을 신는다고 해도 놀랍지 않으니까. 네 재산이 얼마나 되는 줄은 알지?”

모른다.

대답하는 대신 눈을 끔뻑거렸다. 제롬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더 묻지도 않았다. 그는 여전히 아이패드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내게는 한 번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하시기에 내 얼굴도 안 쳐다보나 했더니 틀린 그림 찾기를 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내 기록을 깨기 일보직전이었다. 액정을 마구잡이로 건드려 강제로 게임오버를 시켰다. 삐져서 돌아누운 제롬은 내버려두고 시몬에게로 돌아갔다.

잠시 추궁에서 벗어난 동안 시몬은 남은 양말을 모두 개켜 저 멀리 치워놓은 뒤였다. 이제 그는 작업할 때 주로 입는 청바지를 개키고 있었다. 얼룩덜룩하게 기름 자국이 남고 심지어는 찢어지기도 했지만 그만큼 길이 들어 잘 입고 다니는 옷이었다. 나는 바지와 시몬을 번갈아가며 보았다. 시몬은 눈치 챘으면서도 모르는 척 빨래 개기에 전념했다.

“청바지는 얼마야?”

“…….”

“설마 몇 백 달러씩 하진 않겠지?”

조심스럽게 묻자 시몬이 얼른 고개를 가로저었다. 귀한 바지가 아니라 다행이다마는, 그렇다면 바지보다 비싼 양말을 신고 다닌 셈이 되어 착잡하긴 마찬가지였다. 259달러짜리 양말은 내가 생각하는 사치의 범위, 아니, 상식 수준을 훌쩍 뛰어넘는 물건이라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그때 삐져서 돌아누운 제롬이 한마디 던졌다.

“몇 백 달러가 아니라 몇 천 달러쯤 하겠지.”

그게 사실이냐고 묻기도 전에 시몬은 빨랫감을 들고 후다닥 일어났다. 도망치듯이 잰걸음으로 거실을 빠져나가는 그의 뒤통수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래도 그렇지 설마 바지 한 벌에, 고작 청바지 한 벌에, 그것도 내가 작업할 때 막 입는 바지 한 벌에 몇 천 달러……를 쓸 것 같았다. 양말에 몇 백을 쓰는 녀석이라면 그럴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벌떡 일어났다.

우리 집은 근교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2층짜리 주택이었다. 1층에는 거실과 주방, 욕실, 손님용 방 한 칸이 있고, 2층에는 침실과 욕실, 서재가 다였고, 조그만 다락방은 창고로만 사용했다. 정원이 달리긴 했지만 정원이라고 해 봐야 나무 한두 그루 심고 화단 하나 가꾸면 전부인 작은 공간뿐이었다. 잔디 심을 자리도 없었다. 차고는 자동차 한 대를 넣으면 끝이었다. 자전거 두 대 정도는 어찌어찌 끼어 넣지만 세 대는 어림도 없다. 덕분에 내 자전거는 항상 현관 안쪽에 들여놓았다.

공항도 없는 작은 도시에서 이 정도 집은 평범한 수준이었다. 이런 집에 살면서 몇 백 달러짜리 양말을 신고, 몇 천 달러짜리 청바지를 입는다니, 말이 안 되는 건 둘째고 아예 믿기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건 그냥 평범한 양말이고 평범한 청바지였으니까. 내가 평소에 아무 가게에나 들어가서 사는 20달러짜리 청바지랑 별 차이 없었으니까!

시몬을 놓치고 거실에 우뚝 선 나는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갑자기 집 안의 모든 물건이 의심스러워졌던 것이다. 겉으로는 평범하기 짝이 없는 집이지만, 사실 이 집 안의 물건들은 집보다 값비싸지는 않은지…… 제법 그럴듯한 가설이 떠올랐다.

시몬을 뒤쫓아 2층으로 올라가면서도 내가 신은 슬리퍼조차 의심스러워졌다. 수상했다. 어쩌면 이 슬리퍼도 몇 십…… 아니, 몇 백 달러쯤 하지는 않을까? ……흠, 설마. 하지만……. 의심에 사로잡혀 올라가자 시몬은 옷장 앞에 꿇어앉아 내 양말을 착착 줄지어 진열하는 중이었다.

“설마 그 안에 든 양말들이 전부 259달러는 아니겠지?”

“아니야.” 시몬이 망설이며 대답했다.

“258달러라거나, 260달러라거나 하는 근소한 차이는 인정하지 않아.”

“…….”

시몬은 대단히 어색한 태도로 정리정돈에 몰두하는 척했다. 서랍을 열고 청바지를 넣는 그에게 다시 물었다.

“진짜야? 수천 달러…….”

“…….”

“천 달러가 넘는 옷이야?”

그 질문이 천근만근 무겁기라도 한지 시몬은 한참 뜸을 들인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까지 값이 나간다니까 솔직히 실감나지도 않았다. 나는 한때 꽤 오랫동안 집도 절도 없이 남의 집에 얹혀살며 그날 벌어 그날 먹고사는 생활을 지속했던 것이다.

시몬 옆에 쪼그리고 앉아 함께 서랍을 들여다보았다. 나는 옷에 관심이 없어서 가진 옷이 많지 않았고, 그나마도 매번 시몬이 사오는 것만 입어 언젠가부터 옷에 완전히 무관심해졌었다. 너덧 벌쯤 착착 개놓은 청바지를 하나씩 쿡쿡 찌르며 물었다.

“얘도 천 달러 넘어?”

끄덕.

“얘도?”

끄덕.

“이것도?”

“그건 아니야.” 시몬이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건 지난번에 당신이 사온 옷이라.”

“아, 그러네. 그럼 이건?”

“…….”

그러니까 이 서랍에 든 옷의 가격을 합하면 자동차 한 대는 살 수 있다는 뜻이었다.

“…….”

잠시……

잠깐만.

혼란스러웠다. 

머리가 아픈 것 같기도. 아니. 머리가 아플 것까진 없지. 그렇지만 이게 말이 되나……? 세상에 천 달러가 넘는 청바지가 존재했단 말이야? 존재하다 못해 내가 그런 옷을 입고 다녔다고…… 뿐만 아니라 작업복으로 입으면서 구멍을 내고 기름때로 물들이기까지…… 새삼스러운 감정으로 조심스럽게 청바지를 만져보았다. 별 생각 없이 입고 함부로 다루었던 청바지가 한순간에 귀하신 몸으로 바뀌었다.

삶이 안정되기 전까지, 정확히 말해 시몬과 제롬을 받아들이기 전까지 내 생활은 근검절약이 당연했다. 약간 구두쇠였을지도 모르겠다. 어쩔 수 없었다. 나는 항상 돈이 부족했다. 군에 있을 때는 돈을 꽤 많이 모았다. 하지만 제대 이후 조금씩 까먹었다. 맷에게 거하게 털린 적도 있고, 무엇보다 영국으로 넘어간 뒤 <클럽>을 추적할 때 대부분 탕진했다. 그 뒤로는 일용직으로 일하면서 근근이 입에 풀칠을 하며 살아왔으니 돈이 아쉽고 귀한 거야 당연했다. 세상에 천 달러가 넘는 청바지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이런 얘기다.

줄리아가 거액의 유산을 물려주기는 했다. 그러기는 했다마는 그 정도 되는 재산을 관리할 깜냥이 있을 리 없었다. 당장 세금도 어떻게 내야 하는지 모르는 처지에 과분하다 못해 감당 못할 돈이었다. 그러나 그 돈을 어떻게 쓰느냐는 둘째고, 쓰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았다. 시몬에게 관리를 맡긴 뒤론 뭐가 어떻게 되었는지 물어보지도 않았다.

어차피 필요한 돈은 시몬에게 얻어 썼다. 생활 전반에 필요한 자질구레한 비용은 시몬이 알아서 처리했다. 어디에 어떻게 돈이 들어가고 나가는지 일절 관심도 두지 않았다. 한마디로 시몬의 소비 습관이 어떤지에 지금 이 순간 처음으로 알게 된 것이다.

충격적이었다.

“무슨 놈의 청바지가…….”

순간 머리를 스치는 생각에 스스로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운동복 바지에 후드를 입고 있었다. 바지는 나이키 로고가 떡하니 붙어 있었다. 후드는…… 그 자리에 옷을 벗어 상표를 찾아냈다. 다행히 후드에도 나이키 택이 붙어 있었다. 이 정도면 가격을 짐작할 수 있는 옷이었다. 그때 문득 슬리퍼가 다시금 눈에 들어왔다. 설마 싶지만……

“이건 얼마야?” 슬리퍼를 가리키자 시몬이 티 나게 눈을 돌렸다.

“왜? 얼만데? 안 놀랄 테니까 말해 봐.”

백 퍼센트 놀랄 것 같았지만 일단 말은 그렇게 해보았다.

“어? 궁금해. 말해보라니까.”

“……기억 안 나는데.”

눈을 굴리던 시몬이 우물쭈물 대답했다. 어디서 씨알도 안 먹힐 거짓말을…… 하는 소리가 목구멍까지 올라왔으나 도로 삼켰다. 그러고 보니 시몬의 표정이 심상찮았다. 죽을죄를 짓고 벌을 기다리는 죄수처럼 무거웠다. 아니, 놀랐을 뿐이지 별로 심각한 문제는 아닌데.

“왜 그렇게 바가지 긁히는 표정이야. 화내는 거 아냐.”

“……미안.”

“거참, 화내는 거 아니라니까.”

“……당신 돈은 한 푼도 안 썼고. 잘 보관하고 있어.”

아니…… 내 돈 안 쓴다고 하면 그건 그거대로 미안한데. 대답이 늦어지자 시몬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얼른 “그래, 그래.” 하고 달래줬더니 약간 용기를 얻은 듯 녀석의 얼굴이 비교적 밝아졌다. 말 한마디에 기분이 손바닥 뒤집듯 바뀐 시몬은 열심히 눈치를 살피더니 입을 열었다.

“그……리고.”

계속 말해보라고 턱을 까딱였다. 녀석은 옷장 정리를 하면서 속으로는 열심히 변명거리를 생각해 두기라도 한 듯,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차분하게 궤변을 늘어놓았다.

“당신은 예전에 군대에서 발을 많이 혹사시켰으니까…… 앞으로 잘 관리할 필요성이 있어. 발이 상하면 아무것도 못하잖아. 돌아다니지도 못하고, 그리고…… 더더군다나 당신은 매일 자전거 타고 출퇴근하는데. 특별히 관리 받지도 않으니까 신발이나 양말은 좋은 걸 신어야 해. 발만 신경 써도 컨디션이 훨씬 나아져.”

복무할 때 발을 혹사시킨 건 사실이지만 그게 도대체 언제적 일이며, 내 발이 하는 일이라고는 좀 걷는 것뿐인데 무슨 관리씩이나 할 필요가 있으며, 만일 발이 아프더라도 며칠 쉬면 되는 문제가 아닌가…… 싶긴 했으나, 필사적으로 변명을 하는 시몬이 무척 귀여웠으므로 잠자코 들었다. 말하다보니 흥분한 건지, 좀 더 용기가 난 건지, 시몬이 드물게도 다소 빠른 어조로 말을 이었다.

“바지는, 일하면서 움직일 때 편안해야 하니까, 일하는 것만으로도 힘든데 옷이라도 편한 걸 입어야할 것 같아서 그랬어. 불편한 옷 입고 일하는 것보다는 조금 값이 나가더라도 좋은 옷 입고 편하게 하는 게 맞는 거잖아. 그리고 당신이 나가서 고생하는데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이런 것밖에 없고…….”

솔직히 말해서 한 벌에 100달러하는 바지나 1000달러하는 바지나 나로서는 그 차이를 잘 알지 못하지만, 시몬이 제 나름의 논리를 열심히 펼치니 그냥 고개를 끄덕여 맞장구를 쳐주었다. 뿐만 아니라 자전거 정비 해봐야 그까짓 게 몇 푼이나 된다고, 그 일 하는데 몇 천 달러짜리 청바지를 더럽히는 건 아무래도 배보다 배꼽이지 않은가 싶기도 했으나…… 시몬이 눈에 띄게 안심한 빛으로 좋아하는 걸 보니 왠지 미안해지기까지 했다.

양말이나 바지가 값비싼 물건이라고 별로 화내거나 따진 건 아니다. 그냥 좀 놀라고 신기했던 것뿐이지. ……좀 많이, 엄청나게 놀랐던 것뿐이지.

아무튼 안심하는 녀석을 보니 괜히 안쓰럽고 미안해져서 맞장구를 쳤다.

“잘했네. 네 말이 맞아.”

좀 부족한 것 같아 덧붙였다.

“고마워.”

그래도 부족한 것 같은데, 딱히 할 말이 없어서 그냥 키스를 했다. 뺨에 짧게 키스하고 보니 좀 싱거운가 싶어 입술에 한 번 더 키스했다. 시몬은 잠자코 키스를 받고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화 안 났어?”

“안 났다니까. 그냥 좀…… 신기해서 그런 거야.”

“…….”

“난 이런 거 잘 모르니까.” 양말 사는 법을 모른다는 게 아니라 259달러짜리 양말 사는 법을 모르는 것이다마는.

“…….”

“네 얘기 듣고 보니까 맞…… 맞는 말 같아.”

사실은 전혀 설득되지 않았으나 그런 척 고개를 끄덕였다. 시몬은 귀 끄트머리가 붉어진 채 몸을 일으켰다. 옷장 문을 닫고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는 그의 뒷모습을 착잡하게 지켜보았다.

물론 시몬이 부유하다는 사실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귀족 집안 출신이라는 점은 일단 차치해두고서라도 시몬은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아는 유명한 배우였다. 그간 벌어들인 돈이 모르긴 몰라도 제법 막대할 것이다. 게다가 부자들 속셈이야 잘 모르겠다마는 예전에 듣기로는(제롬에게 들었다) 시몬은 돈 되는 거라면 다 하고 다닌다고 했었다. 아마 어련히 잘 벌겠거니 생각은 했다. 내가 보기에는 집에서 살림만 하는 것 같은데 가끔 밖으로 나돌아 다닌다니(역시 제롬에게 들었다) 이런저런 일을 하기는 하는 모양이니까.

나는 돈 버는 법도, 쓰는 법도 모른다지만 시몬에게는 양쪽 다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얘는 섬도 하나 갖고 있었다. 하지만 얼마짜린지 실감도 안 나는 섬보다, 259달러짜리 구멍 난 양말이 훨씬 피부에 닿았다.

“그래서 이 슬리퍼는 얼마라고?”

“800달러.”

방심한 시몬이 무심코 대답했다. 실수를 깨달은 녀석이 커튼을 묶다말고 얼어붙었다.

이 평범한 슬리퍼가 파, 팔백…… 팔백…… 아무리 소일거리라도 자전거 정비소에서 일하는 내 2주치 봉급에 버금가는 금액이었다. 입을 떡 벌리고 슬리퍼를 내려다보다 문득 고개를 들었다. 시몬이 다시 죄 지은 표정으로 돌아가 있었다. 얼른 아무렇지도 않은 척 말했다.

“그, 그렇군. 그 정도야 뭐. 나도.”

나도 뭐.

내가 뭐.

내가 경제를 알아 살림을 알아 뭘 알아.

슬리퍼에 자석이라도 붙은 것처럼 시선이 내려갔다. 쥐색 슬리퍼는 푹신푹신하고 가볍긴 했지만 다른 슬리퍼와 특별히 달라 보이지도 않았다. 끄트머리에는 보풀도 약간 일어나 있었다. 신기하다고 해야 할지, 당황스럽다고 해야 할지, 나도 내 기분을 설명할 수 없었다.

“또…… 뭐가 있어?”

시몬은 풀죽은 얼굴로 눈만 끔벅거렸다. 그러니까, 이렇게 입이 딱 벌어지도록 비싼 게 또 뭐가 있냐는 그런 질문이었는데, 이걸 입 밖으로 어떻게 꺼내면 좋을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곰곰이 생각하다가 그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가자.”

“……어딜?”

“빨리.”

의아해 하면서도 시몬은 순순히 손목을 붙잡혀 따라왔다. 나는 그를 뒤에 달고 온 집안을 한 바퀴 빙 돌며 짚이는 물건마다 가리키며 값을 물었다. 그리고 조금 전의 신빙성 높은 추측이 진실로 드러나는 모습을 경악하며 지켜보았다. 그렇다. 집 안의 물건들이 집보다 값비싼 것이 아닌가하는…… 제법 그럴듯한 가설은 그냥 진실이었다.

물론 만점짜리 주부인 시몬이라고 해도 모든 물건의 가격을 기억하지는 못했다. 기가 막히게 잘 기억하는 물건은 따로 있었는데, 그 목록은 다음과 같다: 침구, 식기, 욕실 용품 등.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텔레비전이나 냉장고 따위의 값비싼 전자제품은 어렴풋한 가격대조차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면서, 베개는 물어보자마자 대답이 튀어나왔다. 척 보기에도 값비싼 티가 나는 조명은 가격을 어림잡지도 못하면서 내가 사용하는 포크는 크기별로 용도별로 얼마짜린지 척척 나왔다. 벽에 걸린 시계는 언제 샀는지, 본인이 사기는 했는지 기억도 못했으나 샴푸는 어디서 언제 얼마를 주고 구입했는지 상세하게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 식으로 집을 한 바퀴 빙 돌고나면 아무리 둔한 사람이라도 알아차릴 것이다. 시몬은 내가 사용하는 물건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최고급품만 취급했다. 베고 자는 베개나 목욕가운 따위 말이다. 입에 들어가는 식기는 그렇더라도 몸을 씻는 욕실 용품들은 소모품인데도 하나같이 입이 딱 벌어지는 값비싼 물건뿐이었다. 반면에 내 손이 직접 닿지 않는 물건들은 관심도 없었다. 심지어 직접 구입하지도 않는 듯, “우리 집에 그런 게 있었네…….” 하고 무관심한 대꾸만 돌려주었다.

이쯤 되면 소비에 대한 가치관 차이라는 최초의 문제제기에서 한참 벗어나버린다. 침대에 들인 값을 알게 되었을 때는 귀를 의심했다. 10만 달러는 내가 근무하는 작은 자전거 정비소를 통째로 사들일 수 있는 거액이었다. 놀라고, 또 놀라는 내 반응에 어느덧 익숙해진 시몬은 침대 판매원이라도 된 것처럼 차분하게 설득을 시도했다.

“침대는 중요해.” 그가 단조롭기까지 한 침착한 태도로 설명했다. “편안한 환경에서 숙면을 취하는 것보다 중요한 일은 없으니까. 적절히 피로를 해소하지 못하면 다음 날 생활에 지장이 생기고, 그런 날이 반복되다간 결국 큰 병을 얻을 수도 있…….”

잠자코 듣던 나는 점점 샛길로 빠지는 설명에 괴짜 판매원을 덮쳐 입을 막았다. 내가 깔아뭉개는 대로 침대에 털썩 드러누운 시몬이 입을 틀어 막힌 채 눈을 끔벅거렸다. 영문을 모른 채 깜박거리는 커다란 검은 두 눈은 귀여웠고, 영문도 모르면서 깔아뭉개졌다고 다짜고짜 아랫도리가 딱딱해진 하반신 사정은 우스웠다. 나는 그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침대가 별로라고 해서 큰 병에 걸리는 사람은 없어.”

“…….”

시몬은 항변하고 싶은 듯했다.

“정말이야. 내가 보장해. 군대에 있을 때 허구한 날 흙바닥에서 꼬부리고 자도 멀쩡했거든.”

“…….”

“혹시 내가 아플까 봐…… 아니,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길까 봐 그렇게 전전긍긍하지 말란 뜻이야. 값싼 포크를 쓴다고 음식 맛이 떨어지는 건 아니잖아?”

“…….”

시몬은 전혀 납득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그는 대답하는 대신 입을 막은 손을 치우고 내게 키스했다. 보통 사람들보다 체온이 높은 입술에 나도 덩달아 열이 오르는 듯했다. 바짝 맞닿은 하체 때문에 딱딱해진 아랫도리가 여실히 느껴졌다.

“아무리 값비싼 걸 가져와도.” 나직한 목소리와 함께 더운 숨이 입술에 닿았다. “당신이 쓰기에는 모자라고 초라한 것들뿐이야.”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얼굴이 벌게져서 그저 말문이 막혔다. 그 사이 시몬이 무뚝뚝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당신 손에는 좋은 것만 닿게 하고 싶어. 당신이 쓰는 건 뭐든지 가장 귀한 것이었으면 좋겠어. 당신에게는 그런 것들만 어울려.”

“……알았어.”

“이사 가고 싶어.”

“그래, 알았으니까…… 뭐?”

순간 하려던 말을 잊고 멍하니 시몬을 내려다보았다. 시몬은 특유의 아무 생각 없는 뻔뻔한 얼굴로 완고하게 선언했다.

“당신에게 어울리는 집을 주고 싶어.”

나와 어울리는 집…….

구멍 나면 버리는 양말 한 켤레에 300달러를 쓰고, 순전히 나와 도피할 생각만으로 섬 하나를 통째로 구입한 녀석이었다. 내게 어울리는 집이랍시고 어디서 성 한 채를 구해올지도 몰랐다. 나를 사랑하는 마음은 알겠다마는 그건 아니었다. 난 성에 살기 싫었다. 돈이 없는 것보다야 있는 게 훨씬 낫지만, 그래도 성은 싫었다. 나는 진지한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솔직히 말할게.”

순간 시몬은 억장이 무너지는 얼굴이라 황급히 말을 이어야 했다.

“259달러짜리 양말, 그래. 괜찮아. 10만 달러짜리 침대……는 좀 심했지만, 어쨌거나, 나는…… 이렇게 값비싼 물건에 익숙하지 않아.”

“……당신에게는.”

“초라한 물건이라고, 알겠어.”

그렇게 생각하는 건 너뿐이겠지만……. 그러나 반론했다간 반나절 동안 논쟁해야할 것 같았으므로, 재빨리 말을 돌렸다.

“하지만 시간이 필요해. 솔직해지자면 그래. 259달러짜리 양말을 신으면 한 걸음 걷기도 조심스러울 것 같은데.”

“…….”

“네가 무슨 생각인지는 알겠지만, 아무튼 이사까지는 좀……”

시몬은 눈에 띄게 어두워진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가여웠지만, 가엽다고 200년 묵은 고성으로 이사할 생각은 없었다.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며 가능한 한 자상하게 말했다.

“지금 사는 동네도 좋고, 직장도 여기 있고, 이 집도 나쁘지 않잖아. 이사는 천천히 생각해 보자고. 어때?”

묵묵히 침대만 내려다보며 그는 고집스럽게 대답하지 않았다.

“이 집도 나쁘지 않잖아. 난 아늑하고 마음에 들어. 당신은 안 그래?”

“마음에 들어.”

전혀 마음에 안 드는 눈초리로 시몬이 순순히 대답했다. 나는 마음의 소리는 모른 척했다.

“그럼 여기서 좀 더 살아보자.”

마침내 그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서운한 것처럼 고개를 떨어뜨리기에 양손으로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어뜨렸다.

그리하여, 어떻게든 무마하긴 했으나 솔직히 마음에 걸리는 것도 사실이었다. 다른 무엇보다도 시몬에게는 이 집이 불편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지금껏 의식한 적이 없어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만, 사실 시몬은 일평생 부유하고 풍요로운 환경에서 생활했다. 시몬은 평생 0.3달러짜리 물은 입에도 댄 적 없었을 것이다. 휴지 한 장조차도 고급품을 사용했을 그에게 어쩌면 지금 이 집은 말도 못하게 불편할 지도 몰랐다.

시몬이 이사를 가자고 제안한 뒤로 일주일이 흘렀으나 나는 아직도 생각에 잠겨 있었다. 사실 시몬이 원하는 방식대로 살아도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내가 생각하는 건 시몬이었다. 그동안 그 작은 집에서 생활하며 얼마나 불편했을지부터 시작해, 손에 물 한 방울 묻힌 적 없는 애가 어쩌다 갖은 집안일에 저토록 익숙해졌는지, 이런저런 상념에 빠져 일을 하다가도 넋을 잃기 일쑤였다. 그렇지만 몇 천 달러짜리 청바지는 기름으로부터 열심히 사수했다. 그조차도 며칠 지나니 무던해져 기름이 묻거나 말거나 신경 쓰지 않게 되었으나, 한편으로는 바지에 남은 검은 얼룩을 보며 괜히 울적해지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저녁이었다. 퇴근 시간이 되어 자전거를 끌고 나오다가 가게 앞 골목에서 생각지 못한 인물과 맞닥뜨렸다. 애인들 중 한 사람이었다. 제롬이 옆구리에 빨래바구니를 끼고 쪼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웬일이야?” 빨래바구니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이건 뭐고?”

“마중 나왔지. 빨래도 해야 하고 겸사겸사.”

“빨래? 웬 빨래? 왜 집에서 안 하고?”

말하고 보니, 제롬과 시몬은 설사 세탁기라도 공유하고 싶어 하지 않을 것 같았다. 제롬은 담뱃불을 비벼 끄고 기지개를 쭉 폈다. 그는 장난꾸러기처럼 동전을 튕겼다.

“동전이 남아서.”

어쨌거나 뜻밖의 만남에 기분이 좋아졌다. 말없이 그의 빨래바구니를 들어 자전거에 매달았다. 우리는 나란히 걸었다. 제롬은 주머니 속의 동전을 짤랑거리며 시답잖은 수다를 떨었다. 내가 읽으려고 사둔 통속소설을 먼저 읽어치우고는 줄거리와 결말을 마음대로 이야기했다. 실컷 저 좋을 대로 떠들어놓고 결론은 “세상에는 그보다 수준 높은 작품이 많아.” 라는 건방진 조언이었다. 적당히 대꾸해 주면서 나란히 세탁소로 향했다.

세탁소에서는 특유의 다림질 냄새 같은 것이 났다. 가스건조기에서 젖은 세탁물이 마르며 나는 냄새였다. 몇 사람이 플라스틱 의자에 옹기종기 앉아 휴대폰을 들여다보거나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제롬은 퍽 익숙한 손길로 세탁기를 작동시켰다. 섬유유연제를 뚜껑에 표시된 점선에 따라 신중하게 넣는 모습을 구경하다가 킥킥거리고 웃으니 제롬도 따라 웃었다. 기계에 동전을 짤랑거리며 넣자 마침내 세탁기가 웅웅 기계음을 냈다.

“익숙한 솜씬데.”

“일상이지.”

나는 농담이었지만 제롬은 진담으로 받아쳤다. 우리는 세탁소를 나와 공공쓰레기통 옆에 서서 담배를 한 대씩 피워 물었다. 제롬의 진담에 나는 지난 며칠 간 하던 고민이 문득 되살아났다. 제롬에게도 우리 집이 편안할까 하는 그다지 영양가 없는 고민이었다.

내 방식에는 시몬보다 제롬이 훨씬 익숙할 것이다. 왕족출신이라곤 해도 껍데기뿐인데다, 오히려 첩보원으로 지낸 세월이 길었으니 어떤 생활 방식이든 금세 적응할 테고. 게다가 그는 제임스 본드처럼 매일 밤 호텔에서 잠드는 호사스런 스파이도 아니었다. 내전지역에서 총알받이나 다름없는 신세로 버텼던 녀석은 이처럼 평화로운 도시에선 흙바닥에 신문지 한 장만 줘도 쌔근쌔근 잠들 것이다.

“근데 우리 이사 가기로 했나?”

제롬이 불쑥 던진 말에 눈을 끔벅거렸다. “이사? 무슨 이사?”

“걔가 요즘 새 집 보러 다니던데.”

‘걔’는 시몬을 뜻했다.

넌 그걸 어떻게 아냐고 물어보려다가 말았다. 당연히 감시하고 있겠지. 나는 이미 오래 전에 그의 첩보원 시절 버릇을 고쳐놓는 걸 포기했다. 염탐은 이제 제 2의 천성이 되었으려니 하고 어느 정도의 사생활은 반납하는 편이 내 정신 건강에도 이로웠다. 

“이사하고 싶다는 말을 하긴 했어.”

“흠.” 제롬은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근데 별로 내키지 않는다고 얘기했는데.”

시몬이 집을 보러 다녔다니 생각이 복잡해졌다. 그에게는 아무래도 이 집이 불편한 모양이었다. 뿐만 아니라 집 보러 다닌 사실을 나한테 숨겼다. 숨기다니, 괘씸했다.

“어떻게 된 일인데?”

내 표정을 살피던 제롬이 물었다. 방금 전에는 무관심하더니 태도가 바뀌었다. 털어놓을 만큼 별다른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라,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별것 아닌 짧은 설명을 듣는 동안 제롬은 한마디도 끼어들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쓰레기통에 머물렀다가, 길 건너편 대형 식료품점 쇼핑객들을 하나하나 살피다가, 문득 내게로 돌아와서는 담배를 끼운 손가락에 가만히 눈길을 주었다. 공연히 시선을 피해 담뱃재를 털어내자 저 혼자 빙긋이 웃었다. 그는 설명을 끝냈을 때에야 시선을 맞췄다. 착잡한 나에 비해 제롬은 비웃는 듯한 표정이었다. 

“배가 불렀군.”

물론 그의 조롱은 시몬을 향한 것이었다. 하지만 다음에 이어진 말은 오롯이 나를 향한 비난이었다.

“네가 오냐오냐 받아주니까 버릇이 나빠진 거 아니겠어, 레이몬드. 순전히 네 잘못이야.”

“…….”

“하나하나 받아주니까 이사도 가자면서 기어오르는 거 아니겠어.”

“뭐, 난 상관없긴 한데……”

“진심으로, 네가 왜 부채감을 느끼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

시몬이 화젯거리가 되면 늘 퉁명스러워지는 제롬이 눈썹을 들어올렸다.

“걔가 네게 비싼 청바지를 입히는 이유는 딱 한 가지뿐이야.”

“뭔데?”

“그게 자기 취향이니까.”

“……뭐?”

“자기가 좋아하는 옷 입혀놓은 네 엉덩이가 보고 싶은 것뿐이라고. 걔가 좋아하는 인형놀이 말이야.”

“……네가 쳐다보는 게 아니라?” 의심스럽게 물었다.

“만약 네가 내 앞을 지나간 적 있다면 본 적 있겠지.”

“우린 같은 집에 살잖아.”

“응.” 제롬이 뻔뻔하게 대꾸했다.

“…….”

“요점은 네가 사용하는 물건은 전부 그런 의도에서 사온 거란 뜻이야. 지극히 사적인 취향을 충족시키기 위해서지. 걔는 이미 저 좋을 대로 널 실컷 휘두르고 있으니, 더 잘해주지 못해 안달 낼 필요 없어.”

지나칠 정도로 설득력 있는 가설이었다.

“하지만 슬리퍼는…… 그게 무슨 상관이라고? 그냥 평범한 슬리펀데.”

“글쎄. 자기만의 포인트가 있나 보지. 그 미치광이 속을 누가 알아.”

“……포크는? 수저는? 그건 그냥 도구잖아.”

“정말 그렇게 생각해? 네 입에 들어갔다 나오는 건데?”

터무니없는 대답에 순간 말문이 막혔다. 제롬은 오히려 나를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설마 시몬이 그런 의미로…… 그……런 상상을 하면서 사지는…… 아니, 샀을 것도 같고…… 혼란스러웠다.

“…….”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제롬 말이 옳았다.

그동안 나는 무엇이든 시몬이 주는 대로만 사용했다. 내 의견은 거의 반영되지 않았다. 아니, 사실상 내게 의견이랄 것이 없었다. 생활이야 불편함만 없으면 된다는 단순한 사고방식으로, 옷이든 음식이든 크게 취향을 주장한 적 없이 고분고분 따랐다. 시몬이 사주는 옷을 입고, 그가 사준 비누로 얼굴을 씻고, 그가 사준 침대에서 잤다. 그러니까 시몬은 단순히 내게 값비싸고 좋은 물건만 사준 게 아니라, 그저 철저히 자신의 취향대로 입히고 먹히며 철저히 본인의 만족을 추구했던 것이다…….

“너는 그냥 하던 대로 해.” 제롬이 태연히 말했다. “지금 생활이 좋다면 이대로 생활하면 돼. 걔 생각이 어떤지 신경 쓸 필요 없어.”

“그럼 이사는?”

“내키지 않는다며.”

“……하지만.”

티셔츠 한 장만 입고 있어도 귀티가 흐르는 사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넌 어때?”

예상하지 못한 질문이었는지 제롬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는 처음으로 말문이 막힌 표정이었다. 말없이 나를 한참 동안 뚫어져라 쳐다본 끝에 입을 열었다.

“나는……”

제롬이 눈을 깜박였다. 순간 내 시선을 피한 녹색 눈이 갈 곳 없이 거리를 훑었다. 그는 담배를 끼운 손가락으로 공연히 제 뺨을 문질렀다.

“지금도 과분해.”

담뱃불을 끈 그가 문득 세탁소 안을 쳐다보았다. 제롬은 세탁이 끝났다는 둥 뭐라는 둥 웅얼거리며 혼자 세탁소로 쏙 들어갔다. 빨래를 건조하는 동안에는 주로 내 직장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냈지만, 제롬은 대화가 이어지는 내내 귀가 붉어진 채였다.

결국 제롬이 시몬의 민낯을 폭로한 덕분에 내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게다가 시몬이 간혹 내 엉덩이를 흘끔거린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자 고민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렇게까지 둔했을 수가 있나 싶을 정도로 시몬은 나를 성적인 눈으로 바라보곤 했다. 특히 머리부터 발끝까지 시몬이 사다준 옷만 입었을 때는 그의 눈에 숨길 수 없는 만족의 빛이 떠올랐다. 제롬 말대로 전부 쓸데없는 고민이었던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해 왔던 그대로 생활했다.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을 했다. 일할 때 청바지에 기름이 튀어도 그다지 울적해지지 않았다. 점심시간에는 시몬이 준 용돈으로 샌드위치와 커피를 사먹고, 담배가 떨어지면 담배도 샀다. 주말에는 가끔 근방 가게 사람들끼리 모여 축구를 했고 259달러짜리 양말에 구멍을 낼 때도 있었다. 샤워를 하고 1500달러짜리 가운을 입고, 100000달러짜리 침대에서 기다리는 할리우드 스타와 영국 왕족의 품에 안겼다.

새삼스럽지만, 값비싼 물건이야 둘째 치고 매일 밤 곁에 잠드는 남자들이 이미 지나치게 화려한 출신들이었으므로, 생활이 이보다 더 호화로워져도 별달리 달라지는 건 없을 것 같기도 했다.

그런 이유에서 어느 휴일 선심 쓰듯 제안했다.

“집 보러 다녔다면서? 나도 구경시켜 줘.”

기쁜 일이 있어도 무뚝뚝한 얼굴을 조금 밝히는 것이 전부인 시몬이 말 한마디에 밝게 웃었다. 환하게 웃는 얼굴을 순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시몬은 “고마워.” 속삭이며 몇 번이고 입을 맞췄다. 제롬은 소파 건너편에 드러누워서 우리를 힐끔 쳐다보더니 못 본 척 고개를 돌렸다. 그래도 집을 보러갈 때는 따라왔다.

그리하여, 과거에는 집 한 채 없이 떠돌던 가난뱅이 사내가 입이 다물리지 않는 호화로운 저택 아홉 군데를 돌아보고 열 번째 저택에 당도한 것이다.

심해도 너무 심했다. 시몬은 그동안 오늘만을 벼르고 별렀던 것인지 헬기까지 동원해 부동산 투어를 시켰다. 열 군데의 저택들 가운데는 진짜 성도 있었다. 200년은 아니고 125년 묵은 곳이었다(시몬은 썩 마음에 든 것 같았지만 제롬은 질색을 하며 문턱을 넘지도 않았다). 내가 먼저 가자고 했으니 중간에 도로 물릴 수도 없었다. 네 번째 저택에 도착했을 때에는 호사고 뭐고 그냥 이 집에 살자고 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렇지만 실망하는 시몬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다는 일념으로 꾹꾹 눌러 참았다. 의외로 제롬은 불평불만 없이 잘 따라다녔다. 다만 어느 저택을 들르든 가장 먼저 건물의 도면부터 요구하며 중개인을 당황케 했을 뿐이었다.

열 번째 저택의 온수욕조에 걸터앉았을 때는 삭신이 쑤셨다. 아무래도 난 쇼핑체질은 아닌 모양이었다. 어쩌다 이 지경까지 왔나 잠시 회한에 잠겼으나 원인은 나한테 있다는 결론만 나왔다. 와중에 시몬은 내가 피곤해한다는 걸 눈치 챘다. 그는 부지런히 신발과 양말을 벗겨주고는 온수욕조에 물을 받았다. 발목 언저리까지 느리게 차오른 물이 따뜻하긴 했다.

“레이몬드. 괜찮아?”

기대와 걱정이 얽힌 눈을 보아하니, 오늘의 전반적인 평가를 묻는 듯했다. 용단을 내릴 때가 왔음을 직감했다.

“너는?”

“세 번째가 좋았어.” 시몬이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으나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하도 많이 돌아다녀서. 다행스럽게도 부연해주었다. “덩굴장미가 감긴 아테네 상이 있던 곳.”

“아, 그거 멋있더라.”

시몬은 잠자코 고개만 끄덕였다. 그가 대답하지 않음으로써 침묵이 흘렀다. 공연히 발을 움직였다. 발목까지 차오른 물결이 찰랑거렸다.

온수욕조에 발을 담근 채 멍하니 정원을 바라보았다. 정원 곳곳의 조명들이 은은하게 빛을 발했다. 정원 너머, 멀리 떨어진 지평선 부근에는 아스라한 저녁하늘 아래 드넓게 펼쳐진 보랏빛 라벤더 밭이 장관을 이루었다. 복잡한 생각을 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게 만드는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자전거 정비는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좀 더 솔직해지자면 고물자전거쯤이야 어찌되든 알 바 아니었다. 동네 아저씨들과 하는 축구는 퇴근길에 어쩌다 한 번 불려가는 것뿐이지 소중한 일상이라기엔 너무 거창했다. 내게 중요한 건 때때로 자전거를 타고 마중을 나오는 제롬이었다. 빨래를 개면서 함께 구멍 난 양말을 골라내는 시몬이었다. 틀린 그림 찾기를 하는 제롬을 골려주는 쪽이 축구 따위보다 훨씬 재밌었다. 시몬과 장을 보러 다니는 쪽이 자전거 정비를 하는 일보다 훨씬 보람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시몬과 제롬을 제외한 다른 모든 것들은 어찌 되든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 애들이 원하는 걸 들어주고 싶었다. 그게 내가 원하는 전부였다.

“……세 번째 집으로 할까.”

발을 내려다보던 시몬이 느리게 고개를 들었다. 느린 움직임이었지만 시선을 맞춰오는 눈에서는 숨길 수 없는 기쁨이 넘쳐흘렀다. 그냥 이사하자는 이야기가 전분데 저렇게 좋을까. 환해진 시몬의 뺨을 쓰다듬었다. 쓰다듬다 아프게 꼬집어주었다.

“네가 양말 하나까지 골라주는데 집을 고를 재간이 있겠어?”

“레이몬드….”

“난 지금까지처럼 네가 골라주는 걸로 충분해.” 욕조에서 몸을 일으켜 시몬에게 손을 내밀었다. 시몬은 기쁘게 웃으며 손을 꼭 잡았다. “말했다시피, 난 이런 거 잘 모르니까.”

물론 집 사는 법을 모른다는 건 아니고, 대저택을 사는 법을 모를 뿐이다마는.


***


대저택에서의 생활이라고 무언가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 나는 여전히 시몬이 사다준 옷을 입고, 시몬이 사준 비누로 얼굴을 씻고, 시몬이 사준 침대에서 잠들었다. 그리고 실수로 버리지 못한 구멍 난 양말을 발견하기도 했다. 그럴 때면 나는 장난기가 발동해 한쪽에는 구멍이 나지 않는 양말을 신고, 다른 한쪽에는 시몬의 양말 한 짝을 신어 그의 공들인 인형놀이에 훼방을 놓기도 했다. 그러니까 대저택에서 산다고 우리의 삶이 크게 변한 건 아니었다.

오히려 시몬의 양말 한 짝 덕분에 조금 더 행복해졌다고 말해도 좋으리라.










***

예전에 썼던 내용인데 조금 고쳤습니다. ㅎㅎ 다른 외전과 겹치는 내용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확신하지 못하는 이유는 술을 마시면서 썼기 때문입니다. ㅠ 참 13권 준비 중입니다! 진짜 곧 보여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본 단편은 13권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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