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멘트 : 제가 분량을 천 자나 오버해 버린 이유는…….




천자를 알현하는 일은 태자나 공주를 만나는 것과 차원이 다른 일이었다. 그들을 부른 황제의 의중부터 시작해 말 한 마디 잘못하여 목이 날아갈 수도 있는 일이었으니 영녕도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스스로 자신에 대해, 그리고 두 해 전 융롱을 데려가겠다는 자신의 요청에 대해 칼을 무던하게 보관할 칼집이라는 평을 내린 적 있는 영녕군주로서는 지금 황제가 자신들을 불러 어떤 이야기를 할까 알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그들은 그 사이에 무난하게 지내는 대신 사고를 친 편인 것이다. 그러니 여러 방면으로 짐작을 해 볼 뿐, 그렇지만 어떤 짐작도 굳이 하기에 무용할 뿐.


새벽에 산을 내려오는 가마는 아침이 희붐하게 밝을 때쯤 비탈을 내려오기 시작해 해가 다 떴을 때 황도의 성문 앞에 있었다. 안평제는 아침 조회가 끝나고 곧장 그들을 만날 셈인 듯했으나, 황제를 알현하는 쪽에서는 그 시간보다 먼저 입궐해 준비를 끝마쳐야 했으므로 움직이는 것은 이른 아침이었다. 막 사람들이 거리로 나서고 아직 반절 정도의 가게들은 문을 열지 않은 때였다. 나무로 지어진 건물이 많은 하제국의 황도는 특유의 얇은 기와를 이고, 얼마 전에 정비가 되어 널찍널찍한 대로가 사방으로 시원하게 뚫려 있는 곳이었다. 길가 나무들은 이제 거의 잎을 달고 있지 않았다. 


영녕의 가마는 언제나와 같이 익숙한 길을 따라, 이제는 가마를 드는 이들에게도 익숙한 길이라 할 만한 길들을 따라 황궁으로 향했다. 그런데 정말로 어떤 의중으로 갑작스레 알현을 명한 것일까. 전에 없이 마음이 뒤숭숭하여 입을 꾹 다물고 있던 것이, 표정에도 드러났나 보았다. 곁에 있던 융롱은 이번에도 다른 말 없이 영녕의 손을 꼭 잡았다. 영녕군주는 조금 빤히 융롱을 쳐다보았지만 여전히 대답은 없었다. 그러더니 융롱은 일영에게 푹 하고 머리를 기댔다. "별일 있겠어요." 융롱이 나지막하게 말한다. 머리카락이 목을 간지럽히고, 그들이 타고 있는 가마는 느릿느릿 위아래로 흔들리고 있었다. 그들은 궁문을 넘었다. "그래." 일영은 픽 웃으며 어깨를 늘어뜨린다. "별일이야 있겠니."


조회는 조금 일찍 끝난 것 같았다. 드나드는 대소신료들을 생각하기도 했건만 그들이 신정전 앞까지 가서 대기하고 있어도 편전에서 나오는 이는 없고 희미하게 안에서 말소리 같은 것이 들릴 따름이었다. 해는 이제 하얗게 늦가을의 하늘을 밝힐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계하왕부의 영녕군주와 서 가 융롱은 들라 하십니다." 상궁이 나와 말을 전하면 이어 그들을 안내해 왔던 다른 상궁의 인도를 받아 그들은 신정전 안으로 들어섰다. 붉은 기와를 두른 대궐에 아침 빛이 스며들면 금채(金彩)로 아로새긴 무늬들이 곳곳에서 찬란하게 반짝거렸다. 안평제는 구슬을 물고 있는 용이 아로새겨진 어좌에 앉아 있었고, 그 앞에는 이미 도착해 있던 두 인물이 서 있었다. 태자와 소양이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계단 위 어좌를 향해 그들은 절하고 고개를 숙였다. "일어나거라." 안평제의 목소리는 따스하지만 완고함이 느껴지는 인상이었다. 고개를 들면 열두 줄의 류(旒)* 너머 황제의 검은 곤복(袞服)*을 입은 안평제가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중추절 연회 후로 처음 보는 것이지. 그 동안 잘 지냈느냐."


연회 때라고 해도 언제나처럼 멀리서 친척들과 나라의 번영을 기원하는 천자의 말을 일방적으로 들은 것뿐이나, 안평제는 마치 그때 별다른 것 없이 인사를 나누기라도 했던 것처럼 여상히 말했다. 영녕은 고개를 살짝 숙여 보였다.


"친히 그 말씀으로 헤아려 주시니 나날이 평안하지 않은 때 없사옵니다. 폐하께서도 기체후일향만강하시었나이까."

"너무 깊은 예까지 차릴 것 없다. 가족이 모인 자리가 아니겠느냐."


그러나 안평제의 표정은 흡족하여, 아마도 영녕이 했던 대답이 옳은 것이었음을 암시하고 있었다. 


"내 오늘 그대들을 한 자리에 부른 것은 여러 가지로 나눌 말이 있기 때문이야. 물론 국정에 관한 것도 있으나 황실의 이야기도 겸하기 위해 불렀다. 먼저는 자령국에서 있었던 사건 말인데……."


영녕과 융롱은 슬쩍 손 안으로 땀을 쥐었다.


"화약 밀거래가 있었던 과정을 추적하는 데는 소양과 형부의 공이 컸고, 유주후의 야욕을 밝혀내는 데는 영녕이 직접 나섰다지. 서융롱도 어린 나이에 직접 대장군영의 병사들을 이끌고 자령을 평정했으니 그 용맹함은 높이 살 만하다. 이에 관해서는 각각에게 마땅한 치하를 할 것이니 그리 알라.

"성은에 감복하나이다."


짤막히 인사가 지나가면 느린 목소리가 도로 시작하여,


"그리고, ……."


안평제의 눈이 영녕과 그 뒤의 융롱 쪽으로 향했다. 


"제주후 이설은이 포병들을 길러 단호에 불을 놓았다는 소문이 황도에 횡행하고 있다 들었다. 또, 그가 직접 화약고를 조성하고 이를 터뜨리라 명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하니 실로 백성들은 멀리서 일어난 일의 진위를 가리기가 힘들다. 자령의 일이 도성까지 다다라 사람들을 어수선하게 만들었으며 이설은이 화약을 숨겨 두었다 한들 관에 보고하여 회수를 청했어야 할 일, 영녕. 이에 관해 할 말이 있느냐."


해연이 크게 만든 소문이 도리어 화로 돌아온 것인가? 아니다. 영녕은 답하기 전에 심호흡했다. 오히려 이는 영녕군주 자신에 대한 시험에 가까웠다. 자의적 판단으로 일을 키우고 처리까지 해 버린 건에 대한. 영녕이 고개를 들고 나섰다.


"황공하오나 폐하, 이는 처음부터 제주후가 숨기고 있던 무기로서 상책으로는 이르신 바와 같이 회수를 택했어야 할 것이나 하책으로는 그 사용을 막는 모든 방법이 있을 것이며, 제주후의 위세가 월강 동쪽에서 강하다 하나 폐하의 발 아래 있지 않은 것이 없으므로, 이 책임은 제주후 본인에게 물어 그를 경질하심이 마땅할 줄로 사료되옵니다."


대담한 대답이었다. "제후를 경질한다라." 안평제는 영녕의 말에 표정도 변하지 않고서 눈길만 돌려 물었다. 


"태자, 소양. 둘의 생각은 어떠하냐."

"모황께 아뢰옵니다. 본래 화약 밀매를 자행한 것은 제주후의 야심이 맞으므로 그 일차적인 책임을 군주에게 물을 수는 없겠습니다. 소문으로 도성이 어지러워진 건은 공과를 따져볼 때 공에 비해 적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두둔하는 척 하면서도 영녕의 자의적 판단에 일부 책임을 돌리는 어법이었다. 소양은 태자의 답변이 끝날 때까지 나긋이 입끝에 웃음을 띠었다가, 


"영녕군주가 상책과 하책을 나누어 답했다 하나 이미 상대할 적이 눈앞에서 사라진 후에 방법론의 상중하를 논하기는 무용할 줄로 아옵니다. 다만 이미 일어난 사태를 두고 또 다음 방도를 찾는 것이 일이니, 모황께서 군주에게 명하려 하신다면 그 소문을 수습하는 건을 맡기심은 어떠하온지요."


"음." 안평제는 짧게 끄덕였다. "두 사람의 말이 모두 일리가 있다. 제주후에 관한 건은 그의 사사로운 야심을 경계하지 않을 수 없는 일, 이는 내 필요한 조치를 취할 것이야. 그리고 영녕, 앞으로 사흘이 지나도 소문이 가라앉지 않는다면 이를 바로잡는 일을 너에게 맡기겠다." 


나쁘지 않았다. 무엇보다 천자의 선에서 제주후에게 내려가는 명이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영녕은 목적을 상당 부분 달성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었다.


"듣자하니 영녕군주는 소양과 친분이 꽤 있는 편이라더군."


뒤이은 말에 소양이 옆에서 작게 웃음짓는 것이 보였다. 먼저 와서 이야기를 나누면서는 그 이야기를 했나 보았다. 


"예, 폐하. 공주께서 저를 자주 불러 주시고 여러 가지 편의를 봐 주신 점도 많으시지요."

"영녕."


안평제의 눈이 저 위에서부터 곧장 아래로 내리깔렸다. 


"내 세대는 후계 다툼으로 너무 분쟁이 많았어. 그대 부친은 그것을 지혜롭게 피해 갔으니 그 선택은 실로 칭찬할 만하다 할 수 있다."


본론이로군. 영녕은 가만히 고개를 숙인 채 안평제가 하는 말을 들었다. 


"본래 계하왕부의 후계자로서 봉작을 받았으나 세상 바깥의 일에 두루 관심이 많을 수가 있지. 이 제국은 크고, 한 사람의 손만으로 나라가 돌아가는 것 아니니 부디 공주와 태자를 보조하여 앞으로도 대소사를 원만히 해결하기를 바란다. 내 그대를 눈여겨볼 것이야." 


후계인에 관한 말은 없었다. 다르게 말하자면 그 정도에는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는 뜻이 될 것이었다. "나는 소양에게도 비슷하게 말한 적이 있지. 그렇지 않나, 소양?" "그렇습니다. 모황." 소양은 이런 상황에서도 흔들림 없는 웃는 낯이었고, 태자는 무표정이었다. "그리고 융롱." 안평제는 다시 영녕 한 발 뒤에 선 융롱을 불렀다. 


"폐하의 말씀에 답하옵니다."

"올해로 나이가 열다섯이니 이제 곧 열여섯이 되지 않나?" 

"예, 그러합니다."


안평제는 융롱의 나이를 알고 있었다. 실로 대장군가의 후계에 대한 비상한 관심이었다. 


"너는 이제 관례를 치르는 편이 좋겠구나. 나이도 찼으니 어른이 되어서 실제 군무를 맡아 보아야 하지 않겠느냐. 소식이 들려오면 정월이 지나서 발령을 내리겠다." 

"황명에 답하겠사옵니다."


융롱은 자리에서 깍듯이 예를 다해 대답했다.


"세간에서는 후계에 관해 이런저런 말이 많다지만 나는 그런 것을 바라지 않는다. 부디 이 나라를 다스리는 황실의 같은 일원으로서, 그리고 신하로서 힘을 합쳐 도리를 다하기를 바라지. 오늘 그대들을 한 자리에 모은 것은 무엇보다 이를 당부하기 위함이야. 이 말을 알겠는가."


안평제는 일동이 머리를 조아리고 답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물러가라는 손짓을 했다. 네 사람은 황제의 앞에서 나란히 걸음을 물려, 그리고는 신정전 바깥에서부터 각각의 길로 걸어갔는데 소양이 살짝 멈춰서서 말했다. 


"아닌 척 말씀하시지만 모황께서는 그대가 후계 문제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상당히 신경을 쓰고 계시는군." "그러합니까?" 영녕은 모른 척 물었다. 이는 황제를 어려서부터 봐 온 소양의 견해를 들을 수 있는 중요한 대목이었다. "이 자리에 태자가 굳이 필요없었음에도 후계인을 가진 이들을 한 자리에 모아 말씀을 내리신 것을 보게. 나 또한 어릴 적에 지나치게 영명하여 어머니의 심기를 거슬렀고, 태자 책봉이 미루어지다가 끝내 다른 곳으로 튀어 버린 계기가 되었지. 행동을 조심하는 게 좋을 테야. 그대는 너무 갑작스럽게 너무 많은 풍파를 몰고 오네." 


융롱과 수호의 인을 맺은 것부터, 후계의 인이 나타나고, 그리고서는 자령국 사건까지. 실로 화려한 등장이라고 할 수 있었다. 영녕은 자신도 납득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아직까지 서툰 것이 많으니 폐하께서 좀 헤아려 주시면 좋을 텐데요."

"서툴다? 그대가?"

"얼마 전에 말입니다."


영녕이 발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태자 전하의 소개장을 들고 은완궁에 갔다가 문 앞에서 근 두 시진을 기다리는 박대를 당했습니다. 제가 황궁 사정에 이리도 무지하니 다른 분들이 살펴 주지 않으시면 어찌 지내려나 모르겠어요."


그 말에 소양은 눈을 크게 떴다가 쓴웃음에 가까운 표정을 지었다. "그랬나. 확실히 자네에게는 아직 황궁이 낯선 곳일 게야." 


신정전 바깥은 이제 높이 떠오른 태양이 너른 편전 앞을 새하얗도록 비추고 있었다. 명서궁으로 돌아가는 소양과 간단히 인사를 나눈 영녕은 마침내 융롱과 둘이 남게 되자 한숨을 호로록 내쉬었다. 


"황궁에 살면서 신경증이 생기지 않은 것은 심줄이 굵다는 뜻이니, 공주 전하도 생각한 것 이상으로 다시 봐야겠어." 

"익숙하지 않으셔서 그러실 겁니다. 차차 괜찮아지시겠지요." 

"천자의 부름을 매일 받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일에 상상 이상으로 열중한 관리이거나 후궁전의 사람들밖에 없어."


나오는 길을 걸으면서 영녕이 삐죽거렸다. "그나저나 폐하께서 저렇게 말씀하신 이상 정월 내로 관례를 치러야 하겠구나." "예, 황명이 있으니 집안에서도 서두를 겁니다. 가장 가까운 길일을 잡겠지요."


서융롱은 이 또한 마치 그가 자신에게 처음 올 때처럼, 있을 수 있고 당연히 앞으로 감당할 일인 것처럼 이야기했다. 그런 그에게 거칠 것이나 어려울 것은 없어 보였고, 그의 미래 또한 주어지는 대로 창창히 펼쳐질 것만 같았다. 영녕은 황궁에서 내내 자신의 한 발 뒤로 서서 걷다가 궁문을 빠져나와 도로 수행원들과 만나면 얼른 앞서 다시금 자신의 시중을 드는 융롱을 본다. 가마에 올라타고, 오늘은 함께 입궐할 예정이었기에 뒤이어 장막을 들치고 들어와 자신과 나란히 앉는 융롱을. 오늘 아침에 잡아 주었던 손, 기댔던 머리카락, 그리고 '곧 그렇게 되겠지요.'


자를 받고 정식으로 군무를 맡게 된다면 아무리 화인으로 맺어진 사이라 하나 서융롱은 일단 자신의 곁에서 떠나가게 된다. 같은 밥을 먹고, 같은 때 일어나고, '언니, 좀 주무세요,' 라거나, '언니, 바깥으로 나와 보셔요!' 와 같은 날들. 밖으로 나가 보면 눈이 와 있고, 눈이 밤새 깊숙하게 쌓여서 그들이 깊은 발자국을 만들 수 있었던 날들. 융롱은 날이 추워 자신이 바깥에 오래 나가 있기를 염려했지만, 그런 염려는 실제로 두 사람이 산을 꽤나 걷고 나서 딱 적당한 시점에 이루어졌으므로 영녕은 언제나 이만 돌아가자는 융롱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러면 덥혀진 실내 공기가 다소 아플 정도로 뺨을 찌르고, 두 사람은 화로 앞에 앉아서 차갑고도 따뜻한 겨울 아침을 보냈다. 조금 기다리면 식사로 빵과 게살, 생강을 넣고 끓인 죽이 나왔고, 호호 불면서 먹다가 새하얘서 더욱 밝은 낮에 읽을 책과 할 이야기를 생각하면 추운 날은 싱그러웠다. 눈 속에 멀리 울릴 소리는 잦아들어 고요하기만 하고, 먹 가는 소리가 방 안에 느릿하게 퍼지며, 코끝에 묻는 먹 향과 데워진 방 안. "융롱." 하고 이끌어서 보는 구절들. 시들. 그런 날들이 그리워져서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런 날들이 그리워지면, …….


영녕은 자신이 황제가 했던 어떤 말들이나 소양과 나누었던 의미심장한 대화라거나 하는 것을 모두 잊고 이 생각에만 몰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일영은 융롱의 손을 잡는다. "언니?" 언제나처럼 그 얼굴이 돌아보면, 일영은 융롱을 와락 끌어안고 입을 맞췄다.  



류 : 면류관에 꿰는 채옥(彩玉)의 한 줄을 가리킨다.

곤복 : 황제가 조회나 제사 때에 입는 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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