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오페라의 거장인 주세페 베르디(Giuseppe Fortunino Francesco Verdi)의 수많은 오페라 작품 중에, 제가 가장 처음 직관했던 작품이 바로 [라 트라비아타(La traviata)-각주 1]였습니다.

우리 나라 제목으로는 '동백아가씨'란 의미의 '춘희'로도 알려져 있으며 오페라 전체의 내용은 잘 모르시더라도, '축배의 노래'라고 제목의 흥겨운 노래는 한 번 쯤 들어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축배의 노래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YVyqvNAlLXs


1853년 라 트라비아타 시사회 포스터

라 트라비아타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18세기 말~19세기 초의 파리에서 사교계의 꽃으로 불리우던 아름다운 여인 비올레타는 화려한 파티를 열며 사치스럽고 향락적인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비올레타의 집에서 열린 파티에 참석한 알프레도라는 젊고 순진한(철없는) 귀족 청년이 비올레타를 보고 한 눈에 반하여 그녀에게 구애를 합니다. 

'축배의 노래'가 울려퍼지는 파리 사교계의 화려한 파티. 여기서 알프레도는 비올레타에게 첫눈에 반하게 됩니다.

사실 이미 지병으로 인해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았던 비올레타는 그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에 고민을 했지만, 끈질기고 순수한 그의 구애에 결국 마음이 움직여 파리 교외에서 동거를 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경제 관념 없는 알프레도 덕분에 비올레타가 마련해놨던 생활비는 모두 떨어져서 궁핍해졌고, 알프레도는 돈을 구하기 위해 잠시 그녀의 곁을 떠나게 됩니다. 

그 사이에 알프레도의 아버지는 자신의 아들의 돈으로 그녀가사치를 하고 있다고 오해하며 찾아놨다가 알고보니 그녀의 돈으로 생활하고 있음을 알고 조금 미안해졌으나, 알프레도의 여동생의 혼사를 위해 그녀가 알프레도 곁을 떠나줄 것을 부탁합니다(귀족의 혼사엔 집안의 평판이란 것이 중요했으니까요). 

비올레타에게 떠나주길 부탁하는 알프레도의 아버지(제르몽) - 2막에서 나오는 아리아.

그녀는 알프레도를 위해 편지를 써놓고 저택을 떠나게 되고, 돌아와서 그녀의 편지를 본 알프레도는 비올레타가 화려한 사교계 생활이 그리워 그를 버린 것이라고 오해하며 분노에 휩싸이게 됩니다. 결국 파리의 한 파티장에서 다시 만나게 된 비올레타에게 돈을 집어던지며 그녀를 모욕하게 되죠. 

비올레타에게 돈을 집어 던지며 모욕하는 알프레도.

비올레타의 순수한 마음을 알았기에 미안해하고 있던 알프레도의 아버지가(예상 외로 넘 좋은 분), 그녀가 떠난 진짜 이유를 밝히며 아들을 꾸짖었고 알프레도는 그녀를 다시 만나기 위해 달려갑니다. 그러나 이미 비올레타의 몸 상태는 한계에 이르렀고, 알프레도의 품에서 행복했던 지난 날을 떠올리며 숨을 거두게 됩니다.

사랑하는 알프레도의 품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비올레타.


내용만 보면, 신분 차이를 넘어선 사랑을 하지만 부모에 의해 헤어지고 엇갈리는 요즘 드라마들과도 비슷하며, 불치병으로 인해 이별을 맞이하는 젊은 연인들의 슬픈 사랑 이야기의 원조격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이 오페라의 애절한 스토리와 아름다운 음악도 인상 깊지만, 저의 경우엔 비올레타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에 눈길이 갔습니다. 그녀와 알프레도 사이를 영원히 갈라놓게 만든 질병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1막의 '축배의 노래'가 끝난 뒤에, 비올레타는 '갑자기 심한 기침을 발작적으로 하고 기진맥진해 하는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그리고 2막, 3막으로 진행할 수록 점점 더 초췌해지고 쇠약해지는 비올레타의 모습을 보여주며, 하녀 혹은 알프레도 앞에서 선홍색 피가 섞인 기침을 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비올레타의 외모는 확실히 아름답지만, 오페라 초연 당시의 컨셉 아트나, 팜플렛, 오페라 장면을 묘사하는 그림 등에서 전반적으로 피부가 창백하고 마른 여성의 모습으로 표현됩니다.

오페라 초연 당시의 비올레타 컨셉 아트.국내 공연 팜플렛.1막의 파티 장면을 묘사한 그림. 하얀 옷을 입은 여인이 비올레타입니다.


실제 비올레타의 모델이었다고 전해지는 '마리 뒤플레시스(Marie Duplessis, 1824.1.15~1847.2.3)'라는 여인(각주 2)도, 역시나 "큰 키에 검은 머리카락, 흰색 피부와 특이하리만치 커다란 눈"을 가졌다고 전해지며, 향략을 즐기며 몸을 잘 돌보지 않다가 쇠약해져서 20대 초반의 나이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마리 뒤플레시스의 초상화.


비올레타의 마른 체구와 창백한 피부, 기침과 각혈, 그리고 전신쇠약감이 동반되다가 사망하는 양상을 볼 때, 그녀의 사망 원인은 '폐결핵(Tuberculosis)'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결핵은 결핵균(Mycobacterium Tuberculosis) 감염에 의해 발생하는 질환으로, 주로 공기를 통해 전파되며 이 균이 산소를 좋아하기에 산소와 접촉하기 좋은 폐에 잘 걸리고(85% 이상), 여기에 있던 균이 다른 장기까지 퍼져 나가면 림프절이나 뇌, 뼈, 신장에도 자리를 잡고 증상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폐결핵의 가장 흔한 증상으로는 피가 섞인 가래를 동반한 기침, 오한, 식은땀, 그리고 체중 감소 등이 있는데, 오페라 속의 비올레타가 경험했던 증상들과 매우 흡사합니다.

결핵의 증상을 보이고 있으나 아직 결핵균에 대한 효과적인 치료제가 개발되지 않았기에(각주 3), 대증 치료 밖에 할 수 없는 상황에서 휴식과 영양 보충은 커녕, 파티 등을 즐기며 무절제한 생활을 하고 알프레도와 헤어지는 것으로 인한 정신적 충격을 받은 상황이 비올레타의 건강을 악화시켜 더욱 빨리 죽음에 이르도록 만들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 '라 트라비아타'의 배경인 19세기 파리는 도시화로 인해 많은 인구가 밀집되면서 결핵이 창궐하기 좋은 환경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전염병에 대한 지식도 부족하여 결핵 환자를 어떻게 격리하고 치료해야할 지에 대한 방법도 제대로 정해져 있지 않았습니다. 오페라 속 상황만 해도, 비올레타는 사람들이 가득 모인 파티 중에 기침을 하고, 그녀의 하녀나 알프레도도 기침을 하는 그녀 곁에 가까이 있습니다. 

현대 같으면 비올레타는 바로 격리되고, 그녀의 치료를 담당하는 의료진들은 N95 마스크를 착용하고 매우 주의를 기울여야하는 상황이죠.

N95 마스크. 에어로졸을 포함하는 공기중에 떠다닐수있는 0.3㎛ 미세입자를 95%이상에서 필터링의 효과가 있습니다.

 

어쨌든 19세기의 특수한 상황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결핵으로 죽어갔습니다. 작곡가 쇼팽이나 '폭풍의 언덕'의 작가인 에밀리 브론테나 그녀의 여동생 앤 브론테도 결핵으로 사망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라 트라비아타를 비롯한 19세기 배경의 여러 예술 작품 속에서는 결핵으로 사망하는 사람들이 많이 그려집니다. 푸치니의 오페라 '라 보엠' 속의 여주인공(미미)도 결핵으로 사망하며, 소설 '빨강머리 앤'의 등장인물 중 하나인 루비 길리스도 폐결핵으로 이른 나이에 사망합니다(죽은 후의 얼굴이 매우 아름다웠다고 표현되죠). 

아래 그림 속의 소녀 역시 폐결핵으로 사망한 뭉크의 누나의 모습입니다. 젊다 못해 어린 소녀가 창백하고 초췌한 모습으로 죽어가는 것을 슬프도록 잘 묘사하고 있죠.

'아픈 아이', 1886년, 뭉크의 작품.


결핵은 현대에 들어와 결핵균의 특성에 대한 파악(공기 감염으로 격리 필요)과 치료(다양한 항생제 치료) 및 예방법(BCG 접종) 개발로 <라 트라비아타>의 배경인 시대만큼 치명적이진 않으나, 한 번 감염되면 치료가 오래 걸리며 약제에 대한 내성균도 잘 발생하여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결핵에 의해 희생되고 있습니다.

2007년 기준으로는 세계적으로는 930만이 결핵에 걸리고 180만이 사망한다고 보고 되었으며(각주 4), 한국에서도 2010년 기준 연간 35,000여명씩 발생하고 있으며, 안타깝게도 이중 2천여명이 사망하고 있다고 합니다(각주 5).


눈 속에 피어난 붉은 동백꽃의 이미지. 결핵으로 죽어간 비올레타를 동백꽃 아가씨라 부른 것은 어쩌면 그녀의 창백한 모습과 각혈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눈처럼 창백한 피부에 선홍색 각혈을 흘려야했던 동백꽃 아가씨... 비올레타의 가련한 사연이 그저 '오페라나 소설 속 비극'으로 남기 위해서는 아직도 가야할 길이 많이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각주

1. 오페라의 이탈리아어 제목의 뜻은 '길을 벗어난 타락한 여인'입니다. 비올레타의 신분과 살아온 방식을 좀 더 극명하게 드러내는 제목이라고 볼 수 있죠. 한국어 제목인 '춘희'는 이 오페라의 원작이라 볼 수 있는 알렉상드르 뒤마의 소설 제목인 <<La Dame aux camélias: 동백꽃 아가씨>>에서 따온 것입니다.

2. 알렉상드르 뒤마의 연인이기도 했으며, 소설 <<동백꽃 아가씨>>의 주인공인 '마르그리트 고티에(Marguerite Gautier)'의 모델이기도 합니다. 

3. 결핵의 치료제 중 하나인 이소니아지드(isonicotinylhydrazine, INH)는 1951년에, 리팜피신(rifampicin)은 1967년에야 결핵  치료에 도입이 되었습니다.

4. World Health Organization (2009). Epidemiology.《Global tuberculosis control: epidemiology, strategy, financing》. 6~33page. 

5. (2010국감)결핵발병률 10년째 OECD 1위, 《아시아경제》, 2010.10.8

이야기 읽는 의사입니다.

Iatros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