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는 집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깊은 잠에 빠졌다. 전후 상황을 묻지도 않고 그저 병원부터 가야겠다 한마디 하더니, 병원에서도 내내 말이 없었다. 붉어진 눈으로 정국의 상처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목이 간지러워 기침을 몇 번 하고, 또 말없이 멍하게 사색에 잠기길 반복했다.

여주가 모든 사실을 알고 나면 불같이 화를 낼 것으로 생각했던 정국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여주는 숨긴 것보다 정국이 다친 것에 더 분노했다. 냉정하게 딱 잘라 뒤엎는 말은 시작도 안 했다.

‘컨디션이 안 좋아서 그런가.’ 

침대맡에 앉아 잠이 든 여주의 이마에 가만히 손을 대 본 정국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화를 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쩐지 좋지 않은 기운이 돌았다. 

그 순간 대뜸 울린 벨 소리에 정국은 화들짝 놀라며 재빨리 볼륨 버튼을 딸깍 눌렀다. 여주가 잠결에 미간을 찌푸리는 것을 보자마자 행여 깰세라 거실로 나가는 모양새가 꽤 다급했다. 평소 소리를 켜 두지 않는 편인데, 피 묻은 걸 닦다가 진동이 해제된 모양이었다. 

[어머니] 

예상치 못한 발신자를 확인하고 몇 초간 망설인 끝에 “여보세요.” 아주 작은 소리가 튀어 나갔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깊게 잠든 여주에게 들릴 리 없는데도 굳이 베란다까지 나갔다.


-퇴근했니? 왜 종일 통화가 안 돼.

“바빴어요. 웬일이세요?”

-너 집에 좀 와야겠다.

“집에 무슨 일 있어요?”

-다음 주에 주연이 한국 들어온대. 완전히.


‘주연이가 한국을? 연락 없었는데 갑자기 웬 한국.’

곧장 답을 들려주지 않고 목을 긁적이던 정국이 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주연은 정국에게 하나 있는 여동생이었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서 딱히 뭔가를 함께한 기억은 없지만 정국은 주연을 생각하면 괜스레 애틋한 마음이 들곤 했다. 

결혼할 때 마지막으로 보고 그 후로는 주연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스케줄을 잡아 볼까 고민하다가도 상태가 안 좋은 여주 때문에 망설여졌다. 혼자 가자니 여주가 걱정되고, 그렇다고 둘이 가자니 그것도 못 할 짓이고, 안 가자니….


-왜. 바빠?

“조금요. 요새 일이 많아요.”


여주 몸이 안 좋다는 이야기는 굳이 하지 않았다. 쓸데없이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고, 여주를 거절의 이유로 대는 것이 싫기도 했다. 다음 주 스케줄을 봐야 정확하게 알 수 있겠다며 확답을 망설이는 정국에게, 어머니는 정 그렇다면 어쩔 수 없겠다고 공감해 주었다. 그래도 하나 있는 여동생이 외국 생활을 청산하고 한국에 오는데 만나야 하지 않느냐 하려다가, 아들의 고집을 모르는 게 아니라서 말을 아꼈다. 

간단한 안부 몇 마디를 주고받고 전화를 끊은 정국이 창틀에 팔을 얹고 야경을 구경했다. 주연이 스무 살 때 떠났다가 스물일곱이 다 돼서 들어오는 거였다. 정국은 그새 시간이 참 많이도 흘렀다고 생각했다.

둘 사이 공백이 길었어도 동생은 동생이다. 정국에게 주연은 그런 의미였다. 살갑게 굴어 준 적도 가깝게 지낸 적도 없지만, 여섯 살이나 차이 나다 보니 동생에게 일이 생기면 가장 먼저 발 벗고 나서는 건 언제나 정국이었다. 주연 역시 몇 달에 한 번 연락할까 말까 한 오빠인데도 부모에게 차마 말할 수 없는 것들을 오빠에게는 곧잘 털어놓곤 했다. 

‘그게 벌써 7년 전이구나.’ 

골몰히 전의 일을 곱씹던 정국이 문득 궁금증이 생겨 안방 쪽을 흘깃 바라보았다.


“혹시 여주는 알고 있었나?”






신혼 전쟁



“전부터 오고 싶다고 하더니. 결국 아예 들어오기로 했구나.”

“주연이랑 통화했어?”

“결혼식 때 봤잖아. 들어오고 싶다고 했어. 통화도 가끔 하고.”


여주는 잠을 꽤 오래 잤는데도 여전히 피곤해 보였다. 그새 더 부어 버린 여주의 한쪽 뺨을 빤히 보던 정국이 딱지가 앉은 입술로 시선을 옮겼다. 그 상처를 발견하고 무슨 일이냐고 물어도 여주는 별일 아니라는 답만 반복했다. 나중에야 부장에게 자세한 내막을 들은 정국은 화난 티를 낼 수 없었다. 여주가 말하기 싫어하는 데엔 이유가 있을 거로 생각했고, 게다가 자신도 숨긴 게 있으니 답을 재촉할 수 없었다. 

‘차장 새끼는 말로 하면 되지, 왜 사람을 때려.’ 

부장이든 차장이든 정국 자신에게는 얼마나 우호적인지 몸소 느낀 바가 있어, 정국은 그 둘이 여주와 갈등을 빚는 것을 볼 때마다 가슴 속에서 알 수 없는 불편한 감정들이 스멀스멀 피었다. 여주는 제 뺨을 멍하게 바라보는 정국을 눈치채고 손등으로 살며시 감추며 몸을 돌렸다.


“주연이 한국 오면 우리 집 근처로 이사 온다고 했어.”

“왜?”

“왜긴. 가까이 살면 좋지.”

“너무 받아 주지 마. 내 동생이라고 그럴 필요 없어. 내가 얘기할게.”

“자기 웃긴다. 내가 주연이랑 더 친한 것 같은데.”


옅게나마 웃음을 터트린 여주가 마스크를 꺼내 한쪽 귀에 걸었다. 의사가 기관지를 보호하려면 이동할 때마다 꼭 마스크를 착용하라고 하기도 했고, 마스크가 있으면 부어 버린 뺨을 가리기도 좋았다. 나머지 한쪽도 걸려다 말고 정국을 흘깃 돌아본 여주는 잠시 망설이는가 싶더니 성큼성큼 그 앞으로 다가가 섰다. 의도를 알 수 없는 정국이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며 내려보기만 하자, 여주가 품 안으로 폭 안겼다. 

여주는 정국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제 등을 쓸어 주는 정국의 손길에 살짝 걸린 미소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사라져 버렸다. 


“오늘 하루 쉬라니까.” 


걱정 담긴 정국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무 말도 하지 마. 그냥 한 번 안아 보고 싶어서 그래.”

“아무 말도?”

“응. 걱정도 하지 말고 변명도 하지 마.”


그것이 마치 걱정할 자격도 없고 변명은 듣고 싶지도 않다는 말처럼 들린다면 무언가 찔리는 게 있어서일까. 정국은 꾹 다문 입술이 떨어질 기미가 안 보이는 걸 보니 어느 정도는 맞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 대신 여주의 머리를 살짝 감쌌다. 그중에서도 미안하다는 말을 제일 듣기 싫어하지 않을까 생각할 때쯤, 여주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웅얼웅얼 말을 이었다.


“누가 누굴 걱정하니. 자기 몸 좀 봐.”

“….”

“그리고 변명은….”

“….”

“듣고 나면 나 자신이 되게 작게 느껴질 것 같아. 그래서 안 했으면 좋겠어.”






아침부터 호출되어 부장실로 온 여주는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차장을 발견하고 미간을 구겼다. 그래도 금세 표정 관리를 했다. 얻어맞은 뺨이 아직도 욱신거리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차장, 부장뿐만 아니라 정국까지 앉아 여주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사이에 끼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절실했지만 여주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정국은 깍지 낀 손을 다리 위에 놓고 초조함에 입술을 축였다. 정국 역시 이 자리가 불편하고 별로라서, 여주와 별반 다르지 않은 생각을 떠올렸다. 어쩐지 풀이 죽은 여주가 자리에 앉자마자 고개를 푹 숙이니, 정국은 그냥 지금 당장 손을 잡고 나가 버릴까 하는 충동까지 느꼈다. 차장은 그런 여주를 빤히 보다가 큼큼 헛기침과 함께 입을 뗐다.


“이야기 들었다. 전 팀장이 누락한 정보가 있었다고.”

“….”

“내가 오해했다. 미안하구나. 진작 그렇게 말을 하지.”

“….”

“그리고 전 팀장. 몸은 좀 괜찮고? 그러게 민간인 일에 끼어들긴 왜 끼어드나. 그냥 적당히 모르는 척하라니까.”


아주 짧은 사과를 끝으로 차장의 시선이 곧장 정국을 향했다. 여주는 픽 터지는 웃음을 굳이 참지 않고 뱉었다. 현장 출신 요원들의 의리는 조금 눈꼴 실 정도로 돈독했다. 물론 정보팀 요원들도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지만, 기밀을 다루는 일이 많다 보니 웬만해서는 서로 접점을 두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런 와중에 여주가 속한 지부의 부장과 그 위의 본부 차장까지, 두 사람 다 현장 출신이라는 건 여주에게 그다지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정국의 합류에 대한 승인부터 진행까지 속전속결로 이루어진 것만 봐도 잘 알 수 있었다. 세 사람이 대화 나누는 모습을 표정 변화 하나 없이 빤히 보던 여주가,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바삐 움직이는 팀원들 사이에서 여주는 책상에 엎드려 있기만 했다. 시끄러운 소리가 거슬릴 만도 한데 눈을 꼭 감고 미동조차 없었다. 정국은 중간 테이블에 살짝 기대서서 그런 여주를 빤히 봤다. 미안하다 사과하는 차장한테 한마디 할 타이밍이었는데, 정보를 누락한 게 전 팀장이 아니라 자기였어도 그냥 넘어갔을 거냐고 화를 내야 맞는 건데, 여주가 대체 왜 가만히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변명을 듣고 나면 자기 자신이 작게 느껴질 것 같다는 건 또 무슨 뜻인지 궁금했다. 정국은 잔뜩 구긴 표정으로 여주의 동그란 머리통만 바라봤다. 그사이 옆으로 모여든 팀원 두세 명이 서로 허리를 콕콕 찌르며 정국에게 말을 걸어 보라며 재촉했다. 


“네가 해, 새끼야.” 

“뭔데. 왜 나한테 시켜.” 


앞으로 밀렸다가 다시 뒤로 물러났다가 또 다른 사람의 등을 밀고. 덩치가 산만 한 남자들이 옆에서 부산을 떠는데도 정국은 여주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빨리 물어보라고. 김 팀장님하고 무슨 사이인지.”

“미친놈아. 너도 무서우니까 나 시키는 거 아니야.”

“나 저번주에 형한테 털린 거 모르냐? 제일 오랫동안 안 혼난 거 너뿐임.”

“야. 그냥 다 닥쳐. 지태 시켜.”

“지태 새끼는 안 궁금하대.”


정국의 팀원들은 제 팀장과 여주의 관계가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지태와 은주를 제외한 나머지 세 사람이 옆에 쪼르르 몰려와 이 난리를 치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정국과 여주가 그리 떠나 버린 후에 자기들끼리 옹기종기 모여서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에 대해 무려 두 시간 넘게 토론을 이어 갔다. 

그런데도 이렇다 할 답을 내리지 못해 정국의 옆에 얼쩡거리기는 하지만 누구 하나 총대를 멜 기미가 안 보였다. 그 순간 부산스러운 느낌이 이상해 고개를 돌린 정국이 제 팀원들에게 시선을 던졌다. 


“거기서 뭐 해?” 


팀원들은 곧장 힘차게 고개를 젓고 언제 그랬냐는 듯 각자의 자리로 흩어져 버렸다. 

그리고 그건, 여주 팀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고 보니 팀장님 요새 통 남편 이야기 안 하지 않아?” 

“저번에 인사팀장님이랑 싸울 때도 전 팀장님 좀 이상하긴 했어.” 

“팀장님이 누구한테 오빠라고 하는 거 들은 적 있는 사람?” 


여주 팀원들은 정국 팀원들보다 눈치가 조금 빠르긴 했지만 마찬가지로 어떠한 정확한 답을 내린 것은 아니었다. 쪼르르 모여 앉아 엎드려 있는 여주를 보며 입을 달싹거리기만 하다가, 결국 가장 가까이에 있는 팀원 하나가 여주의 팔을 콕콕 찔렀다. 여주는 그 즉시 고개를 들고 부스스한 머리를 정리하지도 않은 채 눈썹을 추켜세웠다. 


“응. 왜? 할 말 있어?” 


어쩐지 다정스러운 목소리에 팀원이 침을 꼴깍 삼켰다. 약간의 결심 끝에 드디어 말하려는데, 다른 직원이 그 팀원의 허벅지를 꾹 누르며 대신 나서서 고개를 저었다.


“팀장님, 커피 드릴까요?”

“커피?”

“어제부터 계속 차만 드셨잖아요.”

“아… 좋지.”

“네. 제가 가져다드릴게요.”


겨우 판을 깔았는데 대화 주제를 바꿔 버린 팀원을 향해 의아한 마음을 가득 담은 시선이 꽂혔다. 그러더니 세 명이 동시에 일어나 커피 머신으로 향했다. 말하려다 저지당한 팀원이 자신을 말린 동료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야, 차지현. 갑자기 말이 왜 거기로 튀어?”


‘커피 하나 가지러 셋이나 움직여?’ 

쪼르르 줄지어 커피 머신으로 향하는 팀원들을 여주가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좀 전 정국의 팀원들이 그랬던 것처럼 여주 팀원들의 은밀한 대화가 시작됐다. 여주는 결국 머리를 털며 의자에 깊숙이 기댔다. 

그사이 팀원들은 다 내린 커피에 따뜻한 우유를 붓고 나서도 한참을 등을 보이고 선 채 열띤 토론을 이어 갔다. 여주에게 커피를 가져다주겠다고 말한 사람이자 대화 주제를 바꾼 주범인 지현이 조곤조곤 말했다.


“안 그래도 심란하실 텐데 우리까지 얹지 말자.”

“아니. 생각해 봐. 만약 전 팀장님이랑 무슨 사이기라도 하면 이거 좀 큰일 아니야?”

“솔직히 그렇다고 한들 뭐 어때. 일만 잘하면 되지.”

“어? 그런가….”

“일터에서 왜 도덕성을 운운해. 팀장님이 우리한테 뭐 잘못한 거 있냐.”

“없지. 근데 뜬금없이 전 팀장님이 튀어나오니까….”

“저요? 제가 왜요?” 


갑작스레 귓가에 들리는 낯선 음성에 쪼르르 선 세 명의 직원이 동시에 파르르 몸을 떨었다. 너무 놀라서 가슴께에 손을 올리고 바라보면, 오늘따라 머리가 부스스해서는 씩 웃는 정국과 눈이 마주쳤다. 

‘전 팀장님? 어디부터 들었지?’ 

팀원 중 단 한 명도 대답을 못 하고 아하하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그중 하나가 수습이랍시고 재빨리 커피를 정국에게 건넸다. 


“전 팀장님 커피 드릴까 하고요.” 


기껏 생각해 낸 게 겨우 이런 변명이었지만, 그래도 가만히 굳어 있는 나머지 두 명보다는 나았다. 정국은 얼떨결에 커피를 받아 들어 그 안을 빤히 보았다.


“이거 라떼 같은데. 제 거 확실해요?”


정국이 터질 듯 말 듯 한 웃음을 입에 걸고 다소 장난기 넘치게 말했다. 그러더니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잘 마시겠다 인사를 전하며 휙 떠나 버렸다. 

‘진짜 못 들은 건가?’ 

팀원들은 안심하는 표정이 반, 여전히 의심하는 표정이 반이었다. 지현은 그러다 갑자기 집중하는 표정으로 미간을 팍 모았다. 정국이 휙 몸을 돌릴 때 짙게 퍼진 향을 킁킁거리며 이걸 어디에서 맡아 봤는지 고민하는 지현의 표정이 꽤 진지했다. 


“왜. 된장찌개 냄새 나냐? 나 아침에 먹고 왔는데.” 


이어지는 팀원의 말에 결국 실소를 터트렸지만, 지현은 끝끝내 생각의 끈을 놓지 않고 거의 사라진 잔향을 음미했다.






모든 팀원이 바삐 움직인 덕에 회의 준비를 수월하게 마쳤다. 문을 걸어 잠그고 공동 테이블에 모여 너 나 할 것 없이 섞여 앉았다. 여주는 팀을 나누지 않고 모여 있는 모양새를 얼떨떨하게 바라보다가, 조금 떨어진 곳에 의자를 끌어와 털썩 앉았다. 그 앞으로 펼쳐진 화이트보드에 인물 관계도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여기까지는 여주 팀이 알아낸 것이고, 이제부터 추가 내용을 채우는 것은 정국 팀의 몫이었다. 

마스크를 내릴까 말까 고민하던 여주가 결국 손대지 않고 등받이에 기대는 순간, 여주 팀원 하나가 정국의 옆에 섰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여주를 대신해 정국과 함께 회의를 주도할 예정이었다. 정국은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여주에게 할 말이 있는 듯 입술을 달싹였다. 덩달아 시선을 옮기던 팀원이 아차 하며 손뼉을 쳤다. 여주는 정국에게 의견을 전하는 팀원을 보며 마스크를 내리려다 말고 손을 떨궜다.


“어제 전 팀장님께서 팀원 사생활이라 말 못 했다고 하셨잖아요. 그래서 정보 출처는 묻지 않으시겠대요. 대신 이제부터는 숨기는 건 하나도 없어야 해요.”

“전 그런 뜻이 아니라 정식으로 사과하려고 했는데요.”

“우리 팀이 조금 미숙하게 처리한 것도 있고 달리 문제가 생긴 것도 아니니까 퉁치자고….”

“아….”

“저 말고 팀장님이 그러셨어요.”

“네.”


왜 사람을 앞에 두고 나서서 대변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여주는 팀원이 애쓰는 게 갸륵해서 그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더 정확히는 미숙한 처리가 아니라, 상대의 정보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찾아내는 게 정보팀의 역할이니 불평하지 않겠다고 했다. 다만 이제부터는 신뢰의 문제이니 속이지 말아 줬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어찌 됐든 뜻은 통해서 상관 없지만 여주는 어쩐지 입이 근질거렸다. 

그사이 정국은 멍하니 앉아 있는 여주를 빤히 보다가 화이트보드에 손을 올렸다. 정국이 멀리 떨어져 있는 김상국 사진을 김선태의 바로 밑에 옮겨 붙였다.


“김상국은 김선태 동생입니다. 어려서 나란히 보육원에서 자랐어요. 김선태가 열일곱 살이 되는 해, 당시 열네 살이던 김상국을 두고 먼저 나갔습니다.”

“예? 하지만 김상국과 보육원에서 함께 자란 형은 죽었는데요. 게다가 이름도 김선태가 아니고….”

“김상헌. 그게 김선태예요. 죽은 게 아니라 신분을 세탁하고 열일곱 살부터 조직 일을 시작했어요.”


생각지 못한 정보에 혼란스러운 마음이 여주의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다. 김선태와 김상국이 단순한 파트너가 아니라 혈육 관계라는 데 놀랐다. 

은주는 여주의 표정을 살피며 손톱을 물었다. 이제 시작인데, 여주가 정보 출처를 묻지 않겠다는 말을 번복할까 봐 걱정이었다. 은주의 마음속 불안한 감정이 피어올랐다. 

이번에는 여주 팀원이 새로운 사진 한 장을 김상국과 서준호의 사이에 놓았다. 서준호는 이렇게까지 큰 존재감은 없었다가, 이번 일로 김선태와 견주는 위치까지 올라온 또 다른 실세였다. 팀원은 사진을 손톱으로 톡톡 건드리며 말했다.


“그때 전 팀장님이 화장실에서 마주쳤던 여자. 김상국과 만나던 애인이었어요. 지금은 헤어졌지만요. 근데 이 여자도 김상국이 김선태 동생인 것은 몰랐나 보네요. 그러니까 김선태가 있는 프라이빗 룸에 서준호와 함께 들어갔겠죠.”

“서준호랑요?”

“네. 아직 무슨 사이인지는 파악 못 했지만, 꽤 가까운 관계인 건 확실해요. 연인일 수도 있고요.”

“….”

“그럼 이제 사진을 서준호 쪽에 놔야 하나?”


말끝을 흐린 팀원이 서준호의 옆에 여자의 사진을 놓자마자, 마스크를 살짝 내린 여주가 다 갈라져 가는 목소리로 힘겹게 말했다. 


“그 정도 관계는 아니야. 서준호 옆에 붙이지 말고 아래에 붙여.” 


팀원은 여주의 지시에 곧장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사진을 끌어 내렸다. 테이블에 팔을 올려 턱을 괴고 대화를 경청하던 지태가 고개를 살짝 꺾으며 여주를 향해 눈짓했다. 곧 이어지는 지태의 물음에, 여주는 빨리 대응해 주기 위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때 들이닥친 남자들이 그 여자를 데려가려고 했다면서요. 치정 때문일까요?”

“치정극 같은 거요? 전 그냥 김상국이 또라이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해요.”

“또라이….”

“자기 형이 김선태라면 위치를 이용해서 아랫사람들을 충분히 구워삶을 수 있었을 텐데, 그거 하나 못 하고 반감을 샀어요. 게다가 김선태가 승기 좀 잡아 보려고 동생까지 소환하는 와중에 일에 집중 안 하고 여자를 끌고 가려고 했다? 이거 그냥 미친놈이죠.”

“….”

“생각해 봐요. 그렇게 데려가면 지가 어쩔 건데? 그러면 다시 자기 애인이 되기라도 하나? 성격 파탄자 아니면 탕아 둘 중 하나. 아니, 온갖 추잡한 말 다 갖다 붙여 주고 싶네요. 뭘 어쩌려고 그 여자를.”


말을 마친 여주는 계속하라는 듯 여자의 사진을 향해 고갯짓했다. 팀원은 멍하니 방심하고 있다가 놀라서 흠칫 몸을 떨었다. 정신 차린 팀원이 여자 사진을 다시 한번 톡톡 두드리며 정국을 돌아보았다.


“이 여자는 알아보니 양복집 사장이더라고요.”

“양복집?”

“아, 술집이요. 그것도 엄청 프라이빗한. 도청, 녹화 불가능하고 경비도 삼엄해서 저희도 아직 직접은 못 들어가 봤어요. 그러니 작당 모의하기에는 최적인 셈이죠. 구린 짓 하는 정치인들 다들 한 번쯤 거기 들어가 봤을걸요? 100% 예약제에 단골 인맥 아니면 고객 명단에 오를 수도 없어요. 고객을 직접 상대하는 여직원들도 다들 고학력이고요. 특히 사장이 많이 까다로워서 자기 직원들… 손님 옆에 앉아서 술 한 잔 못 따르게 해요.”

“근데 왜 양복집이라고 하죠?”

“거기 들어가려면 옷을 전부 벗고 신체검사를 해야 하거든요. 그러고 나서 새 양복을 한 벌씩 맞춰 주는데, 그래서 우린 양복집이라고 불러요. 저희도 이 여자가 사장인 건 이번에 처음 알았어요. 전 팀장님 덕분에요.”


정국이 머쓱한 얼굴로 볼을 긁적였다. 그 여자랑 키스 한 번 한 게 이렇게나 큰 정보를 물고 올 줄은 몰랐다.

정국은 그날 일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살려 달라는 여자의 외침을 들었다. 작전 중 발생하는 민간인과의 마찰은 무시하는 게 원칙이지만, 이미 여자에게 자신을 경호원이라고 소개한 탓에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게다가 여자가 정국을 빤히 바라보며 한 명을 콕 집어 도움을 요청하니, 생각보다 몸이 먼저 반응해 튀어 나가고 말았다. 

두세 명이 한꺼번에 달려드는 탓에 다치긴 했지만 그래도 기어코 여자를 구해 낸 정국에게 그는 명함을 하나 건넸다. 언제든 찾아오라고, 보답하고 싶다고 말했다. 결국 그 명함을 중심으로 여자를 역추적한 끝에 인물 관계의 정점을 찍는 정보까지 알아냈으니. 정국은 키스의 대가치고는 꽤 짭짤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괜스레 입술이며 목이며 간지럽기 시작해 불쾌했다. 살며시 미소 띤 팀원이 말을 계속했다.


“보니까 김선태와의 관계는 꽤 오래된 것 같아요. 아마 한진 회장부터가 그 집 단골이지 않았을까…. 김선태랑 오빠 동생 하는 사이인 걸로 봐서 김상국도 거기에서 만났을 가능성이 매우 커요.”

“오빠 동생 하는 사이라는 건 그때 도청?”

“네. 김선태가 서준호한테 그러더라고요. 그 여자가 오빠 오빠 하는 거 너무 믿지 말라고.”

“믿지 말라는 게 무슨 뜻일까요.”

“그러니까요. 사실 조금 이상한 게, 직원들은 물론이고 사장은 특히 사생활 관리가 철저할 거란 말이에요. 근데 고객이나 다름없는 사람을 두 명이나 만났다는 게 이해가 안 돼요. 특히나 김상국이요. 아무리 김선태 동생인 걸 몰랐다고 해도, 김상국이 김선태 측근인 건 알았을 텐데 어떻게….”


김선태와 여자는 오빠 동생 하는 사이인데, 여자가 김선태의 측근을 만났다는 게 이해 안 된다는 뜻이었다. 회장 때부터 연을 맺은 고객이라면 분명 철저하게 공과 사를 구분했을 터, 여자가 위험을 감수하면서 김상국을 만난 것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서준호에게 옮겨 간 것까지, 납득하기 어려운 행보의 연속이었다. 

김선태, 김상국, 서준호, 그리고 여자. 팀원이 네 명의 사진을 빤히 보며 골몰히 생각에 잠긴 그 순간, 내내 앉아만 있던 여주가 대뜸 일어나 성큼성큼 그 앞으로 다가갔다. 


“팀장님. 왜요?” 


여주는 팀원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여자의 사진을 떼어 내더니 서준호 옆자리로 옮겨 놓았다. 자신을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눈빛들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주가 화이트보드에 시선을 고정한 채 중얼거렸다.


“처음부터 서준호 파트너였어.”

“예?”

“이 여자 서준호 애인 아니야. 애초에 서준호가 김상국한테 작업 들어간 거야. 여자 이용해서 김상국을 제거하려고. 자기 관리 철저한 여자가 왜 그깟 사랑놀이에 빠졌나 했더니. 역시 아니었네.”

“….”

“김상국을 가장 아니꼬워했던 건 서준호였을 거야. 김선태는 넘을 수 없는 벽이라 반쯤 포기했는데, 웬 놈이 굴러 들어와서 자기 옆에 떡하니 자리 잡으니까. 그래서 눈여겨봤겠지. 특성 파악도 했을 거고. 어쩌면 쫓아낼 수도 있겠다 생각이 든 거야. 정보를 캐내는 건 껌이었을걸. 서준호는 김상국이 주색잡기에 환장하는 걸 알았거든. 그릇도 안 되는 놈이 자기 자리를 차지하려고 하니까 얼마나 화가 났을까.”

“….”

“조금 불쌍하네. 김상국이 김선태 동생이라는 걸 알았으면 그런 무모한 시도는 안 했을 텐데.” 


사진 속 서준호의 얼굴을 가만히 쓰다듬으며 혼잣말하듯 조곤조곤 작은 목소리로 말하던 여주가, 갑자기 입을 꾹 다물며 뒤를 돌아봤다. 많고 많은 사람 중 제 팀원 하나를 빤히 보며 미간을 구깃거렸다. 그러다 문득 무언가 떠오른 듯 옅은 미소를 띠었다.


“전 팀장님이 목격한 상황은 치정극이 아니라 복수극. 서준호랑 양복집 여자한테 놀아난 김상국이 욱해서 저지른 일이라, 이거죠. 그럴 생각 없었는데 때마침 여자가 보이니까 충동적으로 그랬을 수도 있고. 뭐, 이건 어찌 됐든 상관없고요.”

“….”

“그럼 서준호는 왜 김상국을 없애려 했지? 단순히 아니꼬운 거 말고 더 큰 거 하나가 있을 텐데.”

“밥그릇 위협을 받았겠죠.”


이번에는 정국의 대답이었다. 


“게네가 싸우는 이유는 별거 없어요. 김선태가 치고 올라올 틈을 보여 준 것도 있지만, 더 큰 건 김상국이 직접적으로 서준호의 입지에 위협을 가했을 거예요. 그러니 정리가 뭐야. 그냥 죽이고 싶었겠죠.” 


시니컬한 정국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중에서도 ‘밥그릇 싸움.’ 그 한마디에 꽂힌 여주가 곧장 옆에 선 직원의 어깨를 토닥였다.


“서준호가 가장 최근에 맡았던 일.”

“한국병원 장기이식센터 설립 건이요. 유제국 사위가 센터장으로 있는.”

“그거네. 거기부터 파 보자.” 


아주 간결한 대화가 한두 마디 오가고 여주는 다시 정국과 눈을 맞췄다. 털 수 있는 정보를 다 털어 내니 퍼즐은 아주 빠른 속도로 맞춰졌다. 이렇게 쉽게 될 일이었나 싶어서 조금 허탈하기도 하고, 정국이 정보를 넝쿨째 물고 들어온 복덩이라는 생각에 조금 고맙기도 했다. 여주 역시 제 감정이 무엇인지 몰라 혼란스러웠다. 

정국은 또다시 멍하게 생각에 잠긴 여주의 어깨를 살며시 토닥이고는 괜찮은지 묻기 위해 바짝 다가갔다. 자연스레 집중된 시선 끝에 나란히 선 두 사람이 걸리니, 팀원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침을 꼴깍 삼키며 눈을 부릅떴다. 

‘또 여주라고 해 봐요.’ 

‘또 오빠라고 해 봐요.’ 

마음속으로만 외치는 바람들을 모르는 건지, 정국은 별다른 동작 없이 멀어지며 살짝 미소를 띠는 것으로 대신했다.






정국은 여주가 계속 신경 쓰였다. 남들은 그냥 컨디션이 좀 안 좋나 보다 생각하고 말았지만, 정국의 눈에는 어딘지 모르게 자꾸만 이상한 기운을 뿜어내는 것처럼 보였다. 특히나 잠시라도 혼자 있을 때면 멍하게 사색에 잠기는 모습은 그중에서도 가장 이상한 점이었다. 

‘무슨 생각을 저리 골똘히 하지?’ 

정리할 내용을 곱씹는다고 하기에는 여주는 지나치게 멍한 눈빛이었다. 결국 안 되겠다 생각한 정국이 핸드폰을 집어 든 순간, 작은 진동과 함께 지민의 메시지가 들어왔다.


-형. 오늘 퇴근하고 여주 좀 데려가도 돼요?

-저 곧 이사하잖아요. 가구 골라 달라고 하려고요.


그다지 좋지 않은 타이밍이었다. 

‘왜 하필이면 오늘.’ 

마음 같아서는 오늘 말고 다른 날은 안 되겠냐 말하고 싶어도, 애초에 그걸 정국한테 허락받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됐다. 


[왜 나한테 물어. 여주한테 물어봐야지.]


정국이 조금 신경질적으로 답을 보내고 나니, 여주는 어느새 다시금 책상에 풀썩 엎드려 고른 숨을 내쉬고 있었다. 정국은 덩달아 나른해진 표정으로 여주를 빤히 보았다. 

‘혹시 나한테 화가 난 건가.’ 

이제 중요한 일은 거의 끝났겠다, 오늘은 조금 일찍 퇴근해 쉬는 게 어떠냐 묻기 위해 정국이 마침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 순간 누군가 팔을 툭툭 쳤다. 곧장 휙 돌아보니 언제 왔는지 모를 은주가 뚱한 표정으로 정국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국이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왜.”

“너무 노골적인 거 아냐?”

“뭐가?”

“오빠 시선이.”


출근하고부터 내내 정국의 시선이 여주에게 닿아 있었다. 은주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이상하게 생각하던 참이었다. 은주는 고요한 사무실에 시한폭탄을 툭 던져 놓고도 조심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이는 정국이 못마땅했다. 안 그래도 정국의 기분이 이미 충분히 별로라 말을 꺼낸 타이밍이 썩 좋지 않다는 게 문제였지만, 시선이 너무 노골적이라는 은주의 그 말 자체는 많은 이가 공감하는 바였다. 

정국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딱히 대답하고 싶지 않아 그대로 몸을 돌려 걸음을 옮기려 했다. 그러자마자 자신에게 집중된 시선을 눈치채고 우뚝 걸음을 멈췄다. 이 사무실 안에서 정국을 보고 있지 않은 건 여주 하나였다. 정국은 짜증이 담긴 표정으로 이마를 긁적이다가, 여주에게 향하는 대신 담배를 물고 사무실을 나섰다.






“가구를 봐 달라고?”

“어. 나 이제 곧 이사하잖아. 호텔 생활 정리하고.”

“아는데. 그냥 설비팀에 맡기지. 괜히 돌아다니지 말고.”

“김여주 겁쟁이.”

“그래. 너 용감해서 좋겠다. 용감하게 일찍 돌아가시겠네.”

“야….”


몸을 사리라고 분명히 말했는데 허락도 없이 현장으로 들어가 버린 지민 때문에 여주는 아직 심기가 불편했다. 물론 그 덕분에 정국이 이 정도만 다친 것이기도 하지만, 혹여 한진회 사람들이 지민의 존재를 알아차리게 된다면 상상 이상으로 일이 복잡해질 것이 뻔했다. 


“내가 너 때문에 온종일 머리가 터져. 알아?” 


지저분한 책상을 정리하며 톡톡 쏘는 여주의 한마디 한마디에 지민은 자기도 모르게 머리를 조아렸다. 그 모습에 마음이 좀 약해진 여주가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꼭 오늘 해야 돼?”

“음… 응.”

“참 손 많이 가는 인간이야.”

“….”

“알았으니까 자리로 가. 걸리적거려.”


앞으로 퇴근까지는 삼십 분 정도가 남았다. 여주는 그사이에 일을 좀 더 할지 아니면 청소를 할지 고민했다. 책상 앞에 서서 한참을 생각하던 여주는 어디선가 느껴지는 빤한 시선에 흘깃 고개를 돌렸다. 정국이 삐딱한 자세로 앉아 어쩐지 조금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여주를 보고 있었다. 

‘왜?’ 

여주가 입만 뻐끔거리며 왜 그러냐 물으니 정국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왜 그러지.’ 

내내 엎드려 있다가 또 생각에 잠겨 있다가, 여주는 그러느라 정국에게 미처 신경을 쓰지 못한 탓에 뒤늦게야 그의 컨디션이 좋지 않은 것을 알아차렸다. 난감한 마음에 입술을 물며 정국이 왜 저럴까 고민했다. 분명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괜찮았던 것 같은데 이상했다. 아무래도 따로 이야기를 나눠 봐야 하나 생각하는 순간, 콜록콜록, 기침이 두 번 터졌다. 

‘아, 진짜 너무 건조하다.’ 

닦을 걸 찾으며 두리번거리는 여주의 앞으로 때마침 지태가 불쑥 다가와 휴지를 건넸다. 여주는 정국의 눈치를 한 번 보고는 얼떨결에 휴지를 받아 들었다.


“고마워요.”

“감기 걸리셨어요?”

“아뇨. 그냥 좀 건조해서.”

“아… 건조하면 기침이 나오나 봐요.”

“…다 그렇지 않나?”


지태는 애매한 표정으로 고개만 끄덕였다. 건조해서 기침하는 사람을 처음 보는 것도 아니고, 이게 그렇게 신기할 일인가 싶었다. 여주는 볼일이 끝난 것 같은데도 떠나지 않는 지태가 신경 쓰여 괜히 휴지를 두어 번 더 접어 손안에 쥐었다. 지태는 뒤늦게야 살짝 고개만 숙여 보이고 망설임 없이 뒤돌아 제자리로 돌아갔다. 

여주는 그새 지태가 자기를 좀 편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서 그의 뒷모습을 빤히 봤다. 여주가 모르는 사이 분위기가 조금 바뀐 느낌이었다. 

‘너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니. 오늘 사무실 분위기 좀 이상하지?’ 

그런 마음을 가득 담아 일에 열중하는 팀원들을 흘깃 본 여주는 팀원 넷의 시선이 전부 다 제게 꽂힌 걸 알아차리고 너무 놀라 헉 소리를 내 버렸다.






“응, 자기야. 침대랑 옷장만 좀 봤어. 이제 무슨 조명 산다고 난리야. 이것만 보고 갈게.”

-밥은?

“집에서 먹으려고. 기침이 너무 나와서.”

-지민이도 데려와.

“지민이도? 아냐. 그냥 버리자.”

-왜.

“얘 엄청 찡찡거린다. 다 지 맘대로 할 거면 날 왜 데려온 건지 모르겠어. 이제 그만 헤어지고 싶어.” 


숨도 쉬지 않고 이어지는 여주의 말에 정국은 픽 웃음을 터트렸다. 이번에는 무슨 침대 옆에 놓는 조명을 사야 한다나 뭐라나. 벌써 네 바퀴는 돈 것 같은데 지민이 좀 더 봐야 한다고 고집을 피우기에, 여주는 지민을 혼자 보내 놓고 매장 안 카페에서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었다. 

‘박지민 체력 한번 살벌하다.’ 

실시간으로 다리가 부어오르는 게 그대로 느껴질 정도였다. 여주가 한쪽 귀에 꽂아 놓은 이어폰을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좀 더 편하게 조정했다. 


“자기야. 전화 끊지 말고 나랑 놀자.” 


여주는 묘하게 가라앉은 정국의 목소리가 신경 쓰여 할 말을 다 전했는데도 전화를 끊고 싶지 않았다. 애써 밝게 말하는 목소리가 중간중간 갈라졌다.


“여기 오니까 우리 결혼하기 전에 가구 보던 거 생각난다.”

-지민이랑 너랑 마치 신혼부부처럼 느껴진다는 뜻이야?

“아니. 어쩜… 말이 그렇게 되니.”

-목소리 들으니까 컨디션 좀 돌아온 것 같다?

“그래?”

-어. 어떻게 나랑 떨어지자마자 목소리 톤이 달라지냐. 서운하게.


아예 맛이 가 버려서 그다지 듣기 좋은 소리는 아닌 것 같은데, 목소리 톤이 어떻다는 건지 몰랐다. 정국의 입에서 직접적으로 서운하다는 말이 나오고 나니, 여주는 그제야 그가 어쩐지 조금 가라앉은 것처럼 보이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아까 사무실에서 내내 조용했던 여주를 신경 쓰는 듯했다. 정국 때문에 그런 것도 아닌데 애먼 사람을 마음 쓰게 했다.

자기가 그렇게 감정 절제를 못 했나 싶어 아차 한 여주가 아랫입술을 물었다. 이내 볼을 긁적이며 잠시 망설였다. 일단 무슨 말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입을 떼려는데, 때마침 저 멀리 기둥을 돌아 이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한 남자를 발견했다. 

여주는 순간 너무 놀라 아이스크림 스푼을 떨어트려 버렸다. 그와 동시에 심장 박동이 급속도로 빨라지는 걸 느꼈다. 여주가 차분하게 자리를 정리하고 카페를 벗어나는 것까지 망설임 없는 동작으로 이었다. 여전히 통화를 끊지 않은 채 지민을 찾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그래도 좀 불안해서, 내내 벗어 두었던 마스크까지 쓰고 묶었던 머리를 풀어 얼굴을 가렸다.


“자기야. 나 방금 한진회 사람 봤는데. 우리 따라온 걸까?”

-한진회? 어디에서. 지금 너 혼자 있어?

“난 이제 지민이 찾아보려고. 그 사람이 나를 보는 것 같지는 않았어.”

-사람 없는 데로 가지 말고 일단 거기 있어. 내가 바로 갈게.

“안 돼. 만약 들킨 거라면 자기까지 노출되게 할 순 없어.”


조금 떨어진 매장에서 걸어 나오는 지민을 발견한 여주가 티 나지 않게 걸음을 빨리했다. 지민은 아직 여주를 발견하지 못했는지 또 다른 장식품에 정신이 팔려 몸을 반쯤 숙이고 구경했다. 최대한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지민 곁에 다가간 여주는, 슬쩍 지민에게 팔짱을 끼고 주차장과 이어진 출구로 그를 끌었다. 


“뭐야?” 


얼떨떨한 지민이 순순히 끌려가면서도 물었다. 여주는 곧장 아무 말 말라는 듯 눈짓으로 주의를 줬다. 

이 모든 게 우연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 확률이 더 높을 수도 있다. 하지만 여주는 한진회 사람을 발견한 이상 후속 처리를 미룰 수 없었다. 어느덧 차 앞까지 당도한 여주가 지민을 조수석에 먼저 태우고, 자기도 운전석에 올라타자마자 문을 잠갔다. 여주는 핸드폰을 지민에게 건네고 지체 없이 차를 몰아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지금 오빠랑 통화 중이거든? 네가 받아서 상황 설명 좀 해.”

“도대체 뭘? 난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는데?”

“아까 거기서 한진회 사람 봤어.”

“뭐?”

“우릴 따라온 건지는 모르겠는데, 일단은 너 호텔 정리하고 안가로 가.”


안가. 안전 가옥을 뜻하는 말이었다. 요원이나 증인을 보호하기 위하여 설립한 것으로, 지부별로 두세 개의 안가를 보유하고 있다. 주소지가 존재하지도 않지만 안다고 해도 공유할 수 없었다. 여주는 수년 전 방첩 업무를 맡았던 당시 안가에서 생활했던 경험이 있어 찾아가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지금부터 아무 곳도 들르지 않고 곧장 안가로 향할 거라는 여주의 말에, 지민은 여전히 얼떨떨한 채 정국에게 말을 전했다.


“네, 형. 안가로.”

“….”

“일단은 저희 둘뿐이긴 한데…. 야, 여주야. 우리 둘만?”


여주는 고개를 저었다. 


“애들도 오라고 해야 돼. 장비 챙겨서 넘어오라고 할 거야.” 


정확하게 상황 파악을 마칠 때까지는 조금 지나치다 싶은 정도로 몸을 사리는 게 좋다. 어차피 안가에 있을 거 다 있고, 차장 눈치 안 보고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할 수 있으니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불안감이 불쑥 치밀어 여주는 입이 다 말랐다. 

티를 낼 수는 없었다. 자기가 불안해하면 팀원들은 더 동요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3년 전 지우가 사고를 당했던 그날도, 그리고 지금도. 팀장의 역할이 무엇인지 여주만큼 잘 아는 사람은 없다. 지민은 운전에만 열중하는 여주를 힐긋 보고는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뭘 했길래 안가까지 갔냐고 그러시던데요.

“뭘 한 게 아니라, 뭘 안 하기 위해서 그랬다고 대답하지.”

-저는 팀장님만큼 말발이 좋지 않아요.

“암튼 차장 말은 신경 쓰지 말고. 장비 다 챙겼어?”

-네. 아, 그리고, 전 팀장님이….


말끝을 흐리는 팀원의 목소리에 여주가 침대 시트를 씌우다 말고 핸드폰을 고쳐 잡았다. 


“전 팀장님이 왜?” 


정국이 여주에게는 별말 없었던지라 여주는 그새 또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싶어 긴장했다. 팀원은 큼큼 헛기침을 한 번 하더니 지나치게 작은 목소리로 가만히 속삭였다.


-현장팀도 가겠다고….

“응? 현장팀도?”

-네. 지현이한테 연락 왔나 봐요. 그래서 그쪽 팀 차 타고 가기로 했는데….

“….”

-팀장님?

“아, 일단 알았어. 하자는 대로 해.”

-네.


‘그걸 왜 나한테 이야기 안 하고 지현이한테 연락했지.’ 

정국은 분명 아까 여주와 통화할 때까지만 해도 도착하면 전화를 달라는 말뿐이었다. 하지만 여주가 도착하자마자 전화한 것이 무색하게도 내내 통화 중이었다. 그래서 여주는 메시지를 남기는 것으로 대신했는데, 그사이 여주 팀원과 연락한 정국이 이곳으로 오겠다 결정까지 내린 게 아니겠나. 좀처럼 생각을 읽을 수 없는 여주가 미간을 구겼다. 

물론 와 주기만 한다면 도움받을 일이 많겠지만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어서 나름 배려해 준 것이었다. 좀 더 자세히 묻기 위해 여주는 곧장 정국에게 전화를 걸었다. 끊기지 않는 연결음에 침대에 걸터앉아 발을 까딱이길 몇 분, 전화를 받지 않는다는 음성 메시지가 흘러나왔다. 

‘뭐지.’ 

여주가 한 번 더 통화 버튼을 꾹 누르며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한 시간쯤 지나고 나서야 나머지 팀원들이 도착했다. 차와 안가를 오가며 쉴 새 없이 짐을 옮기는 팀원들 사이, 정국이 저벅저벅 조금 빠른 걸음으로 여주를 향해 다가갔다. 뭘 하려나 싶어 그중 몇몇이 의아한 시선을 던졌다. 정국은 누가 말릴 새도 없이 대뜸 여주의 손목을 잡고 가장 가까운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딸깍. 곧장 문이 잠기는 소리와 함께 여주 팀원들은 당황해서 눈을 깜빡였다. 


“뭐야. 싸우는 거야?” 


팀원들이 무슨 일이냐며 덩달아 방으로 향하려 하기에 지민이 그 앞을 막아 세우며 괜찮다고 달래 주었다. 


“왜 같이 들어가요?” 

“왜 문을 잠가요?” 


혹여 제 팀장이 잘못되기라도 할까 불안해하는 목소리들이 터졌다. 그게 좀 불쾌한 듯 정국 팀원이 말했다.


“형이 무슨 짓이라도 할까 봐요? 우리 형 그런 사람 아니에요.”

“무슨 짓을 한다는 게 아니라요.” 

“우리는 도와주러 온 건데 그런 반응은 좀 기분 나쁘네요.”


상황이 상황인지라 조금 예민해져서 그런지 대화가 신경질적으로 변하려고 했다. 지민은 애써 밝게 웃으며 분위기를 풀어 보려 노력했다. 지민이 곧장 맞받아치려는 제 팀원의 손을 꾹 누르며 그만하라는 듯 눈짓하고 말했다.


“그러지 말고 밥부터 먹을까요? 다들 식사하셨어요?”






왜인지 화가 난 듯한 정국을 앞에 두고 여주는 당황스러워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정국은 조금 상기된 얼굴로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후, 후, 거친 숨을 몇 번 뱉었다. 스스로 진정하려 하는데도 쉬이 되지 않는 모양인지 고개를 살짝 떨궜다. 눈을 질끈 감고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물다가 한참 만에 고개를 들어 여주와 눈을 맞췄다. 도대체 왜 그러는지 몰라 별다른 말 없이 가만히 있는 여주에게 정국이 다소 거친 숨으로 말했다.


“너 나한테 화난 거 있어?”

“…없어.” 

“근데 왜 그래? 내가 진짜 이해하려고 해 봤는데 가만 보면 공과 사를 구별하는 게 아니라 그냥 너랑 나를 구분 짓는 것 같아.”

“….”

“종일 신경 쓰여 죽겠는데 컨디션 안 좋아 보여서 그냥 뒀어. 근데 적어도 팀에 문제가 생겼으면 나랑 상의해야 하는 거 아니야?”


상의해야 한다니. 여주는 한 번도 그리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지금은 협력하고 있는 관계이긴 하지만 어찌 됐든 완전한 팀은 아니고, 게다가 지민에 관한 것은 접점을 찾을 필요도 없이 완벽하게 자기 일이라고 생각했다. 유제국 수사와 관련된 것도 아니고, 그저 한진회와 지민의 사이에서 벌어지는, 그것도 3년 전부터 끈질기게 연을 맺던 이야기인데. 상의하지 않아 화를 내는 정국을 이해할 수 없었다.


“우리 팀 일이라고 생각했어. 도와주면 고맙지만 그러지 않더라도 문제없어서. 나 혼자 해결할 수 있는 일이라서. 그래서 상의 안 했어.”

“그럼 남편한테는 뭐라고 얘기할 건데. 집에도 못 들어가고 안가에 있어야 하는 이 상황 말이야. 또 예전처럼 거짓말할 거야? 출장? 아니면 친정?”

“무슨 소리야. 상황 다 아는데 왜 거짓말을 해.”

“나는 네 남편이야, 아니면 협력하는 팀장이야?”

“….”

“내가 느끼기에는 둘 다 아닌 것 같아.”


반면에 정국은 여주가 말한 공과 사라는 게 무엇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일에 감정이 섞이는 게 싫다고 철저하게 사적인 공간을 분리하는 것까지는 이해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둘만 있을 때도 제 감정을 공유하지 않는 여주가 낯설게 느껴졌다. 여주는 분명 심적 변화가 있는 것 같은데, 일터에서도 집에서도 좀처럼 터놓고 이야기하질 않았다. 

그래도 기다리면 언젠가는 말하겠지, 본인도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겠지, 정국은 그리 위안하는 것도 이제는 지쳐 버렸다. 정국이 숨긴 정보가 있다는 걸 알고 나서도 화를 내지 않는 여주만 봐도 잘 알 수 있었다. 이미 사적인 감정이 섞여 버린 걸 여주 본인만 모르고 있었다.


“왜 나한테 화 안 내? 내가 너 속였잖아.”

“….”

“말 안 해 놓고 뻔뻔해서 미안한데. 난 네가 화내지 않는 이 상황이 너무 무섭고 낯설어. 이제 아무 말도 안 하려는 건가 싶어서 조급해. 그래서 들어야겠어.”

“….”

“내가 너한테 김상국에 대해서 말 안 한 거. 협력하기로 해 놓고 뒤통수쳐서 화가 났어? 아니면 결혼한 사이인데 못 할 말이 뭐가 있나 싶어서 서운했어.”

“….”

“그럼 지금은? 네 말대로 내 도움 필요 없다고 치자. 그래도 무섭지 않아? 내내 두려워했던 상황이잖아. 지민이가 다시 위험에 빠지게 될까 봐 겁먹었잖아.”

“….”

“기회 좀 줘. 네가 사과하라면 사과하고, 납득시키라면 이해할 때까지 설명할게. 무서우니까 안심시켜 달라면 그것도 전부 다 할게.” 

“….” 

“내가 남편인데. 그 정도 위로도 못 해 주는 거야?”


여주는 사실 두려웠다. 누군가 본다면 확실하지도 않으면서 뭘 그리 오버해서 안가까지 들어가냐고 비난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래도 만에 하나라도, 정말 아주 낮은 확률이라도, 일이 생기는 것보다는 오버하는 편이 훨씬 나았다. 여주는 지우를 잃은 것이 자신의 무능력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지난날 정국에게 지우가 그 밑에 있었으면 그렇게 허무하게 죽지는 않았을 것 같냐고 물은 것도 진심만을 담은 말이었다. 

‘남편한테 그런 감정 하나 털어놓지 못하냐고?’ 

사실 그 이유는 여주도 잘 알지 못했다. 정국의 말처럼 어느 순간부터 일에 사적인 감정이 섞여 버린 건지, 아니면 사생활에 공적인 앙금이 뒤섞인 건지. 본인조차도 알 수가 없어 혼란스러웠다. 

정국의 말에 의하면, 정국이 여주에게 김상국에 대해 말하지 못한 건 팀원의 사생활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여주가 지금 일을 정국에게 말하지 않은 이유 역시 팀원의 사생활 때문일까? 협력하는 팀원이 위험에 빠지게 될지도 모르는 이 상황, 이게 진정 지민의 사생활일까? 여주가 정국에게 이 일을 상의한다면 지민이 무언가 피해를 보게 되나? 찬찬히 질문을 던져 보면 둘의 차이점을 명확히 알 수 있었다. 어쩌면 여주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곧 대답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국은 평소라면 쉬이 대답하지 못하는 여주를 언제고 기다려 줬겠지만, 이번에는 왜인지 곧장 몸을 돌렸다. 여주는 정국이 필요 이상으로 화내는 게 이상하다 생각하면서도, 무엇 때문에 그러는지 알 것 같아 조금은 이해했다. 정국은 언제나 자신의 안전보다 여주의 안전에 더 예민하게 굴었다. 여주도 그걸 잘 알았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그대로 굳어 버려 아무런 말이 나가지 않았다. 딸깍, 정국이 문고리에 손을 올리고 몇 초간 망설인 끝에 문을 열고 나가 버렸다.






다른 사람들은 저녁을 먹고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회의한다는데, 여주는 몸이 안 좋다는 핑계를 대고 일찌감치 누웠다. 팀원에게 전달 사항을 꼼꼼히 일러 주고 이불 속으로 파고든 여주가 조금 지친 표정으로 눈을 깜빡거렸다. 어쩌다 상황이 이렇게 됐을까 곰곰이 생각했다. 꼬인 매듭을 풀고 싶어도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된 건지 몰라서 엄두가 안 났다.


“틀린 말은 하나도 없네.”


정국이 화를 내는 모습을 처음 본 건 아니었다. 이보다 더 크게 싸운 적이 훨씬 더 많았다. 근데 오늘은 어쩐지 가슴이 콕콕 쑤시는 게, 여주는 상처받을 것 같았다. 여주도 모든 걸 다 털어놓고 싶었다. 정국이 여주의 편이 되어 준다면 정말 든든하겠다고 생각했다. 그게 뭐 어렵다고 하지 못하는지 여주 역시 답답할 지경이었다. 

여주는 정국이 팀원의 사생활 때문에 정보를 숨겼다는 말을 듣고 쿨하게 인정했다. 여주도 팀원 사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정보라면 오픈할 생각이 없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쿨하다고 함은, 겉으로 티 내는 게 하나도 없었다는 뜻이다. 근데 속은 아무도 몰랐다. 그 속도 마냥 쿨했을까.

정국이 단순히 지민의 일을 상의하지 않아 화내는 게 아니라는 걸 여주는 잘 안다. 지민의 위험보다도 여주의 위험에 더 큰 관심이 있다는 것도 잘 안다. 여주의 위험을 정국 자신이 모르게 되는 상황이 올까 겁낸다는 거, 여주는 정말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눈물이 날 것 같아 엎드려 누운 여주가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어쩌면 이 일이 적성에 안 맞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자신해 놓고 결국엔 여주가 먼저 사적인 감정을 섞어 버렸다. 솔직히 서운했다. 거짓말하는 정국에게 화도 났다. 그런데 일과 관련된 것을 사생활에 끌어오고 싶지 않다는 알량한 신념 때문에 꾹꾹 눌렀다. 정국이 한 말 중 틀린 게 하나도 없는데, 여주는 인정을 못 했다. 

여주가 만약 정국에게 변명할 기회를 줬다면, 정국은 최선을 다해서 여주를 납득시켰을 것이다. 그런데 여주는 그 기회 자체를 원천 차단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괜찮다 말하고, 하던 일을 계속하고, 태연하게 회의까지 했다. 솔직히 말하면 정말 괜찮아서가 아니라 모든 걸 듣고도 서운해하는 자신을 보고 싶지 않았다. 팀의 사생활 같은 건 오픈하지 못할 테니까, 정국이 할 수 있는 변명은 한정되어 있었다. 여주는 정국이 어떠한 사고의 흐름대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 얼추 알 것 같았다. 

김상국이 김선태의 동생이라는 핵심 정보를 여주에게 오픈하려면 은주의 사생활을 밝힐 수밖에 없다고 했다. 만약 여주가 그 정보를 알게 된다면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해서 최악의 경우 작전을 취소할 수도 있으니, 정국은 정보를 숨긴 대신 자기가 직접 현장에 나갔다. 정국 기준 감당 가능한 수준의 위험이라는 판단이었다. 결과적으로 그렇게 얻은 추가 정보는, 김상국과 김선태가 생각 이상으로 긴밀한 사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면 정국은 팀원의 사생활을 하나도 오픈하지 않고, 한 번의 작전만으로, 여주에게 자연스럽게 정보를 제공할 수 있게 된다. 문제는 변수였다. 작전 중 알게 된 민간인의 위험을 맞닥뜨렸고, 원칙을 어기고 돕다가 부상당했다. 많은 정보 속에서 여주가 꽂힌 건 오로지 정국의 부상 하나였다. 중간 과정을 모조리 생략하고, 정국이 자기에게 정보를 숨기다가 부상까지 당했다는 비약적인 결론을 내렸다.   

여주는 서운하고 서러웠다. 하루 지나고 나니 멍해졌다. 혼자서 자꾸 깊은 생각에 잠기는데, 정국에게 단 하나도 말하지 않았다. 여주는 작전상 실수를 인정했다. 설령 정국이 정보를 숨겼다고 해도, 그것은 여주가 미리 대비해야 할 문제이기도 했다. 원칙대로, 실수를 인정한 뒤 제대로 사과하고 수습하는 게 다음 수순이었다. 그런데 그중 하나도 못 하고 감정적으로 무너져 버렸다. 공적으로 보자면 본인의 일 처리를 눈 뜨고 볼 수가 없고, 사적으로 보자면 정국에 대한 서운한 감정이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컸다. 한마디로 모조리 다 최악이었다. 불 꺼진 방 안에서 그렇게 혼자 곱씹으며, 또 한 번 어두컴컴한 곳으로 내려가기만 했다.






“넌 이 와중에 술을 챙겼냐.”

“안가 들어오면 허가 없이 밖으로 못 나간다잖아.”


바깥의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좀 전 팀원 간의 말싸움이 마음에 쓰여서 자리를 만든 지민 덕분에, 빛의 속도로 화해한 팀원들이 이른 시간부터 술판을 벌였다. 불을 환하게 켜 놓은 채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 모습이 여주의 방과 대비되었다. 

정국은 그 사이에 낄 자신이 없어서 방으로 들어갈까 하다가 말없이 술 한 잔을 따라 마셨다. 독한 술이 목구멍을 타고 흘러 피를 돌게 했다. 정국이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소파에 깊숙이 기대자, 팀원들은 게임이라도 할 태세로 테이블 중앙을 비워 두었다.


“우리 진실 게임 해요.”

“와, 게임 선정 뭐야. 최악이다.”

“아니. 나 궁금한 거 있거든.”


정국 팀 남자는 자기를 비난하는 지민에게 장난스레 눈짓하며 옆구리를 콕콕 찔렀다. 


“궁금한 거? 뭐? 나만 몰라?” 


지민 하나만 빼고 일제히 웃음을 터트리는 모습에 지민이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다 비운 술병 하나를 테이블 중앙에 놓은 정국 팀원이 짐짓 엄하게 으름장을 놓았다. 


“이거 돌려서 걸리는 사람은 그 어떤 질문에도 무조건 답해야 하는 거 알죠?” 


다들 꿍꿍이가 있어 곧장 고개를 끄덕이는 새 정국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딜 가냐며 손을 끌어당기는 팀원 때문에 다시 앉아야 했지만 정국은 끝까지 필사적으로 거절 의사를 내비쳤다.


“야. 빨리 돌려. 형 도망간다.”

“나 이거 진짜 잘 돌리는 거 알지.”

“미친놈아, 빨리하라고.”


병 하나를 놓고 투덕투덕 다투는 모습에 은주가 웃음을 터트렸다. 괜히 머쓱해진 팀원이 입술을 삐죽이며 술병을 뱅그르르 돌리자, 다들 흥미로운 표정으로 눈을 반짝이며 술병과 정국을 번갈아 보았다. 지민은 그제야 사람들의 궁금증이 정국을 향한 것임을 알아차렸다. 뭐가 궁금한 건지도 모르면서 지민이 덩달아 눈을 빛낼 때쯤, 술병 회전하는 속도가 점점 느려지는가 싶더니 입구가 정확히 정국을 향해 멈춰 섰다. 


“나이스!” 


그와 동시에 또다시 도망가려는 정국을 이번에는 양옆에서 단단히 붙잡았다. 질문을 누가 할 것인지, 뭘 할 것인지, 별다른 의논 없이 숨도 쉬지 않고 누군가의 말이 튀어 나갔다.


“형. 김 팀장님이랑 무슨 사이야?”


지민은 떡 벌어지는 입을 틀어막았다. 둘의 사이를 궁금해하는 상대 팀원들 때문에 자기가 더 조마조마했다. 혹시나 해서 제 팀원들을 바라보아도, 그들 역시 궁금해 미치겠는 얼굴로 정국의 대답을 기다리기만 했다. 대체 그런 걸 왜 궁금해하는지 몰라서 초조한 지민과 달리 정국은 팔짱을 끼고 앉아 태연한 표정으로 입술을 축였다. 


“대답 못 하면 이거 마셔야,” 


팀원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정국이 앞에 있는 벌주를 그대로 입 안으로 털어 넣었다. 정국 팀원들은 얼떨떨해하고 여주 팀원들은 그게 왠지 모르게 멋있어서 입을 가렸다. 순식간에 정적이 찾아온 사이 정국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기까지 했다. 


“너희끼리 놀아. 다들 편히 마시세요. 저 먼저 들어갈게요.”


팀원들은 표정이 좋지 않은 정국을 보며 혹시 화가 난 건가 싶어 서로서로 눈을 맞췄다. 눈치껏 궁금증을 접고 좀 더 있다 가라며 붙잡으려고 하는데, 팀원들이 잡아 세우기도 전에 움직임을 멈춘 정국이 어딘가를 보며 멍하게 눈을 깜빡였다. 

자연스레 모든 이의 시선이 집중된 곳에 여주가 서 있었다. 그새 조금 울었는지 눈이 빨갛게 충혈된 여주가 정국을 스쳐 지나 소파에 털썩 앉았다. 정국은 자리에 선 그대로 몸만 돌려 여주를 바라보았다. 앉자마자 술 한 잔을 들이켠 여주가 미소 띤 채 물었다. 


“뭘 그렇게 재미있게 해요?”  

“아, 아, 저희 진실 게임….” 

“재미있겠네. 나도 끼워 줘요.”

“….”

“뭐야. 내가 방해했어요?”

“아, 아니요!”


당황한 남자 팀원이 한눈에 보기에도 잔뜩 경직되어 술병을 손에 쥐었다. 이걸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눈치를 보는 팀원에게, 그 누구도 첨언하지 못했다. 

팀원들은 정국과 달리 여주가 조금 어려웠다. 여주 팀원들은 매너 있는 정국을 편하게 생각했고, 정국 팀원들은 정국을 형 오빠 하며 따른 시간이 길어 상사 그 이상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여주는 달랐다. 여주는 제 팀원에게는 엄격한 상사이자, 상대 팀원에게는 빈틈없는 완벽주의자였다. 

여주 또한 그런 마음을 아는지 픽 웃음 지었다. 굳어 있는 팀원을 대신해 자기가 직접 술병을 돌렸다. 술병이 돌아가며 뱅그르르 소리를 내기 시작하니, 내내 멈춰 있던 정국이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정국은 여주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라 입술을 물었다. 자기 때문에 혼자 울었나 싶어 마음이 쓰였다. 때마침 우뚝 멈춰 선 술병이 여주를 향하자, 이번에는 전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경직된 팀원들이 서로 질문을 하라며 떠넘기기만 했다. 여주는 씁쓸한 웃음을 터트렸다. 


“다들 나한테는 궁금한 거 없어요?” 


물기가 가득 묻어난 여주의 물음에,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 움직임을 멈추고 침묵만 유지했다. 그 순간 지태가 휴지 두어 장을 뽑아 여주에게 건넸다. 타이밍 좋게 똑 하고 떨어진 눈물을 여주가 재빨리 휴지로 닦아 내니, 지태는 불쑥 질문을 던지기까지 했다. 정국은 갑작스러운 여주의 눈물에 놀란 것도 잠시, 지태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몰라 미간을 구겼다.


“우리 형이랑 무슨 사이예요?”


여주는 한 번 흐르기 시작한 눈물을 막을 수가 없어 끊임없이 울먹거렸다.


“팀장님…. 왜 울어요.” 


팀원들이 옆에서 껴안고 등을 토닥여 주자 여주가 더 울컥해서 입술을 삐죽였다. 그러면서도 지태의 물음에 답을 해 주려는 듯 입술을 달싹이니, 너 나 할 것 없이 대답할 필요 없다며 여주를 달랬다. 


“야. 지태 새끼야. 넌 이 와중에 질문을 하냐.”


당황한 탓에 남자 팀원들의 말이 조금 거칠게 나갔다. 사람들이 약속이나 한 듯 이제 이런 거 말고 그냥 술이나 마시자고 슬슬 상황을 정리할 때쯤, 여주가 천천히 입을 떼 조곤조곤 말했다.


“다들 날 너무 냉정하다고 생각하지 말아요. 나는 내 한 몸 건사하기도 벅찬 사람이에요. 그쪽 팀은 서로 생각하고 위해 주는 사람 많죠? 우리는 안 그래요. 우리 애들은 여려서 내가 챙겨 줘야 돼요.”

“….”

“그래서 난 다른 데 한눈팔 여유가 없어요. 여긴 우리 편이 없어요. 우리뿐이에요. 부장님도 차장님도. 다른 팀 사람들까지. 좋은 사람 많지만 내 편은 아니에요. 가혹하다 싶을 정도로 사람을 몰아세우는데, 나까지 흔들리는 모습 보이면 우리 애들은 어떡해요.”

“….”

“속이고 싶어서 속이는 거 아니에요. 이건 그냥 내 방어 기제예요. 말하는 것보다 감추는 게 훨씬 나았어. 내 한평생 그랬어….”

“….”

“혹시라도 내가 상처 준 적 있으면 미안해요. 솔직히 앞으로 안 그러겠다고 장담은 못 하는데. 그래도 같이 일하는 동안만이라도 조심해 볼게요. 우리 애들만 안 건드리면 나도 최대한 협조할게요.”

“….”

“근데 질문이 뭐였지? 우느라 다 까먹었어. 사실 내가 지금 왜 우는지도 모르겠어. 우는 거 진짜 싫은데…. 내일 일 안 시킬 테니까 다들 술 좀 많이 마셔요. 많이 마시고 오늘 일 다 잊어 줘요.”


손등으로 눈물을 벅벅 닦은 여주가 제 앞에 있는 술잔을 한 번 더 호로록 털어 넣었다. 


“팀장님. 그거 벌주인데….”

 

좀 더 독한 술이라는 걸 몰랐던 건지 여주는 마시자마자 너무 써서 눈을 질끈 감았다. 입을 틀어막고 괴로운 소리를 내는 여주에게 팀원 하나가 재빨리 과일을 먹여 주었다. 눈이 크게 떠질 정도로 그야말로 엄청난 독주였다. 입 안의 쓴 기운은 거의 가셨지만 속이 부글부글 끓는 듯 여주가 인상을 썼다. 한참 만에 웃음을 터트린 정국이 소파에 깊숙이 기대며 여주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내 묻는 목소리가 담담했다.


“왜 엉뚱한 소리만 하지. 질문 그거 아닌데.”

“….”

“나랑 무슨 사이냐고 묻잖아요.”

“맞다, 참. 그랬지?” 


여주는 머쓱하기도 하고 난감하기도 해서 볼을 긁적였다. 정국은 친절히 벌주 하나를 더 타 여주 앞에 놓아 주었다. 여주가 따지는 듯 보며 말했다. 


“저 마셨는데요?”

“대답할지 말지 결정하고 마셔야죠. 혼자 마셨으니까 무효예요.”  


아랫입술을 꼭 깨문 여주가 정국을 노려보며 제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왜 저러는지 몰라 원망스러운 시선이 정국에게 닿았다. 정국은 웃지 않으려고 해도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좀 전까지만 해도 화를 내더니 뭐 좋다고 웃고 있느냐 불평하는 여주의 마음을 모르는 건지, 정국이 볼을 긁적이며 여주에게 장난스레 눈짓했다. 


“대답 못 하겠으면 마셔 줄까?” 

“…됐어요.” 


여주가 제안을 거절하고 술잔을 집어 드는 순간, 정국은 쓱 술잔을 빼앗더니 여주 대신 단번에 들이켰다. 저 인간 둘이 또 뭐 하는 짓인가 싶어 사람들이 얼떨떨한 표정을 지을 때쯤, 정국이 휙 테이블을 넘어 여주와 마주 보고 앉았다. 테이블에 걸터앉아 여주의 양 볼을 부드럽게 감싸는 정국을 보며, 여주는 너무 놀라 말문이 막혀 버렸다. 뭘 하는 거냐는 의문을 가득 담아 빤히 보는 사이, 정국에게 잡힌 양 볼 때문에 여주가 자연스레 고개를 위로 추켰다. 


“내가 대신 마셔 줬잖아.” 


이내 아주 작은 정국의 목소리가 이어지고,


“이건 내 소원.”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여주 입술 위로 정국의 입술이 포개졌다. 정국은 고개를 살짝 꺾어 여주의 아랫입술을 입 안 가득 머금고는 다른 한 손으로 뒤통수를 쓸며 더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 힘에 밀린 여주가 소파 등받이에 기대려 하니 정국이 물 흐르듯 따라가 허리를 쓰다듬었다. 당황한 여주가 정국의 가슴팍을 밀어 보았지만, 꼼짝도 않고 그저 단단한 근육이 손에 닿을 뿐이었다. 숨이 차서 가쁜 호흡을 뱉는 사이, 살짝 떨어진 입술이 곧장 반대쪽으로 교차해 맞닿았다.

숨을 쉬지 않는 건 둘뿐만이 아니었다. 나머지 팀원들 역시 저마다의 방법으로 숨을 참고 있었다. 보면 안 될 것 같은데 자꾸 시선이 갔다. 두 사람을 멍하게 바라보는 한 남자 팀원의 허벅지를 지태가 살짝 꼬집었다. 


“보지 마, 새끼야.” 


작게 말한다고 했는데도 침묵 속에 덩그러니 던져진 지태의 그 한마디에, 한참 만에 다소 진득한 소리를 내며 입술이 떨어졌다. 여주는 붉어진 얼굴로 옅은 숨을 내쉬었다. 당황한 건 여주뿐인지 정국은 그런 여주의 볼을 감싸고 쪽쪽 두 번의 입맞춤을 더했다. 자기 때문에 흐트러진 여주의 머리칼을 태연한 얼굴로 살살 정리해 주기까지 했다.


“진짜 미친 건가….”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여주의 말에 정국이 소리 내 웃었다. 지금 이 공간 안에 정국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패닉에 빠졌건만, 정작 본인은 여유롭다 못해 즐거워 보이기까지 했다. 


“내 말이. 진짜 미쳤네.” 


여주 말을 인용한 은주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번에는 조금 반응한 정국이 은주를 흘깃 돌아보며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은주는 반쯤 해탈한 표정으로 정국과 눈을 맞췄다. 이제 다 알게 됐으니 어떻게 할 거냐는 의문이 얼굴에 담겨 있었다. 그에 화답하듯 정국은 한참이나 은주를 빤히 보다가, 다시 여주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무슨 할 말이 있는지 입술을 달싹이는 정국에게 여주는 제발 더는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애원을 담아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도 야속하게 떨어진 정국의 입술이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말을 툭 뱉어 냈다.


“여주야. 그냥 말하면 안 돼?”

“….”

“내가 네 남편이라고.”

“….”

“쟤네가 나 쓰레기 보듯 하잖아.”






신혼 전쟁



잠에서 깬 여주가 부스스한 머리를 정리하지도 않고 부엌으로 나와 따뜻한 물 한 잔을 마셨다. 그사이 먼저 일어난 정국의 팀원들은 아침 식사를 하다 말고 벌떡 일어나 여주를 향해 허리를 꾸벅 숙였다. 순간 너무 당황해서 물을 조금 뿜어 버린 여주는 손등으로 대충 쓱 닦으며 큰 눈을 깜빡였다. 


“부담스럽게 왜 그러세요?” 


여주가 한껏 움츠러들어 눈알을 도르르 굴리기만 하는데, 누군가는 티슈를 뽑아 여주에게 건네고 또 다른 누군가는 의자를 꺼내 주며 앉으라 손짓하고 심지어는 재빨리 여주 몫의 식사를 준비하는 사람도 있었다.


“아, 제발. 그러지 마세요.”


여주는 질색했다. 밥 생각이 없을뿐더러 저 사이에 앉고 싶은 마음이 단 1g도 없어서 쪼르르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그러니까 팀원들이 또 한 번 벌떡 일어나 허리를 꾸벅 숙였다. 

‘아니. 왜 저래, 진짜?’ 

그전에는 대충 고개 숙이는 게 다였으면서 갑자기 오버하니 속이 다 울렁거렸다. 여주가 다 마시지도 못한 물을 들고 재빨리 거실로 나와 고개를 저었다. 시간을 돌리고 싶었다. 앞으로도 계속 이러는 건 아닐까 짜증이 밀려왔다. 오늘은 팀원들을 피해 구석에 박혀서 일이나 해야겠다 마음먹을 때쯤, 어디선가 나타난 정국이 대뜸 뒤에서 허리를 끌어안으며 여주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정국은 여주의 옷 속으로 손을 넣어 허리를 만지작거리더니,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쪽쪽 볼 뽀뽀를 이어 갔다. 

‘진짜 미쳤나 봐. 미친 게 분명한 것 같아.’ 

여주가 이 화상을 어쩌면 좋을지 고민하는 사이, 계단을 내려오던 여주 팀원 하나가 그대로 몸을 돌려서 다시 위로 저벅저벅 로봇처럼 걸었다. 부엌을 나서던 정국 팀원 하나는 역시나 몸을 돌려 제 팀원들의 엉덩이에 별안간 발길질했고, 마지막으로 막대 사탕을 문 지민이 쯧쯧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여주는 하하 어색한 웃음과 함께 정국의 발을 살며시 지르밟았다. 아, 소리를 낸 정국이 자연스레 떨어져 눈을 흘겼다. 여주가 세상 싸늘한 표정으로 돌아보며 이를 악물었다. 


“작작 해라.” 


누가 봐도 간신히 화를 참고 있는 듯한 여주의 목소리에, 정국은 얼떨결에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거실 한가운데 화이트보드를 펼쳐 놓은 여주가 사무실에서의 기억을 더듬어 한 자 한 자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얼마 가지 못하고 펜이 나오지 않아 잔뜩 미간을 구긴 채 두어 번 털어 보았다. 옆에 있던 남자 팀원 하나는 그걸 보자마자 재빨리 어딘가로 튀어 나갔다. 

‘뭐지?’ 

여주가 의아하게 생각하며 탈탈탈 펜을 다시 터는 순간, 남자 팀원이 또다시 후다닥 달려와 여주에게 새 펜을 건넸다. 한껏 공손한 자세로 펜을 건네는 모습에 여주는 티 나지 않게 한숨을 내쉬고 쓰던 걸 마저 이었다. 

‘전정국. 아오, 전정국.’ 

머릿속에는 온통 정국을 향한 원망뿐인데도 실수 한 번 안 하고 망설임 없이 쓱쓱 적었다. 하나둘 모인 팀원들이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아 여주를 구경하기 시작했다. 


“진짜 다 외웠나 봐.” 

“너 형수님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 


신기하다는 듯 속삭이는 목소리에 누군가 곧장 타박했다. 여주는 그 순간 비끗 삑사리가 난 글씨를 벅벅 닦으며 입술을 물었다. 마지막 남은 여자 팀원 하나가 핸드폰을 들고 방에서 나오더니 곧장 여주의 옆에 가 섰다.


“팀장님. 차장님이 안가 진행 상황 실시간으로 보고하라고 하시는데요.”

“왜?”

“혹시 저번처럼 일 생길까 봐 그러시는 것 같아요.”


아침부터 차장의 전화를 받은 팀원이 난감한 표정으로 말을 전하는데도 여주는 표정 변화 하나 없이 하던 일을 계속했다. 미친놈이 별소리를 다 한다고 욕할 타이밍인데 어쩐지 답이 없고 반응도 없었다. 흘러내린 머리칼이 신경 쓰여서 헐렁한 끈을 풀어낸 여주가 다시 묶기 위해 손바닥으로 잔머리를 쓸었다. 


“뭐라고 전할까요?” 


한시라도 빨리 차장에게 답을 줘야 해서 초조해진 팀원이 어쩔 수 없이 여주를 재촉했다. 여주는 그런데도 끈을 입에 물고 화이트보드만 빤히 바라보았다. 이내 웅얼거리며 말하긴 했는데, 뭘 물고 있어서 알아들을 수 없었다. 


“네? 팀장님, 뭐라고요?” 


팀원의 물음이 한 번 더 이어졌다. 물고 있던 끈을 빼 머리를 묶은 여주가 다시 펜을 집어 들며 팀원 쪽은 보지도 않고 툭 말을 던졌다.


“좆 까라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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