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레이 키즈 - 끝나지 않을 이야기

프롬님 :)

민선생과 별사탕

24




여주의 뒤를 따라 느린 걸음으로 집안으로 들어서는 정국과 정국의 모친. 둘이 지내던 고급 저택은 아니었고, 깔끔한 방 4개가 딸린 집이었다.



"여기라면 지내시는데 크게 불편함은 없으실 거예요."

"..."

"어머니랑 지내는데 큰 문제는 없을 거야. 나랑 남준선배가 자주 들를 거니까 불편한 거 있으면 저기, 거실에 있는 화이트보드에 써놓고,"



여주가 거실 벽 한쪽에 붙어있는 화이트보드를 가리키며 말한다. 정국의 시선이 화이트보드로 향하고는, 말없이 캐리어를 끌고 가장 안쪽에 있는 방으로 향한다.




"어, 여긴 내 방인데."

"선생님도 여기서 지내세요?"



정국의 당황한 말투에 윤기가 피식 웃으며 정국 쪽으로 다가온다. 정국아, 누구셔? 옆에서 묻는 모친에게 떨떠름한 말투로 답하는 정국.



"우리 담임선생님."



대체 담임 선생님이 왜 이 집에서 같이 지내는지, 누가 봐도 이상할 상황이었지만. 정국의 모친은 그저 미소를 띠며 윤기에게 인사를 한다. 골드문 회장인 전 남편을 만난 이후로 그녀의 인생이 순탄한 적은 없었으니까. 이것도 그중의 하나겠지. 윤기와 인사를 나눈 모친의 시선이 여주에게 향한다.



"정국이한테 얘기 많이 들었어요. 친구가 생겼다고 그러던데,"

"아, 엄마!"

"얘는."



쓸데없는 소리 좀 하지 마시라구요. 정국이 툴툴대며 윤기의 옆방으로 들어간다. 방 안으로 들어간 정국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쳐다본 여주는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모친의 시선에 아앗, 하며 머리를 긁적인다.



"어떤 사정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쁜 분이 아니시라는 건 알겠어요. 형사님도, 그리고 정국이 담임 선생님도요."



여주와 윤기는 서로 눈을 잠시 맞추고는 살짝 미소 짓는다.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전회장 때문에 인생의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을 모두 경험해본 모친의 입가에도 미소가 걸릴 수밖에 없었다.

여러분들 잘못은 없어요. 전부 다, 정국이를 외롭게 만든 그이 잘못이에요. 모친의 미소는 꼭 그렇게 말하는듯했다.








윤기와 정국은 화양 경찰서에서 보호하는 자택에서 지내면서 평소와 다름없이 학교를 나갔다. 오가며 마주치는 백현의 모습이 꽤 껄끄럽기는 했지만, 그날 정국이 여주 쪽으로 옮긴 이후로 더 이상 접근은 없었다.



"여주도 학교를 나왔는데 변백현 그 자식이 아직 붙어 있는 이유는,"

"뭔가 확실히 있긴 있는 거죠."



강력 1반과 마약 1반 형사들은 전회장보다도 백현에 더 집중하기 시작했다. 지난날 백현이 했던 의미심장한 말도 있었고, 전회장은 일을 마무리하고 정국과 중국으로 가고 싶어 했다는 그 말.

회의실에 크게 자리 잡은 화면에는 학교 도면이 띄워져 있었다. 백현이 주로 지내는 교무실에서부터, 여주가 백현에게 위협받은 5층 복도까지.



"저는 교무실보다도 5층 복도가 더 위험할 것 같아요. 그때 제가 쫓아갔을 때 찰나였지만 확실히 당황한 것처럼 보였거든요."

"분명 우리가 수사하려는 걸 모르지는 않을 거야. 트릭이 있을지도 모르고. 그걸 뚫고 증거를 잡아내는 게 어렵다는 거지."

"..."

"밤에 학교를 잠입하는 거? 어렵지는 않지만 노력에 비해 얻는 게 전혀 없을 수도 있어."



여주는 선배들의 말을 경청했다. 짧게는 몇 년, 길게는 몇십 년이나 여주보다 경력이 많은 선배들이니까.



"저희 마약 1반에서는, 은성 물산의 주축인 릭이 학교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는데 초점을 맞췄습니다."



오랜 시간 동안 비축해온 빅데이터를 분석해보면 패턴을 분석하기 쉽죠. 호석이 이어 말하며 프레젠테이션을 시작했다. 그동안 마약 1반이 소탕해온 거대 마약 조직의 정보들과 그들의 활동 패턴을 분석해놓은 빅데이터를 총정리한 발표였다. 다들 숨죽이고 경청하기 시작했다.



"일반인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그 포인트, 그 허점을 노려 시장을 뚫는 게 마약상들의 특징입니다. 그리고 저희 마약 1반에서 분석한 릭의 마약 거래 또한, 비슷하죠."



강력 1반 오형사가 손을 들어 질문한다. 그렇다면 릭이 노린 허점이란 건 어떤 거죠? 오형사의 질문에 호석이 여유로운 웃음을 지으며 답한다.



"학교'라는 거죠."

"..."

"저희 마약 1반은 학교 컴퓨터실 수사를 강력 1반에 정식으로 요청하는 바입니다."








여주가 거실에 붙어있는 화이트보드를 꼼꼼히 읽는다. 설거지를 하고 그릇을 뒤집어놓을 거치대가 필요하다는 메모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정국 모친의 요청인 것 같았다. 남준에게 카톡을 보내놓은 여주가 복도에 줄지어 선 방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늦은 시간에 잠시 집에 들른 거라 다들 잠이 든 게 분명했다. 별다른 요청이 없는 거라면 나도 그냥 집에 가야지.



"이제 퇴근한 거예요?"



막 현관으로 향하려던 여주는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뒤를 돌았다. 아직 안 자고 있었던 건지, 부산스러운 소리에 여주인가 해서 나와봤던 윤기였다. 여주의 얼굴 가득 웃음이 번지자 윤기의 얼굴에도 웃음이 가득.




"학교 안 나오니까 출근하는 재미가 없더라. 우리 반 분위기 메이커가 없어져서."



그 분위기 메이커가 나야? 여주가 묻는다. 그걸 몰라서 묻는 거냐는 윤기의 핀잔에 여주가 민망한 웃음을 짓는다. 3월부터 학교에 나갔고 지금이 10월이니까,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 동안 학교에 많은 정이 들었다.

꼭 윤기뿐만이 아니라, 9반 아이들에서부터 정국, 아미. 그리고 귀찮아했지만 사실은 꽤 귀여워했던 지민까지. 여주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애들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요?"

"어떻게 알았어?"

"표정이 딱 그런데."

"아, 맞다. 나 형산데 얼굴에 마음이 다 드러나는 스타일이었지."

"괜찮다니까."



윤기가 여주를 안심시키듯 말한다. 응? 뭐가 괜찮다는 거야, 여주가 되묻는다.



"나쁜 마음이 아니니까,"

"..."

"괜찮은 거라고 했잖아요, 내가."



꽤 오래전, 정국이 때문에 여주가 불안해하고 우울해할 때 달랬던 말을 그대로 인용하는 윤기다. 여주가 울컥하는 마음에 괜히 윤기의 시선을 피한다. 그 피한 시선의 끝에 정국의 닫힌 방문이 보이는 바람에, 다시 고개를 바닥으로 떨궈버렸지만.



"아미도 씩씩하게 잘 지내고 있고, 박지민 그 자식은,"

"...응?"

"계속 누나 찾기는 하는데, 그냥 두고 있어요."



약간의 질투가 묻어나는 목소리에, 여주가 물기 묻은 웃음을 터트린다.



"지민이 걔가 제일 많이 놀라겠다. 주접이 보통내기가 아니던데."



여주의 말에도 윤기는 답이 없다. 질투하는 건가? 의아한 마음에 여주가 고개를 들면, 질투가 아닌 걱정스러운 얼굴로 여주를 내려다보는 윤기가 있다.




"왜 정국이 얘기는 안 물어봐요?"

"..."

"이 집에서 지낸 이후로, 한 번도 못 마주쳤으면서."



엄청 궁금하고, 걱정하고 있잖아요. 윤기의 말에도 여주는 답이 없다.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는듯한 표정에, 그저 걱정스러운 얼굴로 여주를 쳐다보는 윤기.



"궁금하고 걱정되지. 너만큼이나 생각 엄청 나."

"..."

"미안. 사실 너보다 더 많이 생각하는 것 같아."



여주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눈을 찡긋거린다. 황당하고 질투가 나기는 하지만, 그래도 정국을 향한 여주의 마음이 얼마나 컸고 아팠을지 누구보다도 잘 알았던 윤기였기에 그저 웃기만 했다.



"그때 변백현 버리고 나한테 와줘서 너무 고마운데,"

"..."

"그게 나한테 남아있는 믿음 때문인지, 아니면 아버지에 대한 원망인지, 어머니를 위한 정국이의 선택이었을지 그건 모르는 거잖아."

"..."

"정국이 얼굴 보고 오해를 풀고 싶었고, 처음엔 아니었더라도 정말 진심으로 친동생처럼 아꼈다고 해명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그게 아니었더라. 여주가 어두운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정국이한테 나는 아무 말도 못 해. 사과도 염치없는 짓이고, 믿어달라는 말은 더더욱."

"..."

"내가 하는 일이 옳다고 생각했는데, 그 잘못된 방법 때문에 그것마저 다 틀어진 느낌이야. 나는 그래서, 정국이한테 아무 말도 못 하겠어. 얼굴도 못 보겠고."



울먹이는 여주의 목소리가 점차 울음소리에 먹혀들어 갔다. 여주를 안타까운 눈으로 내려다보던 윤기가 천천히 다가가 여주를 안았다. 윤기의 품에 안겨 토닥임을 받는 여주는 더욱 세게 어깨를 파르르 떤다. 혹여나 울음소리가 새어나갈까 최대한 숨죽여 우는 모습조차 안타까웠던 윤기.



"글쎄, 내가 집에서 봐왔던 정국이 모습은 그게 아니었는데요."



으응? 그게 무슨 소리야. 여주가 윤기의 품에서 벗어나 묻는다. 눈에는 눈물을 그렁그렁 달고서, 궁금하단 얼굴로 저를 올려다보는 여주가 퍽 예뻐 보였다. 여주의 걱정을 덜어내 줘야 하는데 어쩐지 웃음이 나고 만다.



"김여주 사과 안 받아주면 생기부 엉망으로 써줄 거라 협박했거든."



아, 뭐야, 장난하지 마. 여주가 울먹거리며 윤기의 가슴을 팡팡 친다. 윤기가 제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서 하는 말이라는 건 알았지만, 마음이 정국이 걱정으로 가득 차서 그런 애정 표현조차 받아줄 여유가 되지 않았다. 여주가 저의 애정 표현을 받아주지 않아도, 그저 입가에 웃음을 가득 머금은 채로 여주를 안는 윤기.



"그냥 다 미워."

"..."

"전회장도 밉고, 변백현은 개새끼야!"

"나도 약간 동감."



으응? 여주가 당황한 얼굴로 윤기를 올려다본다. 윤기는 어깨를 으쓱하고 만다. 마지막 말은 윤기의 입에서 나온 말이 아니었다. 여주가 떨리는 눈으로 윤기의 어깨너머를 쳐다본다.



"진짜 생기부 엉망으로 써줄 거예요?"

"..."

"그거 권력 남용 아닌가."



윤기가 웃으며 여주를 품에서 떼어내고는 제 방으로 들어간다. 여주와 정국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맴돌았다.








"지내는데, 뭐 불편한 건 없고?"



여주가 먼저 무거운 침묵을 깨고 물었다. 여주의 물음에 정국이 고개를 끄덕였다. 꽤 오랜 시간 이 집에서 머물렀지만 이렇게 여주와 마주 보고 서 있는 건 처음이었다. 윤기나 제 어머니와 몇 번 대화하는 소리를 듣기는 했지만, 여주의 목소리가 들리면 절대로 방에서 나오지 않았던 정국.



"민쌤이랑 사귀냐."



정국이 넌지시 물었다. 여주가 입술을 꾹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픽, 웃음을 흘리는 정국. 그렇게 주접을 떨어대고 민쌤도 뭔가 수상하더라니. 성인과 고등학생의 연애여도, 그게 민쌤과 김여주라면 상관없었던 정국에게 크게 부담으로 다가오는 정보는 아니었다. 오히려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아버지한테는 연락 안 와."

"..."

"그거 궁금해할 것 같아서."

"아니야. 이제 너한테 그런 거 안 궁금해."



왜? 정국이 퉁명스럽게 물었다.



"진짜 친구라고 생각했거든."

"뭐?"



진심을 꾹꾹 담아 뱉는 여주의 말에, 정국이 떨리는 눈으로 여주를 내려다본다. 답을 바라는 정국의 눈빛에, 여주가 조금은 안심을 하며 꿋꿋이 답했다.



"진짜 친구한테는 그런 불순한 의도를 갖고 묻는 거 아니야, 바보야."

"..."

"몰랐냐?"



여주의 장난스러운 말에 정국은 말을 잃었다. 겉으로는 장난스러워 보였지만, 강하게 느껴지는 여주의 진심에 말을 잃었다.



"미안해, 정국아."

"..."

"속였던 모든 일들이 미안하고, 또 서운하게 만든 것도 미안해."



이어지는 사과에 여주의 시선을 피했다. 듣고 싶었던 말들과 사과였음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여주의 눈을 마주할 수가 없었다. 여주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모르는 두려움이었을까, 속았다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어서 그랬을까. 제 시선을 피하는 정국을 쫓아 일부러 눈을 맞춘 여주가 말했다.



"그래도 매 순간순간이 즐거웠어."

"..."

"나는, 진심을 다해 너한테 친구였어, 정국아."



어쩌면 이 말이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이었을 수도 있었다. 내면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진실의 소리를 애써 무시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정국 또한 여주를 진심으로 친구라 여겼고, 여주 또한 그게 진심이었다는 사실에,

안심이 되었으니까.








CCTV를 통해 백현의 위치를 파악한 강력반은 무전을 통해 이곳저곳 형사들을 배치했다. 백현이 막 학교를 벗어난 것을 확인한 강력반은 그대로 교문을 걸어 잠갔고, 협업을 위해 마약반 형사들이 백현의 뒤를 쫓았다. 혹여나 다시 학교로 돌아올 일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 컴퓨터실 진입합니다.



최전방에 서서 무전을 날리는 선배의 뒤를 숨죽여 쫓아가는 여주. 여주의 안내에 따라 컴퓨터실을 손쉽게 찾고 조심스럽게 문을 열면, 학교의 보안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빨간빛의 레이저가 컴퓨터실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이 프로그램을 막으면 변백현한테 신호가 가겠지."

"안 막고 어떻게 진입해요?"

"그러려고 내가 온 거 아니겠냐."



강력 2반 해킹 전문인 형사가 씩 웃으며 가방에서 패드를 꺼낸다. 미리 준비해놓은 프로그램을 돌리면 거짓말처럼 빛을 잃어가는 레이저. 뭐야, 어떻게 한 거예요? 여주가 놀라 물었다.



"별거 아닌 알고리즘이야. 애초에 마약이 주특기니 이런 해킹 프로그램에는 취약할 수밖에 없지."

"..."

"특히 나같이 전문가인 사람한테는, 초등학생 수준의 보안 프로그램이랄까?"



와씨, 선배님 개 멋있어요. 여주가 박수를 친다. 강력 2반 형사가 보안 프로그램을 뚫었다는 무전에 반장의 한숨 섞인 목소리가 무전을 통해 들려온다.



- 그러니까 강력 2반 반장한테 사정사정해서 내가 데려온 거 아니야.

- 반장님, 고생하셨습니다!

- 고오급 인력 데려왔다고 소고기 쏘란다, 소고기.

- 골드문만 잡으면 소고기는 무슨, 소목장도 가능한 거 아닌가요?

- 야, 네가 반장이야? 소목장 살 돈 대줄 거 아니면 조용히 해.

- 넵.



미쳐 죽어. 무전에서 들려오는 선배들의 농담에 여주가 웃음이 터진다. 이제, 저 많은 컴퓨터 중에 변백현이 작업을 쳐놨을 컴퓨터를 찾기만 하면 되는 거네. 여주가 승리의 미소를 짓는다.

작업 끝냈습니다, 끝끝내 컴퓨터를 찾아낸 형사가 무전을 친다.



- 고생했다, 현장 팀 철수.



물증을 잡을 날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중국이 원래 마약이 그렇게 활발해요? 해킹된 백현의 컴퓨터 화면을 뚫어지게 보던 남준이 호석에게 묻는다. 마약 전문이 아니니 궁금할 만한 질문이었다.



"한국처럼 코딱지만 한 나라에서 마약을 살 수 있는 사람들? 끽해봐야 대기업 자제들이나 정신 나간 연예인들 정도."

"..."

"하지만 러시아나 중국으로 나가면 그 클라스가 달라져요. 그래서 마약상들의 주 무대가 러시아랑 중국인 거예요. 변백현 이 새끼는 중국이 주 무대인 거고."



호오, 남준과 여주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맨날 서로 놀리고 그래도, 또 이럴 땐 형사 같고 그렇단 말이야? (셋 다 형사)



"중국어랑 영어랑 어순이 똑같아서, 중국 놈들이 영어를 그렇게 잘한대요. 그럼 변백현도 영어 겁나 잘할 것 같다."



다들 끝이 보여서였을까. 빠르게 변환하는 숫자들을 보면서 시답잖은 농담들이 오가기 시작했다. 남준의 말에 여주가 아! 하며 핸드폰을 뒤적이기 시작한다.



"뭔데 그래?"



남준이 궁금하단 표정으로 여주의 핸드폰을 흘긋 쳐다본다.



"변백현 그 새끼, 내가 중국어 못 하는 거 알고 자꾸 중국어로 쌸라쌸라 하는 거 알아요?"

"..."

"개 열받아. 걔가 모르는 언어 뭐가 있을까요? 아랍어? 스페인어?"



김여주 미친놈. 남준과 호석이 같은 생각을 했다.








"요즘 누님 없으니까 서운하기는 하다, 그치."



석진이 기지개를 쭈욱 펴며 말한다. 윤기도 석진의 말에 동의하기는 했지만, 거의 매일 여주의 얼굴을 보니 막 그렇게 우울할 정도는 아니었고. 그냥 그 넘사벽 주접이 그리운 정도?



"근데 진짜 누님 주접 대단하기는 했어, 안 그러냐?"



윤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방금 그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째 이런 것까지 통하냐.



"누님은 요즘 뭐 하셔? 엄청 떠들썩하게 학교 나가시고 통 소식이 없네."

"그냥, 바쁘지, 뭐."

"뭐 때문에?"

"대한민국 형사가 그렇게 한가한 줄 아냐. 너처럼 농땡이 피울 수 있는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너 되게 좀 그렇다? 대한민국 전국의 보건교사를 멕이는 말이었어. 내가 만약 대한민국 보건 교사 협회에 너 말 올리잖아? 너 그럼 인생 끝이야. 우리 보건교사끼리 얼마나 돈독한데? 학교 이름 불어라, 교사 이름 불어라, 엄청 시끄러워질 거라고!"



야야, 시끄러워. 조용히 해봐. 윤기가 석진을 밀치며 말했다. 아, 거참 사람 되게 서럽게 하네~! 석진이 소리치면 윤기가 진지하게 석진의 입을 틀어막는다. 야, 뭔데 그래? 석진도 사건의 심각성을 깨닫고 윤기의 시선을 쫓아간다.

운동장에 경찰차 여러 대가 사이렌 소리를 내며 들어오기 시작했다. 수업 시간이라 조용한 학교 운동장에 사이렌 소리가 울려 퍼지니 선생이고 학생이고 할 것 없이 창문에 다닥다닥 붙어 운동장을 쳐다보기 바빴다. 수업이 없었던 윤기 또한 보건실에서 석진과 함께 창문으로 바깥을 내다봤다.



"야, 너네 누님 아니야?"



마지막으로 정차한 경찰차에서 내린 여주의 모습에 석진이 호들갑을 떤다. 경찰 제복을 입은 여주가 당찬 걸음으로 운동장을 가로질러 건물을 향해 들어온다. 윤기가 급히 보건실을 빠져나간다. 여주를 포함한 제복을 입은 경찰 여러 명이 잔뜩 각이 선채로 계단을 올라간다. 그중 몇 명은 컴퓨터실로 직행했고, 여주를 포함한 강력반 형사들은 백현이 일하고 있을 3학년 9반으로 향했다.



"이 문장의 성조는, 뭐야?"



앞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는 여주를 보고 백현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진다. 여주의 얼굴을 너무나도 잘 아는 9반 학생들은 저마다 각자의 방식으로 놀라움을 표현했다. 제 입을 틀어막는 학생도 있었고 너무 놀라 벌떡 일어난 학생도 있었고.

수업을 듣던 정국 또한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백현과의 사이가 껄끄럽기는 해도 표면적으로는 어쩔 수 없이 수업을 듣고 있었는데, 그렇게 여주가 밤낮없이 일하던 그 일. 그 일이 마무리되는 날이 오늘이었던 건가.



"바깥으로 나오는 게 좋을 텐데요."

"뭐야?"



남준의 비아냥대는 말에 백현이 불쾌한 표정을 잔뜩 드러낸다. 아니면 컴퓨터실로 올라가실래요? 남준이 또 한 번 비아냥대면 백현이 주먹을 꽉 쥐고는 교실을 빠져나온다. 당연히 수업을 듣던 학생들도 소란스럽게 복도로 따라 나온다. 3학년 9반뿐만 아니라 지민을 포함한 다른 학년 학생들도 궁금한 얼굴로 기웃대고 있었다.



"지금 이 학교가 어느 재단 건지 알고는 이러는 거야? 뭐 잘못 처먹었어?"



여주가 학교를 떠나고 나서야 컴퓨터실에 트릭을 설치했기에 모를 줄 알았는데. 다 알고 있다는 거겠지. 백현이 여주를 노려본다. 그리고는 마지막 발악이라도 하려는 듯 복도를 빠져나가려는 백현. 하지만 둘러싼 학생들 때문에 빠져나갈 구멍은 없었다.



"변백현씨. 당신을 마약류 관리법 위반 및 범죄 수익 규제법 위반 혐의로 긴급체포합니다. 당신은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고, 당신이 하는 말은 당신에게 불리한 증거가 될 수 있으며, 변호사를 선임할 권리가 있습니다."



성큼성큼 백현에게 다가간 여주가 가볍게 백현의 손을 제압해 수갑을 채운다.



"이거 놔. 미쳤어? 죽고 싶어? 증거 있어?"

"아아, 증거는 차고도 넘치고요. 나중에 심문하면서 다 따질 거니까 그건 걱정하지 마시고?"

"긴급 체포? 영장 있어?"



영장은 경찰서 가면 도착해 있을걸요. 남준이 심드렁한 목소리로 답한다. 미쳤다, 그럼 김여주가 학교에 있었던 게 중국어쌤 때문이었나 봐. 학생들이 수군대는 소리가 커졌다.



"미친. 여주누나 진짜 미쳤다."



지민이 하이. 발버둥 치는 백현을 제압하면서 여유롭게 인사하는 모습까지. 지민은 한 번 더 심쿵 했다. 남준이 여주를 도와주려고 다가오면, 여주가 남준을 제지하고는 비장한 얼굴로 백현에게 말한다.



"Đã bị quản thúc!"

"뭐?"

"베트남어로 체포한다는 뜻이다, 이 새끼야!"



김여주 미친 거 맞다니까. 남준과 호석이 시선을 맞추고는 고개를 절레 젓는다.








은성 물산과 변백현의 수사는 순조롭게 되고 있었다. 물증을 확보했기에 빠져나갈 구멍은 없었고, 비록 수사에 비협조적이기는 했지만 그것도 다 시간문제였다. 임시로 마련했던 거처는 폐쇄 조치됐다. 윤기는 평소와 다를 것 없이 학교로 출근했고, 정국은 학교에 나가지 않았다. 윤기는 정국이 마땅한 서류를 내지 않아도 담임 재량으로 정국의 무단결석을 막았다.



"전회장?"



그토록 찾아 헤매도 보이지 않던 전회장이 드디어 정국의 집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꼬박 사흘 동안 정국의 집 앞에서 잠복하던 강력 1반 형사들은 불편하게 쪼그리고 있던 자세를 고쳐잡으며 당장이라도 뛰어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초인종을 누르는 전회장의 모습에 무전은 바쁘게 오갔다.



"오랜만이네요."



집 밖으로 나온 정국이 덤덤한 얼굴로 아버지를 마주한다. 많이 수척해졌고, 정국을 걱정하는 얼굴에는 변함이 없었지만, 정국의 결심 또한 변하지 않았다.



"잘 지냈니?"



하지만 생각보다 전회장의 얼굴은 평온해 보였다. 잠복 중이던 차에서 형사들이 내려도, 이미 예상했다는 눈빛으로 돌아볼 뿐이었다.



"변이사에게 들었어. 직접 찾아오라고 했다며?"

"..."

"안 그래도 찾아오려고 했었는데."



형사들은 전회장의 말을 기다려주지 않고 수갑을 채웠다. 강력 1반이 수년간 쫓던 골드문의 실체를 완벽하게 잡아내는 순간이었다. 미안하다. 정국에게 쓸쓸한 말을 남기고 경찰차로 끌려가는 전회장.



"선배님, 잠시만요!"



막 경찰차로 연행되려는 순간, 고민하던 여주가 그 앞을 막는다. 왜 그러냐는 선배들의 물음에, 꾸벅 인사를 한 여주가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전회장을 마주한다.



"원래 바로 연행인 거 알죠? 부하들 많이 잡혀가 봐서 알 거 아냐."

"..."

"이러면 안 되는데, 당신 아들이 예뻐서 기회 주는 줄 알아요."

"..."

"아들한테 사과해요, 지금 당장."



수갑을 채운 채로 정국의 앞에 전회장을 다시 데려다 놓는 여주. 정국과 여주의 눈이 마주친다. 고맙다는 눈빛을 여주에게 보내는 정국, 그리고 고개를 끄덕거리는 여주.



"미안하다, 정국아."

"..."

"당연히 경찰이 이곳에 있을 거라 생각했어. 잡힐 걸 모르고 온 건 아니다."



정국이 아랫입술을 깨물며 제 아버지를 노려봤다. 지난날의 원망이 가득 담겨 있었다. 왜 바르게 살지 못했냐는 원망과, 왜 내 어머니를 힘들게 했냐는 원망이 가득.



"정말로, 그 일을 청산하고 싶었어. 변이사에게 모든 일을 다 넘기고 정말로 너와 새 삶을 살고 싶었다, 정국아."

"..."

"제때 끊어냈어야 하는데, 마지막까지 욕심이 생겨 완벽하게 변이사한테 넘기고 싶었다. 그것 또한 내 욕심이었겠지."



전회장이 고개를 푹 숙인다. 어느새 정국의 눈에도 눈물이 가득 차 있었다.



"두 마리의 토끼를 잡으려던 건 내 실수였다."

"..."

"그것과 비할 것 없이 소중한 건 정국이 너였는데,"



볼 위로 뚝 떨어지는 눈물을 손등으로 훔친 정국이 덤덤한 얼굴로 말한다. 결심이 가득 찬 표정이 꽤 의젓해 보였다.



"3년이든 5년이든, 충분히 벌 받고 나와요. 그리고 나오게 되면,"

"..."

"저랑 캐치볼 해주세요."



연행하겠습니다. 정국은 제 아버지의 연행 장면을 끝까지 쳐다보지는 못했다. 벌을 받길 바랐던 마음과, 아픈 마음이 공존했기 때문이었을 거다. 전회장이 탄 경찰차가 골목을 떠나고, 여주가 무거운 걸음으로 정국의 앞에 선다.



"괜찮아?"

"뭐, 그냥."

"미안해."



미안할 것도 참 많다, 너는. 정국이 씁쓸하게 답한다. 그러게, 여주가 중얼거린다. 평소의 주접 가득한 발랄한 모습과는 다른 여주의 말투에 정국이 천천히 고개를 든다.



"네 말대로 '철없는' 네 아빠, 내가 데려가 버렸네."

"됐어, 자업자득이지."

"잠깐 임시 거처 마련해드렸던 것처럼, 어머니랑 너는 경찰 측에서 적극 보호해 줄 거야."

"..."

"집이며, 대학 등록금, 뭐 그런 거."

"이제 나도 곧 성인이야. 신경 쓰지 마."



어떻게 신경을 안 써. 여주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가 감옥을 가는데, 어떻게 그 마음이 편하겠어. 내가 그렇게 했는데."

"..."

"정말 필요한 거 없어?"



정국이 고개를 도리 젓는다. 괜찮아, 말해봐. 여주가 한 번 더 답을 바라는 얼굴로 보채면 정국이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얼굴이더니, 이윽고 입을 연다.



"너 말이야."

"..."

"계속, 내 친구로 있어 주는 거지?"

"..."

"알잖아. 나 친구 너밖에 없는 거."



정국의 말에 여주가 울컥 울음이 차오르려는 것을 꾹 참아냈다.



"당연하지! 완전, 제일 친한 친구지!"



여주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됐어,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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