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협조 요청은 해놨어요. 일하러 가는 거긴 한데요. 원래 계획은 스탭인 척하고 입구에 서 있는 거였거든요. 그런데 기획사 쪽에서 공연 시작 후에 2층에서 지켜봐도 된다더라고요. 관람 방해만 안 하면.”

현재 민다영 역시 피해자로 보고 수사하고 있지만, 생존 확인이 되면 단번에 용의선상에 올려놓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정말로 당일에 민다영이 공연장에 나타난다면, 반발심을 우려해 그녀의 공연 관람을 막을 생각은 없다만 공연 내내 그녀를 지켜보는 게 마음이 편하리라. 인원 충원 후에 공연장 출구를 틀어막고 있으면 놓칠 일도 없고.

관계자 측에 형사 한 두 명 정도 방문할 예정이라고 해놨으니 태오를 데리고 가도 문제없었다.

“사람이 많겠지?”

“많긴 할 텐데 입장권만 판매한 거고, 안에서 돌아다니는 건 자유라서 1층에만 사람이 몰릴 거래요. 매번 2층은 생각보다 한산했대요. 그리고 가서 복잡하면 나오면 되니까요.”

“응. 같이 갈래. 그럼 그림부터 빨리 완성하는 게 좋겠다. 사건에 관련된 거니까.”

태오가 먹던 국그릇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 두입 퍼먹던 국그릇은 어느새 깔끔하게 비어 있었다.

“어디 가요. 공연은 다음 주라니까요. 그거 해야죠. 밥상머리 교육.”

물론 밥상 앞에서 내내 말도 안 하고 핸드폰만 한 사람은 태오였지만. 태오가 ‘밥상머리 교육?’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번에 서재에서 베고 자던 책이요. 달라진 밥상머리 교육이었나.”

“아, 그거 봤어?”

태오가 맞은 편에 다시 앉아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밥 혼자 먹게 안 한다더니, 이제 아침에도 뜨문뜨문 보면서 저녁도 혼자 두려고요? 그게 신세대 밥상머리 교육인가?”

“아니. 일이 있으니까아….”

태오가 찔리는지 쭈뼛거렸다. 그거 진짜 교육하려고 구매한 책이었나?

“저 금방 먹어요. 같이 일어나요. 그래서 밥상머리 교육이 뭐가 달라졌대요?”

화제를 던지며 신우재는 밥과 닭고기를 입 한가득 욱여넣었다. 태오는 알았으니까 천천히 먹으라고 다독이듯 말했다.

“밥상머리 교육이라는 게 꼭 밥 먹을 때에 국한된 건 아니었지만, 옛날엔 식사를 할 때마저 아이들에게 훈육과 지시를 하려 했대.”

이제 밥상은 대화의 장이며, 자아가 형성된 뒤에는 생각을 물어봐 주는 게 좋고, 성인이 된 아이들을 따끔하게 야단치거나 꾸짖는 일을 지양하라는 책이었단다. 물론 도덕적으로 잘못된 행동을 하거나 범법처럼 큰 잘못을 했을 때는 화를 내야 하지만.

“하지만 나는 옛날에도 딱히 엄하게 혼나거나 하진 않았던 것 같아서.”

“그럼 어땠어요?”

“그냥 지금이랑 똑같아. 오늘 하루는 어땠는지, 무슨 재미있는 일이 있었는지, 문제는 없는지, 뭐가 힘들었는지 이야기를 나눴어.”

“키워주신 분이랑요?”

“응. 그래서 자연히 여러 가지를 배웠어. 밥을 함께 먹지 않아도 곁에 있어 준다는 건 좋다는 거구나. 식사는 그저 일상이었는데, 이 시간을 기다리기만 할 수도 있는 거구나. 이런 것들.”

“엄청 오래전 일인데도 기억이 또렷한가 봐요.”

“그러게. 이상하게도 그 시절은 아직도 머릿속에 생생해. 나으리랑 함께했던… 순간들이.”

좋은 순간에 이어 나쁜 순간까지 떠올랐는지 태오의 낯빛이 차갑게 식었다. 곧바로 빠르게 어색한 미소를 장착했지만.

“그때는 피를 구하기 어려웠겠죠?”

“…….”

“태오.”

“응? 뭐라고 했어?”

“…밥 다 먹었다고요.”

“아, 그래. 자리 정리해서 개수대에 가져다줘.”

급히 일어나 개수대로 도망친 태오는 얼빠져 보였다. 그가 다른 생각에 빠져있다는 걸 증명하듯 손에서 미끄덩 빠져나간 접시가 텅, 텅 소리를 내며 개수대 안을 데굴데굴 굴렀다.

“다쳤어요?”

“아냐. 안 깨졌어.”

“그러게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해요? 제가 할게요.”

“그림을 그려야 할 것 같아서. …얼굴을 금방 잊어버리진 않겠지만 계속 신경이 쓰이니까.”

그림을 그리고 싶어 안달 난 사람처럼 그는 기계적으로 접시를 주워다 설거지했다.

“그리는 동안 옆에 있어 줄까요?”

“괜찮아. 그리다 보면 시간이 늦어질 테니까.”

안 그래도 태오와 이벤트가 생기면 자정을 넘겨서 잘 때가 잦았다. 별거 안 한 것 같은데 부쩍 시간이 지나있더라. 그래서 태오도 신경을 쓰는 것이리라.

“늦게 자는 게 습관 돼서 괜찮은데.”

“너는 사람의 생활 방식대로 살아야 해.”

올라가서 쉬어. 그가 단호히 말했다. 태오는 요즘 사람의 생활 패턴을 모르는 게 분명했다. 그러나 눈을 마주한 그의 표정이 너무 딱딱해서 한발 물러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오는 뒷정리가 끝나자마자 저를 2층으로 밀어 넣었다.

“에라이. 방에 쑤셔 넣는다고 내가 자겠냐. 어? 뭐야.”

텅 비어 있던 책상 위로 새로운 사물이 생겼다. 컴퓨터였다. 뭐를 구매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고, 골라놓으면 결제만 하겠다더니 결국 혼자 산 건가. 기특하다고 해야 할지, 부담스러워해야 할지.

그런데 모니터가 두 개다. 헤드셋은 왜 샀어? 대충 선들을 연결한 뒤 전원을 켜자 본체가 무지갯빛으로 반짝거렸다. 뭐가 이렇게 현란해? 컴퓨터는 잘 모르지만 고사양 컴퓨터 같은데.

때마침 열어놓은 창문 밖으로 소리가 올라왔다. 마당에서 그림을 그리려는지, 한옥에서 이젤을 꺼내는 태오가 내려다보였다.

“태오!”

이름을 크게 부르자 태오가 2층을 멀뚱멀뚱 올려다봤다.

“이리 와보세요. 그냥 와요!”

그냥 오라는 말에 태오가 마당에서 폴짝 뛰어올랐다가 창틀을 가볍게 딛고 내려섰다.

“무슨 일 있어? 아, 저거 샀어. 좀 어때?”

“뭐를 어떻게 구매한 건지 브리핑 좀 들어봅시다.”

브리핑? 눈동자를 데구르르 돌리는 태오를 위해 설명 좀 해달라고 다시 말해줬다.

“컴퓨터를 구매하려면 추가해야 되는 품목이 많다길래, 난 잘 모르겠어서 추가상품을 다 추가했어.”

“전부 다요?”

그래도 같은 물품을 중복으로 담진 않았다고 2개의 모니터 앞에서 태오가 억울해했다. 아무래도 글씨가 다르게 적혀 있었나 보다.

“왜? 잘 작동이 안 돼? 뭐 더 사야 돼?”

“아뇨. 늘 넘쳐서 문제죠.”

“…미안.”

“왜 주는 사람이 미안해할까. 저는 받기만 하고도 뻔뻔한데.”

“네가 나한테 미안해야 할 일은 없어. 나 때문에 제대로 일도 못하고 있는 거 아니까.”

“계속 그거 신경 쓰고 있었어요?”

“…들리니까. 저번에 노트북 화면이 작으니까 일이 좆도 안 되네-.”

“어허! …욕은 배우지 마요.”

들릴 줄 몰랐다.

“응. 마우스 건전지가 다 달았다고 쾅 하고 내려쳐서… 건전지도 저기 위에 올려놨어. 못 봤을까 봐.”

거참, 귀가 밝아도 너무 밝으시네.

“고마워요.”

“이것도 전부 가져가도 돼. 마지막 날 차에 실어줄게.”

이제 2주도 안 남았구나. 덧붙이며 태오가 괜스레 방을 한 번 쭉 둘러보았다.

“아! 저는 집 보수할만한 회사 알아 왔어요. 한옥 회사로. 태오만 괜찮다면 내일 바로 전화 걸어보려고요. 어때요?”

“그래. 그렇게 해.”

약속한 한 달 중 이제 2주도 채 남지 남았다. 곧 이 생활도 끝날 텐데 더는 일을 미룰 수 없었다.

우재야. 그가 살며시 성을 떼고 이름을 불렀다. 자신이 태오의 이름을 처음 불렀을 때, 태오도 이런 느낌이었을까? 왼쪽 가슴이 찌릿했다.

이 이상한 한 달이 끝난 뒤에도 어쩌면 가끔 이렇게 얼굴 보면서 지낼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목에 화상자국이 있는 흡혈귀를 조심해.”

“보통 이런 말 들으면 목에 화상자국 있는 흡혈귀가… 아, 아니에요.”

튀어나오던데. 이번 말은 태오의 말처럼 삼고초려라 했나? 일언반구? 하여튼 입 조심하라던 게 생각나서 마무리 짓지 않았다.

“알았어요. 그게 다예요?”

“응.”

돌이켜보면 태오는 단 한 번도 제게 계속 찾아와 주면 좋겠다는 말이나, 또다시 만날 수 있다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어쩌면 조금 서운한 건지도 모르겠다.

“태오.”

마당으로 돌아가려고 다시 창틀에 앉은 그가 뒤를 돌았다. 달빛이 그의 뒤로 은은하게 내려앉았다. 구도 때문인가. 같은 공간에 있는데도 이상하게 그가 훌쩍 떠날 것만 같았다.

기억하기 두려운 장면을 떠올려 그림으로 담아달라고 조르는 주제에 자리를 뜨려는 걸 제지하고, 이번에는 또 괜한 걸로 불러내 앞에 세웠다. 그에게 신우재란 민폐 덩어리 방해꾼이었다. 귀찮은 내색 한 번 안 하는 게 대단한 거지. 서운이라. 웃기지도 않은 감정이다.

태오를 혼자 두고 싶지 않았다. 안 보이는 데서 홀로 무너져 있을까 봐. 피해자나 피해자의 가족에게 자꾸 마음이 쓰이는 것과 같은 이치일 터다.

혼자 두고 싶지 않다고 말할까? 이미 눈치채고 있진 않을까? 아니다. 태오는 은근히 둔하니까 모를 거다.

하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동정심이라는 이 감정이 이상하게도 들켜서는 안 되는 마음 같았다.

“제 밤에 여전히 당신이 있어요?”

그래서 그냥 물어보고 싶었다. 질문에 대한 변명은 무수히 많았다. 당신이 먼저 있겠다고 말했으니까. 밤엔 당신이 저보다 강하니까. 저는 아직 두려우니까. 보험이라도 있어야 밤에 실컷 돌아다닐 테니까.

“응.”

그러나 덧붙는 의문 없이 대답해오는 목소리에 어쩐지 심장이 쿵 하고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저를 쳐다보는 동그란 눈매가 괜스레 심장이 아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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