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만나러 갑니다>



스물 일곱, 윤기는 아주 뜨겁게 한 사람을 사랑을 하고 있었고, 그것과는 별개로 아주 고루하고 차가운 이별을 했다. 사랑해서 보내준다는 이유 같지 않은 이유가 정말로 이별의 이유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닫게 되었다.


"형."


담배를 물고 빠르게 타자를 치고 있던 윤기의 앞머리가 후-하고 입으로 불어오는 바람에 갈라진다. 그리고 윤기는 노트북 화면에 고정되어있던 눈을 살짝 돌려 바람이 불어온 쪽을 올려다본다.


"아직도 있었냐."

"저도 금방 가려고 했어요. 약속 있거든요."


쌀쌀맞은 윤기의 반응에 메-하고 혓바닥을 내보이며 지민이 뾰로통하게 대답해왔다. 사실 윤기는 지민이 30분 째 제 얼굴을 이리저리 뜯어보고 있는걸 알고 있었다. 항상 무심하다 무신경하다 차갑다 라는 말이 수식어로 붙어오는 윤기였지만 지민에 한해서는 예외였다. 쳐다보지 않는 척하면서도 아, 오늘은 내가 사준 하얀 니트를 안에 입었네. 그렇게 잘 어울릴 줄 알았어 정말 예쁘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의미 없이 타자를 두드리고 있었다. 지민이 옆에 있으면 신경이 분산되어 글이 써지지 않았다. 이건 마치 거실을 한가득 매울 정도의 크기의 티브이 스크린에서 블록버스터 영화가 틀어놓고 동시에 바로 그의 10분의 1도 안되는 작은 디스플레이의 노트북에 서정적인 일본 로맨스 영화도 재생시켜놓고는 자, 할 수 있으면 한번 집중해봐라 하는 상황이나, 강한 비트의 음악이 심장이 울릴 정도의 볼륨으로 플레이되고 있는데 이어폰을 꽂고 클래식 선율에 집중하라고 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


"담배 끊었다고 하지 않았어요?"

"응, 그랬지."

"그럼 이리 줘요."


윤기의 입에 물려있던 담배를 치우면서 지민의 손가락이 윤기의 아랫입술에 살짝 닿았다. 가슴이 요동치고 손가락 끝까지 힘이 들어간다. 이 순간의 감정을 이겨내려고 윤기는 눈을 감았다. 참아내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지민은 멈추지 않고 마음을 두드려온다. 엄지로 윤기의 부르튼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립밤 좀 바르라니까."

"......."


귀찮다며 손을 뿌리칠 줄 알았는데 윤기는 지민의 눈을 응시했다. 얇게 찢어진 눈매가 섬세하다고 생각했다.

윤기는 저 눈이 휘어지도록 웃는 것, 아주 깊었던 어느 날 밤에 어둠 속에서 긴장과 환희로 바르르 떨리던 것, 이슬같이 깨끗하고 맑은 눈물이 맺혀서 떨어지던 것, 그리고 이별을 고할 때 빛을 잃고 저를 쳐다보던 순간 모두를 기억하고 있었다. 저 눈매 하나가 마음이 떨리게 했다가 서늘하게도 했다가 사랑으로 가득 차게도 했다가..


"지민아."

"네."

"열쇠 주러 온 거 맞지."


어떠한 기대감으로 일렁이던 지민의 눈이 곧 실망감으로 바뀌어 흔들렸다. 입고 있던 얇은 봄 점퍼 주머니를 뒤적여 열쇠 하나를 내려놓는다. 열쇠고리엔 여전히 해바라기 씨를 먹는 볼이 통통한 귀여운 햄스터 인형이 달려있었고 윤기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둘은 대학 선후배 사이로 영화동아리에서 만나서 시시한 단편영화를 만들면서 1년 365일을 붙어 다녔다. 윤기의 졸업이 가까웠고 지민도 군대에 입대 날짜가 코앞이었다. 지민은 더 이상 숨길 수 없이 커진 마음을 고백하겠노라 마음을 먹었고, 그날은 윤기가 첫 원고료를 받았던 날이었다. 둘은 이전에 없을 정도로 술을 퍼마시고 그걸로도 모자랐는지 윤기의 자취방에서 한잔 더하기로 했었다. 


비틀대며 골목길을 걸어가다 인형 뽑기 자판기를 발견했고 지민은 저 햄스터 인형이 너무 귀엽다며 인형 뽑기 기기에 얼굴을 뭉개며 붙어있었다. 윤기는 비켜보라고 손짓을 하고 500원짜리 뽑기 기계에 만원을 들이붓고는 결국엔 지민이 손에 저 인형을 쥐여줬다. 이렇게 쓸데없이 다정하게 굴면서 '난 하나도 안 다정해.'라는 표정을 하고 있을 때면 지민은 마음이 아파왔다. 왜냐면 그게 지민이 가장 사랑하는 그의 얼굴이었기 때문에... 손에 그리도 원하던 햄스터 인형을 쥐여줬는데 눈물만 뚝뚝 흘리고 있는 지민을 쳐다보던 윤기는 주머니에 꽂고 있었던 손을 지민의 얼굴로 옮겼다.


윤기의 손은 차가웠다. 볼에 와 닿는 차가운 느낌에 저도 모르게 움찔하던 지민은 곧 와 닿는 따뜻한 혀의 감촉에 눈을 감았다. 술 냄새가 뒤섞여서 혀가 섞일 때마다 조금씩 더 취하는 기분이었다. 꿈은 아닐까 눈을 감고 있는 동안 지민은 생각했다. 긴 입맞춤을 끝마치고 윤기는 지민의 손을 잡았다.


'가자 집에.'


그날 두 사람이 함께 손을 잡고 돌아간 후 그 집은 그들의 함께 집이라 부르는 장소가 되었다. 3년을 함께 지내는 동안 윤기는 프리랜서로 열심히 글을 쓰고 있었고 느리지만 꾸준한 반응이 오고 있었다. 같이 책을 하나 내보자는 제안도 받았다. 그때 지민은 군대를 다녀오고 복학한 후 4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형, 지민이랑 연락하죠? 걔 그 인턴십 안 간다고 했다면서요?"

"인턴십?"

"네 뉴질랜드로 가는 거 말이에요. 그렇게 가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더니 됐는데 안 간다더라고요."

"............"


윤기와 지민의 사이를 모르는 대학 후배는 끊임없이 쫑알거리면서 지민이 얼마나 멍청한 결정을 했는지, 그래도 지민의 포기한 덕분에 다음 차례인 자기가 덕을 볼지도 모르겠다는 얘기까지 떠들어대다 면접을 보러 가야 한다며 서둘러 걸음을 재촉했다. 윤기는 얼른 핸드폰을 들어 태형에게 전화를 걸었다.


"알고 있었냐?"

"..지민이요?"

"왜 안 간대?"

"...... 자기 없으면 형 어떡하냐고 그러죠 뭐.."


밥도 잘 안 챙겨 먹고 해가 갈수록 술 담배만 늘고 있는 것 같다고 옆에서 자기가 이정도 라도 챙겨주지 않으면 아예 안 먹고 글만 쓰다 죽을 것 같다고 얘기하면서 웃었다는 소리를 들으니 가슴이 아려왔다. 글 쓰는 데만 집중하느라 사랑하는 사람이 어떤 고민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너무나 무지했고, 타인을 통해서 전해 들은 현실은 아팠다.


“지민아, 이제 돌아가자."


우리가 있었던 곳으로...


“형... 그게 무슨 소리예요?”

"그냥, 언제까지 이러고 살겠냐."

"........."

"너랑 나랑 뭐 가정을 꾸리겠냐. 이제 그만할 때도 됐지."

".......진심이에요?"

"글 쓰는데도 은근 신경 쓰이고."


진심이 아닌 못된 말들을 쏟아내고 나니 영혼이 몸 밖으로 빠져나간 것처럼 모든 것이 하얗게 느껴졌다. 하얀 방에 아무것도 없이 혼자 앉아있는 느낌. 이제 지민이가 떠나겠구나, 이제 모든 게 끝이야 혼자가 되겠구나. 이기적인 마음으로는 들었던 말들을 다 없었던 일로 치고 지민을 붙잡아 두고 싶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그를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이 너무 컸다.


"저 없어도 괜찮아요?"

".........."


윤기는 노트북 화면만 응시하던 눈을 지민에게로 옮겨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얀마, 나 그전에도 잘 살았거든."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지민의 눈을 바라보면서 마음에 비가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마음속이 그 빗소리로 시끄러웠다.


"거짓말.."


나, 안 사랑해요?

나, 이제 형한테 아무것도 아니야?

형...


한 달을 지민은 윤기에게 매달려왔다. 집을 떠나지 않았지만 그렇게 벽을 만들고 자기를 밀어내는 윤기를 보면서 서서히 지쳐가고 있었다. 방 안의 물건들은 점차 박스로 들어가고 박스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오늘은 드디어 지민의 모든 물건이 박스에 들어갔다.


"형 저 가요."

"그래."

"연락할게요."

"......."

"답장해줘요. 꼭.."


울고 싶었다. 떠나는 지민을 붙잡고 싶었다. 이삿짐이랄 것도 없지만 트럭을 빌려와 박스를 다 옮기고는 윤기 앞에 30분 째 앉아서 떠난다는 이별의 인사를 망설이는 지민에게 그렇게 어려운 말이면 하지 말라고 하고 싶었다.


"잘 살아라."

".........."


건강해.

좋은 사람 만나.

행복 해야해.

그리고..

형이 너 많이 사랑했고,

아직도 정말 많이 사랑해.


하고 싶은 말은 너무 많은데 언제나처럼 그냥 목구멍으로 넘어오지 못하게 삼켜버렸다.


"키스... 해줄래요?"

"........"

"작별 인사로 그런 것쯤은 해줄 수 있죠?"


"그래." 라고 대답해주는 대신 윤기는 지민의 머리를 소중하게 감싸 안았다. 그리고 머리카락, 이마, 눈썹, 눈, 코에 차례로 입을 맞추고 마지막으로 떨리는 입술 위에 내려앉았다. 지민은 두 팔을 윤기의 허리에 감싸고 매달려왔다. 마지막이란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불가능한 일이었다. 자꾸만 가슴에 물이 차오르고 목이 메왔다.


조금만 더...


따뜻한 혀의 감촉이 입안에 침범해온다. 질척하게 섞이는 소리가 귓가에 와 닿고 얇은 윤기의 티셔츠 너머로 요동치는 심장의 박동 소리가 지민의 가슴에 전달된다. 지민은 윤기의 가슴에 귀를 파묻었다. 지민의 머리카락이 윤기의 턱을 간지럽혀 오니 윤기는 참았던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서 길어진 앞머리로 두 눈을 가리고 얼굴을 들지 않았다. 그 순간이 그들의 마지막이었다.


"사랑해요."


나도...

나도 우리 지민이 많이 사랑해.


지민은 그렇게 떠났다.

한 달에 한 번씩 지민은 엽서를 보내왔다. 지민의 엽서를 받는 날에는 그게 닳아 없어질 정도로 읽고 또 읽었다. 값싼 와인을 따서 취해 잠이 들 정도로 마셨고 아침에 두통을 안고 일어났다. 어떠한 형태의 고통이라도 느껴야지 죽을 것 같은 아픔이 덜할 것만 같았다. 그리고 보내지 않을 답장을 써 내려갔다.


윤기는 글쓰기에 매달렸다. 자신이 기억할 수 있는 지민의 모든 것을 원고지에 담았다. 물론 하얀 종이 안에 쓰여 내려간 지민은 더 이상 통통한 볼을 가진 하얗고 사랑스러웠던 소년은 아니었다. 그의 글 속에서 그는 그녀가 되어버렸지만 그것을 빼고는 모든 것이 윤기의 기억 속에 있는 지민의 모습이었다. 


첫 만남, 여자 친구가 생겼다는 얘기를 듣고 술에 잔뜩 취해 찾아와 울던 일. 그로 인해 어렴풋이 알게 된 지민의 마음, 그 후로 2년 동안을 같은 마음을 가졌지만 숨긴 채 지민 곁을 맴돌던 못난 자신에 대한 자책. 또 사랑하기에 보내줘야 했던 마음을 책 속에 가득 담았다. 지민에게서 받았던 엽서를 적어 내려갔고, 보내지 못한 답장 역시 써 내려갔다.


그의 첫 소설의 제목은 

'너에게 보내는 연애편지’


그의 소설은 빠르게 입소문을 타 베스트셀러에 올랐고 여기저기서 러브 콜이 쏟아져 왔다. 잡지 인터뷰에 묻어나는 그의 무심함과 덤덤함이 더욱 더 여성 독자들의 마음을 흔들어 놨다. 

가장 최근에 받은 건 영화 관련 잡지사 인터뷰였다. 질문지를 먼저 메일로 받아보고 답을 달아 보내기로 약속을 했었다. 그렇게 까다롭게 굴게 된 이유는 유쾌하지 않았던 이전 인터뷰의 경험 때문이었다. 이전 패션 잡지사 인터뷰들은 1:1로 진행 되었고, 주로 인터뷰어와 카페에서 만나 편안하게 대화를 나누고 그게 정리되어 올라가는 식이었다.  질문들이 전부 윤기의 연애관, 연애사, 이상형, 가끔은 심하면 성생활까지 전부 사생활에 관련된 질문들이었던지라 에이전시에 더는 인터뷰에 응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해 놓은 상태였다. 그렇게 얘기한 다음날 바로 이 인터뷰 스케줄이 잡혔다. 영화 제작사와 계약서를 작성할 때 지정한 매체를 통해 3회 이상 인터뷰에 응하겠다는 계약 조항이 들어가 있었는데 세세히 체크하지 않았던 탓이었다.


받아본 인터뷰의 내용은 이러했다.


Q1. 새로 발간된 너에게 보내는 연애편지는 본인의 경험담이라고 들었다 사실인가?

-그렇다. 첫사랑에 대한 기억을 전부 적어 내려갔다. 아마 99퍼센트는 내 얘기라고 해도 무리가 없을 것 같다.


Q2. 책에서 등장하는 엽서도 실제 첫사랑에게 받은 것인가?

-맞다. 엽서를 받을 때마다 답장을 써 내려갔지만 보낼 수 없었고 그게 고스란히 책에 들어갔다. 엽서 일러스트에 실제 필체 역시 담았다. 혹시라도 나중에 원본을 잊어버려도 덜 씁쓸한 것 같아서 그랬다.


Q3. 실제로 첫사랑을 다시 만난다면 어떻게 할 것 같은지?

-설마 그런 일이 일어날까? 내가 여태 살아온 세상은 그렇게 아름답지만은 않아서 그런가 그런 기대는 해본 적이 없어 모르겠다.


타자를 쳐 내려가다가 한참을 망설였다. 모든 질문이 묘하게 사생활을 파고드는 기분이었지만 왠지 어딘가에서 지민을 아는 사람이나 지민이 읽게 되진 않을까 하는 생각에 솔직해지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Q4.그 후로 다른 사랑이 있었는지?

-  


마지막 질문에 답을 하려다가 타자를 치던 손을 멈추고는 한참을 생각했다. 어떻게 사랑이 그래요, 사랑이 다른 사랑으로 잊혀지나요? 그런 고루한 노래 제목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세상에 태어나 사랑을 느껴본 게 단 한 번이라서 잘 모르겠다는 솔직한 답변을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써놓으면 책도 더이상 잘 팔리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 현실적인 생각을 하고 있자니 스스로가 초라하고 우스워 헛웃음을 웃게 되는 것이었다.


사생활을 캐는 질문은 싫다고 그렇게 못 박았었는데도 결국은 그게 질문의 전부였다. 


솔직해지자면 3년이란 시간이 지났고, 그 시간 동안 줄곧 혼자였던 것은 아니다. 타지에서 홀로 생활하는 아들을 걱정한 어머니의 극성에 떠밀려 나간 선 자리가 여러 번 그중에 마음이 맞는 여자도 있었다. 이 사람과 함께라면 그냥 무난한 인생을 살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생각도 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되지 않았던 것은 '아마도 사랑하는 마음이 남아서였겠지...' 하고 혼자 생각을 하며 펜을 돌렸다. 단 한 번도 엽서에 답장을 보내지 않았던 것이 과연 잘한 일이었을까? 지민은 답장을 기다리다 점점 지쳐버리고 그리고 더 이상은 엽서를 보낼 의지조차 잃어버리게 된 것일까? 그렇다면 다행이었다. 자신의 마음과 상관없이 지민의 마음이 안녕해지기만을 바랬기 때문이다. 


엽서가 오지 않기 시작한 것은 3개월이 지났지만 하루도 우체통을 확인하는 일을 거르지 않았다. 나갈 일이 없는 날이라도 헝클어진 머리에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슬리퍼를 끌며 나와서 우체통을 확인했다. 스스로를 괴롭히는 일 같아 이마저도 그만하려고 생각하고 확인하지 앉은 지 일주일이 지났다. 그런데 오늘 아침 주소 없는 엽서 하나를 받았다. 영화 포스터가 그려진 엽서였고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았다. 언젠가 본 것이 분명한데 기억해 낼 수 없었다. 


오늘은 윤기의 그 영화 잡지사와 인터뷰가 있는 날이었다. 카페에 들어서기 전 윤기는 빗방울이 떨어질 것만 같은 우중충한 하늘을 올려다봤다. 지민은 잘살고 있을까? 늘 비가 오기 직전의 하늘을 올려다볼 때면 그의 생각을 했다. 그 어떤 큰 상처라도 아물기 마련이다. 흉터가 보기 싫게 남아 있을 순 있지만 그래도 더 이상 아프지 않게 되는 날이 온다는 게 삶의 위로가 아닐까.


카페의 문을 열고 들어서니 차가운 바람이 윤기의 몸을 한 바퀴를 감싸고 돌아 지나갔다. 어디쯤 앉아 있을까 한 바퀴 둘러보다 보니 자신의 책이 놓인 테이블에 앉은 남자를 하나 발견했다. 검은색 가죽 재킷에 블랙 진, 그리고 블랙 워커에 달린 반짝거리는 것이 햇빛에 반사되어 잠시 윤기의 시야를 가렸다. 찡그렸던 얼굴을 풀어내고 점점 가깝게 다가가고 있었다. 남자는 블랙 캡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있었다.


"제이씨?"


이메일로만 연락을 주고받았고 이메일 끝에는 늘 J라는 이니셜이 따라왔었다. 윤기가 맞은편 자리에 앉자마자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진동벨이 징징 소리를 내며 시끄럽게 울렸다. 윤기는 바로 그 진동벨을 집어 들고는 카운터로 향했다.


"저도 목이 좀 타서 주문하러 가는 김에 가져올게요."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잔을 가지고 자리로 돌아오는데 쓰고 있던 모자를 벗어 헝클어지고 정전기가 일어나 엉망이 된 남자의 새까만 머리칼이 눈에 들어왔다. 남자는 다시 윤기의 책을 읽고 있었다. 거의 끝부분인 걸로 봐선 아마도 인터뷰 전에 예의상 한번 읽어본다는 것이 이제야 겨우 다 읽은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커피를 내려놓으면서 그제야 천천히 맞은편에 앉아있는 남자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민윤기 입.."


"제이라고 불러주세요."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예쁜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윤기는 눈을 비볐다. 분명 제가 그리고 그리워하던 그 얼굴이었다. 티 없이 하얗고 맑은 피부, 도드라져 보이는 새빨간 입술이 옅게 미소를 띄고 있었고 잠시 환영을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꿈속에서도 잊을 수 없었던 그 얼굴. 


"..지민아."


"오랜만이에요. 잘 지냈어요?"


"아.."


목구멍으로 뜨거운 것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분명 방금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모금 들이켰는데 왜 이렇게 가슴까지 뜨거운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답장 이제야 받았네. 3년을 기다렸는데."

"..........."


예쁘게 접혀져 있던 눈가 끝으로 맑은 무언가가 맺혀있었다. 어떤 말부터 꺼내야 할지 찾을 수 없는 윤기는 그저 지민의 눈가에 맺힌 것을 닦아내는 걸로 말을 대신했다. 지민은 자신의 얼굴에서 떨어져 가는 윤기의 손을 붙잡고 얼굴을 파묻었다.


"보고 싶었어."

"알아요. 그 얘기 백번도 넘게 했잖아요 여기서-"

"......."


3년이란 공백이 윤기의 마음에 무겁게 내려 앉았다. 아마도 새로운 사람을 만났을 거다 지민이는 사랑받아 마땅한 사람이니까. 내가 알지 못하는 새로운 인생이 그에게 있겠지.


"그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궁금해요. 하고 싶은 말도 많고요.."


지민은 손톱 끝을 이로 뭉개면서 윤기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럼 집에 가자."


윤기가 먼저 일어서고 지민은 그의 뒤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윤기의 집에 도착할 때까지 30분이 넘는 거리였지만 서로 한마디도 건네지 못하고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집 앞에 도착해 가방을 뒤적여 열쇠를 찾아 열쇠 구멍에 꽂는데 열쇠고리에서 덜렁이는 햄스터 인형을 인지하고 윤기는 어쩐지 멋쩍어져서 머리를 긁적였다. 지민은 그 인형을 조몰락조몰락하며 웃었다. 


"내가 오래된 걸 잘 못 버려서."

"이거 읽어버린 줄 알고 엄청 울었었어요.."


괜히 미련이 철철 묻어나는 사람처럼 보일까 봐, 부담을 주게 될까 봐 가볍게 얘기하려 노력하는 윤기에게 지민의 시선이 붙어왔다. 맞다, 책에 햄스터 인형을 뽑아주던 날 밤 이야기를 자세하게도 썼었다. 그런 책을 써 놓고 이제 와서 이러는 게 우습다는 생각도 들기는 했다. 

지민은 열쇠와 같이 윤기에게 넘겨준 사실을 잊고는 몇 달 만에 뉴질랜드에 짐이 도착했을 때 그걸 다 뒤집어서 찾다가 나오지 않아서 목을 놓고 울었다는 얘기를 해줬다.  윤기는 그 장면이 상상이 되어 가슴이 아려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면서 웃었다. 


"열쇠가 잘 안들가네."


 눈앞이 자꾸 흐려져 열쇠구멍에 열쇠가 들어가지 않았다. 곧 등 뒤로 지민의 무게가 느껴졌다. 허리를 둘러 안은 지민의 존재가 현실감 있게 느껴져서 윤기는 고개를 들어 한숨을 내쉬었다.

갑자기 숨을 쉬는 방법을 잊기라도 한 듯이 이 순간이 어렵고 그 동시에 또 벅차게 느껴졌다.


"이번엔 꼭 안아줘요."


더이상은 기다릴 수가 없었다. 한손에 쥐고 있던 가방이 바닥에 둔탁한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가방 속에 있던 원고들과 엽서가 어지럽게 흩어져버린다.

윤기는 몸을 돌려 지민을 삼켜 버릴 듯이 키스를 퍼부었다. 지민의 새빨간 입술은 마치 건드려서는 안되는 독은 품은 가짜 사과색처럼 빛났다. 

사과를 베어 물듯이 지민의 입술을 깨물고 핥고 맛봤다. 꿈결같이 달콤하고 부드러운 맛이 났다. 어쩌면 정말 현실감 있는 꿈을 꾸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맛과 색이었다.

영화는 아직 본편도 완성이 되지 않았지만, 본편만 한 속편은 없다고들 하지만 처음으로 그런 글을, 그런 영화를 만들 수 있을 것만 같은 예감이 드는 윤기였다.





편안한 이야기를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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