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네임리스, 모브 여밀레/톨비밀레
  • 메인 줄거리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밀레시안이 톨비쉬 정체 알기 전 상황 대충 날조
  • 기사단이랑 아직 다 좀 어색한 시기라는 설정
  • 시기. 배경. 설정 그냥 다 날조.
  • 공식이 아닙니다. 재미로만 봐주세요.
  • 밀레시안이 톨비쉬를 살짝 불편해합니다
  • 읽어주셔서 언제나 항상 감사합니다아악!!!!

 

 

 

 

<나를 싫어하는 톨비쉬에게 브래지어 끈을 채워달라고 해봤다>

 

 

 


 

“아.”

 

훈련장 인근 숲의 개울가. 쪼그려 앉아 손을 씻고 있는데 툭, 하고 브래지어 후크가 풀렸다. 아마 알터와 함께 훈련하겠답시고 미친 망아지처럼 숲을 뛰어다닌 탓인 듯 했다.

 

“왜 그러세요?”

 

옆에 앉아 세수하던 알터가 내 작은 탄식을 놓치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나무에 기대앉아 총을 만지작거리던 르웰린 역시 이쪽을 신경 쓰는 눈치였다.

 

“아니야. 아무것도.”

 

어색하게 웃으며 팔을 뒤로 뻗었다. 옷 위로 잠그려 시도해보았지만 어림도 없었다. 일단 빨리 잠그기는 해야 할 것 같은데 도와달라고 해야 하나. 그렇다면 누구한테 도와달라고 하지?

 

[알터에게 상황을 설명한다]

[르웰린에게 도와달라고 한다]

 

알터? 르웰린? 알터? 르웰린? 역시 르웰린이 좋을까? 르웰린은 알터보다 어른스러우니까 여자 속옷 정도로 유난 떨지 않을 것이다. 아니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대뜸 속옷 좀 잠가달라고 하면 좀 그렇지 않나? 애초에 성희롱 아닌가?

 

“밀레시안 님. 잠깐 저쪽에서 이야기 괜찮으십니까?”

 

골이 터져라 고민하는데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고개를 드니 르웰린이 서 있다. 알터에게 양해를 구하고 르웰린과 함께 덤불 안쪽으로 들어갔다. 풀린 속옷을 들키지 않게 어깨를 살짝 움츠렸다.

 

알터가 시야에 보이지 않는 것을 확인한 르웰린이 내게로 시선을 돌린다. 그리고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빤히 바라보기 시작했다. 파르스름한 물빛과 제비꽃 빛이 섞인 보석안은 화려함의 극치다. 녀석의 찬란한 눈동자가 주는 압도감에 괜스레 긴장했다.

 

“무슨 일 있으세요?”

“아니?”

“흐음…”

 

르웰린의 눈이 가늘어진다.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티나?”

“네. 아까부터 안절부절못하시는 모습이 신경 쓰입니다. 별일 아니라면 그만두세요. 주위의 관심을 끌고 싶은 거라면 더더욱 그만두세요. 무서우니까.”

“무섭다고? 내가?”

“솔직히 무섭지 않다고 말한다면 거짓말이겠지요. 혼란스럽기도 합니다. 피를 뒤집어 쓴 채로 왕좌 뒤에 귀신처럼 서 있던 무표정한 여자와, 지금 뺨에 토마토소스를 묻히고 있는 당신이 같은 존재라는 걸 받아드리기 쉽지 않네요.”

“...나 얼굴에 뭐 묻었어?”

 

르웰린이 대답 대신 자기 뺨을 톡톡 두드렸다. 안 그래도 아까 밥 먹었는데, 그걸 어떻게 알고 대뜸 점심 맛있게 드셨냐 물어보는 거지 싶었다. 얼굴에 소스 묻어있었구나. 진작 말 좀 해주지. 민망함에 시선을 피하며 손등으로 뺨을 문질렀다. 르웰린이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내민다.

 

“저도 나름대로 당신에게 익숙해지려고 노력 중이니까 협조 부탁드립니다. 불필요하게 눈에 띄려 하지 말아 달라는 뜻입니다.”

“아니 나는 그냥…”

“부탁 좀 드릴게요.”

 

내가 뭘 잘못했지? 나는 그냥 속옷 끈이 풀려서 당황했을 뿐인데 내가 뭘 잘못한 거지? 억울했지만 이 억울함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대체 무슨 일인데요. 에린의 영웅님. 어디 불편한 곳이라도 있으신가요?”

 

바보처럼 입만 벙긋거리는 나에게 르웰린이 미소 띤 얼굴로 물었다. 웃고는 있는데 눈빛은 여전히 차가워서 어쩐지 시무룩한 기분이 되었다.

 

“편하게 이야기해주세요. 당신은 알터 앞에서는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 하는 것 같으니까 자리까지 옮겨드렸지 않습니까. 아, 물론 밀레시안님이 나쁜 사람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저 우리와 조금 다른 분이시라는 뜻이죠. 사고방식이나 개념이나.”

“너 나 안 무섭지.”

“잘못한 것이라도 있으신가요? 무슨 일인지 지금 솔직하게 말씀하시면 용서해 드리겠습니다. 나중에 추궁해서 대답하시면 봐 드리지 않습니다.”

“그, 그런 게 어디 있어…!”

“제 용서를 받을 기회를 드리고 있는 겁니다.”

“이거 그거지 가, 가스. 가스라이팅…!”

“그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알고 쓰세요?”

 

한심하다는 듯이 되물으며 르웰린이 내 쪽으로 한걸음 바짝 붙어왔다. 움찔하며 뒤로 물러났다. 겁을 집어먹은 듯한 모습에 르웰린이 묘하게 눈을 빛낸다.

 

르웰린은 나를 해칠 수 있지만 나는 르웰린을 해칠 수 없다. 움켜쥐는 순간 설탕처럼 부서져 버릴 테니 감히 옷깃조차 스칠 수 없다. 압도적인 힘의 차이로부터 발생하는 역설적인 권력을 눈앞의 아름다운 기사는 잘 알고 있다.

 

아는 것을 넘어 이용할 줄도 알지.

 

“밀레시안님!”

 

그때였다. 덤불을 거칠게 헤치고 들어온 알터가 묘한 자세로 붙어 서 있는 나와 르웰린을 번갈아보더니 곧 질 수 없다는 듯 큰소리로 외쳤다.

 

“저, 저도 할 수 있습니다! 그, 그거요! 가스라이팅?”

“돌겠네.”

 

무심결에 튀어나온 소리는 고상한 르웰린 답지 않은 저렴한 한탄이었다. 이런 빡통이랑 한 팀으로 움직여야 한다니, 알터를 응시하는 르웰린의 눈빛이 여느 때보다 싸늘했다. 그 눈빛을 불신이라 해석했는지 알터의 표정이 한층 더 절박해졌다. 제발 믿어주세요! 하는 눈빛으로 식은땀을 흘리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정말입니다! 저 가스? 그. 그…어. 하여튼 그거 정말 잘합니다! 저도 잘 해요!”

 

가스라이팅을 실드 오브 트러스트, 저지먼트 블레이드 뭐 이런 종류의 것으로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어감이 비슷하긴 하다.

 

“그게 사실이라면 문제가 되겠는걸. 알터.”

“으아아악!”

 

오늘따라 왜 이렇게 기척 숨기고 다가오는 놈들이 많지? 등 뒤에서 들려온 부드러운 목소리에 비명을 질렀다. 르웰린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알터가 내 등 뒤를 올려다보며 반갑게 웃는다.

 

“톨비쉬님!”

“다들 이곳에 있었나? 아벨린 양이 두 사람을 찾던데.”

“지금 가보겠습니다!”

 

씩씩하게 대답한 알터가 내 옆에 붙어 섰다. 그리고는 좋아하는 장난감을 가져가고 싶은 강아지처럼 물었다.

 

“밀레시안님이랑 같이 가도 되나요?”

“그건 곤란하군. 잠깐 할 이야기가 있어서.”

 

톨비쉬가 친한 척 내게 눈웃음쳤다. 그 모습에 알터의 어깨가 아래로 축 처졌다.

 

“후일 또 뵙겠습니다.”

 

얼굴 가득 ‘헤어지기 싫은데’라고 쓰여있는 알터의 팔을 르웰린이 잡아끌었다. 나무에 매어 둔 말을 탄 두 사람이 숲 안쪽으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다 톨비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할 이야기가 뭔데?”

“잠깐 함께 걷겠습니까?”

“할 이야기가 뭐냐니까?”

 

내가 지금 브라 끈도 풀렸는데 너랑 산책하게 생겼냐. 할 말 있으면 빨리하고 헤어지자. 라는 뜻을 담아 올려다보았다. 톨비쉬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눈썹을 으쓱하며 웃는다.

 

“밀레시안씨가 곤란한 상황에 처하신 것 같아 적당히 둘러댄 겁니다.”

“뭐?”

 

그러면 할 이야기 따위는 처음부터 없었던 건가?

 

“가끔은 이런 것도 괜찮지 않습니까. 둘만 있는 시간 말입니다.”

“아니. 난 불편한데.”

“그런가요? 조금 서운하네요.”

 

톨비쉬가 입꼬리를 당겨 웃는다. 예의 그 완벽한 ‘조각 미남’ 미소다. 너무 완벽해서 되려 정떨어지는 그 미소 말이다. 사람이 좀 흠이 있고 결함이 보여야 정이 갈 텐데 말이지.

 

르웰린은 내가 무섭고 불편하다 했지만 그 말은 오히려 내가 하고 싶다. 그 말을 그대로 되돌려줄 수 있다. 눈앞의 이 남자에게.

 

톨비쉬는 건장한 근육질에 키도 크고 잘생기고 아름답고 목소리도 좋고. 그래서 뭐? 그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싫어하는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무엇을 원하는지. 내가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애초에 저 남자가 내 편이 맞는지조차 명확하지 않다. 그런 존재는 섬뜩할 뿐이다. 위화감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아름답고 오싹하며 기억나지 않는 악몽처럼 불편하다.

 

“당신도 나 별로 안 좋아하잖아. 서운은 무슨.”

“제가 당신을 좋아한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아! 진짜 소름 끼치니까 하지 마.”

“하하.”

 

이 남자랑 이야기할 때면 왜 이렇게 항상 속이 불편하지? 비단 이 순간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언제나 항상 이 남자와 대화 할 때면 불편한 기분이 들었다.

 

“으아! 뭔데!”

 

그때였다. 금속 갑주에 쌓인 커다란 손이 눈앞으로 불쑥 다가왔다.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 톨비쉬가 머쓱하게 손을 내린다.

 

“몸이 불편해 보이셔서요.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아마 풀린 속옷 탓에 어깨를 움츠리고 있던 것을 눈치챈 모양이다. 하여튼 귀신같은 놈. 이를 어쩌나 잠시 고민하다 대수롭지 않게 밝혔다.

 

“속옷 끈이 풀려서.”

“네?”

“브래지어 말이야. 아까 알터랑 달리기를 조금 했는데 아마 그래서 풀린 것 같아.”

“그런 문제라면 아벨린양에게 부탁하면 되겠군요.”

 

당황하지 않을까 내심 기대한 것이 무색하게 평이한 반응이었다. 뭐야. 시시하게. 입술을 삐죽거리다 문득 이 남자의 당황한 얼굴이 보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칼로 찔러도 당황하지 않을 것 같은 이 남자가 당황하는 게 보고 싶다. 얼굴을 붉히고 말을 더듬는 걸 보고 싶다.

 

“아벨린한테 어느 세월에 가. 불편하니까 당신이 해줘.”

“네?”

“자. 빨리.”

 

톨비쉬를 등지고 섰다. 헐렁한 상의를 아래에서부터 돌돌 말아 가슴 위까지 올린 채로 훤히 드러난 등을 내보였다. 풀린 속옷 끈이 덜렁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뭐 하시는 겁니까.”

“어어-”

 

옷이 다시 아래로 잡아당겨졌다. 그답지 않게 꽤나 거친 손길이었다. 덕분에 균형을 잃고 휘청거리며 넘어질 뻔했다. 잠깐의 실랑이가 있었다.

 

“뭐해. 넘어질 뻔했잖아.”

“이동하는 것이 불편하시다면 그녀를 이곳으로 불러오겠습니다.”

“그냥 당신이 빨리해줘. 귀찮아.”

“밀레시안씨. 이건 적절하지 않은 부탁입니다.”

“지금 이걸로 시간 질질 끌며 실랑이하는 게 더 적절하지 않거든?”

 

나한테 수치를 줄 셈이냐고 가늘게 뜬 눈으로 흘겨보았다. 톨비쉬가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저는 못 합니다.”

 

햇빛에 찬란히 부서지는 금발. 진주처럼 희고 은은한 피부. 푸른 보석을 닮은 눈동자. 달콤한 미소. 자기가 웃으며 간청하면 여자들이 다 들어줄 거라 믿는 것 같아 괜히 열받았다.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저 웃음에 넘어갔을까.

 

“못하긴 뭘 못해. 자꾸 시간 끌면서 질질 끌래? 설마 민망하다느니 부끄럽다느니 하는 소리를 하려는 건 아니지? 왜 이래 알 거 다 아는 사람이.”

“그런 게 아니라-”

“징그러워.”

 

큰 소리로 깔깔대며 웃었다. 징그럽다는 말에 톨비쉬의 눈이 살짝 크게 뜨였다. 그리고는 하려던 말을 멈추고 나를 내려다보았다. 재채기를 참는 것처럼 뺨을 굳히고 인형 같은 눈을 깜박거리는, 웃는 것도 찡그린 것도 아닌 묘한 표정이었다.

 

“빨리해줘.”

 

그동안은 본 적 없는 묘한 표정 변화가 조금 신경 쓰였지만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다시 등을 돌리고 옷을 위로 걷어 올렸다. 서늘한 바람이 맨살을 스친다. 바람에서 물 냄새가 난다. 내 등 뒤에 서 있는 남자는 조용하기만 하다.

 

“어으. 춥다. 바람 분다.”

 

타박하며 재촉했다. 하지만 톨비쉬는 여전히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반응은 커녕 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설마 도망친 건 아니겠지? 뒤를 돌아보려는 순간이었다.

 

축 늘어진 속옷 끈이 조심히 당겨졌다. 그가 내 속옷 끈을 잡고 있음을 느꼈다. 내가 부탁한 일이긴 하지만 막상 닥치니 어째 현실감이 없었다. 그 남자가, 무려 ‘그 톨비쉬’가 내 브래지어 끈을 만지고 있다.

 

팔등으로 솜털이 바싹 일어났다. 극도의 긴장감에 속이 울렁거렸다. 왜인지 톨비쉬는 끈을 쥔 채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있었다. 뭐 하는 거냐고 떨리는 목소리를 내려는 순간이었다.

 

“아악!”

 

톨비쉬가 갑자기 끈을 자기 쪽으로 힘주어 당겼다. 그리고는 구두 끈을 묶는 것처럼 끈을 교차해 투박하게 묶었다. 몸에 딱 맞는 사이즈의 속옷이다. 그 끈을 무식하게 당겨 구두끈처럼 묶어댔으니 충격은 고스란히 내 몸으로 전해졌다. 뭉개진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애초에 묶인 게 기적이다. 빼액, 소리를 지르며 팔을 뒤로해 톨비쉬의 손을 쳐내고 끈을 풀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끝에 후크 안 보여? 하기 싫으면 싫다고 말을 하지 지금 나랑 해 보자는 거야 당신?”

 

당신 곱창도 이렇게 묶어줄까?- 이미지 관리할 알터도 없겠다, 욱하는 성질을 못 이겨 원색적인 욕설이 터져 나오려는 순간 톨비쉬가 작게 중얼거렸다.

 

“...후크?”

 

눈을 크게 뜨고 입술을 살짝 벌린 톨비쉬가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인다. 말간 얼굴에 ‘그게 뭐지?’라고 쓰여있다. 잠깐, 설마. 설마 아니겠지? 저 남자가. 톨비쉬가 여자 속옷을 본 적이 없어서 어떻게 묶는지 몰랐다고 하려는 건 아니겠지? 곧 톨비쉬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는 멋쩍게 뒷목을 쓸어내렸다.

 

“이거, 제가 실수를 저지른 모양이군요.”

“어? 어…?”

“못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민망한 마음을 무마하기 위한 웃음은 어색할 뿐이다. 웃음기 어린 목소리에 스며든 희미한 원망에 식은땀이 쭉 솟았다.

 

“미, 미안.”

“밀레시안씨가 사과할 일은 아니죠. 도움이 되지 못해 죄송한 건 제 쪽입니다.”

“아니. 미안. 진짜 미안. 내가 심했어. 장, 장난치고 싶어서. 나는 그냥.”

“징그러운 저는 이만 사라지고 아벨린을 데려오겠습니다. 아프게 해서 미안합니다.”

 

톨비쉬가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밝게 웃었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웃음에 조금 전 내가 뱉은 말을 그대로 되돌려주는 얄미운 화법. 하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지금 그가 어색해진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 무리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 모습이 연기라면 남자는 기사가 아니라 배우나 사기꾼을 하고 있어야 했다. 어느 진로를 골라도 골드를 쓸어 담았으리라.

 

“기다려!”

 

표정을 감추려는 듯 빠르게 몸을 틀어 자리를 떠나려는 톨비쉬의 앞을 가로막았다.

 

“잘못했어. 내가 예의가 없었어. 톨비쉬. 제발.”

“당신께 이런 부탁을 받을 줄 알았다면 미리 연습이라도 해 볼 것을 그랬네요.”

“여, 연습?”

 

연습? 여자 브래지어 채우는 연습?

 

“뒤 돌아 주십시오.”

 

부드러운 목소리에 홀린 듯 뒤를 돌았다. 내 셔츠를 돌돌 말아 위로 걷어 올린 톨비쉬가 서툴면서도 느릿한 손길로 브래지어 후크를 채워주었다. 어디에 걸어야 하는지 모르는 모양으로 몇 번 헛손질하기는 했지만 곧 안정적으로 구멍에 고리를 걸어 채운 뒤 옷을 갈무리해주었다.

 

“이렇게 하면 됩니까?”

“어. 그 있잖아. 그. 연, 연습 말인데…”

“물론 농담입니다. 제가 누구인지 잊으신 것은 아니겠지요.”

 

톨비쉬가 자신의 가슴을 툭툭 쳤다. 먼저 변명하자면, 그때의 나는 톨비쉬의 기분을 나아지게 하려고 제정신이 아니었다.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저돌적으로 대답했다.

 

“미남!”

“신의 기사입니다.”

 

내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자연스럽게 흘려보낸 톨비쉬가 속삭이듯 간지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깨끗한 물가로 양을 치는 목자이니, 이 몸도 영혼도 모든 것이 신의 것입니다. 함부로 더럽힐 수는 없지요.”

 

순간 톨비쉬의 얼굴 위로 엄한 표정을 지은 아벨린의 얼굴이 겹쳐졌다. 그렇다. 기사단에는 규율이라는 것이 있다. 톨비쉬는 평범한 기사가 아닌 신의 기사다. 대부분의 종교가 쾌락을 경계한다는 점을 토대로 유추하건대, 알반 기사단 역시 이성과의 성적인 접촉에 대한 규율이 존재할 확률이 높았다.

 

설마 알반 기사단은 전원 처녀 동정인가?

 

“…잠깐. 그럼 당신 방금 내 속옷 만져서 규율 어긴 거 아니야?”

 

설마. 설마 아니겠지? 비명처럼 외쳤다.

 

“나 때문에 더러워진 거 아니야?”

 

톨비쉬가 대답 대신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본다. 순결한 시선, 순결한 입술, 순결한 손. 머리부터 발끝까지 순결한 처녀와도 같은 남자. 갑자기 불안이 엄습했다. 감히 손을 대서는 안 될 성물에 손자국을 낸 기분이었다.

 

“서, 성적인 의도가 없었으니 괜찮을 거야. 날 도와주려던 거잖아. 고작 이 정도로 규율에 어긋나면 어? 르, 르웰린은 이미 지옥에 갔을걸? 걔 연회장에서 난리도 아니야! 진짜야 내가 다 봤어.”

“저도 신께서 그 정도로 융통성 없는 분이실 거라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르웰린까지 팔아가며 읍소하는 나를 달래듯 톨비쉬가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율법을 등한시하여서는 안 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율법만이 전부는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율법은 믿음을 담는 그릇일 뿐 본질이 아닙니다.”

 

뭔가 어려운 이야기가 쏟아진다. 이해한 척 고개를 끄덕이는 내 속을 훤히 꿰뚫는 눈빛으로 톨비쉬가 검지를 세워 입술에 붙였다.

 

“오늘 이야기는 다른 이들에게는 비밀로 해주세요.”

 

그렇게 말하는 톨비쉬는 무척이나 야릇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눈매가 가늘게 휘어지고 입꼬리가 살며시 말려 올라가는 야릇하다 못해 교활하게까지 느껴지는 미소였다. 단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표정에 가슴이 울렁거렸다. 그와 무척이나 가까워진 것 같으면서도 동시에 한없이 멀어진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당신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 걸까? 내가 아는 당신은 당신이 아닌 걸까? 코끼리를 더듬는 맹인처럼 나는 당신의 일각만을 더듬고 있는 게 아닐까?

 

돌이켜보면, 그날 남자는 나에게 자신의 본질에 대해 꽤나 큰 힌트를 주었던 것 같다. 남자는 양을 치는 목자요 번제를 태우는 제사장이자 번제물 그 자체였다.

 

훗날, 남자를 파괴할 절망은 자신이 목자가 아닌 길 잃은 어린 양에 불과하였음을 깨닫는 순간 찾아온다. 흐느끼는 남자를 위로하고 싶지만 당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꿰뚫렸으니까.

 

 





(끝)

 

이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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