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나 다를까, 전속력을 다해 날아오는 청단은 전혀 속도를 줄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백호 또한 이름을 우렁차게 부르며 제게로 달려드는 청단을 인지한 것인지 그렇지 않아도 진창마냥 어둡게 굳어있던 표정은 썩어 비틀어진 무말랭이 처럼 일그러졌다. 

쿵-!!

지면이 다시금 박살 나는 소리가 나자마자 소요는 제 이마를 짚어 보였다. 망했다. 역시나 청단은 싸움을 말리러 온 것이 아니라 만들기 위해서 온 것이었다! 파열음과 함께 일어난 충격파는 그 주변에 몰려들어 있던 구경꾼들을 단번에 나자빠지게 만들었다. 멀쩡히 서 있을 수 있는 것은 무덤덤하게 모든 광경을 지켜보는 소요와 그 뒤에 숨어든 금령 뿐이었다. 순식간에 흙먼지가 흩날리고 조각조각 부서진 땅바닥은 파편이 되어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완전 미쳤어! 대제 죽은 거 아니에요??"

소요 뒤에서 나올 생각이 없어 보이는 금령이 비명을 질렀다. 확실히, 무신의 몸으로써 단련된 백호라면 모를까 가장 가까이 있던 은류가 이 충격을 그대로 받았다면 몸이 박살 났을 것이 분명했다. 금령이 호들갑을 떠는 사이 소요는 차분하게 흙먼지가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온 몸이 조각조각난 시체를 치워야 하는 상황 같은 것이 오지 않기를 바라는 찰나의 순간은 마치 억겁의 시간처럼 길게 느껴졌다. 

"..."

다행히도 금령과 소요가 걱정하던 최악의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 앞을 흐리던 먼지들이 점차 흩어져 시야를 밝히자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각자의 신기를 든 채 대치 하고 있는 백호와 청단이었다. 백호의 손에 쥐어져 있는 것은 창 형태로 이루어진 백호의 신기. 비광이었는데, 어느새 날아든 것인지 검은색의 창대는 제 주인의 가슴으로 향하고 있는 시퍼런 언월도의 날을 훌륭하게 막아내고 있었다. 청단은 이 마저 예상했다는 듯 시원하게 웃는 표정으로 언월도를 크게 휘둘러 보였다. 날카로운 검날에 베이지 않기 위해 백호는 창대를 거둬들이곤 뒤로 도약했다. 팽팽한 긴장감이 이어지며 두 사람 사이에서 끈을 당기고 있는 듯했다.

"아이고 머리야..."

결과적으로 은류는 무사했다. 앞뒤 생각하지 않은 청단이 충돌하기 직전, 은류가 휘말릴까 전전긍긍하던 백호가 손을 길게 뻗어 그를 밀쳐낸 것이다. 그런데도 이어지는 충격파에 바닥에서 몇 바퀴 구른 것인지 은류는 이미 저만치 나가떨어져 얼굴에 붉은 생채기가 난 상태였지만 몸이 박살 나는 처우보다는 이 편이 나을 것이다. 허나 문제는 이다음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너덜너덜한 상태였던 은류의 상처가 추가된 것을 보자 백호의 눈이 가늘게 뜨였다. 그 뿐인가, 어둡게 가라앉은 인상 속에서 청단을 바라보는 눈이 시퍼렇게 빛나 보였다. 살기가 줄줄 흘러넘치는 동공은 점이 되어 무섭게 번뜩였다. 허나 청단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듯 언월도를 고쳐 들며 말했다.

"우백호, 화를 내는 건 좋지 않다. 나와 함께 싸우며 모든 잡생각을 날려버리도록 하자."

청단은 죽도록 눈치가 없었다. 저런 말은 지금 상황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 싸움으로 머리를 맑게 만들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청단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였다. 맑았던 하늘에 점차 구름이 끼었다. 백호가 진심으로 화가 났다는 것을 알리기라도 하듯 불길한 바람과 함께 까슬한 모래들이 공기 중에 감돌았다. 청단의 개입은 완벽하게 상황을 악화시켰다. 차라리 백호와 은류를 그냥 두었더라면 이것보다 일이 꼬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된 이상 둘을 진정시킬 방법은 오로지 힘으로 떼어놓는 방법 뿐이었다. 소요는 한숨을 쉬며 옆구리에 채워진 수엽을 만지작거렸다. 이 상황을 그냥 놔두면 분명 천계 절반이 다시금 박살 날 것이다. 이를 복구하는 것 또한 분명 일이 될 터인데, 소요는 처리해야 할 일이 늘어나는 것이 그리 달갑지 않았다.

"뭘 하는 것이냐? 지금 저 둘을 말리려고?"

언제 어떻게 끼어들어야 할까, 머리를 굴리고 있던 와중 소요의 시선의 한참 아래서 맹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요가 고개를 한껏 숙이자 바로 보이는 것은 연홍서를 닮은 붉은 머리카락이었다. 천계에서 이런 색의 머리카락을 가진 이는 단 한 사람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주작신 홍연. 그렇지 않아도 일을 하기 싫어 바닥에서 뒹구는 게 일상이던 그녀가 이어지는 소란의 궁금증을 견디지 못하고 걸음을 한 모양이었다.

"이대로 둘 순 없으니까."

"너도 기운이 넘치는 모양이구나, 뭣 하러 힘든 일을 자처하느냐? 싸움으로 천계가 망가진다면 둘이 알아서 복구를 하겠지. 기운이 빠지면 알아서 그만둘 터이니 괜히 나서지 말거라. 새우 등 터질라."

"아무리 그래도..."

소요가 대답하려 하자, 홍연은 제 입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며 조용히 하라는 듯 시늉을 해 보였다.

"이런 일이 하루 이틀인 것도 아니고, 너무 걱정하지 말아라. 새로운 상대라면 모를까 저 둘은 늘 대련을 해오던 상대였으니 이러다 금방 말 것이다. 늙은이의 감을 믿어. 그것보다 우리는 더 신경 쓸 사람이 있지 않느냐?"

홍연은 저 멀리서 너덜너덜하게 서 있는 은류를 가리키며 말했다. 은류는 투명하고 하얀 눈을 깜빡이며 자신이 뭘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듯 보였는데, 그 모습이 정말이지 얼이 빠졌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멍해 보였고, 마치 어미를 잃은 아기토끼 마냥 벙긋거리는 모습이 몹시도 안쓰러웠다. 허나 소요는 금방이라도 다시 싸우려들 것 같은 두 사람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홍연은 소요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혀를 쯧쯧 차며 고개를 저어 보였으나 소요는 홍연의 표정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잠깐... 무슨?!?!"

"모름지기 연장자 말을 들어야 마땅하지 않겠느냐! 네 시선을 보아하니 또 둘 사이에 끼어들 것 같은데 내 이럴 수 밖에는 없겠다!"

홍연은 소요의 뒤에 찰싹 붙어있던 금령을 떼어내고 그 자리를 꿰찼다. 그것 뿐이랴, 무지막지한 힘으로 소요를 제 어깨에 주저 앉히고는 마치 솜털베개를 어깨에 얹어놓듯 소요를 들어 올렸다! 이건 의심할 필요도 없는 짐짝과 같은 취급이었다. 이렇게 작은 체구에서 흘러나오는 무력이라니, 홍연 또한 남쪽을 담당하는 사방신으로써 몹시도 높은 경지의 강함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곤 예상은 했지만 이것은 그가 가지고 있는 생김새와는 몹시도 괴리감이 컸다. 

"자, 가자꾸나!"

"뭐야?! 나도 데려가요!"

홍연은 그대로 소요를 들어 올려선 현무궁으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달려가는 와중 먼지 속에서 멍하니 서 있는 은류를 들춰매는 것 또한 잊지 않은 채였다. 오른쪽 어깨에는 소요, 왼쪽 어깨에는 은류를 들춰맨 기괴한 광경이 보여지고 있었다. 손이 모자란 탓인지 아니면 알아서 따라올 것이라 생각한 것인지 홍연은 금령을 두고 그대로 걸음을 옮겼는데, 예상대로 금령은 이 난리 통에 혼자 남아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인지 전력으로 달리는 홍연의 뒤를 열심히 따랐다. 금령은 몸은 하나도 쓰지 못하는 문신이었으나 문제에 휘말리고 싶지 않다는 욕망으로 인해 홍연에게서 전혀 뒤처지지 않는 달리기 솜씨를 내비치고 있었다.

"이 자식들...!"

은류를 데리고 빠르게 사라지는 홍연의 모습에 백호가 언성을 높이며 눈을 희번덕였다. 당장이라도 홍연에게 달려들 듯한 모습이라 할 수 있었다. 백호는 사방신 중 그 누구보다 빠르다. 마음먹고 달린다면 현무궁 쪽으로 사라지는 네 사람을 따라잡는 것은 어려운 일도 아니겠지만 지금 백호 앞엔 싸움을 기다리는 청단이 자리 잡고 있었다. 

"네 반려를 구하고 싶다면 나를 쓰러트리고 가라."

청단이 내뱉는 말은 영락없는 악당의 대사였다. 광경만 따지고 본다면, 백호는 사랑하는 공주를 납치당한 왕세자나 다름이 없었고 홍연과 청단은 이를 방해하는 삼류 악역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쿠궁-!!!

결국 거대한 굉음과 함께 백호가 폭발했다. 소요는 시시각각 멀어지는 싸움의 현장을 보고 머리가 아파왔다. 멀리서 힐긋 봐도 이미 금서관의 절반은 날아가 있는 것이 분명했으며 금서관보다 견고하게 지어지지 못한 건물들은 허공에 파편을 튀기고 있었다. 이미 가봤자 늦었겠지. 간다고 해도 홍연이 이미 제 몸을 단단하게 틀어잡고 있어 놓아줄 생각 같은 것은 없어 보였다. 대체 무슨 생각인지는 몰라도 홍연은 현무궁으로 향하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특별히 하늘을 걸어 날아 도착한 것도 아닌데 몹시도 빠른 속도였다. 순식간에 뺨을 스쳐 지나가는 바람의 감각이 선명하다.

"휴! 오랜만에 몸을 좀 썼구나! 들어가자!"

마치 홍연은 제집의 문을 여는 것 마냥 현무궁의 안으로 들어섰다. 눈이 멀어 앞이 보이지 않는 탓에 은류는 아직 제게 무슨 상황이 벌어졌는지 알지 못하는 듯했다. 연신 물음을 날리며 은류가 멀어버린 동공을 두리번거리자, 뒤따라오던 금령이 이를 잘 달래며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그러게 거기서 왜 고집을 부려요.' '백호는 어디 갔어요?'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하며 소곤소곤 이어지는 이야기가 소요의 귓가에도 조금씩 흘러들어왔다.

"...."

결국은 원점이었다. 무슨 일인지 파악하기 위해 궁을 나섰던 두 사람은 오히려 수가 늘어 본래의 자리로 돌아오고 말았다. 흑선은 갑작스레 늘어난 사람에 눈을 깜빡이며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지만 이내 가벼운 한숨과 함께 자리에 두 개의 찻잔을 더 놓고 차를 우리기 시작했다. 

"정말 이래도..."

소요가 말을 잇지 못하자 홍연이 차를 호록이며 이를 안심시켰다.

"에이, 괜찮다니까. 별걱정은 말고 어디 얘기나 해보거라. 왜 거기서 백호와 말다툼을 하고 있었던 것이냐?"

"맞아, 그게 저도 궁금했어요. 둘이 싸우는 거야 흔한 일이라지만 이번엔 정도가 좀 심했다고요."

아직까지 조금 갈라져 있는 현무궁의 바닥을 흘긋거리며 금령이 중얼거렸다. 금령은 툴툴거림과 동시에 은류의 옆에 앉아 어디서 꺼내온 것인지 모를 영약의 뚜껑을 따보였는데 효험이 있을법한 달짝지근한 향이 단번에 방 안에 맴돌아 마음을 안정시키는데 도움을 주고 있었다. 그렇게 은류의 상처가 신경 쓰인다며 노래를 부르더니 결국은 직접 치료를 해주기로 마음을 먹은 모양이었다.

"약은 또 어디서 가져오셨습니까."

"네? 현무의 서랍에 가득 들어있던데요? 현무는 자기 방에 뭐가 있는지도 모릅니까?"

소요의 물음에 금령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은류의 볼에 약을 바르는 손은 멈추지 않은 채였다. 얼굴에 대충 약을 문대자마자 상처가 감쪽같이 사라지는 것이 분명 효험이 뛰어난 영약임이 분명했다. 저런 게 방에 있었던가, 필요한 것을 찾는 것 외에 특별히 방을 살피거나 뒤져보지 않으니 이를 모를 법도 했다. 게다가 소요는 요 몇 백 년 간 크게 다쳐본 적이 없었다. 최근 가장 크게 상처를 입은 것이 벽린사에서 지네 괴물과 대치를 했을 때였는데 그 상처조차 영약을 쓸 틈도 없이 연홍서가 모두 치료를 해주었다. 소요는 무심코 제 팔을 들여다봤다. 흉조차 남지 않고 멀끔하게 빛나는 희여멀건한 피부에 인상이 찌푸려졌다. 여기서 왜 또 이딴 놈이 생각 나는 거지.

"현무... 마음대로 뒤져서 화났어요? 이건 제가 꼭 열 배로 쳐서 갚아드릴 테니..."

"...그런 게 아닙니다."

걱정하지 말고 치료나 계속하라는 듯 소요가 가볍게 손짓을 해 보였다. 금령은 어깨를 한번 으쓱인 후 다시금 은류에게 집중했다. 번들번들한 약에 볼을 문대지며 은류는 눈을 끔뻑였다. 상처가 심한 정도를 눈치챈 것인지 금령이 다시금 툴툴거렸다.

"어휴, 이 상처 좀 봐. 사실 대제가 말 안 해도 알 것 같습니다. 보나 마나 어디서 또 얻어맞고 백호신한테 들킨 거죠?"

"맞아요!"

금령의 예측에 은류가 어떻게 알았냐며 환하게 웃어 보였다.

"백호신은 대제를 때린 놈들이 누구인지 말하라고 했을 것이고?"

"네!"

"근데 대제가 말을 안 하고 그 자리에서 입을 꾹 다물었죠?"

"금령은 어떻게 그리 잘 알아요?"

은류가 신기하다는 듯 감탄해 보였다. 마치 남 일이 아니라는 듯 상세하게 알고 있는 금령의 선견지명에 홍연 또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소요 또한 이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워낙 남의 일에 관심이 없다 보니 소요는 백호와 은류가 싸우는 이유조차 잘 알지 못했는데, 역시 이곳저곳 들쑤시기 좋아하는 사람은 뭔가 달라도 다르구나. 

"그러게 왜 말을 안 하고 버텨요? 나 같으면 죄다 불어버리고 백호신한테 혼내달라고 했을 텐데."

"어떻게 그런 짓을 해요..."

금령의 말에 은류가 고개를 저어 보였다. 홍연은 이 반응에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팍팍 쳐보였다.

"어휴! 답답해 죽겠구나! 맞은 곳이 아프지도 않느냐? 네가 말하지 않으면 그 놈들은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고 다음에도 똑같은 일을 반복할 거다. 애초에 이게 지금 몇번째냐? 또 천체관 놈들 짓이지? 이젠 맞은 자국만 봐도 알겠다."

백호에겐 입을 꾹 다물고 사정을 알리지 않으려던 은류는 세 사람의 앞에선 제 사정을 술술 털어놓았다. 은류의 상처는 별을 관장하는 천체관의 신관들에게 홀대당해 생긴 것들이었다. 소요는 어째서 천체관의 이들이 은류를 이리도 싫어하는지 알지 못했으나 슬슬 기억을 되짚어보니 은류를 노골적으로 괴롭히는 이들은 늘 검은색의 도포를 입은 채 오합지졸 마냥 몰려다니고 있었던 것이 어렴풋이 떠오르는 듯했다. 소요는 이제서야 그들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백호신한테 말하지 않으면 혼자서 복수라도 할 생각이에요?"

"아뇨?"

"그럼 두고두고 쌓았다가 금서관에 고발해서 한 번에 터트리려고?"

"들어주지도 않을걸요..."

"그럼 대체 백호신한테 숨기는 이유가 뭐예요?"

금령과 은류는 빠르게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일이 이렇게 되니 소요 또한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은류가 말을 하지 않는 이유, 근본적인 원인을 알게 되다면 두 사람의 마찰을 해결하는데에 도움이 될 것이고 하루가 멀다고 천계의 바닥이 갈라져 무너지는 일을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누가 그랬는지 말했다가 백호가 천체관 신들을 전부 죽이면 어떡해요..."

"아."

소요를 제외한 두 사람이 순간적으로 숨을 들이켰다. 금령과 홍연은 뭐가 문제인지 그제서야 알아챈 듯했다. 백호신은 참을성이란 것이 없었다. 과거 본인의 감정이 수틀린다는 것을 이유로 백호 가문의 신들을 몰살시킨 것은 물론이요. 화를 참지 못하고 문제를 일으킬 뻔한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이성이 날아간 그를 진정시킬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그의 반려인 은류 뿐이었는데, 문제는 그가 평소보다 더 불같이 화를 내는 이유도 모조리 은류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백호는 마치 세상에 둘 밖에 남지 않은 것 처럼 행동했다. 은류에게 무슨 일이 있다면, 그 이유와 사정이 어찌 되든 봐주지 않고 모든 것을 말살시켜 버릴 듯 분노했다. 

헌데, 만약 은류가 이렇게 상처를 입은 이유가 천체관의 일부 신들과 관련되어 있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천체관 신관들의 몰살은 물론 건물 전체로 날아가는 것도 모자라 천계 일부가 소실되어 버릴지도 모른다. 은류가 그 자리에서 입을 다문 것은 천계 모두를 위한 선택이었다. 

"거짓말이라도 해서 말을 돌리지..."

"알잖아요... 저 거짓말 못하는 거..."

말하는 것을 듣자 하니 은류는 남에게 거짓을 말하고는 견딜 수 없을 만큼 올곧고 유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소요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올바른 심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절대로 싫어할 수 없다. 어떻게 해서든 도움을 줄 수는 없을까. 소요가 천체관에 관해 묻기 위해 흑선을 바라보자 흑선은 멀대같은 키를 굽혀 소요의 귀에 속삭였다.

"괜히 나서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천체관의 책임자인 성휘는 제 3자가 자신들의 일에 끼어드는 것을 몹시도 싫어합니다. 천체관의 이들이 생명신을 괴롭히는 것은 과거에 있었던 앙금이 남았기 때문입니다. 지극히도 개인적인 일이지요. 구조상 그들은 사방신의 권력 아래에 있지만 적으로 돌리면 꽤나 골치 아파질 것입니다."

이것은 몹시도 아쉬운 일이었다. 앞으로 벌어질 현무궁의 행보에 지장이 가는 일이라면 쉽사리 감정을 앞세울 수는 없다. 홍연과 금령은 이미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인지 은류와 천체관의 사이에 직접적으로 끼어들 낌새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둘 사이의 앙금이 사라질 때까지 언제까지고 이런 상황을 반복해야 한단 말인가? 소요가 팔짱을 낀 채 생각에 잠기자 금령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대제가 백호신을 좀 살살 다뤄봐요. 제 생각엔 백호신은 좀 짐승 같은 면이 없지 않아 있잖아요? 화를 낼 수 없도록 살살 녹이면서 둘이서 해결책을 강구해보라고요. 대제한테 손을 댄 놈들만 골라서 조질 수 있도록."

"어떻게요?"

"애교를 부린다거나..."

"지금 이만큼이나 나이를 먹은 사람한테 대체 뭘 시키는 거냐?"

홍연이 바로 반박했다. 겉모습은 소년이었으나 은류는 이미 나이를 먹을 대로 먹은 할아버지와도 같은 속을 지니고 있었다. 애교는 둘째치고 세상 돌아가는 일에 뒤처지지 않으면 그게 천운인 수준이다. 은류도 금령의 말에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고 두 사람에게 만류당하자 금령은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그럼 뭐 뾰족한 수라도 있어요?! 거짓말은 못하겠고, 애교로 애간장을 녹이지도 못하고, 방법이 없네! 방법이!"

"....주의를 돌리는 일이라면 꼭 그런 것이 아니더라도 본인에게 집중을 하게 만들면 되는 일이 아닙니까."

가만히 듣던 소요가 중얼거렸다. 거짓말이나 애교 같은 것은 소요와는 정반대의 이야기였으나, 전투 상황에서 남의 눈길을 빼앗는 법은 알고 있었다. 압도적인 강함으로 제게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거나, 일부러 과장한 몸짓이나 기술을 선보여 이목을 집중시키는 것 따위의 일이었다. 문제는 거창한 기술 같은 것은 단 하나도 쓰지 못하는 은류의 능력이었으나, 조언을 하지 않고 입을 다물고 있는 것 보다 훨씬 나은 해결책이 나올 것 같았다.

"아... 알 것 같아요!"

소요의 조언에 은류가 제 무릎을 탁 두드리자 금령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오! 대제! 나이를 헛먹은 게 아니었군요?! 이런 조언을 듣고 바로 해결책을 생각해내다니!"

칭찬인지 험담인지 모를 이야기였으나 은류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 웃음을 흘리며 머리를 긁적여 보였다.

"하지만 잘 통할지는 모르겠어요..."

"대제가 생각해낸 방법이면 얼추 들어맞겠죠. 다른 건 몰라도 백호신과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건 대제 뿐이잖아요? 백호신에 대해서 대제가 모르는 게 있다면 그건 세상 전체를 뒤져봐도 아무도 모르는 일 일 거라고요. 자신감을 가져요."

쾅-!!!

금령의 응원과 함께 천계 중앙에서 또다시 한차례의 굉음이 들려왔다. 백호와 청단이 아직도 싸우고 있다는 증거였다. 소리가 한 번씩 울릴 때마다 점차 갈라져 가는 바닥에 금령은 의자를 끌어 소요에게로 몸을 딱 붙였다. 

"이러다간 대제가 주의를 돌리기도 전에 멸망이 먼저 찾아오겠는데요. 역시 도망보다는 말렸어야 하는 게..."

금령이 중얼거렸다.

"괜찮다고 몇 번을 말하느냐? 청단은 싸움에 미친 싸움광에다가 머리까지 근육으로 가득 차서 생각이라곤 단 하나도 하지 않는 것 같지만 지금껏 제가 수습하지 못할 문제를 일으킨 적은 없었다."

홍연이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그렇다면 백호신은?"

소요가 물었다. 청단은 그렇다 쳐도 문제는 흥분한 백호였다. 벌써부터 그가 화가 났다는 흔적이 속속들이 보이고 있는데, 완전히 진노한 그를 무력으로 말리려면 천계의 무신 전체가 뛰어들어도 모자랄 터였다. 

"...."

홍연은 말없이 차를 삼켰다. 내색은 하지 않았으나 거기까지 생각을 하진 못했다는 듯 찻잔을 든 손이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뭐... 어떻게든 되지 않겠느냐! 내가 겪어봤는데 천계가 그리 쉽게 무너지는 것도 아니더라!"

"맞아요. 너무 걱정마세요. 백호는 화가 많긴 하지만 그렇다고 한순간에 천계를 멸망시킬 만큼 나쁜 사람은 아니에요."

"음, 그 의견엔 동의 못하겠지만 적어도 대제가 여기 있으니 백호신이 지금 당장 천계를 무너트릴 일은 없겠죠."

홍연이 가슴을 탕탕 치며 말하자 은류와 금령이 거들었다. 원래 사방신들은 이렇게 대책이 없나. 소요가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이제 와서 후회해봤자 말리러 갈 수도 없는 것, 소요는 제 방에 자리를 잡고 틀어앉은 네 사람과 함께 기다림의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소요는 평소 말이 없는 탓에 특별히 이야기에 끼지는 않았으나 금령, 홍연, 은류가 한마디씩 내뱉는 것 만으로도 분위기는 왁자지껄하게 달아올랐다. 도무지 걱정이라곤 보이지 않는 표정들을 보아하니 저도 모르게 동화가 될 것만 같았다. 

그러나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여전히 끊길 생각을 하지 않는 굉음은 점차 거리를 좁혀오고 있었고, 폭발음이 터지는 간격도 몹시 짧아져 청단과 백호, 두 사람이 격돌하고 있는 장소가 바로 근처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이렇게 두다간 현무궁까지 직접적인 여파가 미칠 것이다. 적어도 궁에 손해를 끼치지 못하도록 해야 했다. 지금 현무궁엔 차를 마시고 있는 네 사람 뿐만이 아니라 여러 잡일들을 하고있는 정괴들 또한 존재했기 때문이다. 

쾅-!!!!

잠시 상황을 살피기 위해 소요가 몸을 일으키는 순간, 그가 했던 걱정은 단숨에 물거품이 되어 사라졌고 단정했던 소요의 방 안은 완전히 개판이 되어있었다. 백호의 힘에 튕겨 나간 청단이 현무궁의 벽을 박살 내고 들어와 바닥에 나뒹굴게 된 것이다!

"음... 이번 건 좀 세군..."

돌들 사이에 파묻힌 청단이 옷을 툭툭 털고 일어서며 중얼거렸다. 부스스한 머리를 다시 정돈하던 청단은 뒤늦게 주위를 둘러보곤 자신이 있는 장소를 깨달은 듯했다.

"오, 어디 갔나 했더니 다들 모여있었군. 미안하다. 최대한 이곳으로는 오지 않으려 했는데 백호 녀석의 힘이 너무 강했어."

아직도 명치가 욱신거린다. 청룡이 실없이 웃으며 중얼거리곤 제 가슴께를 더듬어 보였다. 소요는 머리가 지끈거릴 지경이었다. 아니, 차라리 무고한 신들 사이로 떨어져 상처를 입히는 것 보다는 이곳이 나은가. 다친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 천만다행일 지경이다. 허나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청단이 나자빠진 곳을 확인한 백호가 뚫린 벽 사이로 모습을 내비쳤다. 이미 그 모습은 반쯤 정상이라고 할 수 없는 상태였는데, 그가 부서진 방 안으로 걸음을 들이자 마자 몸을 가눌 수 없는 바람과 함께 태풍과도 같은 전조가 밀려들었다. 금령은 다시금 소요의 뒤로 숨어들었고, 홍연은 이 광경을 보면서도 아직 쏟아지지 않은 차를 마저 마시며 눈을 빛내고 있었다.

'나서야 하나?'

더 이상 현무궁을 부쉈다간 용서하지 않을 테다. 소요가 속으로 중얼거리며 수엽에 손을 댔으나, 이를 눈치챈 듯 여태껏 가만히 있던 은류가 화살처럼 앞으로 튀어 나갔다. 청단을 가로막고 백호의 앞에 서보인 그는 화가 난 백호와는 달리 온화하고 상냥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모든 이들을 죽일 것 처럼 분노한 이와 모든 이들을 용서할 것 처럼 따뜻한 이가 마주 섰다. 은류는 보이지 않는 동공을 애써 굴려 보이며 백호와 눈을 마주치려는 듯 애를 쓰고 있는 듯했다. 

"너...."

다시금 제 앞을 가로막는 은류의 행동에 백호는 쉽사리 진정을 하지 못했다. 차마 손을 대지는 않았지만 풀리지 않는 미간과 어두운 표정이 그가 내고있는 분노의 깊이를 가늠하게 해주었다. 

"저리 비...."

"!!!!"

백호가 말을 내뱉음과 동시에, 아슬아슬한 선의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던 이들은 동시에 눈을 크게 뜰 수 밖에 없었다. 은류는 먼지를 뒤집어쓴 백호에게 단번에 안겨들어 따뜻한 포옹을 이어가고 있었다. 워낙에 체격차가 큰 탓에 은류의 팔은 백호를 완벽하게 껴안지도 못했지만 은류는 그런 건 상관없다는 듯이 백호에게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 듯했다. 갑작스레 벌어진 일에 백호의 귀가 붉게 물들었다. 마치 작은 쥐가 고양이를 끌어안는 듯한 이상하고도 신기한 광경에 금령이 소요의 귓가에 중얼거렸다.

"세상에, 현무가 조언을 해준 게 효과가 있나 봐요. 저렇게 할 줄은 상상도 못했네."

그건 소요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야기를 덧붙이긴 했으나 이런 결과를 생각하고 내뱉은 조언은 아니다. 사람이 무언가를 받아들이는 것은 절로 생각하기 나름이지만 은류는 백호가 자신에게 약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백호, 이제 화 풀렸어요?"

모두가 보는 와중에 은류가 백호의 품에 안긴 채 물었다. 백호는 대답을 하지 않았지만 제 단단한 두 팔을 끌어올려 은류를 소중히 끌어안았다. 하지만 여전히 청단을 노려보는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였다. 무턱대고 제게 덤볐다는 것이 괘씸하다는 듯, 몸은 상냥하게 은류에게로 향해 있었지만 그 표정만큼은 험악했다. 은류는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올려 보였다. 백호의 시선이 제게로 향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듯 그는 조심스레 손을 올려 백호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제서야 백호는 무섭게 굳혔던 표정을 풀며 은류에게로 눈동자를 내렸는데, 엉망이 된 방 안의 사람들이 빠짐없이 경악을 한 것 또한 그 순간이었다.

"!!!!!!!!!!"

"???????"

관심을 제게로 집중시키는 것도 모자라, 은류는 까치발을 돋아 백호에게 진한 입맞춤을 하기 시작했다!

홍소백류만 씁니다. 가뭄에 콩나는 연성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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