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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IGGER WARNING : 살해로그

- 폭력, 살해 등의 요소가 포함되어 있으므로 열람 시 주의를 요합니다.




환청을 들었다.


이즈.

살려줘.

이즈.


삐—. 


총성이 질척한 빗물이 되어 이지스 요크셔 그 안으로 퍼붓는다. 귀에서 등골을 따라 깊숙한 곳으로, 아래로, 아래로, 더욱 아래로, 뚝, 뚝, 삐이… 뚝. 

고작 한방울 비에도 녹아내리는 어떤 세계가 있다.

지독한 이명이 마침내 발 끝을 적시자 이지스는 무너졌다. 


조각.


파편.


조각…


파편.


시야에 들어온 장면을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 그 사람이 19년, 내가 10년. 거의 30년에 달하는 기나긴 시간 사람 손을 탔던 우산이다. 고물이어도 튼튼했다. 그런데…?


땅으로 내려앉았던 손이 퍼뜩 허공을 부유한다. 이네리어? 이네리어. 정신 좀 차려 봐요. 이네리어, 이네리어… … 


겨우 쇳덩이 하나에 산산이 부서진 우산은 손 쓸 도리조차 없게 보였다. 몇 부분을 그러모아 안간힘을 써 보아도 형상이 갖춰지지 않는다. 겨우 쇳덩이 하나, 사람 목숨 하나. 겨우 쇳덩이 하나에 싸늘히 늘어진 그 사람은 손 쓸 도리조차… 없게 보였다. 보였었다. 그것으로 이지스의 마음은 꿰뚫렸다. 매캐한 화기의 향이 피어올라 우산을 덮자 그는 누군가의 영정과 마주한다. 아. 하나의 세계가 다시금 박살나기란 얼마나 손쉬운 일인가? 

균열이 더해졌다. 영혼 가까운, 인간 기저의, 가장 깊고 깊은 곳에 갈라진 틈이다. 이제 곧 완벽히 깨어질 그 틈 위에 서서 이지스 요크셔 천천히 눈을 감는다. 내도록 소란하던 공간에 암막이 내려온 듯 모든 것이 멎었다. 


우산을 펼쳐 비를 막아주던 존재가 더이상 없게 되었을 때 그의 우산은 복수의 현상(現象)이 되었다. 이 우산을 알아보는 사람을 찾으면 반드시 죽여버려야지. 이 우산을 알아보는 사람을 찾으면 반드시 죽여버려야지. 이 우산을 알아보는 사람을 찾으면 반드시, 죽여버려야지. 그날의 다짐이 자꾸만 혀 끝을 맴돈다. 

어떡하지? 이 우산을 알아보는 사람… … 

이제 찾을 수 없게 되었네.


그 원인이란,


이지스는 번쩍 일어선다. 짚을 것이 사라져 몸이 비척여도 시선은 타오르며 온전히 일직선이다. 


약점을 드러내고 다닌 것은 오히려 대대적인 경고였다. 이지스 요크셔 주변의 그 누구라도 저 낡아빠진 우산이 그의 역린임을 - 어렴풋이나마 - 모르지 않았고 따라서 미치지 않고서야 먼저 건드리려는 치도 그간은 없었다. 


그랬는데…


일레르 비올라. 네가 뭐지? 네가 뭔데 감히.

구질구질하고 징그러워도 그래야만 살아갈 수 있었다. 물고기는 아가미로 호흡을 해. 뭍으로 튀어올랐을 때 고여있는 물에라도 들어가질 않으면 숨이 끊겨. 우산 그늘은 수조, 어항… 그 비슷한 것. 나에게서 대체 무얼 앗아간 거야? 어떻게? 어떻게 이런 짓을? 


한줄기 호기심이 무너진 정신을 더더욱 좀먹는다. 정정하자면, 미세한 차이일지 모르나, 호기심이 아니라 의문이었다. 남의 소중한 것을 이리도 쉽게 짓밟을 수 있다면 그 본인이 살아낸 삶이란 어떤 부류의 것인가? 딛고 선 지반은? 얼마나 결여된 인생을 살았어야 이다지도 구석구석 모나게 닳을 수 있나? 


물론 그것은 이지스 요크셔가 할 만한 질문은 아니었다.


얼마만큼 사소하고 어느 정도 추악하고 어느 정도 망가져 있는지, 이지스 요크셔는 고할 필요가 없었다. 알려줄게. 얼마나 바스라진 인생인지. 어찌나 위태하고, 또 아슬하며, 통제할 수 없는 인생이었기에 "가지고 다니던 우산 하나 망가진 정도"로 이렇게,


이토록 쉽게 사람을 죽일 마음이 고개를 드는지.



다 찢어져 뾰족하게 날이 선 쇳조각 - 우산이었던 것, 이 가장 먼저 눈에 밟혔다. 하지만 저것만큼은 안 된다. 저것은… 저것만큼은 차마 남을 해할 때 쓸 수 없다. 그래선 안 돼.


너는 뻔뻔하고 가증스러운 낯짝이 무색하게 바닥에 엎어져 있었다. 연약한 존재라도 되는 양, 불쌍한 꼴로. 그러면서도 웃는다. 

주위엔 마찬가지로 널브러진 물건들이 잡다하다. 이지스는 그늘져 읽을 수 없는 얼굴로 시선을 돌린다. 


저거면 되겠네.


땅에 떨어진 당신 단장을 주워 서서히 치켜드는 모양새는 한두 번 해 본 이의 것이라 말할 수 없었다.

이전의 업이었으므로 당연하다.


이네리어 펜드래곤이 죽은 후 자연히 관두게 되었지만, 남의 소중한 것을 쉽게 짓밟는 일. 그 문장 자체가 이지스의 생이었다. 반대로 소중한 것 - 어려서 가문을 버리고 뛰쳐나온 도련님 이지스 요크셔 아인호프의 성장 전반을 지탱해준 하나뿐인 소중한 사람, 우산의 주인 - 을 잃고 난 뒤에야 그 잔인함을 깨닫게 되었으니 어찌 보면 꼴 좋은 처벌을 받은 것이다.


그렇기에 지금의 행위는 제정신의 이지스 요크셔라면 하지 않을 짓, 두고 후회할 짓이다. 다시는 사람을 죽이지 말아야지. 이지스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그를 지배하는 것은 거대한 맥동이라 골몰할 겨를조차 없으니 깨고 나면 어떤 죄책에 사로잡힐지 모른다.


아… 그러고 보면 착각이다.

깨어날 세계조차 깨어졌었지.


"넌 나랑 똑같은 인간이야."


천천히, 다가서며, 나지막이 읊조린다.

네가 나와 거울처럼 닮았다면, 그럼 일레르 비올라는 죽어도 마땅할 것이다.

나도 그러하나 세상에 한이 남아 꿋꿋이 견디고 버티며 복수할 언젠가를 위해 살았는데,

이제 매개가 사라졌으니 살아갈 의미조차 모르겠다. 그들에게 복수하지 못한다면, 그럼 일레르 비올라는… … 


그 대신에라도 죽어야 한다. 


부정하진 마.



이지스, 무방비한 네 머리 위로 단장을 내려찍는다. 정교하게 세공된 그 잘 빠진 장식으로, 

한 번, 

두 번, 

세 번, 

… … 장식이 모조리 부서질 때까지.


분이 풀리지 않았다. 내려치면 기형적인 소음이, 다시 내려치면 익숙한 액체가 튀어 그를 적신다. 아. 소름끼쳐. 끔찍해. 하지만 참을 수가 없어. 


단죄의 의식은 한참동안 끊이지 않았다.




—,


으윽.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없었으나 이지스 요크셔는 불현듯 헛구역질을 했다. 갑작스레 온 감각이 악을 쓰며 기립한다.


사람을 죽였다. 사람을 죽였다. 죽이고야 말았다. 익숙한 일일텐데 이 죄악감은 이상하다. 

그제서야 주위를, 제 상태를 돌아본다. 웅덩이. 식은땀. 그것과 뒤섞인 눈물.

뚝, 떨어져 내린다. 축 내려앉은 머리카락 끝에 맺힌 물기가 뺨을 타고 흘렀다.

비 맞은 생쥐처럼 축축하게 젖은 이지스 요크셔는, 스스로 내린 비에 질식되어… 마치 조롱받는 기분을 느끼며, 헐떡이고 있었다.


이상해.

이상해, 이건 이상해…


왜… …





욕망을 토해낸 대가란 이렇게 끔찍한 것인가?


익숙한 붉은빛 눈동자가 공허하게 드러나 무언의 말을 전한다.

숨이 끊어진 일레르 비올라 앞에 주저앉아, 이지스, 어린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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