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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았다.


멀리서부터 이어져 오던 발걸음이 마침내 멈춰섰다. 멈춰선 곳은 숲 속에 존재하는 낡고 허름한 성 앞이다. 아무도 이름 모를, 소문만 무성한 요상한 성이다. 집이라 하기에는 성 같고 성이라 하기에는 집 같은 모양새의 주거공간이 덩그러니 그 자리에 있다. 전쟁 이후 아무도 찾지 않았던 성이다. 괴상한 모양새로 흐르듯 떠도는 성이었다. 잔뜩 녹이 슨 손잡이를 쳐다본 방랑자는 그 성의 문을 두드려 열기를 결심한다. 

.

.

.

.


그러니까 동화의 시작은 그런 문장이었다.


“제가 하울의 소피예요.”


뭐?

퍼석거리고 부스스한 금발 머리를 하고 눈을 반쯤 뜬 마법사가 인상을 찌푸린다. 불청객의 등 뒤로 쏟아지는 햇살이 유난히 밝다. 주말 아침부터 이게 무슨 일이야. 잠이 덜 깬 금발의 남자는 마른세수를 하며 눈을 비볐다. 그러니까 지금 뭐라고...


“들어가도 되죠?”

“아니 당연히 안 되지.”


막무가내로 성안에 들어오려는 불청객을 성의 주인이 막아선다. 그늘 안으로 한 발짝 다가오니 비로소 선명히 보이는 얼굴. 자신보다는 조금 더 큰 키에 휘어지는 눈. 검은 머리에 파란색 후드티를 입은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한번 그 대사를 친다.


“아니 제가 하울의 소피라니까요?”


그러니까 그게 대체 무슨 소리냐고.





절대낭만 마법동화

하울 윤 x 소피 겸




“와... 초장부터 할 거 많네.”


이름 모를 남자는 들어오자마자 한숨부터 쉬었다. 그도 그럴 게, 성안은 각종 잡동사니로 가득했다. 배달 음식을 먹고 남은 봉지들이 책상 위에 잔뜩이었고, 찌그러진 맥주 캔과 먹다 만 오징어 같은 것들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꽤 오랫동안 청소를 하지 않은 게 분명한 먼지 낀 바닥과 희뿌연 창문 같은 것들은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도 단 번에 보였다. 한 마디로 개판. 돼지우리. 난장판. 그런 단어들과 아주 잘 어울리는 모양새였다. 막무가내로 무단침입한 남자는 그 어지러운 사태를 보며 팔을 걷어붙이고 있었다. 그렇다면 원래 이 성의 주인은 지금 무얼하고 있는가... 하니,


“아니 당신 진짜 뭐... 우욱...”


주말 아침부터 술에 개꼴은 마법사는 입을 틀어막고 벽을 짚는다. 남자가 힘없이 현관에서 밀린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숙취.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속이 울렁거리는데 자기보다 덩치 큰 사람을 무슨 수로 막아. 골이 울렸다. 와 진짜 울렁거리는 거 장난 아닌데...


“우웨엑”


결국에는 그 사단이 나고 만다. 불청객은 별 드러운 꼴을 다 본다는 얼굴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다. 못 말린다는 한숨이 함께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는지 표정을 고치고 상큼하게 운을 띄운다. 

 

“석이라고 부르세요. 그리고 이건 수당에 추가로 청구할 거예요.”


석이는 집이 더럽다고 중얼거리면서 남자의 등을 떠민다. 일단 씻고 오시고 정신 좀 차리세요. 비틀거리는 남자는 저항도 못하고 욕실에 처박힌다. 석이는 성 주인을 처리한 뒤 본격적인 청소를 시작한다. 일단 쓰레기를 비우고, 먼지를 좀 쓸고, 걸레질까지 해야겠다... 머릿속으로 아무리 견적을 세워봐도 깔끔해질 모습이 보이지 않긴 했다.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는 와중에 화장실에서는 토악질하는 소리가 연이어 들려온다. 


“하여튼 개꼴값...”


석이는 최대한 빠르게 몸을 움직인다. 바닥에 흥건한 숙취의 잔해를 처리하는 게 급선무였다. 박박 닦는 건 나중에 하더라도 일단 이 난장판은 진압해야 했다. 집안일에 익숙한 손놀림이 조용히 거실을 감쌌다. 상황 파악이 안 되는 술병난 마법사는 퀭한 얼굴을 하고 화장실에서 기어 나와 소파에 몸을 누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석이는 어디서 찾았는지 청소기 선을 연결하고 바닥에 있는 먼지를 빨아들이고 있다. 


“너 뭔데... 너 뭐냐고...”

“아니 얘기했잖아요. 댁의 소피, 입니다만.”

“아 뭔 개소리야... 너 나 알아?”


소파에 엎어진 남자가 괜히 꽥 하고 소리를 지른다. 쳐다보지도 않고 묵묵히 청소기를 돌리던 석이가 별안간 소파 쪽을 바라본다. 위잉 거리는 청소기는 여전히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진 과자 부스러기를 빨아들이는 중이었다.


“당신이 제 하울이라니까요.”

“아까부터 뭔 하울 하울... 내 이름은 제대로 아는 거냐고.”


석이는 피곤으로 절어있는 남자의 얼굴을 계속해서 쳐다봤다. 쨍알거리는 목소리에 대고 쓸데없이 곧은 얼굴이 정직한 답변을 한다. 네, 아는데요.


윤정한


석이가 그 입으로 윤정한 세 글자를 뱉자마자 부엌에 있던 모닥불이 파란색 빛을 뿜어낸다. 5초간 집 안을 가득 메운 빛 때문에, 안 그래도 숙취로 속이 울렁거리던 윤정한은 엄청난 두통을 다시 한번 경험했다. 와 진짜 토 쏠려.


“아니 내 이름은 대체 어떻게 안 거야.”

“성 앞에 명패 있던데요”


진짜 골 때리네. 우리의 마법사 윤정한은 아직도 상황 파악이 덜 됐다. 평소에는 팽팽 잘도 굴러가던 머리가 거실 한 가운데를 떠도는 기분이었다. 석이. 별안간 자기가 석이라며 나타난 남자. 집을 청소해주니까 감사하긴 한데 갑자기 왜? 내 평화롭고 안락한 성에 대체 어쩌다? 하울이랑 소피는 또 뭐야. 모르는 것투성이였다. 아니 그래서 뭔소리냐고.


“야, 너는 마법사라는 새끼가 그것도 모르냐?!”


머리를 싸매고 있는 마법사를 앞에 두고 부엌 한 켠에 놓인 모닥불에서 새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여기서 잠깐,


안녕하세요, 저는 이 성의 캘시퍼입니다. 방금 소리 지른 모닥불 같은 게 저 맞습니다. 이 성의 하울은 지금까지 주구장창 보신 숙취에 시달리고 있는 윤정한이고요. 자기가 소피라고 주장하는 남자는 방금 나타났습니다. 태초의 마법사 하울과 하울의 사랑인 소피의 이야기를 여러분은 아실 겁니다. 세계 각 지역까지 구석구석 전해진 이야기니까요. 시간이 흐르면서 마법사와 악마와 그의 구원자는 마법 같은 동화의 등장인물 이름으로 대체되기 시작했습니다. 다들 그 포맷을 따르기 시작한 거죠. 쉽게 말하자면 명칭에 가깝습니다. 성을 가지고 있는 마법사는 하울, 그와 계약하는 악마는 캘시퍼. 하울의 운명은 소피가 됩니다. 이들은 서로의 이름을 매개로 운명을 함께하게 됩니다. 


“너랑 나도 그런 관계잖아.”


윤정한과 계약을 한 이유는 다른 게 아닙니다. 게으르긴 하지만 실력 좋은 마법사라 그랬습니다. 한 마디로 재능충이어서요. 이 성에 묶이게 되더라도 빨아먹을 게 많을 줄 알았습니다. 악마는 하울의 미색에 홀리지 않는 것이 기본 조건이라는데... 예 저는 아무래도 홀린 거 같습니다. 그냥 아주 퐁당! 빠졌습니다. 이 외로운 남자에게는 성을 유지해 줄 악마가 필요했고 저는 그 역할을 자처하고 싶었으니까요. 하울과 캘시퍼의 룰은 별 게 없습니다. 둘은 운명 공동체 입니다. 캘시퍼는 하울의 심장을 대가로 그에게 힘을 줍니다. 그것이 별거 아닌 계약 조건 입니다. 이 성을 굴리는 건 제 일이지만 이 성이 살아있게 만들려면 소피가 있어야 합니다. 하울에게는 언제나 소피가 있어야 한다는 게 마법 세계의 법칙입니다. 


“아니 그거 다 개뻥 아니었어? 이 시대에 그런 게 어딨어~ 다 전래동화야. 쟤가 내 소피면 난 쟤 이름을 알아야 하잖아. 난 아무것도 모른다고.”

“하 참나, 정말로 나를 몰라요?”

“그래 모른다, 어쩔래.”

“그럼 평생 모르세요. 어쨌든 그와 별개로 저는 이 성에서 일해야겠으니까요.”


하울과 소피 이야기에 반발하는 마법사를 두고 석이는 태연하게 자신이 여기에서 일할 것임을 선전 포고합니다. 


“막무가내인 게 제법 네 소피스러운데...”


아니라고 하면서 저를 째려보는 성 주인의 눈빛이 매섭습니다. 그러나 윤정한은 언제나 설렁설렁 삶을 대해왔고, 불청객을 내쫓을 정도의 의지가 없는 인간이었습니다. 그에 반해 석이는 어째서인지 이 성에 붙어있겠다는 의지가 강했습니다. 그러니 어쩌겠어요? 


결국 그 날 이후로 석이는 이 성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




석이가 이 성에 들어온 이유가 무엇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 이유를 숨기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몰랐다기보다는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이 더 맞을 지도 모른다. 석이는 그럴 때마다 하던 일을 멈추고 친절하고 사무적인 설명을 이어갔다. 매번 손에 끼고 있는 형광핑크색 고무장갑에 설명이 묻히는 것 같긴 했지만.


“첫째, 당신이 제 하울이고 제가 당신의 소피니까 우리는 운명 공동체고... 운명을 함께 하는 사이에 떨어져 있으면 이상하니까요.”

“아니 그러니까 내가 왜- "

“둘째, 저는 지금 일자리가 필요하거든요.”


투덜대려던 정한은 석이의 굳은 표정에 하던 말을 멈췄다. 이내 금세 바뀌는 얼굴. 일자리? 그렇지 아무래도 요즘 실업률도 높고... 이해는 되네. <운명>이라는 단어보다 일자리라는 말이 더 설득력 있기는 했다. 그는 나름대로 실리를 아는 마법사니까. 전쟁이 끝나고 애매한 평화와 폐허가 된 도시만 남겨진 상황에서 직장을 구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리라. 그래도 그게 굳이 여기인 건 이상했지만... 합리적인 듯 비합리적인 듯 요상한 말에 정한은 대개 설득 당하는 편이었다.


“집이 개판이던데... 관리할 사람이 필요하지 않아요? 저는 일자리가 필요하고, 이 성은 그 일을 해 줄 사람을 필요로 하는 것 같으니, 제가 여기에 사는 게 하울에게도 이득이죠.”

“그렇게 부르지 마.”


설득될 위기에 놓여 고개를 끄덕이려던 정한이 순식간에 날 선 소리를 했다. 찡그린 얼굴에는 혼란과 짜증이 가득해 보였다. 정한은 꼭 석이의 입에서 하울이나 소피라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질색을 하며 펄쩍 뛰었다. 아무래도 낯 간지럽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근데 어차피 너는 쟤를 데리고 살아야 해.”

“뭐? 왜!”


분위기가 싸해지려는 타이밍에 별안간 캘시퍼가 끼어들었다. 


“어제 쟤가 네 이름을 불렀잖아.”


캘시퍼가 그 이름에 반응하고 푸른색 빛이 집을 감싸는 현상이 그저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석이가 주장하는 대로 그가 윤정한의 소피라는 뜻이었고, 캘시퍼 앞에서 이름을 부른 순간 그들의 계약은 성립된 셈이었으니까. 윤정한은 이 설명을 듣자마자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싫어, 싫다고... 더 이상 누군가를 들이는 건 싫단 말이야... 석이는 아랑곳 하지 않고 그런 윤정한을 내버려 둔 채 분리수거를 하러 나갔다.


캘시퍼는 말도 안 되는 어리광을 부리는 남자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이 성에는 나랑 자기 밖에 안 살고 있는데 무슨... 남겨진 게 없는 성이었다. 성안에 가득한 건 잡동사니 밖에 없었다. 하울과 소피의 이야기를 까먹은 마법사는 계속해서 불만을 토로 중이었다. 그는 자기 성 캘시퍼의 이름도 잊었다. 겨우 기억하는 건 자신의 이름 세 글자 뿐. 기억을 잃어가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은 남자가 절규하고 있었다. 혼자 있고 싶다고 소리 치면서. 



***



정한의 지랄발광에도 굴하지 않고 석이는 그 날 이후로 부지런히 성을 가꾸기 시작했다. 낡고 삐걱거리는 쇳덩이 성을. 말이 좋아 성이지 고철 덩어리에 가까운 모양새였다. 성은 느리지만 끊임없이 어딘가를 떠돌았다. 정처 없이. 하염없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게. 정한은 이 성에 바퀴를 달았다. 캘시퍼가 있는데 왜 바퀴가 필요하냐는 말에 그는 ‘잘 굴러가는 게 좋잖아’ 하면서 웃어댔는데, 그 미소가 기묘하기 그지없었다. 성의 바퀴는 네모 모양이었다. 


날이 좋은 어느 날에 석이는 캘시퍼에게 성을 잠시 멈춰주기를 부탁했다. 그는 석이에게 너그러운 편이었고, 그걸 떠나서 바퀴가 네모인 성이 애초에 잘 굴러갈 리 없었으므로 성을 멈추는 일은 아주 쉬웠다. 초원 한복판에 성을 세워두고 마음을 다잡은 석이는 씩씩하게 팔을 걷어붙였다. 그는 비누칠을 잔뜩 한 솔을 들고 성의 표면을 벅벅 문질렀다. 그걸 어느 세월에 다 해? 정한이 핀잔을 줘도 굴하지 않았다. 녹이 조금이라도 닦이면 소용 있는 거거든요? 정한은 솔질에 따라 움직이는 우직한 팔 근육을 멍하니 바라봤다.


집 안은 이미 깨끗해진 지 오래였다. 적어도 1층은. 석이는 시꺼먼 재를 뒤집어쓰길 마다하지 않았다. 그 덕에 부엌에 가득하던 달걀 껍질과 비닐봉지는 더는 없었다. 각종 과자 부스러기와 쓰레기로 발 디딜 틈 없던 바닥도 반짝반짝 윤이 났다. 산더미 같던 빨래는 탈탈 털려서 건조대에 걸렸다. 자기 속옷을 널고 있는 모습을 보며 정한은 이걸 네가 왜 하냐며 울상을 지었지만 석이는 굴하지 않았다. 그럼 네가 하든가...


“손가락 한 번 튕기면 다 되는 거거든? 이렇게 안 해도 된다고.”

“그럼 그냥 튕기지, 그게 뭐 어렵다고 쌓아뒀어요? 참내. 마법 다 소용없어.”


정한은 징징거리며 비명을 질러댔지만 석이는 여전히 아랑곳 하지 않았다. 날이 갈 수록 캘시퍼의 웃음꽃은 활짝 피었다. 낡아가던 성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역시 소피! 하울에게는 소피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캘시퍼는 잔뜩 신이 났다. 어쩌면 윤정한이 괜찮아질 지도 몰라. 타오르는 불씨와 함께 희망도 피어올랐다. 



***



석이가 이 성에 도착하기 전 윤정한의 삶은 폐인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방 안은 돼지우리. 기상은 오후에. 잠은 어쩌다 잠에 들면. 구청에서 날아오는 촉구 서류는 죄다 무시. 누군가 찾아오면 다른 지역으로 이동. 식사는 배달 음식. 정정한다. 어쩌면 폐인 그 이상이었다. 정한은 매일 거실에 앉아 멍하니 텔레비전만 바라봤다. 화면에 뭐가 나오는 줄도 몰랐다. 그냥 적막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래. 소피가 오고 난 뒤 이점이 가득하다는 걸 실리적인 하울은 모른 척 할 수가 없었다. 물론 해가 떠 있을 때 기상하고 등 떠밀려 몸을 바쁘게 움직이는 건 지독히도 귀찮았지만... 집이 깔끔한 건 명백히 좋은 일이었다. 치우지 않고도 대충 살아진다고 생각했는데 훨씬 더 살기가 편했다. 매일같이 집 안을 누비는 누군가가 있으니 조용할 틈이 없었다. 그 소음에 적응 못하고 눈살을 찌푸리다가도, 어떤 밤에는 돌아온 집에 누군가 있다는 사실이 안도가 됐다. 정한은 어느 순간부터 텔레비전을 켜지 않은 채 살아가게 되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랬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건 누가 뭐래도 달라진 식사의 질이었다. 매일 다른 시간에 애매하게 때우던 식사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제때 따뜻한 밥이 나왔다. 구첩반상. 한식대첩에서나 볼 것 같던 메뉴들이 눈앞에 있었다. 


“와...”


정한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감탄을 흘렸다. 대단했다. 영혼이 차오르는 맛이란 이런 거구나. 물론 인스턴트 식품과 들쭉날쭉한 공복이 주는 재미도 있었지만, 아무래도 질적인 즐거움은 차원이 달랐다. 초반 다양한 요리에 떨떠름한 정한의 반응을 살피고 석이는 언제부턴가 정한의 마음에 쏙 드는 한식 메뉴만 준비했다. 인정하기 싫지만 맛있었다. 삶이 나아지고 있다, 그런 감각을 불러일으키는 맛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설거지는 하울이 하세요 ^^


밖에 나갔다 들어오면 그렇게 쓰인 포스트잇이 식탁 위에 붙어있었다. 왜 또 하울이래. 그렇게 투덜대며 정한은 실제로 그 그림마냥 꺾어지며 휘어지는 눈꼬리를 생각했다. 


-식었으면 데워 드시던가요. 마법으로 그 정도는 할 수 있죠?


덮여있는 천을 걷어내면 메모가 하나 더 있었다. 참내... 헛웃음이 나왔다. 당연하지. 설마 이 정도도 못할까 봐. 나 나름 유능한 마법사인데... 하지만 그럴 필요도 없이 밥은 매번 따뜻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 지도 모르겠지만 늘 그랬다. 정한은 말 없이 밥알을 입안에 욱여넣었다. 하루도 빠짐없이 맛이 있었다. 




***



식은 땀에 젖어 눈을 뜬 어떤 새벽에는 그 옆에 석이가 있었다.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순간 눈앞에 보이는 게 아무것도 없는 감각은 정한에게 극심한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그렇게 어둠 속에서 소리 없이 비명을 지르며 덜덜 떨고 있을 때, 어느 날부터는 거기에 석이가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매번 거기에 있었다. 아무 말도 없이 그냥 램프를 들고 그 옆에 있었다. 우직하게. 늘 그렇듯 곧은 시선으로. 그래놓고 낮이 되면 둘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행동하곤 했다. 


정한은 끝없는 악몽에서 벗어나는 법을 몰랐다. 무섭고 두려운 꿈을 꾸다가도 깨어나면 다 사라진 기억에 무너져 내렸다. 무언가를 잊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무얼 잃어버린 줄도 몰랐다. 꿈 속에서 정한은 기억이 나지 않는 주문을 거듭 외웠다. 캘시퍼와 계약을 하던 순간이 나타나기도 했다. 정한은 매번 홀로 바람을 가르며 서 있었다. 그럴 때는 타는 듯이 뜨거웠던 심장의 부재가 와닿았다.


알 수 없는 두려움이 닥쳐올 때. 그런 밤이면 눈에서 눈물이 방울방울 흘러내렸다. 덜덜 떨고 있는 자신을 석이가 꽉 끌어안을 때마다 정한은 간절히 무언가를 기억하고 싶어졌었다. 자기의 목을 끌어안는 손길을 놓치기 싫어서 석이의 옷자락을 붙잡게 됐다. 석이는 아무 말도 없이 그냥 그렇게 정한을 안아주었다. 매번 똑같은 온기로. 식지 않을 것 같은 따뜻함으로.



***



바야흐로 초여름이었다. 장미가 한가득 피어올라 성을 감쌌다. 장미 덩굴은 성의 이곳저곳을 타고 올라가서는 화려함과 함께 만개했다. 정한이 기억하는 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석이는 성 어딘가에 줄을 달고 매달려 능숙한 손길로 장미를 손질하고 있었다. 정한은 몸을 띄워 그 옆까지 날아가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야, 석아.”

“네, 왜요.”

“그냥 네가 나한테 이름 알려주면 안돼?”


한참 장미만 보고 있던 석이는 의외라는 표정으로 정한을 쳐다봤다.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정한은 괜스레 투덜거렸다. 자기는 아직도 이런 걸 잘 모르겠다면서. 


“저는 제 이름을 몰라요.”

“뭐? 네 이름이잖아. 그걸 어떻게 모르는데.”

“모르는 걸 어떡해요? 잃어버렸다고요.”

“그럼 나보고 어쩌라고.”

“찾아줘야죠, 내 하울이면.”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대화를 해도 매번 이야기가 돌고 돌았다. 이해할 수 없는 것투성이. 


“어떤 기억은 뇌에 박혀있는 것처럼 또렷하거든요? 근데 또 어떤 건 너무 흐릿하고 지워진 것만 같아요. 그래서 지금 제가 여깄는 거겠죠.”


전혀 몰랐던 이야기에 정한은 조금 황당해진다. 그와 동시에 형체를 파악할 수 없는 조급함도 함께 닥쳐왔다. 


“이름이 세 글자인 건 맞는 거지? 그래도 석이 가운데나 끝에 오는 거겠지? 너 설마 석 씨니?”


정한이 따발총 쏘듯이 물어도 석이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는 다시 장미를 봤다. 정한은 그 태연함을 가끔 이해할 수가 없어서 답답했다. 자기가 나의 운명이라고 이름을 찾아달라며 찾아와서는 지금 장미나 손질하고 있다. 이쯤 되면 일자리가 더 큰 목적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도 할 말은 없지만...


“잠은 잘 주무세요?”


그 말에 정한은 머리를 쥐어뜯던 걸 멈추고 굳어서 석이를 바라봤다. 지금껏 모른 척 넘어가며 한 번도 묻지 않던 걸 석이는 묻고 있었다. 잠은... 글쎄. 여전히 잘 잔다고 하기에는 어려운 지점이 있지. 석이는 다시 한번 어깨를 으쓱거리고는 말았다. 평소랑 다른 걸 물어보기에 자기도 한 번 그래봤다고. 정한은 눈앞의 남자를 이해할 수가 없어서 다시 한번 벙쪄버린다.


“너는 진짜...”

“저는 로맨티스트거든요. 보면 모르세요?“


뭔 소리야. 석이는 가끔 뚱딴지 같은 소리를 했다. 정한은 홧홧거리는 얼굴을 문지르며 괜스레 열을 냈다. 안 더워? 여기 너무 더워. 이제 이거 그만하고 들어가자. 그러자 석이는 몸을 돌려 정한을 보더니 또 덤덤하게 말했다.


“그럼 잡아주세요.”

“뭐?”

“이거 올라오기 힘들었거든요. 손 정도는 잡아줄 수 있잖아요?”


정한은 대뜸 두통을 느꼈다. 그래, 내가 얘를 어떻게 당해. 어느 날 찾아온 불청객은 성 주인의 머릿속을 열심히도 뒤집어엎고 있었다. 정한은 생각하기를 포기한 채 석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제야 석이는 싱긋 웃었다. 둘은 손을 맞잡고 허공을 걷듯이 내려와 착지했다. 그 짧은 순간이 느리게만 느껴져서 정한은 괜히 가슴이 간질거렸다. 


“아이스크림 드실래요?”


그러거나 말거나 석이는 또 황당한 제안을 한다. 늘 그렇듯이.



***



둘은 성안에 들어와 고물단지 텔레비전을 켜놓고 아이스크림을 퍼먹었다. 핑크색 포장지를 뜯자 커다란 통에 같은 맛만 한가득이었다. 무슨 민트초코가 한 단지나 있어. 정한은 기겁을 했다.


“너 이거 내 돈으로 산 거지.”

“네.”


정한은 그냥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진짜 뭐 이런 애가 다 있어... 


“사이트 카드 등록이 하울 걸로 되어있는 걸 어떡해요?”

“나는 하겐다즈가 좋은데...”

“그럼 먹지 마요.”


석이가 아이스크림 통을 가져가려고 하자 정한이 재빨리 그 팔을 붙잡고는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내 돈으로 산 거라며. 나도 먹을 거야.”

“그러든가...”


석이는 태연하게 아이스크림을 한 입 퍼먹었다. 그 반응에 어쩐지 분해진 정한은 보란 듯이 크게 한 입을 퍼서 자기도 입안에 넣었다. 먹어본 적도 없는 맛의 아이스크림을 입에 넣자, 화하고 시원하면서도 달콤한 감각이 입 안 구석구석 퍼졌다. 덜덜거리는 선풍기 바람은 여름의 시작을 열기에 알맞았다. 그렇게 나쁘지는 않죠? 석이는 그렇게 말하며 싱긋 웃었다. 그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던 정한이 말했다. 


“오늘 저녁은 시켜 먹을까?”


석이가 눈썹을 꿈틀댄다. 배달 음식을 시키면 발생하는 쓰레기의 양과 나빠지는 건강 상태 같은 것들을 가늠하는 모양이었다. 정한은 그 생각이 더 이어지기 전에 재빠르게 자른다.


“피자 어때.”


석이의 굳은 표정이 눈에 띄게 풀어진다. 정한은 못 말리겠다는 얼굴로 가게에 전화를 건다. 요즘은 어플로 다 된다고 투덜거리는 석이에게 자기는 스마트폰이 없다고 정한은 받아친다. 석이는 황당하다는 얼굴이다. 아무리 마법이 있다 해도... 어떻게 휴대전화가 없냐고. 정한은 됐으니까 식탁이나 세팅하자고 화제를 돌린다. 유선 전화기 버튼에 피자집 번호를 누르면서. 


석이가 피자를 좋아한다는 사실은 피자 전단지만 버리지 않고 냉장고에 붙여다 두는 걸 보고 짐작했는데, 다행히도 정답이었다. 청소를 하다가도 가끔씩은 그 전단지를 한참을 들여다보는 걸 본 적이 있었다. 피자가 오자마자 석이는 다채로운 표정 변화를 보이며 배달 음식이 주는 감동 같은 것에 취해 좋아하는 피자를 양껏 먹었다. 


정한은 한 손에 피자를 든 채로 그런 석이를 멍하니 바라봤다. 충격적인 등장으로 찾아와서는 끊임없이 고요한 애. 그러면서도 자꾸 알게 모르게 파장을 일으키는 애. 무덤덤한 것 같으면서도 속이 깊고 따뜻한 애. 마음속에 무언가 커져만 가는데 그게 뭔지 알 길이 없었다. 오랜만에 배달 음식을 시켜 먹어서 그런지 얹힌 것 같았다. 가슴 한 구석이 꽉 막힌 듯 답답했다.



***



둘의 관계는 밍숭맹숭했고, 알 수 없는 지점들이 상당했지만, 그럼에도 안정적이었다. 그런 평화로운 나날들이 이어지고 있던 어느 날... 석이가 드디어 2층에 당도하는 바람에, 그 평화는 윤정한의 비명과 함께 산산조각이 나고 만다. 


그 날 캘시퍼는 이 성을 맡게 된 이후로 가장 큰 소리를 들었다. 날카로운 고함이 위층에서부터 이어져 오더니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야!!!!”


석이가 불쑥 나타난 정한을 보고 짐짓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뭐야. 이게, 이게 뭐냐고. 비명을 지르는 윤정한의 두피는 실시간으로 변화하고 있었다. 빨간색 주황색 초록색 파란색... 무지개가 따로 없네. 확실한 건 원래 있던 찰랑이던 금발은 아니었다. 


“너 내 화장실에 무슨 짓 했어.”


석이는 그 날 지금껏 정한에게서 들은 것 중 가장 진득하고 무서운 목소리를 들었다. 맨날 폐쇄되어 있던 2층에 들어가서 온갖 청소를 다 했는데 그게 화근이 된 모양이었다. 그래도 마법사니까 나름대로 걸려있는 마법과 체계가 있었을 텐데... 마법에 문외한인 석이는 그것까지는 고려하지 못했고...


“죄, 죄송해요.”


미안함과 당황함으로 범벅이 된 석이가 그 말을 하는 순간 정한의 머리색이 변화하기를 멈췄다. 머리를 감싸고 있던 정한이 그 사실을 눈치챘는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내 머리... 지금 무슨 색이야?”

“검정... 검정인데요.”

“검정...? 분홍도 아니고 결국 검정...?”


정한은 다시 한번 비명을 내지른다. 이번에는 조용히 좀 하라고 소리 지르는 캘시퍼의 목소리까지 함께다. 아름답지 않으면 의미가 없어. 진짜 아무런 의미도... 검정색 머리? 말도 안 돼. 아름답지 않으면!


“말해 봐. 나 지금 완전 별로지. 최악이지. 내가 유지해 온 모든 게 사라진 거지.”

“사실 원래 금발도 제 취향은 아닌데요...”


쓸데없이 거짓말을 할 줄 모르는 입이 필요치 않은 진실을 토해낸다. 뭐라고? 와중에 정한은 기가 찬다. 정한이 휘청거리자 이번에는 석이가 말을 몰아치기 시작한다. 


“지금 샤워하다 뛰쳐나온 거예요? 꼴이 이게 뭐야.”

“몰라... 너 진짜 싫어... 미워...”


정한은 그 말을 끝으로 까무룩 기절했다. 이번에 기가 찬 건 석이다. 내가 매일매일 제때 밥 먹이면서 멀쩡하게 만들려고 얼마나 노력했는데, 이런 일로 기절을 해? 진짜 어이가! 하지만 석이는 거기까지만 하고 군말없이 정한을 짊어진다. 


“이런 것까지 해야겠냐... 내가...”


사실 군말없이는 거짓말이다. 짜증이 좀 나긴 했으니까... 석이는 정한을 옮겨다가 옷을 입히고 침대에 눕혔다. 예민하고 신경질적인 남자는 인상을 찡그린 채로 자고 있었다. 석이는 그 얼굴을 멍하니 보다가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어루만져 본다.


“머리 예쁘기만 하구만...”


이름을 잃어버린 남자는 눈앞의 마법사를 빤히 쳐다본다. 괜스레 얼굴선을 따라 손가락을 움직여보기도 한다. 눈썹뼈. 콧날. 조금 더 지나서는... 


“.....”


입술. 



***



석이의 기억은 온전치 않았다. 자신의 이름을 모르는 것에서부터 그랬다. 어느 날 눈을 뜬 아침에 석이는 생판 모르는 곳에서 깨어났다. 풀밭에 앉아서 쨍한 하늘을 바라보는데 정신이 멍했다. 내 이름은... 내 이름 뭐지? 머리가 지끈거렸다. 석... 석 뭐인데. 고작 그거 한 글자가 떠올랐다. 시냇물에 얼굴을 비춰보고 이곳저곳을 더듬어 봐도 모르겠는 것투성이였다. 그래서 석이는 일어나서 걸었다. 일단은 걷고 봤다. 걷다 보면 길이 나오겠지. 두려움은 뒤로 하고 막연한 생각이 먼저 튀어나왔다. 나 원래 이렇게 겁이 없나. 그것까지는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그냥 하염없이 걷는 수 밖에 없었다. 


석이는 윤정한의 성에 당도하기 전에도 두 차례 가량 다른 성에 들른 적이 있다. 첫 번째 성에는 이미 키도 크고 잘생긴 근육질의 남자가 그 성을 관리하고 있었다. 성의 대문은 파란색이었다. 훌륭한 외모의 남자는 손님으로 찾아온 석이에게 양파 수프를 내어줬다. 너 오믈렛 할 줄 알아? 고개를 휘젓자 만드는 법도 가르쳐줬다. 알 수 없는 야무짐과 깔끔함이었다. 성의 주인인 깡마른 남자는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석이의 이마를 몇 번 톡톡 건드렸다. 


“신기하네...”


그리고는 다른 성의 주소를 알려주며 거기로 가보라고 했다. 석이는 오믈렛 레시피와 든든한 배를 얻고 두 번째 성을 향해 나섰다. 그 다음 성에는 말 많고 조그만 남자애와 그와는 정반대로 과묵한 남자가 살았다. 둘은 투닥거리느라고 석이에게 그다지 큰 관심을 두진 않았다. 혼자 남겨진 석이는 거실 한복판에 있는 책을 펼쳐서 읽었다. 심장을 잃어버린 마법사와 그 성에 들어선 소녀에 대한 내용이었다. 무언가 기억나려고도 했다. 어딘가로 가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무심한 듯 상냥한 두 남자는 아직은 날이 춥다며 떠나려는 석이에게 파란색 후드티를 줬다. 석이는 꾸벅 인사를 하고 또 정처 없이 걸었다. 


그렇게 아주 오랫동안 석이는 방랑자의 삶을 살았다. 가끔은 불청객을 자처하기도 하면서. 항간을 떠도는 소문 한 자락에 의지한 채 몸을 움직였다. 떠돌이 생활은 석이에게 알 수 없는 생활력을 줬다. 그 시간 동안 석이는 어디 가서 굶지는 않을 인재로 자랐다. 


그러던 어느 날, 하염없이 길을 걷던 석이는 땅바닥을 굴러다니는 신문 한 조각을 주웠다. 마법사로 추정되는 사람의 얼굴이 나와 있었다. 이름은 없었다. 심드렁한 표정의 남자가 마법을 부리고는 높으신 인사들과 악수를 하는 것이 신문 내용의 전부였다. 석이는 남자의 얼굴이 크게 나온 사진을 본다. 흑백 사진 속에서 일렁이는 얼굴을. 텅 비어버린 얼굴 한 구석을 보면서 이름 세 글자를 조용히 읊조린다.


아는 사람이었다.



***



그리고 다시 지금. 윤정한의 성. 한참을 더 걷던 석이는 결국 이 곳에 당도했다. 성 앞에는 걸려있는 명패가 눈에 띄었다. 맞네. 여기네. 주말 아침이었고, 꼬박 이틀을 걸어 조금 지치려던 찰나였다. 걷는 내내 여러 생각이 났다. 윤정한. 석이는 어쩐지 그 사람이 자신의 하울일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다른 건 모르겠는데도 그냥 그랬다. 기억이 날아간 중에도 알 수 있었다. 힐끗 얼굴만 보고 떠올린 이름이 그것의 증명 같이 느껴졌다. 


막무가내로 성안에 들어서고, 집을 치우고, 윤정한을 마주하고... 어쩐지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석이는 이 모든 게 꿈이 아닐지에 대해 생각했다. 말이 생각을 거치기도 전에 술술 나왔다. 가끔은 자기가 하는 말이 제 말이 아닌 것 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것은 단편적으로 석이도 모르게 돌아오고 있는 기억이었다. 언제 어디에선가 들었던 문장들. 이 성에 있는 마법사를 보면 그런 것들이 떠올랐다. 알 수 없는 그리움의 감정이 빨래를 널다 찾아왔고, 남들은 이해할 수 없을 실없는 농담 같은 것들이 마루를 닦다가 입 밖으로 튀어 나가곤 했다. 석이의 근거없는 믿음은 여전히 거기에 그대로 있었다. 


정한이 악몽을 꾸는 것과 비슷하게, 석이에게도 이따금씩 눈을 감을 때면 생각나는 장면들이 있었다. 그것은 꿈인가? 그럴 수도. 만약 그렇다면 정말로 선명한 꿈이 아닐 수 없었다. 


나를 찾아와. 꼭 나를 찾아와야 돼. 


울음 섞인 목소리. 그렇지만 그 뒤로는 기억이 흐릿했다. 끊임없이 반복하는 꿈인데도 목소리의 주인을 몰랐다. 깨고 나면 어떤 꿈을 꾸었는지 까먹기도 했다. 그래도 크게 연연하지는 않았다. 석이에게는 지금 당장 챙겨야 할 사람이 눈앞에 있어서 그랬다. 


석이가 본 윤정한은 어쩌면 기대 이상이었고 대부분은 기대 이하였다. 석이는 어쩐지 흑백 사진 속 남자의 머리색이 검은색일 거라 생각했는데 마법사는 눈에 띄는 금발이었다. 소리에는 예민하고 까다롭게 굴었다. 자신의 이름과 기억을 턱 찾아줄 줄 알았는데 웬걸, 자기보다 한참은 더 불안정해 보였다. 점점 기억력이 감퇴하는 것만 같아 보였고, 건강에 최악인 엉터리 삶을 살았다. 무언가 마음에 안 들면 바락바락 소리를 질러댔고 일주일 중 여러 번 잠을 설쳤다. 예민함과 짜증으로 뒤범벅인 얼굴이 눈물을 흘리다 겨우 잠에 드는 모습을 볼 때마다 석이는 기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뭐가 그렇게 힘들어...”


안쓰러웠다. 이것은 연민의 감정인가? 그가 너무나도 안타까운 형태로 살고 있어서? 어쩌면 그럴 지도. 그런 마음이 아예 없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석이는 마력의 크기가 그렇게 크다는 마법사를 감히 안쓰러워 하고 있었다. 하지만 연민과 동정의 잔잔함이라고 하기에는 그 마음에 파장이 컸다. 숙취에 시달리는 처참하고 피폐한 모습을 처음 봤을 때부터 그랬다. 단순히 신경 쓰이는 것을 넘어서는. 운명이라고 생각해서? 그럴 수도. 하지만 보면 볼 수록, 알면 알 수록 고요하게 힘을 키우는 마음 같은 것이 있었다. 기원을 알 수 없는 감정의 끝이 까마득했다. 


지금의 석이는 자고 있는 윤정한을 보면서 또 다시 비슷한 대사를 친다. 대체 뭐가 그렇게 힘드냐... 윤정한아. 찡그린 미간을 손가락을 쿡쿡 찌르면서. 뭐야. 예민한 마법사가 그걸 못 참고 잠에서 깨어나 눈을 떴다. 코가 맞닿을 정도로 가까운 얼굴. 정한이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석이는 어쩐지 그 얼굴이 조금 귀엽다고 생각한다. 예민하고 사나워 보이는 얼굴이 약간은 둥글어진 것 같은 느낌이다. 두 눈을 끔뻑끔벅일 때마다 기다란 속눈썹이 그에 따라 움직이는 걸 보면서...


“키스해도 돼요?”


석이는 대뜸 그런 걸 묻는다.


“뭐?”


짜증스럽고 예민한 기대 이하의 마법사. 그런데도, 그렇게 기대 이하인 남자인데도, 뒤죽박죽인 기억 속에서도 어쩐지 석이는 윤정한이 좋았다. 정말 이상하지. 이상한 일이야. 그걸 알면서도 자꾸...


“아니 갑자기 그게 무슨...”


정한은 당황한 듯 잔뜩 횡설수설했다. 석이는 그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정한을 끌어당겨 입을 맞춘다. 



***



동화에서 키스는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아마 대부분 엄청나게 극적인 효과가 있을 것이다. 마법이 존재하는 세계관은 더욱 그렇다. 그리고 이들은 무려 하울과 소피가 살고 있는 동화 속의 주인공이다. 이 두 명의 키스가 이야기에 커다란 파장을 일으키기에 충분하다는 뜻이다. 석이가 정한에게 입을 맞추는 순간, 마치 깨진 조각이 맞춰지듯 둘의 머리에는 기억이 흘러들어왔다. 마법 전쟁 이전의 기억. 평범하고 실없고 별것도 아닌 둘의 나날들이.


다시 만난 이후 서로가 서로에게 건넸던 알 수 없던 대사들이 흘러간다. 이전에도 함께했을, 그러나 어떤 것들은 또 다시 처음이었을 순간들과 함께. 우연처럼 만난 그들은 가장 좋은 날들을 같이 맞았었다. 풋내나고 어린 사랑을 속삭이면서. 운명과 동화가 뭔지도 모를 시절에, 둘은 이미 함께였고 그것이 당연했었다. 그런 기억들이 지금 둘에게로 흘러가고 있다. 모를 수 없던 사실들이. 그리고 그들의 처음 맞이했던 마지막 역시 함께 스며들어온다. 


석이가 항상 반복해서 꾸던 꿈. 하늘을 빼곡하게 매우던 전투기들. 전투기에서 뿌연 분홍색 연기가 지상으로 흩뿌려진다. 사람들은 도망을 치고 있고 그건 석이도 마찬가지이다. 매번 반복되는 장면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의 현장이었다. 내 손을 맞붙잡던 누군가가 있었는데. 꿈속 마지막 즈음에서 석이는 늘 흐릿한 기억을 마주했었다. 그 기억은 비로소 오늘에서야 선명해진다. 


내 이름! 내 이름 기억해줘. 윤정한이야, 내 이름. 꼭 기억해야 돼, 알았지. 


모를 수 없는 목소리가 귓가를 울린다. 희뿌옇던 시야가 점차 맑아진다. 아, 역시나 아는 얼굴. 


나도 너를 찾을게. 찾아낼 거야, 내가. 


두 손을 맞잡고는 주문을 중얼거린다. 눈앞에 남자는 자신이 꼭 모든 걸 해결하고 찾아갈 거라고 말한다.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그러니까 꼭 찾아오라고. 석이는 그에 질 세라 자신도 답한다. 너나 까먹지 마.


내 이름도 꼭 기억해야 돼. 이,석-


뚝.


하늘을 감싸는 분홍색 연기 때문에 안타깝게도 기억은 여기까지다. 



***



“뭐야?”


정한이 숨을 몰아쉰다. 혼란스러운 얼굴은 덤이다. 이게... 이게 뭐야? 무슨 기억이야? 석이 역시 마찬가지로 혼란스러워 보였다. 입술을 뗀 둘은 멍하니 서로만 쳐다봤다. 마침내 90% 가까이 완전해진 기억들이 둘의 머릿속에 들어찼다. 


“이 기억은 뭐야? 아니 그러니까 네가...”

“내 이름. 내 이름 기억해요?”


정한의 말을 끊고 석이가 몰아붙인다. 답지 않게 조급한 말투다. 둘의 얼굴은 어쩐지 조금 울 것 같다. 목소리조차 점점 일렁이기 시작한다. 이름? 이름이라고...


이석민


저 멀리 아래층에서부터 푸른 빛이 발광하여 흘러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마치 처음 만났을 때처럼. 석이, 아니 석민이 정한의 이름을 처음 불렀을 때처럼. 맞게 부른 거지? 이게 맞는 거지? 석민의 눈에서 눈물방울이 툭, 하고 떨어진다. 정한은 이미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다. 어떻게 까먹지. 내가 어떻게 이걸... 너는 기억했는데... 내가 너를...


그 날 그 땅에 살고 있던 모든 사람들은 소중한 무언가를 잃었다. 대개는 기억. 또는 운명의 연결고리. 마법 전쟁의 최후란 그런 거였다. 적군의 작전이란 게 그랬다. 이어져 있던 사람들을 잃어버리게 만들었다. 그들이 폭격한 마을에 정한과 석민이 살고 있는 줄은 그들도 몰랐을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둘을 소소하고 평범하게 살고 있었으니까. 자신의 운명을 잃고 혼자 남은 마법사가 악마와 계약할 줄도 모르고. 막대한 힘을 얻은 그 마법사가 막무가내로 전쟁을 끝내 버릴 줄은 아무도 몰랐다. 그렇게 엄청난 짓을 저질러놓고 허름하고 부서져가는 성에서 자기 자신도 매일 같이 낡아가며 살고 있을 줄은. 무얼 찾아 헤매는 지도 모르면서 정처 없이 떠돌고 있을 줄은 아무도 몰랐다. 심지어 정한 본인조차도. 


석민이 정한의 이름을 기억한 건 다름 아닌 마법 덕분이다. 연기가 지상을 완전히 감싸기 전에 어린 마법사가 손을 부여잡고 읊조렸던 주문 때문에. 석민이 자신을 찾을 수 있도록. 다시 만나면 기억할 수 있게. 정한은 그렇게 설정해놨다. 그 어려운 마법을 쓰느라 힘을 다 소진하고 자신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는 것이 함정이었지만. 


“우리가 진짜 운명이야?”

“반쯤은요.”


하늘이 그들을 맺어준 건 극히 일부 요소에 불과했다. 처음 만났을 때의 둘은 서로 이어져 있다는 것도 몰랐으니까. 전쟁 이후 끊어진 연들의 복구는 더뎠다. 영영 그 사실을 잊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태반이었다. 다시 만나고 손을 맞잡는 이들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운명을 넘어서는 발걸음을 당도했던 이들만이 새로운 결과를 맞았다. 무언가를 찾아헤매던 밤을 지나온 사람들만이 마침내 완성된 아침을 맞이한 것이다. 


“처음 본 순간부터 사랑할 수 있었다고 말하면 믿으실래요?”

“안 믿어.”

“안 믿으셔도 상관없어요. 사실이니까.”

“너 정말 로맨티스트구나.”


입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눈물은 계속해서 흐른다. 참으로 이상한 모양새가 아닐 수 없었다. 울면서 웃다니, 기이한 일이다. 그와 동시에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었다. 압류되어있던 기억과 감정이 들어찬다는 건 벅찬 일이었으니까. 


"석민아."


마법사가 주문을 외듯 그 이름을 부른다. 석민아. 이석민. 다시는 까먹지 않겠다는 듯이 거듭해서 읊조린다. 석민은 왜 자꾸 부르냐면서 웃음을 터뜨린다. 그닥 싫지는 않은 눈치다. 


“그래, 네가 내 소피 해.”


정한이 석민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그런 거 안 믿지만. 난 동화 같은 거 안 믿어. 처음 만나자마자 사랑에 빠졌을 리도 없어. 세상이 그렇게 낭만적일 수가. 그래도, 그래도 너라면. 나를 다시 찾아와서 살린 너라면 그게 정말 운명일 지도 모르지. 뒷말은 전하지 않아도 다 알았다. 


“그럼 키스 한 번만 더 할래요.”


그 말에 정한은 한 번 더 웃었다. 그리고 석민의 뺨을 감싸서 자기 쪽으로 끌어와 입을 맞췄다. 실로 마법 같은 키스였다. 눈물맛이 잔뜩인데도 어째 달콤한 키스였다고 석민은 후에 이 날을 회상했다. 


그야말로 마법 동화 속 주인공다운 낭만적 사고방식이었다. 


 


숲 속 작은, 그래서 잊어버렸다고?, 초여름에 피는 꽃

20210701 백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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