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3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이수가 베개를 들어 그 밑에 머리를 숨겼다. 천장과 벽이 대부분 다 유리로 되어 있어서 그런지 아침부터 여름 햇살에 타죽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미 오전 열 시, 기력도 없고, 의욕도 없었지만 일어나야 할 시간이었다. 이수는 베개 밑에서 한참을 버티다가 겨우 몸을 일으켰다. 잠을 자지 못해 불긋한 눈가는 피로에 젖어 있었고, 얼굴 가득 짜증이 묻어났다.

어제부터 곯은 배에는 감각이 없었다. 병원에 다시 실려 가기 전에 이제는 정말 뭐라도 먹어야 했다. 그가 주방에 갈 생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휴대폰이 진동했다. 신유진이었다. 그 이름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이수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 어어, 이수이수. 웬일로 전화를 했어?

“야, 너 차재희 알아?”

전화를 받자마자 대뜸 그렇게 물었다. 그 말을 들은 신유진은 잠깐 말이 없었다. 이게 또 무슨 개소리를 하고 있나, 그리 생각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이수가 지금 상황에 대해 설명하려고 할 때 그녀가 먼저 말했다.

— 내가 아는 차재희 말고 다른 차재희가 또 있어……? 갑자기 뭔 소리야?

“아마 그 차재희가 그 차재희일 거야. 나랑 결혼한……. 걔.”

— ……너 술 마셨냐? 아니면, 약했어? 왜 차재희라고 그래? 뭔데, 코카인? 대마초? 설마 헤로인은 아니지?

셋이 찍은 사진을 봤을 땐 그녀가 제 친구가 아닌 것처럼 느껴졌었지만 신유진은 역시 신유진이었다. 별안간 약쟁이 취급에 이수가 짜증을 냈다.

“씹소리 말고. 걔랑 친해?”

— 아니, 왜 그래. 당연히 친하지! 뭔데, 무슨 일이야? 둘이 싸웠어? 왜 모르는 사람처럼 그렇게 얘기해? 아냐, 됐어. 말해 뭐해, 니 잘못이겠지. 빨리 재희한테 사과해.

“…….”

이수가 황당한 눈으로 휴대폰 화면을 내려다봤다. 신유진. 분명 신유진인데.

“야, 너 내 친구 아니야?”

— 니가 나 안 재워준다고 쫓아낸 이후로 내가 앞으로 재희 편들겠다고 말했던 거 잊었어?

하. 이수는 인상을 구기며 한숨을 내쉬었다.

“씨발…….”

— 뭐야. 무슨 일인데.

그가 뱉은 씨발의 행간을 읽어낸 유진이 문득 심각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그녀의 태도 변화에 이수는 코웃음을 치면서도 현재 상황을 설명했다. 단순한 이야기였다. 차재희의 생일날 같이 차를 타고 가다가 사고가 나서 기억을 잃어버렸다는 별 개 꿈같은 소리.

자초지종을 들은 신유진이 깔깔거리며 폭소했다.

— 어떻게 니들은 인생이 드라마냐. 결혼할 때도 동생 약혼자 될 사람 뺏어가면서 막장 드라마를 찍더니, 지금 시즌 2 찍는 거야?

“…그건 또 무슨 소린데.”

— 와, 진짜 잊어버렸구나. 원래 이나가 재희 동생 재하랑 결혼하기로 했었는데, 걔가 다치는 바람에 재희가 동생 대신 이나랑 약혼할 뻔했잖아. 근데 그게 너랑 사귀기로 한 이후에 있었던 일이라, 너 상견례에서 차재희 보고 눈 돌아가서 그 자리에서 지랄하고, 둘이 결혼하겠다고 폭탄선언 했었어. 그래서 결혼하게 된 건데…….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진짜, 정말 말도 안 된다. 이수가 이를 악물며 중얼거렸다.

“구…라치지마. 씨발, 기억 못 한다고 개소리 지껄이는 거 다 알아.”

— 아, 존나 웃기다. 나 이거 지금 통화 자동 녹음이거든? 너 기억 돌아오면 들려줄게.

“지랄 말고!”

이수가 버럭 성질을 내자 유진이 숨이 넘어갈 것처럼 웃어댔다. 그러다가 이내 뚝, 웃음을 그치며 말했다.

— 나 갑자기 걱정되기 시작했어.

“뭐가.”

— 너… 기억 잃었다고 재희한테 막말하고 그런 거 아니지? 그 맘 약하고 착한 애한테 제발 그러지 마, 응? 앰버가 부부라고 말해줬다며. 안 그랬지? 말조심했지?

“…….”

이수가 대답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설마설마 싶었던 신유진이 스피커 저편에서 긴 한숨을 내쉬었다. 곧 이수는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유진의 진지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내가 자세히 설명할 일은 아니지만, 재희는 지금 부모님이랑 인연도 끊고 형제들이랑도 간간이 연락만 하면서 살고 있어. 너 기억 돌아오면 분명히 후회해. 재희한텐 너밖에 없단 말이야. 그리고 재희만 그런 거 아니야. 너도 마찬가지잖아, 서이수. 결혼식 날 니가 나한테 그랬잖아. 재희 없으면 못 살 것 같다고.

내가? 내가 나 아닌 다른 사람이 없으면 못 살 것 같다는 말을 신유진한테 했다고? 이수가 충격에 휩싸여있는 동안 유진이 말을 이어갔다.

— 너랑 재희랑 사는 거 보고 나도 여친이랑 결혼하고 싶어져서 지금 미국으로 이민 갈까 고민 중이야. 날 이렇게 만들어놓고 넌 그러고 있으면 어떡해? 일부러 그런 건 아니지만… 여튼 재희한테 말조심하고, 빨리 기억 되찾을 방법 찾아봐. 정 안 떠오르면 벽에 머리라도 박든지.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그녀가 무어라 말을 더 붙이는 동안 이수는 말없이 생각에 잠겨 있었다.

제 배우자가 남자라는 것부터 마음에 안 들었다. 일하는데 부산스럽게 움직거리는 것도 짜증이 났고, 자신은 먹지도 않는 음식을 해놓아서 화도 났었다. 내가 한 선택도 아닌데 그걸 책임져야 하느냐고, 같이 자자고 찾아온 애를 울려가며 내쫓기까지 했다.

그런데… 신유진의 말대로 자신이 정말 차재희와 죽고 못 사는 사이였다면? 이수는 자신이 차재희를 위해 요트를 주문했다는 소리를 듣고, 쇼윈도 부부들이 으레 그러하듯 생일 선물을 돈으로 때우려 했구나, 하고 생각했었다.

근데 그게 아니라면? 보지도 못했지만 만일 그 요트가 차재희를 위해 오랜 시간 공들여 준비한 거였다면?

돌아버리겠네. 이수는 통화가 끝난 휴대폰을 내려놓으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대회의고 나발이고, 차재희와 이야기를 나눠봐야 할 것 같았다. 둘 사이의 관계가 정확히 어떠했는지 알기 전에는 액세스고 뭐고 눈에 안 들어올 것 같았다.

욕실로 들어가 간단하게 씻은 이수는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복도를 지나 서브 룸으로 향했다. 하지만 메인 침실보다 조금 작은 그 방에는 차재희가 그곳에 머물렀다는 흔적만이 남아 있을 뿐,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침대 옆 협탁 위에 반지가 반짝거린다.

그것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이수는 괜한 심술이 났다. 나한테는 어떻게 반지를 뺐냐고 뭐라고 하더니, 자기는 이렇게 보란 듯이……. 협탁 위의 반지를 움켜쥔 이수가 주머니 속에 그것을 쑤셔 넣었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끼기 싫다면 갖지도 못하게 해주겠다는 심보였다.

“차재희.”

2층으로 내려간 이수가 차재희를 불러보았다. 넓은 집 안에 외로운 목소리가 울린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서재도, 드레스 룸도 텅 비어 있었고 브릿지에서 내려다보는 후원과 수영장에도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1층으로 내려가 주방과 시팅 룸, 다이닝 룸을 살폈지만 그 어디에도 차재희는 없었다. 다만 이수는 아일랜드 바 위에 놓인 훈제 연어 샌드위치를 발견했다. 아이올리 소스가 들어간 연어 샌드위치는 입이 짧은 그가 유일하게 곧잘 먹는 음식이었다.

“…….”

이건 우연일까? 아니면, 내 식성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기라도 했나? 그런 생각을 하며 이수는 바 옆에 앉았다. 어이없을 정도로 맛있는 샌드위치를 모두 먹어 치우고, 냉장고를 열어 초코 우유를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막상 대화를 해야 할 인간이 없었으므로, 이수는 서재에 들어가 다시 액세스 정리 파일을 살펴보기로 했다. 일단 화장실에 들러 양치질을 하고 나왔을 때였다. 휴대폰이 울렸다.

「앰버.」

「보스, 좋은 아침이에요. 어때요, 몸은 좀 괜찮으세요? 막 기억이 돌아올 것 같은 느낌이 있다거나 이상한 기분이 느껴지진 않구요?」

「어제랑 똑같아. 무슨 일이야?」

「아쉽네요. 별건 아니고요, 요트 인수 확인을 안 하셨더라고요. 정확히 말하자면 못 한 거죠. 어제 인수 확인 담당자랑 파티 플래너가 부두에서 기다리고 있었거든요. 저도 정신이 없어서 일단 나중에 한다고 하긴 했는데, 안에 제이 생일 파티한다고 꾸며 놓은 것도 있고 해서 관리자가 치우려면 보스 허락이 필요한가 봐요. 챙길 물건도 있고. 하여튼 그래서 연락이 왔는데, 제가 대신 오케이 할까요?」

「나 대신…….」

알아서 해, 그렇게 말하려던 이수가 멈칫했다. 차재희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서 준비한 게 있다고…….

「내가 갈게. 어디지? 주소 보내.」

「보스가 직접 가보겠단 말씀이세요? 아니, 그, 운전은 하실 수 있겠어요?」

「면허는 기억 잃기 전에도 있었어. 휴대폰으로 주소 보내.」

전화를 끊은 이수가 곧바로 아래층으로 나왔다. 어제 쫓아낸 일 때문에 상심해서 가출이라도 한 건지 차재희는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별로 걱정이 되지는 않았지만 혹시 모를 가정 때문에 마음이 찝찝한 건 사실이었다. 어쨌든 지금 가서 확인해보면 될 일이다. 그를 위해 무엇을 준비해놨는지 알면 자신과 차재희가 얼마나 깊은 사이였는지 확신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수는 주차장에 세워진 여섯 대의 차들 중 가장 크고 무섭게 생긴 SUV를 골라 탔다. 모델명을 모르는 걸 보니 최근에 나온 차량인 것 같았지만, 외형만으로도 제가 골랐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시동을 걸자마자 스피커에서 낯선 음악이 흘러나온다. 그는 음악을 즐겨 듣지 않기에, 아마도 차재희가 듣는 것인 듯했다. 곧바로 소리를 낮추려던 이수는, 그러나 귓가에 들려오는 목소리에 동작을 멈췄다.

— Ready to call this love.

담담하게 읊조리는 음성은 낯설면서도 익숙한 것이었다. 그걸 듣는 순간 짤막한 장면이 눈앞에 스쳐 지나갔다.

주변에 가득했던 사람들. 어딘가를 향해 환호하며 박수치는 관중들 사이에서 누군가와 입술을 맞댔던 기억. 짧지만 달콤하고 강렬한 충격으로 누군가의 인생을 바꿔놓았던 순간. 그 후에 떠올랐던 진한 웃음과 만족감까지…….

이게, 언제지?

이수는 또다시 아파 오는 머리를 부여잡고 흐려져 가는 기억의 실마리를 잡으려 애썼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반짝 떠올랐던 추억은 금세 자취를 감췄다. 미쳐버릴 것 같았다. 답답하고 막막한 기분을 느끼며 이수는 거칠게 차를 몰았다. 먼 길을 가는 동안 귓가엔 계속 차재희의 목소리가 맴돌았다.

 

 

「미스터 서!」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요트 정박장으로 갔다. 이수가 알아보기도 전에 저 멀리서 여자 두 명이 종종거리며 다가와 그에게 아는 체를 했다. 요트가 어떻고, 사고가 어떻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으니 어쩌고저쩌고. 사설이 많은 그들에게 짧게 인사하고 이수는 요트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Planet J’

새하얗고 커다란 배가 이수를 반겼다. 반짝이는 붉은색 페인트로 쓰인 요트의 이름은 플래닛 제이였다. 아까 요트 회사 직원이 했던 말이 이거였나 보다. 탄생석인 루비를 갈아서 섞었다고……. 누구의 탄생석인지는 묻지 않아도 뻔했다. 7월이 루비였던가.

그리고 나는… 무슨 뜻으로 이런 이름을 붙였을까. 이수는 추측하는 것을 포기하고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3개 층으로 구성된 요트는 아주 호화스러웠다. 후미의 아래층에는 바다에 그물을 쳐놓은 천연 수영장이 있었고, 2층에는 담수 수영장이, 마지막 층에는 거대한 침실이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사랑해, 이보다 더 사랑할 수 없을 만큼.』

 

짤막하게 쓰인 카드를 주워 들었다. 흘려 쓴 필기체였지만 결코 대충 쓴 글씨는 아니었고, 아주 공을 들여 쓴 문장이라는 건 한눈에 봐도 알 수 있었다.

서이수, 자신이 직접 쓴 것이었으니까.

그에게서 막막한 한숨이 터져 나왔다. 천장이 개폐되는 침실은 오직 차재희를 위한 것들로 가득 차 있었다. 선물로 준비한 건 요트뿐만이 아니었다. 런칭 때문에 지금 당장은 시간이 안 났던 건지, 3개월 후로 예약되어 있는 비행기 표는 세상 곳곳을 향하고 있었다. 티켓과 함께 있는 종이는 세계 각지에 있는 유명 레스토랑의 예약 내역이었고, 그건 요리사인 그의 남편 차재희를 위한 것임이 틀림없었다. 서이수 본인은 먹는 것에 별 흥미가 없었으니까. 비행기 티켓 옆에는 새 자동차 키와, 시계, 그리고…….

꽃다발.

집에서 보았던 꽃이 이곳에도 있었다. 푸른색과 연보라색의 작은 꽃잎으로 이루어진 꽃다발은 하루가 지났어도 여전히 생생하고 또 아름다웠다.

꽃의 이름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수는 신유진의 메신저에서 본 결혼식 사진에서도 이 꽃을 보았음을 기억해냈다. 무슨 의미가 있는 건가……. 고심해봐도 떠오르는 건 없었지만, 어쨌든 차재희가 제게 보통 존재가 아니었다는 사실만큼은 이제 인정할 수 있었다. 자신이 진심으로 그를 사랑하고 아끼고 있다는 걸 모를 수가 없었다. 이 모든 게 다름 아닌 본인이 준비한 것들이었으므로…….

실수했다. 말을 그렇게 하는 게 아니었는데. 이수는 그렇게 생각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에야말로 집으로 돌아가 그와 대화를 해볼 참이었다.

그런데 그때,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몸을 돌린 순간… 들어올 때는 보지 못했던 뒤쪽 벽면이 이수의 눈에 들어왔다. 새하얀 벽면에 걸린 사진, 그것을 보는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는다. 이어서 누군가가 머리를 쪼개고 지나가는 듯한 두통이 일었고, 번개처럼 찌릿한 통증이 전신을 관통했다. 한 손으로 이마를 붙잡은 이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진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결혼식 날 찍은 사진 한 장이 벽면 한쪽을 꽉 채우고 있었다. 사진 속의 이수와 재희는 흠뻑 젖은 채 활짝 웃고 있었다.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 짓고, 또 키스하는 사진이었다. 서이수 자신이 직접 카메라를 들고 찍었던…….

“씨발……”

쿵쾅쿵쾅, 거칠게 뛰는 심장소리 사이로 차재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배가 나한테 키스하면, 나도 선배한테 키스해도 돼요?’

‘……이게 내 대답이에요.’

‘좋아해요.’

‘좋아해요, 정말로.’

‘……좋아해요, 선배.’

 

‘사랑해요.’

 

그와 함께했던 수많은 순간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이수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파도처럼 덮쳐오는 기억이 끝도 없었다.

울면서 제게 사랑을 고백하던 차재희, 저의 키스에 기쁜 듯 뺨을 붉히던 차재희, 그와 함께했던 찬란한 시간들, 결코 잊을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행복한 시간들…….

“씨발!”

두통을 이기지 못하고 자리에 주저앉은 이수가 거친 손길로 바닥을 내리쳤다. 하지만 쿵, 쿵, 몇 번이나……. 손등이 까지고 피가 날 때까지 내려쳐도 분이 풀리지 않았다.

이걸 어떻게 잊을 수가 있지. 내가 어떻게, 너한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지.

이수는 스스로에게 분노했다. 이틀, 이십 일도 아닌 고작 이틀이었다. 그런데도 그새를 못 참고 그를 상처 주고 울려버린 쓸모없는 주둥아리를 그는 제 손으로 찢어버리고 싶었다.

미친 것 같다고, 귀신에 홀린 것 같다고 변명이라도 하고 싶지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서이수는 원래 이런 인간이었다. 그래서 그와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도 그에게 수도 없이 상처가 되는 말을 내뱉고는 했다. 그래놓고, 그때도 그렇게 후회해 놓고…….

 

‘너랑 나는 서로 맞추다가 포기하는 과정에 있었던 건 아닐까? 난 그런 생각이 드네.’

 

뭣도 모르면서 그런 말을 했다. 자신과 재희에게 차이점이 많은 건 사실이었지만, 포기하는 과정? 그딴 건 절대 아니었다.

두 사람의 생활은 대부분 평화롭고 규칙적이었다. 그리고 그 평범한 일상들이 모두 재희의 배려와 양보에서 비롯되었다는 걸 이수는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는데, 고작 기억 좀 잃어버렸다고 어떻게 그런 말을…….

그 순간 오늘 아침에 먹었던 훈제 연어 샌드위치가 생각났다. 그리고 어제 브릿지에서 본 광경도 떠올랐다. 재희는 후원으로 향하다 말고 벽면 한쪽에 한참 동안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이수는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 정확하게 알았다. 자신이 방금 본 것과 같은 결혼식 날의 사진은 그곳에도 똑같이 걸려 있었다.

설마…….

만약 어젯밤, 재희가 저와의 기억이 돌아온 상태로 그런 말을 했던 거라면……. 씨발. 제 뺨을 후리고 싶은 심정을 뒤로하고 이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재희를 만나야만 했다. 그에게 미안하다고 말해야만 했다.

그리고 다급히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침실을 뛰쳐나가려는 찰나, 방 안에 놓인 꽃다발에 눈길이 갔다. 머릿속에 자연히 떠오르는 단어가 있었다. 아까는 몰랐지만, 이수는 그 꽃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스타티스, 재희가 자신에게 처음으로 선물했던 꽃이었다.

 

 

집 앞에 대충 주차한 이수가 뛰쳐나오듯 운전석에서 내렸다. 저택은 아직도 텅 비어 있었다. 고용인 하나 없이 고요한 침묵이 내려앉은 곳에 그의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재희야.”

이수가 애타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주방에도, 서재에도, 피트니스 룸에도 재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마음속에 점점 초조함이 깃들었다.

설마 나간 건 아니겠지. 내가 어제 한 말 때문에, 기분이 상해서 떠나버린 건 아니겠지……. 다시 한번 제 입을 찢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며 이수는 그가 머물렀던 서브 룸으로 향했다. 하지만 재희는 그곳에도 없었다.

점점 속이 타들어 갔다. 오늘 수업이 있는 날이었던가, 하지만 몸도 온전치 않은 애가 그걸 알고 있다한들 수업에 참여하러 갔을 리는 만무했다.

이수가 휴대폰을 꺼내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받지 않았다. 포기하지 않고 몇 번이나 다시 걸며 1층으로 내려왔을 때 그는 시팅 룸에 놓인 재희의 휴대폰을 발견했다. 심장이 곤두박질쳤다. 이것까지 놓고 대체 어딜…….

막연한 불안감에 휩싸이려 할 때였다. 희미하게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집에 돌아온 후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리키가 짖는 소리였다. 이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저택을 뛰쳐나갔다. 산책로를 향해 달려가며 제발 그가 집으로 돌아오고 있기만을 바랐다. 그리고 주방이 있는 코너를 지나 몸을 돌렸을 때.

한 손에 레오를 안고 리키와 함께 걷고 있는 제 남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시간이 멎은 듯했다.

“…….”

재희의 걸음이 우뚝 멈춰 섰다. 그는 레오를 바닥으로 내려주고, 겁먹은 듯한 표정으로 이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런, 그런…….”

그렇게 보지 말라고, 그런 얼굴로 저를 바라보지 말라고 소리치고 싶은 것을 꾹 참고 이수가 그에게 다가갔다. 재희는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수가 그와 두 걸음 떨어진 곳에 섰을 때는, 그의 시선을 피하며 뒷걸음질 치려 했다.

다급해진 이수는 재희에게 달려가 그의 두 뺨을 붙잡고 키스했다.

재희는 이수를 밀어내지 않았다. 화를 내지도 않았다. 다만 빤히 내려다보는 눈동자가 점점 촉촉해지더니, 또르륵… 눈꼬리를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눈물 한 방울이 천근 같았다. 역시 저보다 먼저 기억이 돌아온 것 같았다. 제 손가락으로 옮겨붙는 눈물에 이수는 자신의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왜… 흑, 왜…….”

“미안해.”

입술을 떼어내자 재희가 울먹거리며 이수를 바라봤다. 순수하리만치 새까만 눈동자에 원망과 그리움이 담겨 있었다. 이수는 그 눈을 차마 바라보지 못하고 그의 어깨에 머리를 박았다. 익숙한 체취가 코끝에 스몄다. 사랑하고, 또 사랑해마지않는 그만의 향기였다.

“미안해.”

“기억이…….”

“미안해, 재희야…….”

그 말밖에는 할 말이 없었다.

자신은 원래 그런 인간이었기에 마음에 없는 소리라는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적어도 재희에게 날 선 말을 내뱉는 그 순간만큼은 전부 진심이었으니까. 그에게 진짜로 상처를 주었던 거니까, 이제 와서 아니었다고 말하는 건 오히려 그를 기만하는 일이었다.

미안해, 미안해, 내가 정말 미안해……. 이수의 끝도 없는 사과에 재희가 어깨를 들썩였다. 곧 이수를 꽉 끌어안고, 부드러운 갈색 머리칼에 고개를 파묻은 채 울먹거렸다.

“나는, 나는… 형이… 내가 정말 마음에 안, 안 든다고 해도… 흐윽, 안, 갈 거예요……. 아무 데도 안 갈 거예요……!”

“재희야, 그럴 일 없어. 그럴 리가 없잖아……. 미안해, 내가 미안해.”

이수가 사과했지만 재희는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그가 흘린 눈물이 이수의 뺨을 적시고 흘러내린다. 축축하게 젖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진짜로… 흑, 절대, 안 나가요…….”

“나가지 마. 제발… 내 옆에 평생 있어 줘. 응? 재희야…….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미안해…….”

평생 있어 달라는 말에 재희는 그제야 안심한 듯 보였다. 연신 흐느끼던 울음이 잦아든다. 이수는 그럼에도 마음을 놓지 못하고 계속 그의 등을 쓸어주었다. 제가 한 말이 그에게 엄청난 상처가 되었음을 알기에 이렇게 쉽게 용서를 받는다는 게 불안했다. 더 화를 내도 되는데, 화조차도 내지 못하는 재희에게 미안했고 또 스스로가 원망스러웠다.

그러다가 문득 깨달았다.

“……사랑해.”

수백 번 뱉은 미안하단 말보다 차라리 그게 더 낫다는 것을. 상처 입고 수그러든 마음을 달래는 일에는 제 마음을 온전히 내보이는 것이 훨씬 더 낫다는 걸 조금 늦게 깨달아버렸다. 재희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은 이수가 속삭였다.

사랑해.

사랑해, 재희야.

이보다 더 사랑할 수 없을 만큼,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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