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좋은 순간만 영원했으면




*




‘후우.’

호율은 남몰래 한숨을 내쉬며, 호텔 한 편에 조성된 잔디 공원의 벤치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할짝대는 예오를 넌지시 바라보았다. 학교로 다시 갈 거라더니, 갑자기 버스를 타고 시내로 나와서는 대뜸 도착한 곳이 호텔 앞이었다. 그것도 별 다섯 개를 자랑하는 비싼 곳. 아니, 가격이 문제가 아니라 대낮부터 교복 입은 학생 둘이 호텔 앞을 얼쩡거리는 꼴이 얼마나 의심스러운가.

“예오야, 맛있어?”

“응.”

빨간 혓바닥을 내밀며 천진난만하게 크림을 핥아댄다. 그래, 좋아하니 다행이다. 우리 예오 예쁘네…. 호율은 얌전해진 소년의 머리통을 쓰다듬어 주며 미소를 지었지만, 어딘지 피곤함이 묻어나 있었다. 예오에게는 한없이 약해지는 저가 문제인지. 

그런 상태로 당당하게 호텔 정문을 박차고 들어가는 한예오가 얼마나 황당하고 대담했던지, 순간 멋있어 보이기도 했으나 요 맹랑한 다람쥐가 하는 말을 듣고, 그냥 입이 쩍 벌어져 한동안은 넋이 나간 상태였다.

접수처에서 학생들을 의아하게 쳐다보던 직원이 무슨 일이시냐고 묻는 목소리에 정신을 차려서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학교가 어디냐며 신고를 당했을지도 모른다.


-왜 신고를 당해? 죄지은 것도 없고 교복 입고 있으면 신원도 확실하고, 돈도 있고. 나쁜 짓 하겠다는 것도 아닌데. 학생이 피곤해서 호텔에서 쉬겠다는데 무슨!-

-예, 예오야. 그래도 이건 아닌 것 같아.-


그런데도 뿔이 난 입술은 퉁퉁하게 계속 투덜대는 통에 결국, 호율도 한마디 하고 말았다.


-예오야, 내가 싫어. 내가 싫은데도 가, 야 돼?-


그제야 한예오는 볼을 빵빵하게 부풀린 채 멈칫했다. 


-그래. 네가 싫다는데…. 그럼 안 되지. 내 것이 싫다는 짓은 하면 안 되니까.-


다행이다 먹혀서. 

호율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꽁무니에 매달리는 따가운 눈초리를 무시하고 밖으로 나왔으나 딱히 갈 곳도 없어서 공원으로 왔고, 기분이 상한 예오를 위해 편의점에서 아이스크림을 후다닥 사 와 먹는 중이다.

한차례 폭풍을 무사히 보내서 그런지, 기분은 좋았다. 하늘은 푸르고 뭉게구름이 둥둥 떠다닌다. 주변에 사람도 없고 조용해서 여유를 부리기 딱이다. 다만, 벌써 점심시간을 향해 달려가는 시각을 확인하며 학교에서 난리가 난 건 아닐까 노심초사하고 있었다. 아직 휴대폰이 울리지는 않았지만 그게 더 불안을 부추겼다. 

“예오야, 괜찮아?”

“뭐가?”

“…학교. 나 때문에 너까지 곤란해지면….”

“뭐가 너 때문이야. 너 혹시 학교 가서 선생님들이 추궁해도 나 때문이라고 해. 알았지? 내가 꼬신 거 맞잖아.”

“꼬, 꼬시긴! 나도 좋아서 온 건데. 네 잘못 아니야!”

“그럼 됐네. 우리 둘 다 좋으니까.”

그러더니 한예오는 배시시 웃으며 호율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다 먹은 아이스크림콘만 치아로 깨작거리는 모습이 꼭 호두를 갉아 먹는 다람쥐 같아서 호율은 빙그레 얼굴을 붉혔다. 귀여운데 홧홧해지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냥 좋았다.

“그런데, 왜 호텔로 왔어?”

당시에는 당황해서 예오를 끌고 나왔지만, 혹시 정말 피곤했던 거면 어쩌나 싶은 생각이 이제야 든다. 그러고 보니 잠을 못 잤다고 했는데….

“저기, 혹시 정말…. 그냥 자고 싶었어?”

불면증으로 일주일 이상 제대로 못 잤다고 했다. 이제야 떠오른 상황에 호율은 너무 미안해져서 어쩔 줄 몰랐다. 그런 이유라면 어떻게 해서든 호텔로 갔을 텐데. 이런 못난 호랑이 같으니! 호율은 자책하다가 자신을 채찍질하기 시작했다.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는 호랭이를 빤히 쳐다보던 예오가 무던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 물론 그것도 있지만, 그것보다 너 내가 만져주는 거 좋아한다며?”

“엉? 그, 그런데?”

잠깐, 어쩐지 한예오의 입에서 또 발칙한….

“그래서 만져주려고. 나도 만지고 싶고. 아까 네 엉덩이 감촉이 좋았거든. 물론, 가슴도 좋고…. 그리고 사실은, 전에 우리 영화 보러 갔을 때, 그날 너랑 하고 싶은 게 있었거든.”

아, 안돼! 한예오, 그 입 다물라!

“그날…. 우리 하다 말았잖아. 해보고 싶어서…. 나머지를.”

눈가를 살짝 붉히며 야릇한 표정으로 올려다보는 시선에 호율은 펑- 터지고 말았다. 밖에서 이럴 줄은 몰랐다. 아니, 그러고도 남을 한예오지만, 그래도 그렇지 그런 말을 바짝 붙어서 귓가에 속삭이면 호랑이 마음 설레서 불타오르잖아!

뻣뻣하게 굳어버렸지만, 어느 때보다 손바닥에 닿는 온기가 뜨거웠다. 예오는 뾰족하게 입꼬리를 비죽 올렸다. 한쪽만 동하면 재미없지 않은가. 김호율이야 언제나 절 보면서 흥분한다는 걸 이제는 쉽게 이해했으나, 그래도 직접적인 행위는 또 다른 이야기라 상대의 동의가 무엇보다 중요했다.

“호율아, 너 또 왼쪽 터질 것 같다. 내가 말한 게 무슨 뜻인 줄 알고 그렇게 흥분했어?”

“하,하, 한예오…. 진짜….”

아이고, 저러다 울겠다. 예오에게 붙잡힌 팔뚝을 떼어내지도 못하고 온몸을 빨갛게 물들인 채 눈은 아롱아롱하고. 예오는 제 호랑이의 욕정에 흐뭇하면서도 이렇게 순진하고 예뻐서야 앞으로 어떻게 데리고 돌아다닐지 걱정이 앞섰다.

이걸 묶어놓을 수도 없고. 내일 바로 성인이 된다면 참 좋을 텐데. 그러면 합법적으로 독립해서 김호율한테 왕창 이 짓도 해보고, 저런 짓도 해보고, 고런 짓도 해 보고…. 상상만으로도 즐거운 예오는 본인이 햇살처럼 환하게 웃고 있다는 것도 자각하지 못했다.

“예오야.”

저는 당황스럽고 안달 나고 좋고 또 뭐야, 그냥 막 미, 미치겠는데. 제 첫사랑은 순수하게 웃고 있지 않은가. 아무튼, 저만 발정 나고 힘들지. 

“입술 나왔어, 김호율.”

“몰라. 네, 네가 책임져.”

여기가 뻥- 뚫린 공원이란 것도 잊고 투정을 부렸다. 어차피 사람도 없는데 -없진 않다. 지나가는 호텔 투숙객부터 외부 사람까지 간간이 보이긴 한다. 어쨌든, 뽀뽀 정도야 괜찮지 않을까. 예오에게 당하지 않으려면 저도 좀 대범해질 필요가 있긴 했다. 매번 자신만 얼굴 붉히는 것도 억울하지. 한예오도 어디 얼굴이 토마토가 되어 보라지!

쪽!

“어?”

어린애 장난처럼 호율의 입술이 예오의 입술을 바람처럼 도장을 찍고 지나갔다. 순간, 놀라긴 했는지 예오의 얼굴에 웃음기가 사라지고 눈은 댕그래졌다. 어쩐지 좀 의기양양해진 호율이 가슴을 자랑스럽게 내밀며 콧바람을 뀌었다. 

그것 봐. 나도 먼저 할 수 있다고.

예오의 얼굴이 저와 같이 빨개진 건 아니지만, 그래도 아까보다 홍조가 올라온 게 눈 밑에 분홍 소시지를 얹은 햄토리 같았다. 예오는 멍하니 호율을 쳐다보다가 씩- 웃었다. 상큼하게 올라가는 입가를 보며 호율이도 빙그레 맞웃음을 지었다. 지나가던 몇몇 사람들은 각자의 바쁜 일정을 처리하느라 한가로운 학생들에게 관심을 주지 않아 다행이다. 

차가워진 바람이 살짝 소년들의 열기 띤 몸을 식혀주었다. 깍지 낀 손가락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힘이 들어가고, 깃털처럼 스치는 코끝과 달콤하게 시원한 서로의 체취가 숨결에 스며들어 감각들을 느슨하게 풀어주고 있었다. 

바라만 보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좋을 수 있구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그저 가만히 서로를 향해 웃고만 있어도, 손만 잡아도, 가장 가까이 심장을 맞대고만 있어도. 이렇게 안온하고 편안할 수 있다니. 널 만날 수 있어서 참 다행이다.

“고마워. 김호율.”

한예오가 해주고 싶은 말은 그것보다 훨씬 많았지만, 괜스레 무언가 울컥하는 기분에 긴 문장을 함축하고 말았다. 그래도 호율은 예오의 고마움에 담긴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지금도, 예전에도 저는 아마, 한예오에게만은 모든 걸 내주어도 좋겠다는 마음이었나 보다. 소년이 하품만 해도 좋았고 사랑스러웠으니 말이다.

호율은 오늘 한예오가 조금 이상하다는 걸 알았다. 대뜸 미안하다고 하면서 학교를 몰래 빠져 나왔으면서 상당히 들떠 보였기 때문이다. 호율의 기민한 감각이 촉각을 세웠으나 예오가 직접 얘기하지 않는 사정을 캐묻고 싶지는 않았다.

한편으로는 걱정되면서도, 다른 마음에서는 그냥 예오가 원하는 대로 해주고만 싶었다. 그러나 예오가 품은 고민이 무엇이든, 힘든 일이 생긴다면 누구보다 먼저 달려가서 안아주고, 세상이 던지는 날카로운 칼날에 베이지 않도록 자신이 보호해 줄 것이다.

“예오야.”

호율이 발갛게 물든 예오의 귓가에 입술을 가깝게 붙이며 소곤거렸다.

“하트해.”

가녀린 작은 어깨가 들썩인다. 그리곤 호율의 귓가에 입술을 대며 한쪽 손으로 가린 채 속삭였다.

“나도 하트해.”

“예오야, 나는 널 절대…. 떠나지 않을 거야. 무슨 일이든 널 믿을 거고, 너밖에 없어.”

비장하게 다짐하는 고백에 예오는 피식 웃었으나 눈빛은 진지했다. 예오는 호율을 감싸 안았다. 제 품에 다 들어오지 않는 커다란 몸이 어떻게든 파고들려고 노력하는 예쁨이 사랑스러웠다. 그제야 지나가던 사람들의 흘끔거리는 시선들이 돌아본다. 그러나 학생들은 서로를 보듬기 위해 떨어질 생각이 없었다.

무슨 상관인가. 그저 틈새로 들이치려는 차가운 바람을 피해 꼭 껴안고 있을 뿐인걸. 그렇기에 세상도 두 사람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는가. 떨어지지 않을 만큼 딱 붙은 몸과 주변을 에워싼 넘실대는 마음처럼 향긋한 체향은 오로지 소년들만 느낄 수 있었다.

늦가을 활짝 핀 봄꽃 같은 따스한 어여쁨이 두 소년의 얼굴 위에 피어올라 아롱거렸다.






“가자.”

호율의 커다란 손이 활짝 펴지자, 상대적으로 작고 하얀 손이 덥석 물듯 잡았다. 장난기가 섞인 곰살맞은 짓에 호랑이는 허리를 세우고 등을 쭉 펴며 제 기운을 뽐냈다. 역시 나의 호랑이라며 예오가 뿌듯하게 호율과 눈을 맞췄다.

아까부터 두 사람의 휴대폰은 수십 통의 부재중 전화와 문자 메시지로 야단법석이었다. 이제야 어른들이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린 것이다. 학교 정문 앞, 소년들을 의심 없이 내보내 주었던 경비원이 난감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다행히 그는 학교로부터 나쁜 말을 듣지는 않았다. 

평상시 순진하고 운동을 좋아하며 교우 관계 원만한 김호율보다, 전국 석차 상위권을 유지하는 모범생 한예오의 일탈이 더욱 화제가 되었다. 경비원도 선생님들도 한예오의 돌발에 당황한 상태다. 게다가 지금 학교에는 오늘 오전에 예고했듯이 예오의 어머니가 이미 와 계셨다. 

아수라장이 된 사정을 알면서도 두 소년은 느긋하게 웃으며 정문으로 들어섰다. 예오는 작금의 사태를 얼추 예상할 수 있었다. 어머니가 학교에 와 있을 것이고 선생들은 추궁을 시작하겠지. 그래도 괜찮았다. 잠깐 수업을 빼먹었을 뿐, 문제를 일으킨 것 아무것도 없었으니, 그저 반성문을 쓰고 봉사 활동이 필요하면 하면 된다.

예오가 잡은 손의 온기를 가두듯 힘을 주자, 단단한 손이 제 곁으로 끌어당긴다. 살짝 끌려간 예오의 몸이 기우뚱했지만 우직하게 버티고 있는 품에 안전하게 들어찼다. 

이거면 된다. 예오는 그렇게 생각했다. 잠깐의 일탈도, 저를 괴롭히는 현실 앞의 벽도 충분히 무너뜨릴 수 있다고.

 


사나래=사도화 쓰고 싶은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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