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망할 자식이!"


결국 마음 먹고 뻗은 주먹은 라이에게 닿지 않았다. 그는 교활하게도 그녀가 가까워지자 냉큼 그녀를 쫓아내버렸다. 그리고 그녀는 깜빡이는 빛과 함께, 창이 없는 다소 갑갑한 방 안 침대 위에 남겨졌다.


본래 침실의 용도로 사용되었던 장소가 아니었던건지 뭐랄까 전체적으로 횡하고 부조화스러웠다. 방안에 있는 거라고는 침대가 다였고, 벽지도 붙이지 않아서 콘크리트의 벽이 그대로 드러나있었다. 그리고 한쪽 벽에는 전면 거울이 있었다.


'방이라기보다는... 그래 감방같네. 이쪽이나 저쪽이나 감옥은 다 똑같군.'


인간들의 감옥 비슷한거에 갇힌것도 모자라서 늘 몸에 지니고 있던 무기도 없었다. 그런 나에게 남은 것은 라이에 대한 짜증과 허탈함, 쪽지 한 장이었다. 아주 빈털털이구만. 나는 일단 끓어오르는 분함을 꾹 누르고 쪽지를 펴들었다. 


<제가 항상 주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세요. 이쪽에서 판단하기에 위험하다고 생각된다면 그 때 다시 만날 수 있을겁니다. 그 때까지 부디 본인의 직분을 다 하세요. >


"아아아악!!!!"


짜증나!!! 재수없는 말투가 여상히 들리는 것 같아 쪽지를 구겨, 한 구석에 던졌다. 아까 한대만 때렸어도 이렇게까지 짜증은 안났을텐데. 


나는 힘을 쭉 빼고 침대에 털썩 누웠다. 쪽지야 어차피 인간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위쪽의 연락수단이었기에 비밀유지는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여전히 뚜렷하게 해결된 것은 없고 화가 났지만 수긍하기로 했다. 


조금 지치기도 했고, 인간의 몸으로 깝치다가 남는 것은 고통뿐이라는 것을 알았으니까. 사신이라고 고통을 느끼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나, 인간의 몸보다는 나았다. 400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얻은것은 무심함뿐이었고 노력도 감정도 이 일에는 별로 쓸모가 없었다.


그걸 배우느라 얼마나 많은 값을 치뤘는가. 


인간은 필멸한다. 사신 일을 하다보면 별의별 사람을 다 만나고 그리고 개중에는 사신을 보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죽음을 앞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나도 갓 사신이 됐을 때는 나를 볼 줄 아는 인간이 신기하기도 했고 반갑기도 해서 곧잘 어울리고는 했다. 라이가 바보 같다고 후회할거라고 해도 콧방귀를 끼며 인간들과 어울렸다. 그러나 끝이 정해져 있는 그 자들을 떠나 보내는 것도 다시 또다른 자에게 마음을 주는 것도 너무 힘들었다.


하지만 긴 시간은 감정을 무디게 하고, 많은 것을 잃게 한다. 그리고 무엇을 잃었는지도 잊게 한다. 나는 내가 가지고 있던 어떤 것을 잃었다. 아마 이번 일도 내가 잃어버린 것에 대한 부작용일뿐이다. 이번 벌을 계기로 다시 실수하지 않으면 되는 거였다. 그리고 다시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일상을 계속하면 된다.


'그 일상으로 돌아가려면 먼저 여기가 어디인지나 좀 알아보자.'


나는 그렇게 가볍게 목표를 정하고, 앉아있던 침대 위에서 벗어났다. 일단 이 방에서 나가기 위해 문을 확인했지만 잠겨 있었다. 억지로라도 열기 위해 문고리를 잡고 마구 흔들자, 기계적이지만 신사적인 목소리가 들렸다.


[괜찮으십니까?]


어디에서 들리는지 몰라서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저는 어디에나 있습니다. 굳이 찾지 않으셔도 됩니다. 스타크씨는 이미 불렀습니다] 라는 말이 되돌아왔다.


나를 나가게는 못하게 하려는 건지 문이 열리지는 않았지만, 일단 사람을 불러준다는 말에 괜히 힘빼는 것을 멈추고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목소리에게 몇 가지 궁금한 것을 물었다.


"스타크? 그건 또 뭐고, 넌 뭐야? 여긴 어디지?"

[아 제 소개가 늦었군요. 저는 자비스입니다. 그리고 여기는 뉴욕의 스타크 타워입니다. 스타크씨는 그 타워의 주인이죠.]

"그런 뻔한 소개는 별로 쓸모가 없는데.."


사람인지 아닌지도 모르는 것과 입씨름하기도 귀찮고, 이 곳 주인을 불러준다고 했으니 얌전히 기다리지 뭐. 아까 순간적으로 당황해서 내 무기를 못 느꼈었는데, 집중하니 이곳 어딘가 그것도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어서 마음까지 푹 놓았다.


'중요한 물건이기는 했지만, 내가 못 뺏어 올리도 없고, 사람들이 올 때까지 좀 쉬자.'


목소리에게 뭘 더 알아내는 것을 포기하고 다시 침대로 돌아와 침대에 털썩 누웠다. 처음에는 기절해 있어서 몰랐는데 침대는 푹신하고 부드러웠다. ....편안하고 좋네. ..갑자기 졸리....


"아! 나를 살려준 뱀파이어 왕자님! 드디어 일어났네? 나는 하도 안 일어나길래, 그 쪽이 잠자는 공주인줄 알았어."

"...네! 어우씨 깜짝이야! 노크 몰라요? 노크?"

"생각보다 새가슴이네. 꼬마 왕자님."


잠이 잘 올 만큼 조용했던 이곳에 느닷없이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들 때문에 거의 경기하듯이 일어났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내가 살려준 빨간 깡통 양반이었다. 


그는 깜짝 놀란 내 모습을 보고 으쓱거렸지만 그 뒤의 다른 사람들은 그런 내 모습에 다소 당황스러워했다. 과민반응한다고 생각하겠지만, 내가 놀란건 갑자기 문을 열고 들어왔다는 사실 뿐만은 아니었다. 


우르르 들어온 사람들의 머리 위로 보인 숫자가 원인이었다. 황급히 오른쪽 눈을 가렸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아까는 라이를 만난 데다가 사람들이 없어서 몰랐지만 이제야 눈에 안대가 쓰여져 있지 않은 것을 깨달았다. 


이미 봤으니 눈은 가리나 마나라서 이 이상 정신이상자로 보이기 전에 손을 내렸다. 근데 저 5000이 넘어가는 숫자는 뭐야. 무섭게! 저딴거 본 적 없다고!


나머지는 고만고만한 숫자를 가지고 있었는데, 저 금발머리 남자!  지난번과 같은 옷을 입고 있는데 왜 아무도 뭐라고 안하는 거지? 혼자만 시대를 잘못 알고 있는 건지 아니면 코스프레가 취미인건지 로마시대 검투사 차림인 저 사람만이 보통사람과 다르게 인간의 몇 십배는 뛰어넘는 수명을 가지고 있었다.


"거기 혼자 시대를 잘못 아는 것 같은 로마 시대 금발의 남자분?"

"?"

"네. 그쪽이요"


궁금하기도 하고 이 구역을 관리하기로 한 이상, 이런 기이한 일을 그냥 넘어갈 수가 없어서 나는 일단 그를 불렀다. 모두의 이름을 알 길이 없으니, 나 편한데로 부르는 수밖에.


그리고 내가 그런 식으로 부르자 로마시대 남자를 제외하고 모두 쿡쿡거리며 웃었다. 물론 그 남자도 나도 나머지 사람들이 왜 웃는지는 몰랐고, 다들 웃느라 바빠서 설명해줄 것 같지도 않았기 때문에 슥 쳐다보다가 로마시대 남자에게 눈을 고정했다.


"흠....나를 말하는 건가? 나는 로마시대 남자가 아니라 토르다."

"아...네 토르씨? 토르님? 아무튼 그 쪽 정체는 뭐죠? 인간은 아닌데."


아니, 자기를 불렀던 건지 몰랐던거야? 그런 강렬한 옷을 입고 있는데? 나는 약간 넌씨눈의 향기가 나는 남자를 답답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그런데... 이 싸늘한 분위기 뭐죠? 어디서 많이 보던 장면인데... 이거...


"내가 인간이 아니라는 건 어떻게 알았지? 그 무엇도 내가 인간이 아니라는 증거는 없을텐데."


진심인가? 아니... 그런 옷을 입고 있는데... 눈치를 못채면 그게 좀 더 이상하지


"그냥 코스프레 일수도 있잖습니까"


왜 그렇게 생각하신거죠?라는 어제 파란 쫄쫄이를 입었던 남자의 대답이 들려오고 나는 생각만 한다는 게 입 밖으로 내뱉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남자는 내 눈을 보며 나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긴 하지만.... 내가 뭐라고 대답해야할지 망설이자 나를 제외한 사람들의 눈초리가 점점 가늘어졌다. 


아. 생각났다. 그 때 낫으로 쓸어버렸을때도 다들 저런 표정에 이런 분위기였지... 해야하는 대답은 생각나지 않고 쓸데없는 걸 기억해버렸지만 좀 억울했다. 아니 내가 댁들 동료 목숨도 구해줘, 일도 도와줘, 해를 끼친건 요만큼도 없는데 서로 피곤하게 왜 저렇게 경계를 하는지 원. 그것보다 뭐라고 둘러대나.


"그렇긴 하지만..... 개인적으로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이곳의 인간들을 관리하는게 제 일이라서요."


이 정도면 대충 둘러댄 거 치고는 나쁘지 않았다.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니었고 제일 그럴듯하게 들리는 건 거짓이 아니라 교묘하게 숨긴 사실이라고 생각하니까. 나는 내 대답이 만족스러웠다.


"당신 일이라고요?"


그러나 다른 사람은 아니었나보다 내 변명에 빨간머리 여자가 셀쭉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시선을 돌려 답을 돌려주지 않았던 로마시대 남자를 쳐다보았다.


"그래서 대답은요?"

"나는 아스가르드의 신이다."

"예?"


어제 전투중에 머리를 많이 다쳤나? 아니면 장난? 나는 그의 의도를 알 수가 없어서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러나 내 의뭉스러운 시선에도 그의 눈동자는 흔들림이 없었다.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신이라니.


질문도 현실적이지는 않았지만, 대답이 신화로 이어질지는 몰랐다. 내가 계속 로마시대 남자와 눈싸움을 이어가고 있는데, 그 사이를 끼어드는 목소리가 들렸다.


"진짜에요. 더 간단히 표현하자면 외계인인거죠."


어제에는 볼 수 없었던 한 남자가 안경을 올리며 대답했다. 친절한 얼굴과 부드러운 목소리로 설명해준건 고마웠지만, 저기 저를 보고 있는 눈은 안 웃는데요? 왜인지 라이랑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였다. 저런 타입은 화가 나면 무서워지니 나는 눈을 피했다.


"이왕 말이 나왔으니까 물어보겠는데, 왕자님 정체는?"

"음....."


의심의 눈초리 하나를 피하니 또 하나가 들러 붙었다. 도망갈 곳도 없는 좁은 이 방안에서 상대적으로 어려보이는 아이-400년을 살았지만 외관상-를 심문하다니. 비겁하다며 삐죽였지만 넘어갈 생각은 없는지 모두 입을 다물고 내 대답을 기다렸다.


뭐라고 하지? 사신이라고 말해도 괜찮은 것은 곧 죽을 인간에게 만이었다. 나도 이 규칙은 한 번도 어긴적이 없다. 게다가 앞으로는 특히 나를 예의주시한다고 했으니 이 역시 대충 둘러대야 했다.


아까부터 고민했지만 정말 뭐라고 해야 하는지 생각이 안났다. 눈만 계속 대굴대굴 굴리는데 타임리미트가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어떡하지? 시간을 더 끌면 끌수록 그들의 경계는 더 올라갈거고, 그럼 서로 피곤해진다.


모르겠으니 적당히 진실과 거짓을 섞어야....아!


"그냥 공무원입니다!"


그래! 나도 나름 공무원이야. 위쪽에 하나 밖에 없는 공기업 비스무리한거에 다니고 있으니까. 나는 생각보다 훌륭한 대답을 했다고 생각하며 히죽 웃었다.







마음의 바다(心海)에서 헤엄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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