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 한 번, 케니에게 어린애 취급을 받은 적이 있다. 

몇백 년 전만 해도 아이는 작은 어른으로 취급되었지 그들의 미성숙함과 발달되지 않은 몸과 미래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신경써주지 않았다는 얘기를 한지에게서 들었다. 케니는 바로 그런 식으로 리바이를 다뤘다. 케니의 잘못만은 아니었다. 잘잘못을 가릴 수도 없었다. 뒷골목은 진보하지 않은 구세계가 아니었다. 그곳은 가난이 존재하는 독자적인 세계였다. 아이가 아이일 수 없는 것은 무질서가 아니라 필요에 의해 생성된 규칙이었다. 케니의 손에 떨어진 뒤 리바이는 나이프를 쥐는 법과 손가락뼈를 보호하면서 사람의 얼굴을 뭉개버리는 법 따위를 배웠다. 군인이 될 앞날을 내다봐서가 아니라 순전히 살아남기 위해서. 

그날 리바이는 성당을 구경해야 했다. 평소와 다르게 밤이 아닌 아침에 길을 나서며 케니는 문간에 멈춰 섰다. 성당에 가면 빵을 줄 테니 먹고 싶으면 구걸이나 해 보라고 했다. 식사를 해결하는 건 언제나 리바이 혼자의 몫이었다. 케니는 집에 들어오는 날이 많지 않았고 먹을 것은 커녕 푼돈이라도 쥐여 주면 다행이었다. 리바이는 케니가 돈을 보관해 두는 장소를 알고 있어 티가 나지 않을 정도로만 그것을 빼서 쓰고는 했는데, 그 또한 빌어먹을 양아버지의 계획이었다는 것은 머리가 조금 큰 뒤에 알았다. 돈은 수단이었다. 케니는 언제나 결과가 아닌 수단만을 제공했다. 폭력, 돈, 그리고 어쩌면 사랑을 리바이에게 가르쳐 주었다. 그날도 그는 신의 사랑을 수단으로 삼아 리바이를 떠났다. 피와 때를 양분으로 자라가는 작은 인간도 손톱만한 빵 하나 어치의 사랑을 받을 가치가 있다는 듯이 말했다. 또한 리바이는 배가 고팠다. 성당도 월교의 사당도 모두 똑같아. 전부 다 빌어처먹을 놈들이나 가는 곳이지. 너는 굶어 뒈지는 한이 있어도 절대 저런 위선자들이 되면 안 된다. 그렇게 말하던 시절의 케니는 순수한 악이었다. 그런 양아버지가 빵을 허락했다. 자라나기 위해서는 무언가를 먹어야 했다. 리바이는 배가 고팠다. 

형제 자매 여러분. 사제는 말했다. 그의 말투는 경건하고 높낮이가 없었으나 기도하지 않고 딴청을 피우는 사람들은 알아챌 수 있는 오만함을 지니고 있었다. 꼭 자기 자신이 신이라도 된 것처럼 말했다. "형제 여러분, 내가 말하려는 것은 이것입니다...때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이제부터 아내가 있는 사람은 아내가 없는 사람처럼, 우는 사람은 울지 않는 사람처럼, 기뻐하는 사람은 기뻐하지 않는 사람처럼, 물건을 산 사람은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처럼, 세상을 이용하는 사람은 이용하지 않는 사람처럼 사십시오...이 세상의 형체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치고 사당의 안은 화려했다. 조각난 색유리가 갖가지 색으로 빛났고 신도들의 손목에는 조잡하게 깎아 만든 십자가나 묵주가 들려 있었다. 저것들의 가치는 어디서 온 것일까? 소리나지 않게 문을 닫으며 리바이는 생각했다. 때가 얼마 남지 않았고 형체도 사라지고 말 거라면 저들이 꼭 쥐고 있는 신앙의 증거도 사라지게 될까? 피와 살은 어디로 가며 뼈는 또 어떻게 될까? 배가 고팠기 때문에 리바이는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처럼 머릿속이 불타오른 적은 다시 없어서 이후 그는 한지를 이해하고 싶을 때마다 그날의 기억을 억지로 되살려야 했다. 그렇지만 자신이 항상 획득을 실패하는 어떤 결론을 한지는 얻었을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리바이의 머리는 질문을 제기하는 것에서 멈추었기 때문이다. 한지는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질문으로 돌아가다 못해 그것을 찢어발길 때도 있었다. 한지 조에는 그런 사람이었다. 

리바이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또 배가 고팠고 의식은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리바이는 사제를 찢어발길 뻔 했다. 나이프를 쥐는 대신 위를 향해 핀 손바닥 위에 사제는 손톱만한 빵 덩어리를 놓아주었다. 실수라고 생각하고 가만히 서 있었다. 손바닥에 시선이 몰릴 때쯤 사제는 두 번째 빵 덩어리를 주며 말했다. "세상을 이용하지 않는 사람처럼 살거라." 리바이는 자리에서 비켜났다. 입 안에 털어넣은 빵조각은 스펀지처럼 퍼석거렸다. 세상의 형체가 사라지고 있다는 선언을 귀담아듣지 않은 아이를 비웃는 시선이 진득한 연민과 비웃음을 품고 있었다. 세상의 끝이 오면 그조차 사라지게 될 거라고, 리바이는 차마 생각하지 못했다.

집에 돌아가보니 케니는 없었다. 케니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리바이가 그와 재회한 것은 파라디 섬에 출병을 나갔을 때였다. 케니는 유탄을 맞아 다 죽어가고 있었다. 신생 에르디아국의 귀족 가문인 레이스 가에게 발탁되어 헌병으로 있었다고 했다. 뒷골목에 살면서 틈만 나면 마레의 헌병들을 죽이고 다녔던 인간은 이제 에르디아의 헌병이 되어 목숨이 끊어지기 일보직전이었다. 리바이는 그에게 왜 자신을 떠났냐고 물었다. 케니는 자신이 누군가의 아버지 노릇을 할 수 없는 인간이기 때문이었다고 대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케니는 아버지 같은 사람이었다. 부모가 되기 싫었다면 창녀가 된 여동생의 자식이었던 자신을 처음부터 거두지 말았어야 했다. 그런 관계를 부모와 자식 이외의 다른 것으로 정의할 수 있다고 케니가 주장했다면 리바이는 그의 헛소리를 조금이나마 들어줄 의향이 있었다. 허나 케니는 그러지 않았다. 케니는 한지와 다르게 학자가 아니었다. 그런 점에서 자신과 케니는 뼛속까지 같았다. 각자의 살을 저며 뼈만 남긴 뒤 섞는다면 길이가 다른 척추를 제외하고서는 무엇이 누구의 뼈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이리라고. 부러졌다 붙은 자국은 각각 셀 수 없이 많아서 혼란만 더해 줄 것이라고.



이제 리바이는 정말로 사라져 가고 있는 땅덩어리에 와 있었다. 옛 기억에 젖은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종말은 오지 않을 것이다. 파라디 섬의 사라진 형체만큼 마레의 것은 그 위엄을 공고히 하리라. 그러는 동안 스러져 갈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은 계산에 넣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그것을 알지 못하는 병사들이 서로 맹세를 나누며 푸대자루의 내용물처럼 쏟아져 내린 것은 낮의 일이었다. 리바이는 그날 잠에 들지 않았다. 자신에게 맹세의 행위를 해 보이고 돌아오지 않은 이들의 이름을 곱씹는 것만으로도 시간은 잘만 갔다. 

밤이 되자 권총을 한 정 챙겨들고 숙소 밖으로 나왔다. 좌표의 위치는 외우고 있었다. 도보로 네 시간 정도는 걸어야 했다. 한지의 방에서 찾은 자료가 맞다면 이미 경비가 삼엄할 터였지만 자신에게는 해당되지 않을 일이었다. 조물주가 자신을 만들 때, 군인으로서 나라에 지녀야 할 충성심을 없애고 신체력을 월등하게 했기 때문이다. 리바이는 좌표를 향해 걸었다. 망가진 땅에서 화약 냄새와 시체 비린내가 났다. 탄피와 자갈이 군화 밑창을 솟아올렸다. 인간의 생명력을 흡수한 땅바닥은 물컹거렸다. 리바이는 처음으로 좌표라는 표현이 마음에 들었다. 그것은 이제껏 그가 기대 살아 왔던 단순한 목적 의식을 강화시켜 주었다. 적인지 전우인지 모를 것들의 흔적을 즈려밟으며 지나가는 감각을 다시금 잊게 해 주었다. 좌표는 실재했다. 한지 조에는 좌표에 있었다. 그때 리바이 아커만이 찰나의 의문도 제시하지 않은 것은 그의 습관 때문 뿐만이 아니라 좌표라는 단어의 탓인지도 모른다. 

나침반과 하늘과 지도는 리바이를 버려진 구덩이 같은 곳으로 인도했다. 가는 내내 경비가 삼엄하기는 커녕 부대가 주둔했던 흔적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것에 비례하듯 인간의 기척은 사라지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 억지로 존재를 지워 놓았거나 자신의 감각이 무뎌진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이 최고조에 이르러 좌표의 문서에 대한 의구심이 들 때쯤 리바이는 달빛이 닿지 않는 구멍 앞에 설 수 있었다. 대각선으로 나 있는 구멍은 동굴과 우물의 중간 같기도 했다. 안쪽에서 서늘한 바람이 불어와 끝이 막혀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미 발견된 유적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비루한 안으로 리바이는 발을 들였다. 그곳은 그의 좌표였기 때문이다. 다른 근거들의 부재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한지는 좌표에 있었고 리바이는 좌표를 찾아냈다. 남은 것은 한지의 흔적을 따라가는 일뿐이었다. 망할 안경. 찾는 즉시 얼굴을 후려갈겨 주겠어. 리바이는 얼른 그녀의 코뼈를 부러뜨리고 싶다고 생각하며 빛 한 점 새어들어오지 않는 안쪽을 걸었다. 그러면 한지는 피가 흐르는 코를 부여잡고 억울하다는 듯 스스로의 의도를 호소할 것이다. 꽤 볼 만한 광경일 것이다. 어쩌면 자신은 웃게 될지도 모른다. 한지가 목구멍 안쪽으로 넘어오는 피를 뱉으며 자신이 무엇을 보았고 알아냈는지 설명하려 드는 꼴이 우스워서, 혹은 조금 반가워서, 좌표의 안을 떠돌고 있을지도 모를 방사능에 피폭되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릴지 모른다. 

좌표의 안은 천장이 낮았다. 굴 표면에 고인 축축한 습기가 정수리에 스쳤다. 그것도 잠시고 공동의 면적은 점점 넓어지고 있었다. 대기 또한 점점 차가워졌다. 입김을 불자 공중에서 하얗게 번졌다. 리바이는 망토의 끈을 단단히 여미며 품 안에 넣어둔 권총을 만지작거렸다. 군화 끝이 서리를 헤치고 나아가야 할 때쯤이었다. 입구와는 비교도 되지 않게 넓은 공간이 리바이의 앞에 펼쳐졌다. 막다른 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리바이는 자신이 옳은 곳에 도착했음을 알았다. 구조물 같은 것들이 원통형의 공간 중심을 지키듯 그 가장자리를 둘러싸고 있었다. 족히 열 구는 되어 보였다. 리바이는 그중 하나를 향해 다가갔다. 손을 뻗어 표면을 만지자 익숙한 감촉이 지문을 타고 흘렀다. 

그것은 아주 커다란 무언가의 뼈대였다. 

어느 날 마을에 왔던 서커스단이 공룡의 화석을 보여준다는 명목으로 푼돈을 걷어간 적이 있었다. 엉성하게 맞춰진 티라노사우르스 렉스의 정강이에서는 조잡한 플라스틱의 느낌이 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리바이는 입대했고 붙어 있던 살점을 모두 들어낸 뼈의 감촉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그런데 지금 자신이 만지고 있는 것은 공룡과는 다른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동물이나 파충류라기보다는 오히려 등을 꼿꼿하게 펴고 서 있는 인간에 가까웠다. 다리가 있었고 골반이 있었고 갈비뼈 양 옆으로는 팔이 돋아나 있었으며 곡선을 그리며 뻗은 척추와 두개골이 있는 그것은 거대한 인간이라고밖에 할 수 없었다. 리바이는 목이 아파올 정도로 고개를 뒤로 젖힌 채 한참 동안이나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디선가 바스락대는 소리가 났다. 리바이는 품에서 권총을 뽑아들었다. 소리는 다른 쪽에 있는 뼈대 사이에서 나고 있었다. "한지?" 리바이는 총이 장전된 것을 확인하며 외쳤다. "한지?"

"리바이?"

그리고 그녀는 걸어나왔다. 그녀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거인들의 틈바구니 안에서 이 세상의 전부를 가진 듯한 표정을 지으며, 또 리바이가 자신을 찾아오지 않았더라도 그 행복에는 변함이 없었으리라는 투로, 놀라움에 가득 차 대답했다. 

"역시 여기에 있었군. 이번에야말로 정신이 나간 거냐."

"너야말로 용케 여기까지 왔네."

네가 이곳에 있으니까. 리바이는 그 말을 삼켰다. 한지는 앞을 가로막고 있는 뼈 앞에 무릎을 꿇고 그것에 기대 앉았다. 부모의 품에 기대 자는 어린아이처럼 아주 편안해 보였다. 그녀가 때로 뼈를 쓰다듬지 않았다면 리바이는 한지가 영원히 잠들었다고 생각했을지도 몰랐다. 리바이가 말했다. 

"돌아가자. 오는 길에는 수상할 정도로 정찰병이 없었다. 무언가 안 좋은 기미가 느껴져."

"아, 리바이. 너무해! 어떻게 온 곳인데 조금만 더 즐기도록 해 줘. 이왕이면 옆에서 말동무도 좀 해주고."

한지가 눈을 뜨고 일어섰다. 리바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리바이는 그것을 잡는 대신 한지의 옆으로 다가가 섰다. 한지가 미소지었다. 그녀는 리바이를 공동의 한가운데로 이끌었다. 리바이는 그녀가 가리킨 곳에 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돔처럼 세워진 뼈대들이 마치 자신을 감시하듯 내려다보고 있었다. 텅 빈 눈구멍은 시커맸고 이빨이 날 자리는 빈틈없이 메워져 있었다. 리바이가 말했다.

"대체 이게 뭐야."

"이건 무덤이야. 거인들의 무덤."

한지는 경이를 견딜 수 없다는 듯 눈을 감고 두 팔을 벌렸다. "거인은 역시 실재했어. 나는 고대 에르디아의 근본이 이들이었다고 생각하고 있어."

"그렇다면 어째서 은폐되었던 것이지?"

"그 전에 리바이, 안쪽으로 같이 가 보지 않을래? 내가 발견한 것들을 좀 더 보여주고 싶어."

한지는 리바이를 거인의 다리 같은 기둥 사이로 이끌었다. 막다른 길이라고 생각했던 곳에 빈 틈이 있었다. 아까 걸어온 것과 같은 길이 드러났다. 폭은 좁았지만 천장은 높았다. 누군가 단층을 세로로 갈라 놓은 듯했다. 때로 천장을 받치고 있는 듯한 거인의 뼈대가 한 구씩 드러났다. 리바이가 중얼거렸다.

"무덤에서까지 서 있어야 한다니, 저 치들은 꽤나 다리가 아프겠군."

"네 농담은 여전히 재미가 없구나... 그건 그렇고 리바이, 아이다를 본 적 있어?"

 "그게 뭐지?"

 "아이다를 몰라? 이집트를 배경으로 한 오페라잖아."

 "그딴 것에 관심 없어."

한지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에 얕은 콧노래를 불렀다. 콧노래는 벽을 타고 울려퍼지다가 여운을 남기며 흩어졌다. 문득 리바이는 그녀가 곧 사라질 것처럼 느껴졌다. 손을 뻗어 한지의 어깨를 붙잡았다. 한지가 돌아보았다. 안경 밑의 시커먼 안대가 그를 응시했다. 거인의 텅 빈 눈구멍 같았다. 리바이는 한지의 어깨에서 손을 뗐다. 한지는 기동을 재개한 기계처럼 앞으로 나아갔다. 

머리 위로 무언가가 떨어졌다. 액체 같은 것이 이마를 타고 흘렀다. 리바이는 얕게 내리는 비처럼 떨어지기 시작하는 물방울을 손으로 받았다. 파리한 빛의 알갱이 같은 것이 손바닥 위에서 흩어졌다가 뭉쳐지기를 반복했다. 수은이었다. "한지." 리바이는 손을 기울여 액체 금속을 흘려보내며 말했다. 한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걷고 있었다. 

리바이는 뒤를 돌아보았다. 방금까지 그들이 서있었던 공동의 입구가 사라져 있었다. 보이는 것은 오로지 어둠뿐이었다. 액체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만이 마치 누군가를 홀리듯 영롱했다. 

"아이다는 무슨 이야기지?"

문득 정신을 잃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리바이는 한지에게 말을 걸었다. 한지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사랑하는 두 사람이 같이 석실에 생매장당해 죽는 얘기."

 "끔찍하군."

 "이제 와서?"

한지가 웃었다. 그녀의 미소는 하얗고 투명했다. 수은처럼 광택이 나는 것 같기도 했다. 한지가 말했다. 

 "괜찮아, 리바이. 거인이 우리를 해방시켜 줄 거야."

 "무엇으로부터?"

 "질문은 좋은 습관이 아니야."

그녀의 말은 학자답지 않았다. 질문과 의문은 여태껏 한지 조에라는 여자를 움직여 오지 않았던가? 한때 엘빈 스미스라는 남자가 자신에게 그랬듯 말이다. 리바이는 문득 중얼거렸다. 

"엘빈, 보고 있나? 한지를 찾았어. 그녀는 살아 있다...아마도."

흐릿한 시야 가운데서 한지의 뒷모습이 아른거렸다. 그래, 나는 한지 조에를 찾았어. 임무는 성공했고 남은 것은 한지에게 약간의 자유를 만끽할 시간을 준 뒤 돌아가는 것이 전부다. 그런데 죽은 사람들에 대한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엘빈과, 지나치게 많은 부하 병사들, 케니...

한지,

너희들은 어째서 전부 나를 떠나는 거지?

언제나 리바이의 곁에 존재했던 순도 높은 질문. 소화되지 않는 종양 같은 것. 혹은 위에 남아서 현실을 소화시키는 일을 돕는 것. 분노와 우울을 자아내다 못해 스스로 압착되어 보석 같은 투명함마저 지니게 된 의문점이 떠올랐다. 대체 왜 그를 제외한 세상만이 녹슬어 사라지는가? 이제 리바이는 세상의 형체가 조금씩 사라지고 있다는 말의 의미를 알았다. 오래된 종이가 모서리부터 부스러지고 종일 나무를 토막낸 도끼의 이가 빠지는 것처럼, 혹사당한 것들은 영광을 누리는 대신 무언가를 상실해가기 마련이었다. 그러므로 자신이 지금까지 흘렸을 피와 땀과 뼛조각에 있어 보상을 바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사실 그것들은 사라지지 않았던 것이다. 전쟁은 사라짐이라는 관념에 고통스러운 가치를 부여했다. 존재할 가치가 없다고 취급되는 삶과 실제로도 그럴 가치가 없는 삶의 저며진 톱밥들이 뒤섞이는 지옥이었다. 그 한가운데에서 리바이 아커만은 살아 있었다. 떠나갈 운명을 떠안은 사람들이 기묘한 자세로 흐트러져 쓰러지는 것을 보며 묵묵히 서 있거나 어디로인가 걸어가고 있었다. 형체가 사라진 세상. 형체가 사라진 길. 위와 아래가 없이 뒤죽박죽이 된 무(無)와 진공의 공간에서 홀로 숨쉬고 있었다.

"그래서 이번엔 네가 나를 위해 떠나왔잖아, 리바이."

한지가 말했다. 리바이는 눈을 떴다. 속눈썹 안쪽이 불에 데인 것처럼 따끔거렸다. 한지를 따라 걸을수록 바닥은 진흙처럼 물컹거렸다. 천장에서는 계속해서 수은이 떨어지고 있었다. 리바이는 발 밑을 내려다보았다. 잘게 부서지는 액체 금속이 점점 빠르게 차오르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발등까지 수은에 잠기는 것은 순식간일 것이다.   

"봐, 리바이. 아름답지 않아?" 

한지가 발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리바이는 눈가를 비비며 고개를 들었다. 또다른 공동이 펼쳐져 있었다. 아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의 물체는 사람의 형태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길었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마치 척추만 남은 듯한 무참히도 거대한 뼈대였다. 두개골에는 긴 머리카락 같은 종유석이 매달려 있었고 긴 상체는 둥글게 구부리고 있어 또다른 동굴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리바이는 타들어가는 듯한 눈을 애써 뜨려고 하며 말했다.

"벽에 똥칠할 때까지 연구해도 저것의 비밀을 다 밝혀낼 수는 없을 거다." 

"그래, 그렇겠지." 

"네 그런 점은 언제나 조금 혐오스러웠어."

리바이가 말했다. 

"한 번도 좋았던 적이 없었지."

한지는 그저 웃기만 했다. 구역질이 나서 리바이는 윗배를 부여잡았다. 허리를 구부리고 토했다. 발목까지 차오른 수은이 기다렸다는 듯 그것을 삼켰다. 그녀가 그토록 사랑하는 연구 자료를 더럽혔는데도 한지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수은에 중독되어 비틀거리는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질 만큼 굳건한 자세로 서 있었다. 그녀의 손이 허리를 굽힌 거인의 뼈대를 쓰다듬었다. 리바이는 가까스로 눈을 떴다. 죽기 직전까지 무언가를 울부짖었던 듯 거인의 턱뼈는 벌어져 있었다. 리바이는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돌아가자. 오는 길에는 수상할 정도로 정찰병이 없었다. 무언가 안 좋은 기미가 느껴져."

"아, 리바이. 너무해! 어떻게 온 곳인데 조금만 더 즐기도록 해 줘. 이왕이면 옆에서 말동무도 좀 해주고."

한지. 리바이는 온 힘을 다해 동료의 이름을 불렀지만 커다란 뼛조각에 기도가 막힌 듯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가 한지를 부를수록 목구멍이 수축해 공기를 조였다. 갑자기 다리에 힘이 빠져 리바이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다시 일어서기 위해 바닥을 짚었다. 손아귀에 잡히는 것은 액체 금속뿐이었다. 은빛 액체는 물에 떠다니는 기름처럼 리바이의 손바닥 위를 배회하다 떨어져 내렸다. 흉터와 손금이 조밀하게 잡힌 손바닥 거죽이 수축했다. 한지가 말했다. 

"리바이, 안쪽으로 같이 가 보지 않을래? 내가 발견한 것들을 좀 더 보여주고 싶어." 

리바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바닥이라고도 할 수 없는 것을 딛고 일어섰다. 한지는 이미 저 멀리로 걸어가고 있었다. 품 속에서 총기가 미끄러져 떨어졌다. 수은이 순식간에 그것을 가라앉혔다. 리바이는 그것을 주우려다가 또다시 쓰러졌다. 입 안으로 비린 맛이 나는 액체가 들어왔다. 피 같기도 했고 금속 같기도 했다. 리바이는 그의 위에 드리우고 있는 거인의 뼈대처럼 등을 둥글게 구부렸다. 짧게 자른 머리카락이 눈 앞으로 쏟아졌다. 수은 밑에 담궈진 손가락 사이로 무언가가 꿈틀거렸다. 리바이는 발버둥치며 일어났다. 한지의 모습이 마치 점처럼 작아지고 있었다. 리바이는 철퍽거리는 바닥을 딛고 달렸다. 그가 외쳤다.  

한지.

나를 떠나지 마. 

 한지가 돌아보았다. 거인의 텅 빈 안와 같은 안대가 보였다. 어느새 그의 반신은 수은인지 무엇인지도 알지 못하는 액체에 감싸여 있었다. 반면 한지의 몸은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는 듯 유유히 그것을 가르고 나아가고 있었다. 리바이는 손을 뻗었다. 한지의 손이라고 믿고 싶은 무언가가 수은을 맛본 손아귀에 잡혔다. 한지의 피부는 조각상처럼 단단해서 상처를 내면 피도 흘리지 않고 부서져내릴 것 같았다. 그와 반대로, 리바이의 몸은 뜨거웠다. 뜨거움과 동시에 차가웠다. 수은과 닿은 표피 밖은 차게 얼어갔고 혈관 아래에서는 불꽃이 터졌다. 그러나 리바이는 한지를 따라가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힘이 풀려오는 다리를 지탱하기 위해 무릎에 힘을 줬다. 시야를 얽매는 듯한 통로에서 넘어지지 않도록 애써야 했다. 길은 점점 좁아지고 있었다. 그러나 없지 않았다. 그 위에서 리바이 아커만은 존재하고 있었다. 존재치 않는 짐승을 마주하기 위해 영원히 걷고 있었다. 




예전에 연중했던 글을 커미션 받아서 완결냈습니다. 오래된 글이지만 즐겁게 썼습니다. 신청 감사합니다~

진우/샤릭 twitter @zzodaryuji https://spinspin.net/zzodaryuj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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