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간만에 연성을 쪄 왔습니다. 여우구슬의 외전격...을 쓰려다가 여우구슬이 외전이 되어버린, 어떤 본편을 시작하고 말았읍니다. 암만 생각해봐도 스불재인 것 같은데, 우리 아는님에게 갓연성도 받았겠다, 아예 시작을 안할 수는 없을 것 같아서 갈 길이 구만리인 듯 싶지만 그래요 어디 한번 가봅시다. 얼마나 자주 쓰게 될 지는 모르겠지만요 껄걸.  


여우아들램 은영 X 홀애비 해준, 본격 (유교 가부장) 퇴마 동양물 적폐 캐해로 가득한 조선판타지 2차 날조물 시작합니다. 집없즈 아이들 다수 출연 예정.



* 여우아들램백은영 x 사냥꾼개비고해준

* 동양(내멋대로조선)AU

* 집없즈 다수 출연




-1-



오늘도 어김없이 사랑채에서 다투는 소리가 들린다.


한때, 한양을 호령했다는 만상의 가문이라는 것이 무색하게 집안이 뒤숭숭하다. 이런 살풍경이 박가(家)의 막내아들에게는 새삼스러울 것이 없다. 길지 않은 삶 속에서 양친은 항상 싸웠고 그 사이를 오고 가는 말들은 이해하기 어려웠으나, 어렴풋하게나마 다툼의 연유가 짐작 갔다. 오래전 빛을 잃은 가문의 명예와 변변치 못한 재물 때문이란 사실을.


가끔 들려오는 모친의 울음소리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무정한 부친의 호통 덕에 이 막내아들은 날 적부터 불안을 가슴에 품어야 했으며, 때때로 속이 꽉 막힌 듯 답답하기도 하였으나 슬픔을 오래도록 곱씹기엔 아직 모르는 낱말이 많았다. 하여 금세 다른 것에 정신이 팔리곤 했는데, 그것이 당숙이 제게 준 팽이일 적도 있었고, 식사 후 한 개씩만 허락된 약과일 적도 있었고, 공부를 핑계로 동네 아이들과 어울리느라 서너 식경은 돌아오지 않는 형님일 적도 있었다. 열 살배기가 몰두할 사건이라곤 딱 그 정도였다. 


이날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다리가 부러진 까치 새끼 한 마리를 구할 적만 하더라도.


아이는 식은땀을 훔치며 제가 만든 엉성한 매듭을 보곤 멋쩍게 웃었다. 너무 꽉 묶은 탓에 피가 통하지 않으면 어떡하지? 그래도 한 식경이나 들인 건데. 까치 새끼가 저를 바라보는 시선에 못 미더움이 엿보이는 것이 기분 탓이길 바란다.


처음부터 어머니에게 부탁할 것을 그랬나. 짐승이라고 눈총 주실 게 뻔해 광으로 숨기까지 했는데 하필, 둥지에서 떨어질게 무어람.


그렇다 하여 흙바닥 위에 쓰러져서 떨고 있는 모습을 모른 체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만하면 됐다며 아이는 조심조심 까치 새끼를 양손에 담아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


문제는 지금부터다. 둥지는 아득하게 높은데 박가의 막내아들은 나무를 타는 재주는 고사하고 또래보다 병약해 탕약을 달고 살아야 했다. 


낭패감에 젖어 있는 그때, 누군가 거짓말처럼 담장 위를 훌쩍 뛰어넘어 들어왔다. 아이는 코앞에 서 있는 홍안의 소년을 보고 제가 꿈을 꾸나싶었다. 소년은 희고 깨끗한 얼굴에 비취색 비단옷을 차려입고 흰 꽃이 수 놓인 남색 신을 신었는데, 머리는 반 갈래로 땋아 홍마노 비녀로 고정하여 계집인지 사내인지 가늠하기 힘들었다. 그 선동(仙童)과 같은 소년은 남의 집 담장을 가뿐하게 넘어온 주제에 제가 더 당황하는 것도 잠시, 다짜고짜 뇌까렸다.


"야, 나 좀 숨겨줘."

"뭐, 뭐요?"

"귓구멍 막혔어? 나 좀 숨겨달라니까. 급해! 얼른."

"쪼, 쫓기는거요?"


그때, 후문에서 낯선 인기척이 들려왔다.


"계시오?"


낮은 사내의 음성에, 소년이 혀를 차며 빠르게 주위를 둘러보더니 광을 벌컥 열어젖힌다.


"웬 사내 하나가 날 찾거든, 문은 열어주되 무조건 잡아떼라. 알았느냐? 안 그러면 험한 꼴 볼 줄 알아."


다짜고짜 을러대는 소년의 행패에 어안이 벙벙해 입만 벙긋이는 것도 잠시, 광 문이 빼꼼 열리더니,


"위험한 자는 아니니까 염려 붙들어 매고."


하고는, 다시 모습을 감추는 소년에 그저 기가 막힐 노릇이다. 혹여 사랑채에 있는 양친에게 들킬까 가슴이 조마조마해 고민하는 것도 잠시, 다시 한번 들려오는 목소리에 조심스레 문을 열기로 마음먹고 정신이 쏙 빠져 양손 위에 올려놓은 까치 새끼는 깜빡한 지 오래.


"뉘, 뉘시오?"


문밖에 서 있는 사내와 눈이 마주치자 아이는 백지장처럼 희게 질려버렸다. 어림잡아도 6척은 되는 듯한 풍채 좋은 사내였는데 눈동자가 새까만 것이 매우 날카로운 인상인지라, 어쩌면 소년이 말한 사내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눈앞이 컴컴해져 떨기 시작했다. 두려움이 가득한 아이의 얼굴, 손 위에 들린 까치 새끼, 이 두 가지를 번갈아 보던 사내의 낯에 서리는 것은 뜻밖에도 당혹감이었으니.


"어른은 안 계시느냐."


집 안에 함부로 들어서지 않는 것으로 보아 ‘위험한 자’는 아닌 듯하여, 아이는 용기를 내 본다.


"무슨 일인데 그러시오?"

"혹, 네 또래의 사내아이가 이리 들어오지 않았느냐. 분명 담을 넘었을 텐데."

"모, 못 보았소."


암만 봐도 소년이 말한 ‘위험한 자가 아닌’ 사내가 맞는가싶어, 아이는 눈을 도록도록 굴리며 딴청을 피웠다.


"비취색 비단 쾌자를 걸치고 흰 꽃이 수 놓인 물빛 신을 신었다."

"보지 못했소."

"낯이 희고 속눈썹이 긴데, 몹시 곱다랗다.”

"보지 못했다고 이, 이야기하지 않았소! 속고만 살았나!”


어색한 정적이 흐르는 찰나, 새끼 까치가 깍깍 울며 작은 날개를 퍼덕이니 사내의 시선이 아이의 손바닥 위를 향한다. 나무 둥지에서 시끄럽게 까치들이 우는 것으로 말미암아, 대강의 사정을 짐작하기란 쉽다. 아이는 허둥댔다.


"아, 알았다. 얼른 둥지 위로 올려줄게."


허나, 여전히 까마득하게 높은 둥지에 아이는 금세 울상짓고 만다. 그때, 사내가 조심스럽게 무릎을 굽혀 눈높이를 맞추고는 물어오는 것이었다.


"나무 위 둥지에 올려주면 되느냐?"

"......그렇소."

"잠시, 집 안으로 들어가는 걸 허락해준다면 내가 도와줄 수도 있는데."


날카로운 인상과 달리 부드러운 말씨에 아이는 마음이 너그러워져, 고개를 끄덕였다. 지체하다가는 소란을 들은 어머니가 언제 들이닥칠지 모를 일이라 허락하는 것 뿐이라며 속으로 변명까지 하면서. 마당으로 들어선 사내가 한 손에 까치를 받아들고는 가뿐하게 나무를 타고 올라 까치를 둥지에 내려놓으니, 둥지에서 깍깍대는 소리가 환호처럼 들린다. 아이는 저도 모르게 짝짝 손바닥을 마주치다가 얼굴을 붉히며 슬그머니 손을 숨겼다. 나무 위에서 훌쩍 뛰어내린 사내가 손바닥을 털며 아이에게 이르기를-


"둥지가 생각보다 낮은 곳에 있어 수월하게 올려놨다. 위에 세 마리 정도가 더 있더구나."


세 마리? 처음 듣는 사실에 흥분으로 가슴이 뛰건만, 낯선 사내에게 드러낼 수는 없어, 아이는 짐짓 점잖게 대꾸해 본다.


"고맙소."

"...다리에 붕대는 네가 감아 준 것이냐?"

"그렇소만…. 왜 물으시오?"


사내의 눈빛이 일순 유순해지더니 낯에 옅은 웃음이 걸렸다. 놀랍게도 날카로운 빛이 온데간데없이 스러져버리는 것이 꼭 다른 사람 같다.


"튼튼하게 잘 묶어뒀기에, 누구 솜씨인지 궁금하여 물었다. 훌륭한 일을 해냈구나. 다친 녀석은 금세 팔팔해져 날아다닐 테니 염려 놓거라."

“차, 참말이오? 그것참 다행이오."


문밖을 나서던 사내는 광 쪽으로 한 차례 묘한 시선을 던진다. 속이 뜨끔한 아이는 공연히 발장난을 치며 무안을 숨긴다.


"혹, 아까 이야기한 사내아이를 보게 된다면 말을 전해줄 수 있겠느냐?"

"나, 나는 그런 사람 모르오."

"안다. 그래도 부탁 좀 하마.”

"뭔데…. 그러시오?"


그제야 광 쪽에서 시선을 뗀 사내가 씩 웃으며 말을 잇는데, 입가에 장난기가 묻어나는 게 기분 탓인지 알 수가 없다.


“모약과가 먹고 싶다 하여 잔뜩 만들어놨는데,얼른 집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이 아비가 다 먹어버리겠다고."

"모…. 약과가 무엇이오?"


사내가 품을 뒤지더니 조그만 보자기에 곱게 싼 것을 보여준다. 약과와 같은 빛깔로 표면이 반지르르한 것이, 약과라고 이르기엔 꽤 두꺼운 탓에 마치 꽃 모양을 한 떡 같다. 고소하게 퍼지는 냄새에 아이는 입맛만 다셨다.


"더불어, 아비가 많이 걱정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전해줄 수 있겠느냐."

"그…. 것이."

"약조해주면 이것들을 주마."




사내가 떠나고 문이 닫히고, 얼른 약과를 한 입 베어 문 아이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계피 향이 은은하게 맴도는 가운데 바삭한 식감이 신묘하다. 그렇게 아이가 정신없이 약과에 빠져있을 무렵, 광이 벌컥 열리더니 낯을 시뻘겋게 물들인 소년이 튀어나와 아이를 향해 눈을 흘겼다.


"모르는 사람이 주는 거, 함부로 주워 먹으면 안 된다는 것도 모르느냐? 산 아래 인간들은 다 이래?"


아이는 산 아래 인간이 무슨 뜻인지 몰라도, 이웃끼리 나눠 먹는 것에 대한 미덕은 잘 알기에 모약과를 내밀어 본다.


"도령도 좀 들겠소?"

"꼴도 보기 싫으니까 치워."

"왜 그러시오? 아까 부친도 그러지 않으셨소, 도령이 모약과를 먹고 잡았다고."

"부친은 무슨. 허구한 날 애 취급이나 하고……."


눈을 세모꼴로 뜨는 도령이 아이는 의아하다. 자신과는 한, 두 살 정도 차이나 보이긴 하나, 도령 역시 영락없는 어린 애 아닌가.


"부친이 아니란 말이오?"

"아니야!"

"그럼 누구요?"

"......있어. 날 성가시게 하는 인간. 내가 산 아래에 관심만 가져도, 집에서 난리를 치는데 지겨워 죽겠다.”


아이는 도령을 이해할 듯 말 듯하다. 아이의 모친 역시, 밖에 나가 놀고 싶다는 기색을 보이기만 해도 호통을 쳤고, 부친은 모친의 치마폭이 어쩌고, 하며 비아냥거리기 일쑤였는데 곧장 부부싸움으로 번지는 일이 번번한 까닭이었다. 하여 아이는 여태껏 한 번도 대문 밖을 나서본 적이 없었다.


"혹, 도령의 양친께서도 자주 다투시오?"

"뭐?"

“나도 도령의 심정이 이해가 가오. 두 분이 하루가 멀다고 다투시는데…. 한 번쯤은 나도 형님처럼 밖으로 나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오."


양 볼에 욕심껏 약과를 욱여넣고는, 애늙은이처럼 땅이 꺼지라 한숨을 내쉬는 열 살배기의 모습에 도령은 기가 막혀 되물었다.


"왜 못 나가는데?"

"몸이 약하여 모친께서 반대하신다오."

"약하지 않은 게 이상할 일이다."

"그게 무슨 뜻이오?"

"네놈 관상을 봐라. 눈이 처지고, 귀의 윤곽이 흐릿하니 물길이 얕을진대 수장(水臟)(=신장)이 약하지 않고 배기겠냐. 와중에 집 꼬락서니가……."


도령이 말을 하다 멈추고 눈살을 찌푸리며 집 안 구석구석을 살피더니 까치의 둥지에 힐긋, 시선을 주었다.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겠네. 어쨌든 신세를 졌으니 작은 보답 정도는 하지. 네 방이 어디냐? 앞장서라."


아이는 망설였다. 조금 있으면 어머니가 저를 찾아다닐 시간이다. 도령이 눈에 띄면, 낯선 사람에게 문을 함부로 열어주었다고 혼나는 건 저일 텐데.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아이를 부르는 여인의 목소리에 아이는 주저앉을 뻔 했다.


"주완아, 어디에 있었느냐. 한참을 찾았…. 아니, 넌 누구…. 누구시오?"


머리부터 발끝까지 귀한 옷감을 두르고 있는 것이 누가 봐도 사가의 자식은 아닌듯하여, 여인은 말끝을 흐렸다. 어찌된 영문이냐고 막내아들에게 눈짓을 했으나 아이 아니, 주완의 앞을 가로막은 홍안의 도령이 눈가를 곱게 접고는 새가 지저귀는 듯 낭랑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처음 뵙겠소, 나는 부여 백 가(家)의 10대 사손, 은영이라 하오.”


여인이 깜짝 놀라 묻는다.


"부여 백가…. 라 하면, 홍주(오늘날의 홍성) 목사를 지내신 백의봉 영감 댁 말씀이십니까?"

"그렇소. 과연 만상의 안주인은 다르오. 숙부를 뵈러 상경한 지 아흐레가 다 되어가도록 홍주를 아는 자가 드물었는데, 참으로 반갑소.”

“집안이 상단을 운영한다고, 주완이가 말씀드렸느냐?”


주완이 입술만 달싹거리는데, 도령이 눈을 깜빡이며 의뭉을 떤다.


“아니, 한양에서 나는 새도 떨어트린다는 박치만 상단을 모르는 이도 있소?”


예기치 못한 이야기를 들은 듯 여인의 표정이 묘한 것도 잠시, 이내 파안대소한다.


“참으로 재미있는 도련님이십니다. 허나, 다 옛날 일로, 지금은 조상 뵐 면목이 없을 따름이지요. 헌데, 귀한 집 도련님께선 어찌 종복 하나 대동하지 않고, 예까지 행차하셨습니까?”


도령은 사뭇 가련한 표정을 짓더니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실은 내가 아주 난감한 상황에 빠지고 말았지, 뭐요. 할아버님이 통영에서 구해다 주신 귀한 봉황 연이 있는데 내게 꼭 열두 살이 될 때까지 참으라 하시는 것 아니겠소? 생일을 목전에 두고 도저히 기다릴 수가 없어서, 꼬리처럼 데리고 다니던 종복 놈도 따돌리고 예까지 오는 데 성공했다오. 부푼 마음을 안고, 연을 날리는데 글쎄, 별안간 이 댁 감나무에 걸려버린 것 아니겠소? 별수 없이 발만 동동 굴리고 있는데, 마침 감나무 근처에 있던 저 아이가 도와준 것이라오. 내 마음 깊이 고마움을 전하고 싶어 모약과를 좀 준비해왔는데, 모친께 들키면 혼쭐이 난다는 것을 공연히 내가 고집을 부린 탓에 이리 집 안까지 몰래 들어오게되었소. 아이를 너무 나무라지 않았으면 하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주완의 소매에서 모약과가 우르르 떨어졌다. 바닥 위를 뒹구는 보자기에 모친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을 하는 듯하나, 주완은 그럴 수가 없었다. 조금 전까지 제게 보였던 불한당 같은 모습들은 전부 거짓부렁이었다는 듯, 제 옆에 서 있는 것은 누가 봐도 인의를 벗 삼고 예를 행하는 사대부 가문의 자제가 아닌가. 


문득 도령으로부터 알 수 없는 싸늘한 기운이 전해져, 주완은 모친을 향해 부지런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도령이 봄바람처럼 웃는데, 그 자태가 몹시도 빼어나 노인이고 어린아이고 할 것 없이, 꼭 여우에게 홀리는 듯하다.


“혹, 부인만 허락한다면 종복이 찾으러 올 때까지만 머물러도 괜찮겠소? 늦어도 유시(酉時)에는 날 찾아낼 거요. 서찰을 남기고 나왔소.”


그렇게, 도령 아니 은영은 박 씨 가문의 안마당까지 무혈입성했다. 주완의 모친이 다과상을 준비하는 사이, 주완이 막 방문을 여는데 은영은 어디선가 제 덩치만한 소쿠리를 끌고 왔다.


“소쿠리는 어디서 났소?”

“보답한다고 했잖아. 문이나 열어.”

“도령은 안 들어올 거요? 왜 그리 멀찍이 서 있소?”

“방 안에 뭐가 있다.”


주완이 영문을 알 수 없는 얼굴로, 제 방문을 여는데 은영의 말마따나, 방 안에 뱀 한 마리가 똬리를 틀고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은영이 혀를 차며 막 신을 벗으려는데, 주완이 겁도 없이 성큼 방 안으로 들어선다.


“야! 위험하…!”


은영의 말이 채 마치기도 전에 주완은 능숙하게 머릿장을 열더니, 쌀과 술을 꺼내 뱀에게 뿌렸다. 그러자 뱀이 마당 어딘가로 빠르게 자취를 감춰버리는 것이었다. 은영이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는데, 주완은 태평하게 손님맞이를 위해 자리를 정돈할 뿐이다.


“이제 괜찮소. 들어오시오.”

“이런 일이 왕왕 있냐?"

“상해를 입히지 않으려다 보니 쓰게 된 방책이오.”

“의외네. 보통 인간들은 그냥 죽이려 들던데?”


그냥 여우가 싫은 건가? 뒤의 말을 듣지 못한 주완이 펄쩍 뛴다.


“죄 없는 짐승은 물론이거니와 어찌 영물을 함부로 죽인단 말이오. 게다가 업신(재물을 관장하는 신)을 함부로 죽이면 집안의 재물이 달아나고, 재앙이 내려 옴짝달싹 못한 채로 죽는다고 어머니께서 말씀하셨소.”

“뭐,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네 어미의 고향이 제주인가 보지?”

“그걸 어찌 알았소?”

“업신도 업신 나름이지, 유독 뱀에 손도 못 대는 곳이 제주다."


은영은 주춧돌 아래에 손을 쑥 넣더니 뭔가를 끄집어냈다. 무언가, 하고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것은 엉켜있는 뱀 암수 한 쌍이었다. 화들짝 놀라 말리려는데, 은영은 묵묵히 뱀들을 소쿠리에 던져 넣고는, 질질 끌고 집 안 구석구석을 배회하며 보이는 족족 뱀들을 끄집어내는 것이었다.


“뭐하는 거요! 어머니께서 보시면 경을 치실 텐데!”

“그니까 서둘러서 하고 있잖아. 도움 안 될 거면 조용히나 해라. 짝짓기 철이라 온 집안이 뱀으로 득실거리는구먼.”

“업신을 다 잡아들이다니, 천벌을 받을게요.”


숫제 울먹이는 목소리에 은영이 삐딱하게 웃는데, 미색이 아까울 지경이다.


“너야말로 봐라. 업신이 이렇게 득실거리는데, 한때 한양에서 이름을 날렸던 만상 가문이 이젠 입에 거미줄이나 치고 산다니, 넌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네 조상의 죄라면, 업주가리(業主嘉利. 업신이 사는 나뭇더미)가 저리 대놓고 둥지를 틀었는데도 못 알아챈 죄다. 더군다나 이 집 업신은 뱀과 상극인데. 재물과 곡식이 숭덩숭덩 빠져나가지 않고 배기겠냐.”

“그럼… 그 많은 뱀이 모두 업신이 아니었단 말이오…?”

“알았으면 말 좀 그만 시켜. 아니, 근데 왜 이렇게 많아?”


그렇게 한참을 돌아다닌 끝에, 소쿠리가 다 채워지자 은영은, 뚜껑을 덮어 한쪽에 숨겨 두었다. 때마침 다과상을 차려온 모친에게 언제 그랬냐는 듯 꽃처럼 웃는 은영이 주완은 펵 가증스럽다. 


모친이 방을 나가자 주완이 넌지시 물었다.


“언제까지 머물 참이오?”

“왜, 말뚝 박을까 봐 겁나냐?”


솔직히 말해, 주완은 은영이 불편했다. 저와 비슷한 또래이면서 속과 겉이 다른 데다, 괴이한 것들을 당연스레 입을 담으며, 가출한 것도 모자라 도망을 친다. 허나, 사실대로 이야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주완은 변명을 주워섬겼다.


“아니 그냥, 아까 유시에 종복이 데리러 온다 하여……”

“그걸 믿냐? 나한테 종복이 어디 있어.”

“그럼 숙부에게 연락을 취해,"

“난 숙부 같은 거 없어. 대충 지어낸 거지.”

“거, 거짓부렁을 말한 게요?”

“그럼 게서 솔직하게 말하랴? 난 담을 넘었고, 네가 모약과를 받아먹은 대신 날 팔아넘겼다고?”


주완은 은영이 싫은 까닭을 두 가지 추가한다. 거짓부렁을 밥 먹듯이 하는 데다 무고한 이를 음해하기까지 하다니. 주완은 억울했다. 


"무슨 말을 그런 식으로 하시오. 팔아넘긴 적 없소.”

“해준은 바보가 아니야, 조금 둔하긴 하지만…… 아무튼 내가 여기 있다는 건, 진작 들켰을 거다."


사내의 이름이 해준인 모양이다. 하지만 사내는 분명 저에게 은영의 아비라고 하였는데 대관절 무슨 관계이길래 이러는 것일까. 사내가 은영의 못된 계부라도 되는 것일까? 까치를 둥지에 올려주고, 모약과도 준 사람이 불한당처럼 보이지는 않았는데. 주완이 몸을 고쳐 앉아,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낸다.


"부친……. 아니 사내는 좋은 사람 같았소."

"그럼 내가 언제 시정잡배라고 했더냐? 다정도 병이라고, 사람이 지나치게 좋아 탈이지.”

“뭔진 몰라도 그냥 가서 잘못했다고 싹싹 빌면 용서해주실지도 모르오."

"야, 난 잘못 같은 거 안 했거든?”


은영이 인상을 구기며 주완을 노려봤다.


“이것 봐. 지금 너만 하더라도, 고작 한 번 보았을 뿐이면서 해준 편을 들잖아.”

“그건 누구든 그리 생각하지 않겠소?”

“이게… 기껏 뱀 굴에서 끄집어내 명줄 연장해줬더니, 은혜를 원수로……”


한바탕 성질머리를 늘어놓던 은영의 표정이 문득 이상해진다.


“그러고 보니 이상하단 말이야.”

“뭐가 말이오?”

“뱀이 많아도 너무 많아. 본디 뱀굴인 곳에 집터를 잡았나? 아니, 아니지. 한때 부를 날리던 집이니 그럴 리는 없고.”


은영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주완도 엉덩이를 떼려는데, 


“넌 나오지 말고, 이거나 잠깐 보관해라.”


은영은 주완에게 제 홍마노 비녀를 건네며, 다시 제자리에 앉힌다.


“왜 그러시오?”

“저 뱀들을 한번 멀리 치워봐야겠다. 넌 여기 앉아 좋아하는 약과나 실컷 먹고 있어라. 홍마노는 잃어버리면 내 손에 죽는다. 참, 유시 이전에는 제발가지 말라고 붙들어도 꺼져줄 테니 염려 붙들어 매고!”


주완은 공연히 찔리는 구석이 있어, 샐쭉하니 약과를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그러기를 잠시, 문득 궁금증이 일어 뚫린 창호지에 눈을 가까이 붙이는데, 이내 황급히 제 입을 틀어막는다. 홍안의 도령은 온데간데없이, 웬 노란 여우 한 마리가 은영의 소쿠리를 입에 물고 담장 위로 훌쩍 뛰어넘고 있는 게 아닌가. 


그야말로 귀신이 곡할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한편, 인적 드문 산기슭에 뱀들을 풀어주고 돌아온 여우는 박가의 담장에 앉아, 모로 고개를 기울였다. 업주가리인 까치둥지도 잘 있고, 숨어있던 뱀들까지 모조리 끄집어냈는데 집에서는 여전히 진득하고 기분 나쁜 기운 일색이었다. 


설마 했는데. 


여우가 혀를 차며 널따랗고 휑뎅그레한 만상의 집을 내려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사가의 집은 참 크구나.’


자연스레, 제가 살던 산 중턱의 초가가 떠올라 여우는 고개를 내저었다. 좁아터지고 당장에라도 무너질 것 같은 그곳은 이세 자신의 집이 될 수 없을 터이니 앞으로 익숙해져야 할 풍경을 눈에 담아 보고자 애쓴다.


그때, 담장 밖에서 뭔가가 강한 힘으로 여우의 꼬리를 잡아당겼다. 


여우의 심장이 쿵, 하며 몸뚱이와 함께 속절없이 뒤로 나자빠졌다.




계속

일단 써보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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