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와 늑대의 시간

 





화창한 하늘을 보며 아를렌은 웃었다.

며칠 전부터 꽃봉오리가 맺히기 시작하더니, 드디어 피었다.

 

흐드러지게 핀 벚꽃 아래에서 찻잎 색 소매를 흩날리며 주술사가 춤을 췄다.

 




만물이 움트는 봄이었다.

 

 

 

아를렌은 봄을 사랑하는 편은 아니었다.

꽃이 아름답기야 하다만은, 곧 다가올 여름을 생각하면 마냥 웃을 순 없었기에. 아를렌의 고향에서 여름은 그야말로 농번기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두피를 찢고 뇌까지 태워버리기로 작심한 태양이, 그늘 한 점 없는 넓은 평야에 작렬했다. 더위는 끔찍했다. 당시의 아를렌이 느끼기엔 그러했다.

 

그러나 탑의 봄은 달랐다.

 

기상 현상이랄 것이 딱히 없는 탑이었지만, 그래도 가끔 관리자들이 기분을 내기 위해 전환하는 계절이라는 것이 존재했다. 어느 층은 유난히 추웠고, 어느 층은 지금처럼 따듯해 꽃이 바다를 이루기도 했다. 에드안이 얼음이 잘 얼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이 층처럼.

 

아를렌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건 조금 높고 푸른 천장이었지만.

 

“하늘에 태양이 없다는 건 좋은 일인 것 같아, 브이.”

 

고향에서부터 가져온 검을 닦던 브이가 고개를 들고 아를렌을 기이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세상에, 아를렌.

 

“태양을 싫어하는 사람은 처음 봐.”

 

“덥잖아.”

 

단순한 대답에 브이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검 닦는 것을 중단하고, 브이는 나무 그늘에 숨어 있는 아를렌의 옆에 다가가 자리를 잡았다. 자비로운 관리자가 제 몸에 뿌리내리는 것을 허락한 선택받은 나무에 기대서 브이는

 

“그래도, 태양이 없었으면 우린 모두 존재하지도 못했을 거야. 하루 종일 밤인 건 조금 끔찍하지 않아? 빛이 있어서 내가 널 볼 수 있는 건데.”

 

라며, 다정하게 중얼거렸다. 아를렌은 훅 들어오는 브이의 말에 당황해 얼굴을 붉혔다. 브이의 한 없이 맑은 다정함에 괜히 틱틱대고 싶어진 아를렌은 들꽃 꺾기에 동참하며 부루퉁하게 말했다. 

 

"그거 지금 내 얼굴 보고 만났단 소리지?"

 

손가락 사이사이로 풀이 스치며 대지의 향이 배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전투하느라 피를 잔뜩 묻힌 손가락에 어울리지 않는 푸름이 물들었다. 두 사람 모두에게. 그 간극을 힘껏 느끼며 브이는 손가락에 무심하게 힘을 주고 뚜둑 소리와 함께 또 다른 꽃을 꺾었다. 이름 모를 하얀 들꽃은 햇살 한 줄기 받지 않고도 잘 자랐다. 탑의 생명체들이 어떻게 살아가는 것인지 도통 알 수가 없다고 브이는 생각했다. 푸른 꽃의 목을 매만지며 브이가 툴툴거렸다.

 

"그건 너무한 지적이네. 빛이 없었으면 내가 널 어떻게 발견했겠냐는 뜻이었는데. 그 어두컴컴한 동굴 속에서."

 

말을 마치며 브이는 들꽃의 목을 무심하게 땄다. 하나둘 모아 이제 한 아름이 된 푸른 들꽃을 품에 안고 브이는 줄기를 엮기 시작했다. 아를렌은 사랑과 기대로 부푼 가슴을 안고 브이의 어깨에 기댔다. 당연하다는 듯이 사랑을 요구하는 게 이렇게까지 사랑스러울 일인가. 브이는 봄이 끝나지 않기를 바라며 43층에 연정을 묻고 다음 층으로 갈 준비를 했다. 언젠가…. 그래, 언젠가 이 여정이 끝나면 이 봄의 들판에 다시 오자고.

 

 

그러나 그 날이 이리 빨리 올 줄 브이인들 알았으랴.

 

회임한 아를렌을 데리고 43층으로 돌아온 것은 그로부터 몇백 년 후였다. 이제는 브이도 태양이 싫었다. 끝도 없이 세상을 비추어 자신들의 행방을 왕에게 낱낱이 보고하는 그 빛이 싫었다. 백성을 위하는 척 가식을 떠는 태양이 싫었다. 삶을 주겠다 약속한 아내에게도 말 못한 비밀을 가진 채로, 브이는 닳아갔다. 유난히 버티기 힘들었던 겨울을 겨우 지내고 그들은 봄의 초입에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달의 그림자에 숨어 이동하기를 몇 달 째, 여전히 자비로운 관리자 품에 안겨 아를렌은 아이를 품었다.

 

하루 하루가 불안한 행복의 연속이었다. 태양은, 왕은 아를렌을 찾길 포기한 것처럼 보였다. 여전히 델피니움이 흐드러지게 핀 들판을 바라보며 아를렌은 아직 부풀지 않은 배를 끌어 안았다. 벚꽃은 지고 없었다.

 

달게 익은 과일을 베어물며 아를렌은 나무와 등을 맞대고 저 멀리 일하는 브이를 바라보았다. 관리자는 왕이 가장 사랑하나 가장 관심이 없는 존재가 되라고 조언했다. 브이와 아를렌은 이를 받아들였다. 그들은 태양의 백성 사이에 숨어 들었다. 

 

"브이!"

 

손을 들고 크게 흔들며 아를렌이 평범한 시골 아낙 같은 모양새로 웃었다. 웃통을 벗고 낫질을 하던 브이가 고개를 돌려 아를렌을 보았다. 사랑하는 아내의 발갛게 익은 뺨을 보며 브이는 처음 느껴보는 종류의 뿌듯함과 성취감을 느꼈다. 아마 탑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몇천여 년 전 이리 살다 흙이 되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랬다면 아를렌을 만나진 못했겠구나. 브이는 문을 연 자신의 선택에 후회 한 점 없었다. 몸의 노화를 느끼는 지금까지도.

 

탑에 태양은 없었으나 낮과 밤은 찾아왔다. 서서히 어둠이 내리며 해 없는 황혼이 찾아왔다.

 

아를렌의 고향에선 황혼을 개와 늑대의 시간이라고 불렀다. 어둑어둑해지는 하늘에 집에 돌아오는 것이 제가 매일 먹이를 주는 개일지, 저를 잡아 먹으려오는 늑대일지 분간이 가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다고 했다. 양피지에 한 방울 잉크가 떨어져 퍼지듯이 하늘은 순식간에 먹색으로 물들어갔다. 서산에 걸리는 해가 없는 황혼은 언제 보아도 지루하다고 아를렌은 생각했다. 브이는 오늘 마을 사람들과 심해어를 잡으러 간다고 했다. 아를렌은 턱을 괴고 태양 없는 노을과 그 밑에 바다처럼 너울거리는 밀밭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평화로웠고, 위태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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