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을 바라보는 서정원을 보던 순종이 얼굴 앞으로 손으로 휘휘 저었다. 요즘 서정원은 학교가 빨리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것처럼 보였다. 전에는 차라리 20교시까지 해서 집에 안 갔으면 좋겠다는 끔찍한 소리를 잘도 하더니만, 요즘은 종례를 하자마자 교실을 뛰쳐나가기 바빴다.

“너 누구 생겼지.”

“생기긴 뭐가 생겨.”

“아니라고?”

“어.”

“아닌데 학교 끝나자마자 뛰쳐나가?”

말을 안 하고 뒀다가는 계속 애인 타령을 할 것만 같아 서정원은 삐딱하게 턱을 괸 채 순종에게 그동안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우연히 놀이터에서 만난 열 살짜리 꼬마와 매일 만나 놀고 있다는 짧지만, 결코 얕지 않은 매일의 이야기를.

“그러니까 지금…. 매일 열 살짜리랑 논다는 거야? 놀이터에서?”

“매일 놀이터에만 가는 건 아냐. 어제는 만화방? 그런 데 갔는데 좋아하더라. 너 사촌동생 있지. 걘 뭐 좋아해? 내가 어린애랑 뭐 놀아 본 적이 있어야지.”

“…너 집 들어가기 싫은 건 알겠는데 그래도 어린애랑 매일 뭐 하는 거야. 차라리 나랑 어디 카페 가서 공부하자. 거긴 안 답답하잖아.”

이해를 바라고 한 말은 아니기에 서정원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다시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제가 학교가 끝나자마자 매일 뛰쳐나가는 이유는 너무나도 명확했다. 저보다 훨씬 빨리 학교가 끝나는 연준이 저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한동안 골목에서 힘들게 계속 서서 몇 시간씩 저를 기다리길래 카페 카드를 만들어 돈을 잔뜩 충전해 주고, 제 학교 앞 커다란 카페에 가서 기다리라고 말해 주었다. 그 뒤로 연준은 딸기주스나 딸기바나나 주스 같은 것을 마시면서 서정원을 기다렸다. 숙제를 하기도 하고, 또 책을 읽기도 하면서. 아마 지금도 저를 기다리면서 다리를 달랑달랑 흔들며 뭔가 달콤한 걸 마시고 있을 것이었다.

“나도 처음엔 그냥 귀찮았거든.”

“…….”

“그랬는데 걔는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다 끝까지 들어주고, 좋다고도 해 주고, 나랑 같이 있는 게 재밌다고도 해 주니까 나도 걔랑 있는 게 좋아졌어.”

“…….”

“걔도 집안 사정이 복잡한지 밤까지 집에 못 들어가고 밖에 있더라고. 떠도는 사람들끼리 그냥 내 발로 지옥에 들어가기 전에 잠깐 같이 있는 거야. 뭐 억지로 이해할 필요는 없어. 별로 안 필요해. 누군가의 이해 같은 거.”

조용한 순종을 흘끗 본 서정원의 눈이 커졌다. 순종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아, 왜 우는데.”

“…친구가 돼서 길에서 만난 초딩보다도 해 주는 게 없는 것 같아 미안해서.”

“됐어. 넌 학교에서 잘해 주잖아.”

“너한테 위로가 된다면 다행인데…. 너무 정 주지는 마. 정 너무 들면 너도 그렇고, 그 어린애한테는 더 상처가 될 수도 있으니까.”

“상처?”

“그러다가 졸업하고 대학 다른 데로 가고, 이사라도 가면 그땐 보기 힘들 거 아냐.”

순종의 말에 서정원은 잠시 충격에 빠진 사람처럼 멍하니 있다가 책상으로 시선을 뚝 떨어뜨렸다. 매일 연준과 보내는 그 몇 시간이 참 따뜻하고 포근해서 그 시간만 생각했지 미래 같은 건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지금의 함께 보내는 이 시간이 연준에게 상처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도 당연히 하지 못했다.

“끝까지 책임질 거 아니면 함부로 정 주면 안 돼.”

“…….”

“…화났어?”

“아니. 맞는 말이라서. 거기까진 생각 못했거든.”

따뜻함, 다정함, 웃음과 달콤함, 각진 모서리가 없는 부드럽고 편안한 시간. 어떻게 해야 연준을 더 많이 웃게 할 수 있을지 생각하느라 ‘책임’이라는 걸 떠올리지 못했다. 서정원은 한숨을 내쉬며 내내 책임에 대해 떠올렸다. 책임…. 책임. 제가 연준의 무엇을 책임질 수 있을까? 오다가다 길에서 만나 알게 된 그냥 아는 형 주제에.

“…….”

학교를 떠나게 되면 지금처럼 연준과 시간을 매일 보내지 못하게 될 것도 자명한 일이었다. 졸업하는 즉시 부모님을 보지 않아도 되는 곳으로 떠날 생각이었으니까.

책임…. 그리고 상처. 생각지 못한 무거움이 길게 기우는 오후의 빛과 함께 서정원을 파고들었다.


* * *


학교가 끝나자마자 카페로 달려간 서정원은 창가에 앉아 딸기주스를 마시고 있는 연준의 앞으로 가 앉았다. 교실에서부터 십 분을 내내 뛰었더니 숨이 찼다.

“정원이 형아!”

“하…. 숙제하고, 후우…. 있었어?”

“네에, 독후감 쓰고 있었어요…. 형아 얼른 주스 마시세요.”

제가 마시던 딸기주스 컵을 앞으로 내민 연준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서정원을 바라보았다. 서정원은 연준이 걱정하지 않도록 빨대를 살짝 물고 달착지근한 딸기주스를 한 모금 목 뒤로 넘겼다. 확실히 시원한 걸 마시니 좀 나았다.

“형아, 괜찮으세요?”

“응, 이제 괜찮아.”

“형아는 힘든데에 왜 매일매일 뛰어와요?”

“연준이 네가 혼자 오래 기다리는 게 싫으니까.”

“…저느은… 괜찮은데에….”

“난 걱정돼. 아직 어리잖아.”

서정원의 걱정이 싫지 않은지 연준이 작게 웃으며 다리를 앞뒤로 살짝 흔들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 누구도 해 주지 않던 걱정을 서정원은 늘 해 주었다. 보호라는 말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연준은 서정원에게 받는 보호의 느낌이 좋았다. 저를 걱정하고 살피면서 함께 있어 주는 서정원이 너무너무나 커 보이고 멋있어 보였다. 서정원은 연준이 아는 가장 멋진 어른이었다.

“형아가… 걱정 안 해도 되게… 빨리 크고 싶어요….”

“얼마나 크고 싶어?”

연준이 또박또박 한 글자씩 쓴 <으랏차차 도깨비죽>이라는 책의 독후감을 훑으며 웃은 서정원이 곰곰 생각에 잠긴 연준의 얼굴로 시선을 들었다.

“형아보다 크게 커서 저도오… 정원이 형아 지켜 주고 싶어요….”

“…….”

생각지 못한 대답에 서정원은 잠시 멍해졌다. 저보다 커져서 저를 지켜 주고 싶다니…. 연준이 그런 생각까지 하고 있을 줄은 몰랐기에 코끝이 다 찡해졌다.

“지켜 주는 게 뭔지 알아?”

“네에…. 무섭지 않게 해 주는 거….”

“연준이 진짜 똑똑하다. 그런 것도 다 알고.”

작게 헤헤 웃는 소리와 함께 연준이 얼른 공책을 덮었다. 서정원이 제가 쓴 독후감을 보고 있다는 걸 이제야 알아차린 이유였다. 숙제를 본 게 부끄러운지 귀가 빨개진 게 귀여웠다. 서정원은 손을 뻗어 작은 머리를 슥슥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연준은 귀가 빨개진 채 서정원을 보며 또 소리 내어 웃었다. 눈이 접히도록 활짝.

“그럼 연준이가 그만큼 크기 전까지는 내가….”

뒤에 이어질 말을 소리 내려던 서정원의 머릿속으로 순종의 말이 떠올랐다.

‘끝까지 책임질 거 아니면 함부로 정 주면 안 돼.’

책임…. 오후 내내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던 말이었는데 연준을 보자마자 또 다 잊고 웃고만 있었다니 어이가 없었다. 서정원은 가만히 제가 이을 다음 말을 기다리는 연준을 바라보았다.

“나는 네가 나처럼 크지 않았으면 좋겠어. 상처받는 거 싫어. 그냥 어릴 때를 떠올리면 많이 웃고, 많이 놀고…. 좋았던 기억만 잔뜩 있었으면 좋겠어. 그런데 난 너무 아무것도 아니잖아. 진짜 형도 아니고…. 그런 내가 널 지킬 수 있을까?”

말이 빠르기도 하고 열 살인 연준이 전부 바로 이해하기에는 조금 어려운 말이라 연준은 가만히 눈만 깜빡이며 서정원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해라도 한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

완벽한 이해에서 나온 끄덕임이 아니라는 걸 서정원은 알고 있었다. 저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제 마음을 연준이 어떻게 전부 이해해 답을 주겠는가.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그냥…. 그 대답을 따라가고 싶었다.

“정말? 내가 할 수 있을 것 같아?”

“네에…. 형아는 다 할 수 있어요. 정원이 형아는 착하고… 멋있고오, 또 힘도 세고, 돈이도 있고… 어, 잘생겼으니까아….”

웃음이 나오지 않는 상황에서도 저를 웃게 하는 연준을 보고 소리 내어 웃은 서정원이 공책 위로 손을 내밀었다.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서정원의 손을 맞잡은 연준의 작은 손이 온기를 나누어 주었다. 서정원은 저에게 전해지는 온기와 진짜 어른도 아닌 저를 믿는 그 맑은 눈동자, 그리고 저를 향하는 웃음에 손가락을 오므려 작은 손을 꼭 쥐었다. 그리고 대답을 마저 이었다.

“크면 나 꼭 지켜 줘. 그만큼 연준이 네가 클 때까지는….”

“…….”

“내가 지켜 줄게.”

연준이 밝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서정원도 웃었다. 밝고 맑은 연준의 웃음을 따라 책임감이 얹힌 결코 가볍지 않은 걸음을 기꺼이 옮기며.


* * *


연준과 만나 따뜻한 저녁과 밤을 함께 보낸 지 석 달이 지난 6월의 마지막 주의 어느 날, 서정원은 연준의 손등에 난 기다란 상처를 보았다. 그동안에도 손목에 손자국이 나 있다거나 팔에 멍이 든 것을 본 적은 있지만, 연준은 한 번도 그것에 대해 서정원에게 말을 해 준 적이 없었다. 그리고 집이 어디인지도 말해 주지 않았다. 그래서 늦은 시간에도 늘 연준을 끝까지 데려다주지 못해 늘 마음이 아팠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서정원은 제 눈치를 보면서 상처가 난 손을 테이블 아래로 내리는 연준을 보며 입을 열었다.

“왜 숨겨.”

“…형아… 화난 것 같아서요….”

연준의 말을 들은 뒤에야 서정원은 제가 인상을 쓰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구기고 있던 미간을 펴고 마음을 가다듬은 뒤 손을 뻗어 연준이 앉은 쪽 테이블 위를 똑똑 두드렸다.

“손 보여 줘. 다쳤어? 약 사올게.”

“…….”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안 해도 되는데…. 내가 알아야 연준이 너를 도와주고 지켜 줄 수 있잖아.”

“…….”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연준을 보며 서정원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옆에 약국이 있으니 얼른 가서 연고와 밴드를 사 올 생각이었다.

“옆에 약국 갔다 올게. 오 분도 안 걸릴 거야.”

서정원이 자리를 벗어나는 걸 멍하니 보던 연준이 의자를 뒤로 밀고 일어나 얼른 달려 서정원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카페 문을 여는 서정원의 허리를 뒤에서 와락 끌어안았다.

“…흐윽, 형아…. 잘못했어요, 말 안 해서어 잘못했어요….”

“연준아.”

화를 낸 건 아닌데 연준의 눈에는 제가 화가 나서 가 버리는 것처럼 보인 모양이었다. 제 허리를 필사적으로 끌어안고 우는 연준의 팔을 가볍게 푼 서정원이 뒤돌아 다리를 구부려 앉아 연준과 눈높이를 맞췄다. 그리고 저를 안고 있던 팔을 어쩔 줄 모른 채 벌벌 떨고 있는 연준에게 가만히 팔을 벌렸다. 눈물을 뚝뚝 흘리며 보던 연준이 울먹이며 서정원의 품으로 안겨 들었다.

너무 세게 안으면 부서질 것처럼 작은 몸을 조심스럽게 안은 서정원이 등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귓가에서 들리는 연준의 울음소리는 아주 작았다. 밖으로 나오는 게 아니라 안으로 어떻게든 숨기려는 것처럼. 서정원은 그대로 연준을 가볍게 안아 들고 몸을 세웠다. 그리고 자리로 가 한 손으로 연준의 책가방을 챙겨 제 가방과 같이 빈 어깨에 메고 카페를 나섰다.

“같이 약국 가서 연고 사고 저녁 먹으러 가자. 오늘 같이 스파게티 먹기로 했잖아. 피자 가게에 파는 치즈 녹아 있는 스파게티. 저번에 그거 맛있었다며.”

“…형아…. 집에 안 갈 거예요?”

“응. 왜, 내가 혼자 집에 가는 줄 알았어?”

“…화난 거 아니에요?”

“내가 왜 화가 나. 화 안 났어. 화난 게 아니라 손 다친 거 보니까 속상해서 그런 거야. 걱정돼서.”

어깨에 파묻고 있던 얼굴을 들어 다정한 서정원의 얼굴을 마주하던 연준이 다시 목을 끌어안으며 어깨 위로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 서정원이 약국 문을 열려는 순간 귓가로 내내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확인할 수는 없었던 일에 대한 소리가 작게 파고들었다.

“…제가 잘못해서… 고모한테… 맞았어요….”

약국 문손잡이를 쥔 서정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제가 손만 올려도 어깨를 움츠리고 겁을 먹는 걸 보면서 설마 하기는 했지만, 맞았다는 말을 직접 듣고 나니 화가 나 미칠 것만 같았다. 도대체 이 어리고 이 약한 애를 때릴 데가 어디 있다고 때린단 말인가. 욕이 터져 나오려는 걸 가까스로 누른 채 서정원은 약국 안으로 겨우 들어가 상처에 바르는 연고와 캐릭터가 그려진 밴드를 샀다. 그 와중에도 연준에게 뭐가 마음에 드나 물어봐서 토끼가 그려진 분홍색 밴드를 사서 교복 주머니 안에 욱여넣었다.

“연준아. 형네 집 갈래?”

“…형아 집이요? 제가 형아 집에 가도 돼요?”

“응. 오늘 아버지는 출장 가셔서 안 들어오실 거고, 어머니도…. 늦으실 거야. 오셔도 어차피 위엔 안 올라오셔서 만날 일도 없을 거고. 더운데 집에 가서 있다가 이따 집에 데려다줄게.”

“…….”

“오늘은 데려다주게 해 줘. 걱정돼.”

가만히 생각하듯 서정원을 보던 연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정원은 이제 연준이 뭔가 저에게 이야기해 줄 마음이 생겼다는 걸 눈치챘다.

“택시타고 얼른 가자. 피자는 가서 시켜 먹고.”

“네에, 형아 집에 가는 거 너무너무 좋아요…. 친구들이 집에 한 번도 안 가 봐서 가 보고 싶었어요. 어…. 형아가 친구는 아니지만….”

“왜 친구가 아냐. 우리도 친구지.”

“형아는… 저랑 친구 해도 괜찮아요?”

“응. 난 전부터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나만 그런 거야?”

서운하다는 듯 괜히 입술을 불퉁하게 내밀자 연준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저었다. 더 놀리고 싶은데 연준의 얼굴이 너무 귀여워 그만 웃음이 나와 버렸다. 영문을 알지도 못한 채 연준도 그냥 웃는 서정원을 따라 웃었다. 눈물이 흠뻑 묻은 눈을 접어가며 웃는 그 따뜻한 웃음소리는 택시가 와 두 사람 앞에 설 때까지 이어졌다.



서정원의 예상대로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집안일을 해 주시는 분이 너무 어린 연준을 보고 놀랐지만, 서정원은 대충 친구 동생인데 몇 시간 봐 주기로 했다고 덤덤히 말하고는 연준을 데리고 2층으로 올라갔다.

같이 먹기로 한 피자와 오븐 스파게티, 콜라까지 시켜 저녁을 먹고, 연준이 좋아하는 초콜릿 과자를 준 서정원은 제 침대 위에 앉아 아직도 연신 감탄을 터뜨리는 연준을 보며 웃었다.

“와아…. 형아 방은 진짜진짜 좋아요…. 좋은 냄새도 나고, 침대도 있고, 문도 튼튼하고….”

“문 튼튼한 건 왜?”

낯빛이 어두워지는 연준을 보며 거기도 뭔가 있다 생각한 서정원이 의자를 당겨 아예 침대 앞으로 가 앉았다. 그리고 연준을 바라보았다.

“나한테는 다 말해도 돼.”

“…고모한테… 형아도 혼날까 봐….”

“걱정하지 마. 나 아무한테도 안 혼나. 씨발, 내가 어린애나 때리는 그런 쓰레기들한테 왜 혼나.”

“…나쁜 말….”

“아, 미안.”

순간 욱해 섞여 나온 욕에 사과한 서정원이 연준을 기다리며 손등에 연고를 발라 주었다. 그리고 분홍색 귀여운 밴드도 예쁘게 붙여 주었다.

“…….”

저를 아프고 무섭게 하는 고모 식구들은 한 번도 저에게 약을 발라 준 적이 없었다. 그래서 연준은 손등에 붙은 토끼가 그려진 밴드를 물끄러미 보다가 서정원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기댈 곳이 없어 아프고 외로워도, 또 무섭고 지쳐도 늘 두 발로 서 있어야만 했던 연준의 다친 마음이, 외로운 시선이, 따뜻함을 그리워하다 지친 몸이 서정원에게로 기울었다.

서정원은 작게 열린 연준의 입에서 나오는 아프고 슬픈, 그리고 화가나 미칠 것 같은 말들을 끝까지 들었다.

“…….”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 고모 가족과 같이 살게 됐다는 것을 시작으로 연준은 아주 많은 이야기를 서정원에게 털어놓았다. 일찍 들어가면 고모에게 손바닥을 맞고, 사촌 형이 좋아하는 소시지를 먹으면 젓가락으로 손등을 맞았다고 했다. 손등에 생긴 부어오른 상처의 이유를 알게 된 서정원은 종국엔 자리에 앉아 있지 못하고 일어나 방을 마구 왔다 갔다 했다. 정말 화가 나서 미칠 것 같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밤마다 그 사촌 형이라는 놈이 할 이야기가 있다면서 문을 열어 보라고 문손잡이를 돌린다고 했다. 그제야 튼튼한 문을 좋다고 말한 연준이 이해가 갔다. 서정원은 당장이라도 그 집에 가 사촌 형이라는 놈을 죽여 버리고 싶었다.

“말해 줘서 고마워. 내가 생각한 것보다도 훨씬 심하네…. 씹….”

욕을 뱉으려던 서정원이 뒤에 나올 말을 삼키며 연준의 눈치를 보았다. 다행히 이것도 욕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지 연준은 초콜릿 과자를 먹고 있었다.

“하….”

서정원은 정말 미칠 것 같았다. 저 어린애가 그런 불행을 한꺼번에 겪었다는 것도 미치겠지만, 가장 미치겠는 건 당장 오늘 밤에 저 집으로 연준을 보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제가 아무리 지랄을 해도 저는 연준의 보호자도 아니고, 어른도 아니니까.

왜 저는 어른이 아닐까. 서정원은 울고 싶어졌다.

“그 형이라는 새끼…. 아니, 그게 네 방에 가려고 하는 거 고모는 몰라?”

“고모도 아세요…. 고모가 하지 말라고 형도 혼내서 요즘은 잘 안 그러기는 하는데…. 얼굴이 보는 게 너무 무서워요….”

그래도 불행 중 다행인 건 그 고모란 작자가 그런 쪽으로는 나름 단속을 한다는 것이었다. 최악의 상황에 그 집에 가서 협박을 하거나 딜을 해야 한다면 그 정신병자 같은 아들을 볼모 삼아 고모를 흔드는 게 제일 좋을 것 같았다. 서정원은 간만에 머리가 아주 빠르게 도는 것을 느끼며 다시 의자에 앉았다.

“아….”

다시 벌떡 일어난 서정원이 책상에 있는 서랍 마지막 칸을 열어 안에 든 휴대폰을 꺼내 충전기를 연결했다. 작년에 쓰던 건데 만일을 대비해 해지하지 않고, 따로 두고 있는 것이었다. 혹시라도 제 아버지가 화를 내며 제 휴대폰을 던지거나 뺏을 경우 따위를 대비해서 이런 서브 폰을 둔다는 게 웃기지도 않지만, 지금은 이게 있어 참 다행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휴대폰이 켜졌다. 서정원은 충분히 충전이 될 때까지 기다리다가 제 지금 쓰는 휴대폰 번호를 저장해 연준에게 주었다. 외부 소리를 녹음할 수 있는 앱도 홈 화면에 꺼내 어떻게 쓰는 건지 알려 주었다.

“자, 이걸 누르면 이렇게 들어가지지? 그리고 여기 빨간 버튼만 누르면 돼. 그럼 소리 나는 게 녹음되거든. 내가 녹음 한번 해 볼게.”

빨간 버튼을 누른 서정원이 저를 보고 있는 연준을 보며 싱긋 웃었다.

“연준아. 무서운 일이나 혼자 있기 힘들 때 언제든 전화해. 전화기 모양 그려진 거 누르면 내 번호 있으니까 그거만 누르면 돼. 그리고 형이 문밖에서 이상한 소리하고 문 열려고 할 때 여기 빨간 거 눌러서 녹음해. 끝나면 다시 한번 빨간 거 누르면 돼.”

연준이 듣고 알 수 있도록 천천히 말해 녹음한 서정원이 빨간 버튼을 한 번 더 눌러 음성을 저장했다. 그리고 재생해 주자 연준의 눈이 동그래졌다.

“와아…. 형아가 한 말이가 또 나와요.”

“응, 이거 듣고 따라서 하면 돼.”

“네에, 저 할 수 있어요. 형아가 하라는 대로 다 할 거예요.”

“응, 언제든 전화해. 알았지?”

“네에. 아…. 형아, 여기 또오 형아 목소리 다른 것도 들어갈 수 있어요?”

손보다도 큰 휴대폰을 두 손으로 든 채 설레는 얼굴을 한 연준을 보고 웃은 서정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엄…. 또 정원이 형아 목소리 해 주세요오…. 집에서도 형아 목소리 듣고 싶어요….”

“음…. 무슨 말을 하지.”

“연준이한테 하고 싶은 마알….”

“연준이한테 하고 싶은 말….”

서정원에게 배운 대로 연준이 빨간 버튼을 눌렀다. 화면이 아니라 연준의 얼굴을 보며 서정원이 다시 입을 열었다.

“연준아. 이제 너 진짜 혼자 아니야. 그러니까 아프거나 슬플 때 혼자 울지 말고, 참지 말고 나한테 다 말해 줘.”

“…형아는… 저 정말 안 싫어요?”

“그럼. 내가 왜 연준이 널 싫어해. 싫어하면 지켜 주고 싶은 마음이 들 수가 없어. 좋아하니까 그런 거지.”

“…저 좋아요?”

“응, 좋아해.”

가장 소중한 말이 담긴 순간 연준이 울먹였다. 그러면서도 서정원의 목소리가 지워지지 않도록 다시 빨간 버튼을 꾹 누른 다음 서정원에게 와락 안겨들었다. 침대 바로 앞에 의자가 있긴 하다지만 그래도 갑자기 확 안기는 연준에 놀란 서정원이 얼른 작은 몸을 안아 토닥였다. 한 번도 동생이 있는 사람을 부러워한 적이 없는데 오늘은 좀 부러웠다.

“저도오 아빠 엄마랑 같이… 정원이 형아가 세상에서 제일제일 좋아요….”

“정말?”

“네에….”

“고마워.”

서정원은 작은 연준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제 침대와 책장, 가구 같은 것들을 찬찬히 눈에 담았다. 그 익숙하고 정이 붙지 않던 것들이 오늘따라 참 따뜻하게 보였다.

이 삭막하고 적막한 집도 이렇게 포근하게 느껴질 수 있구나. 서정원이 웃었다. 부디 이 따뜻한 시간이 연준에게도 아주 오래도록 기억되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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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준이 생일 기념으로 올렸던 포근 멜로 뒤를 이제야 올리는 저를 용서하세요.. 그래도 겨울에 봐야 포근함을 더 잘 느낄 수 있으니까요(?) 저는 포근 멜로 쓸 때면 참 힐링도 되면서 이상하게 너무 슬퍼진답니다..🥺 기대면서 편히 지내야 할 나이에 기댈 곳이 없어 두 발로 내내 꼿꼿하게 서서 버티던 정원이와 연준이가 서로에게 어설프게나마 기대고, 기댈 수 있게 해 주는 게 너무 짠하지 않나요(과몰입)😭

오랜만에 올린 포근 멜로도 읽어 주셔서 넘 감사합니다. 그냥 中이라고 올리려고 했는데 한 편으로 안 끝날 것 같아서 中-1 이라고 써 보았습니다... 다음 편은 늦지 않게 가지고 올게요! 고모랑 현창이 조지고 둘이 같이 살아 보자고..!

클리셰 클 씨 @dearmycla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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