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ver Beach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2021) 홍굥 기반 
보기에 따라 극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Ah, love, let us be true
To one another!

아, 사랑이여, 우리 서로에게
진실해집시다!

- Mathew Arnold, "Dover Beach" - 


*


  "헨리, 뭐해요?"

  등 뒤에 와 닿는 부드러운 손길에 갑판에 서 있던 남자는 난간을 짚고 있던 손을 떼어내고 시선을 돌린다. 오래 전 휘황찬란한 조명 아래 열렀던 어느 화려한 사교 모임에서처럼, 연분홍색 드레스를 갖추어 입은 그의 연인―아니, 그의 아내―은 꿈결 같은 화사한 미소를 띠고서 그를 바라보고 있다. 그는 조용히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그녀가 내미는 샴페인 잔을 받아든다. 옅은 노란 빛 액체 안에서 톡톡 터지는 기포가 배 아래에서 부서지는 파도의 잔해와 닮아있다. 

  "바람을 좀 쐬고 있었어요."
  "바닷바람이 시원해요, 그렇죠?"
  "그렇네요. 배를 타 본 게 얼마만인지."
  "아, 당신은 그동안 런던에만 콕 박혀 있었으니까요. 대체 그 시커멓고 우울한 도시가 뭐가 좋다고."

  자못 뾰로통하게 볼을 부풀리는 모양새에 그는 웃음을 터트린다. 낮고 듣기 좋은 음색은 제자리에 오래 머무르지 않고 불어온 바람에 깨끗이 씻겨나간다. 배가 항구에서 멀어지고 난 뒤에도 꽤 한참 동안이나 그들을 따라와 주변을 맴돌던 갈매기 두어 쌍은 어느 샌가 사라지고 없다. 갓 결혼식을 올린 남녀를 제외하고 아무도 올라와보지 않는 갑판은 고요하다. 그는 팔을 뻗어 이제 막 자신의 아내가 된 여인의 허리를 부드럽게 감싸 안는다. 바람에 차갑게 식은 야회복이 바스락거리며 드레스의 고급스러운 원단과 얽혀든다. 여인은 열 살짜리 소녀처럼 웃음을 터트린다. 훤히 드러난 하얀 어깨가 들썩인다. 

  "난 런던이 좋은데. 그곳에서 당신을 만났잖아요?"
  "어머나, 그런 말도 할 줄 아는 줄은 몰랐네요, 박사님."
  "당신에게만 하는 말이죠."
  "하지만 우린 지금 프랑스로 향하고 있다고요. 프랑스! 장담컨대 런던보다 훨씬 재미있을 걸요."

  그 명랑한 목소리가 뒤이어 끝없는 이야기를 조잘조잘 늘어놓는 동안, 그의 시선은 그녀의 입술 언저리에 머무른다. 붉고 도톰한 입술이 기쁨에 가득 차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것을 그는 한동안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 입술 위로 가지런히 자리한 콧날도, 그보다 더 위에 별처럼 선명하게 빛나는 눈동자도, 그것을 가만히 덮었다가 사르르 말려 올라가는 그 연약한 깃털 같은 속눈썹도. 그러다가 눈이 마주치면, 그는 가지런히 눈꼬리를 접어 웃는다. 투닥거리며 가슴에 와닿는 장난스러운 손길도 마다하지 않는다.  

  "들었어요? 마르세이유에 가면요."
  "들었어요."
  "그 노을 지는 수평선에 대고 내게 사랑을 맹세해요."
  "그럴게요."

  소금기를 머금은 해협의 바람이 두 남녀의 뺨을 얄궂게 스친다. 그는 허리를 감싸 안았던 손을 옮겨 제게 평생을 의탁하기로 서약한 여인의 작은 얼굴을 어루만진다. 오른쪽 어깨 너머로 서서히 자취를 감추기 시작하는 그날의 태양이 마지막 빛줄기를 그들의 머리 위로 붉게 쏟아부을 때, 그는 상체를 숙여 그녀의 입술에 가만히 입 맞춘다. 그 흔한 소리 하나 나지 않는 고요한 입맞춤에서는 어렴풋하고 달콤한 샴페인 향이 난다. 


아, 사랑이여, 우리 서로에게 진실해집시다. 


  "헨리, 헨리. 내 말 들려요? 헨리!"

  늘어진 어깨를 세차게 잡아 흔드는 손길에, 헨리 지킬은 무거운 눈꺼풀을 어렵사리 들어올려 몇 차례 깜빡였다. 이곳이 어디였지? 금방이라도 꺼질 듯 얇게 가라앉았던 호흡은 돌연 박자를 잃고 위태롭게 흔들렸다. 죽어가는 연인을 무릎에 받쳐 안고 있던 엠마 커루의―그 모든 것은 성혼선언이 이루어지기 전에 일어난 일이었으므로 그녀는 아직 엠마 커루였다―눈에 매달려있던 눈물 한 방울이, 그 바람에 기어코 갈피를 잃고 툭 떨어졌다. 

  "엠마…."

  헨리 지킬은 습관처럼 입술을 달싹였지만, 그 버석하게 갈라진 입술을 겨우 비집고 나온 것은 거친 쇳소리뿐이었다. 꼴딱거리는 연인의 갈라진 목소리에 엠마 커루는 목이 메어오는 것도 잊고서 귀를 기울였다. 그녀의 하나뿐인 약혼자는 바닥에 쓰러진 채로 몇 차례 손을 들어올리려 시도하다가, 또 몇 차례 그녀의 이름을 부르려는 듯 입술을 벌렸다가, 종래에는 그 무엇도 하지 못하고 길게 눈만 감았다 떴다. 댄버스 커루의 외동딸은 남자의 힘 없이 늘어진 손을 대신 잡아 움켜쥐고는, 떨리는 입술을 억지로 움직여 그를 향해 속삭였다. 

  "아무 말도 하지 말아요, 헨리. 나는 괜찮아요, 괜찮아요."
  "…엠마…."
  "당신도 이제 괜찮아요. 우리 모두 괜찮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배를, 탔어요."

  울컥, 피를 토해낸 입술이 이어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엠마 커루는 당장에라도 그의 말을 막고 그를 병원으로 옮기고 싶은 심정을 간신히 억누르며, 유언이 될지도 모르는 연인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새액새액 흐르는 숨소리가 끊어졌다 이어지기를 반복했다. 젊은 연인의 새출발을 축복해주기 위해 그 자리에 모였던 사람들이 저마다의 이유로 모두 제자리에서 숨 죽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희미한 호흡소리는 유독 뚜렷하게 들렸다. 

  "배요, 헨리?"
  "마르세이유에…가기로 했잖아요? 도버 해협을 건너서…."

  아아.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양손으로 바투 잡아둔 손이 자꾸만 미끄러져 흘러내렸다. 그녀는 밧줄을 비끄러매는 것처럼 손가락을 깍지 껴, 남자의 손을 더욱 단단히 얽어매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 흘러넘쳐도 이상하지 않을 것처럼 그렁그렁하게 눈물이 차오른 눈동자와는 대조적으로, 그녀의 입술에도 어렴풋한 미소가 어렸다. 천천히 숨을 들이쉬고 그녀가 말했다. 

  "그래요, 맞아요. 도버 해협을 건너서. 따뜻한 해변에서 사랑을 나누기로 약속했었죠, 우리."
  "바람이 불고…파도가 치고…당신은 춤을 추네요, 엠마…."
  "춤이라고요? 오, 안 돼요, 헨리. 당신이 또 제 발을 밟을 거잖아요."
  "그 모습이 눈 부시게…아름다워요."

  그 말을 하는 헨리 지킬의 눈빛은 꿈을 꾸는 사람의 그것 같았다. 엠마 커루는 자신을 비질러간 그 눈길을 가만히 좇았다. 언제나 저 먼 곳에 닿아있는 푸른 눈동자. 


세상은 그토록 다채롭고, 아름답고, 새로운 꿈의 나라인 양 우리 앞에 펼쳐진 듯 했다가도


  "우리 춤 출래요?"

  그는 불쑥 그렇게 묻는다. 무도회의 시작을 알리는 뱃고동 소리가 길게 울리고, 젖은 바람이 여인의 머리칼을 요란하게 훑고 지나간 다음이다. 머리카락과 함께 흐드러진 드레스가 넘실대는 파도와 같이 아름다운 곡선을 만들어냈다. 여인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들고 있던 샴페인 잔을 떨어뜨리기라도 할 것처럼 허리를 꺾어가며 소리 높여 웃는다. 

  "맙소사, 춤이라고요, 헨리?"
  "그게 웃을 일인가."
  "당신은 춤이라면 엉터리잖아요. 이번에도 내 발을 밟으려고요?"
  "드레스만 밟을게요."

  흐음, 가느다란 콧소리가 여운을 남긴다. 새신부는 짐짓 고민하는 시늉을 하다가 결국 못 이기는 척 샴페인 잔을 내려놓는다. 그 가냘픈 잔을 조심스럽게 내려놓는 더 가냘픈 손가락에서 그는 한시도 눈을 떼지 못하고 바라본다. 만족스러운 미소가 오가고, 야회복 차림의 남자는 허리를 깊이 숙여 예의를 차린 뒤 손을 내민다. 그 손을 여인이 맞잡으면 안쪽 무도회장에서 건너오는 희미한 현악기의 선율에 맞추어 두 사람이 발을 움직인다.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가, 다시 한 걸음 뒤로 물러나고, 그는 여인을 이끌고 텅 빈 갑판을 크게 훌쩍 돌아본다. 그녀의 산호색 드레스가 노을 빛 아래에서 너울거린다. 남자는 그 넘실대는 치맛자락을 헤치고 나아가 상대의 허리를 바싹 당겨 안는다. 가지런한 구두를 신은 발끝이 스치고, 꼭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간다. 맞닿은 가슴에서 세차게 뛰는 서로의 심장 박동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거봐요, 또 발을 밟았잖아요."
  "이런, 용서를 빌려면 어떻게 해야하죠?"
  "내게 입 맞춰요."

  제법 진중한 얼굴로 그녀는 속삭인다. 그는 웃는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미세스 지킬."
  "미세스 지킬?"
  "미세스 지킬. 미세스 엠마 엘리스 마가렛 지킬."


기실 환희도, 사랑도, 빛도 없고, 확신도, 평화도, 고통에 대한 도움도 없는 곳이었잖소.

  시간이 지날수록 헨리 지킬의 눈꺼풀은 점점 더 느리게 오르내렸다. 그는 이제 시선을 반쯤 떨군 채, 자신을 향해 속삭이는 엠마 커루의 목소리만을 무력하게 듣는 중이었다. 그의 창백한 뺨을 그녀의 눈물이 흥건하게 적시는데도 누구하나 그것을 닦을 생각도, 닦을 엄두도 내지 못했다. 

  "헨리, 헨리. 내 말 들려요? 듣고 있어요?"

  그가 보일 듯 말 듯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은 온통 고요했고, 이제 그가 인식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엠마 커루의 속삭임뿐이었다. 깃털처럼 부드럽고, 오르페우스의 하프처럼 영롱하고, 새의 지저귐처럼 가느다란 그 음성에 그는 온전히 몸을 맡기고 숨을 쉬는 일에만 집중했다. 몸뚱어리를 자비 없이 꿰뚫었던 격렬한 통증도 어느덧 희미하게 잦아드는 것 같았다. 

  "결혼식이 끝나면 우리 곧장 떠나요. 마차를 타고 역으로 가서, 거기서 기차를 타고 도버로 가는 거죠. 그 다음에는 배를 타는 거예요."
  "……."
  "그곳에서는 연구도, 환자들도 생각하지 말아요. 오직 나만, 내 생각만 하겠다고 약속해요."
  "……."
  "여행에서 돌아오면 사과파이를 만들어요. 그리고는 아빠와 어터슨 씨를 초대해서 같이 여행담을 나누는 거예요. 어때요? 그럴싸하죠? 몇 년 뒤 우리의 아이들이 태어나면, 또 다시 같은 곳으로 여행을 가고요."

  그는 대답 대신 눈을 내리 감았다. 무겁게 내려앉은 눈자위 너머로 그와 그녀를 닮은 어린 아이들이 꺄르륵 웃음을 터트리며 달려가는 모습이 희미한 상으로 맺혔다. 그는 바구니 가득 꽃을 채워 담은 흑단 같이 검은 머리칼의 여자아이나, 제본한 자리가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낡아빠진 고서에 코를 박고 앉은 남자아이의 이름을 지어보려다 이내 그만 두었다. 엠마 커루의 목소리는 이제 고요한 자장가처럼 잦아들어, 그 선율만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을 뿐 그 내용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손가락을 움직여 맞잡은 손을 마지막으로 한 번 힘껏 쥐었다. 이름을 부르고 싶었으나, 입술이 움직이지 않았다. 

  아,  사랑이여, 우리 서로에게
  진실해집시다!  

  영국 명문가 집안의 외동딸 엠마 커루는 핏자국이 낭자한 이미 식어버린 입술에 광적으로 입을 맞춘다거나, 미동도 없이 늘어진 몸을 끌어안고 울부짓는 일 같은 것은 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오도카니 앉은 자세 그대로 자신의 친구였고, 연인이었고, 약혼자였고, 그리고 어쩌면 남편이 될 수도 있었던 남자의 식은 몸을 가만히 그러모아 보듬어 안았을 뿐이었다. 그곳에 있던 의사도, 변호사도, 신부도, 모두 그녀의 행동을 잠자코 지켜만 보았다. 엠마 커루가 품에서 헨리 지킬을 놓아줄 때까지 한참동안 아무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된 그 성당에는 도합 서른 다섯 명의 오르간 연주자와 성가대가 있었는데, 그들 중 진혼곡을 연주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하여 이들을 위로하는 곡조 하나 없었으므로, 그날 그 자리에서 헨리 지킬과 함께 살해당한 영혼들은 침묵 속에서 성전을 맴돌았다. 

  칼레로 향하는 배는 그날 밤에도 여지없이 도버 해협을 건넜다.
  아쉽게도 출항 시간을 맞추지 못한 한 쌍의 손님을 제외하고서. 


  Ah, love, let us be true
  To one another! for the world, which seems
  To lie before us like a land of dreams,
  So various, so beautiful, so new,
  Hath really neither joy, nor love, nor light,
  Nor certitude, nor peace, nor help for pain;
  And we are here as on a darkling plain
  Swept with confused alarms of struggle and flight,
  Where ignorant armies clash by night.

  아, 사랑이여, 우리 서로에게
  진실해집시다! 왜냐하면 세상은
  그토록 다채롭고, 아름답고, 새로운 꿈의 나라인 양
  우리 앞에 펼쳐진 듯했다가도
  기실 환희도, 사랑도, 빛도 없고,
  확신도, 평화도, 고통에 대한 도움도 없는 곳이었잖소;
  그리고 우리가 서 있는 이 어슴푸레한 평원은
  투쟁과 도피의 혼란한 경보가 휩쓸고 간 곳
  피아(彼我)를 모르는 군인들이 어둠 속에서 충돌하던 곳이었으니.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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