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7월 말 포스타입에 게재한 연성으로, 소장본 천사이야기 회지에 첫 번째로 실린 단편입니다. 소장본에 실린 교정/퇴고가 끝난 버전으로 재업로드합니다. 소장본 표지디자인 타르프님(tarf_design)


*새드 엔딩, 캐릭터사망요소 O







유중혁은 마왕이다.

어느 날 유중혁 앞에, 천사가 떨어졌다.




천사 이야기





남자에게 매일이란, 무료하고, 감흥 없고, 지루한 것이었다.

그는 하는 일 없이 성안을 돌아다니고, 하루가 지나가는 하늘의 색을 바라보고, 그 외에 나머지 시간 대부분을 그저 아무 일 없이 마왕좌魔王座 위에 앉아서 보냈다. 남자는 정말 하는 일이 없었다.

가끔 스타스트림이 시키는 만큼만 악한 일을 하고 그 외의 시간에는 틀어박혀 있었는데, 그것이 남자가 마왕치고 덜 사악해서는 아니었다. 그는 자기 영토에 들어온 인간들에게는 철저히 자비가 없었다. 몇 년마다 질리지도 않고 마왕을 토벌하겠다고 바깥에서 쳐들어오는 인간들을 찢어 죽였고 사지를 경계에 내걸었다. 마물을 많이 만들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인간을 어떻게 다루는지에 대해 규제를 걸지도 않았다. 알아서 씹어먹든 뜯어먹든 하라는 것이었다.

아주 옛날에는 남자도 ‘좀 더 부지런하게’ 진짜 마왕처럼 굴던 날이 있었다. 그때의 남자는 죽이고, 죽이고, 죽이고, 또 죽이다가, 어느 날 스타스트림의 개연성이 내려와 과도한 악행을 속박하는 바람에 결국 모든 일을 그만두었다. 그렇게 딱 백 년 정도를 구속되어 마왕의 영토 바깥으로 나오지 못하는 동안, 남자는 삶에 의욕을 완전히 잃었다.

애초에 무엇을 위해 태어났는지 잘 알 수 없는 삶이었다. 남자가 맨 처음 눈을 떠서 자신의 존재를 인식했을 때는 살해 욕구만 가득했고, 구속된 후 욕망이 죽은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은 폐허만이 보였다. 폐허 속에서 남자는 더는 무엇을 재건할 힘이 없었다. 죽이는 일을 금지당해서인지 의욕이 드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아주 간간이 무기력증이라는 단어 한 개를 곱씹으며 남자는 시간만 모래알처럼 흘려보냈다. 어두컴컴한 돌벽, 친숙한 마물의 울음소리, 어두운 성안, 아주 드물게 성 밖에서 들려오는 인간의 비명들. 남자의 세상은 빈틈이라 부를 것들이 없었다. ‘비어있지 않은 틈’만이 있었고, 그 외의 모든 부분은 애초에 비어있었으니까. 그것은 틈이라고 부르기엔 터무니없이 거대한 공허였다.

남자는 삶이 무료했다.

남자는 자신의 무료한 삶에 얼마 없는 무언가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매일 같은 곳에서 자고 일어나며, 매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채 같은 곳을 바라본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남자는 구석 모서리에 있는 쥐구멍의 크기까지도 퍽 상세히 알고 있었다. 그 벽에 얼룩이 어떻게 져 있는지, 벽을 이루는 돌들의 결이 어떤지, 어떤 감촉으로 피부에 닿아오는지도 너무 잘 알고 있어 눈을 감아도 똑같이 상상할 수 있었다. 눈을 뜨나 감으나 별 차이가 없었다. 남자는 자신의 무료한 삶에 얼마 없는 무언가들조차도 전혀 인식할 수 없었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던 것이다.

남자가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마왕은 어떻게 죽는가? 마왕은 어떤 순간에 죽을 수 있는가? 남자는 알 수가 없었다. 어느 날 남자는 칼로 자신의 심장을 찌르려고 노력해 보았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인가, 칼은 아주 단단한 철근에 가로막힌 듯 더 들어가지 않았다. 그날 온종일 가슴팍에 칼날을 눌러 넣어 온몸을 걸레짝으로 만들었던 남자는, 뒤늦게 상처를 싸매고 앓으면서도 깨달았다.


스타스트림이 원하지 않는 이상 남자는 죽지 않을 것이다.


남자는 이 세계에서 악의 균형을 유지하는 유일한 마왕이었으니까.

그걸 안 순간부터 남자의 꿈은 죽음이 되었다. 그것을 언제 스타스트림이 허락할지는 알 수 없었다. 남자는 죽음 외에는 다른 가능성을 생각해 보지 못했다. 그 누구도 남자에게 다른 방식으로 삶을 살아갈 방법을 알려주지 않았고, 그 누구도 남자의 삶에 어떤 다른 것을 부여해주질 않았다. 명명되지 않고 버려진 삶은, 제 주인조차도 줄 이름이나 사명을 몰라서 그렇게 무디어 갔다.


그러던 어느 날, 남자는 이상한 것을 보게 되었다.

눈 감아도 똑같이 그려낼 수 있을 정도로 뇌리에서 선명한 성안에,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새하얀 아이가 있었다.

아이는 자신이 천사라고 이야기했다.





남자가 인간을 발견한 건, 여느 때처럼 마왕좌魔王座에 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하니 있다가 정신을 차린 뒤였다. 해가 뉘엿뉘엿 져가는 때쯤이었다. 붉게 진 노을에, 성의 높은 창문들 사이로 시뻘겋고 노란빛이 비쳐 들어와 창문 모양대로 바닥에 흐르고 있었다. 남자는 눈을 깜박였다.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르게, 그 노을빛 사이 바닥에서 하얀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벌거벗은 새끼 인간이었다.

남자는 벌떡 일어나서 새끼 인간을 향해 걸어갔다. 이상한 일이었다. 인간은 분명 마왕의 영토에 떨어져서 살아남을 리가 없었고, 대부분은 경계에 발이라도 걸친 순간 마물들에게 갈기갈기 찢기었을 터였다. 그러나 새끼 인간은―남자는 새끼 상태의 인간이 몇 살이고, 몇 살에는 어느 정도의 체구를 갖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아주 작은 것 외에는 상처 하나 없이 건강해 보였고, 티끌 하나 묻지 않은 상태였다.

남자는 놀란 동시에 불안해졌다. 자신의 허락을 받기는커녕, 자신이 기척조차 알아채지 못했는데 생명체가 이 성안에 들어온 건 전례 없는 일이었다. 남자는 아주 자연스럽게 검을 빼 들었고, 내리칠 준비를 하며 새끼 인간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인간은 마치 자신의 다리가 익숙하지 않은 듯 조금 비틀거리다가 이내 자세를 잡고 바로 섰다. 당연히 죽일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이내 고개를 돌려 남자를 쳐다보고, 눈을 맞추더니, 이내 해사하게 웃으며 하는 말이, …….

유중혁, 나야!

유중혁이 천사를 죽이지 않은 이유는 단 한 가지,

그가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었기 때문이었다.

놀랍게도 유중혁은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새끼 인간이 자신을 유중혁이라고 부르자마자, 유중혁은 그것이 자신의 이름임을 바로 알아차렸다. 그 이름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그것보다 더 자신에게 어울리는 이름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터였다. 유중혁은 정말 오래전부터 불렸던 것처럼 익숙하게 그 이름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지금까지 자신이 마왕 ‘유중혁’임을 인식하지 못했던 것은, 아무도 그렇게 불러주지 않아서임을 깨달았다.

유중혁은 검을 든 채로 한참 동안 인간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인간 아이는 유중혁의 허리까지도 오지 않는 너무 작은 키였다. 유중혁의 황망한 표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이는 전혀 개의치 않는 표정이었다. 배시시 웃더니 양손을 뻗곤, 유중혁의 다리를 붙잡고―팔을 뻗어봤자 무릎께를 안는 게 인간 아이의 최선이었다―어눌하고 짧은 발음으로 말하는 것이다.

차자따…중혀기…….

유중혁은 제일 먼저, 이 인간 아이가 아직 발음 기관조차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았을 정도로 어리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 정도로 어렸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아주 정확하게 유중혁을 인식하고 있었으며, 마치 자신을 아는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유중혁은 어찌 된 일인가 생각하다가 이내 아이를 내려다보며 마왕에 걸맞게 최대한 근엄하게 말했다.

너는 누구지?

기껏 차린 엄숙함이 무안할 정도로 아이는 해맑았다.

김도짜!

그러더니 뒤에 덧붙이는 것이다.

…어…김돗…아니, 김, 독, 짜.

발음이 안 돼서 기어이 하나씩 끊어 다시 얘기해주는 것 같았다. 확실히, 아이가 발음하기엔 어려운 이름이었다. 게다가 특이했다. 유중혁은, 김독자, 하고 그 발음을 입안에서 굴려보았지만 이내 편안히 발성하기엔 걸리는 게 많은 발음임을 알았다. 들어본 적도 없는 이름이었고, 그런 이름 하나 가지고는 도대체 이 성 안에 불쑥 떨어진 아이의 정체를 추리할 수가 없었다. 아이는 이름의 발음만큼이나 거슬렸다. 유중혁은 질문을 바꿔야 함을 깨달았다.

너는 뭐지?

존재를 꿰뚫는 근원적이고 심오한 질문에 아이가 눈을 깜박였다. 그리고는 아주 잠시, 진지하게 생각하다가, 이내… 내뱉었다.

천사!

뭐?

중혀기 수호천사!





천사라는 존재는, 대대로 마왕에게 적이었다.

물론 유중혁은 마왕으로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천사를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유중혁은 이미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천사들은, 재수 없고, 위선적이며, 가식만 떠는 버러지들이다. 유중혁이 읽었던 몇 안 되는 책에도 기술되어 있는 사실이었다. 물론, 제일 재수 없는 것은 온갖 폼은 다 잡아대는 대천사들이었고, 그 외에 하급 천사들은 별 볼 일 없는 존재들이었다.

마왕성에 갇힌 몇백 년 동안, 할 일이 없던 유중혁은 가끔 천사들과 마족들에 관한 책을 읽기도 했다. 그렇기에 상당수의 내용을 잘 기억했는데, 그 중엔 수호천사에 대한 사실도 있긴 했다. 특정한 인간들에게 붙는 천사로, 그 인간의 행복과 번영을 기원하며 삶에 행운을 빌어주고, 종종 맡은 인생에 직접 개입하기도 하며, 해당 인간을 행복하게 해주는 목표를 달성하면 그 인간의 자식에게로 옮아 내려가거나 다른 인간에게 옮아가는 하급 관리직이었다.

유중혁은 어이가 없다는 눈길로 자신이 수호천사라고 주장하는 김독자를 내려다보았다. 수호천사라고? 미쳤나? 지금 이 어린 새끼가 마왕한테 자기가 천족의 후예라고 자랑하는 건가? 물론, 수호천사는 매우 흔한 존재였기에 영력이 없는 인간들이 인식하지 못한다뿐이지 쉽사리 찾아볼 수 있었다.

그러나 유중혁은 마왕으로 지내온 지난 천 년 동안 단 한 번도 마물에게도 수호천사가 붙는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마왕에게 수호천사라니?

유중혁은, 찬찬히 김독자를 훑어보았다. 김독자의 몸에서는 그 어떤 천사의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한 가지 특이한 것은 김독자에게 마물화가 걸리지 않는다는 점이었으니, 분명히 유중혁이 모르는 어떤 천족들의 개연성이 김독자에게 임해 있는 것은 분명했으나, 유중혁은 그냥 무시하기로 했다. 김독자가 천사의 조각 파편이라도 가졌다면 유중혁은 고통을 느꼈을 것이다. 유중혁의 마르고 거친 손이 서서히 김독자의 몸을 지나서 목 쪽으로 올라갔다.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고, 김독자는 아이답지 않게 차분한 표정이었다. 그 침착한 표정이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아서, 유중혁은 김독자의 목을 감싼 손아귀에 힘을 쥐었다.

…….

김독자의 발이 허공으로 딸려 올라갔다. 중력에 의해 몸이 짓눌리면서 유중혁의 손이 김독자의 목을 턱 가깝게 올려붙여 감쌌다. 김독자는 헐떡였지만, 눈에 눈물이 고여 흘러내릴 때까지 비명 하나 지르지 않고 유중혁을 올려다보았다. 침묵 속에서, 유중혁은 손안에서 펄떡이는 맥을 생생히 느꼈다. 지금껏 유중혁은 무언가를 죽일 땐 아무렇게나 마기를 터뜨렸지, 이렇게까지 살아 꿈틀거리는 장기를 직접 손으로 쥐어 본 적은 별로 없었다. 순간 유중혁은 기분이 확 나빠져서 손을 놓고 김독자를 패대기쳤다. 아이에게선 억 하는 소리 한 번 들리지 않았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김독자는 죽음에 다다르는 그 순간까지 공포 하나 없이, 유중혁을 동정하는 눈이었다. 김독자는 연신 기침을 하더니 일어나지도 못한 채 헐떡이며 다시 유중혁에게로 빌빌빌 기어왔다.

유중혁은 김독자를 그 자리에 내버려 두고 자신이 물러나기로 했다.

죽이기엔 뒷맛이 영 찝찝했고, 옆에 두자니 불쾌했다.

김독자는 유중혁이 버려둔 마왕성의 구석에서 빨빨거리며 잘 돌아다녔다. 그것은 조금 신기한 기분이었다. 어느 날 앞마당에 들어온 강아지 한 마리를 보는 기분으로, 유중혁은 김독자를 멀거니 바라보기만 했다. 유중혁은 조금만 아이가 가까이 와도 폭력을 행사하려 들었으므로 김독자는 감히 곁에 가까이 오진 못했고, 대신 성안의 구조라도 파악하려는 듯 여기저기서 잘도 나타났다. 위층에 올라갔다가, 지하에 내려갔다가, 언젠가는 있는지조차 잊어버렸던 창고 입구에서 눈에 띄기도 했다. 그렇게 몇 주가 지난 후엔 다시 김독자가 보이지 않았다. 흐릿한 머릿속에서 유중혁은 그 어린 인간이 점차 말라갔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유중혁은 왕좌에서 벌떡 일어나 성안을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드넓은 성안에서 쓰러져있는 김독자를 찾는 데에는 자그마치 이틀이 걸렸다. 유중혁은 복도 구석에서 손발과 입가에 피를 잔뜩 묻힌 채 정신을 잃은 김독자를 볼 수 있었다. 근처에는 아이가 배고픔을 피하려고 잡아먹었는지 살점이 갈기갈기 뜯긴 쥐의 가죽들이 널려 있었다. 유중혁은 마르고 경련하는 희멀건 몸을 내려다보다가, 결국 그를 들어 창고로 옮겼다.



유중혁에게는 음식이라는 것이 필요 없었다. 필요가 없었기에 요리를 해 본 적도 없었다. 그렇기에 만드는 시간은 꽤 오래 걸렸다. 유중혁은 한참이 지난 후에야 죽 비슷한 것을 만들어서 김독자의 입속에 흘려 넣을 수 있었다. 별로 잘 쓰지도 않던 침대에 어린 인간을 올려놓고서 그렇게 일정한 주기로 양분을 주었다. 유중혁에게는 식사라는 감각이 어색했기에 그것은 입을 통해 약을 투여하는 느낌과 조금 비슷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성과는 나쁘지 않았다. 김독자는 며칠이 지나서야 깨어났고, 일어나자마자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유중혁을 껴안았다. 유중혁은 눈물 콧물을 흘려가며 자신에게 코알라 새끼처럼 딱 달라붙은 김독자를 내려다보았다. 아무리 어린놈이라지만 인간의 몸은 너무 연약했다.

그날부터 유중혁은 김독자를 위한 인간 요리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혹시 모르는 일이었다. 대체로 수호천사가 가진 사명은 맡은 존재의 행복이었지만, 아주 드물게는 행복이 아닌 경우도 있었다. 나중에 큰 악행을 저지를 운명을 타고난 인간을 저지하기 위해 빠르게 죽음을 앞당기는 종류의 수호천사도 드물지만 존재했다. 모르지, 또 이런 하급 천사를 보내서 시비를 거는 게 천사들의 저열한 방식일 수도 있었다.

유중혁은 김독자를 침대에 앉혀놓은 채 일종의 심문을 진행 중이었다. 유중혁은 자기가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무서운 표정을 지은 채 김독자를 바라보았지만 아이는 여전히 해맑았다. 김독자는 한 번 그렇게 징징대고 나더니 그다음부터는 유중혁을 보기만 하면 환하게 웃어대어선 유중혁의 기분을 이상하게 만들었다. 그 모든 건 맘에 안 들었지만,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김독자뿐이었기에 유중혁은 다시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네 사명이 뭐지?

어린아이가 사명이라는 단어를 알아들을 리도 없었지만, 김독자는 또렷하게 대답했다.

중혀기 행복하게 해 주는 거!

…개소리.

유중혁은 눈앞의 조그만 인간을 때리고 싶은 충동을 꾸욱 참았다. 인간은 고작 다섯 살 남짓 되어 보였다. 아주 어리고 연약했고 쉽게 죽일 수 있었다. 행복이라고, 행복? 마왕한테 행복이 무엇인지 논하는 천사라니 우습기 짝이 없었다.

너,

급기야 유중혁은 다섯 살에게 철학적이고 본질적인 질문을 던졌다.

행복이 뭔진 아나?

응!

뭔데.

내가 내일부터 보여줄게!

그날부터 ‘자칭’ 천사 김독자는, 유중혁 행복하게 해 주기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말이 그렇다뿐이지 유중혁의 입장에선 그냥 김독자가 지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뿐이었다.



제일 처음은, 요리였다.

그것이 유중혁이 김독자가 온 이후로 제일 처음 시작한 일이었고, 유중혁이 하루 동안 할 만한 유일무이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김독자는 유중혁이 저녁을 만드는 걸 돕겠답시고 자기 얼굴보다도 큰 냄비를 들고 설치다가 다 만든 요리를 엎을 뻔했고, 그 와중에 또 발에 기름이 튀어선 유중혁을 귀찮게 했다. 유중혁은 자신이 갖고 있던 응급 치료용 물건들이 다 자신에게만 맞는 크기로 만들어진 걸 깨달았다. 유중혁은 낡은 가위로 삐죽삐죽 지저분하게 붕대를 잘라서 김독자의 발을 감쌌다. 유중혁의 거친 손에 잡힌 어린 인간의 발은 너무 작았다. 잘도 이 조그만 게… 돌아다니는군. 유중혁은 새삼스러워서 김독자를 내려다보았다.

중혀가, 소독 헤야 대…….

조그만 놈은 주제에 말도 많았고 심지어 말을 아주 논리적으로 잘했다. 인간의 나이로는 다섯 살이라고 주장하는데 다섯 살이 맞기나 한 건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유중혁이 아무리 인간들을 본 지 오래되었다고 해도, 이 정도로 어린 아이가 이 정도의 지능 수준을 가질 수 없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좋은 머리로 김독자가 하는 말이라고는, 중혀가 자기 전엔 이빨을 다까, 중혀가 이 성 청소하자, 중혀가 물 끌어, 중혀가 나 토마토 시러 정도의 내용이었기에 유중혁은 그에 대해 딱히 위험을 느끼지는 않았다. 그저, 신기했다.

유중혁은 괜스레 심술이 돋아 김독자의 발에다가 약을 들이붓듯 발랐다. 그래도 아이는 아인지 조금만 아파도 금세 눈에 눈물이 고였다. 김독자는 안 울려고 필사적으로 애를 썼지만, 유중혁의 눈에는 뻔히 다 보였다. 시뻘건 얼굴로 코를 들이키는 김독자를 내려다보던 유중혁은, 천천히 김독자의 눈가로 손가락을 뻗었다.

김독자가 프로젝트를 시작한 지 열흘,

유중혁은 김독자가 울 뻔하면 손가락으로 눈물을 닦아 주는 정도의 일은 할 수 있게 되었다. 큰 의미는 아니었고, 얼굴에 말라붙으면 지저분해 보인다는 걸 알아서,

……그저 신경 쓰여서일 뿐이었다.




한 마왕과 한 인간(자칭 천사)가 요리를 하면서 이것저것을 해 먹은 지 이 주가 지났다. 그때쯤 둘은 요리 재료들이 대충 어떻게 쓰이는지에 익숙해졌고, 특히 유중혁은 어떤 것을 어떻게 손질해야 하는지도 잘 알게 되었다. 김독자는 어떤 식기들이 자기가 손으로 들 수 있는지 아닌지를 알았고, 유중혁이 요리할 때 나대지 않고 그냥 가만히 앉아 기다리는 게 낫다는 걸 깨달았다. 두 사람은 말하지 않아도 적당히 일을 분담했다―물론 다섯 살의 김독자가 분담받은 일이라곤 요리하는 유중혁을 옆에서 지켜봐 주기 정도였다. 처음에 김독자는 유중혁을 졸졸 따라다니며 말을 걸었지만, 유중혁은 정신 사납다며 철저하게 거부했다.

어떻게든 분담해서 같이 차린 밥을 먹으며, 김독자는 유중혁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물었다.

답은 간단했다.

없다.

마왕은 인간드를 때려주기고 도륙하길 조아한다던데…안 조아헤?

…도대체.

도륙이라니? 인간 나이로 5살인 아이가 묻기에도, 천사가 묻기에도, 지나치게 반인륜적인 내용 아닌가. 유중혁은 잠시 김독자를 골려주기 위하여, 좋아한다고 대답할까 하다가 성미에 맞지 않아 그만두었다.

아니. 그런 건 일일 뿐이다. 마왕이 마왕으로서 존재하기 위해 하는 일.

유중혁에겐 그 이상의 감흥이 없었다.

그럼 중혀기는 일 말고 뭐 하는 거 조아해?

유중혁은 한참 입을 다물었다. 대답하기 싫었던 게 아니라, 정말로 대답할 말이 없었다. 김독자는 한참 유중혁의 표정을 살피더니 어린아이답지 않게 비장한 표정으로, 아주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지금부터 차자보자.

김독자는 날이 갈수록 유중혁에게 요구하는 게 많아졌다. 처음에 유중혁이 요리를 시작한 것은 그나마 유중혁이 스스로 저지른 일이라고 쳐도, 그다음부턴 김독자가 적극적으로 해달라고 떼를 쓰기 시작했다.

첫 번째는 책이었다. 유중혁은 책이라면 많다, 하고 무심한 얼굴로 대충 지하 서고 쪽을 손짓했지만 김독자는 고개를 저었다. 저거 재밋는 책 아니자나! 사실, 유중혁의 지하 서고에 있는 책들은 대부분 먼지가 퀴퀴하게 쌓여 있으며 읽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펼치자마자 어떤 종류의 마법이 발동되는 형태로, 사람들이 흔히 이야기하는 책이라기보단 부비트랩에 가까운 물건이었다. 유중혁은 단번에 김독자의 의미를 알아들었으나 귀찮아서 못 알아들은 척했다.

책이 다 똑같지.

새 책 사조!

시끄럽다. 어떻게 사는지도 모른다.

이내 유중혁은 ‘시끄럽다’고 한 말을 후회했다. 김독자가 그 말을 기가 막히게 잡아내더니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시끄럽게 굴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김독자는 성안을 뛰어다녔고, 함성을 지르고 바락바락거렸으며, 심지어는 유중혁의 지하 서고에 떨어져 있는 낡은 책장 일부분을 주워 접어 종이비행기를 만들기까지 했다. 애초에 애 손으로 접은 것이라 각도 딱 잡히지 않고 굉장히 흐늘흐늘하긴 했다. 김독자가 던지는 손의 힘 그대로 휙 던져지다 맥아리없이 떨어지는 정도의 비행기였지만, 그 날지도 못하는 물건을 유중혁의 뒤통수 바로 뒤에서 던지고 있다면 이야기가 달랐다. 유중혁은 구겨진 종이비행기와 함께 마왕좌에 파묻힌 채 이를 갈았다. 김독자는 목청이 터져라 소리를 질러대다가 목이 쉬면 잠시 조용해졌다가, 다시 또 목이 괜찮아지면 책을 사달라며 소리를 질렀다. 유중혁이 수천 년간 마왕으로 살면서 처음 들어보는 어린아이 투정이었다. 하루 종일 빽빽대는 김독자 때문에 시끄러워서 살 수가 없었다. 이윽고―여차하면 진짜 죽여버릴까 하는 심정으로―유중혁은 다시 입을 열었다.

대체 넌 뭐가 문젠가.

책.

도대체 그런 것이 왜 필요하지?

이야기를 일글 거야…….

쪼그만 게 무슨 이야기를 읽는다고? 유중혁은 어이가 없었지만, 종내에는 마왕이 천사한테 졌다. 유중혁은 휘하의 마물 중 그나마 지능이 있고 인간 흉내를 잘 내는 것들에게 구매를 시키기 시작했다. 처음에 그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가, 익숙해지자 곧잘 어디에선가 책뭉치와 인간의 잡동사니를 한가득 가져왔다. 유중혁이 앞뒤 없이 다짜고짜 인간들의 책, 인간들의 물건. 이라고만 말했으니 사 온 물건에는 경중도 논리도 실용성도 없었다. 우선 유중혁은 책 무더기를 김독자 앞에 갖다 주었다.

우움…….

김독자는 한참 책 무더기를 바라보더니, 이내 밝은 표정으로 책을 끌어 내렸다. 쌓인 책이 김독자의 키보다도 훨씬 높았으니 김독자는 거의 책더미 위를 기어오르듯 했다. 보다 못한 유중혁이 다가가서 김독자를 떼어내곤 자신이 하나씩 책을 내려놓았다.

이제 됐나?

유중혁이 몇 더미의 책을 김독자 앞에, 쉬이 볼 수 있는 높이로 내려놓곤 팔짱을 꼈다. 김독자는 한참을 생각하더니 표지와 책등까지 샅샅이 훑어보곤 유중혁을 쳐다보았다.

쭝혀가.

뭐.

일거줘.

난 인간 글자를 모른다.

…나도 모르는대…….

유중혁은 그동안 키운 필사의 인내심과 김독자에 대한 그간의 정이라는 것으로 살의를 참았다.

도대체 읽을 줄도 모르는데 왜 사달라고 했던 건가?

난 중혀기가 글자를 알 줄 아랏어…….

그러니까 이 천사인지 뭔지는 뻔뻔스럽게도 마왕한테 책을 내놓으라고 난리를 치더니 이젠 읽어주기까지 할 줄 알았댄다. 보통 물건을 사달라고 할 땐 뭐라도 해주는 것이 상도덕일 텐데, 뭐 주는 것도 없고 빌붙어서 밥이나 축내는 주제에 아주 지가 상전이다. (물론, 유중혁 본인도 부하들한테 인간의 책을 사 오라고 할 때 돈이 필요한지 아닌지 같은 건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아직도 유중혁은 그들이 어떻게 이 물건을 구해왔는지 잘 모른다.) 이 정도의 뻔뻔함이면 천사를 자칭할 양심이 있긴 한 건가?

중혀가.

왜.

글자 배워 줘…….

유중혁은 이마를 짚었다.

싫다.

그치만…….

뭐.

궁금하자나…….

뭐가.

책 내용이…….

유중혁은 고개를 저었다.

나는 안 궁금하다.

그리고는 구석에 두었던 인간들의 다른 잡동사니를 한 무더기 안아 들고 돌아왔다. 김독자라면 이럴 줄 알았다. 책 사오라고 시킬 때 다른 것도 아무거나 좀 가져와 보라고 한 것은 결과적으로 옳은 판단이었다. 김독자의 눈이 반짝이는 걸 보며 유중혁은 일부러 그 앞에서 한 보따리를 풀었다. 챙강챙강, 투두두둑, 여러 물건이 마왕성의 돌바닥에 끌리는 소리를 내며 와르르 흩어졌다. 물건들은 각양각색이었다. 어떤 것은 줄이 달려 있었고 어떤 것은 나무, 어떤 것은 돌 같은 걸로 만들어져 있었다. 어떤 것은 반질반질하고 가볍고, 어떤 건 무거웠다. 유중혁은 이것들이 무슨 물건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고 그건 김독자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네가 원하는 게 있나?

모르겟는대…….

아무리 봐도 가져온 물건들 자체를 잘 모르겠다는 이야기 같았다.

대체 너는 아는 게 뭔가?

유중혁이 조금 짜증을 냈지만, 김독자는 바닥에 쏟아진 물건들을 제대로 놓으려고 노력하며 웅얼거렸다.

내가 너 찻아오느라 기억을 마니 일어가지구…….

유중혁은 그 말뜻이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한참 김독자가 발발대며 물건들 사이를 돌아다니는 것을 보던 유중혁은, 무더기 속에서 금색으로 된 구부러진 물건 하나를 들어 올렸다. 금속성의 소리 같은 게 났는데, 금으로 된 데다가 반짝거리는 걸 보니 장식품인 것 같기도 하고…그런데 몸에 다는 장식품이라기엔 너무 커다랗고 모양도 이상하고 어디 붙일 데도 없고…….

이건 뭐지?

우움…….

김독자, 너도 모르나?

김독자는 자기 머리통보다도 큰 그 물건을 들고 한참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힘이 부족했는지, 손이 미끄러진 건지, 쥐고 있던 물건을 떨어뜨렸다. 물건이 떨어지면서 답지 않게―속이 비어있었나 보다―와장창 요란하고 특이한 소리를 냈다. 유중혁은 김독자가 발이라도 찧었을까 봐 재빠르게 다가갔지만, 김독자의 얼굴에는 아파하는 기색이 없었다. 아슬아슬하게 발에는 떨어지지 않은 표정이었다. 김독자는 또다시 어린아이답지 않게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방금 전에 들은 소리에 뭔가가 고무된 듯한 표정이었다. 아이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이거, 먼지 아라보자.

어떻게 알아보지?

유중혁이 무심코 던진 의문에, 김독자는 의기양양하게 유중혁을 쳐다보았다. 걸렸다, 는 표정이었다.

중혀가, 글자 배울레?

싫다.

책에 써 잇을지도 모르자나.

우리는 책을 못 읽는다.

배우자!

네가?

아니 중혀기가!

그러니까 결국 다시 네가 글자를 배워서 책을 읽어줘라, 이 소리였다. 유중혁은 있는 대로 눈에 힘을 주어 김독자를 노려보았다. 보통의 인간이었으면 이미 사지를 벌벌 떨며 도망갔을 눈빛이었다. 그러나 김독자는 당당했다. 김독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유중혁의 시선을 맞받아 보았다. 유중혁은 진심으로 김독자가 짜증 나기 시작했다. 김독자는 어디서 나타나선 유중혁을 귀찮게 만들었고, 자꾸 이상한 일을 시키고, 말도 안 되는 걸 요구한다. 이 물건의 이름이 유중혁이든 김독자든 마왕이든 무엇이든, 유중혁에게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중혀가, 응?

진심으로 유중혁은 그 이름을 알고 싶지도 않았다.

중혀가!

알고 싶지 않았다…

…젠장.

일주일 후, 그들은 그게 트럼펫이라는 것을 알았다.





유중혁은 일주일 만에 인간들의 글자를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김독자는 유중혁이 빠르다고 칭찬했지만, 유중혁으로서는 인간들이 대체로 얼마 만에 글자를 배우는지 알 수가 없으니 빠른지 느린지도 알 수 없었다. 무엇보다 유중혁은 그 일주일 내내 글자를 익히는 일에만 몰두할 수 있을 정도로 시간이 남아돌았고 할 일이 없었으니, 만일 일주일보다 더 오랜 기간이 걸렸다면 고매한 마왕의 자존심이 상했을 것이다.

일주일 동안 마왕이 한 일은 종이접기 책을 읽으며 김독자가 종이비행기를 제대로 접을 수 있도록 도와주기, 요리를 해서 김독자랑 먹기, 글씨를 배우고 김독자한테도 가르쳐주기가 전부였다. 김독자는 종종 글씨를 배우고 있는 유중혁의 옆에 와서는 한참을 바라보았다. 그때만큼은 김독자도 유중혁을 방해하지 않았다. 놀아달라고 매달리거나 종이비행기를 날리지도 않았고, 무작정 이야기를 하며 떼를 쓰지도 않았다. 그것이 아이치고는 굉장히 기묘하다는 것을 유중혁은 그때까지도 잘 몰랐다. 한참 후에야 김독자가 답지 않게 조용하다는 걸 알아차린 유중혁이 글자 책에서 고개를 떼었을 때, 김독자는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그 표정이 묘하게 낯설어서 유중혁은 김독자를 쳐다보았다.

왜 웃나?

아니, 기특해서.

기특하다는 말은 유중혁이 마왕으로 살면서 전혀 들어 본 적이 없는 단어였다. 유중혁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으나 대충 발음과 어감상 ‘기뻐서’와 비슷한 말이겠거니 생각했다. 기특해하고 있는 김독자는 유중혁을 전혀 방해하지 않았으니, 유중혁은 앞으로도 김독자가 계속 그렇게 느꼈으면 좋겠다 싶었다.

어느 정도 글이 익숙해지자 유중혁은 김독자를 위해 책을 읽어주었다. 김독자는 마치 책의 내용을 알고 있었다는 듯 유중혁이 무슨 책을 읽어도 고개를 끄덕였고, 진지하게 들었으며, 가끔은 내용에 대해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유중혁이 어떤 새에 대한 사전을 읽어주면, 중혁아 너는 이 새 봤어? 이거랑 비슷한 건 성에 없었어? 중혁아 그거 다시 한번 읽어줘. 하는 식으로 김독자는 책에 대한 요청이 많았다. 유중혁은 김독자가 요구하는 대로 했다. 커다란 키의 마왕이 검은 로브를 두르고 앉아 무서운 표정으로 왕관앵무의 울음소리는 삐요오오 삐요오, 같은 문장을 읽고 있는 모습은 굉장히 진귀한 것이었으나 구경할 사람은 김독자밖에 없었고, 김독자는 마냥 즐거워했다. 중혁아 그 대목 한 번만 더 읽어주라. 그럼 유중혁은 또다시 왕관앵무의 울음소리는 삐요오오 삐요오, 같은 문장을 고저 없이 읽었다. 김독자는 진중한 유중혁의 목소리에 깔깔깔 웃었다. 유중혁은 김독자가 왜 웃는지 알 수가 없어서 미간을 찌푸렸다. 김독자는 유중혁이 얼굴을 찌푸리는 것으로 모든 감정표현을 대변한다는 것을 깨닫고, 제 짧은 팔을 뻗어 유중혁의 미간에 손가락을 갖다 대었다.

중혀가.

뭔가.

아프로는 사람이 웃고 있으면, 너도 웃는 거야.

유중혁은 또다시 습관적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 이거 말고. 김독자가 부드러운 손으로 유중혁의 이마를 꾹꾹 누르더니, 유중혁의 양 입꼬리에 제 양 검지를 갖다 대어 살짝 올렸다.

이렇게.

유중혁의 웃음은 애매했다. 살아생전 웃는 표정이라곤 한 번도 지어보지 않은 사람 같았다. 김독자는 유중혁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괜차나. 배우면 돼. 유중혁은 누가 누구를 가르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실상, 김독자는 그 모든 것을 유중혁에게 가르치고 있었다.

둘이서 인간 세상에서 구해왔던 책 무더기를 거의 다 읽고 또 읽었으며, 가져온 잡동사니도 하나둘 사용해보고 질려가던 즈음이었다. 성 밖에서는 몇 번의 계절이 지나갔는지도 알기 어려웠다. 그러나 이제 유중혁은 김독자의 얼굴에서 땀이 송골송골 맺히고 쉽게 피부가 붉어지며 힘들어하면 여름이라는 걸 알았고, 나무들이 붉게 변하여 잎을 떨어뜨리면 가을이라는 걸 알았다. 하얀 눈이 내리고 추워지면 겨울이고, 겨울 다음에는 봄이 올 거라는 사실도 알았다. 왕관앵무가 흰색, 회색, 여린 노란색이 있으며 뺨이 붉다는 것도 알았다. 회중시계라는 물건은 하루의 해가 뜨고 지는 시기를 알기 위해 인간들이 사용하며, 거기에 태엽을 잘 감아줘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런 많은 사실을 알고 나자 유중혁은 자신에게 없던 무언가가 많이 생긴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이쯤 하면 이제 충분한 것 같았다. 유중혁은 이제 가진 게 제법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김독자는 만족하지 않았고 멈추지도 않았다. 김독자가 책 다음으로 요구한 것은, 꽃이었다.

중혁아, 나 꽃 사줘.

이제는 김독자의 발성 기관도 잘 단련되었는지 제법 말하는 발음이 정확했다. 더욱 또렷한 목소리로 김독자는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요구하고 있었다. 너무 단호해서 문득, 그러지, 하고 대답하려고 했던 유중혁은 하려던 말을 멈췄다. 그걸 왜, 하고 유중혁은 생각했다. 지천에 널려 있는 게 식물인데 그걸 왜 돈 주고 사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당장 마왕성 뒤뜰만 나가 봐도 잡초들 사이 피어오른 야생초가 잔뜩이었다. 구해오라고 시키면 못 구할 것도 없었겠지만 유중혁은 만사가 귀찮았다.

싫다.

그러나 김독자가 갑자기 숨을 흡, 하고 들이켰다. 유중혁은 김독자가 무엇을 하는 건지 빤히 보다가 이내 그것이 목청이 터져라 소리를 지르기 위해 준비한 것임을 알았다. 또다시 지옥의 떼쓰기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유중혁은 곧바로 미간을 찌푸렸고, 그리고, 이틀 만에 원예 화훼용품 꾸러미를 마왕성 바닥에 풀어놓았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냥 유중혁은 시끄러운 게 제일 싫었다.





꽃씨를 사주자, 그날부터 김독자는 어린이용 모종삽을 들고 열심히 밭을 갈고 씨를 심기 시작했다. 유중혁은 인간들이 하는 일이 정말 다 부질없다고 생각했다. 저렇게 땅을 파헤치고 땀 흘려 수고를 하지 않아도 식물은 알아서 자라기 마련이었다. 굳이 어떤 종류의 꽃을 인위적으로 보고 싶어서 밭을 만들고 무언가를 기르다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햇볕이 잘 드는 날 한낮에 김독자는 모자를 쓰고 수건까지 두르곤 검은 흙 위를 빨빨거리며 돌아다녔다. 부하들이 뿌려놓은 흙은 기존 뒤뜰의 흙보다 냄새가 심하게 진동했고, 발에 밟히며 바작바작 부스러지고 다져지는 감각이 선명했다. 오랫동안 원래 있어와서 이미 익숙한 땅의 감촉과는 또 달랐다. 유중혁은 그 흙을 밟고 서선 땀을 뻘뻘 흘리는 김독자를 한참 동안 쳐다보았다. 김독자가 예전보단 많이 자라 몸이 건강해진 건 알았지만 여전히 김독자는 마르고 약했고, 지금 저 얼굴은 그렇게 싫어하던 토마토만큼이나 시뻘게져 있었다. 유중혁은 입을 안 열 수가 없었다.

김독자, 씨앗은 어차피 자라면 다시 시들고 시들면 다시 자랄 뿐이다.

맞아.

근데 거기에 무슨 의미가…….

마치 사람 같지?

김독자는 드물게 유중혁의 말을 끊었다. 흙 속으로 손가락을 밀어 넣고, 씨앗 하나를 집어넣으며 김독자의 표정은 누구보다 진지했다.

어차피 사람도 태어나고 죽잖아. 다 부질없지?

유중혁은 입을 다물었다. 유중혁이 할 만한 이야기를 김독자가 먼저 하고 있다 보니 유중혁이 할 말이 없었다. 양손으로 흙을 모아 덮는 흰 손등을 바라보던 유중혁은 이내 그 옆으로 가 쪼그리고 앉았다.

근데 있잖아,

김독자는 제 옆에 쭈그리고 앉은 유중혁을 보고 씨익 웃으며 삽을 건넸다.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이었다.

새싹이 트기 시작하면, 신기할 거야.

그게 단가?

그리고 자라서 잎을 많이 내면, 경이로울 거야.

그리고?

그리고 꽃을 내면, 예쁠 거고.

…….

그리고, 열매가 맺히면 감탄이 나오겠지. 그러고는…또, 걔들은 다 죽을 거야.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다는 듯이. 그러니까…….

김독자는 유중혁이 파낸 곳에 또다시 씨앗 한 개를 넣고 흙을 꾹꾹 다져 밟았다. 그리고는 재빠르게 뒤쪽으로 뛰어갔다. 제 몸만 한 물뿌리개를 낑낑대며 들고 오면서 김독자는 말을 이었다.

읏챠, 정말, 부질, 없는데……!

유중혁은 재빨리 김독자에게서 물뿌리개를 받아들었다. 그새 손잡이 모양으로 새빨개진 손을 털며 김독자는 유중혁을 쳐다보았다.

근데 그 순간순간은 어쨌든 예쁠 거야, 잠깐이라도.

유중혁은 그다지 동의할 수 없었다. 유중혁은 너무 오랜 세월을 살아온 마왕이었으며, 모든 시간의 흐름에 잔인하게 짓눌리며 살기 위해 순간의 감정을 버린 존재였다. 찰나 사라질 것들에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하면 아파지는 게 당연했다. 아주 오랜 세월을 살아온 마왕에게 김독자의 가치관은 잔인하고 폭력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필 유중혁이 그 말을 듣는 바로 그 순간만큼은,

그거면 됐잖아?

어쨌든 김독자가 예쁘게 웃고 있어서, 유중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심은 사과나무의 새싹이 자라기 시작했다.

하루, 이틀, 일주일간 소식이 없더니 급작스레 비가 내린 다음 날 여기저기서 초록색 싹이 머리를 들어 올렸다. 김독자는 유중혁의 손을 감싸 쥐며 밭 한가운데로 유중혁을 잡아끌었다. 유중혁은 기껏 심은 곳에 왜 들어가나, 주변에서 보지 싶었지만, 김독자는 굳이 굳이 유중혁의 다리를 잡아당겨서, 좀 조심히 걸어, 새싹이 밟히잖아, 다리 들어, 내려, 발 세워, 온갖 명령을 해가며 유중혁을 새싹들 사이에 앉히는 데 성공했다.

뭐 하라는 거지?

보여?

마왕의 시력으로는 멀리서도 새싹들의 모양은 잘 보였다.

원래 보였다.

그럼 만져 봐.

김독자는 마치 수업이라도 하듯 유중혁에게 새싹을 만지게 했다. 유중혁은 하나쯤 잡아 뽑아보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김독자가 어떤 난동을 부릴지 몰라서 마지못해 새싹을 쓰다듬었다. 굳은살이 배긴 손가락 끝에 간질간질한 것이 느껴졌다. 거칠게 막 피어오른 첫 떡잎의 울퉁불퉁한 잎맥과 말린 잎의 질감이 희미하게 스쳐 지나갔다. 그때껏 유중혁은 자신이 피어오르는 풀들은 지겹도록 보았고 또 알고 있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유중혁은 자신이 그 풀들을 처음 만져본다는, 아니 어쩌면 예전에도 만진 적이 있었으나 정말 잊어버려서 처음이나 다름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김독자의 생물 교실은 계속 이어졌다. 처음의 모양새는 이끄는 김독자가 선생님이었는데, 가르치는 건 또 유중혁의 몫이 되었다. 이번에 유중혁은 식물도감을 독파해야 했고, 도감을 뒤지고 뒤져서 그것들이 풀이 아니라 나무의 새싹에 가깝다는 것을 알았다. 유중혁은 그 사실을 김독자에게 알려주고 계속해서 식물도감을 읽었다. 그리고 씨앗을 너무 좁은 곳에, 너무 많이 가깝게 심었다는 것도 알았고, 뿌린 것들 셋 중 하나 정도는 아마 죽을 것이라는 사실도 알았으나 입을 다물었다.

원래 살아있는 것들은 너무 긴밀히 붙으면 서로를 죽이는 모양이다.

그러나 그걸 김독자에게 알려준다고 해서 김독자가 그 사실을 새로워 할 것 같지도 않았으며, 그것은 김독자를 만족스럽게 할 사실조차 아닌 것 같았다. 유중혁은 드디어 사실이지만 말하지 않아도 좋을, 말하지 않는 게 더 좋을 것과 말해야 할 것을 조금이나마 구분하고 있었다. 김독자는 그 모든 변화를 당연스레 기다리고 있었고, 굳이 그 현상에 이름을 붙이지는 않았다.

그래서 유중혁은 자신이 하고 있는 것의 이름이 ‘배려’라는 것을,

아주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중혁아, 이 꽃의 꽃말이 뭔지 알아?

김독자는 호기심이 많은 아이였다. 유중혁에게 노상 묻는 것이 많았다. 인간들이 부여한 쓸데없는 의미들, 꽃말이나 별자리, 삶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와 시, 노래들, 사랑에 대한 환상과 가족이나 우정 따위의 개념들에 대하여 김독자는 끊임없이 묻고 또 물었다. 아니, 사실 김독자는 그 모든 것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김독자는 묻기를 멈추지 않았다. 유중혁은 시종일관 인간들의 세계에서 사 온 백과사전에 적힌 대로만 대답했다. 저것은 북극성이다. 그건 원래 음유시인들이 부르던 노래인데, 옛날에는 시였다고 한다. 그건 부부끼리 쓰는 호칭이라더군. 아니다, 그건 실제 이야기가 아니라 소문이라고 한다.

사실만 나열하던 답변들은 김독자가 같은 질문을 끊임없이 반복하자 끝끝내 사족을 달고 나오기 시작했다.

저번에도 물었던 이야기다. 너는 지루한 이야기를 왜 또 묻는 거지?

저번에 이야기했던 것과 비슷하지 않나? 나는 의미가 없는 것 같다.

뒷말에 희미하게 묻어나오는 유중혁의 감상을 들을 때마다 김독자는 즐거워했다.

지루해 중혁아? 왜 그렇게 생각했어?

유중혁은 김독자가 ‘왜’를 내놓을 때마다 세상에서 제일 짜증 나는 것에 맞닥뜨린 얼굴로 김독자를 쳐다보았으나, 김독자는 멈추지 않았다. 김독자는 자신이 많은 것들을 알았어도, 여기에 오며 많은 기억을 잃어버렸다고 주장했으나 때때로 유중혁은 김독자가 이미 모든 것을 다 기억해냈다고 느꼈다. 그래도 유중혁은 성실히 답을 뱉었다. 정보 교환이 전혀 되지 않는 말들임을 잘 알았다. 그러나 주고받음을 모두 쓸모없다고 여기기엔, 유중혁은 어느새 김독자와의 ‘대화’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가끔은 김독자의 번거로움이 유중혁의 인내심을 넘을 때가 있었다. 유중혁은 그럴 때마다 죽여버리겠다는 말을 자주 했다. 아이의 정서보호니 뭐니 하는 것은 인간들의 개념이었던데다가, 김독자가 열 살이라고 믿기에는 너무 말이 안 되게 맹랑한 아이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김독자는 똑똑하고 영특했으며, 호기심이 많았고 유중혁에게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었다. 종종 유중혁은 김독자가 자신한테 그렇게까지 개기는 이유가, 마왕이라는 게 얼마나 인간들에게 무서운 존재인지 김독자가 몰라도 너무 몰라서 그러는 것이 아닐까 했다. 그러나, 쥐를 뜯어먹기까지 성안에서 버려졌던 김독자, 유중혁에게 목을 졸렸던 김독자를 생각해 보면 그 어떤 위협을 하더라도 물러날 가능성은 없는 것이 자명했다.

이쯤 되면 김독자의 존재를 다시 한번 의심할 법도 했는데, 유중혁은 한 일 년간 새싹에 물을 주고 새로운 요리를 개발하고 성안을 청소하며 책을 읽느라 정신이 없어서 아이를 심문하길 자주 잊어버렸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것은 아니었지만, 기억하기론 거의 몇천 년을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왕좌에 앉아 부질없이 보냈던 유중혁으로서는 심적으로 피곤하기 충분했다. 그렇게 한 일 년, 부지런하게 무언가를 하고, 끊임없는 질문들에 답하고, 그렇게 살고, 숨 쉬고, 대화하고, 하고, 움직이고, 날마다 새로이 만들어가는 생활에 익숙해지고 나서야 유중혁은 물을 수 있었다.

김독자.

어?

너 대체 뭐냐?

…사실, 텃밭에 앉아 사과나무 묘목 주변에 자라난 잡초들을 뽑다가 할 말은 아니긴 했다. 둘 다 작업용 장갑을 끼고, 땀에 푹 절어서는 얼굴은 새빨갛게 익어서 볼품없는 꼴이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질문에도 김독자는 당황하지 않고 돌직구를 뱉었다.

말했잖아, 중혁아, 네 수호천사라고.

마왕한테는 수호천사가 없다.

어떻게 알아? 너 이번이 마왕이 처음이잖아? 전임자한테는 있었을지도 모르지.

유중혁은 눈을 가늘게 뜨고 ‘전임자’ 따위의 단어를 내뱉는, 자칭 ‘열 살 정도 먹은’ 인간 아이 김독자를 쳐다보았다. 이쯤 되면 확실히 수호천사라는 걸 믿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기껏해야 유중혁의 허리쯤에 머리통이 닿는 아이가 취할 수 있는 태도나 언행이 아니다. 유중혁은 손을 뻗어 김독자의 이마에 배어난 땀을 닦아주고는, 어깨를 잡아 이끌었다. 날이 더웠고 흙냄새가 강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미루어 보아서는 이 상태의 김독자를 햇볕에 삼 분 정도만 더 널어두면, 쓰러진다. 김독자가 유일하게 아이답게 보이는 것은 그 육체의 연약함 뿐이었으니 유중혁은 그것만큼은 위화감 없이 자연스레 지켰다.

유중혁은 뒷문을 열고 서늘한 성안으로 김독자를 밀어 넣으며 물었다.

그 어느 책을 뒤져도 마왕에게 수호천사가 있다는 말은 없다. 뭘 하면 마왕의 수호천사가 되는 건가?

음…….

김독자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졌다. 그래 봤자 얼굴이 동그랗고 눈코입이 짜그매서, 아직 이목구비가 덜 여문 아이의 얼굴이 굳어지는 거라 크게 진지해 보이지 않았으나, 유중혁은 이제 김독자의 미묘한 표정 변화를 눈치챌 수 있었다. 저건 저놈 꼴에 꽤나 비장한 얼굴에 속한다. 김독자는 입을 삐쭉대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대답했다.

많이…실패하면, 그렇게 돼…….

실패?

…어.

수호천사 일을 실패한다는 건가?

그렇지.

실패했나?

…….

유중혁은 넌 그럴 것도 같다고 하려다가 김독자의 표정을 보고 또다시 입을 다물기를 결정했다. 땀에 전 장갑을 벗어 상자 안으로 던진 김독자가 유중혁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작은 이가 입술을 잠시 깨물더니 이내 벌어진 입에서 볼멘소리가 나왔다.


…맡았던 삶마다, 다 실패했지.

그것이 김독자가 유중혁에게 보인 최초의, 벽이었다. 유중혁은 김독자의 눈가에 선명히 떠오른 뭔가의 울분을 보고 왠지 모르게 속이 뜨끔한 것을 느꼈다. 그러나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유중혁은 어쩐지 묻지 않아야 좋을 것을 물었다.

얼마나 많이?

김독자는 느리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천, 팔백, 육십, 삼 번.




김독자가 병아리를 데려온 것은 그로부터 이 주 후였다.

중혁아, 우리 병아리 키울래?

태연한 말이 던져졌지만, 말만 제안이었지 실상은 통보였다. 김독자가 그 말을 꺼내는 뒤쪽으로 이미 삐약, 삐약, 삐요, 하는 소리가 가득 들려오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제 어느 정도 인간사와 자연사를 총망라한 지식을 갖춘 유중혁은 사태를 빠르게 깨달았다. 이미 김독자가 귀찮은 걸 잔뜩 데려왔다. 어느새 부하로 부리는 마물들도 유중혁을 거치지 않고 김독자의 부탁을 들어줄 만큼, 김독자가 이 성에 자리 잡은 덕이었다. 다시는 김독자의 부탁을 함부로 들어주지 말라고 단단히 엄포해 놓아야지…하는 결심은, 당장에 이 삐약거리는 놈들을 죄다 내쫓고 난 후의 일이었다.

김독자가 병아리 상자를 온몸으로 감쌌기 때문에 무작정 칼을 휘두를 수는 없었다. 유중혁은 성큼성큼 다가가서 김독자가 혼신의 힘을 다해 붙잡은 상자를 뺏었다.

중혁아, 안 돼!

김독자는 팔을 휘두르며 달려들었고, 그 서슬에 유중혁은 상자를 놓쳤다. 그 순간 드넓은 성안으로 병아리들이 어설픈 날갯짓을 펼치며 노란 폭죽처럼 퍼져나갔다. 몇몇은 벌써 자라있는 놈이었는지 날개를 푸드덕거리며 돌계단 위로 뛰어오르기도 했고, 몇몇은 겁도 없이 유중혁과 김독자가 서 있는 근처에서 뽈뽈뽈뽈 돌아다녔다. 회색 돌벽과 돌바닥으로 이루어진 바닥에 갑자기 살아 있는 작은 것들이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이건 사과나무 새싹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마치 김독자가 처음 나타났을 때―희끄무레한 새끼 인간과 마주한 충격과 같았다. 유중혁은 제 시야를 가득 채운 노란 점들을 바라보다가 이내 양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저것들을 뛰어다니면서 하나하나 잡아 들이기에 유중혁은 너무 피곤했다. 물론 유중혁이 손가락 한 번만 튕기면 다 폭죽처럼 고깃덩이로 터지겠지만…….

중혁아…….

물론 (중략) 터지겠지만……

중혁아… 내가 물도 밥도 잘 줄게.

터지겠……

중혁아, 우리는 병아리를 키울 수 있다, 알지?

…대신 유중혁의 복장이 터지게 되었다.

유중혁은 네 마음대로 하라고 한숨을 푹 내쉬고는 침실로 들어가 버렸다―유중혁은 김독자가 온 이후로 더 이상 마왕좌에서 흐리멍덩한 눈으로 졸지도 않고, 인간처럼 침대를 쓰는 버릇을 들일 수 있었다. 김독자는 어느새인가 유중혁의 침대에 기어들어 와서 자는 게 습관이 되었는데, 그 날만큼은 밤새도록 병아리들과 노는 건지 들어오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노란 병아리 무리에 파묻혀 졸고 있는 김독자를 꺼내든 유중혁은 다시 한번 한숨을 쉬곤, 아침을 주기 위해 아이를 안아 들었다.

그날 아침 김독자는 밥을 뜨던 숟가락을 여러 번 자기 뺨이나 코에 부딪혔다. 그리고 그다음 날도, 그 다음다음 날도 그랬다. 아이의 몸으로는 견딜 수 없는 수면 부족이 원인이었다. 결국, 넷째 날부터는 유중혁도 병아리 떼를 돌보는 데 동참하기 시작했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병아리들은 유중혁을 더 잘 따르는 듯했다. 사료를 주는 데에도 요리 실력이 좌우하는 게 있는 건지 유중혁만 나오면 병아리들이 졸졸 따라다녔던 것이다.

김독자는 유중혁이 병아리 밥을 주러 나올 때마다 검은 코트에 파묻히다시피 한 검은 사내 주변에 노란 덩어리가 졸졸 붙은 것을 보며 깔깔 웃어대었다. 그럴 때마다 유중혁의 표정이 더 굳어져서는 얼굴에 그늘이 더 지고, 그래서 더 노란 솜뭉치들과 꺼먼 형체가 대비되는 것은 덤이었다. 퍽 즐거운 보색 대비였다.

닭들은 오히려 사과나무 묘목보다 더 빠르게 잘도 자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귀여운 노란 털이 빠지더니 하얀 털이 군데군데 돋기 시작했다. 날개도 커지고 다리도 굵어졌다. 그쯤 되어서는 더는 그들을 병아리라고 부를 수도 없고, 귀엽다고 할 수도 없었는데, 이젠 중닭이 된 것들은 마왕성 복도에서 홰를 치고 다녔다. 복도 구석구석에 날아다니는 깃털을 보면 여기가 닭장인지 마왕성인지 모를 지경이었다. 어느 날 참을 수 없어진 유중혁은 김독자가 싫어하는 토마토가 잔뜩 든 요리를 저녁 식사로 만듦으로써 최대한 악질적으로 굴었고, 김독자는 비겁한 술수라며 울고불고 난리를 쳤다. 그리고 두 사람은 저녁 식사를 가운데에 둔 채 닭들에 대한 마왕성 최후의 타협을 시작했다.

타협의 결과, 일주일 후 중닭들은 마왕성 근처 들판으로 나가게 되었다. 김독자는 닭들을 성 밖에 내려놓으며 눈물을 찔끔 흘렸고, 잘 가 유돌아, 건강하게 살아 중돌아, 아프지 말고 지내야 해 혁돌아, 마순아 너 지렁이 잡아먹을 줄 알지? 같은 말들을 중얼거렸다. 유중혁은 정말 인정하기 싫었으나 닭들에게도 생김새가 있었고 유중혁은 내놓은 무리 중 누가 중돌이고 누가 혁돌인지 구분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냥 김독자를 따라서 닭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주변에서는 꿰르륵거리는 마물들의 소리가 들리는데 태평하게 내버려진 닭들은 지들 나름대로 꼭꼭거리며 자유를 즐기고, 풀을 뜯고, 땅 구덩이를 파서 피서처럼 지내기 시작했다. 마왕이 키운 닭이라 그 어떤 마물들도 짐승들도 함부로 건드리지 않을 테니 세상에서 가장 팔자 좋은 닭이었다.

눈물의 이별을 보낸 후에도 만남은 계속되었다. 마기의 영향을 받아 닭들이 똑똑해진 건지 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유중혁이 성 밖으로만 나가면 어디서 알고 왔는지 닭 떼가 꼭꼭꼬거리며 쫓아왔다. 이래서야 마왕이 아니라 닭의 왕이라고 해도 좋을 지경이었다. 유중혁의 손을 잡고 산책을 나온 김독자는 그때마다 닭들을 알아보며 그들의 이름을 불러주었고, 유중혁은 그때마다 자신이 정말 듣기 싫었던 이름들을 되새기며 또 그 닭들을 알아볼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저것들이 왜 날 알아보는 건가?

너를 아빠로 여기나 봐 중혁아… 감동적이야.

도대체 어디가 감동이라는 건지 유중혁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결코 닭을 자식으로 삼으려던 적이 없다.

그치만 중혁아, 어쨌든 쟤들은 죽을 때까지 널 기억할 거야.

열 몇 마리 닭들의 아빠가 된 마왕이라니! 유중혁은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모를 지경이었다. 유중혁이 마왕으로 산 몇천 년간 느껴 본 적이 없는 아이러니였다. 그러나, 유중혁이 정말 자식으로 닭 스물네 마리를 갖고 싶지 않았던 것과는 별개로, 성 밖을 나갈 때마다 유중혁을 알아보고 달려오는 생명체가 있다는 것에는 매우 묘한 느낌이 들었다.

지금까지 그 무엇도,

그 어떤 존재도,

성 밖을 나갈 때 유중혁을 환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닭들이 나간 이후 성안은 평온을 되찾았지만, 가끔 유중혁은 밤중에 ‘유돌아…거기 가면 안 돼…….’ 따위의 잠꼬대를 중얼거리며 자신을 끌어안는 김독자를 내려다보며 형언할 수 없는 감정에 빠졌다. 유중혁은 사전에서 외로움이라는 단어를 본 적이 있었으며 그 단어의 뜻을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었다. 또한, 유중혁은 상실감이라는 단어도 알고 있었으며 김독자의 상황이―비록 부모나 자식을 잃은 상황과는 전혀 경중이 달랐으나―조금 비슷할 수도 있다는 생각도 해 보았다. 게다가 유중혁이 본 책들에서는 인간과 동물들의 공생 관계가 자주 언급되었다. 천사와 동물의 관계는 정확히 알 수 없었으나, 김독자가 ‘어쨌든 지금 나는 인간’이라고 언급했으니 유중혁은 인간의 기준으로 보기로 했다.

유중혁은 정말 짜증 난다는 생각을 하면서 머릿속으로 김독자가 강아지나 고양이를 키우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그려보곤 했다.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시끄럽고 일 많이 치는 놈들이, 그것도 크기가 큰 털 날리는 놈이 둘이 된다. 그래서 유중혁은 머릿속에서 김독자가 비글을 기르는 상상을 지웠다. 그다음에는 비글 대신 코카스패니얼이라는 강아지를 넣었고, 그림대로라면 김독자와 눈망울이 비슷하긴 하나 털이 귀찮을 것이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그렇게 유중혁은 김독자 옆에 들어앉을 강아지의 종류를 수십 번 새로 그리고 지우기를 반복했고 잠시 후, 자신이 몇 년 전이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고민을 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

유중혁은 제 품에 안겨 새근새근 잠든 김독자를 쳐다보았다. 덮인 이불 사이로 하얗고 가는 목이 언뜻언뜻 호흡에 따라 살짝 부풀어 오르는 것이 보였다. 유중혁은 자신이 김독자의 목을 졸랐을 때의 감촉이 어땠었나를 생각했다. 물러서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요리를 하고, 책을 읽고, 씨앗을 심고, 닭을 기르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유중혁은 선택에 따른 두 가지의 결과를 머릿속에 그려보고 저울질하기 시작했다.

무엇이 더 좋았을 것인가?

유중혁은 마음의 저울에 두 가지를 올려놓고 그것이 어느 쪽으로 기울어지는지를 보았다. 그러나 유중혁의 머리로는 납득할 수 없는 결과가 자꾸 보여서 유중혁은 그냥 저울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어느 쪽이 더 좋은지 단정 지어 결론 내리기 어려웠다. 유중혁은 마른 눈으로 제 품 안을 다시 내려다보고, 여전히 잠들어 있는 김독자를 한참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 파묻힌 동그란 머리통과 그 위를 덮은 까만 머리칼, 밤이 허락한 최소한의 빛 안에서 하얗게 단단해진 몸의 선을 시선으로 한참 훑었다. 그리고 유중혁은 그냥,

그냥 이대로 있기로 했다.




가끔 잠이 안 오는 날이면, 유중혁은 그렇게 잠든 김독자를 바라보길 반복했다. 거기에 없어야 하는데, 분명 없었는데 어느 날 예고도 없이, 흠 없는 깨끗한 대리석 사이로 시나브로 생겨난 이끼를 바라보듯이. 세상에서 제일 기묘한 이물질을 처음 마주하듯 보다가도, 갑자기 누군가가 그 하찮은 곰팡이를 손톱으로 긁어 파내버릴까 봐 문득 목덜미 뒤에 소름이 돋았다. 너무 죽이기 쉬운,

너무 사라지기 쉬운,

너무나도 연약한,

그런데 사라지면 안 될 것 같은 존재가 제 품 안에 옹송그리고 있었다.

매일 뜨는 달 속에서 그런 밤이 일정한 주기로 반복되고 있었다.

유중혁이 그 말을 들은 것은 우연이었다. 오랜 세월을 산 유중혁의 육신은 잠이 많지 않았고 깊게 들지도 않았으니, 어린 몸을 가진 김독자보다 쉽게 깨고 더 많은 시간을 깨어 있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유중혁이 김독자의 각양각색 잠꼬대를 들을 수 있는 것도 당연했다. 주로 반복되는 잠꼬대는 닭들의 이름이 있었으며, 토마토가 싫다는 말이나, 맥락없이 갑자기 싫다는 중얼대는 말과, 가브리엘과 우리엘 같은 대천사의 이름도 있었다. 수호천사라는 게 영 꾸며낸 말만은 아닌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어느 날 김독자는, 잠꼬대로,

…죽지 마, 라는 말을 꺼냈다.

유중혁은 무심한 눈으로 김독자를 내려다보았다. 죽을 수 없는 마왕인 자신에게, 죽지 말라는 말보다 더 우스운 말은 없을 것이다. 김독자가 말을 하는 대상이 그의 꿈속에선 자신인지 아니면 다른, 이전에 수호한 사람들인지는 모를 일이었으나 높은 확률로 후자일 터였다.

문득, 유중혁은 김독자가 지금껏 돌봐왔고 실패했던 천팔백육십삼 가지의 영혼이, 삶이 어땠는지 궁금해졌다. 이 아이가 그렇게 성심성의껏 돌본 자들은 어떤 자들인가? 그들도 나와 같은가? 김독자는 그들에게도 이런 방식으로 머물렀나? 김독자는 그들과 이렇게 같이 살았나? 이렇게 같이 살아서, 무언가를 심고, 기르고, 살리고, 먹이고, 키우고, 자라나며 함께했나? 이렇게? 늘? 항상?

유중혁은 이상하게 그 생각을 계속, 깊게 하게 되었다. 갑자기 불어온 바람에 떠밀려 온 난파선처럼 급작스러운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 이어졌다. 그것은 몇천 년 마왕으로의 삶에서 그 어떤 것보다 유중혁에게 깊게 다가온 궁금증이었다. 유중혁은 저도 모르게 부질없는 상상 속에 빠져들었고, 두 팔로는 어린 김독자를 껴안은 채 생각에 잠겼다.

나도 포기하지 않을게…….

그래서였다. 유중혁은 한 박자 늦게 뒤이은, 김독자의 아주 희미한 웅얼거림 역시 듣지 못했다.




닭도 내보내고 다시 김독자의 허리만큼 자란 묘목들에 물을 주며 사는 한가로운 나날이 이어졌다. 자란 건 나무들만이 아니었다. 김독자는 유중혁의 손으로 두 뼘 정도 키가 더 컸는데, 엄청난 변화였다. 김독자의 옷과 신발들이 매일같이 새것으로 바뀌었고 조금 더 큰 것으로 늘어났다. 김독자의 코가 조금 더 오뚝해졌고, 눈은 조금 커졌고, 입술이 얇고 길어졌으며, 팔다리 역시 길어졌고 손가락도 희고 단단히 여물었다. 이제 김독자는 더는 유중혁과 대화를 할 때 목이 아프다고 투덜대지 않았으며, 유중혁은 기껏 들였던 버릇―김독자와 얘기할 때 꼭 어디 의자에 앉아서 고개를 숙이는―이 쓸모없게 된 것에 묘하게 불만이 있는 눈치였다. 김독자와 유중혁이 같이 잠드는 침대 위는 조금 더 좁아져 갔다. 반면, 밤에 그 주변을 채우는 사소한 잠꼬대 같은 것은 여전했다. 평화로운 나날이었고, 김독자는 머리가 굵어서 그런지 한동안은 이상한 일도 벌이지 않고 유중혁과 함께 책만 읽으며 조용했다.

조용해도 너무 조용했다.

유중혁은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유중혁은 김독자에게 강아지를 길러 볼 것을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충동적이었다. 말을 뱉고 유중혁 스스로도 놀랐는데 혼자만 놀란 건 아니었는지 김독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유중혁을 쳐다보았다. 믿을 수 없는 소리를 들었다는 표정에 유중혁은 왠지 짜증이 샘솟았다.

나를 무엇으로 보길래 개 기르자는 말에 그렇게 놀라는 건가?

어…아니…마왕이지…….

김독자는 멍하니 중얼거리다가, 이내 유중혁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뭐가 그리 좋은지 환한 웃음을 지었다.

싫은가?

물론 난 좋아.

그럼, 종류는 네가 고르는…….

한 마리?

당연히 한 마리다. 절대로 닭들처럼 여러 마리 기를 생각은 마라.

유중혁은 대번에 김독자가 던진 말을 끊었다. 그러나, 이내 잘못된 대답을 했음을 깨달았다. 그 말을 듣자마자 김독자의 눈이 반짝이더니 호선을 그렸기 때문이었다. 유중혁은 순간 흠칫했다. 유중혁은 저 장난기 어린 표정이, 김독자가 무언가를 계획했을 때만 나온다는 걸 다년간의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그런데 자신이 던진 한 마리라는 말 어디가 김독자에게 그런 빌미를 주었는지, 유중혁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유중혁이 해명을 요구하는 눈으로 김독자를 쳐다보자 김독자가 잠시 후 입을 열었다.

한 마리면, 엄청 신중하게 골라야겠지?

…….

반박을 해야 할 것 같았으나 할 말이 없어 유중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 직접 보고 고를래.

직접?

유중혁이 팔짱을 꼈다. 여러 마리의 개를 데려오는 것은 어려운 일은 아니었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김독자가 그렇게 해 놓고는 개 한 마리만 기를 리가…….

그렇다고 개 여러 마리를 막 잡아 와서 보여주진 말고.

그럼 어떻게 고르란 말인가?

우리가 가서 직접 보고 고르자.

김독자가 너무 태연히 말했기 때문에 유중혁은 잠시 그래, 하고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그런데 말의 어감이 이상했다. 성 내에는 그 어디에도 개를 직접 보고 고를 곳이 없었다. 유중혁은 눈을 깜박이다가 김독자를 바라보았다. 종종 이 아이는 마왕이 자신을 바보처럼 느끼게 했다.

…어디로 ‘가서’?

당연하잖아?

김독자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구석의 책장 한 편을 가리켰다. 꽂혀있는 책은, 지금껏 읽은 수많은 사전이었다. 전부 인간이 편찬한 것이었다. 미소지은 김독자를 바라보던 유중혁의 불안감도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김독자의 목적은 강아지가 아닌 것 같았다.

마을로!

마을?

어, 인간 마을로.

그날부터 김독자는 유중혁을 끌고 인간 마을로 다니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김독자가 바라던 바였으며, 유중혁이 제일 후회하는 일이었다.




이제는 기억도 나지 않는 시절의 이야기이다.

김독자는 막 고치를 열고 나온 어린 천사였으며, 젖은 날개를 말리고 다듬어 열심히 펼쳐내었다. 막 얻은 제 몸이 신기하고 처음 보는 세상이 신기하여 여기저기를 바라보고, 만지작대고 있던 그에게 신이 첫 선물을 주었다.

김독자의 첫 아이였다.

김독자는 제 손안에 들어온 번쩍이는 빛무리를 한참이나 쳐다보았다. 김독자가 천사로 태어나 최초로 받은, 김독자가 수호해야 할 첫 영혼,

유중혁이었다.

그날부터 김독자는 유중혁의 수호천사로 살아가기 시작했다.

김독자는 처음으로 맡게 된 아이가 예뻐 어쩔 줄을 몰랐다. 수호천사가 굳이 매일 담당하는 인간의 옆에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닌데 김독자는 매일 밤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유중혁의 요람 옆에서 쭈그리고 앉아 밤을 보냈다. 잠든 아기의 이마에 제 이마를 대어 열이 있는지 없는지, 기분은 편안한지, 잠을 깊이 못 자고 있지는 않은지, 몸 안의 뼈와 피와 살들은 제대로 생겨나고 있는지, 하루하루 확인하는 게 김독자의 유일한 재미였다. 그렇게 이마를 대고 있으면 살갗 너머로 어린 유중혁의 생각들이 흘러들어왔다. 아직 색채는 정교하지 못하지만, 몸 전체를 가득 채운 따뜻함, 편안함, 행복감, 안정감은 또렷하게 느껴졌다. 김독자는 그 감정들을 공유받으면서 일종의 황홀감을 느꼈다.

그때까지, 천사인 김독자에게는 그런 감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유중혁이 커갈수록, 김독자는 유중혁에게 넘겨받는 감정이 많아졌다.

김독자는 유중혁의 성장과 함께 유중혁을 ‘배우기’ 시작했다.

김독자는 유중혁을 기르며 유중혁을 배웠고, 유중혁의 감정과 기분을 배웠고, 유중혁의 생각을 배웠고, 그를 통해 유중혁이 보는 세상을 배우고, 인간을 배웠다. 김독자는 유중혁에게 모든 것을 배우고 있었다. 감정을 모르는 김독자는 유중혁을 통해 감정을 배웠다. 유중혁이 즐거울 때 같이 즐거워하고, 유중혁이 슬퍼할 때 같이 슬퍼하고, 유중혁이 놀랄 때 같이 놀라고, 유중혁이 화낼 때 같이 화낸다.

유중혁 본인은 전혀 몰랐지만,

유중혁은 유중혁의 삶을 사는 것으로 김독자를 가르치고 있었다.

김독자는 유중혁을 통해 행복을 배웠다.

김독자는 거의 유중혁 옆에서 살다시피 했다. 그럴 필요가 없었음에도 하늘로 돌아가는 일이 없었다. 오히려 유중혁의 인간 부모보다도 김독자가 더 지극정성이었다. 유중혁이 걸음마를 떼다가 넘어지기라도 하면 난리를 피우고, 몸이 고꾸라질라치면 곧바로 김독자가 옆에서 균형을 잡아주는 것이다. 유중혁의 부모는 아이가 아주 건강하고 튼튼하며, 다치는 일도 아픈 일도 없다고 기뻐하기만 했다. 그 옆에서 유중혁을 붙드는 보이지 않는 손은 그들에게는 보이지 않았기에 그 누구도 김독자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했으나, 김독자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김독자가 잠시라도 유중혁의 곁을 비우고 하늘로 돌아가는 때는, 오로지 김독자가 인간 세상에 머무를 수 있는 개연성을 거의 다 소모했을 때뿐이었다. 김독자가 돌아갈 때마다 주변에서는 한두 마디씩 핀잔을 건네왔다. 주로 우리엘이 그랬으며 다른 이들도 비슷한 맥락의 말을 했다.

첫 영혼은 거의 다 그러더라. 가끔 와서 개연성 회복도 다 하고 가라. 너 그렇게 거기에만 있으면 나중엔 개연성을 다 소진해서 뻗어버린다니까? 왜 애 걸음마 하는 것까지 일일이 도와주고 있어? 그런 사소한 일에는 일일이 힘을 쓰면 안 돼. 인간의 삶이 얼마나 괴로운지, 얼마나 여러 가지 일이 있는지 니가 몰라서 그래. 앞으로 그 애가 살면서 겪을 괴로울 일은 훨씬 더 많은데 고작 돌에 걸려 넘어지는 거 하나로 그래? 정신 차려. 아직 처음 해봐서 감이 없는 거지, 네가. 다음 아이부터는 그렇게 신경 쓰지 않게 될 거야.

관록 있는 천사들은 비슷한 이야기를 해댔지만 김독자에게는 크게 와닿지 않는 이야기였다. 다음 아이를 수호할 땐 어떻게 된다느니 하는 이야기는 일단 유중혁의 삶을 성공적으로 완성한 후의 일이다. 유중혁 하나를 신경 쓰기도 바쁜데 미래를 그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유중혁이 가르쳐주는 수많은 감정을 배우고 세상을 배우며 함께하기에도 바쁜 나날이었다. 다만 그들이 한 조언이 아주 빈말은 아니었던 것이, 고작 유중혁이 열 살도 되기 전에 김독자가 꽤나 지쳐버렸던 것이다.

처음에 김독자는 자신을 탓했다.

다른 능숙한 천사들이 하는 것처럼, 적당히 힘이 될 개연성을 남겨놓고 조절하지 못했다는 이유였다. 그래서 아홉 살 열 살이 되어가는 유중혁의 주변에서 온통 힘든 일만 일어나도 김독자는 그게 다 자기 탓 같았다. 어릴 때부터 방바닥에 엉덩방아 찧는 일 하나 없이 애지중지 키워온 아이에게 별별 사건 사고가 다 일어나는 건 가슴이 찢어지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연성을 다 소진해버린 수호천사는 그 어떤 사건도 막을 수가 없었다. 그때부터 김독자는 이를 악물고 하늘에 올라가서 쉬다가, 또 다급하게 내려왔다. 너무 아기 때부터 유중혁에게 몰아준 개연성을 빨리 회복해서 지켜주어야만 했다.


그러나 상황은 이상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원래 그런 애들이 있어.

원래 그런 애들, 이라니, 그게 무슨 뜻이죠?

지나가던 우리엘이 무심하게 던진 말에 김독자는 존재하지 않을 심장이 덜컥 떨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얼마 전에, 나무 위를 타고 오르다 땅에 떨어진 중혁이에게서 느낀 것과 비슷한 심정이었다.

수호천사의 능력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불운의 별을 타고 난 아이들이 있다고…….

그러면서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너도 참 안타깝네, 하는 것이다. 그런 아이들은 대개 일찍 죽는다고, 알 수 없는 이유로 영혼이 그런 별자리 밑에 고정되어 있으니 보통은 불행하게 죽기 전에 수명을 빨리 단축시켜 주는 것이 오히려 행복한 방법이라는 말이 뒤따라왔다. 김독자가 한참 동안이나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해서 눈만 껌벅거리고 있자, 주변에서 어깨에 손을 얹었다가 지나갔다.

그냥 포기하고 다음 아이부터 잘 해. 어쩔 수 없지. 네가 받은 첫 영혼이 하필 그랬던 걸 어떡해.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김독자가 받았던 첫 영혼.

그 영혼은, 김독자의 첫 아이이자 마지막 아이가 된다.




성의 주변 지형을 적은 책을 며칠 내내 읽어내린 후에야 겨우, 김독자와 유중혁은 마을로 가는 지름길을 찾았다. 유중혁은 거기에 마을의 입구와 출구가 있는지도 잊어버리고 있었다. 몇천 년 전에는 썼던 것도 같은데, 통로가 얼마나 쓰이지 않았는지 이젠 주변에 이끼가 가득하고 곰팡내가 퀴퀴했다. 주변에 흐르는 마기를 확인하고 몇 번 실험해본 결과 유중혁은 아직도 통로가 정상적으로 작동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김독자의 눈이 반짝였다. 외출 준비를 끝마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김독자는 이럴 때만 재빠르고 철두철미했다. 그 와중에도 바깥의 닭들에겐 추울 때 둥지로 쓰라며 천을 잔뜩 내놔주곤 제 목은 드러내고 있는 것이 신경이 쓰여, 유중혁은 김독자의 목에 스카프를 매 주었다.

그렇게 어느 날 두 사람은 마을에 나섰다.

유중혁으로서는 몇천 년 만의 소풍이었고, 김독자의 입장에서는 성에 온 이래 첫 소풍이었다. 둘 다 단출한 로브를 입은 채였다. 그때쯤 김독자는 열 서넛 정도 되어 보였으며, 유중혁은 항상 30대 초 청년의 모습을 하고 있었으니 둘의 외양은 부자지간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하고 형 동생이라고 대기에도 모호한 조합이었다. 세상 물정을 몰라도 그동안 읽어왔던 책의 지식과 소설의 분위기로 인해 두 사람이 의심을 받을 거라는 걱정이 앞섰다.

형이라고 하면 안 돼?

내가? 너의?

아빠는 싫을 거잖아.

아빠든 형이든, 아무도 믿지 않을 거다. 너와 나의 생김새는 전혀 닮지 않았으니까.

사람들은 외모만 보니까.

외모를 빼고도 너와 나는 닮은 점이 없다.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뭐…….

김독자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러고는 말을 앞으로 데려올 강아지에 대한 것으로 돌렸다. 좀 커다란 아이가 좋겠다느니, 털은 길면 쓰다듬기 좋겠다느니, 우리 성은 넓으니 개가 좋아할 거라는 종류의 이야기였다. 둘은 도란도란 이야기하며 걸음을 옮겼다. 포털을 타고 넘어 울창한 숲을 지나 언덕길을 내려오자 저 멀리 마을이 보이기 시작했다. 김독자의 걸음이 빨라졌고 그 와중에 몇 번 미끌미끌한 나무줄기를 밟고 넘어질 뻔한 걸 유중혁이 붙잡아 세웠다.

좀 천천히 걸어라.

유중혁이 말했으나 김독자는 건성으로 고개만 끄덕였다. 흥분으로 상기된 낯빛이 평소보다 더 밝았다. 왜 그렇게까지 흥분한 거냐며, 유중혁이 묻자 김독자는 태연하게 유중혁을 쳐다보았다.

너도 그렇잖아?

난 별로 흥분 안 했다.

에이, 아냐. 중혁이 표정도 달라졌어.

김독자는 유중혁의 손을 잡아끌며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유중혁은 김독자가 억지를 부리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거울이 없으니 김독자가 말하는, 달라졌다는 게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제야 유중혁은 자신이 거울을 본 적도 거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유중혁은 자신의 표정이 어떤지, 어떤 감정을 가진 순간에 어떤 표정을 짓는지 한 번도 제대로 본 적이 없다. 오로지 유중혁이 지금까지 봐올 수 있었던 것은, 김독자가 어떤 감정을 가진 순간에 어떤 표정을 짓는다는 것뿐이었다. 김독자가 맨 처음 어린 몸으로 이 성에 나타났을 때부터 그랬다. 아직 정교하지 못하지만, 김독자가 느끼는 것들은 유중혁의 눈으로 또렷하게 볼 수 있었다. 그때까지 마왕인 유중혁에게는 그런 감정에 대한 인지가 없었다. 유중혁이 이제 표정으로 감정을 표할 수 있게 되었다면 그건 김독자가 즐거울 때 그 표정을 보았고, 김독자가 슬퍼할 때 그 표정을 보았고, 김독자가 놀랄 때 그 표정을 보았고, 김독자가 화낼 때 그 표정을 보았기 때문이리라.

유중혁은 자각하지 못했지만, 유중혁은 김독자를 통해 그 감정들을 조금씩 배우고는 있었다.

평소와 달리 딴생각에 빠진 유중혁보다 김독자가 목표에 더 저돌적이었다. 김독자는 어느새 유중혁을 데리고는 마을 어귀까지 가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울타리를 넘어 들어가선 무슨 채소인지 새싹이 잔뜩 자라는 밭을 내려다보았다.

이것 봐, 중혁아, 진짜 사람들이 잘 만든 밭은 이런 모양이네.

확실히 실제로 본 밭은 훨씬 더 지표면이 고르고, 돌이 적었으며, 고랑의 간격이 일정했다. 김독자가 신기해하며 밭의 주변을 한 바퀴 돌았다. 유중혁은 여전히 김독자가 왜 저런 쓸데없는 것을 주의 깊게 보는지 이해할 수 없었으나―그는 몇 년간의 경험으로 인해 머리로 이해하기보단 그냥, 그렇겠구나,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는 자신도 김독자를 따라 느릿하게 발걸음을 옮기며 천천히 밭둑 위를 걸어갔다.

그래도 보는 것마다 우와, 우와, 하면서 저거 보라고 호들갑을 떠는 김독자를 보는 기분은 좋지 않았다. 다 마왕성에도 있다는 건데 뭐가 그리 좋다는 건가? 그러면서 유중혁은, 마왕성에 있던 풍경과 마을의 풍경의 다른 점을 찾아내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김독자는 자신이 입을 열어 무어라 하지 않아도 알아서 마을의 구석구석에 집중하고 있는 유중혁을 보며 웃지 않기 위해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렇게 마을 주변을 조금 어슬렁거리다가, 거리로 들어선 것은 조금 더 시간이 지나서였다. 사람들이 수런거리는 소리가 커졌고, 이내 김독자와 유중혁은 지금껏 마왕성에서는 단 한 번도 볼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사람들이 움직이는 걸 보았다.

사람,

사람 사람 사람,

여기도 사람,

저기도 사람이었다.

유중혁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굳혔다.

마물들이라면 모를까 인간 종족은 유중혁에게 있어서 낯선 존재였고, 침입하는 이들이었다. 더더군다나 인간들은 마왕성에 김독자가 데려왔던 닭들보다 더 크고, 그 숫자도 훨씬 많았다. 유중혁이 멈칫하는 걸 느꼈는지 김독자가 재빨리 유중혁의 손을 제 손으로 잡고 깍지를 꼈다. 손에 낯선 체온이 와닿자 유중혁은 고개를 내려 저와 손을 잡은 김독자를 바라보았다. 그제야, 유중혁은 깨달았다. 주변에 다니는 인간들과 김독자는 거의 비슷하게 생겼다. 머리칼, 두 귀, 두 눈, 코 하나, 입 하나, 목과, 손발, 다리까지. 지금 이 순간 김독자가 유중혁의 손을 놓고 길 사이로 달려가선 저들 사이에 섞여 걸어 다녀도 유중혁은 구분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자 유중혁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긴장하지 마.

김독자가 웃으면서 말했으나 유중혁은 입안이 썼다. 여태껏 제 영역에 있었고, 제 편이며, 제 것인 것 같았던 김독자가 확실히 인간과 더 가깝다는 걸 깨달은 순간부터 마음 한구석이 찝찝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기분이 좋은지 김독자의 얼굴은 해맑았고, 익숙한 곳에 돌아온 듯 행동이 태연했다. 몇 번 주변을 훑어보며 길의 분위기만 보고도 시장까지 가는 길을 찾아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시장 쪽으로 가자 사람들은 더 많아졌고, 말소리는 더 시끄러워졌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무어라 외치면서 분주히 물건을 팔고 있었다. 살아 있는 짐승들을 파는 곳은 그중 가장 안쪽이었다. 가장 많이 보이는 것은 말이나 소 같은 실용적인 동물이었는데, 근처를 지나갈 때면 정말 선명한 짐승 냄새가 지독하게 풍겼다. 김독자가 닭을 데려왔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유중혁은 생애 처음 겪는 강렬한 후각적 자극에 시달렸다.



커다란 놈들이 있는 곳을 지나서야 맨 끝에 겨우, 작은 동물들을 파는 작은 상점이 하나 있었다. 철장 속에서 풀을 오물거리는 토끼나, 성질은 사나워 보이지만 늘어지게 잠자느라 정신이 없는 고양이들, 각 우리 속에서 잠을 자거나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들이 보였다.

유중혁도 그제야 마음을 안정시킬 수 있었다. 확실히 철장 속에서 꼬리를 흔드는 것들은 제법 귀여웠고 김독자의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만 같아 보였다. 개중에는 컹컹 짖으면서 앞발을 들고 두 발로 서려는 것들도 있었는데 활발한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김독자에게는 같이 뛸 존재들이 필요했다. 천사라고 주장하는 주제에 김독자는 일반적인 인간들보다도 몸이 형편없어서 잔병치레도 잦았고 그렇다고 몸에 도움이 될 만한 일도 일절 하지 않았으니, 큰놈들과 산책을 하며 몸을 더 적극적으로 움직일 기회가 있다면 나아질 것이다.

유중혁은 각양각색의 강아지들을 주의 깊게 보면서 어떤 놈이 제일 보기 좋아 보이는지를 머릿속으로 가려냈다. 저놈은 털이 너무 엉켜있어서 보기 싫고, 이쪽은 피부병이 있어 보였다. 누워있는 것은 척 보기에도 천성이 게으른 것이거나 체력이 없어 쉽게 지친다는 증거이니 안 되고, 저기 두 발로 선 놈은 모든 것이 괜찮지만 눈에 하얗게 낀 것을 보니 눈병이 있다. 저놈은 귀엽게 생겼는데 장난기가 많아 골치 아파 보이고, 요놈은 차분해 보이지만 별로 움직이지 않을 것 같았다. 한참 생각하던 유중혁은 그제야 자신이 김독자의 의사를 묻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그리고는 김독자가 묘하게 조용하다는 것도 깨달았다. 유중혁은 김독자를 부르려고 고개를 돌렸는데, 김독자는 이미 어떤 우리 앞에서 쭈그려 앉아서 그 안을 정신없이 들여다보고 있었다.

…김독자?

김독자는 대답이 없었다. 무언가에 정신이 팔린 사람 같았다. 유중혁이 조심스레 다가가서, 쭈그린 김독자 뒤에서 허리를 숙여 시선을 내리자 김독자가 바라보는 것이 보였다.

우리 안에 갇힌, 볼품없는 강아지였다.

그것을 강아지라고 하는 게 적절한지조차 알 수 없었다. 몸집은 작았지만 이미 팔다리가 몸에 비해 긴 것이, 어린 강아지라기보단 이미 많이 자란 개에 가깝다. 어릴 때부터 저렇게 클 때까지 팔리지 않은 것 같았다. 개는 지친 기색으로 누워서는 혀를 내밀고 숨을 할딱이고 있었는데, 피부 일부는 병이 있는지 털이 없고 붉은 딱지만 적나라하게 져 있었다. 뒷다리 하나에는 상점 주인이 묶어준 것인지 하얀 붕대가 감겨 있었다. 가끔 의미 없이 다리를 허우적대기도 했는데 붕대가 감긴 그 다리만 잘 안 움직이는 걸 보면 뼈에 문제가 있는 게 틀림없었다. 꼬리도 어디서 잘못 잘렸는지 부자연스럽게 짧았고, 눈도 흐리멍덩하고 코에 콧물이 가득했다.

유중혁이 가만히 김독자의 어깨에 손을 얹자 김독자는 그제야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유중혁이 뭐라 말을 하기도 전에 먼저 말을 꺼냈다.

나 얘로 할래.

―걔는 돈 안 받아요. 그냥 가져가요.

김독자가 말을 꺼내자마자 이쪽을 지켜보고 있었는지 상점 주인이 지나가면서 한 마디를 툭 던졌다. 유중혁이 미간을 좁혔다. 김독자와 성에서 들고나온 것들은 마왕성 구석 지하에 버려져 있던, 안 쓰던 금은보화들이다. 뭘 사도 각 가게에서 제일 좋은 최상급의 물건을 사고도 남을 재산이었다. 키우기가 번거로울 뿐이지 굳이 사려면 여기 있는 동물들을 통째로 사고도 남을 상황인데 왜 굳이 김독자가 이런 선택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유중혁의 의아한 표정을 바라보던 김독자가 한 번 더 단호하게, 차분히 말했다.

난, 얘로 할래.

다른 것도 많은데 왜 굳이 병든 것을 사랑하나?

…….

유중혁의 질문에 김독자는 입을 다물었다. 옆에 더 건강하고 보기 좋은 놈들도 많았다, 까지 말을 덧붙이던 유중혁은, 김독자의 표정을 보고 의아해졌다.

김독자? 왜…

유중혁이 김독자에게서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표정이었다.

아니…굳이 아픈 애를 찾아서 고른 건 아니야, 다만, 그저…….

아무런 전조도 없었고 김독자는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유중혁은, 김독자가 꼭, 울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냥 내가 얘를 만났잖아.





어찌 된 일인지 유중혁은 유난히 운이 없었다. 환경이 좋지 않거나 본인의 능력이 나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별문제 없는 가정에서 태어나 크게 나쁘지 않은 성격과 재능으로 자라는 유중혁의 삶은 어느 순간부터 늘 어그러지기 시작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 불운함은 그저 운이 없다는 말로는 충분치 않을 만큼 커지기 시작했다. 유중혁은 아무 이유 없이 길을 가다가 위에서 떨어진 화분에 맞아 기절하거나, 갑자기 창궐한 전염병에 시름시름 앓기도 했다. 그즈음 유중혁의 부모는 사기를 당해 돈을 잃고 귀족들에게 땅을 빼앗기기도 했다. 김독자는 매일 밤 잠든 유중혁을 안고 아프지 말아라 기도했지만, 김독자가 가진 개연성을 죄다 쏟아부어 하늘에 기원을 올려보내도 결과는 지지부진했다. 완전히 지쳐버려 얼굴이 핼쑥해진 김독자가 다시 하늘로 올라오자 지나가던 주변 천사들이 한마디씩 했다.

좀 쉬었다 가라, 오랜만이다, 개연성은 제때 비축해줘야 한다, 같은.

그 누구도 김독자가 맡은 아이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김독자는 창백한 얼굴로 온종일 헤매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자신이 먼저 질문을 꺼냈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예상 밖의 것이었다.

저번에 들었잖아, 가끔 그런 애들이 있다니까? 운이 나쁜 애들.

이게 그냥 운이 나쁘다고 치부될 만한 일입니까?

그런 운명을 타고난 거지.

왜 하필 중혁이에요?

누군가는 그렇게 살 거라면 그게 유중혁이 아닐 이유가 있나?

애초에 왜 그런 자리가 있는 건데요? 그럼 모든 아이가 행복하면 안 되는 거였습니까?

독자야, 너 같은 질문을 하던 어린 수호천사는 쌔고 쌨어. 다들 처음에는 너 같은 생각을 해. 그런데 모두가 똑같아지면, 모두가 같은 상황이면 세상에는 이야기가 생기지 않아. 스타스트림의 영혼들은 저마다 다른 이야기를 가지고 태어나고, 자신의 모든 삶에 걸쳐 이야기를 실현해가지.

김독자의 입안이 바짝바짝 말랐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듣고 싶지 않았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는데 그게 당연한 진리인 것처럼 말하는 이들 때문에 속이 탔다.

유중혁이 가진 이야기가 불행한 이야기라면 유중혁은 사는 내내 그것을 실현할 거야. 그게 그 아이의 이야기야, 존중해 줘야지.

불행한 삶을…… 존중해야 합니까?

응.

어떻게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삶을, 불행하게 보낼 확률이 높지, 독자야.

우리엘의 표정이 엄해졌다.

그러나 삶은 행복이나 불행의 크기로 성공 여부를 따지는 게 아니다.

…….

그냥 사는 거지. 그래도 어떤 식으로 살지는 그 아이가 결정할 바야. 너는 돕기만 하는 거고.

고위급 천사들은 이런 일에 익숙한 듯했다. 김독자에게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영역까지 그들의 대답은 한결같았고, 칼 같았다. 대답이 돌아오는 데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걸 느끼며, 김독자는 자신이 지금껏 유중혁을 통해 배워온 모든 상식이 무너져내리는 것을 느꼈다.

사람은 행복하기 위해서 태어났고, 그래서 행복을 위해 살아간다고,

유중혁이 제 부모를 통해 읽고 들은 것들은 인간의 기준인가?

천사인 나는 그런 기준을 통해서는 안 되는가?

복잡한 마음으로 다시 하늘에서 내려왔을 때는 밤이었다. 김독자는 이제 제법 큰 소년 유중혁이 잠든 모습을 착잡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김독자는 잠꼬대를 중얼거리며 이불을 끌어안는 유중혁을 보며 형언할 수 없는 감정에 빠졌다. 김독자는 유중혁과 함께 배웠기에 삶과 불행, 행복이라는 단어를 알았으며 뜻도 어렴풋이나마 이해하고 있었다. 또한, 김독자는 운명이라는 단어도 알고 있었으며 유중혁의 상황이 그런 단어와 엮여 표현될 수도 있다는 생각도 해 보았다. 그러나 그로서는 김독자의 마음속 모든 것이 해결되지는 않았다. 김독자는 그날부터 인간 세상을 떠나지 않고 계속 머물렀다. 계속, 유중혁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김독자가 다시 하늘에 돌아오기까지 걸린 시간은 인간 기준으로 10년,

유중혁의 ‘첫 번째’ 죽음이 도래할 때까지였다.





주인은 돈이 필요 없다고 했지만, 김독자는 한사코 가져온 보석 중 하나를 상점 주인에게 안겨주었다. 곧이어 돌아선 주인은 입이 귀까지 걸려서는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았다. 명백히 팔 수 없었던 것에 큰돈을 받아 기쁜 모양새가 역력했기에 유중혁은 절로 눈살을 찌푸렸다.

돈까지 주나?

…저 사람에게 필요 없다고 해서 내게까지 의미 없는 건 아니니까.


김독자는 그대로 그 강아지를 품에 꼭 안고 성으로 돌아왔다. 유중혁은 그 무게를 생각해서 자기가 안아 들까 싶었지만, 여전히 김독자가 그 개를 택한 것이 이해도 안 되었고 마음에도 들지 않았기에 손을 내밀지는 않았다. 그래도 이왕 처음 김독자에게 무엇을 고를 기회를 주고 사주는 거, 더 좋은 거로 주고 싶었는데, 유중혁의 계획은 무참히 깨져버리고 말았다. 유중혁은 굳이 표현하진 않으려고 했으나 그날 내내 표정이 굳는 것을 통제하지 못했다. 김독자가 마왕성에 도착하자마자 강아지를 씻기고, 붕대를 풀어 약을 발라주고, 바구니에 푹신한 베개를 담아 집을 지어주고 이뻐하는 동안 유중혁은 말없이 저녁 식사를 준비했다. 저녁을 먹을 때쯤에야 김독자는 처음으로 그 강아지를 제 몸에서 떼어놓고 식탁으로 다가왔다. 평소보단 조금 더 스산한, 말 없는 식사가 시작되었다. 음식을 반쯤 먹어 접시가 조금 비워지고 나서야 김독자가 유중혁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삐졌어?

아니다.

김독자는 유중혁의 표정을 슥 훑었다. 정말로 아니었다면 대관절 무슨 소리를 하느냐고 되물었을 것이다. 부정의 속마음이 긍정에 가까운 것 같았다. 김독자가 피식 웃자 유중혁의 표정이 조금 더 찌그러졌다.

네게도 좋은 친구가 될 거야.

…….

유중혁은 김독자의 친구를 만들어 주고 싶어서 개를 데려온 것이지 자신을 위해 데려온 것이 아니었다. 김독자는 거꾸로 생각하고 있었다. 도대체 누가 누구를 위하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유중혁은 자신에게 닭도 개도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김독자는 아닌 모양이었다.

유중혁은 그저 마을에서 직접 사 온 재료로 요리한 샐러드를 입에 밀어 넣었다. 와작와작, 소리가 들릴 정도로 잎사귀의 줄기를 씹어대는 소리가 침묵 속에서 식탁 위로 울렸다. 식탁 너머 저 멀리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려는지 성 구석구석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는 강아지의 모습이 보였다. 김독자는 고개를 돌려 흐뭇한 얼굴로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다시 유중혁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알아, 중혁아.

뭘 안다는 거지?

더 나은 애를 고르면 더 좋았을 거라는 거.

저 녀석은 움직임을 봐도 오래 못 살 거다. 이미 늙은 것 같고.

그것도 알아.

제대로 알고 고른 게 맞나?

응.

일부러?

유중혁은 김독자를 바라보았다. 김독자는 차근차근 말했다.

다른 애를 고를 수도 있었겠지. 아마 다른 애를 만났으면 그 애를 더 사랑했을 거야. 다른 애가 건강하다고 해서 굳이 밀어내고 아픈 아이를 찾아서 다니지는 않았겠지.

그곳에는 저 녀석 말고도 많은 개가 있었다.

응, 그런데 하필…….

김독자는 잠시 입을 다물고 마른침을 삼켰다. 옆에 있는 컵을 들어 물 한 모금을 들이키고 나서야 김독자는 말을 이을 수 있었다.

하필 얘가 나랑…어쩌다 보니, 눈이 마주쳤어. 가게에서 제일 먼저.

제일 먼저, 라.

그냥…그게 다야. 그냥 나랑 맨 처음 눈이 마주쳐서, 사랑하게 되었고, 그냥 그 애가 우연히…우연히 나랑 처음 만난 이 아이가…하필, 운이 나쁘게 타고난 것뿐이지.

유중혁은 우습게도 개 이야기를 하는 와중에 읽었던 소설책 하나를 떠올렸다. 인간들 사이에서 로맨스라고 불리는 종류의 책이었다. 첫눈에 반한다, 라는 표현은 거기서 꽤 자주 쓰이는 관용구였다. 김독자가 왜 같은 인간도 아닌 개에 대해서 첫눈에 반하고 있는지는 잘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다음 김독자가 내민 질문에는 유중혁도 할 말이 없었다.


…그러면 안 돼?


그러면 안 되냐는 말에 유중혁은 김독자의 시선을 슬그머니 피했다. 유중혁은 자신의 말 어디가 김독자를 건드렸는지 알 수 없었지만, 김독자의 얼굴은 전에 없이 어두운 표정이었기에 자신이 뭔가 실수했구나,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유중혁은 오늘만 해도 지난 몇 년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김독자의 낯선 표정을 보았고, 거기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미지의 책을 독해하는 사람이 되어 종이 위에서 헤매는 미아처럼 유중혁은 멍청하니 있다가, 겨우 한 마디를 내뱉었다.


―네 맘대로 해라.



하편으로 이어집니다.

결국 어디에 한눈을 팔아도 글쓰기로 돌아오게 되어 있다 문의는 side_n_tabl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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