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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리지널 사니와 있습니다!!





이치몬지 노리무네는 자신의 주인에 대해서 무엇이든 이름을 붙여볼 수 있었다. 명랑 소녀, 부끄럼쟁이, 미련한 것. 이름 붙일 때마다 어린 주인의 반응은 다양했다. 생일 폭죽처럼 경쾌한 웃음을 터뜨리고, 가라앉은 물가처럼 조용히 화를 내고, 그 나이대의 여자애답게 토라지고, 아무런 말 없이 입술을 사려물기도 했다. 수많은 별명 아닌 별명이 생겨났고, 그나마도 날마다 바뀌기 일쑤였다. 그것은 소년이 강가에서 모아온 조약돌 같은 것이라. 있지도 않은 소년 시절은 그의 안에서 적절한 형태로 동거를 함께 한다. 

마음 속에서 그는 누군가가 다치지 않도록 온통 둥근 그 자갈들을 답지 않게 손에 쥐고 굴려보았다. 입 안에 남는 발음과, 마음을 통과해나가는 심상을 들여다보며. 

그렇지만 맑은 강물의 아래로. 맨발 아래의 그 조약돌들을 전부 건져올린다면. 그 강의 바닥에서 가장 치울 수 없는 돌덩이는 단 하나일 거라고 생각했다. '고집쟁이'. 그 말 하나 뿐.




유리코는 자신의 몸 상태를 쉬이 과신하는 편이었다. 자신들과는 다르게 분명히 타고 나기부터 애초에 인간의 아이였을 텐데, 자신의 몸에 대해 잘 아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모든 관리는 대략적인―거기다 틀리기까지 한―어림짐작으로 주먹구구에 가깝게 이루어져 왔다. 거의 파멸적이던 생활습관은 빠르게 개선되었지만, 아무리 주변에서 챙겨줘도 감각만은 여전히 다른 사람 것만도 못했다. “어쩌겠어요. 스물다섯 해 만으로는 제 자신의 몸이랑 별로 친해질 수 없었나봐요.” 웃는 얼굴에는 씁쓸한 기색조차 없이 산뜻했다. 

그러니 대부분의 남사들은 어느 정도 넉넉히 알고 있었다. 자신의 주인은 머지 않은 언젠가 한 번쯤, 크게 앓는 모습을 보이리라고. 

짐작은 어긋나지 않았다. 햇살이 좋은 아침, 유리코는 묘하게 멍한 표정으로 복도를 걸어나왔다. 모두가 인사를 했지만, 받아주지 않았다. 아니, 받아주지 못했다. 멍한 시선을 떨군 유리코가 조심히 양팔을 벌렸다. 상체를 숙였다가, 조금 주춤하고, 이내 무릎을 굽히더니, 곧 완전히 웅크린 채 엎드린 자세로 바닥에 누워 붙었다. 쓰러지지 않기 위한 최선의 방편이었다. “대장!” 가장 먼저 놀라 다가간 건 야겐 토시로였다. 


“아, 미안, 나 토할 것 같……” 

“방으로 가서 누워야겠는데. 일어설 수 있어?”

“70퍼센트 정도는…….”

“…….”

“……그냥 농담이었는데.”


목소리는 기어들어가다시피 했다. 아무도 웃지 못할 농담이었다는 것을 알고 나서야 유리코는 입술을 꾹 눌러 닫았다. 

방에 누운 유리코는 연신 미안하다는 이야기를 했다. 뭔가 필요하면 불러야 해, 하며 손이 닿는 곳에 작은 종을 내려두었지만 유리코는 그것을 받자마자 멀리로 밀어두었다. 그냥 자면 괜찮아져. 일어나면 죽만 해주라. 그 말에 미츠타다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는 것밖에는 도리가 없었다. 자신들의 주인은 늘 이렇게 묘하게 고집을 부리는 구석이 있었다. 약한 모습을 숨기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돕게 두지도 않는. 

하지만 그게 모두에게 통하는 것도 아니었다. 


“들어가겠네.”

“……저 아직 안 불렀는데요?”

“그럼 그저 그렇게 누워서만 있을 작정인 겐가.”

“환자가 그럼 누워있지…….”


그렇게 유리코가 다 들리는 목소리로 투덜거리든 말든 노리무네는 곁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물수건을 갈아주고, 턱 아래의 목에 슬 손등을 대서 체온을 재보았다. “열이 이리 펄펄 끓는데.” 유리코는 들키지 않게 혀 끝을 입 안에서 몰래 깨문 채 간지러움과 어지러움을 참아야 했다.


“원래 열이 잘 오르는 체질이라 그래요. 누워서 자면 낫는대도…….”

“그럼 괜히 신경 더 쓰지 말고, 얼른 눈부터 감아야지.”

“잔소리는.”


그렇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옳은 소리 뿐이라, 유리코는 오랜만에 순순히 눈을 감았다. 온몸을 지배한 열기 때문에, 눈을 감자마자 단 잠이 쏟아졌다. 초콜릿 한 조각을 혀 아래에 넣어둔 것처럼.




복도에 당신이 서 있다. 나는 언제나 당신을 맞이할 때면 기대가 된다. 시간은 오후 6시 30분. 오차는 매일마다 대충 15분 안팎 정도. 나는 그 사람을 보고 싶어하고, 그 사람도 나를 애틋히 여긴다. 직장에 나가있는 순간만 아니라면 항상 붙어있는데도, 그 짧은 시간이 매번 아쉬워서. 다른 곳에 새지도 않고 그 사람은 집으로 바로 온다. 특별한 날에는 가끔 선물을. 그래도 언제나 7시 전까지. 

언제나 쓰는 리본으로 머리카락을 올려묶고 당신을 기다린다. 오늘의 저녁은 관서풍의 스키야키. 재료를 정갈하게 통통통, 썰어두고 있자니 마음이 쉽게 들뜬다. 아직은 신혼, 서로 모르는 게 많다. 하지만 저번의 전골 요리도 좋아해 주었으니까, 스키야키도 비슷하게 좋아해주지 않을까? 모르는 것마저 에두른 짐작과 들여다보기로 즐거운 기다림이 된다. 누군가는 결혼을 하게 되면 설렘이 덜할 거라고 말하는데, 그러지 않을 것 같아. 평생 즐거울 것 같다는 생각을 경솔하게도 하며, 상을 마저 차렸다. 비싼 값을 치르고 사온 희미한 옥색 식기를 놓고, 그 옆에 가지런하게 수저를 놓는다. 그리고는 물기 어린 손을 앞치마에 닦으며, 사랑하는 당신께서는 언제쯤 집에 돌아오시려나 생각한다. 


“돌아왔네.” 

“어서 오세요!”


당신은 당연하다는 듯이 내 이마에 가볍게만 누르는 귀여운 입맞춤을 남긴다. 그 마음이 받아도 받아도 어쩔 수 없이 좋아 푸스스 웃고 만다. 


“오늘은 상이 제법 화려해 보이네만?”

“스키야키로 정해봤어요. 어쩐지 특별하게 챙기고 싶은 기분이어서.”

“이거야 원, 나의 사랑스러운 아내가 집에 있으니 저녁을 기대하지 않을 도리가 있겠나.”


사랑스러운 아내. 나의, 사랑스러운 아내. 풀어진 호흡의 사이사이로 달콤한 낱말들이 들어온다. 사랑은 식욕처럼 침샘을 자극하여 입 안에는 온통 단 침이 잔뜩 고인다. 크리스마스, 생크림 딸기 케이크를 눈 앞에 두고 발을 구르는 어린 아이처럼. 결국 그 말에 나는 기쁨을 참지 못하고 당신을 끌어안아 본다. 

그러다가.

아니, 그제서야. 

어라, 하고 깨닫는다. 촉감이 어딘가 공허하다는 것을. 

몸을 둘러안은 팔에 감각이 없어 문득 시선을 돌려본다. 

그러면 알게 된다. 아, 나는 이 여자의 ‘바깥’에 있구나. 시선을 든 채 물러나 본다. 진짜 ‘나’의 유령 같은 시야는 여자의 올림머리로 향한다. 한 데 둥글게 묶어둔 헤어스타일을 지지하고 있는 것은 파란 리본. 여자는 윤기가 좋은 까만 생머리였다. 눈은 부드러운 갈색. 이게, 뭐야. 하나도 닮지 않았잖아. 

이 기억 중 자신의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다가 누군가 어깨를 흔들어 깨워 헉, 하는 숨소리와 함께 잠에서 깨어났다. 자신은 깨어나자마자 울고 있었다. 아마 깨기도 전에 이미 울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유리코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로 상체를 세운 채, 열린 눈을 깜빡이는 것조차 잊은 채 주륵주륵 눈물을 쏟아내고 있었다. 이마 위에 있던 물수건이 툭, 하고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이마에 찬 기운이 남아있는 것을 보면 분명 갈아준 지 얼마 안 된 것이리라. 열도 많이 내렸고, 이제는 어지럼증도 많이 나았는데. 그런데 어째서? 주체할 수 없이 흐르는 눈물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슬퍼서 우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어딘가에 구멍이 조그맣게 나서 그 틈으로 물이 새는 것에 가까운 기분이었다. 

노리무네는 마치 물에 빠졌던 사람을 뭍으로 건져내서 그를 들여다보는 것처럼, 신중하게 유리코를 바라 보았다.


“괜찮나?”

“네. 괜찮아요.”

“악몽이라도 꾼 겐가?”


그 말에는 다시 덧씌워지는 상이 있다. 가벼운 입맞춤, 사랑을 담아 불렀던 호칭, 공허하던 감촉. 그 모든 것에 섬짓한 기분이 든다. 아마 이 사람은 다정하니까, 지금 안아달라고 조른다면 조금 쯤은 안아주지 않을까. 그러면 그 비어있던 팔 아래의 외로움 같은 건, 잊어버릴 수 있지 않을까. 


“네, 악몽을 꿨어요.”


하지만 그건 잊을 수 없는 일을 더 늘려가는 것이나 다름이 없어서. 


“고생했군. 좀 더 잘 텐가?”

“아뇨, 됐어요. 뒷맛도 나쁘고.”

“그렇다면야.”


슬슬 몸을 일으켜 나가려는데, 그가 등 뒤에 대고 물었다. 


“그런데, 무슨 꿈을 꿨기에 그리 울었나. 보통 일도 아닌 것 같이 보였네만.”


그 말에는 걸음이 아니라 심장이 붙잡힌 듯한 기분이 되어버린다. 

안아달라는 것 정도는 상상할 수 있었지만, 이것만큼은 말할 수 없어. 애초에 그가 어떻게 반응할까? 무슨 악몽이냐고요. 당신이 저를 사랑해주었어요. 하지만 그건 제가 아니라 다른 여자더라고요. 그렇게 말한다면. 사랑 받는 꿈을 악몽으로 꾸고 현실에서의 당신을 원해 마지 않아 열까지 내는 것 같아 스스로 한심하기 짝이 없다고 한다면? ……그 모든 답변을 상상하고 싶지도, 상상할 수도 없어서. 


“노리무네 씨는 그러면 왜 그 때 ‘조금 울었’어요?”


이렇게 답하자 그도 대답이 궁하게 되어버린다. 그렇죠, 우리는 서로 대답할 수 없는 게 있으니까. 입을 막아버리는 것도 이렇게나 간단하다. 


“……지켜봐주셔서 고마웠어요.”


해결되지 않는 마음을 끌어안은 걸음은 무겁고도 느리게. 그렇지만 신중하게 바깥으로 나간다. 꿈은 사실이 아니고, 일어나려고 했던 일조차 아니지만. 사실이 아니어도 무엇보다도 진실에 가까운 것이라. 유리코는 자신의 마음을 헤집을 수 있는 칼자루를 넘길 수 없었다. 그것이 설령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고, 자신의 검이라 해도. 침묵하기로 결심한 일은 해묵어 녹슨 자물쇠로 잠긴 채, 열릴 기미가 없었다. 

아무도 부숴주지 않아 여전히 소녀로, 여자는 뭉그러져 죽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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