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색할 정도로 평온한 일상이 이어졌다. 가끔 일이 바쁠 때도 있었지만 언제나 그렇지는 않았다. 내가 내 마음을 알아차렸다고 해서 하루 아침에 많은 것이 바뀌진 않았다. 우리는 평소와 다름없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사랑과 미움은 어찌 보면 결이 같다는 것을 문득 느낀다. 


 불가피한 상황이 아니면 야근을 자제하자는 사내 캠페인이 시작되었다. 외국과의 시차 탓에 야근이 많을 수 밖에 없는 업무 특성상 얼마 안가 흐지부지될 게 뻔하지만 누구 머리에서 나온 생각인지 안 봐도 뻔했다. 오늘 못한 일은 어차피 내일의 내가 해야 겠지만, 일개미 입장에서 싫을리 없는 일이었다. 내 퇴근시간이 빨라지니 요즘 최재현은 기분이 좋다. 차에 시동을 걸면서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내게 고개를 돌리며 방싯 웃는다.


"저녁 먹고 들어갈까?"

"그러자."


 자주 가던 호텔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했다. 최재현은 오늘 유독 기분이 좋아보인다. 요즘 내내 그랬다. 잠을 설치는 일도 줄었고, 수면제의 도움 없이도 잠에 들 수 있었다. 잠이 안 올 때마다 하던 게임으로 나를 열받게 하곤 했으나 이제 게임도 관심 밖의 일이 되었다. 그래서 싸울 일도 미울 일도 없었다. 여러모로 우리 둘에게 잘된 일이었다.


 나만의 시간이 없어지고 있는데 그게 나쁘지 않았다. 이렇게 매일이 평탄하면 불안감이 엄습하기 마련이었으나 그럴 때마다 최재현이 날 무장 해제 시켰다. 단순하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 이렇게 허무할 정도로 쉬운 일이었다. 가끔 나는 왜 이 애를 그렇게 두려워했을까 궁금하기까지 했다. 모든 걸 다 가져놓고도 이 세상에 바라는게 오직 나 하나뿐이라는, 안쓰러워야 마땅할 그 아이를.


 최재현이 계산하는 동안 잠깐 들른 화장실에서, 문득 거울 속에 비친 얼굴이 낯설었다. 불과 며칠 사이에 최재현을 많이 닮아있었다. 이목구비 하나 비슷한 구석이 없는데 어디서 그런 느낌을 받은 걸까. 물 믇은 손을 들어 볼을 살짝 쓸어 내리다 말고 인기척에 손을 내렸다. 이미 거품이 모두 헹궈진 손을 연거푸 물에 씻으며 거울 너머로 뒤를 보았다. 빠르게 스쳐가는 남자를 보며 손을 페이퍼타월에 닦았다. 순간 익숙한 향기가 코끝을 스친다. 


 나는 그 비슷한 우디향을 맡으면 파블로프의 개처럼 그 남자를 떠올렸다. 오늘로 벌써 여러번이다. 그는 이제 다신 나를 보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윤선호에게 물었을 때 그는 나와 함께 한국을 떠난 이후로 행방을 찾을 수 없는 상태였다. 거울을 멍하니 보고 서 있다가, 정적을 깨는 진동소리에 다시 고갤 숙여야 했다. 윤선호의 전화였다. 퇴근 후에 윤선호가 내게 전화할 일은 거의 없는데, 나는 떨떠름하게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백지원. 재현이랑 같이 있어?"]

"어. 왜?"

["재현이 데리고 지금 여기로 좀 와야겠다."]


 윤선호의 목소리는 어딘가 다급하게 들렸다. 나는 페이퍼타월을 휴지통에 던져 넣고 화장실을 빠져나왔다. 무슨 일인데. 물으며 나왔을때 윤선호는 전화상인데도 소리 죽여 작게 말하고 있었다. 답답해서 크게 말하라고 다그치려 입을 벌렸다.


 ["회장님이..."]


동시에 계산을 마치고 날 기다리고 서 있던 최재현이 고개를 든다. 그리고 내게 웃어보인다. 


["돌아가셨어."]


 해사하고 밝은 웃음이었다. 저렇게 웃는 얼굴을 본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그 움직임이 슬로우 모션처럼 느리게 보였다. 어깨죽지에 소름이 돋았다. 그 오싹한 감각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일어나는 것이라 어찌할 수 없었다. 윤선호의 말이 이해할 수 없는 외국어처럼 들렸다. 문득 생경하고 이상했다. 그 언젠가 '죽여 줄까?' 묻던 최재현의 얼굴과 목소리가 왜 하필 그 순간 겹쳐 보였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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