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멘트 : 이건 로맨스 라구요! 라고 우겨 보았으나 다들 판타지라고 했습니다…….




5층 누각에서 내려다보는 황도의 밤거리가 그렇게 절경이라더니, 5층은 못 되어도 4층 지붕쯤 되자 비슷한 광경이 영녕의 눈앞에 펼쳐졌다. 심지어 여기는 난간조차 없는 눈밭 위. 자칫 걸음을 잘못 딛으면 큰일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영녕은 자리에 조심히 주저앉았다. 다행히도 다관 지붕은 충분히 커서, 바람이 분다고 위태로울 수준은 아니었다. 


영녕은 눈 사이에 조그맣게 웅크리고 앉아 저 바깥 거리를 바라보며 대장군저까지 자 공자가 다녀온다면 그 시간은 얼마나 걸릴지, 융롱이 생각한 대로 연회석에 있을지 등을 생각했다. 그러고 조금 더 가까운 아래를 내려다보고는 그 아찔함에 잠시 뒤로 물러서고, 아무리 서융롱이라도 그렇지 4층 지붕 위에서 자신을 내릴 수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2층, 최소한 3층이 되어야 하는 것 아닐까? 아무리 융롱이라고 해도 이렇게 높은 곳까지 올라올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혹시 자 공자가 층을 착각한 것일까. 지금 되돌아가서 한 층을 더 내려간 지붕 위로 이동한다면?


그런 별별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까 새삼스레 몸에 슬금슬금 한기가 스며들기 시작했다. 큰일이다. 영녕은 벽에 꼭 붙어앉아 바람을 피했다.


영녕은 저기 먼 길에 밝혀진 불빛을 바라보았다. 소란스러운 사람들 소리가 어디서 들리는 것도 같았다. 머리 위 누각에서는 다시금 음악을 연주하는 것인지 어떤지 느린 금 소리가 흘러나왔다. 시간이 얼마나 흐른 걸까? 영녕이 가만히 앉아 거리를 내려다보는데 문득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다관 근처를 밝힌 불빛에 비친 붉은 머리카락의 사람이었다. 영녕은 눈을 가늘게 뜨고 목을 빼 그 사람을 쳐다보았다. 그는 높이 올려 묶은 머리카락이 출렁거리도록 어딘가로 달려나가고 있었다. 혹시 자신이 아는 사람 가운데 하나인가, 싶어, 영녕은 그 사람의 움직임을 주시했는데, 그는 다관에서부터 거미줄처럼 이어진 황도의 밤거리로 빠르게 달려 이윽고 영녕이 볼 수 있는 범위에서 자취를 감췄다.


그러고 또 한참 별일이 없었다. 몸이 추워 얼마나 지났는지 시간의 흐름이 잘 가늠이 되지 않았다. 영녕이 옷을 꼭 여미면 앞섶에 숨겨서 가지고 온 화약 봉투와 요석 주머니가 가슴에 꾹 눌릴 따름이었다. 호오. 토끼털 목도리에마저 입김으로 불어낸 서리가 얹힐 것 같은 추운 섣달 밤. 


얼마나 기다렸을까, 영녕은 발갛게 언 코끝에서 매캐한 냄새를 맡았다.


……매캐한 냄새?


영녕은 벌떡 일어나지는 않았다. 혹시나 미끄러질까봐 거동을 조심하는 것도 있었고 밤바람에 오래 노출된 몸이 생각만큼 민첩하게 움직여 주지 않아서 그런 것도 있었다. 벽을 짚은 영녕이 주춤주춤 지붕 위에서 일어서면 어딘가에서 피어오르는 연기가 지붕 모서리쯤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영녕이 앉은 쪽과는 반대되었으되 거리가 무척 가까웠다. 


혹시. 설마. 아니겠지. 불안한 예감을 안고 영녕은 자리에 머물러 있다가 조심히 맞은편을 향해 발을 옮겨 보았다. 그러나 더 걸음할 것도 없이, 영녕이 목격한 연기와 맡은 냄새에 대한 정체는 밝혀지고 말았다.


"부, 불이야!"

"이게 무슨 일인가! 각다관에 불이 났다!"


발 아래에서 떠들썩하니 외치는 목소리들이었다. 영녕은 철렁 가슴이 내려앉는 듯했다. 건물에서 불이 나다니. 발 아래서 연기가 올라오는 것으로 보아 저층에서, 아마 부엌이나 하는 곳에서 일어난 불일 텐데, 그러면 그 건물 지붕 위에 있는 자신은 어떻게 된단 말인가? 저도 모르게 마음이 급해졌다. 융롱과 자 공자의 소식은 아직 없었다.


지상에서는 일대 소란이 일어나는 것 같았다. 창문 안쪽으로도 소리를 지르며 내달리는 사람들 소리가 우수수 들렸다. 아, 어쩌면 이 참에. 영녕은 생각하고, 도로 창문을 넘어 실내로 들어가려고 했지만, 키보다 조금 모자란 높이로 솟아 있는 창문 턱은 도로 넘어가기에 생각 이상으로 높았다. 발을 박차 보아도 위로 솟을 수가 없고 힘껏 매달려도 대롱대롱 창틀을 잡고 늘어진 모양새였다.


벽이라도 발로 짚고 올라가면 좋을 텐데. 얼어붙은 나무 벽 외부는 미끄러웠고 잘못 힘을 쓰다 미끄러지는 날에는 까마득한 아래로 추락할 일이 염려되었다. 영녕은 창틀을 붙잡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이 일을 어쩌면 좋단 말인가. 영녕은 생각하고 생각했지만 이번만은 생각이 그를 도와주지 않았다. 어느새 미약하게 오르던 연기가 무럭무럭 자라나고 발 아래 사람들의 비명, 지켜보는 이들의 웅성이는 소리, 그리고 빠각빠각하며 아래층에서 나무가 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5층 사람들은 이미 다 빠져나갔는지 창문 너머가 지금은 조용했다. 


불길은 이제 영녕에게도 보일 정도로 타고 올랐고, 아래에 보이는 거리에서는 다관에서 빠져나온 사람들이 아우성을 치며 근처로 달리거나 이 쪽을 바라보거나 하며 난리통이었다. 불을 꺼야 한다는 목소리도 섞여 들렸다. 영녕은 잠시 고민하다가, 배에 힘을 주어 커다란 소리로 외쳤다. 


"지붕 위에 사람이 있소!"


저 아래에서 몇몇 사람들이 고개를 위로 쳐드는 것이 보였다. 영녕은 다시 한 번 외쳤다. "여기요!"


더이상 정체를 들키면 안 된다거나 소동을 만들었다거나 하는 점은 중요치 않았다. 목숨이 경각에 달할 상황인데 그 무엇이 더 우선할 수 있단 말인가. 


사람들은 저 아래에서 웅성웅성하고 있었지만 당장 별다른 움직임이 보이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불길에 휩싸인 다관 안으로 들어올 수도 없었으되 불타는 건물을 타고 올라오기도 어려웠던 것이다. 영녕은 관병들이 몰려오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그들도 불을 끌 수단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 것 같았다. 몇몇 사람들이 또 거리를 빠져나가 달렸다. 지붕 위에 있어서 돌아가는 상황을 볼 수 있는 것만이 그에게 일말의 다행이었다.


영녕은 숨을 몰아쉬며 차가운 머리로 생각했다. 위기 상태에 놓이니 몸이 떨리는 것과 반대로 정신만은 너무나 맑게 돌아갔다. 만약 여기서 내가 죽으면……. 열기가 훅 끼쳤다가 지붕 옆에 쌓인 눈 더미와 함께 후두둑 떨어졌다. 영녕은 일단 불길이 가장 미치지 않아 보이는 벽 안쪽으로 붙었다.


"사람들이 물을 가지고 오고 있소! 조금만 버텨요!"


그가 움직이는 것을 주시하고 있었는지 응원하는 외침이 들려왔다. 그러나 다관을 둘러싼 불이 타오르는 기세는 상당하여 몇 동이의 물로 쉬이 꺼질 것 같지 않았다. 영녕은 생각한다. 그런데 왜 갑자기 불이 난 것인가?


그때, 우지끈 하고 발밑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며 영녕이 딛고 있는 층 전체가 몇 장이나 아래로 가라앉았다. 영녕은 무심코 잡고 있던 창틀을 꽉 붙잡았다. 바닥이 아슬아슬한 각도로 기울어졌다. 


"언니!"


영녕이 거의 건물에 매달린 순간이었다. 기다리던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나 싶더니 강한 힘이 영녕의 허리를 안은 채 휙 하고 그 전신을 잡아채어, 발 아래 허공으로부터 얼마간 떨어진 아래층 지붕 위로 내려앉았다. 방금 젖어 불이 사그라들기 시작한 좁은 공간에는 반은 숯, 반은 나무인 채 시꺼매진 판자들이 붙어 있었다. 림은 자기도 모르게 융롱의 어깨를 잡고 그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융롱은 다시 한 번, 불길이 아직 다 잡히지 않고 무너져 가는 다관에서 다음 도약할 곳을 찾고 있었다. 연회색 눈동자에 밤하늘의 불길과 다관의 그림자가 이글이글했다. "언니, 그대로 꽉 붙잡고 계세요. 몇 번 더 뛰어 내려가야겠습니다." 융롱은 저 아래 다관의 불쑥불쑥 튀어나온 서까래나 무너진 벽 위 등 발을 딛을 곳을 모색하는 듯했다. 근처의 눈은 이미 녹았고 영녕의 손발만이 눈 속에서 긴장하고 움직인 턱에 빨갛게 얼어 차가웠다.  


융롱은 빠르게 눈을 굴려 다음 발이 닿을 위치를 찾고 그대로 몸을 날렸다. 골조상 단단할 만한 곳을 목적했지만 매캐한 연기 속에서 순간의 판단으로 하는 것이었다. 자칫 잘못되면 딛은 자리가 또 무너져 내릴 수도 있었기에, 재질부터 여린 판자나 풀로 엮은 지붕 위를 훌쩍훌쩍 뛰듯이 가볍게 날아야 했다. 여차하면 또 다시 뛰어오를 수 있도록. 


그런 움직임이었기에, 영녕은 착륙으로 인한 충격을 거의 느끼지 않을 수 있었다. 융롱은 자신을 안고 공중을 날듯이 뛰어내려갔다. 두 번, 세 번, … 그리고 마침내 그들이 지상으로 착륙했을 때는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사람들이 두 사람을 둘러싸고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냈다. "굉장하다!" "어쩌면 저리 몸이 날랠까!" 


"언니, 괜찮으세요?" 융롱이 귓가에서 속삭였다. 연이은 도약으로 조금 비틀거리던 림이 바로 서서 고개를 끄덕였다. "어쩜… 손이 얼어 있으십니다. 융롱이 조금 더 빨리 왔다면 이렇게까지 되지도 않았을 텐데……." 림의 두 손 또한 융롱의 손 안에 잡혀 있었다. 거의 통증처럼 온기가 전해져 왔다. "나는……." 영녕이 뭔가 말하려고 했지만, "아니에요, 언니. 집에 들어가서 얘기하셔야겠어요. 인력거가 있을 겁니다. 곧장 돌아가지요." 하고, 그들의 정체를 궁금해하는 듯한 군중들에게 융롱은 고개를 저어 보였다. "구한 사람의 안위가 아직 확실치 않으니 추후 이야기합시다." 


그렇게 둘이 아직까지 진화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는 다관을 뒤로 하고 나올 때 융롱이 아참, 하고 옆에 있는 사람에게 인사했다. 겨울 추위에 얼굴이 더 하얗게 된 자 공자였다.


"자 공자께서 언니가 계신 곳을 알려주셨어요. 참으로 감사드립니다."

"너무 늦지 않을 수 있어 다행이오. 군주. 몸을 보중하시길 바랍니다."


늦지 않았다기에 조금만 더 늦었어도 큰일날 상황이었지만 결론적으로는 그렇게 되었다. 영녕도 고개를 까딱해 사의(謝意)를 보이고 나자 이제 둘이 집으로 돌아가는 별밤만이 남았다.


"언니, 정말 어쩌다 거기 계셨어요. 제가 때맞춰 나오지 않았더라면……."


융롱은 깊이 안도와 뒤늦게 몰려오는 두려움이 담긴, 영녕군주도 제갈림도 처음 보는 한숨을 내쉬었지만 그것은 답을 요구하지도 책망하는 것도 아닌 혼잣말과 같았다. "제가 나오지 않았더라면……." 무시무시한 것을 상상하는 것처럼 융롱의 어깨는 조금 떨렸다. "일단은 쉬셔야겠어요. 바깥에 너무 오래 계셨습니다. 융롱이 그저 제 할 말만 한다고 해서 탓하지 마세요. 아직까지 이런 때에 어떻게 하면 상대를 위로할 수 있는지 융롱은 모릅니다."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탄식이 섞인 것도 같고 따스함이 섞인 것도 같았다. 문득 영녕은 융롱을 위로해 주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림은 손을 들어 융롱의 뺨을 감쌌다.


"아룡*, 괜찮아."


그 말에 아직 어린 무사는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겠다고, 림은 생각하면서 돌아가는 동안 내내 작은 동생을 달랬다. 융롱이 입을 비죽이며 '그러게 왜 그런 델 혼자 가셨어요' 하면서 섭섭하니 무모하셨니 하는 소리를 늘어놓을 때까지.


대장군저로 되돌아오면 늦은 밤이었다. 융롱은 언니가 목욕을 하셔야 할지 따뜻한 화로를 안고 기대 있어야 할지 혼란스러운 것 같았지만 곧 둘 다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림에게 화로를 안긴 채 목욕물을 준비해 달라고 시종들에게 말했다. 진행되고 있던 연회석도 파해 손님들이 돌아가거나 묵고 가는 와중이어서 집안은 조금 어수선했지만, 두 사람이 나란히 앉은 방 안은 훈기와 그들 두 사람의 그림자만으로 한산했다. 융롱은 이불을 꺼내 와 방 안에 구름같이 깔면서, "오늘은 같이 자요, 언니." 하고 말했다. 




아룡(阿龍) : 서융롱(西隆龍)의 애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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