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1. 


"나 참…. 필요없다니까."

"왜 언니 너 뭐 또 쓸데없는 샀어?"

"야. 공영현 너 언니한테 너가 뭐야? 뒤질라고."

"아 뭔데에."


뿅 하고 핸드크림을 꺼내는 영인에 영현은 웬일로 그런 걸 다 챙겼냐며 손을 내밀었다. 그 모습이 신기했는지 조금 떨어져 걷던 엄마 역시 다가와 물었다. 


"너도 늙었구나. 핸드크림이라니."

"아 뭐래. 나 원래 사무실에서는 쓰거든."

"갖고 다니는 꼴은 못 봐서 그렇지. 좀 짜 봐."

"나 참……."


영현과 엄마의 손에 콩알만큼 핸드크림을 짜준 영인은 인색하다는 비난을 받으며 제 손에 바둑알만큼 짜서 슥슥싹싹 발랐다. 부쩍 건조해지기 시작한 가을 날씨에 속이 촉촉해지는 감각이 나쁘지 않았다. 

'아앗! 관리해야 돼. 손 막 건조해서 트고 그런다고'

얼마 전에 그렇게 잔소리하더니. 몰래 가방 안에 넣어놓은 모양이었다. 빌려 쓴 핸드크림에서 나던 풀냄새와 기본적으로 결은 비슷했지만 살짝 더 부드러운 은은한 나무향이 퍽 마음에 들었다. 엄마와 영현 역시 그런 모양이었다.


"언니. 이거 냄새 되게 좋다. 내 것도 좀 사줘."

"맡겨놨어? 사람이 좀 염치가 있어야 할 거 아냐."

"사준 것도 아니면서 무슨 염치 타령이야? 어이없어."

"근데 정말 향 좋네. 너가 보통 때 쓰던 향수랑은 좀 다른 느낌이긴 한데."

"맞아. 성격에 안 맞게 약간 장미향기 나는 거 썼잖아."

"쓸데없는 수식어가 붙네. 자꾸."


영현에게 으르렁거리곤 영인은 희수의 핸드크림과 같은 브랜드의 핸드크림을 쏙 가방 안에 도로 집어넣었다. 


"선물받은 거라 그래."

"앗. 설마?"

"너 연애하니?"

"아 내가 물어볼랬는데."

"뭐. 어. 하지. 엄마 딸 이 외모에 못 할 것 같아?"

"그 성격에 잘도 하네."

"닥쳐. 공영현."

"너는 언니가 돼선 동생한테…. 누구?"

"엄마도 본 적 있을걸?"


영인의 말에 엄마는 골똘히 생각을 하더니 살짝 미간을 구기면서 물었다.


"혹시 그 지수라는 걔?"

"아니야. 뭔…."

"아니 네가 주위에 사람이 좀 없는 편이어야지? 걔가 예쁘니까 혹했나 했지."

"아 그 눈 왕큰 언니? 졸업사진서 봤어. 예쁘던데."

"예쁘긴 한데, 아니야. 땡."

"다행이다. 얘. 엄만 걔 좀 여시 같아서 별로였거든. 차라리 뭐야 걔 그 참하게 생긴 애. 키 크고. 수희였나?"

"희수?"

"맞아. 맞아. 엄만 그런 애가 좋더라. 네가 맨날 불여시 같은 것들만 만나니까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언니 얼굴 존나 보지. 꼴값 오져."

"넌 유치원 선생이란 게 그렇게 막 존나에 오지네 뭐네 써도 돼?"

"으으응. 어쩔. 다음 꼰대~"

"존나. 뭐래."


철딱서니 없는 두 딸의 대화를 엄마는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그리곤 영인의 가는 팔을 탈탈 흔들며 물었다. 


"아무튼 누군데?"

"와 사생활인데 완전 배려 없어."

"진짜 말하기 싫었으면 아는 사람이라고도 안 했을 거잖아."

"사람이 나이 먹고 철이 드니까 말이지."

"지 할 말만 하는 건 여전하네. 어케 연애를 하는 거야?"


영현은 기가 막힌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으나 영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화려하지 않고 참한 사람의 매력을 알겠더라고."

"뭐어? 정말? 희수? 그 일등며느리감?"

"뭐라는 거야."

"너무 잘됐…. 잠깐, 걔 결혼 한다고 그랬었잖아?"

"와. 쓰레기네. 공영인."

"어? 뭔. 아아악! 왜 때려?"

"아니. 멀쩡한 남의 가정을 파탄을 내?!"

"누가 가정을 파탄댔다는 거야!?"

"결혼하는 친구한테 손을 대? 네가 제정신이니?"

"아 걔 남친이 바람피웠어. 아 왜 나한테 그래?!"


영인은 억울한 나머지 평소에 안 지르던 소리를 빼액 질렀다가 이게 어디서 엄마한테 악다구니냐며 주차를 하고 온 아빠에게 뒤통수를 후드려 맞았다. 아빠는 꼬시다며 손가락질을 하는 영현과 팔짱을 끼고 있는 엄마에게 자초지종을 물었다. 


"너 내가 그렇게 키웠냐?! 뭐? 애인 있는 애를?!"

"아 아니라고. 헤어졌다고! 바람피운 건 그 새끼인데 왜 나한테 지랄, 아! 아프다고!"

"이게 부모님 앞에서 욕은."

"아 엄마가 먼저 오해했잖아!"

"서른 먹어서는 철딱서니 없게…. 아무튼 아니라고? 수상한데."

"내 가정 내 평판 왜 이 모양이야."

"네가 좀 약간 아빠 닮아서 막가파잖아. 그랬구나. 어휴 우리 며느리 고생이 많았겠다."

"안 닮았거든. 그리고 뭐 며느리?"

"그래. 엄만 걔 맘에 든다. 아주 맘에 쏙 들어."


턱을 만지며 흐뭇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엄마에 영인은 오만상을 찌푸렸고 아빠는 내심 궁금한지 엄마의 어깨를 쿡쿡 찌르며 물었다. 


"누군데 그래? 당신 봤어?"

"당신도 봤어요. 그 얘 졸업식 때 사진 찍어준 친구."

"아 그 참한 아가씨? 그 아가씨가 너를 왜?"

"그니까 내 평가 왜 그러냐고."

"언니 월급은 쥐꼬리에."

"비실비실하고 말도 안 듣는 게임 오타쿠잖아."

"맞아."

"와 진짜 딸한테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니야? 나만한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다고? 그리고 내가 언제 말을 안 들었어?"

"너 행시 그만둔 거부터……."

아 안 들려. 안 들려!!"

"애새끼. 진짜."




41.2. 


한 대 더 후드리찹찹 맞고서 영인은 식당에 와서 자리에 앉아서도 가정폭력이라며 입술이 댓발 정도 나와서는 툴툴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엄마는 같이 사는 친구가 걔라는 말까지 듣고선 잔뜩 신이 난 모습이었다. 


"어머. 걔 정말 너무 참하고 이쁘게 굴던데. 난 며느리 갖고 싶어서 아들 낳고 싶었는데 잘 됐다. 얘."

"아 미친 거 아니야. 며느리는 무슨."

"엄마한테 말버릇!"

"사진 있어? 그 언니도 별스타 해?"

"신경꺼라? 남친도 없는 게."

"왜 지랄이야? 아. 우리 가족 밴드 봐야겠다. 거기 공영인 졸업사진 있지."


영인은 괜히 이야기했다며 얼얼한 뒤통수를 만졌다. 병원에 갔다온 뒤라 일부러 모두 이렇게 답지 않은 호들갑을 떨고 있는 거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희수에 대한 관심이 영인은 달갑지만은 않았다. 


"아 그만해."

"왜? 언제 데리고 놀러 와."

"그래. 인사하게."

"아 됐어. 희수 부담스럽게. 인사는 무슨……. 이제 사귄 지 100일도 안 됐어."

"부담은? 우리가 뭐 며늘아기 잡아먹니?"

"시집살이도 아니고 뭐야. 진짜."

"어머 어머 얘 좀 봐라 얘~ 같이 살면 사실혼 아니야? 며느리지! 그럼 뭐, 사위니?! 애가 진짜 순하더라고요!"

"그래? 정말 왜 쟤를 만나지…."

"여자 며느리는 괜찮은데 또 말 잘 듣고 순할 것 같아서 좋다니. 무지 깨어있는 거야. 아님 무지 닫혀있는 거야? 열림교회 닫힘도 아니고 뭐야? 하나만 해 좀."

"싫단다. 그리고 며느리는 원래 여자야."

"언니가 남자 며느리 싫다며. 무신론자 주제에 교회 드립은 또 뭐야."


영인은 오만상을 썼다. 결혼 때문에 쓰레기네 집안에 시달린 희수에게 더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다. 물론 자신의 집안이야 비슷비슷한 성격에 나쁜 사람은 없었지만, 어쨌거나 모르는 어른들이 편할 리 없었다. 영인은 됐다고 일축하곤 숟가락을 깔았다. 그래도 회사 생활 하더니 인간은 됐다며 칭찬하는 부모님에게 다시 인상을 팍 쓰곤 영인은 영현에게는 젓가락만 세 개를 건넸다. 영현은 보답으로 소주컵에 물을 따라서 건넸다. 




- 여보세요! 영인아!

"잘 도착했어?"

- 응. 아빠가 데리러 와서 공항에서 금방 왔어.

"다행이네. 피곤하겠다."

- 조금? 아 양갱 엄청 맛있더라.

"벌써 먹었어?"

- 응. 연우가 예쁘다고 뭐냐고 물어 봐서. 진짜 맛있더라! 고마워….


어제만 하더라도 이런 법이 어디 있냐며 억울해 하더니 순순히 고마워하는 네 귀여웠다. 하긴 어제도 인절미 맛있었다고 바로 고맙다고 하긴 했지. 영인은 그 모습을 상상하며 베란다 창틀에 팔꿈치를 올려놓고 턱을 괴었다. 


"계속 화낼 줄 알았는데 다행이네."

- 날치기로 통과시킨 건 그렇지만, 잘못한 게 아니라 나한테 잘한 건데 계속 화내면 안 되지!

"맞는 말만 하네."

- 고마워. 나는 아무것도 못 해 줘서 미안해.

"됐어. 야. 이 핸드크림이 양갱보다 훨씬 비쌀 것 같거든?"

- 아! 이제야 써 본 거야? 나 넣은 지 2주는 된 것 같은데. 

"그랬구나. 요새 다른 가방 갖고 다녀서 몰랐어. 고마워."

- 향 마음에 들어? 네가 자주 뿌리는 for rest도 약간 우디하길래. 골라 봤는데.

"되게 좋더라."

- 진짜? 신난다! 엄청 고민했는데!

"아. 조희수 진짜 졸라 귀여워."

- 뭐래애.

"어이쿠. 마음의 소리가 나와 버렸네?"

- 진짜 뭐래. 아하하. 


맑은 웃음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밤하늘을 올려다보면서 통화를 하고 있자니 세상에 자신과 희수만 있는 것 같았다. 영인은 휘영청 밝은 보름달을 보며 그 얼굴을 그렸다. 


"귀여운 조희수 빨리 보고 싶다."

- 나도…. 어제 잠깐 보고 못 봤어.

"최유민이 보면 진짜 꼴값이라고 욕하겠네. 40시간 못 봤다고 이런다고."

- 응. 유민이한테는 비밀로 하자!

"말할 생각도 없었어. 걔도 안 듣고 싶어할걸."

- 그건 그래. 

"내일은 어디 가?"

- 내일은 기장 쪽에 드라이브 갔다가, 용궁사 보고…. 저녁에는 민서가 추석 당일에도 영업하는 한식당 예약했대서 거기 가려고. 아! 점심엔 복국 먹는대.

"캬 복국 끝내 주겠네. 해장에 캬."

- 그래서 지금 술들을 퍼마시는 건가….

"사진 많이 찍어 와."

- 응! 영인이는 내일 뭐 해?

"우린 아침에 일어나서 차례 지내고…. 아마 뭐 친척들 오면 인사하고 고스톱 칠 듯?"

 - 그렇구나. 고스톱?

"어. 설마 칠 줄 모르는 건 아니지?

- …모를 수도 있찌이. 화투로 한다는 건 알아.

"진심? 천연기념물이네. 우리 희수."


영인은 호탕하게 웃었다. 그리고 한동안 통화를 하가 희수가 하품을 하자 영인은 잘게 웃었다. 


"자. 졸리지."

- 으응. 비행기에서 잤는데에.

"1시간도 안 타는데 거기서 자 봤자지."

- 흐암. 아. 영인아.

"왜애."

- 엄마 아빠도 되게 좋아하셨어. 양갱. 내가 막 자랑했어.

"다행이다. 입맛에 맞으셨나. 역시 안 달고 맛있는 게 최고라니까."

- 그….

"응?"

- 아니야. 역시 졸리긴 한가 봐. 흐암.

"그래. 자."

- 응. 사랑해. 내일두 전화할게.

"어 나도 사랑해. 언제든 톡 보내고 전화해."

- 응. 꿈에서 만나! 안뇽!


끊어진 전화. 영인은 화면을 가득 채운 조희수라는 이름과, 제주도에서 (몰래) 찍은 사진을 사랑스럽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이래서 사람이 진짜 말 한 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 거구나. 희수와 연애를 하면서 매일 천냥씩 받아 마음이 부자가 된 것만 같았다. 가끔은 돌려 주고 싶은데…. 방법을 좀 모색해 봐야 할 것 같았다. 영인은 잠시 고민하고선 안방 문을 쿠당탕 두드렸다. 두드릴 때 영감님을 찾았다가 아빠한테 한 대 더 얻어맞았다. 



41.3.

 

'부담스러울 수도 있으니까….'

이제 그냥 친구 사이도 아니고 애인 사이니까, 엄마 아빠가 보고 싶어하신단 말을 쉽게 꺼낼 수 없었다. 아직 자신은 두 분께 여자를 만난다는 이야기도 하지 못했으니까. 

영인이 선주와의 연애에서처럼 괴로워도 괜찮은 척하지 않기를 바랐다. 꼭 말하고 소개시켜 줘야지. 그래도 가족들 모두 영인을 좋아한다는 사실에 희수는 조금 기분이 좋아져서 방긋 웃고선 베개를 꼭 끌어안았다. 




"똑바로 차려라."

"아 왜 나만…."

"영현이는 사촌동생들이랑 놀아 주느라 정신없잖아. 네가 가서 놀래?"

"에이씨."

"가는 게 있음 오는 게 있어야지."

"어차피 쓰지도 않는 거면서 영감탱이 성격 진짜…."


혼자 음식을 날라가며 차례상을 차리면서 영인은 쉴 새 없이 궁시렁거렸다. 아빠와 막내 삼촌은 원래도 나이차가 많이 난데다가 결혼을 늦게 해서 사촌동생들은 아직 초딩, 중딩이었다. 삼촌과 숙모, 엄마가 열심히 음식을 데우고 송편을 찌는 동안, 원래 아빠와 영인, 영현이 상을 차리는 담당이었다. 그러나 영현이 사촌들 놀아준다는 핑계로 (자신이 본가에 놓고간 게임기나 쥐어줄 거면서, 영인은 빡이 쳤다) 빠지고 아빠는 어제 자신이 한 부탁을 핑계로 알밤이나 아작아작 씹으며 손짓으로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딸이 아니라 노빈가. 친부모 맞아?"

"어. 너 저기 다리 밑에서 주워 왔어. 이제 알았어?"

"뭔 소리야. 할배 영정 사진 나랑 똑같은데."

"그래 넌 나보다 아버질 닮긴 했지."

"아 또 잔소리 하려고."

"아주 한량에다가 예쁜 여자를 좋아해서는……."

"아 그래도 뭐 실제로 바람피워서 배다른 형제가 있는 것도 아니잖, 아악!"

"못 하는 소리가 없지."

"지도 얼굴 밝혀서 엄마랑 만난 지 한 달만에 결혼해 놓고… 아악! 아프다고. 혼잣말이잖아. 혼잣말! 신고할 거야."


영인은 팔뚝을 쓸며 다시 궁시렁거렸다. 그래도 할아버지를 아끼는 마음에 정성껏 상을 차리며 "할배 이거 좋아했잖아. 많이 드셔." 하는 영인에 아빠는 살짝 감동했다. 물론 이어지는 "그리고 로또 번호 좀 알려 줘. 이제 좀 거기서 짬 좀 찼잖어." 하는 말에 다시 맞을 수밖에 없었지만. 

소싯적에는 여자 뒤꽁무니 쫓아다니던 할아버지 덕에 할머니가 속이 좀 썩었다 들었지만 결과적으로 결혼하고 나서는 애 넷 낳고 금슬 좋게 잘 살았다. 어릴 적에 영인의 기억에도 맨날 싸워도 함께 있던 두 사람이었다.

그걸 알기에 사실 가족이 할아버지에게 바라는 소원은 한 가지뿐이었다. 제발 조금만 더 거기서 혼자 기다려 달라고. '사랑하는 할망구' 보고 싶어도 조금만 참아 달라고. 영인은 서울에서부터 주문해 들고 온 차례용 청주를 따르면서도 다시 한 번 부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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