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엘 가(家)의 직계 세 갈래 가문의 29대 가주인 라마엘 스피엘Ramaell Spihel은 자신의 귀하고 성스러운 아들의 청천벽력과 같은 선언에 강한 현기증을 느꼈다. 얼마나 무서운 말이었던지, 그녀의 어머니, 그리고 그 어머니의 거룩한 모습이 주마등처럼 스치었다. 아무리 들어도 믿을 수 없어 그녀는 아들에게 3번 째 같은 질문을 하고 있었다.


“그게 무슨 말이란 말이냐? 지금 네가 제정신인 게야?”

“프란페Franpe 수도원에서 이미 작별 인사를 다 마친 상황입니다. 수도원장님께서도 결국 허락해주셨다고 말씀 드렸지 않습니까.”

“내가 너를 자주 찾아가지 못했던 것을 원망하는 게야? 그래도 어찌 사명을 버리느냐!”


라마엘의 말에 아들은 힘없이 웃었다.


“사명을 따르는 것입니다, 어머님.”

“이게 사명을 다하는 것이냐? 부모에게 대들고 있는 게 아니고 무어란 말이냐. 감히 스피엘가의 위명을 짊어지고서 그 길을 포기하겠단 말을 어찌 스스로 한단 말이야! 네가 누구냐. 축복받은 비올레테 아우라Violette Aura가 아니냐!”


크게 화가 난 얼굴로 라마엘 스피엘은 아들에게 윽박질렀다. 어리고 순한 다섯 살이었던 그의 아들은 이런 엄한 교육에 금방 입을 다물고 순순히 부모를 따랐었다. 다섯의 나이로 부모 곁을 떠나 이 나라 최고 수도원에 보내졌을 때도 엉엉 울면서 부모에게 손을 내밀었지만 엄하게 타이르니 금세 입을 다물었었던 것이다. 15년이란 시간이 흘러 멋진 청년이 되었다 한들 천성이 어디로 가진 않을 것이었다. 순한 성품의 사제라는 상징인 검고 긴 머리칼을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땋아 내리고 주름 하나 없이 깨끗한 보라색 사제복을 걸친, 스피엘이 자랑하는 바로 ‘그 율리우스 스피엘Julius Spihel’이 아니냔 말이다. 장차 이 나라의 가장 젊고 강한 대주교가 될 인물이었다. 그러리라고 아무도 의심한 적이 없는 일이 될 터였다.


“가문을 위해 저를 사제로 만드셨을지는 몰라도, 저는 이제 환속하려 합니다. 제 의지는 확고하고 앞으로의 계획도 이미 다 세워두었습니다. 그러니 부모님께서도 너그럽게 이 아들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환속? 너 돌았구나. 잠깐 수도원을 떠나 있는 것이 아니라 환속?”


라마엘은 벌떡 일어나서 아들의 앞으로 잰 걸음으로 다가갔다. 아주 작았던 아이는 다 큰 성인이 되어 있었고 그 키는 어머니를 뛰어 넘고 있었다. 가주좌에서 내려다 봤던 모습과 또 달랐다. 가까이서 보아도 율리우스의 눈매는 선하여 누가 보아도 완벽한 사제의 모습으로 그렇게 서 있었다.


“네가 정말 돌았구나.”


율리우스는 미소 짓지도, 미간을 찌푸리는 일도 없이 단호하게 말했다.


“저 율리우스 스피엘 환속하여 그랑데차우렐Grande Zaurrel 마법학교에 입학할 예정입니다.”

“가주에겐 명령권이 있다. 당장 취소하여라!”

“고작 이런 일로 아들에게 가주의 권한을 쓰시리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국가중대사에나 쓸 권능입니다.”


라마엘이 흥분해서 스프엘가 가주의 최고권한을 들먹였다. 그의 아들은 단호하게 그 말을 받아 넘겼다.


“무엇보다도 저는 15년간 프란페 수도원에 사제로 봉사하였으니 저에게야 말로 가문을 초월한 면책권이 있다는 걸 모르시진 않겠죠.”


라마엘은 크게 소리 지르려다 그 말을 듣고 낭패한 얼굴을 했다. ‘비올레테’를 놓아줄 수도원이 아닐 텐데 어째 거기서도 율리우스를 놔줬다 했다. 수도원장은 그 같은 인재를 허망하게 잃을 사람이 아니다. 15년을 믿고 따른 사람의 고집을 꺾었다면 생각보다도 더 심각한 일이리라. 라마엘은 부드러운 방식으로 설득해보자며 방향을 틀었고, 볼에 어색한 미소를 걸고 입을 열었다.


“율리. 프란페 수도원에서도 아니, 하이리히츠Highrichts 교구 전체에서도 너의 환속은 반대할 일이다. 그렇다면 이 나라 전체의 문제가 되기도 한단다. 모두가 반대하는 일을 하면서 그 하찮고 폭력적인 마법이란 잡학에 빠져 너의 미래를 망친다는 것은 너무나도 큰 손실이야. 그리고 너에 대한 기대가 무척 컸기에 너에겐 많은 적이 생길 것이고 또한 그로 인해 돌이킬 수 없는 미래가 펼쳐질 거야.”


말투는 방금 전과 비교해 상당히 누그러들었지만 그 내용은 협박과 다름이 없었다. 시종일관 단호하긴 하지만 평온한 표정을 유지했던 율리우스의 미간에 드디어 가볍게 주름이 졌다. 사제에겐 직업병이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엄청난 수준의 평정심이 율리우스에겐 선천적으로 주어졌었고 후천적으로 단련되었다. 하지만 제 아무리 율리우스라 해도 부모의 이러한 태도에는 미간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어머님께 말씀드리러 온 것은 허락을 받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통보입니다.”


그리고 그의 심정만큼이나 율리우스의 톤은 차가워졌다. 그 말에 아주 오랫동안 자식에게 관심을 끊었던 라마엘에게 약한 상처가 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뭐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율리우스는 등을 돌리고 부드럽지만 건조한 톤으로 말을 이었다.


“일주일간 여기 머물 예정입니다. 매일 절 설득하러 오시는 건 상관없지만 저를 꺾진 못하실 거예요. 전 이제 다섯 살이 아닙니다. 그럼.”


사제들에게 절대적으로 평온한 마음가짐만큼이나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고요한 발걸음이라고 한다. 마치 고양이처럼 아무 소리 내지 않는 율리우스의 발걸음은 늘 다른 사제들에겐 경외의 대상이었다. 몸에 밴 습관은 어쩔 수 없는지 길게 땋은 머리가 거의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 가볍고 조용히 가주의 접견실을 떠났다. 성격 상 한숨을 쉬진 않았지만 자신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으면서 말이다.











파로상 살롱Farosan salon. 프란페리아의 수도 뉴프란페에서 가장 고급스럽고 은밀한 살롱이다. 드나들 수 있는 마담과 무슈들은 프란페리아에서 손꼽히는 명문가의 높은 분들 뿐이라 여러 음모의 진원지로 악명이 높기도 했다. 보통 소문은 그 반절도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 통념이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곳엔 아무나 들어올 수 없다는 것이었다.


라마엘 스피엘은 선천적 효자였던 아들의 변심과 속 썩임으로, 요 며칠 동안 살이 쏙 빠졌다. 이에 대해 친한 마담에게 상담하고 싶은 마음에 은밀히 이곳으로 발걸음을 옮겨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가문의 자랑이 가문의 수치로 전락할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해야할지 상담할 상대도 많지 않았고 혼자서는 도무지 방책이 없었기 때문이다.


스피엘가의 가주의 상담상대. 이 나라에서 발은 가장 넓지만 한 번 들어간 이야기는 결코 밖으로 나오는 법이 없다는 베일에 싸인 해결사 ‘마담 브리기테madame Brigitte’는 라마엘 스피엘 정도는 아니었지만 상당히 곤란한 상황이었다.


상담을 요청한 아주 고명하신 가문이 오늘 따라 둘이나 되고 그 어느 쪽도 다음으로 미루기 곤란했던 것이다. 그래서 약속장소를 이곳 파로상 살롱으로 한 후 시간차로 만나 상담을 이어나갈 생각에 머리가 아주 복잡했다.


‘스피엘 가주가 나에게 고민을 털어놓는 날도 있구나.’


온갖 이야기와 추문은 모두 다 주워듣게 되는 브리기테였지만 황실 다음가면서도 비정치적인 세도가 가문인 ‘스피엘’은 늘 문제없이 모두의 존경 받는 모습을 보여 왔다. 신심이 깊어 명망 있는 대주교를 네 번이나 배출한 명문 중의 명문이었다. 그런 스피엘 가에서 상담을 요청했을 때 그만, 선약을 잊고 오케이 한 것이 지금 참으로 뼈저리게 아플 지경이었다.

그리고 선약이 되어 있던 사람 역시 한 가문의, 그것도 어마어마한 가문의 가주였다. ‘북의 판다’라고 불리는 용맹하고 힘 있는 변방의 무인가문이었다. 외부의 침입에 대해서 걱정할 필요가 사라진 지금에야 가세가 많이 기울었지만 황실을 제외하고 가장 넓은 땅을 소유하고 있고 황실은 여전히 자매의 예를 취하는 그 유명한 ‘칼레Calais’의 주인이다. 그녀와 선약을 했던 마당에 스피엘과 겹쳐졌다고 취소할 수는 없었다.


마담 브리기테는 약속 시간보다 일찍 살롱에 도착하였다. 누구도 기다리게 할 수는 없는 사람들이라 그녀답지 않게 긴장했다. 브리기테는 외투를 벗어 한 갸르송에게 맡겼다. 여느 때처럼 눈인사와 팁을 주기 위해 갸르송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어머!”


두 무서운 가문의 가주를 만나게 된다는 기대도 잠깐 잊고서 그만 소리를 내고 말았다. 브리기테는 애교 있게 웃으면서 갸르송에게 말을 걸었다.


“처음보네요. 이름이 어떻게 되죠?”

“마담 브리기테시죠? 저는 줄리앙Julian 이라고 합니다. 예약하신 곳으로 안내하겠습니다.”

“오늘 영 일진이 꼬인다고 생각했었는데 행운도 있네요.”


라고 말하며 브리기테는 5굴덴을 팁으로 내밀었다. 줄리앙은 그것을 자연스럽게 받으며 마담을 방으로 안내했다. 브리기테는 자신도 모르게 풀어진 입가를 톡톡 치며 줄리앙에게 시선을 흘낏 주었다. 떡 벌어진 어깨에 늘씬한 몸매, 뭣보다 눈이 다 시원해질 것 같은 화사한 외모가 너무나도 인상적인 청년이었다. 살롱을 운영하는 무슈 파로상이 어디서 저런 복덩이 같은 인물을 취직시켰는지 나중에 꼭 물어보리라 다짐했다.


얼마 안 있어 오늘의 상담상대가 줄리앙의 안내를 받고 등장했다. 그녀도 역시 여자라 그런지 갸르송 줄리앙의 화사한 얼굴 덕에 큰 고민거리를 안고 있음에도 미소로 입장했다. 엄청난 가문의 가주도 별 수 없단 생각을 하며 브리기테는 그녀를 맞이했다.







“그래서 내가 어째야할지.”

“정말 곤란하시겠어요.”


북의 판다라 불리는 칼레가는 원래 다산의 축복이 가득하여 부러움을 사는 가문으로 유명했다. 정확히는 유명했었다. 과거의 번영이 지금의 것이 아니라고 말하듯, 현재 중앙 직계의 대는 끊어지고 말았다. 현 가주인 마들렌 칼레에게 아이가 없었던 것이다. 무남독녀로 가주직에 오른 그녀는 얼마 안 있어 자신이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소식에 절망하여 더욱더 무예에 힘을 쏟아 감히 넘보지 못할 경지에 이른 것이 아이러니할 정도였다. 그녀에게 남편이 생겼다. 무척 야무지고 똑똑한 남자였다. 그는 칼레가문의 영광을 되돌리기 위해 노력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아이를 못 낳는 것만을 절망하지 말고 방계의 재능 있는 아이들을 직접 키워 가주로 만들어서 중앙에 진출하게 해야 한다고 말이다.

처음 마들렌은 고개를 가로저었지만 천천히 설득되었다. 그래서 칼레란 성의 뛰어난 재능을 가진 방계의 소년소녀들 가운데 엄중한 심사를 통하여 일곱 명을 선발하였고, 그들은 앞으로 칼레가문의 새로운 기둥이 될 것이다. 그런데.


“이그드라실Yggdrasil 그 녀석이... 그렇게 나올 줄 몰랐죠. 남편은 몸져누웠습니다. 하필이면 이그드라실이라니.”


이그드라실 칼레Yggdrasil Calais. 마들렌의 양자 양녀 중에서도 단연, 군계일학群鷄一鶴, 낭중지추囊中之錐라 여겨질 빼어난 녀석이었다. 그 많은 사람 가운데 뽑힌 일곱 명, 그 가운데서도 가장 우월했다. 고된 훈련을 아무렇지도 않게 이겨내는 것은 무인가문의 일원으로 큰 재능이었고, 머리가 비상하게 똑똑하고 정치에 능한 가문의 보배 이그드라실 칼레. 그가 스무 살이 되는 동시에 차기 후계자로 그를 지명할 것은 누가 봐도 뻔한 일이었는데 돌연, 이그드라실이 가주를 ‘영구히 포기할 것을 선언’ 한 것이다.


“어리지만 정말 대단하네요. 칼레 가주직을 망설임도 없이 포기하다니.”


듣고 있던 브리기테는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아이들은 가주직 승계를 아예 이그에게 미뤄두고 있었습니다. 저 역시도 심사를 통해 선정하겠다고 말은 했어도 이미 그 놈으로 굳히고 있었고요.”

“강제로 앉히시지 그러세요. 가주들에겐 후계자 지명권이 있잖아요. 명령권도 있을 테고. 게다가 교육을 전담했으니 거절하기 어려울 텐데.”

“참 약았더라고요. 그 녀석. 방계에게 우선적으로 가주직이 계승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안전장치가 있죠. 방계의 자손은 지명거부권이 있어요. 아니 거부를 해야만 하는 상황을 만들기 위한 안전장치일 뿐이죠. 제가 명령을 해도 그 녀석보다 직계에 가까운 사람이 존재하는 한 그 녀석은 무한정 거부를 할 수 있는 거죠. 근데 첫마디가 영구히 포기하겠대요.”

“정말 아까운 아이입니다.”

“제 말이요.”


마들렌 칼레는 어마어마한 한숨을 쉬면서 검지로 이마를 긁었다. 브리기테는 웃으면서 제안을 했다.


“그래서 아드님은 다른 계획이 있다는 겁니까? 그걸 모두 끊어버리세요. 할 게 없으면 다시 돌아온답니다.”

“하아……. 제가 손댈 수 없는 곳으로 가게 되더라고요. 그랑데차우렐 마법학교로 간다지 뭡니까. 입학수속도 모두 마쳤고 짐 싸놓고 기다리고 있어요. 게다가 그간 교육비를 모두 환원하겠다고 돈까지 들고 와서 얼마나 속상하던지.”


브리기테는 내심 ‘요놈 정말 대단한데.’란 생각을 하며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상담자로서 머리를 굴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스무 살이라고 했던가요? 그맘때 아이들은 부모의 밑에서 떠나고 싶어 합니다. 부모가 만들어준 틀을 벗어나고 싶어 하고 반항하고 싶어 하죠. 미래에 대한 의지만큼이나 그 또래 아이들에게 커다란 게 하나 있죠. 그걸 물고 늘어지세요. 아마 가주의 권한으로 가능한 걸 겁니다.”


마들렌의 눈이 이채를 띄며 번득였다.


“그게 뭐죠?”

“연애, 그리고 결혼이죠.”








브리기테는 잘생긴 청년 줄리앙의 신호를 받고 급하게 화장실을 간다며 자리를 비웠다. 브리기테의 ‘회심의 조언’에 대해 골몰히 생각하느라 마들렌은 정신없어 보였다. 마담 브리기테는 준비된 또 다른 방에 앉자마자 커튼이 젖혀졌다.


‘사제도 아닌데 겔베 아우라Gelbe Aura.’


“어서오세요, 마담 스피엘.”

“반갑습니다. 마담 브리기테.”


라마엘 스피엘은 사제를 배출하는 걸출한 집안의 가주이지만 그녀 자신이 사제는 아니었다. 하지만 스피엘가는 선천적으로 신의 축복인 ‘아우라’를 타고나는 사람이 많았다. 다만 그런 축복을 뽐내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그 아우라를 드러내고 다니는 경우가 많았다. 당연히 라마엘도 그 중 한 명이었다. 축복받은 고귀한 혈통이라는 걸 드러내길 좋아했다.

브리기테가 라마엘의 노란 귀고리 빛에 감탄하는 말을 시작으로 근황을 물었고 브리기테의 유연한 화법에 이끌려 자연스럽게 고민의 이야기로 들어갔다.


“그랑데차우벨 마법학교에 들어간다지 뭡니까. 이게 말이나 됩니까?”


라는 대목까지 들었을 때 브리기테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어디서 들었던 이야기인가 고민할 수도 없을 만큼 직전에 들었던 이야기랑 똑같았다.


“아드님이 그랑데차우벨 마법학교에…….”


하이리히츠 교구계에 최고의 인재와 무인가문의 최고의 인재라는 차이 빼고는 별 다르지 않았다. 그렇다면 해답역시.


“그, 그맘때의 아이들은 말이죠……. 반항하고 싶어 하고……. 그러니까요. 직접 권한을 쓰세요. 환속한 가문의 일원에게 명령할 수 있는 게 뭐죠?”

“마담 브리기테. 두서가 없군요. 그게 무슨 말이죠?”

“아드님께서 환속을 하신다면 인생에 가장 큰 기로로 현재, 그리고 나중에 올 결혼을 생각할 겁니다. 안 그렇겠습니까?”

“사제가 결혼이라뇨!”

“그러니까, 사제직을 포기하다는 건 결혼에 대한 희망이 있을 거라는 겁니다. 하지만 그 꿈을 직접 부수시면 아마 다시 생각하지 않을까 해요. 자신의 반항의 ‘대가’라는 것에요.”


브리기테가 방금 전 칼레가의 가주에게 한 것과 아주 비슷한 말을 뱉었을 때 그제야 ‘아!’하는 얼굴을 하며 방긋 웃음을 지었다.


“가주는 가문의 일원의 배우자를 선택할 권한이 있었죠! 맞아요!”


그러면서 라마엘은 박수를 치다가 다시 시무룩해졌다.


“그래도 안 들으면 어쩌죠.”

“가주님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는 상대를 고르세요. 절대로 결혼하기 싫을 것 같은 상대를.”

“제 아이지만 제가 키우질 못해 어떤 여잘 싫어하는지도 모르겠고, 워낙 성품이 온화해서 어휴…….”


마담 브리기테가 스피엘가의 가주의 말을 받아 뭐라 말하려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커튼 뒤가 소란해지더니 아까 그 잘생긴 갸르송 줄리앙이 약간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디밀었다. 그 뒤로 칼레가의 가주가 크게 흥분한 얼굴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브리기테는 갸르송보다 100배는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벌떡 일어섰고 그녀가 일어서자 마들렌도 그녀를 따라 일어섰다.


“어머, 마, 마담!”

“마담 브리기테. 여기서 무슨…….”


가문에 아주 은밀한 비밀을 이야기하다가 사라진 사람을 기다리다 답답한 마음에 찾아 나섰더니 다른 사람과 함께 있었다. 흥분하면 물불을 못 가리는 성격의 마들렌이 크게 소리치기 바로 직전이었다.


“칼레의 주인이시어! 이 분은 스피엘의 주인이신 마담 스피엘이십니다. 이, 인사 나누세요.”


아무리 마들렌이라도 스피엘 가의 가주 앞에서 큰 소리를 낼 순 없었기에 울그락불그락 하며 고개를 숙였고, 마주 고개를 숙이는 마담 스피엘도 어리둥절해 했다.


마담 브리기테는 큰 당혹을 감추지 못하면서 말을 이었다.


“이게 참 엄청난 인연이네요. 호호호. 어떻게 고명하신 두 가문의 가주께서 이처럼 같은 고민에 빠져 계실 수 있는지요. 제가 일...부러.. 이렇게 한 자리에 모이시도록 한 것이 역시 좋은 방법이었습니다. 제, 제 비책을 받아들이시고 안 받아들이시고는 물론 가주님들의 결정에 달린 것입니다만.”


브리기테도 이즘 되니 자신이 뭐라 말하는 지 알 수가 없었다. 두 가주도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두 분의 아드님들께서 절대로 결혼하려 하지 않으실 배우자를 꼭 찾으시면 참 좋을 텐데 말입니다.”


브리기테는 횡설수설하며 자신이 내놓았던 조언을 계속 반복했다. 부디 절대로 결혼할 것 같지 않을, 만나자 마자 결혼을 무조건 포기할 수밖에 없어서 부모의 말을 따를 것 같은 사람을 찾아야 한다는 말을 했다. 마들렌과 라마엘은 잠깐 눈을 마주쳤다. 서로 ‘아 그 집안의 그 사람인가.’라는 평을 하는 동시에 같은 생각이 떠올랐는지 한참을 마주보고 있었다. 마담 칼레가 테이블에 다가와 앉자 마담 스피엘도 그녀를 맞이하듯 앉았다. 그리고 동시에 생각해낸 엄청난 아이디어를 뱉어냈다.


“혼담을.”

“혼담을.”


그런 후 두 마담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승리를 만끽했다. 그녀들의 미소를 뒤늦게 확인한 브리기테는 두 명문가의 혼사가 ‘이루어질 뻔 했으나, 곧 실패하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을 느꼈다. 정확히는 ‘반항에 실패하여 부모의 말에 순응 하는 아이들’을 보게 될 것임을 강하게 느꼈던 것이다. 설마하니.


‘미래를 위해 특혜마저 포기하려는 녀석들이래도 남자랑 결혼 하겠어?’


두 가주의 회심에 가득한 시선을 이해한 브리기테는 깜짝 놀라며, 두 어린 청년의 절망을 점칠 수밖에 없었다.


‘팔팔하고 재능 있는 반항아들의 저항도 여기까지구나.’


마담 브리기테는 안타깝다고 생각했다. 물론, 입 밖으로 내진 않았지만.


1차BL 쓰는 계정: @bbokkwon 랑야방/엔네아드 덕질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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