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자살, 폭력, 범죄조직에 대한 묘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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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틈으로 새어나온 빛이 어두운 거실을 가로지른다. 

파리하게 그어진 빛줄기에 두꺼운 암막커튼과 깨끗한 새 소파, 빈 책장이 윤곽을 드러냈다. 새하얀 식탁보와 각진 나무 의자까지 여느 가정집과 다를 바 없는 풍경이었다. 

부엌에는 먼지 앉은 가스레인지와 물자국 없는 싱크대, 그 아래 열려있는 찬장, 가지런히 수납된 식칼들… 그 중에 빈자리 하나.

그 자리의 주인은 다시 문틈으로 들어가 화장실 거울 앞에 선 여자의 손에 들려있다. 

여자는 외형만 보자면 아직 젊었으나 표정을 보면 마치 살날이 머지않은 노인 같았다. 부스스한 금발과 다 갈라진 입술이 추레했다. 

자신의 모습을 가만히 거울에 비춰보던 여자는 이내 천천히 손을 들어올렸다. 쓰인 적이 없어 날이 잘 선 식칼이 정확히 경동맥을 겨눴다. 사실 혈관이라는 게 육안으로 잘 보이진 않았지만, 여자는 알았다. 손을 조금만 당기면 피가 폭죽처럼 튈 것이다. 

그럼 거울과 벽은 뒤덮이리라. 방금 생명으로부터 떨어져 뜨겁고 묽은 것으로. 여자는 알았다. 그것은 금세 세면대와 타일 틈에 붉게 고일 것이며, 지독한 냄새를 풍길 것이다.

그리고 흘러가겠지. 

수도꼭지를 틀고 샤워기를 휘두르면 전부. 저 작은 배수구로 속절없이 흘러갈 터였다. 여자는 알았다. 따라서 여자의 손은 한 치의 떨림도 없었다. 

그 일련의 과정들을 잘 알면서 제 손에 들린 칼을 두려워 한다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여태까지 겨눴던 것들과 지금 칼끝에 놓인 것은 다르지 않았다. 또한 여자는 언제나 마지막에 흘러내릴 것을 정해놓고 있었고….

그 사실을 두려워하는 건 단 한 사람밖에 없었다. 

여자는 잠시 눈살을 찌푸렸다가, 상념을 치우고 거울에 비친 상을 바라봤다. 칼끝은 여전히 미동 없이 정확한 자리에 닿아 있었다. 만족스러운 듯 여자의 입에 희미한 웃음이 걸렸다. 그 모양을 더욱 짙게 늘리며 손을 당기는 순간,


“노멘!”


궤도를 틀게 하는 힘이 달려들었다.

뚝. 뚝. 정해둔 것 외의 피가 떨어졌다. 노멘이라 불린 여자의 낯이 단숨에 일그러졌다. 갑자기 난입한 방해꾼은 무식하게도 칼날을 맨손으로 붙잡고 있었다. 노멘이 칼을 뺏기지 않으려고 살짝 당기자 칼날을 쥔 손에서 피가 울컥 흘러내렸다. 결국 노멘은 한숨을 내쉬며 칼을 놓았다.

무식하고 집요한 방해꾼, 준은 숨을 몰아쉬며 식칼을 화장실 밖으로 던져버렸다. 그러더니 냅다 노멘의 멱살을 잡고 입에 손가락을 쑤셔 넣었다.


“전 당신이 바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진심이에요? 발을 풀어주자마자?” 


입안을 헤집어 혀가 멀쩡하다는 걸 확인하고서야 손가락이 입술 사이로 빠져나갔다. 손바닥을 적신 피와 타액이 섞여 얇게 늘어지다 끊어졌다. 

노멘은 피곤한 낯으로 입가를 닦으며 옷깃을 잡은 손을 뿌리쳤다. 준은 순순히 손을 거두며 입을 달싹였다. 제발, 노멘.


“그냥 눈 딱 감고 하루만 살아보면 안 돼요?”


마찬가지로 지독하게 지친 얼굴이었다. 노멘은 헛웃음을 흘리며 준의 번들거리는 눈동자를 바라봤다. 


“너는 그럴 수 있었나본데, 나는 안 돼.”


무감한 어조는 차라리 비수였다. 지겹도록 들은 말인데도 그랬다. 준은 입안에서 혀를 굴리며 노멘을 노려봤다. 그래봤자 차갑게 식은 잿빛 눈동자는 가소로워하지도 않았지만. 그 오만한 작태에 준은 충동적으로 말을 뱉었다.


“…그럼, 어쩔 수 없죠. 그 생각까지 전부 부순 후에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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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개싸움의 시작은 약 한 달 전이었다. 장장 10년에 걸친 노멘의 복수가 끝난 날.

준은 만신창이가 되어 쓰러진 노멘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옆에는 노멘의 원수가 죽어 널브러진 채였고, 공기 중엔 매캐한 탄내가 코를 찔렀다. 아래층에 난 불 때문이었다. 빨리 빠져나가지 않으면 이 방까지 불이 번질 것이다

그러나 노멘은 눈을 감은 채 미동도 없었다. 


“노멘.”


마피아들 사이에서 악명이 자자한 살인청부업자. 원수를 갚기 위해 10년의 세월을 버린 복수귀. 또한 준의 부모를 죽인 원수이자, 지난 6년 간 준의 보호자였던 이. 


“이대로 죽을 셈이에요?”


준은 자글거리는 눈으로 노멘의 머리맡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살아있는 게 신기할 만큼 넝마 꼴이면서 노멘의 표정은 평온했다. 

영원히 잠들어도 좋을 것처럼. 

준의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납득할 수도, 용납할 수도 없는 이야기였다. 준은 이를 악물고 노멘을 들쳐 맸다. 

빠져나오는 건 쉬웠다. 이 복수극의 피날레를 시작하기 전 노멘이 알려준 도주로와 새 은신처 덕분이었다. 준은 불타는 저택을 뒤로하고 새벽이슬을 맞으며 어느 빌라에 도착했다. 

문득 치미는 것은, 노멘이 일러주는 걸 외울 때 예상했던 건 이런 상황이 아니었는데… 하는 허탈감.

문을 열고 들어가니 새 가구가 들어찬 집안이 보였다. 그 모든 게 자신에게는 살라고 하는 것 같아 속이 끓었다. 본인은 죽을 생각이었으면서. 

준은 뭐든 쏟아내야 할 것 같은 기분으로 바쁘게 손을 움직였다. 그리고 기어코 노멘의 목숨을 붙들어놓은 후에야 넘실대는 감정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것은 배신감이었다. 또 혼자 남겨질 뻔 했다는 배신감. 

준은 시퍼렇게 타오르는 눈으로 노멘을 바라봤다. 그 순간 뭘 해야 할지 모든 게 선명해졌다. 준의 입꼬리에 사나운 웃음이 걸렸다.

노멘이 눈을 뜬 건 그로부터 이틀이 지나서였다.


“깼어요?”


침대 맡에 앉은 준에게로 회색 눈동자가 소리 없이 굴러왔다.


“…너.”

“아직 움직이긴 힘들 거예요. 물 필요해요?”


노멘은 고개를 젓지도 끄덕이지도 않고 빤히 준을 바라봤다. 그러다 눈뜨고 기절했나 준이 의심할 즈음, 버석하게 한마디 했다.


“네가 날 살렸어?”

“네.”

“…왜?”

“하…. 죽을 생각이었다는 소릴 이렇게 하시네.”


준은 짜증스럽게 검은 곱슬머리를 쓸어 올리며 탁자 위에 올려뒀던 생수병을 향해 손을 뻗었다. 톡 치면 파사삭 바스러질 것 같은 목소리로 잘도 말을 한다 싶었다. 그러나 노멘은 흔들림 없이 재차 채근했다. 


“왜? 네가 붙인 불에 타죽었으면 완벽했을 텐데….”


쾅!


“지금 그걸 말이라고…!”


반쯤 열린 생수병에서 물이 넘쳐 탁자를 적셨다. 노멘의 눈이 살짝 커졌다. 자신이 왜 화내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한 표정에 준은 시선을 먼 곳으로 돌리고 길게 숨을 쉬었다. 시퍼런 눈이 파르르 떨리며 감겼다. 

죽음을 안식 삼는 태도도 열이 뻗쳤지만, 그보다는 그 기저에 깔린 감정이 거슬렸다. 죄책감. 이제 와서 그딴 걸로 뭘 어쩌겠다고. 

준은 상체를 기울여 잿가루 같은 눈을 들여다보며 짓씹었다. 


“제가 당신을 죽여주길 바랐다면, 죽길 바라지 말았어야죠.”


회색 눈동자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흔들렸다. 노멘은 발이 닿지 않는 물속에서 땅을 찾듯 다급하게 할 말을 찾아냈다. 


“…난 네 부모를 죽였어.”


바르르 떨리는 목소리가 예상했던 변명을 주워섬겼다. 준은 피식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누구에게든 그렇게 죽을 수 있었던 사람들은 이제 상관없어요.”

“뭐?”

“노멘, 제가 이러는 건.”


당신이 제게 이름을 주었기 때문이에요.

노멘을 처음 만났을 때 준은 겨우 14살의 소녀였다. 

하루아침에 떨어진 야만의 세계에서 노멘은 준에게 폭력을 휘두르기도 했지만, 준이 병난 것을 가장 먼저 알아차리기도 했다. 준의 행동을 강제하면서도 의식주를 챙겼고, 때로는 준 대신 다치기도 했으며, 할 일을 잘 마치면 옅은 미소와 함께 칭찬을 해주었다. 

그렇게 6년. 어린 소녀의 삶이 길들여져 뒤바뀌기엔 충분한 세월이었다. 이제 준은 친구들과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떠들고 부모님과 멋진 저녁을 먹던 때의 이름을 기억하지도 못했다. 

노멘이 붙인 ‘준’이라는 이름과, 두 번째로 악명 높은 청부살인마라는 범죄자의 인생만 남았을 뿐.


“그래서 저도 그렇게 하려고요.”


당신을 살려서, 멋대로 바꿔보려고.

누군가는 그 말을 구원이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노멘은 아니었다. 

준은 점차 절망으로 빠져드는 잿빛 눈을 즐겁게 감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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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정부리지 좀 마요.”


준이 귀찮다는 표정으로 노멘의 두 볼을 잡으며 말했다. 억지로 벌어진 입 안으로 피가 배어나온 혀가 보였다.

벌써 4번째였다. 혀를 끊으려고 한 건. 

그 외에도 침대 모서리에 머리를 박아 이마를 찢어놓은 건 2번, 컵이나 접시를 깨서 손목을 그은 건 미수까지 3번. 물과 음식을 거부해서 억지로 먹이는 건 예삿일이었으며, 며칠 전에는 이불을 찢어 목을 매달려고 하기까지 했다. 결국 준은 노멘을 침대에 묶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사지가 결박된 채로 얼굴까지 붙잡힌 노멘이 준을 노려보았다. 준은 상처 난 혀를 잡고 이리저리 살펴보다 팽개치듯 놓았다. 


“이래봤자 안 죽는 거 잘 알면서. 당신이 했던 말이잖아요.”


처음 노멘에게 끌려왔을 땐 준도 비슷했다. 더 바락 대긴 했지만. 그렇게 발버둥 치다 손발이 묶인 후에는 혀를 깨물었고, 그를 깔고 앉은 노멘은 그래봤자 죽지 않는다며 비웃음을 흘렸었다. 

준은 그때와 반전된 상황이 퍽 유쾌하면서도 지쳤다. 절로 한숨이 나왔다. 


“노멘, 당신이 저한테 요구했던 것보다는 쉽잖아요. 푹 자고 일어나서 브런치를 먹어요. 오후엔 책을 읽거나 TV를 보고. 공부하고 싶은 게 있으면 해요. 그렇게 살면 된다니까.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하게.”

“퍽이나 그게 되겠네.”

“노멘.”

“애초에 나한테 평범이란 베개 밑에 있는 총이야. 그 총을 내 머리에 쏠 수 있으면 더할 나위 없을 테고….”

“택도 없는 소리 말고요, 좀.”

“얘야.”


어색하기 짝이 없는 호칭에 준은 몸을 부르르 털었다. 얘야, 라니. 준은 다른 것보다 그 말이 가장 싫었다. 본인이 지은 이름은 어디다 버려두고 갑자기 왜 애 취급이냔 말이다. 

그러나 준이 노려보건 말건 노멘은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생각해 봐.


“자그마치 10년이야.”


10년. 10년 전에는 노멘도 그런대로 평범한 학생이었다. 보육원에 살았지만 열심히 공부하면 언젠가는 행복해지리란 희망에 차 있었고, 비오는 날 부모가 데리러오는 친구가 부러운 것 이상의 불행은 몰랐다.

친동생처럼 아끼던 같은 보육원 아이가 어쩌다 마피아의 살인현장을 목격해 머리에 총알이 박히기 전까지는. 또한 그 아이의 죽음이 고아라서 흐지부지 묻혀버리기 전까지는 그랬다.


“모든 걸 잃고 그만큼이나 더 살았으면 충분하지 않니?” 


준은 인상을 찌푸리며 10년이라는 시간의 무게를 애써 털어냈다. 다 궤변이다. 


“그럼 저한테는 왜 살라고 했는데요?”


노멘의 입이 일자로 다물렸다. 그래. 모든 걸 잃은 건 노멘이나 준이나 피차일반이었다. 준은 조소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죽고 싶으면 절 먼저 죽여야 할 걸요. 그러니 그만 포기해요, 노멘.”


노멘은 대답하지 않았으나, 그 뒤로 한동안은 아주 얌전하게 굴었다. 굳이 혀를 누르지 않아도 음식을 선선히 넘겼고 이거저거 해보자는 준에게 토를 달지도 않았다. 

노멘이 먼저 물 좀 달라고 요구한 날 준은 기꺼이 손을 풀어주었다. 그리고 며칠 지나자 노멘은 오렌지가 먹고 싶다거나 TV의 몇 번 채널을 틀어달라거나 말하기 시작했다. 


“거 봐요. 불가능하지 않다니까….”


준은 활짝 웃으며 발을 풀어주었고. 

그날 밤 노멘은 식칼로 자신의 목을 찌르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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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은 노멘을 끌고 욕실을 나왔다. 

정말이지 한시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다시 묶어둬야 하나. 준이 성대한 한숨을 내쉬며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노멘이 우뚝 멈춰 섰다. 


“…또 왜요?”

“….”


노멘은 말없이 준의 손을 바라보다가 거실로 향했다. 급격히 피곤해진 준은 노멘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 소파에 앉았다. 

드르륵, 달칵. 서랍 여는 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뜨니 식칼에 베인 상처 위에 알코올 솜이 닿았다. 준은 멍하니 손을 치료하는 노멘을 바라봤다.

이젠 헛웃음도 나지 않았다. 본인은 죽음에 반쯤 잠겨있으면서 자신에게는 살라고, 온몸으로 말하는 꼴이 신물 났다. 

준은 정성스레 약을 바르는 손을 뿌리치고 대충 붕대를 감았다. 

그새 창밖으론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준은 암막커튼 틈새로 비치는 새벽빛을 보다 일어났다. 이 난리를 쳤으니 다시 잠들기는 글렀다. 


“나가죠.”

“…뭐?”

“한 번도 안 나가봤잖아요. 오늘 나가 봐요.”


준은 노멘의 금발을 모자에 꼼꼼히 집어넣고 목도리로 둘둘 말은 뒤에 안경을 씌웠다. 자신은 장갑으로 붕대를 가리고 야상의 후드를 푹 눌러쓴 후 마스크까지 꼈다. 날이 추워서 다행이었다. 

현관을 나설 때부터 머뭇거리던 노멘은 준이 사람 많은 마트로 들어서자 숨 쉬기를 더뎌했다. 

이걸 허튼짓 하지 않아 다행이라 해야 할지. 준은 노멘의 팔에 제 심장이 닿도록 끌어안고 걸음을 옮겼다. 

우유나 계란 따위를 계산해서 밖으로 나오기 무섭게 노멘이 주르륵 주저앉았다. 준은 젖은 옷처럼 흐늘대는 노멘을 겨우 인적 드문 벤치로 끌고 가 앉혔다. 하지만 상태는 나아지기는커녕 점점 나빠졌다. 


“헉, 허억, 흡….”

“미치겠네. 진정하고 숨 쉬어요. 천천히, 들이마시고….”


급기야 터진 과호흡 증상에 준이 입을 막으려 손을 가까이 대자, 노멘이 그 손을 붙잡으며 흐느꼈다. 


“얘, 얘야. 이것 봐….”

“….”

“나, 난 안 돼…. 내가, 헉, 내가 어떻게…….”


감히, 내가. 어떻게. 넋 나간 중얼거림이 저주처럼 귓가에 들러붙었다. 준은 차갑게 노멘을 내려보다 어깨를 붙들어 세웠다. 


“감히, 도망치려는 건 아니고?”

“….”

“죽음으로 그 죄를 회피하고 싶을 뿐이잖아요, 당신.”


그대로 우악스레 잡아당기자 노멘은 맥없이 끌려 일어났다. 준은 어느 때보다 싸늘한 표정으로 노멘의 어깨를 움켜쥐고 발을 돌렸다. 

그때, 소름끼치는 말이 준의 귀에 꽂혔다. 


“혹시 이 근방에서 금발에 회색 눈을 한 여자를 본 적 없소?”


탁기가 서렸지만 호흡을 따라 느긋이 이어지는 품위 있는 어조. 준은 순간 숨이 멎는 줄 알았다. 


“금발에 회색 눈? 글쎄, 회색 눈은 좀 드물죠.”

“흠…. 그럼 검은 곱슬머리에 파란 눈을 가진 여자도 본 적 없나? 그 쪽은 더 키가 크고 피부색이 좀 짙은 편이라네.”

“잘 모르겠네요. 이 동네는 들락거리는 사람이 워낙 많아서.”


조심스레 돌아보자 정장에 코트를 입은 남자가 보였다. 북풍에 남자의 냄새가 실려 왔다. 희미하게 풍기는 고급 브랜드의 시가 냄새. 딱 한 번 맡아봤던 냄새였다. 준은 속으로 남자의 이름을 짓이겼다. 

미파엘레. 노멘이 무너트린 조직, 칼마의 콘실리에리(참모). 

한창 상황이 좋지 않을 때는 꽁지를 빼고 코빼기도 보이지 않더니. 한때 이 라포르니 시의 지배자라 불렸던 칼마가 완전히 해체되고, 그렇게 따르던 돈(보스) 칼마까지 죽고 나서야 얼굴을 들이미는 게 아주 기가 찼다. 

준은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바로하고 걸음을 재촉했다. 하지만 척은 척이고 진실로 속이 멀쩡하진 못했다. 머릿속에서 불쑥 어린 시절의 파편이 튀어 올랐다.


‘이게 누구야. 미파엘레의 선택을 받은 총아들이 아니신가!’


새까만 정장을 입고 응접실로 들어가는 아버지. 구두를 신고도 발소리가 나지 않는 어머니. 응접실에서 기다리던 두 분의 지인이 과장스럽게 손을 펼치며 웃는다.


‘드디어 라포르니의 주인이 자네들을 불렀다지?’


그걸 다 듣고도 준은 한참동안 진실을 몰랐다. 몇 년이 지나 아버지의 책상에서 권총을 발견하기 전까진. 

기실 준의 일상이 무너지기 시작했던 건 그때부터였다. 노멘은 거기에 종지부를 찍었을 뿐.


“얘야.”


나지막한 목소리가 상념을 깼다. 준은 자신이 거의 뛰듯이 걷던 것을 깨닫고 속도를 줄였다. 고개를 내리자 어느새 멀쩡해진 노멘이 묘한 표정으로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을 따라간 준은 기겁하며 완전히 멈춰 섰다. 

빌라의 공동현관 앞에 검은 정장이 셋 있었다. 그들 중 한명의 목덜미에 필기체로 새겨진 문신이 보였다.

‘Credo quia absurdum(나는 신이 불합리하므로 믿는다)’ 

불합리의 온상이자 이 도시의 신이었던 칼마다운 문구였다. 준은 바로 문신의 주인을 알아보았다.  엘레나. 미파엘레의 가장 충실한 종. 노멘과 준이 미파엘레를 추격하길 포기한 요인 중 하나였다. 준은 황급히 빌라로 들어가기 전 골목으로 숨었다. 아니, 숨으려 했다. 

노멘이 길 한가운데서 버티지만 않았더라면. 

노멘! 준이 바짝 타는 속으로 입을 벙긋거렸다. 그러나 노멘은 미동도 없었다. 그저 죽음을 바라 마지않는 버석한 낯으로 준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탁, 손을 뿌리쳤다. 

준은 일순 눈앞이 새빨개졌다. 

다시 정신이 들었을 땐 노멘의 입을 틀어막아 붙잡고 골목에 숨은 뒤였다. 준은 발버둥치는 노멘을 더욱 꽉 끌어안으며 숨을 헐떡였다. 

안 돼. 안 돼요.


“제발, 노멘. 이건 아니잖아. 이제 와 원수에게 목숨을 버릴 거예요? 당신이 그렇게 가버리면 저는요. 아까. 아까 못 들었어요? 저도 찾고 있었잖아요. 저들은 저도 죽일 거예요. 당연하지. 전 당신의 하나뿐인 부하였으니까…. 그렇게 둘 거예요?” 


준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채 쏟아냈다. 간절한 속삭임과 함께 노멘의 어깨가 젖어 들어갔다.


“성급하게 굴지 마요. 정확히 알고 온 게 아닐 거예요. 금방 갈 거야…. 당신이 있는 걸 확신했으면 겨우 셋만 보냈을 리가 없어. 그러니까, 지금은… 지금은 아니에요 제발…….”


노멘은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 입을 막은 준의 손을 톡톡 두드렸다. 준은 어느 정도 진정하고서야 조심스레 손을 뗐다.


“얘야.”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진짜 애 같은 칭얼거림에 노멘이 픽 웃으며 준의 볼을 감쌌다. 잿빛 눈동자가 물기어린 푸른 눈을 들여다본다. 준은 순간 노멘의 눈동자가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그래. 그러자. 지금은 아닌 걸로 하자.”


그 안에선 아주 오랜만에 보는 생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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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은 노멘이 어느 부분에서 설득된 건지 몰라 찜찜했지만 일단 가슴을 쓸어내렸다. 우선은 미파엘레를 따돌리는 것이 더 급했으므로.

엘레나를 비롯한 미파엘레의 부하들은 시간이 좀 지나자 돌아갔다. 준의 짐작대로 확신하고 온 게 아닌 낌새였다. 하지만 언제 또 들이닥칠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일단 염색부터 해요. 컬러렌즈는 있으니까.”


노멘의 복수에 휘말리면서 터득한 게 있다면 숨고, 찌르고, 맞추고, 도망치는 법이었다. 준은 익숙하게 색깔별로 모여 있는 염색약과 컬러렌즈 중에서 적당한 색을 골라 꺼냈다. 노멘은 준의 지시를 고분고분 따랐다.

한바탕 부산을 떤 후 다시 나갈 준비를 할 때는 둘 다 검은 머리 갈색 눈에, 짙은 화장으로 인상도 바뀐 채였다. 준은 마지막으로 손목에 밝은 화장품을 발라 피부색을 가리며 노멘에게 말했다.


“자매인 걸로 해요. 당신은 제가 언니라고 부르는 게 끔찍하게 싫겠지만.”


그건 노멘을 만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었다. 당시 준은 노멘의 이름조차 몰랐기 때문에 무심코 언니라는 호칭을 입에 담았고, 진짜 죽겠다 싶을 정도로 처맞았다. 

나중에 자신의 부모가 노멘의 동생을 죽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그땐 속죄도 탄원도 한참 타이밍이 지난 후였다. 결국 준의 뱃속에는 어찌할 수 없는 앙금만 남았다. 6년 간 그렇게 쌓인 앙금만 한 바닥이었다.

물론, 쌓인 게 그런 앙금뿐이었다면 지금만큼 불행하진 않았으리라. 

노멘은 속을 알 수 없는 눈으로 준을 응시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석양이 완전히 하늘을 뒤덮기 전에 라포르니 시를 떴다. 

덮어 가린 머리카락과 눈 색 만큼 무난한 색채의 중고차를 타고 길을 빙글빙글 돌아 다른 도시로 향하는 동안, 조수석에 앉은 노멘은 창문을 내내 열어놓았다. 바람이 차지도 않은지. 준은 감기 걸린다고 한소리 하려다 노멘의 표정을 보고 입을 닫았다. 

미간을 찌푸린 채 입꼬리를 문지르며 뭔가에 골몰한 얼굴. 렌즈 때문에 잿빛이 사라진 눈에서 총기가 반짝였다. 아아. 저 살아있는,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행위에 괴로워하지 않는 표정이 대체 얼마만인지…. 

준은 안도하면서도 한편으론 쏟아지는 불쾌감과 분함에 입술을 짓씹었다. 

뭐가 그렇게 좋은 건데. 왜 이제야. 대체 뭐지? 어떻게 해야 당신이 영영 그렇게 살 수 있을까?


“얘야, 앞을 봐야지.”


불시에 노멘의 눈동자가 준을 돌아봤다. 준은 혀를 차며 앞으로 시선을 바로 했다. 


“…그놈의 ‘얘야’ 좀 그만해요.”

“그럼 뭐라고 불러?”

“준이라고 부르면 되잖아요. 당신이 지어준.”

“…그건 안 돼.”


순간 브레이크로 발이 옮겨갈 뻔 했다. 울컥 치미는 것을 간신히 참은 준은 앞에 눈을 고정한 채 목소리를 높였다. 


“그럼 대체 왜 나한테 이름을 지어줬어요? 당신 때문에 난 원래 이름도 잊어버렸는데!”

“…잊어버렸다고?”


노멘이 당혹스러운 듯 중얼거렸다. 준은 손에 핏줄이 서도록 핸들을 움켜쥐며 시선을 돌리지 않으려고 애썼다.


“정말로 기억이 안 나? 쥴-”

“노멘!!”


그러나 두 번은 참지 못했다. 차가 급정거하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차 한 대 없는 외진 길이라 다행이었다. 준은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는 지도 모른 채 고개를 돌려 노멘을 노려봤다.


“그 입 닥쳐요! 이제와 그 이름으로 돌아갈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까!”


그때로 돌아가라는 게 당신을 놓으란 말과 무엇이 달라. 준은 놀란 노멘에게 눈을 부라리곤 다시 거칠게 차를 출발시켰다. 차 안에 따끔거리는 정적이 내려앉았다. 노멘이 미간을 더 구기며 차창을 닫았다. 바람소리가 멎었다. 

준은 끓는 속을 식히다, 문득 노멘이 다시 바싹 메마른 눈으로 돌아갈까 봐 불안해져 억지로 침묵을 깼다.


“…그래서 굳이 이름을 지어줬던 이유는 뭐였는데요.”


노멘은 눈을 내리깐 채 글로브박스를 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나는… 네가 언젠가 그 이름을 버리고 평범한 삶으로 돌아가길 바랐으니까.”


뭐? 준의 눈이 동그래졌다. 전혀 예상도 못했던 말이었다. 준은 노멘이 진심인지 곁눈질하며 다시 물었다.


“처음부터?”

“그래.”

“…그럼 아예 데려오지를 말지.”

“칼마가 어떻게 나올 줄 알고? 너, 일반인으로 살고 있긴 했어도 네 부모가 뭐하는지 다 알고 있었잖아.”

“….”

“네가 그대로 칼마의 눈에 띄었다면 아마 입막음 당했겠지. 뭐, 나도 그냥 목숨만 붙여놓는 꼴이었지만….”


그때를 떠올리는지 노멘이 작게 웃었다. 준은 난데없는 진실에 당황하면서도 그 희미한 미소 하나에 시름을 놓았다. 

정말 엉망진창이었다. 겨우 손톱만큼 올라간 입꼬리가 뭐라고, 뱃속이 솜사탕을 처음 먹은 날처럼 간질거리다 또 순식간에 칼로 난도질당하는 것 같았다. 


“그때 알았지. 사람은 죽이는 게 더 쉽다는 걸. 안 그래?”

“…빌어처먹을.”


안 그래도 실시간으로 느끼는 중이네요. 정곡을 찔린 준은 한참 툴툴거리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노멘을 돌아봤다.


“그럼 나도 당신에게 이름을 붙일래요. 어차피 노멘도 본명은 아니죠? 사람 이름이 이름(nomen)이 뭐야.”


노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준은 그 안에 스쳐지나가는 것들이 무엇인지 다 알 수 없었다. 결국 먼저 고개를 앞으로 돌리고도 짧지 않은 침묵 끝에 노멘이 말했다.


“그래라. 저기 제대로 정착하고 나면.”


어느새 목적지, 라포르니 시에서 멀리 떨어진 관광도시가 지평선 너머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준은 박음질하듯이 도시 주변을 배회하다가 적당히 모텔이 몰려있는 외곽으로 들어갔다. 목적지에 좀 늦게 도착한 관광객인 양. 

문제는 모텔 뒷골목 쪽에 이미 검은 정장들이 몇몇 보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체크인 시간이 훌쩍 넘어서 여러 모텔을 기웃거리는 차량은 꽤 눈에 띄었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인영 둘이 다가왔다. 똑똑! 페도라를 쓴 여자가 차 앞을 가로막고, 검은 코트를 입은 남자가 차창을 두드렸다. 둘 말고도 골목 구석구석에서 은근히 옭아매는 시선이 느껴졌다. 준은 한숨을 내쉬었다. 별 수 없었다. 변장이 먹히길 비는 수밖에.


“당신은 제발 허튼 짓 하지 말고요.”


준은 노멘의 손을 단단히 붙잡고 차창을 내렸다. 


“무슨… 일이세요?”


겁먹은 척 하는 건 신경 쓸 일 축에도 끼지 못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준이 노멘의 밑에서 질리도록 배운 게 숨고, 찌르고, 맞추고, 도망치는 법이었다. 


“아, 찾는 사람이 있어서. 어디서 왔죠?”


차창을 두드린 남자가 가식적으로 웃으며 물었다. 준은 노멘을 잡은 손에 힘을 주며 미리 준비해뒀던 말을 했다.


“바니샤 시요.”

“흐음.”


남자가 긴가민가한 표정을 짓자 차를 막아선 여자가 보닛을 툭툭 두드리며 물었다. 조수석 쪽은? 그러자 느물거리는 남자가 슬쩍 창문 안쪽으로 머리를 기울였다. 


“멀리서도 왔네요. …여자 둘이서?”


여자 둘이란 소리에 분위기가 바짝 굳었다. 준은 놀라 뒤로 물러나는 척 노멘을 가렸다. 자신보다는 노멘의 얼굴이 더 알려진 편이었고, 당연히 머리와 눈 색을 바꾼 것만으로는 안심할 수 없었다. 남자는 그런 반응을 즐기는 듯 길쭉하게 웃으며 끈질기게 차 안을 살피다 흠, 콧소리를 내며 고개를 뺐다.


“아닌 것 같은데. 그년보다 체구가 작아.”

“그래도 확실히 해. 여자 둘인 건 처음이잖나.”

“신경질은. 자… 에이, 너무 그렇게 겁먹지 말고요. 확인 할 게 있을 뿐이니까.”


준은 머뭇거리며 물렸던 몸을 바로 했다. 이번에는 노멘이 준의 손을 꽉 잡았다. 

남자는 오면서 들린 주유소나 여행 목적 따위를 캐물었다. 준은 적당히 더듬더듬 출발하기 전부터 외워뒀던 스토리를 읊었다. 언니가 병이 있는데 이번에 상태가 좀 나아져서 여행을 왔다고. 어쩌면 여기서 요양을 할 수도 있다고….

남자는 대충 넘어가고 싶은 눈치였으나 여자는 의심을 거둘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내부 결속이 엉망인 모양이었다. 하긴, 미파엘레가 칼마의 살아남은 카포(지부장)들을 모아 부리고 있는 것이라면 그럴 만 했다. 

 

“하, 좋아. 확실히 하자고.”


여자의 눈치를 보던 남자가 돌연 혀를 차며 손을 뻗었다. 왜, 왜 이래요! 준은 화들짝 물러서며 창문을 올리려고 했지만 얼굴이 잡히는 게 먼저였다. 남자는 거만하게 준의 턱을 잡고는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얼굴은 좀 닮았나? 분위기는 전혀 다른데.”

“분위기? 아, 직접 본 적 있다고 했었나?”

“그래. 그 금발은 스치듯이 본 게 다지만, 검은 머리는 꽤 자세히 본 적 있거든. 딱 사냥개 같았지. 근데 이쪽은 제법… 순하게 생겨선, 귀엽잖아?”


턱을 쥔 손이 슬쩍 움직여 귓불을 지분거렸다. 준은 역겨워서 헛구역질이 나는 걸 간신히 참았다. 페도라를 쓴 여자 역시 못 볼 꼴이라는 듯 혀를 차고 보닛을 짚으며 몸을 기울였다. 


“어쨌든 얼굴은 닮았다는 소리 아닌가? 위에서 내려온 조건과도 맞고. 그럼…”


조짐이 좋지 않았다. 이길 자신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요란하게 굴었다가는 추적의 근거가 될 수 있으니 최대한 마찰 없이 넘어가야 하는데. 초조해진 준이 입안 살을 슬쩍 깨물 때였다. 

노멘이 준의 손에 무언가를 쥐여 주었다. 그리고. 

타앙! 

아 미친. 저질렀네.

준은 미간에 구멍이 나 뒤로 넘어가는 남자를 보며 노멘이 쥐여 준 총을 들었다. 일단 가까운 몇 명을 맞추고 차문을 발로 차 열었다. 총성이 울린 이상 싸그리 치워야했다. 돌겠다, 돌겠어. 준은 욕지거리를 중얼거리며 빠르게 움직였다.

마지막으로 도망가던 잔당의 목뼈를 꺾어 던져놓고 돌아보니, 노멘은 가장 먼저 본인이 머리에 구멍을 냈던 남자를 잘근 잘근 밟고 있었다. 구둣발 아래서 으득으득 뼈 뒤틀리는 소리가 났다. 


“감히 누굴 만지고 지랄이야, 씨발새끼가….”


담배까지 물고 있었으면 폭주기관차처럼 칼마를 쫓던 몇 달 전이라고 해도 믿을 법 했다. 준의 눈동자가 흐려졌다. 역시 당신은 피웅덩이 속에서 살아야만 하는 건가? 불사를 게 있어야만 타오를 수 있는 거야? 

하지만 무언가 석연찮았다. 그저 그들이 ‘칼마’라서 다시 불이 붙었다기엔, 처음에 노멘은 그냥 그들에게 죽으려 하지 않았던가….

그러다 준은 불현듯 깨달았다. 


‘저들은 저도 죽일 거예요.’


노멘이 자신의 어느 말에 마음을 돌렸던 건지.


“하.”


실소가 비틀린 입매를 비집고 기침처럼 튀어나왔다. 그 소리에 노멘이 준을 돌아봤다.


“끝났어? 차는 멀쩡하니까 가자.”

“당신 진짜 싫다.”

“뭐?”


차라리 같이 죽자고 해요. 왜 자꾸 나만 두고 가려고 해?

많은 말이 목 안에서 맴돌았으나 준은 삼켜냈다. 섣불리 뱉었다가 저 가증스런 생기도 사라질까 두려웠다. 그래. 일단은 저 불씨라도 살려야 했다. 


“아니에요, 가요.”



#

그러나 준의 눈 감음이 무색하게도, 작은 불씨가 꺼지는 건 삽시간이었다. 


“…날붙이는 다 치운 줄 알았는데.”


아니, 식용 나이프로 이렇게까지 한 노멘이 어지간히 미친 쪽이리라. 준은 시뻘건 물로 가득 찬 욕조에서 노멘을 건져 손목부터 지혈했다. 룸서비스를 잘못 보내서 연락했더니 받지 않는다는 호텔 직원의 말을 듣고 달려와 봤더니 이 꼴이다. 

다행히 상처가 심각하게 깊지는 않았다. 하지만 눈살이 찌푸려지는 건 매한가지였다. 무딘 나이프로 얼마나 그어댄 건지 칼로 벤 게 아니라 거의 뭉갠 것 같았다. 

게다가 욕조 가득했던 물의 빛깔이 그 지경이었던 걸 생각하면 이번엔 직원의 눈치가 좋아서 산거나 마찬가지였다. 준은 여상스럽게 혈액팩을 노멘에게 연결하며 중얼거렸다. 


“정신적으로 좀 불안하다고 말해두길 잘했네…. 팁이라도 줘야겠어.”


선이 꼬이지 않도록 팩을 스탠드에 걸고 시선을 옮기자, 깜빡. 어느새 뜨인 회색 눈동자가 멍하니 준을 바라보고 있었다. 준은 낮게 한숨을 뱉으며 침대 맡에 앉았다.


“살기로 한 거 아니었어요, 노멘? 갑자기 왜 이래요.”


칼마의 추적을 피한다고 더 꽁꽁 가둬둔 게 문제였을까? 하지만 총을 쏴서 문제를 만든 건 노멘이었다. 이 정도는 감수해줘야 했다. 준은 누구를 달래는지 모를 다정한 목소리를 꾸며내며, 다시 탈색하지 않아 여전히 검은 노멘의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었다. 


“호텔이 불편해요? 오늘 집 계약했으니까 조금만 더 참아요. 곧 있으면 당신 신분증도 나올 거고. 기억하죠? 여기 정착하면 당신 이름…”

“라우스.”

“네?”

“라우스…. 기억 해?”


뜬금없는 소리에 준의 굵은 눈썹이 위로 치솟았다. 라우스는 칼마의 카포들 중에서도 꽤 중앙지역을 관리하던 거물이었다. 그런데도 칠칠맞게 정보를 흘리고 다녀서 칼마를 무너트리는 출발점 된 인물. 지나간 일을 복기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노멘이 피딱지가 앉은 입술로 말을 이었다. 


“룸서비스 왔던 직원…. 라우스 동생이었어.”

“아, 그 놈이 매달 돈 보내던?”

“…그 애는.”


그 돈이 오빠를 죽인 걸 알까. 오빠를 죽인 사람이……


“그만.”


준은 손으로 노멘의 입을 덮었다. 숨이 가빠지며 초점이 흔들리던 잿빛 눈동자가 다시 준에게로 굴러왔다. 준은 사늘한 표정으로 노멘을 내려다보며 손을 뗐다.  


“그래서, 또 그놈의 죄책감이에요?”


이젠 좀 지겹기도 했다. 게다가 라우스는 죽을 만한 놈이었다. 준은 아직도 라우스를 죽일 때 옆에서 나체로 벌벌 떨고 있었던 어린 여자애를 기억했다. 그런 놈이었으니까 죽였지, 아니면 노멘도 충분히 자비를 베풀었을 것이다. 

…아, 이런 사고방식 자체가 그른 건가? 준은 감흥 없이 생각하며 노멘을 바라봤다.


“…난…!”


노멘이 벌떡 일어나려다 휘청거렸다. 피를 얼마나 흘렸는데, 어지러울 게 뻔했다. 준은 고꾸라지는 노멘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러자 노멘이 몇 번의 헛손질 끝에 준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난 끝을 정해두고 있어서 버틸 수 있었던 거야…!!”

“….”

“그만큼 피를 뒤집어쓰고도 계속 할 수 있었던 건, 내 끝을 정해두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그런데 이제, 이제 와서…! 살아? 무엇으로?? 발밑에 시체가 가득한 살인마로??” 

“노멘.”

“얘야, 얘야… 난, 이대로는, 내가 뭐가 될 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제발……,”


그냥 날 나인채로 죽게 해줘…….

거친 숨결이 가슴팍으로 떨어졌다. 준은 한숨을 삼키며 마른 등을 끌어안고 토닥였다. 

발밑에 시체가 가득한 살인마라. 노멘의 것인지 망상인지 모를 피냄새가 코를 막았다. 준은 노멘의 젖은 얼굴을 내려다보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노멘, 내가 말하지 않았던가요?”


말라 죽기 직전의 고목 같은 몸을 침대 헤드에 기대놓고 일어서자 충혈 된 눈이 따라붙었다. 준은 행거에 걸어놨던 코트 안주머니로 손을 집어넣었다.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서렸다. 


“죽고 싶다면 날 먼저 죽여야 할 거라고.”

“…자, 잠깐. 너!”


코트에서 나온 건 새까만 권총이었다. 노멘의 눈이 더 커질 수 없이 부릅뜨였다. 준은 볼펜을 딸깍거리듯 매끄럽게 안전장치를 풀고 총구를 겨눴다. 

자신의 머리에. 


“피웅덩이에 선 사람이 당신 하나뿐인가. 매번 그렇게 앞뒤가 다른 궤변을 늘어놓으면서 날 살리려고 하는 이유가 뭐예요?”

“안 돼! 절대 안돼, 넌…!”

“…뭐, 됐어요. 당신이 내 삶에 목을 맨다는 게 중요한 거니까.”

“….”

“자. 알겠죠, 노멘.”


준은 활짝 웃으며 노멘에게 한걸음, 한걸음 다가갔다. 입은 호선을 그리고 있었으나 푸른 눈은 설산처럼 차가웠다. 그 안에 얼마큼 광폭한 눈보라가 치는지 알아보고야 만 노멘의 어깨가 바르르 떨렸다.


“‘준’에게는 당신이 전부예요.”

“….”

“그러니 함부로 죽으려 들지 말아요. 내 시체 위에서 깨어나고 싶지 않다면.”


손 뻗으면 닿을 거리에도 감히 손을 들어보지도 못한 채 떨던 노멘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준은 푸른 눈을 휘며 활짝 웃었다.



#

준은 손에 들어온 조그만 카드를 엄지로 살살 문질렀다. 카드 구석엔 검은 머리를 한 노멘의 사진이 붙어있었다. 드디어 만든 노멘의 신분증이었다. 

이거 하나 때문에 브로커에게 얼마나 많은 돈을 쥐여 줬는지. 

카드에 쓰인 정보는 당연하게도 전부 거짓이었지만, 때론 진실보다 거짓이 숨통을 틔워주는 법이었다. 준은 이것을 계기로 이제 그만 노멘이 피웅덩이에서 벗어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름을 굳이 이런 방식으로 짓길 택한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준은 신분증에 코를 박은 채 걷다 횡단보도 앞에서 멈춰 섰다. 그리고 신호등을 확인하려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건너편 인도의 인파 사이로 아는 얼굴이 지나가고 있었다. 준의 입매가 딱딱하게 굳었다.


‘미파엘레…?!’


준은 즉시 뒤돌아 미파엘레의 시야에서 벗어났다. 웬만큼 떨어진 후에는 곧장 택시를 잡아탔다. 

무릎을 쥔 손이 덜덜 떨렸다. 불안이 침범할 구석이 너무 많았다. 

이딴, 발 하나 잘못 디디면 추락할 것 같은, 사람 피 말리는 상태에서 벗어나려고 그렇게 노력했던 건데. 그러나 인생은 깊은 구덩이였고 준에겐 날개는커녕 발판도 없었다. 준은 아득바득 쏟아져 내리는 흙벽에 손톱 빠진 손가락을 쑤셔 박았다. 

분명 걸어 올만 한 거리였음에도 호텔로 돌아가는 길이 너무 길게 느껴졌다….

호텔에 도착한 준은 직원이 말을 거는 줄도 모르고 빠르게 방으로 올라갔다. 벌컥, 문을 열자마자 덮쳐온 것은 어둠이었다. 그 다음은 찢어질 듯한 고요. 준은 쿵쿵대는 심장소리에 귀가 먹는 줄 알았다.

조심스레 현관을 지나 불을 키니.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노멘?”


준의 심해 같은 눈동자가 도르륵 굴렀다. 준은 문이란 문은 다 열어 재끼고, 미친 것처럼 침대와 소파를 쓸어 만졌다. 그러다 탁자 위에 놓인 쪽지를 발견했다. 


-미안해.


휘갈겨 쓴 글씨. 그러나 긴박함을 설명하기엔 방 안에는 싸운 흔적도 저항의 흔적도 없었다. 

준의 입에서 허탈한 웃음이 발작처럼 튀었다. 노멘은 자신을 찾아온 타나토스를 따라 흔쾌히 떠났다. 준이 쫓아와 스틱스 강을 건너지 못할 것을 두려워하며, 급하게. 

모멸감과 동시에 서러움이 들끓었다. 급류에 휩쓸리며 부모의 손을 놓친 어린 아이같이. 울컥, 시야가 흐려졌다. 준은 쪽지를 와락 구겼다. 그리고 눈을 벅벅 닦으며 호텔을 뛰쳐나갔다.

어떻게 붙여놓은 목숨인데. 어떻게 기워놓은 삶인데! 늦지 않았으리란 희망보다는 발악이었다. 

자차에는 폭탄이 설치됐을 가능성이 다분했으므로 준은 다시 택시를 잡았다. 조수석에 앉아 방향을 지시하자 운전사가 퍽 당황하며 돌아봤다가 다급하게 엑셀을 밟았다. 준의 옷깃 사이로 총이 보인 것이다. 준은 그 희극에 비소를 흘릴 여념도 없이 차창 밖 도시를 샅샅이 살폈다. 

그리고 운전사가 재차 준을 힐끗거릴 만큼 시간이 지났을 즈음, 기어코 찾아냈다. 좁은 골목길 너머에서 차를 갈아타고 있는 노멘을.

준은 멈추지도 않은 택시의 문을 열어 재꼈다. 


“고향으로 돌아가야지, 노멘.”


반쯤 구르듯 골목길로 뛰어든 준의 귀에 탁한 목소리가 꽂혔다. 미파엘레가 검은 승용차의 문을 열고 서있었다. 회갈빛 페도라 아래 느긋한 미소를 띄운 채로. 

노멘은 잠시 망설이다 검은 차량에 탑승했다. 손이 묶여있지도, 눈이 가려져 있지도 않았다. 총에 떠밀린 것도 아니었다. 준은 예상했으면서도 솟구치는 울분을 어찌할 수 없었다. 노멘. 노멘! 턱 끝까지 목소리가 차올랐으나 무엇 하나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입을 열면 괴상한 비명만 나올 것 같았다. 

그렇게 말 했는데. ‘준’에게는 노멘이 전부라고.

곧이어 노멘을 태운 차 문이 부드럽게 닫혔다. 준이 골목길을 절반도 채 지나지 못했을 때였다. 목표를 달성한 검은 승용차는 일말의 지체도 없이 출발했다. 

준은 한 발 늦게 배기가스만 남은 길거리에 엎어졌다. 


“아… 아악……!!”


억눌린 고함이 잇새로 흘러나왔다. 준은 눈을 부릅뜨고 바닥을 긁었다. 방금, 분명히 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차창 너머로. 노멘의 회반죽 같은 눈이 자신을 보았다. 그리고 준 역시 노멘을 보았다. 

노멘은 희미하지만 부정할 수 없게, 웃고 있었다….



#

무슨 정신으로 호텔에 돌아왔는지 알 수 없었다. 정신 차리니 노멘이 쓰던 침대 위에 웅크린 채였다. 

준은 눈을 서너 번 깜빡인 후에야 자신이 울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뻑뻑한 눈을 문지르려 손을 움직이자 손안에서 무언가 툭 떨어졌다. 노멘의 신분증이었다. 준은 물끄러미 신분증에 쓰인 이름을 바라봤다. 헤라 파브리. 


“당신을 포기해야 할까?”


망연한 중얼거림이 갓 만든 신분증 위로 흩어졌다. 동시에 떠오르는 것은 어느 정도 머리가 굵어졌을 때의 일이다. 아버지의 책상 서랍에서 총을 발견하고 1년 정도가 지났을 즈음. 머릿속에 불안과 불신, 타협이 득실대던 시기.

시작은 준이 다니던 학교에서 같은 학년 학생의 죽음이었다.

원래도 자주 비행을 저질러 말이 많던 아이였다. 그중에 말이 가장 많았던 건 원조교제한다는 소문이었는데, 결국 그게 비극의 화근이었다. 원조교제 하던 상대가 마피아였던 것이다. 그 애는 마피아와 함께 있다가 마약을 주지 않는다고 칼을 휘두른 노숙자에게 죽었다. 

아무리 라포르니 시가 마피아의 본 고장이니, 마피아의 지배를 받는 도시니 해도 준은 그쪽을 전혀 몰랐다. 아버지의 총을 제외하고서는 어떠한 폭력이나 그 조짐에조차도 노출 된 적 없었다. 

그러나 그날, 가장 잔인한 폭력이 가까운 일상으로 성큼 들어온 날. 준은 외면과 타협을 관두고 불안과 두려움의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부모가 ‘그런’ 일을 하고 있고 그들이 ‘그런’ 일을 하는 이상 자신의 일상은 언제든 깨질 수 있다는 걸 인정한 것이다. 

준은 자신이 사랑해 마지않으며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울타리를 잃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부모가 일을 관두게 하려고 갖은 시도를 했다. 


‘얘야?’


걱정에 물든 얼굴과 부드럽게 달래는 목소리. 그들은 정말 다정한 부모였다. 준에게만큼은. 


‘그거 어디서 났니?’


자신이 친애하는 그 모든 걸 속에 품고 사람을 죽였을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구역질이 나다가도, 그들이 불쑥 죽어버릴까 두려웠다. 준은 겁에 질려서 서랍에서 훔친 총을 제 머리에 겨눴다.


‘저, 저 다 알아요. 엄마 아빠가 무슨 일 하시는지.’

‘…얘야. 일단 그건 위험하니까 내려놓고,’

‘그만 해요. 그 일, 제발 그만 하라고요!’


관두고 도망가요, 빈털터리가 돼도 상관없어요, 제발 그만 해요, 온갖 애원을 다했다. 하지만 그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제발… 제발, 아빠.’


두 분이 죽을까봐 무서워요.

그 말에 준의 아버지는 씁쓸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그건 이해의 미소가 아니었다. 준은 반사적으로 뒷걸음치며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었으나…

끝내 당기지는 못한 채, 총을 빼앗겼다. 


‘그럴 일은 없을 거란다.’


아버지는 지독히도 다정하게 말하며 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2년 후 준의 눈앞에서 죽었다.

그때 진심으로 방아쇠를 당길 준비가 되어있었더라면 뭔가가 달라졌을까. 영영 평범하고 평화로운 일상을 살 수 있었을까. 이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어린 날의 평화는 영영 준의 미련이 되었다. 


“…그래… 그랬지.”


준은 신분증이 뻣뻣이 휠 정도로 움켜쥐며 눈을 감았다. 귓가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미련은 미련일 뿐. 준이 진정으로 원했던 건 그저 노멘이 사는 것이었다. 그저, 함께 살아가는 것. 

준은 눈을 떠 노멘의 새로운 이름을 노려보았다. 노멘과 함께 할 수만 있다면 자신은 이제 일상이고 뭐고 눈앞이 온통 핏물에 절은 지옥이라도 좋았다.

정말, 그럴 수만 있다면. 



#

준은 숲이 끝나는 경계에서 아슬아슬하게 발을 멈췄다. 짙게 내린 어둠과 우거진 나무들이 준을 숨겨 주었다. 

숲 밖에는 담쟁이에 휘감긴 울타리가 있었다. 울타리 너머로 풀이 웃자란 마당과 반쯤 무너진 건물이 보였다. 건물은 본래의 색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새까만 화흉에 덮인 채 초라히 서 있었다. 그나마 멀쩡히 남은 것은 울타리 끝의 동그랗게 말린 철제 장식 뿐.

이곳은 노멘이 유년을 보냈던 보육원이었다. 

장소에 대한 단서는 말 한 마디뿐이었다. 고향으로 돌아가야지, 노멘. 준은 그 말에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그 징그러운 남자가 부릴 신경질은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기에 이곳을 택했다. 그리고 안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을 보건데 준의 짐작은 정답이었다.

준은 숲의 그림자 아래서 울타리를 따라 걸음을 옮기며 헛웃음을 흘렸다. 태어난 날도 모르는 사람에게 스스로 태워버린 유년의 둥지를 고향이라 칭하다니. 하물며 노멘이 이곳에 불을 지른 이유는 칼마 때문이었다. 복수를 결심한 이상 뻔히 보이는 약점을 내버려 둘 수는 없었으니까. 

그 결과 평화로운 일상에 취해있던 노멘의 유년과 그때의 이름을 아는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져 찾을 수 없게 되었다-라는 이야기를 노멘은 꽤나 씁쓸하게 늘어놓곤 했다. 뿌리를 잃어버린 가여운 표정으로. 

허나 그러면서도 후회한다는 말은 한 번도 하지 않았으니, 그건 노멘 나름의 다정이었다. 노멘이 제 손으로 뿌리를 태워버린 대신 뿔뿔이 흩어진 이들은 대부분 살았으므로.

남을 먼저 살리고야 마는 그 이기적인 다정은 노멘의 천성이었다. 그래, 그런 사람이라 발밑에 시체를 두고는 살지 못하나 보지.

하지만 준은 아니었다. 준은 발밑에 무엇이 뒹구든 제 사람만 아니면 되었다. 

그러니까 설령 영혼이 진창에 떨어져 뒹군다 해도, 노멘은 살아야 했다.

준은 금방 울타리 끝에 다달았다. 보육원의 대문이었을 창살은 뜯겨져나가 잡초에 먹힌 채였고, 그것을 한 남자가 밟고 서 있었다. 검은 정장코트와 회색 목도리가 담뱃불에 비쳐 어른거렸다. 준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마르첼로?”


남자가 고개를 들어 숲을 바라봤다. 준은 어둠 아래에서 총에 손을 올렸다. 그러나 남자, 마르첼로는 양 손을 들어 보이며 어색하게 미소할 뿐이었다.


“준 씨. 결국 왔군요.”


그 모습에 준은 한걸음 숲 밖으로 나갔다.

마르첼로는 노멘과 준이 살려둔 얼마 안 되는 칼마의 일원이었다. 사실 현재 라포르니 시에 남아있는 칼마의 잔당들, 특히 카포 쯤 되는 간부들은 대부분 노멘의 자비로 살아난 이들이었다. 오랫동안 칼마에 휘둘려온 라포르니라 전부 죽여 버리면 치안부터 행정까지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정말 미파엘레에게 붙은 거예요?” 

“완전히라고 할 수는 없지만, 예. 면목 없게 되었습니다.”

“대체 무엇 때문에…?”


준은 코트 안에 숨긴 도구들을 만지며 물었다. 노멘은 카포들을 살려주면서 안전장치를 해 두었다. 그들이 얻거나 유지할 수 있는 이익, 친지의 안전 등…. 사실상 칼마가 무너진 후 잔당들을 실질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건 노멘과 준이었다. 

둘이 칼마를 무너트린 후에 라포르니 시를 바로 뜨지 않았던 것도 그래서였고, 당장 지금 준도 그들에게서 정보와 몇몇의 도구를 받아서 오는 길이었다. 

때문에 마르첼로의 행방도 알고는 있었지만, 준은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애당초 마르첼로는 먼저 노멘에게 다가와 칼마를 무너트려 주길 청했던 자였다. 그런데 왜 이제와 미파엘레에게 가담한단 말인가.


“…엘레나 때문이었죠. 그 사람을 제 곁에 데려오려면 미파엘레를 죽이고, 다른 카포들의 눈총도 치워야 했는데… 그건 불가능했거든요. 준 씨도 알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결국 당신도 노멘 씨를 구하기 위해 여기까지 왔잖습니까.”

“아.”


둘이 그런 사이였군. 이해하고만 준의 낯이 흐려졌다. 마르첼로가 다시 한 번 미안한 듯 웃었다.


“그래도 아주 나쁜 상황은 아닙니다, 준 씨. 미파엘레는 당신을 영입하고 싶어 하고 있으니.”

“…그래요?”


그나마 다행인 소식이었다. 준은 미간을 문지르며 잠시 고민하다 마르첼로에게 몇 가지 질문을 한 뒤, 함께 다 타고 골조만 남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무너진 몇 개의 벽을 넘자 그래도 3면의 벽이 멀쩡하게 남아있고 천장도 붙어있는 공간이 나왔다. 


“드디어 왔군, 내 친구! 어서 들어오게. 긴 대화를 나눠야 할 테니!”


영입하고 싶어 한다는 건 사실이었는지 미파엘레가 퍽 신사적인 표정으로 준을 맞이했다. 준은 혀를 차며 눈을 굴렸다.

노멘은 방 한가운데 의자에 묶여 있었다. 회색 눈동자가 시선을 피하자 준의 눈이 번뜩였다. 불쑥 그 얼굴을 통 채로 포르말린에 담가버리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준은 애써 심호흡하며 들끓는 마음을 가라앉혔다.

좀 진정하고 나니 그새 생겨난 이마의 상처와 입에 물린 재갈, 붉게 문드러진 눈가가 눈에 들어왔다. 준은 낄낄 웃음을 터트렸다.


“그 사람 살려놓기가 꽤나 어렵죠?”


노멘에게 총을 겨누고 있던 미파엘레의 입매가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준은 그것을 놓치지 않고 한참을 더 낄낄댔다. 그러다 미파엘레의 인내심이 다 닳았겠다 싶을 즈음 웃음을 그쳤다. 


“그래서? 날 여기까지 불러낸 이유는? 태도를 보아하니, 아무래도…”


준의 시푸른 눈동자가 도르륵 굴렀다. 눈에 보이는 인원은 미파엘레를 포함해 6명이었다. 자신의 뒤에 선 마르첼로와 미파엘레의 옆을 지키고 있는 엘레나, 그리고 미파엘레와 함께 자취를 감췄던 카포 둘과 솔다토(전투원) 하나. 


"영입 제안인가?“


준의 능청스런 말에 이번엔 미파엘레가 웃음을 터트렸다. 기침에 가까운 탁성에 준은 찡그려지려는 표정을 겨우 붙잡아 폈다.

그때 눈을 내리깔고 침잠해있던 노멘이 고개를 들어 준을 바라봤다. 느리게 움직이는 잿빛 눈동자.


“그저 투견인 줄 알았더니 오히려 이쪽이 더 말이 통하는군.”


미파엘레가 만족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준은 고개를 까딱였다. 노멘의 눈이 다시 내리깔렸다. 


“어떤가. 내 제안을 받아줄 텐가?”

“대가와 조건은?”

“두 사람의 신변 보장과 무조건적인 임무 수행.”

“…좋아. 개 노릇은 익숙하지.”


협상은 짧았다. 준이 제안을 승낙하자 가장 가까이 있던 솔다토가 준의 손에 들린 총을 가리키며 손을 내밀었다. 준은 껄끄러운 낯으로 총을 건네고, 등허리에 수납해뒀던 나이프도 꺼내 떨궜다. 그제야 미묘하게 동선을 가리고 있던 자들이 한 발짝 씩 물러났다. 준은 트인 길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미파엘레가 기꺼이 미소하며 손등을 내밀었다. 여전히 징그러운 남자였다. 준은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그 손을 받치고 허리를 숙였다. 그렇게 충성의 맹세가 이뤄지기 직전.

노멘이 밧줄을 풀고 미파엘레에게 달려들었다.

쾅! 


“돈 칼마!”


의자가 넘어지며 요란한 소리가 났다. 순식간에 세 명의 몸이 엉켰다. 미파엘레의 부하들은 총을 들고도 쏘지 못해 우왕좌왕했다.

그러나 두 명이 매달렸음에도 미파엘레 역시 쉽게 넘어지진 않았다. 준은 미파엘레를 한 번에 꺾길 포기하고 목과 한쪽 팔을 잡아 늘어졌다. 그 사이 노멘이 미파엘레의 손에서 총을 뜯어내듯이 빼앗았다. 


“merda!”


미파엘레가 욕설을 뱉으며 준의 팔꿈치를 짓눌렀다. 순간 몸이 훅 끌려 내려갔다.  

쿵! 

탕 탕 탕!

준이 반사적으로 낙법을 취하기 무섭게 총성이 빗발쳤다. 노멘이었다. 팔을 꺾으려던 미파엘레가 혀를 차며 물러났다. 거리가 벌어지니 엘레나가 명료하게 총을 겨누는 게 보였다. 준은 몸을 일으키는 것보다 먼저 품 안에서 작은 캔 같은 것을 꺼내 던졌다. 

치이익-!


“연막탄?!”

“젠장, 밖으로 나가!”


순식간에 흰 연기가 공간을 메웠다. 그 틈을 타 준은 노멘을 붙잡고 빠져나왔다. 

그러나 방향을 잘못 잡았는지,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들어왔던 쪽이 아니라 더 안쪽이었다. 군데군데 벽이 무너져 있으니 안 그래도 방이 많아 복잡한 건물이 더 복잡해 보였다. 준이 당황하며 헤매자 노멘이 멈춰 서서 한쪽을 가리켰다.


“저쪽으로 일직선으로 끝까지 가서 오른쪽으로 나가. 남아있는진 모르겠지만 뒷문으로 연결될 거야.”

“…꼭 나 혼자 나가라는 것처럼 들리네.”

“한 명은 남아야지. 후환을 남겨둘 순 없잖아.”


준은 주변을 살피던 고개를 돌려 노멘을 위 아래로 흘기다, 노멘이 들고 있는 권총을 뺏어들며 말했다.


“내가 그 말에 수긍할 거라고 생각해요? 남을 거면 내가 남아야지.”

“너야말로 내가 그 말을 들을 거라고 생각하니?”


아주 당당한 대꾸에 새파란 눈동자가 황당함을 가득 담고 노멘을 노려봤다. 


“이젠 아주 뻔뻔해지기로 했어요?”

“그래, 이젠 포장할 힘도 없다. 손닿지 않는 곳으로 도망가면 포기할 줄 알았더니.”

“거의 포기할 뻔 했는데, 다시 맘 잡았어요.”


당신과 함께 살기로.

짧으나 무거운 선언에 노멘의 표정이 괴롭게 구겨졌다. 답답하다는 감정이 그대로 보였다. 목을 주무르며 성대한 한숨을 쉬는 노멘을 보며 준은 싱그럽게 웃었다. 어서 저 얼굴이 체념을 담았으면 좋겠는데.

그때 등진 벽 너머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인원은 두 명. 준은 벽에 붙어 소리로 거리를 가늠하며 소곤거렸다.


“같이 처리하고, 같이 나가죠.”


노멘은 대답하지 않고 벽에 등을 붙였다. 

발소리의 주인들은 이름 모를 카포와 솔다토였다. 그들이 무너진 벽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순간, 두 발의 총성이 울렸다. 한 명은 가슴을 붙잡고 쓰러졌고 다른 한 명은 간발의 차로 피해 팔을 붙잡은 채 멀쩡한 벽 아래로 숨었다. 

그러나 그곳엔 이미 노멘이 자리한 채였다. 준이 비명을 들으며 벽을 넘어가자 노멘이 목 꺾인 시체를 쿵 떨궜다.

큰 소리를 냈으니 다시 이동해야 했다. 준은 노멘을 끌고 자리를 옮기려 했다.

탕!


“윽!”

“노멘!”


전조 없이 날아온 총알에 노멘이 어깨를 붙잡았다. 준은 황급히 고통에 굳은 노멘을 거의 들쳐 매듯이 하고 뛰었다. 탕탕탕! 발치로 총탄이 쏟아지다 코너를 돌자 잠시 멈췄다. 

빼앗은 총에 남은 총알은 5발. 준은 짧게 숨을 내쉬며 고개를 슬쩍 내밀었다. 반대편 복도 끝에 회색 목도리 자락이 살짝 보였다가 들어갔다. 엘레나였다. 기척이 전혀 들리지 않다니 실력이 죽진 않은 모양이었다. 


“얘야.”


어쩔까 생각하는데 노멘의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준은 힐끗 눈을 굴렸다가 퉁명스레 대꾸했다.


“왜요. 아니, 상처에 뭐라도 좀 묶지 그래요?”

“저기.”


벽에 기대 반쯤 주저앉은 노멘이 턱으로 어느 곳을 가리켰다. 어두컴컴해서 쓸 만해 보이는 방이었다.

자신의 말을 싹 무시하는 건 짜증났지만 확실히 도움은 됐다. 준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노멘을 부축해 방으로 들어갔다. 

문짝 없는 문가에 바짝 붙어 숨기 무섭게 총성이 울렸다. 여전히 엘레나의 발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구멍난 천장에서 새들어오는 달빛으로 희미한 그림자가 보였다. 준과 노멘은 숨소리를 최대한 죽이며 때를 노렸다. 

그리고 상대가 문가에 가까이 다가왔을 때.


“!?”


화살처럼 쏘아져나간 준이 뒤에서 여자의 목을 휘감고 허리를 무릎으로 찍었다. 이어 손목을 비틀어 총을 떨어트리고 뒤로 꺾었다. 퍽, 그대로 벽에 눌린 여자의 뒤통수에 총구가 닿았다.


“큭, 이 새끼들이…!”

“-엘레나!”

“아, 타이밍 끝내주네.”


완전히 제압이 끝나기 무섭게 미파엘레와 남은 카포 하나가 나타났다. 그 뒤로 마르첼로 역시 보였다. 준은 여자의 머리에 겨눠진 총을 잘 보이게 흔들며 그들을 바라봤다. 


“어떡하죠, 미파엘레? 상황이 반대가 됐네요.”

“…엘레나.”

“죄, 죄송합니다, 미파엘레 님.”

“잘 아는구나.”


그럼 나를 이해해 줄 수 있겠지? 미파엘레가 부드럽게 웃으며 총을 들었다. 그에 노멘이 몸을 굳히고 엘레나의 눈이 커진 순간.

탕!

툭, 미파엘레의 손에서 총이 떨어졌다. 한 박자 늦게 주름진 손을 타고 피가 흘러내렸다. 이어 탕 소리가 한 번 더 울려 퍼지고 미파엘레가 허벅지를 붙잡으며 무릎 꿇었다.

총을 쏜 이는 마르첼로였다. 


“마르첼로?! 너…!”

“이게 무슨……!!”


미파엘레와 엘레나가 경악하는 사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린 카포의 머리에도 총알이 꽂혔다. 유유히 다가오는 마르첼로를 보며 준만이 동요 하나 없이 씩 웃음 지었다. 


“고마워요. 약속대로 엘레나를 지킬 수 있을 만큼의 지위를 줄게요, 마르첼로. 언더보스는 어때요?”


준은 엘레나를 마르첼로 쪽으로 떠밀듯 풀어주며 말했다. 그러자 마르첼로가 아직 멍한 엘레나를 끌어안으며 준의 손을 잡아 손등에 입을 맞췄다.


“무엇이든 영광입니다, 돈 칼마.”

“………뭐?”


싸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준은 마르첼로가 당황할 정도로 날카로운 침묵에도 뻔뻔하게 고개를 돌려 노멘을 바라봤다. 

노멘은 입가에 경련이 올 정도로 표정을 주체하지 못하며 준의 어깨를 잡았다. 애써 올라간 입꼬리가 아득바득 희망찬 목소리를 냈다.


“아, 아니지? 거짓말이지? 내가 잘못 들었지? 그게 무슨 말이야. 네가, 네가 왜… 왜……?”


화조차 내지 못하는 노멘을 보며 준은 안쓰럽다는 듯이 그 얼굴을 쓰다듬었다. 


“제대로 들었어요.”

“아냐. 아냐…!! 얘야! 대체 무슨……!!”

“당신이 자꾸 위험해져서 죽을 기회가 생기잖아요. 나름 자비를 베풀어서 그 정도면 볼 일 없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건드리는 놈이 나와 버렸잖아.”


그래서 이번 기회에 아예 내가 완전히 가져버리려고요.

다리의 힘이 풀렸는지 노멘이 휘청거렸다. 준은 맑게 웃으며 노멘의 허리를 받치고 등을 토닥였다.


“걱정 말아요. 당신에게 칼마의 일원이 되라고 하진 않을 테니까. 음, 일단 다른 건 저 놈부터 죽이고 이야기할까요?”


준의 손가락이 슬금슬금 도망치려던 미파엘레를 가리켰다. 내내 오만한 신사를 흉내내던 징그러운 남자의 낯이 단숨에 하얗게 질렸다. 준은 낄낄 웃다 넋이 나간 노멘을 보며 물었다.


“아. 당신이 죽일 수 있게 해줄까요?”

“….”

“자, 여기요.”


노멘은 마치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준이 쥐여 주는 총을 받았다. 준은 노멘을 미파엘레 앞으로 데려가 축 늘어진 팔을 잡고 총을 조준했다. 뒤에서 엘레나가 버둥거리는 듯 했지만 곧 마르첼로가 끌고 자리를 피했다. 


“이젠 아무 걱정 없이 함께 사는 거예요.”


준은 노멘의 귓가에 속삭이며 방아쇠를 당겼다.

탕-!

피와 뇌수가 폭죽처럼 튀어 노멘과 준을 덮었다. 준은 느리게 쓰러지는 미파엘레를 바라보다 노멘이 주르륵 주저앉기에 같이 무릎을 굽혔다. 


“사실 오늘 아침에 말이에요. 당신 새 이름으로 신분증을 만들었거든요.”


준이 주머니에서 작은 카드를 꺼내 노멘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헤라. 헤라 파브리.”


신분증을 본 노멘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준은 노멘의 손에 신분증을 쥐여주고 노멘의 뺨을 감쌌다. 창백한 얼굴에 튄 피가 대비되어 아름다웠다. 준은 사랑스럽다는 표정으로 이름을 불렀다.


“헤라. 이제 당신은 헤라예요.”


나의 헤라. 헤라…. 

준은 끊임없이 자신이 새긴 이름을 중얼거리며 붉게 번진 얼굴에 입 맞췄다. 새 이름에 파묻힌 재색 눈동자는 빛을 잃고 조용히 감겼다.



#

문틈으로 새어나온 빛이 어두운 복도를 가로지른다. 

선명하게 그어진 빛줄기에 두꺼운 카펫과 고풍스런 그림들, 값비싼 조각들이 윤곽을 드러냈다. 세밀하게 세공된 고급 목재의 문까지 나무랄 데 없는 부호의 대저택이었다. 

저택의 주인은 다시 빛이 새어나오는 문 안에 있었다. 

검은 곱슬머리에 짙은 눈썹, 조금 짙은 피부. 책상에서 일어선 준의 손등에 정장을 빼입은 중년이 가볍게 키스했다.


“그럼 부탁드립니다, 돈 칼마.”

“제가 할 말씀을.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시장님.”


준은 최근에 자신의 도움으로 새로 취임한 라포르니 시의 시장을 배웅한 뒤 응접실을 나왔다. 방금까지 싱글싱글 잘만 웃던 얼굴에서 싹 표정이 빠져나갔다. 준은 지친 얼굴로 어깨를 늘어트리며 걸음을 옮겼다. 저택 깊숙한 곳을 향하는 준의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이윽고 저택의 가장 안쪽 방에 다다르자 준은 신난 아이처럼 경쾌하게 문을 두드렸다.


“나 왔어요!”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준은 익숙하다는 듯 문을 열고 들어갔다.

방안 침대 위에는 채도 낮은 금발 머리의 여자가 앉아있었다. 문이 열리자 창밖을 바라보던 텅 빈 잿빛 눈이 준을 돌아봤다. 


“헤라.”


준은 자연스레 마른 몸을 끌어안으며 침대에 앉았다. 


“오늘 뭐 했어요, 헤라?”

“….”

“응? 대답해야죠. 헤라.”


준이 붉은 자국이 남아있는 목을 쥐며 이름을 부르자, 그제 서야 상처 진 입술이 달싹였다.


“…응, 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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