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iring: 평행세계 스티브 로저스/토니 스타크(아이언맨)/스티브 로저스(쉴드 국장)
Rating: R



-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는데, 어느 걸 먼저 듣겠나?

보안회선의 화상전화로 토니와 연결된 리드가 피곤한 미간을 문지르며 물었다. 질문 자체는 클리쉐가 될 정도로 고전적이지만, 막상 이런 말을 듣는 순간이 오면 꼭 망설이게 되고 만다. 토니는 쓴웃음을 지으며 손 안의 펜을 굴렸다.

“이런 질문을 들을 땐 언제나 나쁜 소식이 메인 디쉬더군. 식사는 순서대로 하는 편이 좋으니 에피타이저부터 들겠네.”

- 자네가 의뢰한 평행세계 인간에 대한 조사 결과가 나왔어. 다행히 그는 스크럴도 클론도 LMD도 아니야. DNA 단위까지 조사해봤지만 아무런 문제점도 찾지 못했어. 그는 완벽하게 평범한 초인이네. 그의 위치추적기는 본인 말대로 차원 간 전송까지 가능한 초단파 송수신기더군. 구조가 제법 흥미로웠어.

완벽하게 평범한 초인이라. 그 말은 꼭 뮤턴트 차별주의자들이 고안해 낸 고약한 말장난처럼 들렸다. 하지만 분명 좋은 소식이긴 했다. 스티브의 모습을 한 적과 싸워야 할지도 모른다는 부담감에서 해방될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럼 나쁜 소식은?”

- 위치 추적기 말인데 고치는 데 시간이 제법 걸릴 거야. 기능 자체는 우리 세계의 것과 흡사한데, 구현 방식이 상당히 다르더란 말이지. 핵심적인 부품을 복제하기 위해선 정밀 연구가 필요해.

미간을 찌푸린 토니는 펜 끝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흠. 스티븐의 체류 기간이 예상보다 더 길어질 거란 말이지?

“시간이 얼마나 걸릴 것 같나?”

- 사흘, 아니 일주일이면 될 것 같군. 좀 넉넉잡아 생각하자고.

“일주일이나? 그건 당신답지 않은데?”

- 이봐 토니. 알 만한 사람이 왜 그러는 거지? 패러다임 자체가 다른 기술을 복제하는 일이야. 그게 말처럼 쉬운 일 같은가?

같은 이공학자인 토니는 어렵지 않게 리드 박사의 항의를 알아들었다. 그래. 자네라고해서 늘 만능일 수는 없겠지 미스터 판타스틱. 깊게 한숨을 쉰 토니가 주름진 미간을 손끝으로 문지르며 입을 열었다. 일주일의 체류 기간 동안 일어날 수 있는 온갖 사건들을 따져보느라 복잡해진 머리에선 뜨끈뜨끈하게 열이 올랐다.

“어쩔 수 없군. 알겠네. 대신 가능한 한 빨리 서둘러 주게. 자네도 알다시피 우리 세계엔 캡틴 아메리카가 이미 두 명이나 있어. 다른 세계에서 온 세 번째까지 붙잡아 둘 필요는 없단 말일세.”

-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지. 약속하겠네.

리드 박사는 허리를 세우느라 화상화면에서 살짝 멀어진 상태로 대답했다. 토니도 화상 회의 모니터를 아웃시키고, 다른 일에 몰두하려고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그때 그의 머릿속에서 한 가지 의혹이 스쳐지나갔다. 그러고 보니, 이 건은 거의 외계 기술 연구나 다름없지 않은가? 토니는 눈도 깜빡하지 않고 화면 저편의 리드를 바라보았다. 저 남자가 이런 절호의 기회를 그냥 지나칠 리가 없는데?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묻지, 리드. 그 연구가 정말 필요한 거야, 아니면 그냥 자네가 그러고 싶은 것뿐이야?”

머릿속에 떠오른 의심을 거두지 못한 토니는 화상 화면이 꺼지기 직전에 대놓고 물었다. 그러나 리드는 그의 질문을 듣지 못한 듯 모니터를 꺼버렸다. 약 오른 토니가 다시 보안회선을 가동시켰지만 리쳐드 박사는 그의 호출에 회답 하지 않았다. 직접적인 수긍보다 더 확실한 대답에 확신을 가지게 된 토니는 짜증을 내며 펜을 집어 던지고 말았다. 이 망할 연구성애자 같으니라고!!! 그가 던진 스타일러스 펜이 홀로그램 모니터를 뚫고나가 책상 뒤편으로 떨어졌다.

그는 욕이라도 하고 싶은 기분으로 씩씩거렸지만 리드가 이런 식으로 나온 이상 기다릴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어찌되었거나 간에 위치 추적기 건은 리드 박사가 해결해주지 않으면 결론이 안 나는 문제였으니 말이다.

 

 

 치미는 배신감과 분노를 눌러 참은 토니는 어쩔 수 없이 스티븐에게 돌아가 위치 추적기 건에 대해 설명했다. 가능한 한 듣기 좋게 포장하긴 했지만, 영리한 그가 상황을 어디까지 파악하고 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허나 스티븐은 의외로 대수롭지 않게 자신이 처한 상황을 받아들였다.

“괜찮습니다. 토니. 어쩔 수 없는 일이죠.”

위치 추적기는 물론이고 본인 또한 만만찮은 조사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스티븐은 불쾌감을 전혀 내보이지 않았다. ‘그녀도 당신처럼 철두철미한 성격이었어요.’ 그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중얼거릴 뿐이었다.토니가 예상했던 대로, 스티븐이 그들의 세계에 머물게 되자 여러 가지 자질구레한 문제들이 연이어 발생했다.

그가 가장 처음 맞닥트린 일은 의상문제였다. 혹시 모를 의혹과 혼동을 피하기 위해 체류 기간 동안 캡틴 아메리카의 코스튬을 피해달라는 토니의 부탁을 스티븐은 흔쾌히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러고 나자 기본적인 속옷 외에는 입을 수 있는 게 없었다. 보다 못한 자비스가 옷 방에 스티브 주인님께서 입으시던 의복이 남아 있다고 넌지시 고해왔지만, 토니는 그 말을 못 들은 척 했다. 그렇지 않아도 심란해 죽겠는데 굳이 옷까지 똑같이 입힐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렇지 않아도 스티브와 겹쳐 보여서 탈인 남자인데 말이다.

자학이 취미인 그였지만 자해까지 즐기진 않았다. 토니는 자비스에게 카드를 던져주며 쇼핑을 지시했다. 그 덕에 스티븐은 한 아름이나 되는 새 속옷과 일상복을 얻었다. 오랜 세월 동안 스타크 가에 종사해온 자비스는 주인님의 카드로 인심 쓰는 법을 알고 있었다.

두 번째 문제는 스티븐의 인기에 있었다. 물론 그 인기의 진짜 주인공은 스티븐이 아니라 스티브일 것이다. 스파이디의 입에 확성기가 달려 있다는 사실을 깜빡했던 토니는 다음날부터 맨션으로 밀려드는 인파들에 곤혹을 치러야 했다. 그들은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스티븐을 정말로 보고 싶어 했다. 올드 어벤져스의 멤버들은 물론이고, 뉴 어벤져스의 멤버들, 그에 더해 x맨들이나 쉴드의 간부급들까지도. 어벤져스 맨션에 발을 들일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맨션으로 달려왔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 지구를 지키는데 관심 있는 히어로는 아무도 없는 듯 했다.

하지만 스티븐이 관심을 두는 대상은 오로지 토니뿐이었다. 그는 자신의 그러한 태도를 누구에게도 감추지 않았다. 토니는 실로 난감한 처지에 빠졌다. 그는 이 덩치 큰 테디 베어 같은 남자를 어떻게 대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가 떠나는 날까지 서로 마주치지 않은 채 시간을 보내고 싶었지만, 불행히도 스티븐은 토니에게 그럴만한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는 주인을 찾아 헤매는 강아지처럼 끊임없이 토니를 찾아 다녔고, 그를 발견하면 꼬리를 흔드는 환영이 보일 정도로 열심히 뛰어와 그에게 말을 걸었다. 토니가 아무리 냉혹한 인간이라고 해도 길 잃은 강아지의 배를 걷어찰 정도는 아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많은 시간을 스티븐에게 할애해야 했다.

수많은 동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스티븐의 애정 공세를 받을 자신이 없었던 토니는 전략을 달리 했다. 그는 이 세계를 구경시켜준다는 명목으로 스티븐을 끌고 바깥으로 나갔다. 촌에서 올라온 사촌을 안내하듯, 자유의 여신상이며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같은 대표적인 관광지를 돌아다녔고 이 세계의 매츠를 구경시켜주기 위해 야구경기장에 데려가기도 했다. 스티븐은 그 모든 시간을 진심으로 즐겼다. 그러나 그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은 토니와 단 둘이 앉아서 대화를 나누는 시간, 저녁을 먹으며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게 되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다른 때도 늘 그러했지만 그런 순간의 스티븐은 첫 데이트에 나온 수줍은 남자처럼 굴곤 했다. 웨이터가 다가오기도 전에 그가 먼저 의자를 빼주었고, 나갈 때마다 문을 잡아줄 뿐만 아니라 거리를 걷게 될 땐 항상 본인이 차도 쪽으로 걸었다. 불편했던 토니가 몇 번 지적을 해봤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건 의식적인 행동이라고 하기보다 습관에 가까웠다. 살아 있는 동안 타샤는 스티븐에게 공주처럼 대접 받았음이 분명했다.

“그녀는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었으니까요.”

보통 사람이라면 석 달 동안 웨이팅을 걸고 기다려야 하는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함께 하게 되었을 때, 스티븐은 그렇게 말하며 미소를 지었다. 드레스 코드를 지켜야 하는 엄격한 레스토랑이라 스티븐은 모처럼 정장차림이었다. 몸에 딱 맞게 재단된 매끄러운 양복이 단단한 몸매를 고급스럽게 감쌌다. 어지간하면 차려입지 않는 스티브에 비해, 스티븐은 이런 정장 차림에 익숙한 것처럼 보였다. 그는 토니처럼 상류층의 테이블 매너를 완전히 숙지하고 있었고, 와인을 다루는 일에도 능숙했다.

“이 모든 걸 다 타샤에게 배운 겁니까?”

“그렇습니다. 그녀가 아니고서는 제게 이런 걸 가르쳐 줄 사람이 없었죠. 그 사람은 의외로 참을성 있는 교사였어요. 제가 같은 실수를 반복해도 한 번도 화내는 법이 없었으니까요.”

그거야 그럴 때마다 다이아몬드도 녹을 것 같은 미소로 자신의 잘못을 무마시켰으니 그랬던 거겠지. 토니는 와인잔을 들며 시니컬하게 생각했다. 눈앞에서 보고 있는 미소의 위력은 본인도 절감하고 있는 바였으므로 가엾은 타샤를 탓할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자신이라도 스티븐 같은 학생에겐 마음이 약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는 지금 스티브와는 한 번도 와 본 적이 없는 낭만적인 장소에 스티븐과 함께 있었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스티브라면 보여주지 않을 배려와 매너로 토니를 대하고 있었지만, 그가 마치 숙녀라도 에스코트 하듯 애지중지 대할 때 마다 토니는 그가 스티브가 아님을 새삼스레 실감하곤 했다.

“그녀의 어떤 점이 그렇게 마음이 들던가요? 아름답고, 영리하고, 재능 있고 어쩌고 하는 일반적인 이유 말고, 좀 더 개인적인 부분에서 말입니다. 당신이 그녀에게 마음을 빼앗겼던 결정적인 이유가 뭐였습니까? 어떤 계기가 그녀를 선택하게 했죠?”

사실 이 세계의 스티브도 그렇게 매너가 없는 남자는 아니다. 그 또한 자신과 데이트 하는 여자들에게는 스티븐만큼이나 까다롭게 에티켓을 지키곤 했다. 다만 그 대상에 토니는 포함되지 않을 뿐이다. 딱히 부러운 것은 아니지만 궁금하긴 했다. 그 여자들과 자신과의 차이는 과연 뭘까? 단지 성별만이 이유이진 않을 거라고 토니는 믿고 싶었다. 정말로 이유가 그것뿐이라면, 진심으로 비참해질 것 같으니까 말이다.

토니는 입 꼬리를 끌어올려 미소 지으며, 나른한 눈빛으로 절박한 본심을 숨겼다. 스티븐은 다정한 푸른 눈동자로 토니를 바라보았다.

“글쎄요. 그 질문에 정확한 대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될까요? 어느 순간 사랑에 빠지게 되었는지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그리 흔치 않아요, 토니. 당신도 잘 알지 않습니까? 누가 스티브를 사랑하게 된 계기에 대해서 묻는다면 당신도 대답 할 말이 없겠죠. 언제나 곁에 있는 사람과 사랑에 빠진다는 건 그런 게 아닐까요?”

테이블에 와인잔을 내려놓던 토니의 손이 굳었다. 그는 멈칫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고개를 들어 스티븐을 바라보았다. 스티븐은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다정한 눈빛으로 미소 지으며 그를 마주 보았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까?”

지금 화를 내야 하는 걸까? 아니면 웃으면서 부인하는 쪽이 더 나은가? 순간적으로 머릿속이 헝클어진 토니는 한참을 아무 말도 못하고 있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아니라고, 당신이 착각한 거라고 잡아떼고 싶었지만 마주보는 스티븐의 시선이 너무 깊었다. 닥터 스트레인지가 실수한 동료들을 바라볼 때와 마찬가지로 그는 모든 걸 다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스티븐과 닥터 사이에 다른 점이 있다면 오직 하나, 그 눈길에 동정심과 자비심이 보인다는 것뿐이다. 토니의 질문에 스티븐이 어깨를 으쓱하며 입을 열었다. 그의 미소는 아까보다 훨씬 더 짙어져 있었다.

“이곳에 온 이후로 줄곧 당신만을 봐왔으니까요. 나는 당신과 함께 있었지만, 당신은 나와 함께 있는 게 아니었죠. 모를 수가 없는 일이었어요. 토니.”

그는 테이블 위에 놓인 토니의 손을 잡았다. 커다란 손이 감싸듯 토니의 손등을 덮었다. 푸르게 돋은 핏줄 위를 쓸어 올리는 손가락의 움직임은 마치 애무처럼 깊고 농밀했다.

“하지만 그 남자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요. 그는 당신 마음조차 모를 겁니다. 더 냉정하게 말할까요? 그 사람은 앞으로도 절대 그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할 겁니다. 당신은 그에게 연애의 대상이 될 수 없어요. 언제까지나 그저 친구일 뿐이겠죠.”

토니는 스티븐의 손아귀에서 자신의 손을 빼내려고 했다. 하지만 교묘하게 손목을 움켜쥐고 있는 손가락들 때문에 그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다. 토니는 희게 질린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스티븐은 더할 나위 없이 부드러운 태도로 그를 대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욕당한 듯한 기분을 떨쳐 낼 수 없었다.

“이 손 놓으시죠. 로저스 씨.”

“하지만 저는 다릅니다. 저는 당신을 사랑할 수 있어요. 당신의 연인이 되어 드리겠습니다. 당신이 절대로 가지지 못하리라 포기했던 모든 것을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제게 와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당신을 정말 필요로 하는 것은, 그가 아니라 저입니다.”

“지금 당신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알고 있습니까? 나더러 지금 대용품이 되라고 하는 건가요?”

본격적으로 화가 나기 시작한 토니가 낮게 이를 갈며 물었다. 다시 손을 빼려고 했지만, 그는 여전히 토니를 놓아주지 않았다. 스티븐은 토니의 손등을 붙잡아 자신의 입술 쪽으로 가져갔다. 부드러운 입술이 토니의 손등에 와 닿았다. 손가락 마디마디에 닿아오는 온화한 키스. 그는 토니의 손등에 입술을 묻으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제 말을 오해하셨군요 토니. 제가 제안하는 것은 그 반대입니다. 저는 지금, 제 자신을 대용품으로 내놓고 있는 겁니다. 제게 와주시기만 하신다면 당신이 원하는 건 뭐든지 해드리겠습니다. 그 남자처럼 말하고, 그 남자처럼 웃겠어요. 그리고 그 남자처럼 당신을 사랑하겠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정말로 간절한 것처럼 들렸다. 그의 눈빛도 그랬다. 그 떨리듯 흔들리는 눈동자에 토니는 침을 삼켰다. 그는 정말로 자신을 원하고 있었다. 아니, 그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자신에게서 보이는 사랑하는 사람의 그림자다. 스티븐이 가진 마음의 크기를 느낀 토니는 다시금 타샤가 부러워졌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이런 식의 사랑을 받아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나는 욕심이 많은 사람입니다. 로저스 씨.”

스티븐의 진심 앞에서 토니의 분노는 오래가지 못했다. 그가 선을 넘어선 것은 사실이지만, 그 마음을 이해하지 못할 것은 아니었다. 스티브가 죽은 줄 알았을 때 같은 제안을 받았더라면, 토니 역시 두 번 생각해보지도 않고 그 질문에 답했을 지도 몰랐다.

“그리고 짐작컨대, 당신도 나와 다르지 않을 겁니다. 당장은 속일 수 있을지 모르지요. 하지만 자신을 영원히 속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경험자인 제 말을 믿으세요. 당신이 제안 한 일을 제가 승낙한다면, 끝내는 서로가 비참해질 겁니다.”

토니는 담담하게 말하며 그의 손을 마주 잡았다. 스티븐의 손이 약간 더 크긴 하지만, 토니도 성인 남자였다. 여자 손으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뼈대가 굵었고, 잦은 용접과 체술 훈련으로 인해 굳은살도 배어 있었다. 스티븐은 마주 잡힌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의 우울한 시선에 무엇이 담겨 있는지 토니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절박했던 것뿐이리라고 토니는 스스로를 다독였다. 어쨌거나 간에 그는 언제나 스티브에게 약했다. 그가 아니라 다른 누구라 할지라도 같은 반응일 거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똑같은 얼굴을 마주하며 누가 진심으로 화 낼 수 있겠는가? 게다가 예전에도 말했지만, 이 남자는 지나치게 테디베어를 닮아서 오래 미워하기도 힘들었다. 조금이라도 차갑게 굴고 나면 심술궂은 인간이 된 것 같아 죄책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엄청나게 용기를 내서 말한 건데 장렬하게 차였네요. 좀 부끄럽습니다.”

한참만에야 고개를 든 스티븐이 멋쩍게 미소 지으며 중얼거렸다. 이마까지 벌겋게 상기된 얼굴이었지만 부정적인 감정은 찾아 볼 수 없었다. 토니도 마주 미소 지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도 기분이 좀 이상했다. 속내야 어찌되었든 방금 스티브를 걷어찬 것이다. 자기가 이런 일을 할 거라고는 꿈에도 상상해 본 적 없는데 말이다.

“그럼 이제는 이 손을 좀 놔주시죠?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다들 우리를 이상하게 바라보고 있는데요.”

어벤져스 내에서야 짜하게 소문이 퍼져 있지만 대중들에게 다른 세계의 스티브 로저스가 방문했다는 사실을 공표한 적은 없다. 그러니 모르는 사람들의 눈에 이 광경은 캡틴 아메리카가 아이언맨의 손에 키스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토니의 말을 들은 스티븐이 잠깐 생각 하는 것 같더니, 어울리지 않게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우리 이대로 춤이라도 한 곡 출까요?”

“네?”

“춤추자구요. 홀 한 가운데서 당당하게. 이 세계의 스티브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저는 춤도 제법 잘 추거든요.”

“이봐요, 로저스씨. 상황파악을 못하시는 모양인데, 다른 사람들 눈에는 당신이 우리 세계의 캡틴으로 보일 겁니다. 나더러 지금 캡틴 아메리카와 춤을 추라고 하는 겁니까?”

“물론입니다. 제가 제안하고 있는 게 바로 그건데요? 캡틴 아메리카와 춤 출 수 있는 기회에요, 토니. 본인은 아니겠지만 남들은 모두 그렇게 생각하겠죠. 그 무심한 남자에게 이 정도 장난도 치면 안 됩니까?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친구의 마음도 몰라주는 형편없는 인간인데?”

농담처럼 말하고 있었지만 팔을 잡아당기는 스티븐의 태도는 진심이었다. 설마 진짜로 할 건가? 어이없는 기분에 토니는 헛웃음을 지었지만 스티븐은 포기하지 않았다.

스티븐이 거듭 재촉해오자 토니의 마음도 흔들렸다. 까짓 거 춤 한 번인데 어때서? 나중에는 그런 생각까지 들었다. 이제껏 그 인간 때문에 혼자 마음태운 것을 생각하면 이 정도 스캔들이야 가벼운 조크에 불과하다. 누가 물어도 변명 거리는 충분하고, 실은 스티브와 춤춰보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았다.

“한 번쯤은 심술을 부리는 것도 괜찮겠죠.”

마침내 함락된 토니가 스티븐을 따라 홀로 나갔다. 그들이 손을 마주 잡고 걸어가자 사람들의 시선이 그들에게로 쏟아졌다. 고급스러운 장소라 핸드폰 촬영 같은 노골적인 탐색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근한 시선과 놀람에 찬 웅성거림은 피할 수 없었다.

홀로 나가는 와중에 잠깐 웨이터에게 귓속말을 한 스티븐은 자기 말대로 댄스홀의 정중앙에 섰다. 맞잡은 손을 어깨 높이로 들고, 다른 손으로 토니의 허리를 껴안은 스티븐이 미소를 지으며 음악을 기다렸다. 토니는 자기 인생 최고의 미친 짓을 하는 기분으로 그런 스티븐을 올려다보았다.

“참, 곡은 탱고로 부탁했습니다. 탱고 출 줄 알아요?”

“잠깐, 스티븐. 뭐라구요?”

“몰라도 상관없어요. 제가 리드하죠.”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정말로 탱고 음악이 들려왔다. 세상에. Por Una Cabeza잖아!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린 토니는 스텝을 밟으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Por Una Cabeza에 맞춰 탱고를 추게 됐지만, 여인의 향기가 아니라 트루 라이즈에 출연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장미꽃이라도 입에 무는 건데. 한쪽 다리를 들어 농염하게 스티븐의 허벅지를 감으면서도 토니는 폭소를 멈추지 못했다.

 

- to be...


가늘고 길게 덕질합니다

페이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