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로운 저녁. 너는 사과를 자르다 손가락을 베었다. 피가 뚝뚝 흐르는데도 너는 아무렇지 않아 하며 휴지 몇 장을 가져다가 스스로 지혈했다. 내가 피가 너무 많이 나는 거 아니냐 물으니 너는 괜찮다고 했다. 너는 잠들 때까지 손가락에 휴지를 둘둘 말고 있었고 그건 새빨갛게 물들어있었다.

 

너는 이렇게 말했다. 한물간 예능프로를 틀어놓고 나는 네 무릎을 베고 누워있었다.

 

“다음 달에는 여행이나 가지 않을래?”

“여행? 나 시험 기간이잖아.”

“맞아, 그랬지.”

“뭐야, 갑자기. 가고 싶은 데라도 생겼어?”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싱겁긴.”

 

너는 입을 다물었고 나는 예능 출연자의 위트있는 말에 하하 웃었다. 정확히 무슨 상황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내 웃음으로 대화는 끊겼고 그게 끝이었다.

 

다음날 너는 자살했다.

 

장례식장에서 네 어머니가 세상이 떠나가라 비명 지를 때, 나는 그 무엇도 하지 못했다. 눈물을 흘리지도 못했고 무슨 말도 하지 못했다. 눈만 겨우 뜬 채 네 영정사진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 사진은 내가 우리 여행에서 찍어준 네 사진이었다. 너의 눈에는 내가 픽셀 단위로 반사되어 비추어지고 있었다.

 

나는 네 가족이 아니었기에 죽은 너가 관속에 누워있는 걸 지켜보지 못했다. 어차피 나는 이미 아침에 죽은 너를 보았다. 너는 화장되었다. 나는 납골당에 가보지 못했다. 거긴 네가 있기에는 너무 좁은 공간이었다. 너와 나 둘 누울 공간만 있으면 행복하다고 한 너였는데, 홀로 손바닥 하나만한 정육면체에 가루가 되어 누워있는 걸 볼 수 없었다.

 

너의 장례식에서 돌아온 그날 나는 집에서 혼자 공부를 했다. 시험이 한 달 남은 차였고 이번에 점수를 놓치면 그의 장학금은 날아가게 되기 때문이다. 나는 노트에 배운 내용을 필기하고 형광펜으로 단어를 긋고 책을 넘겼다. 암기할 내용을 필사하고 그걸 입으로 중얼중얼 되풀이하고 수업내용의 녹음을 다시 틀어놓고 그 안에 모든 소리들을 한 귀로 흘리고 샤프에 심을 꽂아 넣고 지우개로 오타를 지워내고 그걸로 부족해 화이트로 눌러버리고 그 위에 펜으로 다시 단어를 뭉그러뜨리다가 잘못 쓰고 잉크가 흘러나와 종이를 망가뜨리고 다시 화이트로 그 위를 죽 덮어버리고 결국 하얬던 종이는 엉망으로 울어서 다시는 쓸 수 없게 되었다.

 

녹음기에서 흘러나오는 교수의 목소리는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그 시간에 몰래 떠들었던 너와 나의 대화까지도 기록된 탓이었다. 지루한 수업이었고 교수는 같은 내용을 반복했다. 나는 필기하던 노트에 그 감상을 끄적였고 너는 그걸 보고 웃으며 그 아래에 낙서해주었다. 그 흔적은 방금 막 버린 장의 바로 앞장에 남아있었다. 나는 그 노트를 다시 펼치지 못했다.

 

잠을 잘 수 없었다. 너는 나보다 덩치가 컸고 늘 침대에 더 많은 부분을 차지했다. 그 빈 공간이 너무 허전해서 눈을 감을 수 없었다. 나는 핸드폰을 다시 켰다. 유튜브 숏츠를 하염없이 넘기다 멈추었다. 멍청한 알고리즘은 그에게 멍청한 30초짜리 영상 하나를 추천해주었다. 조회수에 미친 인간들의 주작 방송 클립이었다. 그건 뻔하고 얕은 수가 훤히 보이는 실로 아둔한 내용이었으나, 나는 겨우 그걸 동앗줄로 잡을 만큼 멍청해진 상태였다.

 

나는 네 머리카락을 모은다. 침대 위 베개 밑, 화장실에 둔 빗, 부엌 바닥에 조금씩 흩어져 있었다. 단발인 나와 달리 너는 긴 생머리를 유지했다. 새까만 머리카락은 창백한 네 얼굴과 잘 어울렸다. 모아둔 머리카락은 한 뭉텅이가 조금 안되었다. 우리는 지난 일요일에 같이 청소를 했다. 너는 강박증이 있는 것처럼 꼼꼼해서 구석 틈의 먼지 하나 허투루 놓치지 않았다. 이 집에서 더러운 건 나 하나였다. 너는 하루에 두 번 샤워를 했고, 매일 그 긴 머리를 감고 말렸다. 아침 여섯 시에 일어나 어둠 속에서 준비하던 너에게 나는 가끔 일찍부터 시끄럽다고 불평했다. 너는 미안하다며 내 볼에 짧게 키스해 주었다.

 

언젠가 사두고 서랍 안쪽에 박아두었던 양초를 찾아냈다. 길에서 받은 라이터로 불을 붙이고 거실 한가운데 바닥에 자리 잡는다. 부엌에서 가져온 식칼을 꺼내들어 내 손끝을 베었다. 빨갛게 고인 피가 손가락을 타고 흐른다. 그 피로 바닥에 그림같은 문자를 적어넣는다. 나의 피, 너의 머리카락과 네 사진을 올려둔다. 사진 속 너는 웃고 있다. 나는 그 위에 내 피를 뿌린다. 양초 위의 불은 붉게 타오르며 촛농을 녹인다. 그 불꽃에 다가가 감히 무형의 에너지를 쥐어본다. 순간적인 고통이 손바닥을 타고 올라와 팔을 저리게 만들었다. 불은 꺼지고 연기 한 줄이 하얗게 피어올라 천장에 닿았다. 시선을 내려보니 손끝의 상처는 이미 아물었고 손바닥엔 발갛게 물집이 올라온 게 보였다.

 

달라진 건 없었다. 마법처럼 너는 문을 두드리며 나를 부르지 않았고, 나는 내가 많이 멍청하단 걸 깨달았을 뿐이다. 그렇게 한참을 무릎 꿇은 채로 멍하니 있었다. 사진 위의 피는 까맣게 굳어버렸고 손바닥의 화상자국은 오래도록 쓰라렸다. 세 시간 후에야 나는 정리도 하지 않고 방으로 들어가 잠에 들었다.

 

 

다음날 눈을 뜨니 옆자리엔 네가 누워있었다. 아침잠이 많은 나를 깨우지 않고 지켜보던 너처럼, 너는 내가 깬 걸 보고 웃어주었다.

 

“오늘 1교시인데 늦는 거 아냐?”

 

너는 말했다. 바로 이 목소리였다. 겨우 이틀만이었는데도 이 목소리를 거의 잊어버릴 뻔했다. 높지도 낮지도 않은 높낮이로 조곤조곤한 말투. 너는 소리 한 번 지르는 법이 없었다. 다툼이 일어나면 나는 목청이 터져라 비명지르는데 너는 끝까지 일정한 톤으로 나를 진정시켰다. 너는 싸우는 걸 싫어했고, 나는 의미없는 말들을 싫어했다. 우리는 늘 빈틈없는 포옹으로 갈등을 마무리 지었다.

 

나는 너를 껴안았다. 너는 걸친 것 없이 맨몸이었다. 가늘고 마른 몸은 따뜻하고 뼈가 도드라져 만져졌다. 나는 갈비뼈 하나하나를 부러뜨릴 것처럼 힘주어 너를 쥐었다. 두근거리는 심장소리는 네가 살아있다는 걸 증명했다. 나는 눈물흘렸다. 그 얼굴엔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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