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퇴근 전 이메일을 확인하던 희수는 한 이메일을 확인하고 "아." 하고 저도 모르게 탄식을 내뱉었다. 그리곤 복잡한 표정으로 모니터 화면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옆자리에 있던 동료가 자리를 뜨며 퇴근 안 하냐며 묻자 정신이 든 듯 인사를 건넸다. 그리곤 다시 마우스에 손을 올리고 살짝 고민을 했다. 


GL 호텔 레스토랑 '百合' 디너 코스 예약 확인

- 예약 일시: 20xx년 3월 1일 12시

- 예약 인수: 2명

고객님께서는 상기의 예약 내용을 확인하시고... 

'그래. 집주인한테 잘 보여서 나쁠 건 없지. 뭐.'




"…엄청 맛있겠는데. 예약 되게 빡센 곳 아니야?"

"응!! 1월 1일 되자마자 전화 100통은 걸었을걸? 학원 전화비 더 내야 하는 거 아니냐고 한 소리 들었어."

"휴일 런치니까. 어지간히 빡셌겠네. 그래서? 자랑하는 건 아닐 거고?"


영인은 레스토랑의 음식 사진을 띄우고 있는 희수의 스마트폰 화면에서 시선을 거두어 그 주인에게 맞추며 물었다. 옆자리에 앉은 희수는 그런 영인에 눈을 가늘게 휘며 키득키득 웃었다. 몸의 작은 떨림이 맞대고 있는 어깨를 통해 흘러 들어 왔다. 

여중 여고에 학과도 여초인 곳(영문과)을 나온 희수는 동성 간에 거리가 묘하게 가까웠는데, 자신이 레즈인 걸 알고도 똑같이 그 거리를 유지하는 거 보면 영인은 참 조희수 얘도 난사람이다 싶었다. 


"자랑하는 건데?"

"아이고. 네. 그러십니까요. 나 잔다."

"아아! 삐지지 말고. 알았어. 알았어."

"잘해? 팍씨."

"같이 안 갈래? 삼일절에."

"삼일절?"

"응. 약속 없으면."


미리 약속을 잘 잡지 않는 성격의 영인이었다. 아직 일주일 이상 남은 삼일절 약속이 있을 리 만무했다. 게다가 눈앞의 레스토랑이라면 한국에서도 손에 꼽는다는 맛슐랭 3스타에 빛나는 한식당이었다. 맛있는 걸 좋아하는 영인이었지만 피튀기는 예약 전쟁을 치르기는 죽기보다 싫었으므로 어찌 보면 평생 갈 일이 없을지도 모르는 곳이었다. 


"내가 가도 돼?"

"응. 너랑 가려고."

"올…."

"집주인한테 잘 보이면 월세 깎아 주나?"

"어림도 없어. 으아. 3월달 지출 빡세겠네~"


그렇게 말하면서도 영인은 꽤 들뜬 목소리로 희수의 핸드폰 화면을 다시 보며 "시즌별 메뉴도 있대. 사진 봐. 장난 아니다." 하며 신나했다. 그 천진난만한 모습에 희수는 피식 웃고선 말했다. 


"내가 사줄게."

"엑. 왜?"

"그냥. 고마워서. 많이 마음 써 줬잖아."

"별. 됐어. 네가 예약해 준 거 같이 가는 거로도 난 만족해."

"왜애. 나도 좀 지르자."

"돈이 썩어나? 야. 제일 싼 코스도 10만 원이 넘는데. 허? 고기 메뉴는 별도 차지래. 15만 원이다. 양아치 같은 놈들."

"진짜야. 고마워서 그래. 그리고 이거…."

"응?"

"재석이 생일이 3월 1일이라 이날로 예약한 거야."


재석의 이름에 영인은 얼굴에서 웃음기를 거두었다. 둘이 먹으러 가려고 예약했을 거라는 건 예상했지만, 그 이름을 희수가 먼저 꺼낼 줄은 몰랐다. 희수는 눈을 내리깔아 화면을 넘기면서 말을 이어갔다. 


"여기서 너랑 식사하고 이제 완전히 매듭짓고 싶어."

"그 쓰레기를?"

"응. 그 쓰레기랑 헤어진 거. 그래서 너한테 미안하고 고마웠던 거. 전부."

"뭐가 그렇게 미안하고 고맙다고."

"그냥. 기분? 그니까 도와 줘. 영인아."


단호하다면 단호하고 깔끔한 정리였지만, 여전히 그일을 생각하면 마음이 좋지는 않은지 희수는 말을 마치고 휴 한숨을 쉬었다. 그리곤 영인의 어깨에 포옥 기대곤 다시 중얼거렸다. 영인은 안쓰러운 마음에 부라리던 눈에서 힘을 뺐다. 


"도와 주라. 내가 다음으로 갈 수 있게."

"……치사하게 구네. 안 그렇게 생겨선?"

"응~~."

"술은 내가 살 거니까."

"나 차 가지고 갈 건데~?"

"아 진짜 치사해. 수 틀리게 하면 내가 낸다? 잘해?"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해오는 희수에 영인은 부담스러워 죽겠다며 끙끙 앓다가도 결국 너 나한테 뭐 잘해 주기만 해 봐라 돈쭐날 줄 알라며 큰 소리를 뻥뻥 치고는 마지못해 동의했다. 



8.2.


"거절하기엔 너무 매혹적인 제안이었던 거지. 공기업 직원에겐…."

"그렇게 박봉이야?"

"훌륭한 워라밸과 유연근무제 속에서도 블라인드 별점이 구린 데엔 다 이유가 있단다."

"그렇구나. 그래도 워라밸은 중요하지!"

"그럼. 그럼."


조수석에 타서 조잘조잘 이야기를 하는 영인과 운전대를 잡고 있는 희수, 두 사람은 GL호텔로 향하는 길이었다. 영인은 코트를 입는 게 꽤 오랜만이라 영 불편한 듯 몸을 살짝 뒤척였다. 


"출근할 때는 맨날 패딩 입어? 되게 어색해하네."

"어. 20분은 걸어야 하니까. 아침 바람이 얼마나 춥다구~."

"그렇구나. 코트 잘 어울리는데. 날씬하고 키도 커서."

"자기소개? 키랑 몸무게 나나 너나. 너야말로 맨날 코트만 입으면서."

"코트 입으면 기분이 좋잖아!"

"무슨 말인지는 알겠지만. 한겨울에 코트는 운전자의 특권이다."


영인은 출근길의 추위를 떠올리곤 몸을 파르르 떨었다. 밝은 카멜색 로브 코트를 입은 희수와 네이비색 하이넥 더블코트를 입은 두 사람은 모처럼 어른스러운 복장이었다. 

영인이야 늘 퇴근할 때마다 희수의 풀메이크업 상태를 볼 수 있었지만, 영인의 출퇴근을 좀처럼 확인하지 못하는 희수는 빡센 화장의 영인을 꽤나 오랜만에 보았다. 원래도 분위기 있는 미인이었지만 아이라인까지 말끔하게 그린 영인은 여자가 봐도 참 예쁜 얼굴이었다. 여자가 봐도 예쁠 정도니까 여자를 만나는 건가 싶어 나름 수긍이 갔다. 


"니 코트 같은 거 사야 하나. 편해 보이는데."

"로브형?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이따 이거 입어 봐!"

"그래야겠다."

"지금 입은 코트도 잘 어울리지만."

"입어 볼래? 지금 입은 니트에는 좀 안 어울리긴 하겠다만서도. 너 가만 보면 그런 루즈한 거 좋아하더라."

"응. 그런 게 편하고 좋아서. 영인이는 좀 핏한 거 좋아하지? 코트도 그렇고. 오늘 슬랙스도 그렇고."

"내가 바지핏이 좀 쩔거든. 아까 봤잖아?"

"아…………. 응! 추리닝도 핏 쩔더라!"

"너 그러는 게 더 나쁜 거 알지."


민망해하며 째려보는 영인을 보고 희수는 웃고선 호텔로 차를 몰고 들어갔다. 영인은 발렛을 맡기고 식당이 있는 고층까지 올라가면서 두리번두리번 구경을 하고 있었다. 미어캣 같은 모습이 좀 귀여워서 희수는 옆구리를 쿡 찔렀다. 


"목 빠지겠어!"

"아. 미안. 좀 촌스러웠나? 서울살이 10년이어도 촌놈이라."

"아하하. 어디랬지? 정읍?"

"어. 뭐 사실 뭐 지금은 전주 사람이지만."

"맞다. 그랬지. 우리 내일로 갔을 때 너네 아버지께서 한정식 사 주셨잖아."

"아 진짜 그때 아빠 창피해 갖고."

"진짜 근데 맛있긴 했어. 어디 들어가든 다 맛집이라고 자랑하실 만하던데."

"여기가 10배는 더 맛있을걸. 가격도 10배지만."


엘레베이터에서 내려서 여러 식당 중 예약한 식당 방향을 가리키며 빨리 가자는 듯 보채며 손을 내미는 영인에 희수는 푸핫 소리내 웃으며 손을 잡고 따라갔다. 

1월에 피튀기는 예약 전쟁을 치러서인지 창가자리의 경관은 끝내 줬다. 시내가 내려다 보이는 고층 뷰를 감사하며 희수와 영인은 10만 원짜리 코스에 고기와 생선 요리를 추가 주문했다. 와인과 전통주 리스트를 살피던 영인은 희수가 차를 가지고 온 것을 통탄스러워 했다. 


"이야. 좀 바가지긴 한데. 리스트 좋네."

"그래? 영인이 술 좋아하는구나."

"너네 만나서야 맥주 많이 마시긴 하지만, 전통주 꽤 좋아하거든. 나 할머니랑 할아버지 손에 자라서."

"어릴 때 술 마셨다는 것처럼 들리잖아."

"탁주가 술인가. 뭐…. 아무튼. 많이는 안 마셔 봤는데. 맛있더라고? 난 독주는 잘 못 마시걸랑."

"술 약했나? 취한 건…. 많인 못 봤는데."

"세진 않아. 소곡주 맛있는데. 우리 할배가 좋아했어."

"아……."

"…무알콜로 하나 추천해 달라고 하자."


대학교 4학년 때쯤. 수업을 듣던 영인이 전화 한 통에 사색이 되어 뛰쳐 나갔던 일을 떠올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영인의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자신들에게 알리지 않았다며 화를 내면서도 지수는 영인을 달랬고 유민 역시 한동안 밥도 잘 안 먹던 영인을 끌고 식당 순회 공연을 했댔다. 

그때 한참 취업 준비 중이어서 늦게야 소식을 전해 들어, 아무 것도 해 주지 못했던 게 희수는 늘 마음에 걸렸었다. 맞벌이셨던 부모님 덕에 동생 영현과 함께 조부모님 손에서 자랐다고 했기에 더더욱. 


"나도 신경 안 쓰는 걸 네가 왜 그래?"

"그냥 그때 생각하면 미안해서."

"별 게 다 미안하네. 차 갖고 와서 소곡주 못 시키는 걸 좀 미안해해라."


소믈리에에게 물어 페어링으로 좋을 무알콜 와인 한 병을 시킨 영인은 물을 한 잔 쭈욱 들이켜고 바깥 풍경을 보며 말했다. 


"마음 써 준 것만으로도 고마웠으니까. 괜찮아."

"응. 고마워. 나중에 같이 마시자. 소곡주."

"푸훗. 그래."

"우리 둘이 술 마신 적 없는 것 같아."

"둘이 뭘 한 게 있냐? 맨날 셋 아님 넷이 했지."

"그렇긴 한데. 그래도 커피는 같이 많이 마셨어!"

"그런가…. 아 하긴 둘 다 지각대장들이라서."

"그니까. 2시 약속이면 너랑 나랑 2시 5분쯤 오고 지수랑 유민이는 2시 반쯤 왔잖아."

"백방타임이고 자시고. 엉망이야."

"그때 영원랜드 갔을 때가 진짜 대박이었지."


영원랜드라는 말에 영인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마도 지수가 교환학생을 갔을 때였다. 셋이 모처럼 개교기념일인데 놀이공원을 가자고 했는데, 유민이 늦잠을 자서 1시간 정도 늦은 날이었다. 기숙사 짤리고 혼자 자취하던 영인은 자신이 기숙사에 처들어 가서 멱살 잡고 끌고 왔어야 했다고 후회했다. 그러나 그날의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희수는 개구진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나 너 우는 거 처음 봤잖아."

"안 울었다니까. 나 그뒤로도 몇 번이나 탔잖아!"

"그래. 잘 타더라. 왜 운 거야? 처음에."

"안 울었다고!"


한 시간 늦는단 말에 입장해서 바로 W 익스프레스부터 타자며 희수를 끌고 가놓고선(사실 둘이 할 말이 궁해서 그냥 놀이기구라도 타는 게 낫겠다 생각한 것 같다고 희수는 짐작했고 사실이었다), 막상 타려니까 무서웠는지 손을 바들바들 떨었다. 재미는 있었는지 그날만 3번은 탔지만 처음 타고 나선 놀랐는지 눈물을 글썽이며 내려 왔던 영인이었다. 물론 그때도 안 울었다며 빡빡 우겼지만. 뜻밖이라 귀엽다고 생각했기에 희수는 벌써 8년도 전 일이지만 기억이 생생했다. 


"좀 놀라서 생리적으로 나온 거지. 안 무서웠다고."

"응. 그래."

"웃지 마. 기분 나빠."

"그래도 나여서 다행이라 그랬잖아?"

"아. 뭐. 최유민이었으면 사회적 타살이지."

"아하하."

"지금 보니 근데 너도 걔랑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너무한 소리 하네!"


시덥지 않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자니 코스가 서빙되기 시작되었다.



8.3


'보고 있으면 좀 재밌단 말이지.'

두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선 오미자차와 한식 디저트의 맛에 감탄하고 있는 영인을 보며 희수는 생각했다. 매 음식이 나올 때마다 반복되는 각양각색의 리액션은 정적이었지만 또 얌전하진 않았다. 저러다 또 우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야…. 이거, 맛이…. 야." 하며 말을 못 잇는 모습이 여태껏 집에서 맛있다 맛있다 하며 먹은 건 적당히 맛있을 때나 하는 소리고, 이게 공영인이 진짜 찐으로 맛있어 하는 모습이구나 싶을 정도였다. 

그리고 음식은 정말 맛이 있었다. 간이 슴슴하긴 했지만 희수의 입에는 딱 맞았다. 재료 본연의 맛을 살린다는 게 이런 거구나. 희수 역시 감탄했다. 원래 뚱한 영인이 머릿속에서 폭죽을 터뜨리고 있으니 희수 역시 표현하기가 좋았다. 


"진짜 미쳤다. 와…. 쩐다."

"어휘력 뭐야~."

"그치만. 너도 뭐 생각나는 표현 있어?"

"………쩔었어."

"그치. 그리고 가격도 개쩌네."


빌지를 보고 영인은 실감이 났는지 한숨을 쉬었다. 희수 역시 예상은 했지만 큰 액수에 "오오…." 하며 말꼬리를 흐렸다. 그래도 소시민의 몇 년만의 행복이라 생각하며 희수는 일시불로 결제했다. 와인값은 자신이 낸다며 영인이 깨톡으로 보낸 돈은 받지 않았다. 


"고집불통."

"내가 사주고 싶댔잖아."

"고집불토옹."

"커피 마시자. 나 커피 사 줘."

"…하. 말 돌리네?"


영인은 손목시계를 살폈다. 디지털 시간이 병기된 아날로그 시계를 쓰는 모습이 왠지 영인다워서 희수는 시계를 함께 들여다 보았다. 꽤 느긋했던 식사에 어느덧 시침은 2를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영인은 그런 희수에게 시선을 맞추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물었다. 


"오늘 학원 안 가지?"

"응. 내일부턴 모의고사 때문에 매일 늦지만."

"저녁까지 먹고 들어갈까 싶어서. 괜찮아?"

"저녁?"

"당장 말고. 배 부르니까. 지금은."


영인은 스마트폰으로 주차장을 찾는 듯했다. 종일 놀자는 건가. 오랜만에 예쁘게 입고 외출을 한 터라 희수에게도 달가운 제안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호텔 근처 산책로라도 걷고 가자고 할까 싶었는데, 추위를 많이 타는 영인이 먼저 이야기할 줄은 몰랐다. 


"커피 갖고 퉁치기엔 너무 훌륭했거든. 저녁 사줄게. 뭐 반에 반 가격도 안 되겠지만."

"진짜? 안 그래도 되는데. 그냥 같이 놀아 주는 걸로도 좋은데."

"놀아 주기는. 내가 놀아 주려면 비싸다? 그냥 노는 거지. 주차가 괜찮을지 모르겠네…."


영인은 입술을 말아넣으며 차를 세워 놓을 곳을 열심히 찾았다.




"와. 진짜 오랜만이야. 스무살 때 와 보고 처음 같은데."

"10년만이겠네. 빨리 가서 격조했다고 절해."


남대문 쪽 호텔에 차를 세운 두 사람은 영인이 아는 카페에서 커피를 한 잔 마시고 명동성당에 와 있었다. 미사 시간은 아니었지만 서울의 중심지에 있어서 그런지 성당에는 사람이 적지 않았지만, 성당 특유의 신성한 조용함이 있었다. 그 아늑한 고요함이 희수는 맘에 꼭 들었다. 비록 주일에 성당에 못 간 지 한참 된 냉담자였으나, 마음이 편안해지는 건 여전했다. 

영인은 무교 중의 무교였기에 이런 곳에 데리고 올 줄은 몰랐기에 희수는 조금 놀랐다. 그러나 영인 역시 믿진 않아도 가톨릭 특유의 경건한 느낌은 좋아한다며 희수와 발을 맞추어 성당을 쭈욱 한 바퀴 돌았다. 


"아까 커피도 진짜 맛있었는데."

"그치? 거기 필터 커피 끝내 줘."

"응. 너무 좋다. 나 시내 진짜 오랜만에 다녀 봐."

"WB백화점도 가 볼래?"

"사람 너무 많지 않을까? 너 괜찮아?"

"내가 무슨 사람 닿으면 죽는 개복치야?"


솔직히 여기서만 파는 거라며 두 덩이나 사서 들고 있는 소시지만으로도 버거워 보이긴 했지만 희수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대학 때 이후로 몇 년만에 와 본 명동 일대였다. 차가 생긴 이후론 주차가 가능한 교외나 강남, 영화관 같은 곳에 주로 다녔다. 강남과는 다른, 오래된 거리 특유의 약간은 정신없지만 와글와글한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영인의 제안에 희수가 고개를 끄덕이자 영인은 마주 웃고선 재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내가 너 좋아할 줄 알았지."

"응. 똑똑하네! 시내 많이 아는구나."

"어. 뭐…. 그, 언니 직장이 이 근처였거든."


전 여자친구를 떠올린 영인은 머쓱한 듯 뒷목을 긁고선 희수가 어색해하지 않게 바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정형외과 의사 아저씨가 좀 움직이라고 해서. 산책은 쫌 해. 걷는 건 그리 싫지 않거든."

"아. 운동을 아예 안 하는 거는 아니구나!"

"뭐야. 너야말로 운동 하고 있어? 비실비실해 갖고. 학원 강사도 앉거나 서 있지 않아? 나이 들면 허리 아프다?"

"네가 나한테? 비실…? 나는 헬스장 다니잖아. 영인아."

"윽."

"벌써 2년은 됐는데, 전에 PT 시작하고 단톡에 얘기도 했는데…. 나한테 관심 좀…."

"아, 알거든. 순간 기억이 안 났을 뿐이야."


영인이 장난으로 던졌던 말을 그대로 되갚아 주면서 희수는 장난스레 웃었다. 영인은 괜히 잔소리 했다가 본전도 못 찾아서 다시 좀 꽁해진 듯했다. 


"암튼 좀 걷자고. 쇼핑이든 뭐든. 어향가지 먹으려면 배 좀 더 꺼트려야 하니까."

"맛있겠다. 중국음식?"

"말도 마. 쓰러질걸. 연태랑 칭따오랑…. 내가 고맥 기가 막히게 말아줄게."

"…그, 미안?"


차키를 흔들며 사과를 건네는 희수에 영인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경악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희수는 정말 미안하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얼마나 마시고 싶었던 거야. 


"너만 마셔도 되니까!"

"혼자 무슨 맛으로 먹어. 됐네요."


하느님이 말하시길 믿음 소망 사랑 중 제일은 고기에 맥주인데…. 아쉬운 듯 헛소리를 중얼거리면서도 결국 영인은 그날 사이다에 콜라를 조금 탄 가짜 맥주만 마셨다. 데이트 때마다 한 명이라도 행복하자며, 재석에게 마셔도 된다며 권했던 걸 떠올리며 희수는 이것도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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