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란의 시대의 마지막 상처마저 아물어가던 때였다. 중앙국에서 새로운 왕조가 들어서건 국가간 복잡한 정세건 하는 복잡한 것들은 취기와 유희 앞에서 허물어지기 마련이며 그보다 앞선 세계 정복에도 휘말리지 않은 덕분에 베넷의 가게는 세상에서 동떨어진 것처럼 평온한 나날을 보냈다. 이제는 마법사들밖에 찾지 않게 된 고즈넉한 술집의 손님들은 백 년도 채 살지 못하는 인간들의 복잡한 사정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크고 작은 왕조들이 세워지고 스러지는 과정을 수도 없이 보아온 그들에게 그런 것은 무용했다. 

다만 중앙국 혁명의 중심에 인간과 마법사가 있었으며, 대등한 입장에서 손을 잡고 혁명을 일으킨 그들 사이에서 내분이 일어나 마법사들이 처형을 당하거나 내쫓겼다는 사실만은 그들에게조차 공분을 샀다. 정의감과는 거리가 먼 서쪽의 마법사들조차 한동안은 그 주제에 흥분한 채 말을 얹었다. 한바탕 소란이 일었던 이후로, 간신히 격랑 속에서 살아남은 마법사들이 소문을 듣고 베넷의 가게를 찾아와 무용담을 늘어놓거나 잃어버린 희망에 관해 넋두리를 늘어놓는 때도 종종 있었다. 그뿐이었다. 어떤 일이든 세월이 지나면 퇴색되고 바스라져 마침내 흙으로 돌아가기 마련이었는데 혁명의 잔재도 이따금 술자리에 끌려오는 안줏거리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그러니까 이제 마법사들조차 혁명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게 되고 중앙국의 그랑벨 왕조가 대륙의 중심으로서 영광을 거머쥐어 그 이름을 드높이기 시작할 즈음이었다. 그런 것과는 하등 상관이 없는 샤일록은 가게의 주인으로서 손님들을 만족시키는 데에 최선을 다하고 있었고 그 날도 선물 받은 허브를 태우며 단골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이었다. 수백 년 단골도 존재하는 이 가게에 새로운 손님이란 꽤 신선한 존재여서 모두의 시선이 문 앞에 어색하게 선 청년 마법사에게로 향했다. 커다란 짐을 짊어져 여행객 같은 행색을 한 청년은 이런 분위기를 즐겨본 적이 없는 기색이 역력해 샤일록이 직접 그를 안내했으나 그는 고개를 저으며 가게를 연신 둘러보았다. 마치 누군가를 찾는 듯한 낌새였다. 

"찾는 분이라도 있으신가요?" 

샤일록의 물음에 청년은 잠시 뜸을 들이다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냥……." 

자신을 바라보는 마법사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확인하던 청년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지는 것을 말없이 지켜보던 샤일록은 카운터 뒤로 돌아가 술병을 집어들었다. 목적하던 이를 찾지 못한 청년은 이미 가게를 나서려던 참이었다. 격정의 세월을 헤쳐온 낌새가 역력한 두툼하고 거친 손이 문고리를 잡아 돌리기 직전, 샤일록이 그를 불러 세웠다. 이미 새로운 잔에 술을 따르고 있는 것을 보고 청년은 조금 난처한 낯을 했다. 

"잠시 쉬어 갈 겸 한 잔 하고 가시는 건 어떠신가요?" 

"술을 즐기는 편도 아니고, 괜찮습니다." 

"취하라는 게 아닙니다. 적당한 음주는 마음을 안정시켜주니까요." 

술을 잘 하지 못한다면 논알콜 칵테일을 준비해드리죠, 하고 덧붙이며 샤일록은 청년을 향해 다정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이만 가보겠습니다."

"찾던 분이 이곳에 없어서인가요?"

"그건……."

"제가 감히 말을 얹을 수는 없지만……. 그 분도 당신이 스스로를 돌보지 않고 자신을 찾아다니길 원하시는 건 아닐 겁니다. 하룻밤의 휴식이라도 몸을 편안히 뉘이고 나서야 비로소 보이지 않던 것들도 보이는 법이니까요."

파이프를 천천히 들이마시다가 내뱉은 연기가 나비처럼 코앞에서 넘실대는 것이 그리 불쾌하지 않았다. 훅 끼쳐오는 허브의 산뜻한 향은 코끝을 감돌며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는다. 그 냄새는 혁명군을 이끌던 어느 마법사가 밤마다 치료약을 만들던 뒷모습에서 풍기던 끓인 허브의 향과 장작을 태우며 퍼지는 조금 매캐한 탄내를 닮았다. 무심하게 불길 속으로 내던져진 마른 가지처럼,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의 등은 이제껏 보아오던 것보다 좀 더 마르고 왜소했으며 기름이 뿌려진 장작에서 춤추듯 살라지던 불꽃에서는 기괴한 냄새가 났다. 수의처럼 흰 옷을 입고, 마법을 사용하지 않은 채 불태워지는 고통을 고스란히 받아들인 그가 마지막으로 어떤 생각을 했는지 청년은 아직까지도 알 수 없었다. 다만 기억에 남은 것은 죽음의 강물이 파도치듯 밀어닥치던 아우성과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사나운 불길뿐이었다.

막힘없이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오는 악몽 같은 향수에 문득 상념에서 벗어난 청년은 고목 껍질처럼 말라붙은 입술을 떼었다.

"하지만 소중한 사람이 상처받고 있는 동안 저 혼자 마음 놓고 쉴 수는 없습니다."

"누군가를 다시 받아들이려면 마음에 여유가 있어야 하죠. 메마른 나무껍질처럼 굳고 식은 마음에는 누구도 받아들일 수 없으니까요."

"……."

카운터 앞에 우두커니 선 채로 대답을 하지 못하는 청년의 낯에는 짙은 상심과 피로가 어려 있었다. 언제 지쳐 주저앉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테지만 그럼에도 그의 발을 움직이는 원동력은 어딘가에 그 사람이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미한 불씨였다. 설사 그 사람이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하더라도 그 사실을 제 눈으로 받아들이고 심장으로 받아들일 때까지 그는 결코 걸음을 멈추지 않을 터였으며 모든 현실을 납득한 뒤에도 발을 움직여 나아갈지, 그 자리에 쓰러져 멈출지는 온전히 그의 선택에 달려 있었다.

그 이해할 수 없는 깊고 복잡한 감정의 실타래를 들여다보는 것을, 샤일록은 좋아했다. 연인 간의 사랑이 아니더라도 맹목적인 사랑 이야기는 언제나 좋아한다. 순도 높은 불꽃처럼 부드러운 윤곽으로 일렁이면서도 끊임없이 타오르는 이 젊은 마법사의 올곧음도 마음에 들었다. 오늘 밤은 이 청년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졌으므로 샤일록은 그를 붙잡아두기 위해 상냥한 미소로 일관하며 카운터 바의 빈 자리를 가볍게 두드렸다.

"자, 여기 앉으세요."

매력적인 주인과 낯선 청년의 대화를 흥미롭게 지켜보던 손님들이 주변에서 부추기기 시작한 탓에 분위기에 밀린 청년은 잠시 망설이다 결국 짐을 한 켠에 풀어놓고 자리에 앉았다.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축음기에서 흘러나오는 나지막한 재즈의 선율이 그리 넓지 않은 가게 안을 부드럽게 감싸안고 조도 낮은 노란 조명에 젖은 아늑하고 단란한 풍경에 녹아든 단골 손님들은 지친 마음을 노곤하게 풀어주는 신기한 힘이 있었다. 처음 온 가게인데도 마치 여러 번 와본 적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여전히 편안히 앉지 못하고 의자에 걸터앉다시피 불안하게 앉은 청년 앞으로 따끈한 머그잔이 내밀어졌다. 

"어떤 걸 좋아하실지 몰라 오늘처럼 추운 날씨에 인기 있는 메뉴로 준비했습니다. 괜찮으신가요?" 

"네, 감사합니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우윳빛 칵테일은 목으로 넘기기에 어려운 온도가 아니었는데 곧바로 마실 수 있도록 온도를 알맞게 조절한 모양이었다. 따뜻하게 끓인 에그노그는 초겨울의 추위를 헤매며 으슬으슬 떨리던 몸을 녹이기에는 그만이었다. 위에 올려진 달콤한 머랭 휘핑을 떠먹고 그 아래로 드러난 고소한 우유 거품과 브랜디의 씁쓸함이 어우러지는 맛이 퍽 절묘했다. 전장 한복판에서 모닥불 하나 켜놓고 살기 위해 음식물을 섭취하는 데에 급급했던 시절에는 맛볼 수 없는 여유로운 맛에 청년의 마음이 조금씩 녹진하게 풀려갔다. 걸터앉았던 몸도 어느 새 제대로 엉덩이를 붙이고 앉은 채였다. 

비스킷과 얇게 저며 구운 사과 위에 시나몬 파우더를 뿌린 안주가 담긴 접시를 내어주며 샤일록은 카운터 안쪽의 의자를 끌어다 그 앞에 앉았다. 그의 행동 하나하나는 봄날의 미풍처럼 부드럽고 우아했으며 새벽의 고요처럼 은밀하고 요염했다. 기품 있는 귀족과 같은 언행은 청년으로서는 상대하기 낯선 것이라 청년은 잠시 시선을 방황하다 이내 두 손으로 감싼 머그컵을 내려다보았다. 파이프를 문 채로 청년을 바라보던 샤일록이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신기하게도, 끊임없이 연기를 내뿜는 파이프는 담뱃잎 특유의 매운 향이 아닌 약초를 태운 것처럼 상쾌한 향을 풍겼다. 

"제 이름은 샤일록. 서쪽의 마법사입니다. 보시다시피 이곳, 신주의 거리에서 술집을 운영하고 있어요. 처음부터 의도한 건 아니지만 마법사들밖에 오지 않는 술집이랍니다." 

"제 이름은……, 레녹스입니다. 중앙국과 남쪽 나라의 경계에 있는 탄광에서 일을 하다가 혁명군으로서 파우스트님을 따랐습니다." 

"혁명이라면……." 

다음 말은 구태여 입에 담지 않아도 충분히 짐작가는 바가 있었으므로 샤일록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말을 마쳤다. 좀체 가게를 나서는 일이 없는 그도 중앙의 그랑벨 왕조의 기초가 된 혁명과 그 중심에 있었던 마법사 파우스트의 이야기 정도는 익히 알고 있었다. 혁명 막바지에 이르러 내분에 밀려 화형에 처해진 마법사들의 리더가 종적을 감췄다는 사실 역시 근근히 들려오던 이야기였다. 이 젊은 마법사 청년은 파우스트라는 자가 어딘가에 살아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은 채 세계를 유랑하다가 마법사들이 자주 모인다는 이 가게를 찾아온 게 틀림없었다. 누군가를 찾는 마법사가 소문 끝에 이곳을 찾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허나 소리소문 없이 사라진 자들은 웬만큼 강한 마법사가 아니라면 어딘가에 돌이 되어 나뒹굴고 있거나 누군가에게 먹혀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샤일록은 바다를 사랑하다가 죽은 마법사의 이야기를 알고 있었다. 이상한 사랑을 하는 마법사들이 유난히 많은 서쪽에서는 마냥 드물지만도 않은 일이었다. 화형을 당했을 뿐만 아니라 믿었던 인간들로부터 배신을 당한 정신적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을 테니 그 역시도 아마……. 

하지만 실낱같은 희망을 붙잡고 세계를 방랑하는 레녹스는 애써 그 사실을 외면하고 있을 게 분명했으므로 샤일록은 굳이 그에 관해 입을 열지 않았다. 백 마디 입에 발린 위로보다 조용히 할 수 있는 것을 해주는 것이 더 나을 때도 있는 법이다. 샤일록은 언변술이 뛰어났으나 이런 데에는 말을 아끼는 게 좋다는 것을 잘 알았다. 

과묵한 청년 앞으로 방금 만든 포토푀를 내어주는 것으로 샤일록은 위로를 대신했다. 가짓수가 많지 않은 야채와 훈제 소시지가 들어간 포토푀에서 풍기는 고소한 냄새가 저절로 식욕을 자극했다. 안경 너머 내리깔린 눈꺼풀이 놀란 듯 뜨이며 상냥한 웃음과 제 앞으로 내밀어진 포토푀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눈썹을 내리며 난처한 낯으로 웃었다. 무뚝뚝해보이던 얼굴이 일순 풀어지는데 그런 얼굴을 하고 있었던 것은 아마도 오랜 시간 동안 피로와 경계가 쌓인 까닭일 것이다. 이미 만들어진 음식을 사양할 이유는 없어 그는 기꺼이 스푼을 들었다. 

"감사합니다." 

"이 거리는 술도 맛있고 경치도 좋은 곳이랍니다. 서쪽 나라 최고의 환락가니까요. 부디, 즐겨주세요." 

 잠깐의 친절을 베푼 샤일록은 곧 다른 손님들의 접대를 위해 레녹스로부터 등을 돌렸다. 그리 많은 사람들이 있지 않았음에도 겨울날 특유의 아늑한 훈기와 즐거운 말소리로 가득 찬 가게 안은 기분 좋을 정도로 북적였다. 새로운 손님을 향했던 호기심 어린 시선들은 진작 떨어져나간 지 오래였으며 샤일록을 제외하면 아직까지는 그에게 먼저 말을 걸어오는 사람도 없었다. 샤일록에게는 사람을 편안하게 말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힘이 있었다. 말을 이어가는 게 서툴고 말이 느린 그로서는 아예 풍경의 일부로 녹아들어 관심을 받지 않는 편이 좋았으나 샤일록과의 대화는 꽤 즐거웠다. 그래도 역시 오래 머무를 생각은 없었다. 그저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가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슬그머니 빠져나갈 심산이었다.

하지만 이런 오래된 가게의 단골들은 그들끼리 이야기를 나누다가도 금세 그 옆의 낯선 손님에게도 스스럼없이 말을 걸 만큼 가게와 분위기에 동화되어 있는 법인데 레녹스 역시도 그들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포토푀 담긴 그릇이 바닥을 드러내고 두 번째 잔을 받아 마시던 중이었다. 혁명이라는 화두로 뜬소문과 목격담이 얽힌 대화를 나누던 그들은 흔들림 없는 등을 힐끔거리다가 조심스럽게 그에게 다가가 어깨를 두드리며 그 옆에 앉았다. 마치 돈이라도 뜯는 모양새였으나 그들은 무해하고 친절한 손님들이라는 걸 알고 있었으므로 샤일록은 그들을 말리지 않고 가만히 지켜보았다. 이런 것도 이 가게의 일부이기에 말릴 수도 없었다.

"자네, 방금 혁명이라고 했지? 그랑벨 왕조의 첫 국왕 알렉 그랑벨과 성인 파우스트가 이끌었던 그 혁명인가?"

"네, 맞습니다."

"역시 그런가. 실은 내 동생도 혁명군이었거든. 그 애는 인간이었는데, 마법사인 나보다도 용감했지. 자네도 알려나 모르겠네."

"사람이 꽤 많았을 텐데 어떻게 알겠어? 같은 마법사도 아니고 인간이었는데. 그나저나 할 얘기가 있다고 했잖아."

레녹스를 사이에 두고 양 옆에 앉은 두 사람은 의미 모를 눈짓을 주고받으며 잠시 입을 열기를 망설였는데 정작 가운데에 앉은 이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말을 하면 그만, 하지 않으면 그건 그것대로 그만. 그저 조용히 앉아 있던 레녹스에게 말을 건 것은 혁명군이었던 동생이 있다던 마녀였다. 동쪽에서 태어나 가족이 모두 죽은 후 서쪽으로 왔다고 자신을 소개한 그는 동쪽 출신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사교적이었다.

"내 동생은 인간이었지만 알렉 그랑벨의 옆에서 알랑대며 마법사와 인간 사이를 이간질하던 인간들의 편은 아니었어. 당시에 잡혀 있던 몇몇 마법사들의 탈옥을 돕기도 했고. 그것 때문에 그 애의 노년에는 몇몇 마법사들이 찾아와주기도 했지. 아, 자랑하려는 건 아니야. 다만 네가 파우스트를 따랐다기에, 혹시 몰라서."

입이 심심했던 모양인지 그는 샤일록에게서 새로운 잔을 받아 단숨에 들이켰다. 적잖은 양의 술을 쏟아붓듯이 목구멍으로 넘기고 호쾌하게 바닥에 잔을 부딪히는 소리에 샤일록의 눈썹이 조금 치켜올라갔으나 그들 중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

"동생이 예순인가, 그쯤 되었을 때 파우스트를 본 적이 있거든."

채 말이 끝나기도 전에 턱을 괴고 다리를 흔들며 느릿하게 말하던 그는 일순 놀라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예의바르나 한 구석이 허물어진 폐허처럼 불안정한 청년의 생기 없는 눈에 광채가 돌았다. 다듬어지지 않아 야생 짐승의 그것처럼 거친 근육이 붙은 거구가 제 쪽으로 기울어지자 그는 자신도 모르게 앉은 몸을 들썩이며 뒤로 뺐으나 좁은 의자에서 움직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레녹스는 금세 정신을 차리고 사과한 뒤 몸을 물렸다. 이제껏 파우스트의 목격담은 수도 없이 들었으나 알렉 그랑벨이 어마어마한 보상을 걸어 옛 친구를 찾는 공고문에 현혹되어 파우스트처럼 꾸며내었던 가짜에 불과했다. 인간인 국왕은 늙었으니 사리분별은 하지 못하리라는 판단 하에 대담한 사기를 치려던 자들이 있었으나 당연하게도 그 누구도 성공하지 못했다. 뜬소문의 자취를 좇아 마침내 도달한 레녹스의 앞에 놓인 현실 또한 그랬으므로 불확실한 풍문에 의존하지 않고 제 힘으로 세계 곳곳을 찾아 다니던 차였다. 어차피 마법사는 남는 게 시간이었으며 레녹스는 마법사로서도 젊고 건강한 편이었으니 더할 나위 없었다.

허나 이번에는 정말로 파우스트에게 한 발짝 다가갈 수 있는 단서가 될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희미하게 뇌리를 스쳤다. 레녹스는 그 옅은 희망이나마 놓칠 수 없었다.

"어디서 보셨습니까?"

"동쪽 나라에서. 우리는 중앙국과의 접경 지역에서 살고 있었거든. 아마 중앙국에서 밀입국을 하던 것 같다고 했지. 행색이 말이야."

"어디로 가신다는 말씀은……?"

"말은 못 걸었대. 그도 그럴 게, 인간들이 마법사들을 몰아낸 거잖아. 그 사람은 화형까지 당했고. 죄책감 때문에 먼저 말을 걸 수가 없었다고 하더군. 뭐, 동쪽 나라는 지독한 개인주의니까 세상을 등지고 살기에는 괜찮잖아? 북쪽은 사람이 얼마 없긴 하지만 땅이나 마법사들이 너무 거칠고. 샤일록, 여기 와인 한 잔. 자네도 마시는 건?"

"아뇨, 괜찮습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무어라 말릴 틈도 없이 레녹스는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 풀어놓았던 짐을 챙기는 중이었다. 짐가방 맨 아래로 손을 넣어 지갑을 꺼내는 레녹스에게 샤일록은 고개를 저었다.

"돈은 받지 않겠습니다."

"공짜로 얻어먹을 수는 없습니다. 받아주세요."

"그렇다면 이렇게 하죠. 이 세계 어딘가에 숨어 있을 그 분과 함께 이곳을 방문해주시면 그땐 돈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오늘밤의 대가는 샤일록이 좋아하는 열렬한 경애로 이루어진 이야기의 한 단면을 들추어 보여준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끝이 매듭지어지지 못한 것은 아쉬우나 짧지 않은 시간을 이어져온, 앞으로도 이어져갈 이야기는 흔치 않아 더욱 마음에 들었다. 기나긴 생애 가운데 찰나에 불과한 만남이었지만 그라면 얼마가 걸리든 돌아와 이야기의 마지막을 들려줄 거라는 무근본한 믿음이 샤일록에게는 있었다. 그때가 되면 샤일록은 그의 서사시에 마침표가 찍히는 것을 축하하며, 그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준 것에 감사하며 기꺼이 이야기의 값을 지불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우직하고 성실한 청년은 끝끝내 샤일록의 제안을 만류하고 값을 치른 후 가게를 나섰다. 손님 하나 나갔다고 해서 가게 분위기가 크게 달라질 것도 없으니 샤일록 역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금세 제 일을 시작했는데 여전히 레녹스와 파우스트의 이야기의 감상에 젖은 그의 앞으로 마냥 유쾌하지만은 않은 손님이 불쑥 끼어들었다. 옷자락에 갇힌 모사된 밤하늘에 감싸인 그는 끝이 뾰족한 모자를 벗으며 사람 좋아 보이는―샤일록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테지만―미소를 지었다.

"내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면 나도 공짜로 마시게 해주는 건가?"

다 태운 재를 털고 새로운 담뱃잎을 넣어 불을 붙이던 샤일록은 눈앞의 불청객에 눈썹을 찡그리며 웃었다.

"당신에게는 배로 받을 거예요."


* * *


샤일록의 둥지는 여전히 신주의 거리 한 구석에 있었지만 최근 들어 중앙국의 마법사에서 시간을 보내는 일이 부쩍 많아졌다. 언제 이변 해결 의뢰가 들어올지도 모르며 이제 겨우 20살인 클로에를 비롯한 서쪽 마법사들의 교육 담당을 맡은 까닭에 예전처럼 자신의 가게에만 붙어 있을 수는 없었다. 이제는 마법사 내부의 바와 서쪽의 가게를 오가며 내키는 대로 문을 열었다. 현자의 마법사들은 대개 샤일록이 마법사의 바에 있을 때를 노려 샤일록 또는 샤일록의 술을 찾았으나 서쪽의 가게 특유의 정겨운 분위기를 잊지 못하는 나이 든 마법사들은 종종 샤일록을 따라 서쪽 나라까지 술을 마시러 가곤 했는데 샤일록으로서는 자부할 만한 일이었으며 동시에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파우스트 역시 짧지 않은 시간을 살아온 마법사였으나 그의 성미에는 생면부지의 타인이 살갑게 부대끼는 게 맞지 않는 모양이었다. 파우스트는 술을 마시기에는 조금 이른 시각, 누구도 없을 것 같은 때를 노려 마법사의 바를 찾곤 했다. 처음에는 바에서 술을 받아가 제 방에서 혼자 마시던 파우스트도 차츰 함께 지내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샤일록의 바에 앉아 있다가 다른 사람들이 올 무렵이면 홀연히 사라지는 일이 잦아졌다.

혁명은 성공했으나 혁명군의 마법사들은 실패한 것이나 다름 없던, 산산이 조각난 과거의 영광을 잊고 저주상의 길을 선택한 파우스트는 오랫동안 삭혀 왔던 이야기를 꺼내곤 했다. 샤일록 아닌 누군가라도 괜찮으니 대답을 얻고자 하는 상담도 더러 있었으나 때로는 한탄이나 푸념, 껍데기뿐인 저주에 가까운 말도 있었다. 파우스트의 이야기는 수백 년 전 레녹스의 이야기와 이어질 때도 있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었다. 이어지더라도 대개는 중간부가 뚝 끊긴 교량처럼 흔적만 남은 채 드문드문 이어지는 이야기였으나 그것들을 조각조각 끼워맞추면 어떻게든 수백 년의 공백이 그럴 듯한 모양새로 채워졌다. 그러나 어떤 이야기든 샤일록은 묵묵히 듣고 삼켜 그 시간과 그 자리에만 존재했던 언사들을 제 안에 박제시켰다. 결코 잊지는 않았지만 잊은 척 하는 거였다. 파우스트 같은 사람은 그렇게 되기를 원할 터였으니 더더욱 그래야만 했다.

샤일록이 직접 공수해온 북쪽의 질 좋은 얼음 녹인 물을 술에 타주는 사이, 파우스트는 깍지 낀 손에 턱을 괴고 한참이나 무언가를 고민했다. 최근 어떤 재회로 인해 책임감을 느끼고 있는 그는 어쩔 수 없이 성실하고 다정한 사람이었다. 과연 레녹스가 그토록 따를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었음을 샤일록은 마법사에서 모두와 함께 지내는 요즈음 부쩍 체감하고 있었다.

"내가 왜 이런 일로 고민해야 하는 건지."

"그런 모습이 당신다운 거예요."

"됐어, 그런 말은. 그래도, 나는……. 어쨌든 그냥 내버려둘 수는 없잖아. 날 찾아 일평생 세계를 돌아다닌 녀석을."

이런 식으로 레녹스와 재회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파우스트는 그렇게 말했다. 현자의 마법사가 된다는 것은 1년에 한 번씩 세계의 존망을 결정한다는 막중한 책임감과 동시에 생명에의 위험을 수반하는 일이었으므로 저주와 다를 바 없었다. 현자의 마법사로 선택되면 몸 어딘가에 새겨지는 검은 백합은 곧 그런 의미였다. 문장을 등에 짊어진 파우스트는 한 번 죽음의 강을 건너다 겨우 되돌아온 마법사로서 등을 짓누르는 불쾌한 무게감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이런 재회는 원치 않았던 거였다.

희석되어 조금 더 부드럽게 목으로 넘어가는 술을 반쯤 비우고 파우스트는 흔들리는 작고 둥근 수면을 내려다보았다. 조명에 잔물결이 반짝이는 황금빛은 가라앉은 새벽 공기 속에서 단단하게 버티고 선 모닥불을 닮았으며 흔들리던 수면이 잔잔해지자 상이 비치는 모습은 거울을 닮았다. 거기에 비치는, 책임감을 이고 고뇌하는 마법사는 영락없는 중앙의 마법사여서 파우스트는 자신도 모르게 자조했다. 타고난 기질을 숨길 수는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파우스트는 재회의 무게를 더욱 절실히 느꼈다. 파우스트는 한 손으로 피곤한 얼굴을 감싸 수면 아래로부터의 시선을 외면했다.

"……그 녀석이 행복하기를 바랐어. 나 같은 건 잊고 제 갈 길 가길 바랐을 뿐이다. 레노에게는 그럴 권리가 있어."

어릴 때부터 노동에 시달리다가 혁명에 뛰어들고, 혁명이 끝난 이후에도 정처 없는 여정을 계속해온 레녹스에게는 마땅히 행복해질 권리가 있었으며 수백 년 전 레녹스의 사정을 알고 있던 파우스트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과거의 망령은 기억에서 깨끗이 소거한 채로 스스로의 행복을 찾아 나섰으면 했기 때문에 레녹스가 잠든 사이 몰래 길을 나섰다. 홀로 그럭저럭 지냈던 자신처럼 레녹스 역시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 비로소 행복을 누릴 수 있으리라고 여겼는데 그러한 일상을 되찾은 레녹스는 한결같이 파우스트의 곁에 머물기를 자처했다. 거기서 오는 죄책감을, 파우스트는 감히 떨쳐낼 수 없었다. 카운터 안쪽에 몸을 비스듬히 기대어 파이프를 피우며 잠자코 이야기를 듣던 샤일록은 잠시 말을 고르다 입을 열었다.

"당신의 곁에 머무는 것이 레녹스의 행복은 아닐까요. 그토록 당신을 찾아 다녔던 남자입니다. 예전처럼 당신의 등을 따르고 곁을 지키는 것이 행복이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행복을 찾아 이제야 손에 쥘 수 있게 된 거예요."

"……."

파우스트는 대답 없이 남은 술을 삼켰다. 바닥을 드러낸 글라스에는 더 이상 일렁이는 불꽃의 심지도, 죄인의 얼굴을 비추는 거울도 보이지 않았다. 파우스트의 낯에 드리워진 어둠은 미처 다 가시지 않았으나 그래도 조금은 시원해진 것도 같다고, 샤일록은 그렇게 생각했다. 파우스트를 만난 레녹스도 그런 얼굴을 했었다.

"어디까지나 제 생각입니다만. 이제는 레녹스를 받아들여도 괜찮지 않나요?"

말을 끝맺으며 샤일록은 장미 꽃잎과 사과와 시나몬을 잘게 썰어 태운 연기를 길게 내뱉었다. 달고 요염한 향이 지척까지 다가와도 어쩐지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홀로 지내는 데에 익숙해진 뒤로는 누군가와 술을 마시는 게 어색했으나 과연 이런 기분을 느끼기 위해 많은 마법사들이 샤일록의 가게를 찾는구나 하고 파우스트는 어렴풋이 느꼈다. 샤일록은 상대방의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적당한 단어를 고를 줄 알았고 어떤 타이밍에 그 단어를 내밀어야 하는지, 어떤 이야기를 감추고 어떤 이야기를 꺼내야 하는지를 알고 있었다. 홀로 수백 년을 지내온 터라 아직까지도 속을 터놓는 대화에 익숙하지 않은 파우스트가 그만큼 적당한 말을 고르는 사이, 누군가가 바의 문을 두드렸다. 이어 열린 문 뒤에서 샤일록에게서 빌린 글라스를 든 현자가 고개를 빠끔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샤일록."

"안녕하세요, 현자님."

"글라스를 돌려주러……, 어라? 파우스트, 와 있었군요."

의외라고 생각하는 얼굴을 짐작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때마침 비운 잔을 두고 파우스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벗어 두었던 모자를 깊숙이 눌러 썼다.

"이제 돌아가려고 했다. ……그럼."

"네, 언제라도 또 와주시길."

엉겁결에 바에 밀려 들어간 현자의 당황한 얼굴과 샤일록의 웃음기 어린 인사를 뒤로 하고 파우스트는 문을 닫았다. 닫힌 문 너머로 들려오는 것은 형태가 뭉그러져 알아들을 수 없는 말소리 뿐이었으나 레녹스를 받아들여도 되지 않겠냐는 말은 선명하게 남아 귓바퀴에서 메아리쳤다. 거기에 대답할 말을 찾는 데에 짧지 않은 시간이 들었을 것이며 아직도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명확한 단어들을 추려내지는 못했지만 이제는 조금씩 윤곽이 보이는 것도 같았다. 다만 아직은 시간이 좀 더 필요했다. 뒤늦게 올라오는 취기에 시야가 천천히 몽롱해지기 시작했다. 눈을 힘주어 깜빡여 취기를 걷어내며 파우스트는 제 방으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아직은 생각해야 할 것이 너무나도 많았다.

깨어 있는 시간의 9할은 남자랑 남자 사이의 곱하기 계산식의 답을 찾기 위해 소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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