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팬담 31세,

톰을 죽이고 커티 프람에게 피떡이 되도록 처맞았던 그날, 그는 전생을 떠올리고 말았다.

“……내가 시발 엑스트라 악역이라니.”

병원에 누워 제 암울한 미래를 천천히 곱씹어보던 그는 결심했다.

사이퍼 폴을 때려치우고 스팬다인 수발이나 들며 금수저 생활이나 하자고.


퇴사하라, 스팬담!

written By. 시쟌

-14~29-


“…모기를 잡았다고? 손가락 하나로 말이냐.”

“거…, 지건이라고 있다. 너는 모르는 특수한 기술.”

스팬담이 문득 떠오른 로브 루치의 지건을 떠올렸다. 아이스버그가 묘한 표정을 하곤 그의 앞까지 다가왔다. 못 본 새 꽤 번듯한 양복 차림을 하게 된 남자를 보며 스팬담이 낮게 웃었다.

“왜 웃지?”

“제법 번듯해졌잖냐.”

스팬담의 가벼운 말투에 아이스버그의 미간에 힘이 들어갔다. 그가 퍽 마뜩잖은 눈으로 스팬담을 흘겨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아, 맞다.”

뭔가를 떠올린 웃는 낯의 스팬담이 그대로 아이스버그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아이스버그의 얼굴이 확 굳었다.

“지금 뭐 하는…!”

“야, 이 새…, 아니, 아이스버그! 너 그 전화 누구야!”

“전화…?”

“나한테 전보 벌레 건 인간 말이다! 내가 너 때문에 무슨 소문이 돌게 됐는지 알기는 하냐!!”

스팬담이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아이스버그의 목을 짤짤 거칠게 흔들었다. 물론 그래봐야 옷자락이 조금 흔들릴 뿐 각종 조선 일로 다져진 아이스버그의 상체가 흔들리는 일은 없었지만 말이다.

스팬담의 말을 듣던 아이스버그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그가 스팬담의 손목을 붙잡아 제게서 떼어내며 입을 열었다.

“…믿을 만한 이에게 부탁하라고 하기에 코코로 씨에게 부탁 했다만, 뭔가 문제라도 있었나?”

“나 분명히 부탁했었지?! 색기 넘치는 요염한 목소리의 여자로 해달라고!!”

“…그 주문도 일단 넣었다만.”

아이스버그의 말에 스팬담이 거의 고통스러운 낯으로 얼굴을 와그작 일그러뜨렸다. 오죽하면 아이스버그가 괜찮으냐고 물어볼 정도였다.

“그래서 그거였냐고…! 그분에겐 미안하지만, 목소리에 색기도 요염함도 없었어. 여장남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단 말이다! 난 직장에 이제 호모 새끼로 소문났단 말이다! 어떻게 책임질 거냐고!”

스팬담이 쪼그려 앉아 서글픈 낯을 했다.

애들 앞에선 무게 잡는다고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후쿠로가 뛰쳐나갔으니 분명히 여기저기 소문을 전부 냈을 거다. 내일 출근하면 남색가라는 소문이 자자하겠지. 소문에 휘둘리는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기껏 쌓아둔 제 이미지가 무슨 꼴이 되느냔 말이다.

‘쪽팔려…….’

쪼그려 앉아 손바닥에 얼굴을 묻은 스팬담이 목덜미부터 벌겋게 확 달아올랐다.

“존나 가오 없잖냐.”

그러잖아도 남자밖에 없는 회사인데 대체 무슨 소문이 나겠느냔 말이다. 아이스버그가 난감한 낯으로 그를 내려다보다가 제 목덜미를 매만졌다.

“그랬나…. 미안하게 됐군.”

“아니, 아냐. 응, 아무것도……. 남자가 취향인 사람도 있는 거지.”

그래, 생각해 보니 전생엔 뒤쪽에서 꽤 흔한 일이었지 않나. 근데 그걸 알게 된 대상이 부하라는 게 문제긴 하지만 말이다. 강제 아웃팅이라도 당한 기분이었다.

“그래서, 날 호모로 만들면서까지 불러낸 이유는?”

“설계도 윤곽은 잡혔는데 한번 보라고 불렀다.”

“아아…….”

아이스버그가 스팬담에게 종이 뭉치 하나를 내밀었다. 그대로 그냥 바닥에 주저앉은 채 종이를 받은 스팬담이 창문에서 쏟아지는 빛에 의지해 첫 장을 펼쳤다.

“못 본 새 고생이 많았나 보지? 꽤 말랐다만.”

아이스버그가 스팬담과 조금 떨어져 목재 위에 가볍게 걸터앉으며 말했다. 스팬담이 흘긋 그를 보더니 가볍게 웃었다. 아이스버그가 제 무릎에 팔꿈치를 가볍게 걸치고 상체를 숙인 채 미묘한 낯으로 그 옆얼굴을 바라봤다.

“아아, 뭐. 임무 갔다가 어쩌다 좀 질 나쁜 약에 중독돼서 말이다. 끊는 동안 금단증상 때문에 좀 고생했더니 좀 빠졌다.”

“…너 정도 위치에 있어도 그런 일을 하나?”

“뭐어…, 위에서 하라면 해야지. 월급쟁이 공무원이잖냐.”

스팬담이 별거 아니라는 듯 설계도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대답하곤 종이를 느리게 넘겼다. 다시 내려앉은 침묵에 아이스버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얼마 전, 사이퍼 폴과 수주 계약을 맺었다.”

“오, 잘됐잖냐.”

“네가 손을 쓴 거냐?”

무겁게 내려앉은 목소리에 스팬담이 종이 뭉치의 끝을 검지로 가볍게 문지르며 고개를 돌려 조금 높은 곳에 앉아있는 그를 보았다. 잠시 고민하던 스팬담이 입을 열었다.

“그랬으면 자존심 상하냐?”

“…아니, 내겐 뭣보다 필요한 일이었다. 동정이었나?”

“넌 내가 동정으로 그런 거액을 날릴 멍청이로 보이냐?”

스팬담이 미간을 찌푸린 채 불쾌하다는 듯 말했다. 아이스버그가 입을 다물고 있자 그가 설명을 덧붙였다.

“입찰한 업체 중에서 나는 네가 낸 곳이 제일 괜찮다고 판단했다. 이력은 길지 않고 포트폴리오로 낸 배들도 몇 개 없었지만, 알아보니 만든 배는 하나같이 호평이었다. 회사 소개나 금액 책정, 장부도 깔끔한 게 미사여구 없이 간결해서 딱 좋았고. 뭐, 사업가로서 조언하자면 조금 더 유들거리며 입바른 소리 하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았다만.”

어깨를 으쓱인 스팬담이 거기까지 말하곤 다시 설계도를 보았다. 그가 곧 말을 이었다.

“그리고 널 몇 번 본 결과 배나 돈 가지고 허튼 장난 같은 건 안 칠 믿을만한 놈이라고 판단했고.”

“…….”

아이스버그의 눈이 살짝 커졌다. 덤덤하게 인정하는 말을 내뱉는 목소리엔 호들갑도 없었고 온갖 미사여구가 붙어있지도 않았고 사실 건조하기 짝이 없었으나 어쩐지 기분은 이상했다. 아이스버그가 멋쩍음에 말없이 제 목덜미를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그리고 한 1년 안에 세계 정부에서도 너한테 다시 연락할 확률이 높다.”

“엄머- 그건 또 무슨 말이지?”

“더블 조선소라고 아냐? 나 거기 장부만 좀 훑었는데 이중장부 같더라. 게다가 가격도 엄청 저렴하더군. 조금 과장해서 네가 써서 낸 값의 반값이야. 그 돈으론 멀쩡한 배 안 나올걸.”

“…간신히 재룟값이나 대겠는데.”

아이스버그가 미간을 찌푸린 채 말했다. 최소한의 인건비를 빼고 재료를 대량으로 구매해서 가격을 낮춘다고 해도 수지타산이 전혀 맞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거기서 만든 배를 수리하러 오는 일도 종종 있었지.’

개중엔 용골이 너무 허술한 일도 있었고 나무를 어떻게 건조했는지 썩은 부위도 꽤 있었다. 아이스버그가 턱을 매만지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우리한테 납품하는 배 신경 써서 잘 만들어 봐. 포탄 맞아도 끄떡없다고 홍보해줄 테니까. 해군 배 산산이 조각날 때 옆에서 멀쩡하면 재밌을 거 같지 않냐?”

스팬담이 설계도를 쥔 채 고개를 돌려 퍽 짓궂은 소년처럼 키득키득 웃었다. 아이스버그가 그를 흘긋 보더니 어이가 없어서 픽, 바람 빠진 웃음을 흘렸다. 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도통 모를 남자군.’

언제는 산전수전 다 겪은 얼굴을 했다가 언제는 또 악당처럼 굴었다가 또 지금은 철없는 소년처럼 굴었다.

“곧 사이퍼폴 함선 세 척 납품 일이었지? 기대되네.”

“아아.”

아이스버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스팬담이 한참이나 보던 설계도를 그에게 내밀었다. 아이스버그가 그것을 받아 들곤 입을 열었다.

“다 봤나?”

“응, 존나 하나도 모르겠다.”

활짝 웃은 사내가 당당하게 선언했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아이스버그가 삐끗하며 다시 주저앉았다. 여태 심각한 표정으로 보고 있었던 건 뭔데.

“모르겠다고?”

“어, 나 일단 조선공이 아니잖냐. 백날 봐봐야 하나도 몰라.”

“……그럼 대체 이걸 왜 노린 거냐!”

“내가 아냐, 조금 더 위지.”

아이스버그가 버럭 화를 내자 스팬담이 천연덕스럽게 말하며 검지를 펴서 위를 가리켰다. 물론, 스팬담이 쏘아 올린 공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굳이 트러블을 만들고 싶지 않았던 터라 그 얘기는 슬쩍 숨겼다.

“이렇게 봤을 때 대충 상대가 속아 넘어갈 정도면 돼. 아니면 앞부분을 아예 똑같이 베끼고 뒷부분을 적당히 너희가 만들어도 되고.”

스팬담이 아이스버그의 손에서 종이를 뺏어와 팔랑팔랑 넘겨 보였다. 스팬담이 마저 입을 열었다.

“표지는 플루톤 설계도랑 똑같이 해주거나 아니면 아예 표지만 플루톤 설계도 걸 빼와도 되겠지.”

“그런 류의 전함은 프랑키가 좀 더 전문일 텐데…….”

작게 중얼거리는 아이스버그의 말에 스팬담의 손끝이 멈칫했다. 그가 조용히 아이스버그에게 설계도를 넘겼다. 그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미안하다.”

스팬담이 제 주머니에 한 손을 밀어 넣더니 다른 손으론 머리를 긁적였다. 흠칫, 어깨를 떤 아이스버그가 고개를 들자 그가 마저 입을 열었다.

“설계도는 보시다시피 난 하나도 몰라서 말이다. 널 믿으니 알아서 해. 이제 몇 년 뒤에 한 번만 더 얼굴 보면 되니까 보기 싫어도 조금만 참아라. 그 뒤엔 나타나는 일 없을 거다.”

아이스버그를 보며 씩 웃은 스팬담이 그대로 로브를 푹 뒤집어썼다. 아이스버그가 눈을 크게 뜨곤 입술을 달싹이다가 그대로 멈칫했다. 그런 아이스버그를 봤는지 스팬담이 설핏 웃었다.

“우리가 조금 더 다른 상황에서 좋은 관계로 만났다면 친구가 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아이스버그의 속내를 꿰뚫기라도 한 듯 여상하게 말한 스팬담이 어깨를 으쓱였다. 아이스버그가 당황한 듯 눈을 크게 떴다가 이윽고 입을 꾹 다물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긴 하다.”

“너…….”

“그런데 안 되잖냐. 너는 커티 프람을 생각해야 하고 난 내 입장을 생각해야 하고.”

커티 프람이라는 단어가 역린이라도 되는 양 아이스버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스팬담은 그걸로 충분하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만에 하나 설령 커티 프람이 돌아오더라도 말이다……, 네가 날 용서하지 않을 이유는 아주 많지.”

“…….”

“그러니까 앞으로도 용서하지 마라.”

스팬담이 가볍게 아이스버그의 어깨를 한차례 툭 치고 꽉 움켜쥐더니 그대로 몸을 돌려 창고 문의 손잡이를 붙잡았다. 한숨을 푹 내쉰 스팬담이 퍽 비장한 낯으로 양손으로 창고 문을 붙잡는 순간이었다. 뒤에서부터 어깨 너머로 뻗어온 손이 단숨에 창고 문을 열어젖혔다.

“널 용서하든 말든 그건 내 권한이다. 네 녀석이 신경 쓸 일이 아니야.”

딱딱하게 나오는 아이스버그의 목소리에 스팬담이 머리에 뒤집어쓴 로브 끝을 가볍게 매만지더니 피식 웃었다.

“그러냐, 잘 지내라. 나중에 보자.”

“나보단 네 걱정을 하는 게 낫겠는데.”

창고 문에 비스듬하게 기대선 아이스버그의 말에 스팬담이 대답 없이 가볍게 손을 흔들며 금세 멀어졌다. 스팬담이 시야에서 사라져갈 때쯤 아이스버그도 창고 문을 닫고 막 나서는 참이었다.

“우와악!”

짤막한 비명에 아이스버그가 눈을 크게 떴다. 멀지 않은 곳에 자빠져 주저앉아 있는 스팬담과 누군가가 있었다.

“정말 덤벙거리는 놈이군.”

그가 성큼성큼 다가가자 스팬담이 주저앉은 채 끙, 앓는 소리를 내며 슬금슬금 일어나고 있었다. 손을 뻗어 로브 위 팔뚝을 잡아 스팬담을 일으킨 아이스버그가 맞은편을 향해 시선을 돌렸을 때였다.

“어? 아이스버그 씨!”

“엄머- 파울리? 왜 여기에 있지?”

“아니, 뭘 좀 두고간 게 있어서 돌아왔는데… 이 사람이랑 부딪쳤습니다. 어이, 괜찮은 거야?”

“아아, 손목 뼈가 살짝 나간 것 빼고는 괜찮다.”

“그거 안 괜찮은 거잖아! 미안, 급해서 앞을 못 봤어.”

스팬담이 낮게 웃으며 고개를 저으면서도 로브를 꾹 눌러 썼다. 머리에 고글을 쓴 퍽 호쾌하고 시원스러운 인상의 소년, 파울리가 인상을 찌푸리더니 손바닥을 내밀었다.

“일단 손 내놔 봐. 보고 우리 집 잠깐 들렸다 가, 치료해줄게.”

“아아, 괜찮아.”

“내가 찝찝해서 괜찮지 않으니까! 어서.”

스팬담이 왼손을 들어 파울리의 머리를 꾹 누르곤 머리카락을 거칠게 헤집었다. 파울리가 퍽 불퉁한 낯을 했다.

“소년, 난 괜찮다. 집이 근처니까 근처에 가서 할게. 아니면 이놈한테 치료해달라고 하면 되니까.”

“뭐야, 아이스버그 씨랑 아는 사이? 무슨 사인데?”

스팬담이 왼손으로 아이스버그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자 파울리가 눈을 크게 뜨더니 스팬담과 아이스버그를 번갈아 보며 호기심 가득한 낯으로 물었다. 마땅한 대답을 찾지 못한 스팬담이 도리어 파울리에게 질문을 던졌다.

“너는 무슨 사이냐.”

“나는…….”

“내 제자나 마찬가지인 녀석이다.”

대답은 아이스버그에게서 나왔다. 파울리가 퍽 감동한 표정으로 아이스버그를 보았다.

“아이스버그 씨……!”

“푸핫, 귀여운 꼬맹이네.”

스팬담의 말에 파울리가 흠칫, 어깨를 들썩이며 그를 바라봤다.

“그래서 당신은 뭔데!”

“나…? 나는…….”

결국 질문을 되돌려 받은 스팬담이 로브 밑으로 퍽 짓궂게 웃었다. 복수할 절호의 찬스가 아니던가. 누가 봤으면 뒷걸음질 쳤을 사악하기 짝이 없는 웃음을 띠고 있던 그가 냉큼 입을 열었다.

“애인.”

“……어, 어어어?!”

“이봐, 너……!”

아이스버그가 경악하거나 말거나 입이 떡 벌어진 파울리의 얼굴을 본 스팬담이 입술을 깨물며 웃음을 눌러 참더니 그대로 팔을 뻗어 아이스버그의 팔에 가볍게 팔짱을 꼈다.

“그래서, 계속 눈치 없이 방해할 건가? 소년.”

“으아아아아, 죄, 죄송합니다아아아!! 아, 아이스버그 씨!! 저, 전 취향 존중하니까요!! 바, 방해해서 죄송합, 우와아악!!”

파울리가 그대로 뛰듯이 멀리 달려가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스팬담이 아이스버그에게서 후다닥 팔을 빼더니 그대로 항구가 떠내려갈 듯 웃음을 터뜨렸다.

“으, 으하하하!! 미친 진짜 돌아버리겠다. 크흡, 쟤 왜 저렇게 순진하냐. 풋풋하다, 풋풋해.”

“……어이, 스팬담. 네놈 정말로 죽고 싶나!!”

아이스버그가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인 채 스팬담의 멱살을 붙잡고 흔들었다. 스팬담은 멱살이 붙잡혀 덜렁거리면서도 간헐적으로 웃음을 터뜨리다가 곧 가볍게 손을 들며 입을 열었다.

“화내지 말라고. 아이스버그. ……나는 누구 덕분에 회사 전체에 그런 소문이 났으니까 말이야. 하.하.하.하,하! 하, 시발……. 너는 그래도 네 제자가 소문내고 다니진 않겠지. 아냐? 내 부하는 신나서 소문내고 다녔다.”

기계처럼 웃던 스팬담이 한숨을 푹 내쉬며 암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에 아이스버그가 멈칫하며 멱살을 놓았다. 스팬담이 로브를 다시 한번 정돈하곤 뒤집어쓴 모자를 한 번 더 꾹 누르더니 왼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어쨌든 나도 대외적으론 애인 혹은 밀회 상대 만나러 온 거니까 말이다.”

가벼운 설명을 덧붙이곤 자리에 서서 간헐적으로 다시 웃음을 터뜨리던 스팬담이 곧 왼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그럼 진짜 간다.”

“손 치료받고 가는 게 낫지 않겠나?”

“오호, 우리 관계에 확인 도장이라도 찍고 싶나 보지?”

“……너 진짜!”

스팬담이 곧 멀어졌다. 짜증스럽게 얼굴을 구긴 아이스버그도 그대로 몸을 돌려 제 갈 길을 향했다.

 

**

 

‘좆됐다…….’

왜 좆됐냐고?

납치당했다, 시발.

그것도 퇴사를 7개월쯤 남겨두고서. 스팬담은 밧줄로 꽉 묶여 아픈 손을 어떻게든 풀어보려고 비틀었다. 팔다리가 전부 의자의 팔걸이와 다리에 묶여 있었다.

‘젠장, 무식한 놈들.’

요즘은 화학 약품이라는 좋은 게 있는데 굳이 뒤통수를 갈겨서 사람을 기절시킬 건 뭐냔 말이다. 두개골은 금 안 갔는지 모르겠다.

‘대체 날 왜 납치한 거지?’

부잣집 도련님처럼 보여서? 가능성이 있다. 이 경우엔 돈으로 어느 정도 협상이 가능할 수도 있었다. 문제는 자신이 사이퍼 폴을 총괄하는 장관이라는 걸 알고 있는 경우였다.

금요일 저녁에는 항상 아버지가 계시는 저택으로 퇴근한다. 대충 정해진 루틴 같은 일이었다. 그리고 오늘 새벽 일찍 출근하는 도중에 대가리가 깨지고 기억이 없었다.

사이퍼 폴의 장관은 세계 정부 내에서 사이퍼 폴의 내부 관리나 세계 정부의 회의를 포함한 임무는 맡아도 대외적으론 활동하지 않는 편이었다. 대외적으로 활동하는 건 본래 이지스 제로가 있으니까 말이다.

즉, 외부엔 얼굴 팔릴 일이 없다는 말이다.

‘내가 그나마 장관이라는 걸 알고 있는 건 톰이랑 아이스버그뿐인데…….’

두 사람이 가볍게 입을 털 리는 없다. 어쨌든 서로 거래하고 있지 않은가. 그럼 대체 뭐가 목적이냐가 문제군. 후자라면 사이퍼 폴의 정보가 어디에서부터 샜는지도 문제가 됐다.

철컥, 드르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갇힌 곳이 창고였는지 어두컴컴한 공간에 빛이 들어왔다. 그들이 불을 켰다. 갑작스럽게 밝아진 터라 스팬담이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천천히 떴다.

스팬담은 일단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들었다. 머리도 욱신거리고 손목엔 피도 안 통하는 것 같아 욱신거렸다.

피어싱한 붉은 머리 남자애 하나와 하얀색과 주황색으로 머리카락 색을 정확히 반으로 나눈 것 같은 남자가 있었다. 심지어 코트도 머리카락처럼 반반으로 나뉜 색이다. 이마에는 번개 모양의 흉터가 있고 와인잔도 여유롭게 들고 있다.

‘외국의 마법 학교에라도 들어가게 생겼는디….’

번개 모양 흉터를 보니 그것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스팬담이 고개를 젖히곤 입을 열었다.

“어느 상도 없는 새끼들이 시발, 사람을 대가리 깨가면서 이렇게 납치하냐.”

“네가 세계 정부 직속 첩보 기관, 사이버 폴의 장관인가?”

하필이면 원치 않는 후자 쪽이었군.

“그게 뭔데?”

뭔 아수라 백작처럼 생긴 사내의 물음에 스팬담이 인상을 찡그리며 천연덕스럽게 반문했다. 그가 옆에 있는 붉은 머리의 소년을 보았다. 붉은 머리의 소년이 눈을 크게 떴다.

“다, 당신이 CP9의 스팬담 맞잖아!”

“존나 무슨 소린지 하나도 모르겠다고! 시발 대가리 아파 뒈지겠네. 어린놈들이 도대체가 어른 공경을 모르네. 우리 아버지 돈 많다고 노린 거 아니었어?”

미간을 찌푸린 스팬담이 머리를 흔들며 뻔뻔하게 말했다. 스팬담의 말에 남자가 인상을 찡그렸다. 소년이 당황한 듯 눈동자를 굴렸다. 움츠러든 고개가 퍽 긴장한 듯 보였다.

“카이저, 확실한가?”

세상에, 시발 언제적 카이저냐……. 스팬담이 터져 나올 것 같은 황당함을 참으며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다 떠나서 여러모로 정말 힘들기는 했다.

‘애들이 찾으러 오려나.’

문제는 어디로 어떻게 찾으러 오냐는 건데.

‘여긴 대체 어디냐.’

사방이 막힌 창고라서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감이 오질 않았다. 스팬담은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곤 고개를 들었다. 당황한 소년이 허공에 대고 뭔가를 움직이고 있었다.

성큼성큼 다가온 소년이 스팬담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스팬담이 눈동자를 굴려 아래를 내려다보곤 다시 고개를 들어 소년을 보았다. 영 좋은 예감이 들질 않는다.

“인물 일람.”

작게 중얼거린 소년의 허공에서 트럼프 카드 같은 것이 촤르륵 펼쳐졌다. 이윽고 카드 하나가 앞으로 쭉 밀려 나와 소년의 눈앞에서 뱅그르르 돌았다.

 

[System 알림] [개인 메세지]

[플레이어 10 ‘탐정 카이저’가 당신의 정보를 열람하였습니다. 스킬의 숙련도 부족 및 ‘이레귤러’ 칭호의 효과로 당신의 정보 중 극히 일부만 공개됩니다.]

 

이건 또 뭐냐.

쟤도 플레이어야? 애새끼들이 대체 왜 이렇게 많은 거냐. 머리가 아팠다. 뭣보다 하나도 이해가 안 됐다. 칭호의 효과는 뭐고 스킬은 뭐고 숙련도는 대체 뭔데. 탐정은 뭔데…. 소년탐정 김전일이냐?

제발, 뭐라고 설명 좀 해줘.

그 사이 소년은 카드를 뒤집어 뭔가를 읽더니 그걸 그대로 아수라백작 사내에게 내밀어 보였다.

“보세요, 이나즈마! 저 사람이 스팬담이 맞습니다. CP9의 장관 맞아요!”

“그런가?”

“네, 보세요. 여기 ‘리톨드의 살해자’ 사이퍼 폴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뽑은 인물 일람 스킬로 방금 뽑은 카드를 보시면 이름 스팬담, 나이 32세, 신장 192cm, 생일 3월 11일에 여기, 칭호 CP9의 장관.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리톨드는 누군데. 남의 신상정보가 다 털리네. 스팬담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뭔데, 진짜. 아아 짜증 나.

‘스킬 어떻게 쓰는데…. 나도 쓰게 해줘.’

스팬담이 고개를 푹 떨궜다. 억울하다. 억울해. 시이발, 나이 들면 젊은 애들이랑 어울리는 건 꼰대라더니, 이건 사회가 꼰대를 만드는 수준 아니냐고. 어울릴 수가 없잖아.

우리 애들 나 구하러 안 오려나? 출근 시간은 지났을 텐데. 여긴 어디지. 이런저런 생각이 머릿속을 파고들어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떨구었다.

“네가 맞았군. 사이퍼 폴의 장관.”

아수라 백작, 이나즈마의 말에 스팬담이 고개를 들어 어깨를 으쓱이곤 턱을 까딱거렸다. 이나즈마는 스스로를 아마도 카이저라고 지칭한 남자에게서 스팬담의 신상정보가 담긴 카드를 손에 쥐었다.

“대체 뭐냐, 저 미친 스토커는.”

“네가 알 필요는 없지.”

“내 정보가 털렸는데 내가 알 필요가 없으면 좀 곤란하지. 이래 봬도 정보를 다루는 첩보 기관의 장관이잖냐, 내가.”

스팬담이 이죽거리며 말했다. 이제 갓 스물이나 됐을 법한 남자가 이를 악물며 눈을 부릅떴다. 살기가 풀풀 넘실거렸다. 뒤쪽에 빠져 있는 붉은 머리의 소년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뿌듯한 낯으로 웃고 있었다.

‘이야, 사람을 구렁텅이에 빠뜨려놓고 웃네.’

어린놈이 싹수 보소. 아주 미래가 썩어 빠진 게 훤히 보였다. 스팬담은 코앞까지 다가온 남자를 보곤 고개를 기울였다.

“네가 내 동료를 죽였다! 아는가?!”

“내가 동료를 죽였다고? 그게 무슨 소리야? 난 임무에 참가 안 하는 편이야.”

“에덴섬!”

“아?”

그건 참가했지.

몰살이었지, 아마도. 스팬담이 떨떠름한 낯으로 그를 올려다봤다가 슬쩍 눈을 내리깔았다. 근데 거기에 누가 있었는데.

“우리가 누군지 아나?”

“알겠냐…? 나는 존나 처음 뵙는 얼굴인데.”

짜악-!

내 이죽거림이 끝나기가 무섭게 화끈한 감각과 함께 얼굴이 확 돌아갔다. 스팬담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와, 존나 아프네. 머리가 얼얼했다.

“사이퍼 폴의 장관을 잡았다고…, 이와 씨에게도 연락드렸으니 곧 오시겠지.”

“하아…?”

“긴가민가하긴 했는데, 장관이라니 생각지도 못한 소득이었다. 네놈이 죽인 혁명군의 씨앗이 얼마나 많았는지……, 세계 정부가 틀어막은 목소리가 얼마나 컸는지…, 뼈저리게 보여주도록 하지.”

“…혁명군이었냐?”

이런 미친, 하필이면 혁명군이냐? 조졌네.

“하.”

헛웃음이 절로 터져 나오는 순간이었다. 짜악-! 이번엔 얼굴이 반대쪽으로 돌아갔다. 덜컹, 묶인 손이 절로 움찔거렸다. 고개를 젖혀 놈을 노려보자 차분한 낯을 한 청년은 스팬담을 오만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선글라스 안쪽으로 격렬한 분노가 느껴지지만, 표정만큼은 가히 완벽했다.

“네놈이 알고 있는 정보 하나하나를 전부 끄집어내야겠지.”

“퍽이나 가능하겠다. 꼬맹아.”

“가능하지. 인간은 고통 앞에서 꽤… 무력해진다. 특히나 너같이 사회의 온갖 특혜를 다 받고 자라온 놈들은 말이다.”

이나즈마가 손을 내려 스팬담의 중지를 하나 붙잡으며 말했다. 스팬담의 표정이 살짝 질렸다. 뺨을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가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손을 내려다보았다.

“이건 좀 최악인데…….”

“이제 시작일 뿐인데 너무 겁먹지 말라고, 장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스팬담의 중지가 뒤로 손등 쪽으로 세게 꺾였다. 연약한 몸뚱어리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가로지르는 끔찍한 통증에 스팬담이 비명을 내질렀다.

“궁금한 건 꽤 많지만, 그건 이와 씨께서 간부들과 함께 진행할 일이니, 일단 에덴섬은 왜 청소했는지부터 물어보지.”

“……하핫. 좆이나 까라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싸가지 없는 꼬맹아.”

“도력 6의 장관이라도 장관은 장관이라는 거군.”

이나즈마가 스팬담의 반대쪽 검지를 붙잡으며 말했다. 스팬담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자신이 도력 6이라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저 카드 대체 뭐냐.

“야, 치사하게 양쪽 손 조져놓기 있냐? 일단 순서대로 한쪽 손 다 끝내고 진행하지?”

“싫다.”

“어른 공경 좀 해라, 싸가지 없는 새끼야.”

우드득- 또다시 여유롭게 내뱉는 어린애 취급이 끝나기가 무섭게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작은 창고에 울려 퍼졌다.

 

**

 

“야, 오늘 유독 장관이 늦지 않냐? 조금 있으면 점심시간인데. 휴가계 냈었던가?”

“아니, 오늘 외식하자고 했었으니 늦을 리가 없다.”

“이렇게 늦는 건 처음 아니냐는 거다. 챠파파.”

“뭔가… 감이 나쁘구먼. 심심하면 사고에 휘말리니 말일세.”

카쿠가 찝찝한 기분으로 모자챙을 매만지며 말했다. 사실 벌써 도착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그가 장관을 역임한 뒤로 지각을 한 적은 정말 손에 꼽을 정도였고 그나마도 1시간 안쪽으로 항상 왔었으니까.

“역시 호위를 붙이는 게 낫지 않겠나?”

“장관이 주말만큼은 자유로워지고 싶다는데 어쩌겠냐.”

블루노의 말에 재브라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근질근질한 것이 영 찝찝한 것은 그도 마찬가지였다.

“집에 가보도록 하지.”

“오, 그래. 집에 있으면 그대로 끌고 점심이나 먹으러 가자고.”

“요요이!! 이 쿠마도리~ 찬성이올시다~~!”

고민하고 있을 무렵 로브 루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재브라가 냉큼 몸을 튕겨 일어나고 그들도 금세 몸을 튕겨 일어났다. 멀리 갈 생각도 없다는 것처럼 그대로 발코니에서 뛰어내린 로브 루치를 따라 그들이 동시에 스팬다인의 저택으로 향했다.

로브 루치가 저택 앞에 내려앉아 눈을 가늘게 떴다. 안쪽에 인기척이 없었다.

“집에는 아무도 없군.”

“……슬슬 불안한데요.”

“장관이 다니는 길목을 가본다.”

로브 루치가 굳은 낯으로 몸을 돌렸다. 반쯤은 확신이 생겼다. 뭔가 문제가 생겼다. 그렇지 않으면 집에서 나왔는데 사이퍼 폴에 오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정말 한시도 떨어져선 안 되는 인간이군.’

성큼성큼 걷던 로브 루치가 우뚝 걸음을 멈췄다.

‘피 냄새.’

킁킁, 코를 들썩이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재브라도 미간을 좁힌 채 냄새를 맡고 있었다. 미미하게 찌푸려진 인상이 그의 표정도 다소 심각했다.

“…재브라, 진짜 늑대라도 된 겐가?”

“염병, 이거 장관의 피 냄새잖냐.”

“쫓을 수 있겠나?”

로브 루치의 말에 재브라가 인상을 찡그렸다. 완전 동물 형태로 변하는 건 딱히 즐거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게 문제는 아니겠지. 재브라의 몸이 비대하게 부풀더니 이윽고 네 발로 땅을 짚고 섰다. 그가 냄새를 맡는 듯하더니 그대로 앞으로 달려 나갔다.

“꺄아아악! 늑대다!!”

“칫.”

빠르게 달리는 그 뒤를 CP9 역시 따라 속도를 올렸다. 인적이 드문 외곽에 작은 창고처럼 보이는 건물에서부터 냄새가 짙었다. 재브라가 아래로 점프하며 인간 형태로 돌아왔다.

“저기다.”

재브라가 굳은 낯으로 고개를 까딱였다. 로브 루치를 필두로 그들이 망설일 것 없이 안으로 뛰어들었다.

“흐아아아악!!”

비명이 들리는 것과 동시에 콰앙-! 굳게 닫혀있던 문이 부서졌다.

“장관!”

재브라가 소리를 내질렀다. 비명이 들린 곳으로 뛰쳐갔지만 그곳에 있는 건 전혀 다른 놈이었다. 재브라의 얼굴이 구겨졌다. 붉은 머리의 소년이 벌벌 떨고 있었다.

“뭐냐, 너는. 장관은?”

재브라가 일단 소년을 거칠게 던져두곤 몸을 돌렸다.

“와아……, 우리 꼬맹이들 늦었네…. 아저씨 세상 하직하는 줄 알았어…….”

“……장관, 괜, 찮으신가요?”

칼리파가 새하얗게 질린 낯으로 물었다. 그도 그럴 게 손가락이 기이한 방향으로 여러 개가 꺾여 있었던 탓이다. 얼굴은 부어있었고 입가엔 피가 흘렀다. 머리에도 피가 흐른 흔적이 있었고 몇 번 넘어졌는지 옷도 꽤 흙투성이였다. 천천히 스팬담을 위에서 아래로 훑어보던 로브 루치의 동공이 세로로 확 벌어졌다.

“누가, 그랬습니까.”

“난 괜찮다.”

“씨발, 괜찮긴 뭐가 괜찮습니까! 본인 꼴을 좀 보십시오!”

“그래, 사실 좆같이 안 괜찮은데, 안 괜찮다고 하면 더 아프니까 자기 세뇌 중이다. 그러니까 괜찮다. 아, 아버지한테 뒤졌다.”

스팬담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손을 들어 안주머니를 뒤지려고 하다가 멈칫했다. 카쿠가 말없이 다가와 담배를 꺼내 입에 물려주었다.

“아, 걔 혁명군인데… 제압 좀 해놔라. 능력자 같더라.”

스팬담이 반쯤 탄 몰골로 쓰러진 이나즈마를 턱 끝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치익, 담배에 불이 붙는 것을 본 스팬담이 흘긋 카쿠를 보곤 낮게 혀를 찼다.

“…애새끼한테 시키려니 영 찝찝하네. 어쨌든 고맙다. 재브라, 그 꼬맹이 좀 데리고 와봐라.”

“이거 말입니까?”

“어어.”

“혁명군에게 납치당한 거냐는 거다, 챠파파.”

평소의 후쿠로 답지않은 고저 없는 목소리에 스팬담이 고개를 끄덕였다가 설핏 웃었다. 사실 웃음이 나올 기분은 아닌데 너무 아프니까 웃음만 새어 나왔다.

“너, 너 뭐야. 플레이어야? 아냐, 그럼 카드에 뜨는데. 뭐지? 칭호 가지고 있는 거냐고!”

“얘들아, 미안한데… 이 새끼 묶어놓고 나 좀 풀어주고 내 뼈 좀 대충 다시 맞춰준 뒤에 자리 좀 잠깐만 비워줘라. 이 새끼랑 할 말이 좀 있어서.”

“으으음~~ 안 되올시다~ 장관님.”

“부탁 좀 하자고.”

스팬담의 말에 쿠마도리가 미간을 찌푸렸다. 카쿠가 놈의 멱살을 붙잡고 입을 열었다.

“그럼 손 좀 봐줘도 되겠는감? 그냥 두기엔 불안해서 말일세.”

“싫어, 이거 놔! 너 뭐야?! 너희 뭔데!!”

카쿠가 버둥거리는 놈을 가볍게 제압해서 구석으로 끌고 간 사이 내 팔다리를 풀어준 로브 루치가 미간을 좁히며 손가락을 보았다. 부러지진 않은 것 같은데, 본래 꺾일 수 없는 방향으로 꺾여서 관절이 다 나간 듯했다.

“손 대면 아플 겁니다.”

“……아, 역시?”

“네.”

“어쩔 수 없지. 빠르게 해줘라.”

스팬담이 이를 악물며 눈을 질끈 감았다. 로브 루치가 잠시 그런 그를 보다가 빠르게 손을 움직였다. 그가 터져 나오는 비명을 악물었으나 그럼에도 손가락이 꺾일 때만큼의 고통이 고스란히 쏟아졌다. 나중에는 비명을 참는다는 최소한의 의식조차 사라졌다.

“끄윽…….”

정신을 차리고 보니 거의 창고 바닥을 데굴데굴 나뒹굴고 있었다. 스팬담의 어깨가 바르르 떨렸다. 손에 감각이 없다. 아예 움직이지도 않는 것 같은데.

“…뭐지. 손이 안 움직여.”

“제가 혈을 눌러서 마비시켰습니다.”

“그게 가능해?”

“네, 오래 하면 좋진 않습니다만 쇼크가 심해 보이셔서….”

블루노의 말에 스팬담이 바닥에 주저앉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악! 아악!” 구석에서 퍽퍽 때리는 소리와 함께 고통에 젖은 신음이 들렸다. “그만, 그만!” 빌어대는 목소리가 꽤 필사적이었으나 카쿠는 아무런 말도 없이 그저 놈을 마구잡이로 때리더니 그대로 손가락 하나를 붙잡았다.

“그만!”

“건드릴 사람을 건드렸어야지 않겠는감.”

카쿠의 목소리가 퍽 서늘했다. 그 상황을 지켜보며 스팬담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카쿠, 대화는 할 수 있게 해줘.”

“알겠네.”

카쿠가 모자챙을 잡아채 꾹 누르며 말했다.

스팬담은 허공에 뜬 알림창을 물끄러미 보았다.

 

[System 알림]

[심판자 고유 스킬 ‘심판’ 발동. 단, 인물에 대한 ‘판결’을 내리지 않아 효과가 반감됩니다.]

[고유 스킬 첫 사용으로 스킬 포인트가 +1 지급됩니다.]

 

‘……스킬명을 입으로 불러야 했을 줄이야.’

손가락 부러지는 걸 도저히 버틸 수가 없어서 저놈들이 하던 대로 그나마 기억나는 스킬의 이름을 외쳐봤던 건데, 그게 그대로 발동했다. 상대가 기절하는 정도로 끝나는 약한 스킬인 모양이었지만.

‘일단 저놈한테서 스킬인지 뭔지 자세히 좀 들어야겠어.’

도통 뭐를 알아야 써먹든가 하지. 스킬은 뭐고 판결은 뭐고 왜 반감이 됐으며 스킬 포인트는 대체 뭔데.

‘참가하기 싫어.’

제발 사람을 좀 자유롭게 놔둘 순 없는 걸까? 스팬담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저 플레이어가 내 정체를 알고 들덤볐느냐도 문제야.’

스팬담은 자신을 제외한 이들에게 내려진 퀘스트 중에 ‘말살’과 ‘회유’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만약 알고 온 거라면,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도 알아야 했다.

“스킬, 선동!”

놈이 비명처럼 소리를 내질렀다. 그에 카쿠가 잠시 멈칫했다. 스팬담의 눈이 가늘어졌다. 카쿠가 코웃음을 치고 다시 발을 움직이려는 때였다.

“미친놈이었구먼.”

“카쿠! 그만!”

카쿠의 움직임이 뚝 멈췄다. 바닥에 주저앉아 호흡을 고르고 있던 스팬담의 눈이 가늘어졌다.

“카쿠, 저 새끼가 악당이야! 저 남자를 제압해야지! 나는 너희를 도와주러 온 사람이라고! 날 공격하면 안 돼! 난 널 도와주러 온 네 친구잖아.”

“……그랬, 는감?”

카쿠가 더듬더듬 대답했다. 다른 요원들이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카쿠가 남자를 향하던 다리를 내리더니 그대로 몸을 돌려 스팬담에게 성큼성큼 걸어오기 시작했다.

“어이, 지금 뭐 하는 거냐. 카쿠.”

로브 루치가 스팬담의 앞을 가로막았다. 스팬담의 손에 붕대를 감아주고 있던 블루노가 미간을 찌푸리고 칼리파가 카쿠의 앞을 가로막았다.

“당신 뭐 하는 거예요?”

“비키게, 칼리파. 적은 죽여야 한다네.”

“맞아, 칼리파! 그 남자는 적이야! 친구인 날 지켜줘!”

얼굴이 퉁퉁 부어오른 카이저라는 소년이 히죽히죽 웃었다. 그에 칼리파의 움직임도 뚝 멈췄다. 칼리파가 설핏 표정을 일그러뜨리더니 천천히 몸을 돌렸다.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감을 눈치챈 블루노가 스팬담의 손에 붕대를 마저 감아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봐, 우리 애들한테 뭘 한 거야?”

스팬담이 미간을 찡그린 채 묻자 소년, 카이저가 눈치를 보더니 슬쩍 일어났다.

“비키세요, 블루노.”

“비킬 수 없다. 정신 계열 능력자인가?”

“아냐, 블루노! 우린 친구잖아, 나는 너희가 지금까지 잡고 싶어 했던 악당을 잡는 걸 도와줬을 뿐이야! 내 덕분에 잡았으니까 얼른 죽여야지!”

스팬담이 붕대로 둘둘 감긴 손으로 목덜미를 매만졌다. 그 사이 후쿠로와 쿠마도리가 동시에 체를 써서 뛰쳐나갔다.

“챠파파, 저걸 먼저 죽인다는 거다.”

“요요이~~! 본인도 동감이니라~~”

카이저가 당황한 듯 눈을 크게 뜨더니 벽에 바짝 붙었다. 다가온 커다란 덩치의 두 사람을 보며 카이저가 도망치기 시작했다. 공포에 질린 낯으로 그가 입을 열고 비명처럼 소리쳤다.

“으아악! 카쿠, 블루노! 도와줘!”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카쿠와 블루노가 동시에 체를 써서 사라지더니 그대로 후쿠로와 쿠마도리를 향해 발과 주먹을 날렸다.

“……!!”

예상 못한 방해꾼에 후쿠로와 쿠마도리가 뒤늦게 방어 자세를 잡았으나 그대로 창고의 벽에 틀어박혔다. 콰앙-! 벽에 처박힌 두 사람이 급히 다시 뛰어올랐다.

“아으으~~!! 동료와 싸우는 것은 슬프도다~~”

“챠파파……, 뭐하냐는 거다!!”

“친구를 괴롭히지 말게나, 후쿠로. 쿠마도리.”

덤덤하게 덧붙이는 카쿠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소년이 입을 벌리더니 웃었다.

‘어떤 탐정이 시발 저런 세뇌를 거냐?’

스팬담이 헛웃음을 흘렸다.

나이가 나이였다 보니 21세기 애니메이션을 안 봐서 모르겠다. 김전일 시대 때엔 최소한 탐정이 세뇌하고 선동하는 건 없었던 것 같은데. 스팬담이 한숨을 흘리며 고개를 기울였다.

허공에 뜬 시스템 창엔 여전히 제 정보가 나열되어 있었다.

‘이건 뭘 어떻게 해야 되는 거야?’

허공에 뜬 창을 손가락으로 대충 이것저것 쿡쿡 눌러보던 스팬담이 순간 움직임을 뚝 멈췄다. 글자를 읽어 내려가던 눈이 살짝 커졌다.

그 사이 카이저는 웃는 낯으로 두 팔을 벌리며 입을 열고 있었다.

“후쿠로, 쿠마도리. 우리 친구잖아. 잘 생각해봐, 너희는 지금 악당을 쫓고 있었어. 나는 정보상이니까 너희가 도움을 요구했고. 우리 친구잖아. 그렇지?”

퍽 다정한 카이저의 말을 들은 쿠마도리와 후쿠로에게서 살기가 사라졌다.

“챠파…?”

“……으음.”

두 사람이 동시에 움직임을 멈췄다.

후쿠로가 카이저를 향하던 몸을 돌려 살기등등한 시선으로 스팬담을 보았다. 쿠마도리는 굳은 채 멈춰 서선 미간을 찌푸렸다. 후쿠로랑은 다르게 썩 내키지 않는 모양이었다. 스팬담은 가만히 그들에게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쿠마도리, 왜?”

“……아으으~ 저 사내를 죽여야 하는 이유를, 잘 모르겠구려…….”

“모르겠다니, 날 공격했는걸!”

쿠마도리가 힐긋 카이저를 보고 다시 스팬담을 보았다. 입을 꾹 다문 그의 눈에 망설임이 보였다.

‘능력이 만능은 아닌가.’

스팬담이 생각하는 사이 “칫.” 카이저가 낭패감 어린 낯으로 혀를 찼다. 그가 쿠마도리의 몸에 손을 올렸다.

“스킬, 인물 일람.”

촤르륵 허공에 펼쳐진 카드가 순식간에 하나만 남기고 사라졌다. 카이저가 카드를 손에 쥐고 내용을 읽더니 씩 웃었다.

“쿠마도리, 기억 안 나? 그가 네 어머니… 야만바코 씨를 죽였어.”

“……아으으!!”

쿠마도리의 기세가 바뀌었다. 형형한 살기에 스팬담이 붕대 감긴 손등으로 뺨을 가볍게 문지르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미친 새끼들 지금 뭐 하는 거냐?”

“미련하고 멍청한 놈들이군. 전원, 처벌이다.”

로브 루치와 재브라가 그대로 자세를 붙잡았다.

“앗, 얘들아! 저 두 사람, 이름이 뭐야? 오늘 소개해주기로 했었잖아!”

“그랬었나요…?”

“응응. 그랬었지.”

처음에만 보더라도 소심하게만 보이던 소년의 입가가 퍽 사납게 일그러졌다. 스팬담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름을 알아야 쓸 수 있는 능력인가.’

스팬담이 고개를 기울였다. 그에 비해 이쪽은 심판이라는 의미도 이유도 사용법도 제대로 모르겠는 스킬만 알고 있고. 우리 집 애들은 다 저쪽으로 넘어갔고, 말이지.

“로브 루치와 재브라라네.”

나를 물끄러미 보고 있는 카쿠가 대답했다.

“듣기 전에 쳐라, 들개.”

“말 안 해도 안다고. 어이, 장관. 움직이지 마쇼. 지켜줄 테니까.”

두 사람이 눈에 보이지도 않을 빠른 속도로 눈앞에서 사라졌다. 동시에 카쿠와 블루노가 두 사람의 앞을 가로막았다.

“꺼져라, 멍청한 놈들이.”

“루치, 부디 손대지 말게나.”

“크핫하하! 나중에 후회나 하지 마라 꼬맹이들아!”

“…….”

로브 루치와 재브라의 주먹이 두 사람을 동시에 내리쳤다. 카쿠의 다리와 로브 루치의 주먹이 부딪치고 재브라의 주먹과 블루노의 교차한 팔이 부딪치며 거센 폭풍을 만들어냈다.

“루치, 재브라!”

두 사람이 동시에 몸을 돌려 곧장 위치를 바꿔 카이저에게 달려들었다.

“기억 안 나? 저 녀석이 너희들의 장관을 죽여서…, 내가 이번에 CP9의 장관이 된 거!”

카이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재브라와 로브 루치의 움직임이 멈췄다. 재브라의 동공이 잘게 흔들리고 로브 루치의 주먹 끝이 잘게 떨렸다.

“흐, 하하하하!!”

카이저가 커다랗게 웃음을 터뜨렸다. 기어코 한 명도 빠짐없이 저쪽에 선 요원들을 본 스팬담이 묘한 낯을 했다. 눈이 반쯤 뒤집힌 카이저가 스팬담을 보며 입을 열었다.

“저런, 결국 혼자가 됐네. 이제 대화 좀 해보자고, 아저씨!! 당신 뭐야? 내가 인물 일람을 봤을 땐 플레이어란 말이 없었단 말이다.”

“뭔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스팬담이 한 걸음 앞으로 걸어 나오자 카이저의 앞을 요원들이 막아섰다. 그나마 재브라와 로브 루치만 불쾌한 낯으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야.”

스팬담이 가볍게 그를 부르며 손목을 흔들어 손을 풀었다. 관절은 영 안 움직이긴 하는데 대충 팔로 누르니 주먹을 쥔 자세쯤은 됐다. 내가 다가가자 카쿠가 미간을 좁혔다.

“그 이상 오면 죽이겠네.”

살기 어린 으름장을 들었음에도 낮게 웃은 스팬담은 말없이 카쿠의 머리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 서툰 손길로 쓱쓱 쓰다듬어주자 카쿠가 눈을 크게 뜨더니 멈칫했다. 손끝이 잘게 떨리는 게 보였다.

“우리 애들 그만 좀 괴롭혀라. 얘네가 이래 봬도 날 얼마나 좋아하는데…….”

“그딴 건 관계없어! 내 선동 레벨은 거의 만렙이라고! 내가 선동할 수 없는 놈은 없다.”

소리치는 카이저에게로 스팬담이 서글서글하게 웃는 낯으로 다가갔다. 그가 왼손등으로 오른쪽 손목을 가볍게 툭툭 쳐보더니 오른손을 조금 더 주먹을 쥐게 하곤 그대로 오른팔을 들어 있는 힘껏 휘둘렀다.

“저, 저거, 죽여어어!!”

명령이 끝나기가 무섭게 바로 뒤에 있던 이들이 스팬담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움직이지 않는 것은 그나마 재브라와 로브 루치 정도였다. 뒤에서 밀려오는 살기에도 스팬담은 뒤를 돌지 않고 그대로 카이저에게 향하는 팔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뻐억-!

둔탁한 소리가 터졌다.

 

[System 알림]

[칭호 ‘CP9의 장관’의 효과로 인해 ‘CP9 요원’에게 걸린 상태 이상 ‘선동’이 제거됩니다. ‘CP9 요원’에게 스킬 ‘선동’의 저항성이 생겨납니다.]

 

허리를 한껏 움직여 손목에 들어가지 않는 힘을 원심력으로 보강한 주먹에 얼굴을 맞은 카이저가 의기양양한 낯을 구기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새끼가…. 엄마 아빠가 나이 든 아저씨는 공경하라고 안 하디?”

스팬담이 카이저의 배를 가볍게 발로 차며 말했다. 요원들의 주먹이 스팬담의 바로 코앞에서 멈춰 있었다.

“뭐, 뭐야! 뭐야! 왜 공격을 안 해! 왜 풀렸지? 스킬이 왜…….”

“그러게, 우리 애들이 날 너무 좋아한다고 했잖냐.”

스팬담이 쓰러진 카이저의 얼굴을 가볍게 짓밟으며 말했다. 가만 보니 괘씸하단 말이지. 사람 마음 가지고 장난질을 치는 게 말이다.

‘그나저나, 간 떨어지는 줄 알았네.’

스팬담이 당황한 낯으로 제게서 멀어지는 이들을 보곤 다시 허공에 뜬 홀로그램을 보았다.

 

[칭호 효과]

[이레귤러] [열기]

[CP9의 장관] [접기]

→ ‘CP9의 요원’이 본 칭호를 가진 자에게 일정 이상의 호감도를 가지고 있는 경우 ‘CP9의 요원’은 본 칭호를 가진 자에게 피해를 주는 직간접적인 공격을 할 수 없다. 플레이어로 인한 상태 이상에 걸렸을 경우 상태 이상이 제거된다. (조건충족/활성화 중)

[대적자] [열기]

[신살자(神殺者)] [열기]

 

칭호라는 게 뭔진 모르겠지만 아무튼 살았다. 애들 하나둘 넘어갈 때는 어쩌나 싶었는데. 뭐라도 건드려보길 잘했던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이 플레이어라는 게 좀 귀찮네.’

뭣보다 벌써 두 번이나 엮였다는 것이 영 신경 쓰였다. 마치 누군가 강제로 끌어들이려고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건 제 착각일까?

‘모르겠다. 일단 해결했고.’

전혀 몰랐던 애들의 호감도 어쩌고에 대해 알게 된 스팬담은 퍽 기분 좋은 낯으로 몸을 돌렸다.

“왜 멀찍이 떨어져서 그런 얼굴들이냐?”

거무죽죽해져선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한 녀석들은 충격을 받았는지 평소와는 다르게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카쿠가 굳은 낯으로 멀찍이 떨어진 채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미안하네, 장관. 우리가 대체 뭘, 한 겐가?”

“장관을 공격하려고 했…죠? 저희…….”

카쿠와 칼리파의 충격이 제일 큰 모양이었는지 두 사람의 목소리가 떨렸다. 저 정도로 동요를 드러내는 건 처음이었던 터라 스팬담은 멋쩍음에 손등으로 뺨을 문질렀다. 오죽하면 후쿠로까지 말이 없었다.

아니, 정말 괜찮은데.

“…….”

성큼성큼 걸어간 로브 루치가 그대로 내 발밑에 있던 놈의 멱살을 붙잡아 그대로 바닥에 패대기쳤다. 쿠웅-! 묵직한 소리와 함께 놈이 비명을 내질렀다. 발밑에서 사라진 육체 때문에 휘청거리는 스팬담을 재브라가 손을 뻗어 잡아주더니 곧장 손을 물리고 떨어졌다. 스팬담이 재브라를 보곤 살기등등한 로브 루치에게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감히…….”

로브 루치의 목소리가 서슬 퍼렇다.

지건이 정확히 급소만 피해 카이저인지 뭔지 하는 꼬마에게 쇄도했다. 바르작거리기라도 하면 그대로 다리가 소년을 때렸고 그러다가 곧 훌쩍거리기라도 하려고 하면 주먹이 날아갔다.

“잘못…!”

“감히……! 버러지 같은 게!”

우드득, 팔 하나를 뽑아버린 로브 루치의 몸에서 귀와 꼬리가 돋아났다. 꼬리가 순식간에 소년의 허리를 휘감았다. 로브 루치가 그대로 주먹 두 개를 모으는 것을 본 나는 급히 걸어가 로브 루치의 머리를 둘둘 붕대 감긴 손으로 툭 아프지 않게 때렸다. 로브 루치의 사나운 시선이 스팬담에게 향했다가 이윽고 그를 발견하곤 누그러졌다.

“……장관.”

“내가 쟤랑 얘기하고 싶다고 했잖냐. 애 잡겄다. 저놈이 정신 계열 능력을 쓴 것 같으니까 괜찮다.”

“……수련 부족입니다.”

“너랑 재브라는 움직이지도 않았잖냐.”

“장관을 지키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로브 루치가 대단히 자존심이 상한 표정으로 말했다. 까드득 툭 튀어나온 송곳니가 로브 루치의 아랫입술을 툭 파고들었다. 스팬담이 붕대 감긴 손등으로 로브 루치의 아랫입술을 한 차례 꾹 눌렀다.

“루치, 나 봐라.”

스팬담이 아직 저보다 조금 작은 로브 루치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로브 루치가 내리깔고 있던 시선을 들어 스팬담의 눈동자와 마주했다.

“나 어떠냐?”

“……퉁퉁 부어서 꼴사납습니다.”

“…시부럴, 그래. 솔직한 평가 고맙다. 근데 나 멀쩡하다. 너희한테 안 맞았고 너희가 안 때릴 걸 믿고 있었다.”

정확히는 시스템을 믿은 것에 가깝기는 했지만 말이다. 사실 전부 반신반의하긴 했다. 뭐, 설령 때렸더라도 원망할 일은 없었을 거다. 이용당한 걸 알았는데 뭘.

“그리고 혹시나 때렸어도 너희 원망할 일 없었으니까 걱정 말고…….”

“원망 좀 하십쇼!”

스팬담이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재브라가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그가 소리를 지른 게 무척 드문 일이었던 터라 스팬담이 눈을 크게 뜨곤 몸을 돌렸다. 주먹을 꽉 쥔 재브라가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고개를 치켜세웠다.

“좀 이해하려고 하지 말고 탓하란 말입니다! 우리가 당신을 못 지켰는데 왜 자꾸 당신이 우릴 이해해주려고 드냔 말입니다! 탓하라고!”

“난…, 그냥 너희가 나 찾으러 와준 것만으로도 존나 고마운데 뭘 탓하라고……?”

내 말에 재브라가 멈칫했다. 그가 고개를 들고 스팬담을 보았다. 재브라가 설핏 표정을 일그러뜨리곤 어쩐지 상처받은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니, 왜. 말을 해라 좀.

“…장관은, 어차피 떠날 거니까 우리에게 기대를 그것밖에 안 하는겐가?”

“아니, 그게 아니라…. 정신 계열 능력에 당한 걸 뭐 어떡하겠냐. 대체 왜 심각해져서 그래? 너희한테 기대는 늘 하고 있고 도와주러 와줘서 고마워. 그리고 결국 공격도 하지 않았잖아.”

“……챠파파.”

스팬담이 로브 루치의 목을 팔로 휘감고 반대쪽엔 재브라를 휘감았다. 그가 질질 끌고 가더니 몰려있는 놈들에게로 다가가 그대로 팔을 벌려 모두를 한 번에 끌어안았다. …쿠마도리와 후쿠로는 손바닥만 닿는 꼴이 됐지만 말이다.

“너희가 이러고 있으면 난 뭘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단 말이다. 이런 거 익숙하지 않다고.”

스팬담이 약한 소리를 했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랬다. 그는 이런 종류의 위로를 할 줄 몰랐다.

“그러니까, 뭐냐…. 이 형님이 너희를 엄청 좋아한다. 아냐?”

“……성희롱입니다.”

“그, 그런 의미는 아냐. 칼리파…….”

칼리파의 힘없는 목소리에 떨떠름하게 대답해준 스팬담이 분위기가 누그러진 것을 보곤 뻐근한 팔을 빼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다음에는 더 완벽하게 지켜줄 거잖냐. 그건 한 치의 의심도 없다.”

이 이상 얼마나 과보호하게 될지는 상상하고 싶지 않지만 말이다. 그래도 뭐, 나쁘지 않지 않나. 아까보단 녀석들의 얼굴이 풀려서 제게 향한 걸 본 스팬담이 마저 입을 열었다.

“너희가 이미 스스로를 탓하고 있는데…….”

느릿하게 읊조리는 스팬담의 말에 그들의 시선이 그에게 닿았다. 스팬담이 설핏 웃으며 머리를 한 번씩 툭툭 쓰다듬었다.

“내가 너흴 탓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는 것 같다. 결국 사람이 누군가를 혼낸다는 건, 다음에 더 잘하길 바라서잖냐.”

“…….”

“다음에 더 잘할 게 뻔한데 굳이 왜 혼을 내겠어. 이렇게 잔뜩 혼난 얼굴을 한 애들 혼내는 건 싫다.”

“…다음엔, 절대로, 혼자 안 내보내겠습니다. 장관.”

“……어어, 그래. 알았다.”

스팬담이 로브 루치의 서슬 퍼런 시선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에야 로브 루치가 어딘가에서 사슬을 가져와 카이저의 팔다리를 꽁꽁 묶어 의자 앞에 무릎 꿇려 두었다. 얼마나 몸체를 전부 묶어뒀는지 나는 한 마리의 사슬 애벌레인 줄 알았다.

“그 혁명군은?”

“블루노가 해루석 수갑을 가져오면 그대로 연행할 예정입니다.”

“알겠어, 일단 잠깐 나가 있어. 나 이놈이랑 얘기 좀 할게.”

스팬담을 한 차례 본 로브 루치는 썩 마뜩잖은 얼굴을 했지만, 그렇다고 명령을 거부하진 않았다.

“예, 밖에 있을 테니 일 있으면 불러주십시오.”

로브 루치가 눈물범벅이 된 소년을 발로 퍽 차더니 그대로 몸을 돌렸다. 여전히 침울해 보이는 이들을 보니 나중에 따로 풀어줘야겠구나 싶었다. 스팬담은 일단 의자에 털썩 앉았다.

“흐, 흐어어엉…… 흐읍, 끄윽……. 흐아앙.”

카이저인지 뭔지가 엉엉 울기 시작했다. 그야 온몸에 구멍이 나고 팔도 꺾였는데 아프기야 하겠지. 스팬담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가, 뚝. 뚝하자? 응?”

스팬담이 쯧, 혀를 찼다.

몸도 아파죽겠는데 제 아랫놈들 고생시킨 새끼까지 신경 쓸 여유가 사실 없었다. 훌쩍거림이 계속 멎지 않으니 짜증이 올라왔다. 그가 붕대 감은 손등으로 눈두덩을 가볍게 비비며 입을 열었다.

“야, 안 그치면 뒈진다.”

“사, 살려주세여……. 아저씨, 살려주세요. 제발…….”

아까의 기세등등함은 어디로 갔는지 로브 루치에게 호되게 당하고 우는 얼굴엔 진심이 그득했다.

그러나 미안하지만, 이 상황에 대한 입막음을 위해서 결과는 정해져 있었다. 다소 이기적이더라도 스팬담은 조용히 평안한 생활을 누리고 싶었고 거기에는 일말의 불안 요소도 존재해선 안 됐다.

“일단…, 카이저? 이름도 참 별 거지 같은 걸로 지어놨네. 그래, 혹시 중학교 2학년?”

“흐윽, 아뇨. 흡, 저, 저 21살입니다.”

“오, 성인이네. 얼굴도 정신연령도 꽤 어려 보여서 10대인 줄 알았는데.”

카이저의 말을 들은 스팬담이 가볍게 웃는 낯으로 대꾸했다. 스팬담이 팔걸이에 팔을 가볍게 올렸다. 그가 화를 내거나 겁박하지 않고 편히 말을 걸자 카이저인지 뭔지도 점차 울음을 그쳐가기 시작했다.

“아가야, 지금부터 내가 하는 질문에 말 잘하면 네가 편해질 거고 제대로 못 하면… 꽤 삶이 괴로워질 거다. 알았냐?”

“흐읍, 네. 네에……. 제가 코인이랑, 스킬 포인트 다 드, 드릴 테니까…… 허엉. 제발 살려주세요…….”

그래서 다시 경고했더니 또 울었다.

사실 울고 싶은 건 스팬담이었다. 손가락은 다 부러지고 얼굴은 퉁퉁 부었다. 그리고 솔직히 뭔 말 하는지도 모르겠고 쟤가 뭘 한지도 아직 잘 이해되지 않았다.

뭘 알아야 대화하지.

‘그놈의 코인이랑 스킬 포인트가 뭔데…….’

자꾸 준다는데 뭔질 알아야 받지.

애초에 스팬담은 혁명군이 이런 어리숙한 놈을 넣었다는 것이 미묘했다. 다른 건 그렇다 쳐도 로브 루치와 재브라는 그 선동질에 어느 정도 저항했다. 세상에 강자는 많았고 더 센 놈들은 더 쉽게 저항할 수 있다는 의미가 됐다.

“아, 아저씨도 플레이어 맞죠?”

“질문은 나만 할 거다, 아가야. 일단… 너 혁명군이냐?”

“아, 아니에요. 저, 퀘스트 중에 혁명군 가입 퀘스트가 있어서……. 퀘스트 시작 장소로 갔더니 에덴섬을 초토화한 사람을 찾는다길래 도와드리겠다고 한 거라…….”

“설마 또 세뇌같은 거 했냐?”

카이저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혁명군이 존나 뜬금없이 나타난 데다가 애들 둘만 보낸 게 찝찝했는데.

“…내가 거기 불로 태워서 다 청소했는데 어떻게 찾았냐?”

스팬담이 고개를 기울이며 여상하게 묻자 아이가 몸을 잘게 떨었다. 절그럭거리는 사슬에 묶여서도 어떻게든 몸을 꿈틀거린 카이저가 조심스럽게 스팬담을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시스템, 정보 공개…. 스팬담…….”

눈치를 슬쩍 본 아이가 중얼거리자 스팬담의 앞에 뭔가 시스템인지 어쩌고 하는 게 떴다. 스팬담의 얼굴이 와그작 일그러졌다.

‘……정보공, 뭐? 하, 시발.’

하나도 모르겠다. 전혀 모르겠어. 외울 자신도 없었다, 일단 이 모든 상황이 이해되지도 않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세상이 자신을 따돌리는 기분이었다.

 

[직업] 위조꾼(위조직업: 탐정)

[칭호] 플레이어, 선동자, 기만자, 학살자.

[위조꾼 고유 스킬] 선동과 날조(Lv.Max), 거짓 증거(Lv.7)

[탐정 고유 스킬] 인물 일람(Lv.1), 추리(Lv3), 흔적 찾기(Lv3), 다잉메시지.

[퀘스트]

1. 집으로 가는 길

2. 이레귤러 ‘???’을 찾아라!

3. 혁명군의 스파이

 

그야말로 말문이 턱 막혔다.

왜 막혔냐고? 시발, 단언컨대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왜 직업이 있는데 직업이 또 있는지도 모르겠고 칭호가 왜 저런 미친 건지도 모르겠으며 옆에 Lv적혀 있는 영어 쪼가리들은 뭐며, 스킬명은 이해도 안 되고 퀘스트는 더 이해가 안 됐다.

스팬담은 심각한 얼굴로 허공을 바라봤다. 그 모습에 카이저가 꿀꺽 침을 삼켰다. 처음부터 끝까지 눈으로 읽은 스팬담이 다시 시선을 내렸다.

“설명. 직업부터.”

스팬담은 이야기의 설명을 젊고 어린놈에게 떠넘겼다. 이미 머릿속은 뒤죽박죽이었던 탓이다. 다행히 그는 이상한 말을 하지 않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위조꾼은… 말 그대로 상황을 조작하고 선동하고 날조하는 거예요…. 위조 직업은 위조꾼만 특별히 추가 직업을 선택할 수 있고 랜덤이었어요….”

“됐다, 이거 다 상세정보 펼쳐봐.”

설명을 들으니 더 모르겠다. 그래서 듣기 귀찮아졌다.

스팬담의 말에 그가 “상세정보 공개, 스팬담.”하고 중얼거렸다. 아, 정말 모르겠다.

‘왜 나한테 이런 시련이 찾아온 거지?’

고스톱이나 화투나, 그림 맞추기 게임 같은 종류면 오죽 좋아. 아니면 오목이나 마작 같은 것도 나쁘지 않겠군. 하다못해 부르르마블인지 뭔지라도. 가족끼리 다 같이 할 수 있는 그런 친숙한 게임 있잖나.

 

[직업] 위조꾼

선동과 날조하여 상황을 위조하고 범행을 숨기거나 조작합니다. 위조꾼에겐 직업 1개가 추가로 제공되며 해당 직업의 스킬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세상에 혼란을 불러오는 존재입니다.

[위조 직업] 탐정

흔적을 찾아 증거를 바탕으로 사건을 추리하고 추론하여 원하는 정보를 찾아냅니다. 손이 닿으면 인물의 정보를 확인할 수 있으며 작은 증거도 당신에겐 큰 정보입니다. 당신은 진실을 찾아내는 존재입니다.

 

글자를 읽어내리던 스팬담은 멍한 눈을 했다. 검은 건 글씨요 뒤로 보이는 건 홀로그램 어쩌고다…. 스팬담은 휘청거리는 머리를 고정하기 위해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칭호 효과]

[플레이어] [접기]

→ 게임에 참가한 플레이어입니다. 참가비는 1일 1코인입니다. 본 칭호를 가진 자는 시스템을 사용할 수 있고 얼굴을 마주하고 친구 등록을 한 특정 플레이어와 연락할 수 있습니다. 단, 1회당 5,000코인이 소모됩니다.

[선동자] [접기]

→ 선동과 날조 스킬을 MAX까지 찍었을 때 생성되는 칭호입니다. 본 칭호를 가진 자는 최대 10명까지 선동할 수 있고 어떤 증거도 조작할 수 있으며 해당 스킬이 1.5배 강화됩니다.

[기만자] [접기]

→ 당신은 100명의 인간을 거짓말로 속였고 억울한 죽음을 맞이하게 했습니다. 이 칭호가 있는 한 당신은 타인의 거짓말에 속지 않게 됩니다.

[학살자] [접기]

→ 스킬을 이용해 직간접적으로 200명 이상의 인간을 죽였을 때 주어지는 칭호입니다. 이 칭호가 있으면 당신은 같은 학살자를 알아볼 수 있게 됩니다.

 

[스킬 목록]

<위조꾼 고유 스킬>

- 선동과 날조 Lv.Max

▶ 상대의 이름을 알고 상대가 당신의 이야기를 들을 수만 있다면, 사람들은 당신이 무엇을 말하든 말을 진실이라고 믿고 당신을 따릅니다. 당신은 이러한 특성을 이용하여 거짓 증인을 세울 수도 있습니다. 단, 상대의 정신력에 따라 스킬의 효과가 달라집니다.

- 거짓 증거 Lv.7

▶ 증거를 조작하여 진짜처럼 만듭니다. 당신이 만든 증거는 완벽하고 사람들은 그것을 믿습니다. 단, 인과관계를 잘 따지세요. 물에 빠져 사망한 사체 앞에 모닥불을 가져다 놓는 것은 바보 같은 짓입니다. 당신의 증거는 누군가를 범인으로도 범인이 아니게도 만들 수 있습니다.

 

<탐정 고유 스킬>

- 인물 일람 Lv.1

▶ 손을 댄 상대의 인물을 일람합니다. 단, 특정 스킬을 가진 플레이어에겐 통하지 않을 수 있으며, 또한 상대의 정신력에 따라 일람할 수 있는 정보의 양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 흔적 찾기 Lv.3

▶ 희미한 현장 속에서 아주 작은 흔적을 찾아냅니다. 보이지 않거나 눈에 띄지 않는 것도 전부 찾아냅니다.

- 추리 Lv.3

▶ 찾아낸 증거와 인물 일람으로 범인을 추리합니다. 당신은 증거와 증거를 엮어 알아내지 못했던 증거와 추론을 해 결과를 낼 수 있습니다. 단, 거짓 증거와 증인에게 속을 수 있으니 주의하세요.

- 다잉메시지

▶ 죽기 전 활성화 됩니다. 만약 죽인 것이 플레이어라면, 자신을 죽인 상대에 대한 어떠한 힌트를 줄 수 있습니다. 단, 위조 직업으로 얻은 스킬인 경우 ‘처벌’관련 스킬을 가진 자에게 죽었을 땐 해당 스킬이 비활성화됩니다.

 

눈으로 내용을 빠르게 훑은 스팬담이 느리게 고개를 숙였다. 그거 아는가? 눈으로 지나간 글자가 귀로 빠져나가는 느낌 말이다.

‘집에 가고 싶어.’

아버지나 보고 이불이나 덮고 아버지가 사다 주시는 밥이나 먹으며 이불 속에서 도롱이나 말고 잠이나 자고 싶었다. 설명하는 글씨도 깨알 같아서 짜증 났다. 돋보기라도 주던가. 요약설명도 좀 해주고.

‘어쨌든 저 탐정 스킬 이용해서 내 정보를 찾았다는 건가?’

거의 다 불태우고 왔을 텐데 그걸 여기까지 추론한 게 놀랍고도 대단했다. 스킬 뭔지 모르겠지만 멋지네. 그리고 존나게 거슬리고.

스팬담이 시선을 내려 인상을 찡그린 채 눈치를 살피는 카이저를 보았다.

“혹시 이 탐정 직업 또 있냐?”

“아, 아뇨…. 직업은 하나씩이라…….”

“음, 혁명군은 어떻게 꼬셨냐?”

“제, 제가 이나즈마의 오랜 친군데 혁명군 가입 시험을 보고 있다고요…….”

그 아수라 백작을 선동하고 날조했다는 거군. 스팬담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는 고개를 들어 다시 홀로그램 창을 보고 전부 X를 눌러서 꺼버렸다. 더 읽고 싶지도 않았다.

퀘스트는 대충 이브가 말했던 역사 찾기라던가 날 말살하거나 회유하거나 어쩌고나 혁명군 스파이나 되라는 내용이었겠지.

“좋아. 아가.”

“네, 네….”

“코인이 뭐냐.”

스팬담이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예?”

“내가 보다시피 아저씨다. 신문물에 익숙하지 않아. 참고로 칭호랑 스킬포인트도 모르겠다. 일단 그 시스템인지 뭔지에 대해 전부 설명해보도록.”

“네……?”

스팬담의 요구사항에 입을 떡 벌린 카이저가 이해되지 않는 표정으로 입술을 뻐끔거렸다. 그는 당황한 듯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더니 슬쩍 눈치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그, 상세정보를 읽어보시면 좀 쉽지 않을까요?”

“뭐라고 하면 되는데.”

“상세정보요….”

“상세정보?”

카이저에게 되묻기가 무섭게 허공에 홀로그램이 우수수 떴다. 저놈 것보다 한층 더 길쭉한 것이 떠올라 스팬담은 그대로 고개를 돌려 현실을 외면했다.

“혁명군엔 왜 잠입하려고 했지?”

“이레귤러 찾으려고요…. 퀘스트 보상으로 코인을 모아서 코인샵에서 힌트권을 살 수 있는데, 그 힌트권으로 힌트를 받아서 정보를 모아서 찾아내려고 했어요.”

“이레귤러 찾으면 뭐 하려고 했는데?”

“당연히 말살이죠!”

이 싹 바가지 없는 자식.

너도 말살이다. 아가야. 스팬담은 팔짱을 낀 채 생각했다.

“말살하면 무려 100만 코인을 주니까요! 100만 코인이면, 소생약도 살 수 있어요.”

“소생약…?”

“네, 죽어도 다시 한번 살아날 수 있는 약이요. 누구든 만병통치해서 살릴 수도 있고요.”

오, 내 목에 그런 게 걸려 있다는 거구나. 그 말은 내가 가만히 있어도 힌트권을 산 놈들이 언제든 덤벼들 수 있다는 거고. 스팬담은 멍하니 생각했다.

“회유하면 얼마였지?”

“30만 코인이랑 스킬 뽑기권이었잖아요.”

음, 그게 뭔데.

스팬담은 팔짱을 낀 채 해탈한 낯으로 웃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막내가 시킬 때 마비놀리기 좀 해볼 걸 그랬다. 그가 미간을 문지르며 입을 열었다.

“스킬 목록.”

스팬담이 슬쩍 눈치를 살피며 작게 외치자 스킬의 상세 목록이 떠올랐다. 가만히 내용을 읽던 스팬담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코인인지 스킬 포인트인지 다 내놔봐.”

“최, 최소한은 남겨도 될까요? 참가비 지불을 못하면 신체 일부를 가져가니까요…….”

음, 참가비에 신체를 가져가? 뭘 어떻게……? 더욱더 모르겠다.

이해하지 못했지만 스팬담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있는데?”

“5천 코인이요….”

눈동자를 데구루루 굴린 카이저가 말했다. 팔짱을 낀 스팬담이 묘한 낯으로 아이를 내려다보다가 제 스킬창을 한 번 올려보며 입술을 달싹거리곤 치밀어오르는 쪽팔림에 다시 입을 꾹 다물었다.

‘스킬인지 뭔지 머릿속으로는 안 되나?’

차마 입 밖으로 내뱉고 싶지 않았던 스팬담이 미간을 찌푸리곤 생각에 집중했다.

‘스킬, 판별의 눈.’

동시에 스팬담의 눈동자가 푸른빛을 한차례 뿜더니 이윽고 홀로그램 창이 앞에 떠올랐다.

‘오, 뭐야 되네?’

젠장, 지금까지 괜히 입으로 소리를 냈다. 쟤네는 왜 입으로 소리를 내는 거야? 디지몬 진화도 아니고 말이다. 홀로그램이 촤르르륵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글씨를 띄웠다.

 

[System 알림]

[심판자 고유 스킬 ‘판별의 눈’ 발동.]

[판별 결과]

[거짓 판명, 플레이어 10 ‘위조꾼 카이저’의 코인은 현재 50,021코인입니다.]

 

이 어린 친구가 사람 늙었다고 서운하게 속여먹네, 시팔. 스팬담이 한숨을 내쉬었다. 슬슬 피곤했다. 여기도 적당히 정리하고 들어가야겠구나 싶었다.

“50,021코인 중에서 21코인 남기고 다 내놔.”

“어, 어떻게….”

스팬담의 말에 카이저의 얼굴이 낭패감에 젖었다. “거짓 판별 스킬이 있었어요…?” 작게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스팬담은 대답하지 않았다. 좆도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킬 포인트란 놈은 얼마 있는데?”

“그, 그게….”

“봤겠지만, 거짓말해봐야 다 안다.”

“하, 하나씩만 남기면 19개요.”

“내놔.”

카이저가 거의 울 것 같은 얼굴로 꾸역꾸역 고개를 끄덕였다. “스킬 포인트, 코인 양도.”라고 중얼거리자 뭔가 허공에 알림 같은 게 떴다. 돈 들어왔단 얘기다.

스팬담이 빠르게 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서 스킬 목록을 보고 다시 속으로 외쳤다.

‘스킬, 판결의 천칭.’

하, 시발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오글거려.

‘젠장, 사람 살려.’

내가 이 나이 먹고이래야겠느냐고.

스팬담의 억울함과 우울함과는 다르게 생각이 끝나기가 무섭게 카이저의 머리 위로 은빛의 천칭이 생겨났다. 정확히 균형을 이루고 있는 천칭이었다.

 

[스킬 목록]

<심판자 고유 스킬>

- 심판

- 판결의 천칭

▶ 상대의 죄를 판결합니다. 시전자는 해당 인물의 선행과 악행 목록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단, 선악의 판별이 애매한 것은 심판자가 직접 천칭에 올려두어야 합니다.

- 판별의 눈

 

스팬담은 제 안내문의 설명을 보다가 다시 아이의 머리 위에 있는 천칭을 보았다. 천칭은 그에게만 보이는 게 아닌 듯 카이저도 눈을 크게 뜨곤 몸을 이리저리 비틀기 시작했다.

눈앞에 홀로그램 창 두 개가 생성되더니 악행과 선행의 목록이 쭉 늘어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잠깐 균형을 이루던 천칭이 곧 왼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왼쪽으로 기울수록 은빛을 뿜던 천칭의 색이 점점 붉게 변했다.

스팬담도 제 눈앞에 생성된 홀로그램에 쌓이는 온갖 악행을 보며 입을 떡하니 벌렸다. 선행 쪽은 몇 줄 지나지 않아 멈춘 게 보였는데 악행은 멈출 기미가 없었다.

이윽고 천칭이 완전히 새빨갛게 물들고 나서야 목록이 갱신되는 것도 멈췄다. 스팬담은 멍하니 그 목록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너……, 사람을 왜 이렇게 많이 죽였냐?”

목록에 있는 연령대도 다양했다.

겨우 3살짜리 어린아이부터 노인들까지. 전부 선동과 날조 스킬에 의해 타인을 이용한 간접적인 살인이었다.

“사람이요? 에이, 게임 캐릭터를 죽였을 뿐이에요. 코인을 벌어야 하니까요. 아저씨는 몇이나 죽였어요? 에덴섬에서도 스킬 써서 죽인 거죠?”

카이저가 태연자약하게 말했다. 조금의 죄책감도 없어보이는 목소리에 스팬담이 멍한 낯으로 아이를 내려다봤다가 다시 목록을 눈으로 훑었다.

부모가 아이를 죽이게 했다, 사실은 자기가 진짜 아이라고 선동하고 날조해서. 그다음엔 스킬을 풀어 정신이 돌아온 부모가 자살했다. 거짓 증거를 날조해서 신실한 이를 마녀로 취급하고 남편이 아내를 죽이게 했고 아내가 아이를 죽이게 했다.

“아니…. 이렇게 끔찍하게 죽인 이유가 뭐야? 코인이 필요했으면 그냥 죽이면 되잖아. 굳이… 사람을 이렇게, 속여가면서…….”

“에이, 그편이 더 재밌잖아요. 그리고 스킬 써서 죽여야 칭호도 얻어요. 나중에 대량학살자도 얻으려고요.”

밑바닥은 볼 만큼 봤다고 생각했다. 전생에도 현생에도 높은 곳, 더러운 곳, 뒷세계, 암약 기관 따위에 있으면 별의별 꼴을 다 보니까 말이다.

그런데 이건…….

이건 그런 문제가 아니다.

그렇다고 아이의 탓이라고도 할 수 없었다. 이 어린놈은 그저 이 세계 전부가 ‘게임’이라고 생각해서 그냥 몬스터 때려잡듯 인간도 사냥한 것이다. 어디까지나 이 세계를 ‘게임으로서’ 즐기고 있는 것이었다. 흔히 몬스터를 사냥해서 레벨 올리는 것처럼 말이다.

속이 역했다.

드물게도 토할 것 같은 기분에 스팬담은 시선을 돌려 숨을 들이켰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왜냐하면, 스팬담에겐 이 세계가 실재고 사실이며 현실이었다. 이 세계에 있는 모든 것이 그의 삶을 구축하고 있는 모든 것이었으니까 말이다.

스팬담은 한참의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한 가지 궁금한데… 혹시 너희를 이 세계로 데리고 온 게 누구냐?”

“아저씨 이상한 걸 물으시네요? 아저씨도 봤잖아요. 시스템!”

카이저는 스팬담이 꽤 편해졌는지 재잘재잘 떠들었다. 스팬담이 눈을 깜빡였다. 해맑은 이 아이가 죽인 인간의 수가, 그것도 자신은 쏙 빠지고 타인의 죄로 만들어 죽인 인간의 수가 4백을 넘었다.

머리가 아찔했다.

“시스템이 널 불렀다고?”

“네, 시스템이 저한테 직업도 고르게 하고 설명도 해줬어요.”

“형태나 이름은 없었나?”

“딱히요? 아, 이름은 있었어요. 페르토!”

카이저가 전하는 썩 낯설지 않은 이름에 스팬담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가 순간 헛웃음을 터뜨렸다.

 

[Quest 알림] [개인 퀘스트]

[이레귤러 ‘심판자 스팬담’은 플레이어 0 ‘설계자 페르토’를 찾아 그의 존재를 지워 세계를 지키세요.]

 

그러고 보니 그런 퀘스트가 있었지. 스팬담에게만 주어진 퀘스트였다. 그는 여전히 머릿속이 멍했다. 그저 조용히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스킬창을 올려다보니 한숨밖에 나오질 않았다.

 

[스킬 목록]

<심판자 고유 스킬>

- 심판

▶ 죄인에게 심판을 내립니다. 판결받지 않았다면 효과가 반감되지만, 판결받은 상대에게는 반드시 명중합니다. ‘판결’이 ‘악’으로 나왔을 경우 죄의 무게에 따라 효과가 배가됩니다. 단, 천칭이 붉게 물든 경우 죄인은 즉시 소멸합니다. 판결이 ‘선’으로 나왔을 경우 선행의 크기에 따라 효과가 감소합니다. 단, 천칭이 파랗게 물든 경우 상대는 타격받지 않습니다.

- 판결의 천칭

- 판별의 눈

 

스킬 내용을 읽은 그가 짜증스럽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도대체가 영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에게는 하나뿐인 가족이 있는 세계인데, 누군가에게는 코인을 벌기 위한 게임 장소라니 말문이 막혔다.

‘시스템은… 설계자가 만들지.’

그래, 플레이어 0이라는 것부터가 찝찝했다. 그 말은 아마도 이 어처구니없는 일을 벌인 장본인이 바로 플레이어 0일 것이다. 스팬담이 가볍게 입을 열었다.

“야, 너 진짜 이름이 뭐냐?”

“네?”

“카이저 말고 실제로 쓰던 이름.”

“아…, 알베르토요.”

“……뭐야, 외국인이었냐?”

“하프에요. 한국계 미국인.”

아이가 어깨를 으쓱이곤 킬킬거리며 대답했다. 스팬담이 퍽 말간 눈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이게 4백 명을 죽인 인간이라고.’

말문이 턱 막혔다.

그는 이미 축축하게 젖은 붕대로 제 뺨을 가볍게 문질렀다.

“아저씨, 우리 파티 맺을까요?”

“…그건 또 뭔데.”

“같이 정보도 공유하고 퀘스트도 같이 깨고 하는 거요. 아저씨는 직업이 뭐예요? 저런 부하들도 있고.”

악다구니처럼 소리치던 녀석는 어디로 갔는지 상황에 금세 적응한 카이저는 퍽 그 또래의 아이처럼 얘기하기 시작했다. 스팬담은 쏟아지는 피로감에 짧은 숨을 뱉었다.

“넌, 어쩌다 여기로 왔냐?”

“아……, 자살했는데 여기로 왔어요.”

“…자살?”

“네, 아. 따돌림이요. 인종차별도 있었고요. 외국은 그런 게 좀 심하거든요. 거기에 아빠 사업도 망해서… 맨날 맞다가 죽을 것 같아서 그럼 알아서 죽자는 생각이 들어서…….”

참담한 얘기를 하면서도 알베르토는 퍽 즐거운 낯으로 씩 웃었다. 스팬담은 담배가 당기는 것을 꾹 참았다. 손이 병신이라서 도통 담배를 꺼내 물 수도 라이터를 켤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냥 속만 타들어 갔다.

“그랬더니 이 세계인 거에요! 재밌어요. 아무도 절 무시하지 않고 제가 강자인 세계.”

스팬담이 그러냐, 짧게 대답하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사람에겐 각자의 사정이 다 있는 법이지. 누군가는 살고 싶었던 내일이, 누군가에겐 지옥 불에 타들어 가는 고통처럼 느껴질 수도 있었다.

그래, 선택은 자유다. 그리고 그 자유로운 선택에 대한 대가 역시 스스로 치러야겠지. 스팬담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서 아저씨 직업이 뭔데요?”

“심판자.”

“아하, 심판…… 어, 그건. 이레귤러의…….”

질문에 담백하게 대답해주자 중얼거리던 아이가 눈을 크게 뜨더니 순식간에 새하얗게 질려 스팬담을 보았다. 그는 고문당했던 철제 의자에 멀거니 앉아 시시각각 변하는 알베르토의 얼굴을 보았다.

스팬담이 몇 번일지 모르는 한숨을 또다시 내쉬었다.

“저, 저 안 죽일 거죠? 사, 살려준다고 하셨잖아요! 저, 비, 비밀로 할 테니까…….”

알베르토가 벌벌 떨면서 말했다. 스팬담은 느리게 입을 열었다.

“난 살려준다고 안 했다. 아가야.”

“무, 무슨 소리야! 했잖아요! 아까!”

“내가 하는 질문에 말 잘하면 네가 편해진다고 했지. 편하게 죽여줄 생각이었다.”

스팬담이 담담하게 말했다. 애초부터 살려 보낼 마음은 없었으니까 상황 자체가 변하진 않았지만, 이렇게 되니 괜히 뒤만 찝찝해졌다.

정말, 장관직 더는 못 하겠다.

스팬담이 생각하며 손등으로 미간을 꾹 눌렀다.

“말장난도 유분수지!! 장난치지 마!! 나 죽이면 다잉메세지로 당신 정체 다 폭로해버릴 거니까!!”

“해봐.”

“뭐라고요?”

“기회 줄 테니까 해보라고. 근데 아마 활성화가 안 됐겠지?”

직업 이름부터 심판자니까 말이다. 처벌 관련 스킬을 가진 사람에겐 사용할 수 없다고 했고 말이다.

덧붙인 스팬담의 목소리에 새하얗게 질린 알베르토가 제 스킬창을 확인하는지 허공을 보더니 이윽고 삐걱삐걱 고개를 그에게로 돌렸다. 고개를 내젓는 알베르토를 보며 스팬담이 입을 열었다.

“원래 거짓말할 땐 벌 받을 각오도 했어야지.”

“웃기지 마!! 나는!! 나, 나, 아, 아저씨. 나 차라리 그럼 등장인물로 만들어줘요. 할 수 있잖아요, 네? 제발…….”

“몰라, 할 줄도 모르고 알아도 해줄 마음도 없다.”

“이 거짓말쟁이!! 살려준다고 했으면서!!”

절규하는 소년을 보며 스팬담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는 아주 느리게 다시 알베르토에게 시선을 돌려 입을 열었다. 서늘하게 가라앉은 라벤더색 눈동자가 유독 시렸다.

“그러게, 거짓말이 꽤 아프지 않냐? 하물며 난 까놓고 말장난에 가까웠는데 말이다. 왜냐하면 넌 거짓말에 속지 않을 수 있는 스킬이 있는데도 나한테 속았잖냐.”

말 그대로 스팬담은 그를 편하게 보내줄 생각이었다. 괴롭히거나 고문하는 취미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말이다.

그러나 아이는 제 말이 들리지 않는지 혼잣말로 계속 중얼거렸다.

“어떻게 거짓말을 할 수가…….”

“너는 왜 그랬냐, 사람을 4백 명이나 속여서 죽이고 말이다.”

“나는 사람이고 그것들은 게임 캐릭터잖아!!”

스팬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알베르토가 비명처럼 소리쳤다. 악을 쓰는 얼굴에 공포와 두려움과 더는 감당할 수 없는 억울함이 있었다.

“너한텐 캐릭터냐? 나한텐 지켜야 할 시민이다. 멀쩡히 살아있는 사람이라고.”

“무슨 소리야? 하하하! 게임에 미쳐버린 거야?! 아저씨 진짜 돌아버린 거냐고! 이건 게임이야! 현실이 아니라고!”

녀석이 악바리를 쓰는 것을 더 견디지 못하고 나는 삐걱거리지만 슬슬 움직이기 시작하는 손으로 붕대를 거칠게 뜯어내고 아이의 멱살을 붙잡아 잡아당겼다.

“알베르토, 잘 들어라.”

“뭐, 뭘….”

“난 여기서 태어나서 여기서 자랐다. 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새끼야! 여긴 살아있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계야! 네놈이 말하는 게임 속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거다!!”

“……무, 무슨 소리야. 기어코 미쳤어? 하, 여기가 왜 게임이 아냐. 아저씨 대체 뭐야? 태어나고 자랐다고? 기억 조작 스킬에라도 당했어? 아니면 무슨 NPC야?”

“…멍청한 놈.”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알베르토를 스팬담이 내동댕이치듯 던졌다.

“스킬, 심판.”

더 할 말이 없다고 판단한 스팬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창고 안에서 콰아앙-! 거대한 번개가 내리쳤다. 창문이 깨지고 사방에 폭풍이 일었다.

아이는 단말마도 내지 못했다. 아마 죽는 줄도 모른 채 죽었겠지.

 

[System 알림] [전체공지]

[플레이어 10 ‘위조꾼(탐정) 카이저’가 이레귤러 ‘심판자 ???’에게 사망하였습니다.]

 

스팬담은 강제로 움직인 충격에 벌벌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마구 문질렀다. “장관!” 밖에 있던 애들이 뛰어들어와 안을 보곤 눈을 크게 떴다. 스팬담이 웃으며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무슨 일입니까?”

“아아…, 심문 좀 했다고 자폭했다.”

스팬담이 매캐한 탄내가 나는 창고를 천천히 나서며 입을 열었다. 재브라가 언제 가져왔는지 두툼한 코트를 어깨에 걸쳐주었다. 스팬담이 더듬더듬 담배를 입에 물었다. 로브 루치가 손을 뻗어 불을 붙여주기에 쓰게 웃었다.

“얘들아, 여기 전부 태워서 흔적 지워버려라. 혁명군은?”

“블루노와 카쿠가 연행했습니다.”

“아아.”

한 걸음 내디딘 스팬담이 크게 휘청거리자 멀찍이 있던 후쿠로가 빠르게 스팬담을 잡아채더니 그대로 들어 올렸다.

“후쿠로?”

“병원까지 가겠다는 거다.”

스팬담이 낮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냐, 부탁한다.” 덧붙이자 “챠파.”하는 짧은 대답이 들려왔다. 그가 빠르게 허공을 도약했다. 재브라가 그 뒤를 쫓았다.

멍하니 업힌 채 담배를 피우던 스팬담이 띠링- 작은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Quest 알림] [칭호 퀘스트]

[당신은 플레이어 학살자에 근접했습니다. 총 3명의 플레이어를 죽여 ‘플레이어 학살자’ 칭호를 획득하세요. 단, 해당 칭호를 얻는 순간 모든 플레이어가 당신을 적대할 수 있습니다. (2/3)]

 

하, 모르겠다.

그래도 대충 스킬의 사용법과 설명을 보는 법 같은 건 알아냈다. 나머진 이것저것 만져봐야겠지만, 가장 중요한 건 이딴 게 없이도 잘 살아갈 수 있는 평온한 일상이었다.

‘글러 먹은 것 같은데.’

이게 부디 기우이길 바랄 뿐이다. 가물가물한 눈을 막 감으려고 할 때 칭호 퀘스트인지 뭔지 위로 또 알림이 떴다. 아니, 일상생활 좀 가능하게 해주세요.

 

[System 알림] [전체공지]

[플레이어 0 ‘설계자 페르토’가 설계자 고유 스킬 <플레이어 소환>을 사용합니다.]

[랜덤 주사위가 돌아갑니다.]

[숫자는 2]

[총 2명의 플레이어가 새로 참가할 예정입니다.]

 

허?

스팬담이 멍하니 고개를 젖힌 채 바라봤다. 무슨 플레이어를 또 뭘 한다고? 저 미친 새끼는 왜 자꾸 젖비린내 나는 애들을 끌어들이고 난리냐.

헛웃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설계자 페르토.’ 실제로 어디에 존재하는 놈이긴 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저놈이 이 세계에 ‘게임’이니 뭐니 하는 이름을 붙인 게 분명했다.

그리고 병원에 도착할 때쯤 또다시 알림이 떠올랐다.

 

[System 알림] [전체공지]

[플레이어 31 ‘악신 우르바노’가 게임에 참전합니다.]

[플레이어 32 ‘수호천사 라파엘’이 게임에 참전합니다.]

 

스팬담이 이마를 짚었다.

‘우르바노…?’

영 찝찝한 이름이다. 특히 전생의 형님이 가지고 있던 세례명과 같은 부분이 말이다. 스팬담이 뺨을 긁적이곤 한숨을 내쉬었다. 알림창에 시야가 방해될 정도다.

‘이거 좀 끄는 방법은 없나.’

슬쩍 눈치를 보며 X를 누르려고 손을 뻗는데 또 뭐가 떴다.

 

[Quest 알림] [칭호:신살자(神殺者) 전용 퀘스트]

[설계자 페르토의 고유 스킬 ‘강제력’에 의해 새로운 신이 출현했습니다. 이 칭호를 가진 당신은 신을 죽일 수 있는 존재입니다. ‘악신 우르바노’를 죽이거나 회유하거나 혹은 원작에 편입시키십시오. ‘악신’은 자신에게 위협이 되는 존재를 그냥 두지 않을 것입니다.]

 

아, 기절하자.

스팬담이 담배를 피우며 꾹꾹 부여잡고 있던 이성 줄을 놓았다. 그가 툭, 고개를 떨궜다.

“장관? 챠파앗! 장관이 기절했다는 거다-!”

호들갑을 떠는 후쿠로와 재브라가 속도를 높여 순식간에 병원 안으로 들어갔다.

 

**

 

“이쪽입니다, 장관.”

“어어…, 고맙다. 출근길 정도는 나도 아는데 말이다.”

스팬담이 만반의 경계를 하는 꼬맹이들을 보며 허허 웃었다.

전치 4주의 진단받고 병원에서 생활한 지 한 달…. 스팬담은 드디어 퇴원했고 출근을 하는 중이었다.

혁명군에게 납치당했다는 얘기를 들은 아버지가 밤새가며 혁명군 지부 하나를 찾아내 이지스 제로와 함께 쳐들어가 개 박살 냈다는 소식은 이제 즐거운 추억담이 되었다.

‘…는 무슨.’

머리 아파.

게임이고 뭐고 일단 다 모른 척하고 있었다. 알림도 한참 시스템을 만진 끝에 뜨지 않게 바꿔버렸다. 한동안은 진짜 아무런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입원해있는 내내 누가 쫓아오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반, 그래도 번갈아 가면서 호위를 서주는 애들에게 고마운 마음 반이었다. 문제는 장관을 관둔 다음이다.

‘내가 얌전히 지낸다고 시스템인지 뭔지가 날 가만히 놔둘까?’

아니다.

전혀 그럴 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여길 떠나서 돌아다니는 게 옳은가? 그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스팬담은 힘이라곤 좆도 없기 때문이었다. 있는 것은 깡과 오기와 쪽팔린 스킬뿐이었다.

그러면 여기에 있는 건 옳은가? 시바알, 그것도 절대 아니다.

미래가 어떻게 될지 알 게 뭐냐만 일단 이 악덕 기업은 퇴사하고 싶었다. 몸이 남아나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말단 노릇은 역시 싫다.

‘감투도 안 맞지만, 말단 노릇은 더 안 맞지.’

애들이 자신을 얼마나 좋아해 주던 그건 뒷전인 문제다. 잘해줘도 문제가 못 해줘도 문제다. 장관 대접하듯 잘해주면 그건 기강의 문제가 못 해주면 이쪽이 괜히 서운하다.

‘내 살길은 알아서 찾아야지.’

애들에게 기대려고 하면 쓰나.

‘그래도 이제 한 반년 남았나…?’

빠르다면 빠르고 길다면 길었다. 별의별 일이 다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즐거웠다. 악덕 기업은 거지 같지만, 애들은 썩 싫지 않았다. 아니, 좀 좋았나?

‘다음 장관이 괜찮은 놈이면 좋겠네.’

스팬담이 납치당했다는 얘기를 들은 스팬다인이 드디어 스팬담에게 장관 후보를 추천해주었다. 오늘부터 출근해서 자신을 따라다니며 인수인계를 받고 천천히 적응할 예정이었다.

“오늘도 데리러 와줘서 고맙다, 루치, 카쿠.”

스팬담이 두 아이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곤 문을 열고 집무실로 들어갔다.

“요요이~!! 조옿은 아침이도다~~ 장관니임~”

“요, 쿠마도리. 좋은 아침.”

“거, 퇴원 축하합니다. 몸은 좀 괜찮수?”

“너희가 맨날 와서 돌봐준 덕분에 살만 뒤룩뒤룩 쪘다.”

스팬담이 키득키득 웃으며 소파에 털썩 앉았다.

그러자 블루노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디저트를 가지고 나왔다. 기실 스팬담이 입원했던 동안 아예 움직이지 못하는 걸 기회 삼아서 그의 살을 찌운 게 블루노와 칼리파였다. 간식을 포함해서 하루 다섯 끼는 먹었던 것 같다.

“이거 퇴원했는데도 먹는 거야?”

“취향이 아니십니까?”

“아니, 그건 아닌데… 매번 힘들지 않냐? 나 그리고 여기서 더 찌면 배불뚝이 아저씨 된다. 그건 좀…….”

“장관, 간신히 예전 체형이라네.”

타박하는 카쿠의 말에 스팬담이 뺨을 긁적였다. 그간 몸이 좀 가벼워서 좋았는데 어쩐지. 다시 무거워졌더라. 블루노와 칼리파의 집념을 이길 자신은 없어서 순순히 푸딩을 떠먹었다.

음, 커피 푸딩 맛있다.

“탱탱하고 젊은 너희들이랑 다르게 아저씨가 돼서 살찌면 보기 싫어진다. 배부터 늘어진다고. 그러잖아도 너희보다 10년은 빨리 늙을 텐데….”

스팬담이 커피 푸딩을 먹으며 말했다. 후쿠로가 챠파파파! 커다랗게 웃음을 터뜨렸다. 어린애처럼 먹으면서 불만스럽게 말하는 게 퍽 웃겼던 탓이다.

“장관은 정말 말과 행동이 다르네요.”

“……왜 칼리파한테 이런 말을 들으면 항상 심장이 아플까?”

스팬담이 심장을 부여잡으며 말하다가 “아.” 낮게 탄성을 뱉으며 시선을 푸딩에 둔 채 느리게 입을 열었다.

“그리고 오늘부터 사람 하나가 더 올 건데….”

“아으으, 새 요원이~~ 오는 것이오~~?”

“아니, 내 후임.”

짤막하게 대답하자 키득거리던 애들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스팬담이 커피 푸딩을 마저 긁어먹고 슬쩍 고개를 들었다. 로브 루치의 고요한 시선과 시선이 마주쳤다. 스팬담이 접시를 내려두곤 뺨을 긁적였다.

“앞으로 반년 동안 나랑 다니면서 적응도 하고 인수인계도 받을 거야. 한 3개월은 내가 전적으로 일하고 그 뒤부턴 조금씩 넘기면서… 후임이 일하는 거 봐주고 괜찮으면 나랑 반반 나눠서 출근할 예정이고…….”

스팬담은 느릿느릿 말했다.

뭐, 미리 예견되어 있던 일이긴 하지만 이렇게까지 침울한 기운을 풍겨대면 난감하긴 했다. 얼굴이야 무표정인데 일 년 반쯤 되면 표정 따윈 안 봐도 알 수 있는 게 있었다.

“새 후임은 육식도 조금 할 수 있다더라. 뭐, 당연히 너희만큼은 아니겠지만 최소한 철괴랑 체랑 월보 정도는 조금 한다더라고. 아버지랑 장관 후보를 겨뤘던 분의 아들이라고 하고…, 성적 보니까 머리도 좋은 데다가 쿠마도리랑 동갑이라 나이도 너희랑 좀 맞을 거다.”

스팬담이 드물게도 구구절절 말을 늘어놨다. 그가 제 목덜미를 꾹꾹 눌렀다. 손가락 관절이 찌르르 아려왔다. 아직도 후유증이 남은 탓이다. 여전히 아무도 말을 하지 않고 있었다. 스팬담은 침묵을 깨기 위해 가벼운 농담이나 던질까 고민하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알잖냐, 나는 너무 약해.”

그가 뒷머리를 긁적였다. 제게 꽂힌 시선들이 퍽 무겁게 느껴졌다. 스팬담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물론 너희가 지켜줘서 그게 다 커버되고 있긴 하지. 근데 장관이라는 게 말이다, 최소한 잘 도망치든 맷집이 좋든 뭐라도 해야 하지 않겠냐. 서류 처리를 백날 잘해도 너희한테 걱정만 끼치면 좀. 아버지도 최소한의 무력은 가지고 계시고…….”

구구절절 변명만 되어가는 것 같았다. 말을 이따위로 밖에 못 하는 스스로에게 조금 화가 났다. 스팬담이 짜증스럽게 머리를 흩뜨렸다. 그가 흘긋 눈치를 살피곤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 미안하다. 이 자리가 말이다, 내가 짊어지고 있기엔 좀 무거운 것 같다. 그러니까 후임 오면 잘 지내보려고 해주면 좋겠다.”

해야 할 말을 다 끝낸 스팬담이 어색하게 웃으며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소파를 빙 둘러 나가다가 멈칫하곤 마저 입을 열었다.

“그래도, 너희랑 연을 끊겠다거나 이런 건 아니니까 언제든 시간 나면 놀러 오고 그래. 대환영이니까. 내가 장관이든 아니든 너흴 좋아하는 건 여전해. 그러니까 장관 말고 친구 해줘.”

“…나이 차이를 알고 계시나요? 양심도 없네요.”

칼리파가 퍽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에 스팬담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래도 답이라도 해주는 게 어딘가 싶어서였다.

“친구에 국경이니 나이가 어디에 있겠냐. 그으럼…, 난 이웃집 아는 아저씨도 괜찮고…….”

“그건 뭔가 어감부터 변태 같다네.”

“…칼리파랑 자주 다니더니 카쿠가 싸늘해진 것 같은데.”

스팬담이 소파 등받이를 붙잡곤 휘청거렸다. 흘긋 보니 그래도 그렇게까지 어두운 표정들은 아니었다.

“뭐, 버겁다는데 어쩌겠습니까. 하는 수 없지. 술이나 많이 준비해두쇼.”

“…오냐, 살림 털어서라도 고오급 술만 준비해두마.”

“브랜디도 준비해주십시오.”

“……어어, 그래.”

스팬담이 미간을 엄지로 문지르며 대답했다. 내 통장 괜찮은 거 맞지? 목덜미를 가볍게 만지곤 그가 책상으로 휘적휘적 걸어갔다. 스팬담이 막 펜을 들어 올리자 후쿠로가 쓱 다가와 입을 열었다.

“장관. 출입구 작으면 안 된다는 거다, 챠파파.”

“그으래, 알겠다. 어차피 나도 독립할 거라서 집 하나 새로 지을 거였으니까 아주 맞춤형으로 지어주마.”

“요요이!! 설계도가 나왔소이까~?”

“아니, 이제 의뢰해야지.”

“그럼 같이 설계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소이다~~”

쿠마도리의 말에 블루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좋을 것 같다.”로 시작해서 아주 온갖 본인들 취향이 나오기 시작했다. 스팬담이 제 예산을 훌쩍 넘어가는 이야기를 들으며 미간을 문질렀다.

‘……아버지한테 빌어야겠냬.’

제 돈만으로는 어떻게 해결이 안 될 것 같았다. 열기가 썩 가라앉지 않아서 스팬담은 결국 서류를 옆으로 치우고 빈 종이를 하나 꺼내 들었다.

“…말해봐라, 적게.”

애들 의견 몇 개 넣어주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그래도 집 나가면 인연 끊지 않겠다고 하는 게 어딘가 싶었다.

“마당이 좀 넓으면 좋겠네요. 앞마당이나 뒷마당 전부요. 뒤에선 대련하면서 몸이 녹슬 일도 없을 테고요.”

“방마다 욕실도 하나씩 있으면 좋겠구먼~”

“으음, 그래. 방은 한 세 개면 되려나?”

“에엥? 뭔 소립니까? 사람이 8명인데 8개는 되어야죠. 손님방까지 할 거면 9개.”

스팬담이 가만히 적고 있다가 인상을 찌푸렸다. CP9의 인원이 8명인 건 알겠다. 근데 그래서 왜 제집의 방이 8개가 되냔 말이다. 스팬담이 엄지로 미간을 가볍게 문질렀다.

그러거나 말거나 저 꼬맹이들은 본인들 취향 얘기하느라 바빠 보였다.

“거실도 좀 넓어서 소파랑 있으면 좋겠다는 거다, 챠파파. 모여서 게임을 할 거라는 거다!”

“그러면 게임들 넣어둘 장식장도 하나 마련하면 좋겠구먼.”

“주방은 좀 넓었으면 좋겠습니다.”

“아으으~~!! 본인의 방은 그으~~ 다다미가 좋소이다~~”

줄줄 써 내려가던 스팬담이 이윽고 한 페이지를 다 채웠을 때쯤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어이, 이 귀여운 자식들아.”

“뭡니까, 장관.”

계속 조용하던 로브 루치가 언제 가져갔는지 종이와 펜을 내게 돌려주며 말했다. 스팬담이 그걸 받아 내용을 보곤 헛웃음을 흘렸다.

본인 요구사항을 아주 깔끔하게도 적어놨다. 스팬담이 흔들리는 눈으로 로브 루치를 봤다가 그가 쓴 내용을 보고 다시 그를 보았다.

“나는 분명히 내 집을……, 만든다고 했던 것 같은데, 아닌가?”

“그랬습니다만.”

“근데 왜…, 한 사람당 방 하나를 배정하는 것처럼 얘기하고 있냐?!”

“그야, 잠을 자려면 방이 있어야 하지 않나요?”

칼리파의 말에 스팬담이 웃는 얼굴 그대로 뺨을 바르르 떨었다.

“그러니까 왜 내 집에서 살 것처럼 말하냐고!!”

“뭔 소립니까? 살진 않을 겁니다. 그냥 일주일에 다섯 번 정도만 자러 가는 거지.”

그게 그 말이라는 걸 시발 왜 모르는 거야. 스팬담이 무슨 말을 해도 전혀 들어 먹을 것 같지 않은 그들을 보곤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가 빈 종이를 일곱 장 꺼내 하나는 빼두고 나머지 여섯 장은 앞에 있는 로브 루치에게 내밀었다. 로브 루치가 받아 들더니 스팬담을 바라봤다.

“각자 여기다 바라는 걸 정리해올 것. 너무 중구난방으로 말해서 정리가 엉망이다. 종이 반으로 접어서 본인 방에 바라는 건 위에 적고 아래엔 그 외에 거 적어.”

한숨을 푹 내쉰 스팬담이 말을 이었다. 그러자 재브라가 냅다 튀어와 로브 루치의 손에서 종이를 낚아챘다.

“알겠습니다~”

“…이럴 때만 빠르지.”

종이를 하나씩 나눠 가지는 것을 보며 스팬담이 낮게 웃었다. 턱을 괴고 보고 있으려니 퍽 보기 좋은 풍경이었다. 로브 루치가 그런 스팬담을 힐긋 보곤 눈을 가늘게 떴다.

평화로운 하루였다.

 

**

 

“리비아, 추운데 밖에서 뭐 하고 있어?”

“아…, 으음…. 저번에 했던 얘기지 뭐. ‘심판자’를 찾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어.”

난간에 턱을 괸 여자를 보며 붉은 머리의 사내가 낮게 웃었다. 그가 제 망토를 여자의 어깨에 둘러주곤 그 어깨에 팔을 두르곤 가볍게 제 쪽으로 잡아당겼다.

“뭐어~ 너무 조급해하지 마.”

“…퀘스트 때문에 당신들 앞길 방해하는 것 같아서 돌아버릴 것 같아.”

“그렇다고 안 할 수도 없잖아.”

붉은 머리의 사내가 여자의 몸을 가볍게 돌리며 말했다. 죽어버린 듯 탁해져서 색을 잃은 한쪽 눈은 이미 눈으로서 기능하지 못하고 있었다.

“너는 이 세계에 있기 위해선 ‘대가’를 내야 하니까 말이야.”

“……뭐, 대체 어디에 숨어있는 걸까. 근데 찾아도 문제긴 해. 플레이어를 둘이나 죽였으니까… 내 부탁을 들어줄지도 모르겠고.”

“그 부분은 뭐, 우리가 있잖아. 걱정하지 마. 강제로라도 하게 만들 테니까.”

그의 말에 여자가 낮게 웃음을 터뜨리곤 까치발을 떼 붉은 사내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 간지러운 입맞춤에 그가 낮게 웃으며 화답하듯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당신을 만나지 않았다면, 나도 분명히 어딘가에서 이 세계를 여전히 장난이라고 여기며 사람이나 죽이고 있었겠지.”

설핏 미간을 찌푸린 그녀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정보가 전혀 없으니 뭘 할 수가 없었다.

“기껏 코인 주고 산 힌트권에서 나온 말은 이런 거고 말이야. 가챠도 정도껏 해야지 장당 3천 코인이나 하면서 중복도 있을 수 있는 게 말이 돼?”

그녀가 트럼프 카드 같은 것을 허공에서 꺼내더니 한 손으로 쥐어 여러 장을 사내의 눈앞에서 촤르륵 펼쳐 보였다.

“큰맘 먹고 코인의 반이나 투자했는데 말이야.”

총 7장이었으나 쓸모 있는 건 거의 없었다.

 

[‘심판자’는 위대한 항로에 존재한다.]

[‘심판자’는 재산이 많다.]

[‘심판자’는 3개의 퀘스트를 진행 중이다.]

[‘심판자’는 낙원의 어딘가에 있다.]

[‘심판자’는 재산이 많다.]

[‘심판자’는 현재 퇴사하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다.]

[‘심판자’는 ‘칭호: 플레이어 학살자’ 퀘스트를 진행 중이다.]

 

심지어 하나는 중복이라고 투덜거리던 그녀가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 같은 건 알고 싶지도 않다고. 꿍얼거리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흩어준 사내가 카드 중 두 장을 뽑아가며 입을 열었다.

“뭐, 그래도 낙원으로 범위가 줄어든 건 다행인 일이지.”

“그것도 뽑은 시점 기준이니까 언제 바뀔지 모르잖아.”

“뭐, 그래도 퇴사하고 싶다는 건 어딘가에 일을 다니고 있다는 거니… 쉽게 움직이지 못하지 않을까?”

“그러네. 낙원에 있다는 거 하나랑 플레이어 학살자 칭호 얻기 직전이라는 건 건졌네…….”

여자가 다시 고개를 돌려 난간에 팔을 얹고 턱을 괴었다. 피곤한 낯으로 그녀가 눈두덩을 가볍게 비볐다.

“칭호 얻으려는 중이면 날 더 가만두지 않을 것 같은데.”

“으음~, 의외로 착한 놈일 수도 있잖아?”

“사람을 둘이나 죽였는데…? 다들 게임에 미친 거야. 이런 게임 얼른 벗어나고 싶어. 그리고 심판자 때문에 위조꾼 추적하는 퀘스트도 자동 취소됐고…….”

그녀가 우울하게 중얼거리곤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붉은 머리의 사내가 냉큼 그녀를 안아 들어 난간에 앉히곤 그녀를 마주 봤다. 그가 웃는 낯으로 입을 열었다.

“우리 정보상께서 왜 이렇게 또 침울해지셨을까.”

“…….”

“걱정하지 마, 리비아. 찾기만 하면 내가 어떻게든 해줄 테니까.”

가볍지만 진중한 목소리에 그녀가 설핏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바람이 조용히 불어닥쳤다. 바다를 바라보던 그녀의 눈이 순간 커졌다

 

[System 알림] [전체공지]

[플레이어 31 ‘악신 우르바노’가 악신 고유 스킬 <악의 제전>을 사용합니다.]

[‘악신교’가 창설되며, 신도 모집이 시작됩니다. 악신의 신도에게는 악신의 가호가 주어집니다.]

[플레이어 31 ‘악신 우르바노’가 악신 고유 스킬 <악신의 눈>을 사용합니다.]

[‘악신 우르바노’가 ‘심판자 ???’을 적으로 규정합니다. ‘악신 우르바노’가 ‘용사 나르바’를 적으로 규정합니다. ‘악신 우르바노’가 ‘수호천사 라파엘’을 적으로 규정합니다. 낙인이 생겨납니다.]

 

여자, 리비아가 뻣뻣하게 굳었다. 붉은 머리의 사내가 의아한 낯을 했다.

“리비아? 왜 그래?”

“미친…….”

“리비아?”

“이거 밸붕 아니냐고…….”

그녀가 멍하니 중얼거리더니 이내 눈앞의 사내를 본 듯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시스템 공유, 샹크스.” 사내가 고개를 돌려 그녀가 보고 있는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System 알림] [전체공지]

[플레이어 31 ‘악신 우르바노’가 악신의 권능 <고대의 본능>을 발휘합니다. ‘악신 우르바노’가 가장 위협적인 적을 찾습니다.]

[‘악신 우르바노’의 본능이 ‘심판자 ???’을 가장 위협적인 적으로 간주합니다. ‘악신 우르바노’의 낙인이 ‘심판자 ???’에게 내립니다. ‘악신 우르바노’는 ‘심판자 ???’의 위치를 알 수 있습니다.]

 

이제는 퍽 익숙해진 홀로그램 위의 글씨를 읽어 내려가던 붉은 머리의 사내, 샹크스가 눈을 가늘게 떴다.

“…이건 좀 곤란하게 됐군.”

저쪽에서 먼저 찾아내면 곤란했다. 악신이 누군진 모르겠지만 제게 거슬리는 건 전부 없애려는 의지가 글자 너머로 흉흉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어떡하지?”

“……음.”

어느 쪽이든 막고 싶어도 위치를 당장 알 방법은 없었다.

 

[System 알림] [전체공지]

[이레귤러 ‘심판자 ???’이 이레귤러 고유 스킬 <간섭>을 사용합니다. 시스템에 간섭합니다.]

[………]

[‘심판자 ???’이 대가를 지불하여 ‘악신 우르바노’가 사용한 스킬을 모두 ‘무효화’합니다.]

[<악의 제전>이 취소됩니다. <악신의 눈>으로 인한 낙인이 사라집니다. <고대의 본능>이 사라져 낙인이 지워집니다.]

 

샹크스와 리비아의 눈이 동시에 커졌다. 무효화 됐다는 건 스킬 사용이 사라졌다는 뜻일 터였다.

“이것도 사기네. 밸붕 미쳤네……, 이 정도면 밸패 들어가야 하는 거 아니야? 망할 운빨 가챠겜.”

리비아가 머리를 감싼 채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어쨌든, 저쪽에서 대항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심판자’는 그들이 먼저 발견해야 했다. 리비아가 알림을 끄려는 순간이었다. 띠리리링-! 평소와는 다른 우렁찬 소리가 들렸다.

 

[System 알림] [전체공지]

[이레귤러 ‘심판자 ???’이 ‘확성기’를 사용합니다.]

[,,,아가야죽고잡냐??^^머리에피도안마른아새끼들이진짜,,사람이가만히있으니가마니로보이냐,,?니내가누군지아니,,??^^니,,덕분에아버지한테혼나게,,]

 

“확성기? 이런 것도 있었어?”

“응, 3만 코인짜리 쓰레기템인데……, 사는 사람이 있었구나. 저 꼰대 말투는 콘셉트인가…?”

“근데 쓰다 말았네?”

“80자 제한이라 그래. 아버지 찾는 거 보면 생각보다 어릴 수도 있겠는데.”

결국 3만 코인이나 써서 뭘 전하고 싶었던 건지 알 수가 없었던 리비아가 미묘한 표정을 하곤 머리를 긁적인 뒤 알림창을 껐다.

“심판자는 코인이 많나 보네.”

그녀가 기지개를 켜고 샹크스와 함께 선실로 들어가며 중얼거렸다.

 

**

 

아침에 빗으로 머리를 빗었는데 머리털이 한 움큼 빠졌다. 스팬담은 절망하며 베개에 얼굴을 처박았다. 이게 전부 악신 우르바노인지 울버린인지 하는 놈 때문이다.

갑자기 매번 반투명한 초록색 창으로 뜨는 시스템 홀로그램이 시뻘겋게 빛나면서 알림을 꺼뒀는데도 나타났던 날, 스팬담은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진다는 것이 무엇인지 처음으로 경험했다.

그래서 급하게 스킬창을 열어서 이것저것 찾다가 간신히 이미 정해진 어떤 사항을 바꿀 수 있다는 설명이 적힌 <간섭> 스킬을 일단 써봤다.

‘없애긴 없앴지….’

내 머리카락이랑 같이.

그런 미친 권능 같은 게 있을 줄은 몰랐던 터라 밤잠조차 못 이뤘다. 그뿐이랴, 아프기도 엄청 아팠다.

 

[System 알림]

[이레귤러 특수 스킬 <간섭>의 대가 지불이 끝났습니다.]

[상태 이상 ‘열병’이 사라집니다.]

 

악신 우르바노의 세 가지 시비를 지우는 대가는 1만 코인과 상태 이상이었다. 이 상태 이상도 카드를 뽑아서 랜덤으로 배정받은 거였는데 그나마 열병이어서 다행이다 싶었다. 열이 조금 나는 것뿐이지 그래도 출퇴근은 할 만했던 탓이다. 한창 후임이 왔을 때라서 애들 어색할까 봐 쉬지도 못했다.

무려 한 달의 열병을 앓은 뒤에야 몸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스팬담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로 미쳐버리겠다. 이렇게 전전긍긍하며 살 수는 없었다.

‘그래도 바로 스킬을 사용하지 않은 걸 보니…….’

그쪽도 뭔가의 대가를 치르고 있거나 반동을 겪고 있는 거겠지. 아니면 그만한 기술을 바로 쓰지 못하게 시간제한이 걸려 있거나. 스팬담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어쨌든 후임이 출근한 지도 두 달이 지났다. 그래도 무난하게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아서 다행이었다. 후임 놈도 생각보다 성격이 서글서글한 게 좋은 것 같고 말이다.

‘보고서를 보니 하나같이 팀의 성과도 좋았지.’

뭐, 성격도 좋고 잘 지내지 않을까 싶었다. 무력도 꽤 있다고 어중간한 해적은 손으로 때려눕힐 수 있을 정도라고 들었으니까 말이다.

스팬담은 뺨을 손등으로 가볍게 문지르며 터덜터덜 장관실 문을 열었다.

“어? 우와앗, 내가 졌네. 너희 엄청 잘 하네.”

“크핫하하!! 식은 죽 먹기 아니겠습니까?”

“나 이런 거 못 하나 봐. 아아…….”

“다음엔 아예 알까기를 해봐도 좋겠구먼.”

“그건 또 뭐야? 그나저나 스팬담 씨는 언제 오시려나.”

“지금 온 것 같군요.”

로브 루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들이 문이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스팬담이 가볍게 손을 흔들자 입에 사탕을 물고 있던 노란 머리카락의 남자가 스팬담에게 달려왔다.

귀에 피어싱을 단 남자는 스팬담과 비슷한 키인데도 동글동글한 얼굴을 하고 있어서 그런가 그렇게 위압감 있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스-팬-담-씨!”

“어, 어어….”

후다닥 달려온 남자, 그러니까 장관 후보인 녀석이 손을 붙잡고 위아래로 휘휘 흔들었다. 사교성이 얼마나 좋은지 첫 만남부터 꽤 서글서글하게 굴었던 터라 스팬담이 조금 낯선 기분에 뺨을 긁적였다.

“오셨군요! 기다렸어요.”

“…아아, 기다려줘서 고맙다. 레온.”

“에이, 별말씀을! 제 부하가 될 요원들이랑 좀 더 친해지고 싶기도 했어요.”

사람 좋게 웃어 보인 그가 스팬담의 코트를 벗겨주고 펑크프리드를 챙겨 한쪽에 놓아주었다.

“어, 거기까지 안 해도 되거든. 내가 무슨 악덕 상사 같잖냐.”

스팬담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러자 레온이 손사래를 치며 “에이, 무슨 그런 서운한 말씀을.”하고 말을 덧붙였다. 스팬담이 낮게 웃으며 레온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흩뜨렸다.

“다들 뭐 하고 있었어?”

“예비 장관님에게 오목을 알려주고 있었어요. 물론 제가 이겼지만요.”

“오오, 역시 우리 칼리파. 멋지다, 멋져!”

“…성희롱입니다!”

스팬담이 큭큭 낮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물끄러미 보던 레온이 살짝 손을 들었다.

“에이, 칼리파. 그건 아니지. 스팬담 씨는 장관님인데 장관님께 그런 언사는 좀…… 무례하지 않나?”

활짝 웃은 레온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말했다. 칼리파가 멈칫했다. 스팬담이 레온에게 손을 가볍게 들어 저어보였다.

“됐어, 괜찮아.”

“스팬담 씨, 이건 칼리파를 위한 일이기도 해요! 보세요! 물론 친하신 건 괜찮지만, 혹여나 밖에 나가서 혹시나 실수라도 하면 어떡해요. 장관님도 욕을 먹지만, 칼리파도 속상할 거예요! 그래서 이런 예절 같은 건 틀릴 때 바로 알려줘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제가 틀렸을까요?”

레온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슬쩍 눈치를 살폈다. 스팬담이 뺨을 긁적였다. 그가 칼리파를 흘긋 보곤 다시 레온을 보았다.

‘어차피 곧 장관 자리가 바뀔 테니까 저쪽 규칙에 익숙해지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그가 풀어주는 경향이 없잖아 있는 것도 맞았으니까 말이다. 생각을 마친 스팬담이 설핏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냐, 네가 그러면 그런 거겠지. 칼리파 안에선 괜찮은데 밖에선 좀 조심해줘라.”

“……네.”

스팬담이 앞에 있는 카쿠와 재브라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쓰다듬곤 장관 자리로 갔다. 뒷짐을 지고 있던 레온이 칼리파를 보곤 빙긋 웃으며 손을 흔들곤 그대로 스팬담에게 쪼르르 달려갔다.

“스팬담 씨!”

“어, 왜?”

“어제 말씀하신 서류! 이렇게 했는데 한 번만 확인해주시겠어요?”

“오, 그걸 벌써 다했어? 대단한데?”

레온이 스팬담의 옆에 의자를 끌고 와서 앉았다. 스팬담이 가볍게 칭찬하며 서류 내용을 확인하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곤 곧 고개를 끄덕였다.

“너 서류 진짜 깔끔하게 처리하는데? 레오르도 씨가 뛰어나신 분이었다더니 정말이었나 보네.”

“정말요? 잘했나요?”

“응, 기대 이상인데?”

손을 뻗은 스팬담이 레온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그러자 레온이 퍽 과장되게 양손을 번쩍 든다.

“와아, 스팬담 씨한테 칭찬받았다.”

“너 진짜 변죽도 좋구나. 어디 가서 미움받진 않겠다. 너처럼 성격 좋은 애가 후임으로 와서 다행이다. 사실 걱정을 좀 했었는데.”

스팬담이 레온의 머리를 토닥토닥 두드려줬다. 레온이 퍽 뿌듯하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주먹을 꽉 쥐어 보였다. 의기양양한 그 모습에 스팬담이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에이, 걱정하지 마세요! 완벽한 CP9을 만들어보겠습니다!”

“아아…. 너무 완벽하지 않아도 되니까 잘 좀 부탁할게.”

“물론이죠.”

스팬담과 레온을 CP9이 조용히 바라봤다. 칼리파가 조용히 안경을 끌어 올렸다. 성격이 좋아보이긴 하는데 묘하게 꺼림칙한 느낌이 들었다.

“…저 예비 장관. 좀, 묘할 때가 있지 않은감?”

“장관이 바뀌면 우리가 적응해야 한다. 상사는 상사니까. 애초에 현 장관이 특이한 거다.”

“챠파파….”

카쿠의 말에 블루노가 대답하고 후쿠로가 우울하게 입을 열었다. 카쿠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알고 있다. 알고 있지만, 그래도 아쉬울 따름이다.

“뭐어…, 어쩌겠냐. 일 끝나고 장관 집에나 쳐들어갈 생각이나 하자고.”

“그거 좋군요.”

“요요이!! 차안성이라는 것이외다~~”

로브 루치가 말없이 스팬담의 옆에 딱 달라붙어 재잘재잘 떠드는 예비 장관 레온을 보다가 팔짱을 끼곤 느리게 시선을 내리깔았다.

“넌 뭔 생각을 그렇게 하냐? 괭이 새끼야?”

“네놈은 몰라도 된다. 얼빵한 들개가.”

“어쭈, 오늘도 또 입만 동동 뜨게 구네?”

로브 루치가 퍽 마뜩잖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냐는 거다, 챠파파.”

“알아볼 게 있다. 점심시간 전까진 돌아오지.”

그가 그대로 몸을 홱 돌려 집무실을 조용히 나갔다.

 

**

 

“으음? 너희 보고서를 왜 이렇게 적어와?”

“지금까지 그렇게 냈는뎁쇼?”

“아아……, 스팬담 씨가 또.”

설핏 미간을 찌푸린 레온이 고개를 숙이곤 뭐라고 중얼거리곤 서류를 다시 재브라에게 내밀었다. 재브라가 미묘한 낯으로 서류를 바라봤다.

“양식에 맞춰서 제대로 다시 써와, 장관인 내가 너희 일까지 할 순 없잖아.”

“뭐…, 알겠습니다.”

레온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동글동글한 낯이 웃으면 퍽 인상이 좋아 보였다. 실제로도 그덕에 윗선에선 꽤 예쁨을 받고 있는 모양이었다.

‘지금 장관도 좋아하고 말이지.’

장관 임기가 얼마 남지 않아 일주일에 며칠은 레온이 또 며칠은 스팬담이 나눠서 일을 소화하고 있었다. 처음엔 하루였다가 지금은 점차 늘어나 일주일에 이틀은 레온이 처리했다.

“스팬담 씨도 물러서 곤란하다니까. 아랫사람들한테 그렇게 얕보이면서 용케도 잘 웃고 다니셔. 성격이 좋은 건지 멍청하신 건지…….”

말갛게 웃는 낯으로 레온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몸을 돌리려던 재브라가 멈칫했다. 설핏 미간을 찌푸린 그가 한숨을 내쉬며 마저 나가려는 때였다.

“…예비 장관, 말이 좀 심하구먼.”

“어이, 카쿠.”

“……하아아? 지금 뭐라고 했어? 카쿠. 뭐야, 반항하는 거야?”

“장관은 딱히 무시당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걸세.”

레온의 웃는 얼굴에 설핏 금이 갔다. 투둑 튀어나온 힘줄에 카쿠가 미간을 좁혔다. 재브라가 카쿠의 손목을 가볍게 잡았다. “어이, 카쿠.” 작은 부름에도 카쿠는 물끄러미 레온을 보았다. 레온이 활짝 웃는다.

“너희들이 나한테 지금 이렇게 굴고 있는 게 스팬담 씨가 얕보이고 있다는 증거지. 얼마나 기강을 못 잡았으면 곧 장관이 될 나한테 이러겠어. 맨날 허허실실 웃으면서 머리나 만져대고, 기분 나쁜 호모 새끼가. 비위 맞추느라 이쪽은 죽겠다고.”

“자네……!”

카쿠의 동공이 확 벌어졌다. 그가 레온의 멱살을 붙잡았다. 레온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주먹을 치켜올린 손을 재브라가 잡아챘다.

“카쿠!”

“반응이 격하네……? 왜, 설마… 스팬담 씨한테 다리라도 벌렸냐? 이 호모 새끼들.”

“자네 진짜…!”

퍼억-! 카쿠의 주먹이 레온의 뺨을 내리치는 것과 동시에 달칵, 문이 열렸다.

“……어….”

따라 들어오던 로브 루치와 블루노가 멈춰선 스팬담을 보더니 안을 보곤 표정을 굳혔다. 카쿠가 당황해서 레온의 멱살을 놓고 뒤로 주춤 물러났다.

“자, 장관…. 이건…….”

“미안미안, 카쿠.”

뺨이 부풀어 오른 레온이 가볍게 두 손을 모았다. 그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 보고서 지금까지처럼 써도 괜찮아. 양식대로 쓰는 게 어려우면 어쩔 수 없지…. 그래도 밖에서는 좀 말을 조심해줬으면 좋겠다고 한 것뿐이야. 보고서는 몰라도……. 물론, 지금까지는 스팬담 씨가 성격도 좋으시고 2년 뒤에 물러나실 거라서 무르게 구신 건 있겠지만…….”

“자네……!”

“스팬담 씨도 다음 달이면 관두실 텐데, 제가 자꾸 문제를 만드는 것 같아서 죄송해요! 이 친구들이 스팬담 씨를 너무 좋아해서 탈이에요. 근데 오늘은 제 근무일인데 어쩐 일이세요?”

레온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기울였다. 스팬담이 머리를 긁적이다가 뒷목을 한 번 매만지고 어색한 분위기의 집무실을 한 번 훑곤 입을 열었다.

“…아, 점심이나 같이 먹자고 왔는데, 음.”

스팬담이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왔다. 그가 팔을 뻗어 레온의 턱을 붙잡아 양쪽으로 돌려가며 뺨을 잠깐 살피더니 고개를 돌려 카쿠를 보았다.

“카쿠, 다친 데는?”

“……없다네.”

“그래. 레온은 나랑 의무실이나 좀 가보자.”

“하하, 이 정돈 괜찮아요. 남자들끼리잖아요. 제가 카쿠의 심기를 거슬렀나 봐요.”

레온이 제 뺨을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말했다. 스팬담이 잠시 입을 다물고 카쿠랑 레온을 번갈아 보다가 입을 열었다.

“카쿠.”

카쿠가 말없이 스팬담을 보았다.

“레온은 곧 장관이 될 거야. 지금까지처럼 너무 가볍게 굴면 곤란해. 화가 나도 상사를 때리는 건 아니지.”

“…….”

“레온에게 사과하고 나가서 잠시 머리 식히고 와.”

스팬담의 말에 카쿠가 주먹을 꽉 쥐었다. 고개를 푹 숙인 카쿠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미안, 하다네. 예비 장관.”

“아아, 아냐. 내가 불편한 소리 해서 미안하지. 그래도 앞으로 잘 지내보자.”

“……아아.”

짧게 대답한 카쿠가 그대로 장관실을 나갔다. 재브라가 짧게 한숨을 내쉬고 로브 루치와 블루노가 카쿠가 나간 문을 한 차례 보았다. 그제야 레온이 활짝 웃으며 스팬담에게 팔짱을 꼈다.

“그럼 같이 점심 먹으러….”

“레온.”

“네?”

“네가 장관이 될 테니 네 방식에 애들이 맞춰가는 건 맞는다고 생각한다. 네가 틀렸다고 하지 않았어. 근데 카쿠가 쓴소리 좀 한다고 주먹질할 애는 아니라는 거 안다.”

스팬담이 나직하게 말하며 가만히 레온을 내려다보았다. 평소완 다르게 아무런 표정도 없는 스팬담의 얼굴에 레온이 멈칫하더니 팔짱을 풀고 어색하게 웃었다.

“에이, 왜 그러세요. 스팬담 씨. 아마 제가 스팬담 씨가 너무 무르게 굴어서 아랫사람이 좀 무시하는 것 같아서 걱정된다고 해서 거기서 화가 난 것 같아요. 애들이 스팬담 씨를 너무 좋아하는 걸 깜박하고 말을 잘못했나 봐요. 저도 제대로 사과해둘게요…….”

“아아, 그래 주면 고맙지. 퇴장하는 입장에서 괜히 이런 말 해서 나도 미안하다, 레온.”

“아니에요.”

레온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서툰 낯으로 눈동자를 굴리는 것이 퍽 당황한 아이처럼 보이기도 했다.

“레온, 나는 뒤에서 누가 내 욕을 하든… 무슨 소문이 돌든 크게 신경 안 쓰는 타입이긴 하다. 그래서 아랫놈들한테 무시당해도 뭐 상관은 없어. 근데 강간이랑 아동학대를 좀 싫어해서 말이다. 그 점만 좀 주의 부탁한다. 난… 화내고 싶지 않아서 말이다.”

“예…?”

“네가 잘 대해주면, 기대 이상으로 보답할 애들이니까 잘 좀 부탁한다.”

레온의 의아한 표정에 어깨를 으쓱인 스팬담이 가볍게 레온의 어깨를 쥐었다가 놓았다. 이윽고 금세 표정을 푼 그가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미안하다, 점심 먹으러 왔는데 분위기 보니까 오늘은 좀 어려울 것 같네. 다음에 먹자.”

“스팬담 씨, 저도 애들이랑 같이 시간 보내도 괜찮을까요? 자주 점심 식사하러 오시니까…….”

스팬담이 멈칫했다. 재브라와 블루노가 레온을 보고 로브 루치가 스팬담을 보았다. 문손잡이를 잡고 있던 그가 느리게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더니 이내 뒤를 돌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내가 생각이 좀 부족했나 보다. 네 시간대엔 방해 안 하도록 할게. 그럼 오늘도 수고해라, 레온. 너희도 얼른 가서 식사하고.”

“어디 가십니까?”

“새끼 기린 찾으러.”

“…기린?”

블루노가 의아한 낯을 했지만, 스팬담은 가볍게 손을 흔들어주곤 말없이 복도를 가로질러 사라졌다. 재브라가 흘긋 주먹을 꽉 쥐고 있는 레온을 보았다.

“낙하산으로 남의 자리나 뺏어간 호모 새끼 주제에……, 누구 앞에서 잘난 듯이….”

레온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동자가 그를 보고 있는 로브 루치와 블루노에게 향했다.

“다 나가! 뭘 봐? 내가 장관만 되면 네놈들 기강을 다시 잡아줄 테니 각오해. 그 망할 사각 코 새끼도 마찬가지다! 상도도 모르는 버릇없는 놈들.”

“……그거 기대되는군요. 현 장관보다 얼마나 나을지 말입니다.”

“당연히 내가 더 나을 거다! 그 무르기만 한 얼빵한 인간보다 말이다!”

“그렇습니까? 부디 오래오래 자리 유지하시길 바랍니다.”

로브 루치가 무표정한 낯으로 입꼬리만 들어 올려 웃었다. 레온의 눈이 확 커졌다. 그가 멀지 않은 곳에 책상에 있던 재떨이를 로브 루치에게 내던졌다. 로브 루치가 가볍게 고개만 움직여 재떨이를 피했다.

“제가 보기엔… 그대로 변하지 않으시면 그리 오래 유지하지 못하실 것 같지만 말입니다.”

“뭐?!”

“장관께서 저희를 꽤 좋아하셔서 말입니다. 그럼 식사 맛있게 하시길.”

“하, 이제나저제나 관둘 날만 기다리는 사람에게 가지 말아 달라고 부탁이라도 하려고 그러나 보지?”

레온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기실 스팬담이 최종적으로 확정을 내려주지 않으면 장관 직위는 받지 못하는 게 맞기 때문이다. 그래서 계속 비위를 맞춰왔는데…….

“아뇨, 붙잡지 않습니다. 저는 명령만 제대로 내려준다면… 누가 장관이든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바라는 건…… 피, 하나뿐이니까요.”

로브 루치의 말에 레온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그가 앳되어 보이던 소년이 순식간에 얼굴을 바꾸더니 퍽 비열하게도 하! 웃음을 터뜨렸다.

“차라리 솔직해서 낫네. 살인 병기라더니 이명에 아주 걸맞아. 내가 널 잘 써주도록 할게.”

레온이 언제 그랬냐는 듯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에 무표정한 낯으로 로브 루치가 고개를 까딱이곤 집무실을 나섰다. 블루노와 재브라도 그 뒤를 쫓았다.

얼마 걷지 않아 로브 루치가 걸음을 멈춘다.

“블루노.”

“뭐지?”

“옥상까지 가는 문 열어라.”

“……옥상?”

로브 루치가 고개를 끄덕였다. 블루노가 뺨을 긁적이다가 고개를 끄덕이곤 능력을 사용했다. 그가 먼저 안으로 들어가고 재브라가 퍽 호기심 어린 낯으로 에어도어로 쏙 들어갔다. 마지막으로 블루노가 문을 닫았다. 옥상으로 향하는 문을 연 블루노가 멈칫했다.

“왜 멈추….”

“쉿.”

블루노가 재브라의 입을 막았다. 그 사이 로브 루치가 소리 없이 문을 나섰다.

“카쿠, 쟤 싫으면 다른 장관 구할 때까지 관두지 말까?”

재브라도 그 목소리를 듣고서야 문밖으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새끼 기린?” 재브라가 작은 목소리로 카쿠의 뒤통수를 가리키며 물었다. 블루노가 어깨를 으쓱였다.

“…아닐세, 내가 애처럼 군 게지.”

“뭔 일이 있었는데 그래?”

“예비 장관 말대로 자네가 무시당한다고 해서 화가 나서 그랬다네.”

카쿠가 옥상에 있는 의자에 걸터앉은 채 말했다. 그 옆에 앉은 스팬담이 카쿠의 어깨에 팔을 두르곤 가볍게 어깨를 도닥거렸다. 카쿠가 입을 꾹 다문 채 챙을 눌렀다.

“지금 짓고 있는 집 말이다.”

“아아…, 벌써 공사하고 있는 겐가?”

“응, 다음 달쯤에 완성될 거다. 네가 해달라는 대로 다 해달라고 반영해놨으니까.”

스팬담이 팔을 두르지 않은 반대쪽 손으로 주머니를 뒤져서 뭔가를 꺼내 카쿠의 손에 쥐여주었다. 카쿠가 의아한 얼굴로 손을 폈다. 은색의 작은 열쇠였다.

“언제든 와서 자고 가라, 힘든 일 있으면 꼭 말하고. 그 새끼가 거기까진 안 하겠지만 혹시나 손찌검하면 말해라.”

“말하면 뭐가 달라지는감?”

“아아…, 난 내 사람 손댄 놈들 가만히 안 두는 편이라서. 태어난 거 후회할 때까지 짓패서 죽여주마.”

스팬담의 말에 카쿠가 낮게 웃었다. 퍽 호기로운 말이지만 스팬담의 도력으론 가능할 리가 없을 테니까 말이다. 레온이라는 놈이 말은 그래도 스팬담보다는 확연히 강했다.

“장관 도력 약하지 않았던감? 장관 손뼈가 먼저 부러지겠구먼.”

“…거, 다 방법이 있다. 어? 어른들은 다 비겁하고 비열한 방법이 있어요.”

스팬담이 퉁명스럽게 말하자 카쿠가 웃음을 터뜨리더니 그러냐고 덧붙였다. 카쿠의 입장에선 퍽 귀여워 보였겠지만, 스팬담은 나름 진심이었다.

“카쿠.”

“왜 부르는감.”

“기분은 좀 풀렸냐?”

스팬담의 말에 카쿠가 힐긋 그를 보곤 고개를 젖혔다. 물끄러미 푸른 하늘을 바라보고 있던 소년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건 장관이 따라온 순간부터 풀렸다네.”

스팬담이 멈칫했다가 가볍게 카쿠의 머리를 헤집었다. 카쿠가 흘긋 스팬담을 보곤 검지로 뺨을 긁적이며 슬쩍 입을 열었다.

“사실 장관이 구안하오에서 밀롱 교관의 손가락 부러뜨리고 잘라줬을 때 통쾌했구먼. 애들을 트집을 잡아서 본인 기분 나쁠 때마다 교육이라고 하면서 자주 때리곤 해서 말일세.”

“개새끼였군.”

“개한테 실례일세.”

“미안, 쓰레기였다.”

“그건 마음에 드는구먼.”

스팬담이 정정하자 카쿠가 퍽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카쿠가 스팬담의 팔을 풀며 자리에서 일어나 난간에 기댔다. 그가 문득 뒤를 보더니 멈칫 굳으며 설핏 미간을 좁혔다가 다시 시선을 내려 스팬담을 보았다.

“장관도 장관의 인생이 있을 텐데, 내가 계속 떼를 쓰는 건 장관을 곤란하게 만들뿐 아니겠는감. 그래도 열쇠는 고맙구먼.”

카쿠가 가볍게 열쇠를 흔들곤 주머니에 넣었다. 스팬담도 가볍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쿠. 나 점심 아직인데, 같이 안 먹을래?”

“나야 영광이네만… 뒤에 방해꾼들이 있다네.”

카쿠가 손가락으로 스팬담의 뒤를 가리켰다. “방해꾼?” 뒤를 돈 스팬담이 거의 비명을 지르며 질겁하곤 뒷걸음질을 치다가 난간에 툭 걸렸다.

“조심하게, 장관.”

카쿠가 스팬담의 팔뚝을 붙잡아 바로 세워주었다. 성큼성큼 걸어온 로브 루치가 스팬담의 앞에 손을 내밀었다.

“뭐…, 용돈 줘?”

스팬담이 재킷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찾아 꺼내 로브 루치의 손에 1만 베리 한 장을 올려두었다. 로브 루치가 알뜰살뜰 챙겨 그걸 주머니에 넣고 다시 손을 내밀었다.

“제 열쇠는 어딨습니까?”

“열쇠? 아아….”

스팬담이 로브 루치의 손 위에 주머니에서 꺼낸 열쇠 한 뭉텅이를 후두둑 쏟아주었다. 총 여섯 개다.

“애들 나눠줘.”

“네.”

그가 흡족한 낯으로 제 열쇠를 챙겨 가고 나머지를 재브라에게 넘겼다. 재브라와 블루노가 하나씩 챙기더니 나머지를 주머니에 밀어 넣는다.

“이야, 우리 건 없나 서운할 뻔했잖습니까, 장관. 임무 간 놈들 건 나중에 오면 주겠습니다.”

“없을 리가 있겠냐? 시발 방을 지금 몇 개를 만들었는데….”

스팬담이 머리를 짚었다. 예산이 초과하다 못해 오죽하면 돈 쓰는데 뭐라고 안 하는 아버지가 자신을 불러서 무슨 일 있냐고 물어볼 정도였다.

‘그래서 설명해줬더니 본인 방도 추가하셨지.’

이야, 북적북적 9명이 살게 생겼네. 설마 나중에 라스키도 들어오겠다고 하지는 않겠지. 칼리파 생각하면 사실 아빠가 있는 쪽이 좋긴 하겠지만…….

‘그냥 라스키랑 아버지가 얘네 부모 노릇 좀 해주면 안 되나. 자식 더 생겼다고 생각하고.’

팔짱을 낀 스팬담이 고개를 기울였다.

아버지라면 나름 뭐 약한 구석이 있으니 애들한테 잘해주실 것 같은데 라스키라……. 라스키는, 요리를 잘하니까 됐나? 살림도 잘할 것 같던데. 아버지도 혼자 사시면 심심할 텐데 친구 하나 있으면 좋지 않나? 근데 정작 아직 안 깨어나고 있지만.

‘……으음, 그만 생각해야지.’

스팬담이 머리를 흔들곤 앞을 보았다.

“뭐 먹고 싶은 거 있냐?”

“뭐, 역시 그거 아니겠습니까?”

“그거?”

“고기. 고기나 썰죠, 장관.”

“내 기억상 고기를 안 썬 날이 없는 것 같긴 한데, 한창때니까 좋다. 그거나 먹으러 가자.”

흠, 오늘은 또 누구한테 업혀 가냐. 고민하고 있는데 체로 다가온 블루노가 스팬담을 옆구리에 낚아채더니 그대로 옥상에서 뛰어내렸다.

“……으메, 시발 제발 예고 좀 해줘라, 얘들아. 이 아저씨 심장 떨어져요.”

스팬담이 한숨을 푹 쉬었다. 심장은 이미 바닥까지 내려갔다가 슬금슬금 올라오고 있었다.

 

**

 

“오, 먼저 와있었네.”

“아담.”

꽤 고급스러운 요리주점으로 들어가 낯익은 이에게 인사를 건네자 그가 고개를 돌려 웃는 낯으로 스팬담을 맞이했다.

“에르니, 이야. 이 새끼 이거 오늘도 양복이 쌔끈하네. 팔다리가 쭉쭉 길어서 그런가 뭘 입고 와도 존나 잘 어울린단 말이지.”

솔직하다 못해 가히 적나라한 스팬담의 말에도 제법 익숙해진 에르니가 설핏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스팬담이 코트를 벗고 몸을 부르르 떠는 것을 본 그가 가볍게 손을 들어 점원을 부르며 입을 열었다.

“칭찬으로 알아듣겠네.”

“당연히 칭찬이지, 욕이겠냐? 으으, 추워.”

점원이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하는 것을 들은 에르니가 들었던 손을 가볍게 내리며 스팬담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이 날씨가 벌써 추우면 곤란하지 않나?”

“아아, 근데 나 옛날부터 겨울에 좀 약해. 추운 거에 좀 맥을 못 쒀서 말이다.”

“아직 겨울이 아니라는 말이었다네.”

“그건 대충 넘어가자고.”

그가 손을 휘휘 내저었다. 실제로도 손끝이 새파란 게 정말 추운 모양이었다. 개인 룸으로 되어 있는 요리주점은 생각보다 공간이 분리되어 있어서 조용하고 좋았다.

“그러고 보니 일을 곧 관둔다고 하지 않았었나?”

“아아, 다음 달에 관둬. 인수인계 중이야.”

점원이 다가왔다. 에르니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주문하는 것을 스팬담이 턱을 괸 채 가만히 보았다. 스팬담이 딱히 메뉴 고르기에 흥미가 없다는 걸 아는 그가 이제는 아예 묻지도 않고 알아서 시켰다. 덕분에 스팬담은 아주 편했고. 주문을 마친 그가 다시 스팬담을 보았다.

“후임은 어떤가?”

“뭐…, 성격도 좋고 사회성도 괜찮아. 아부도 잘 떨고……. 근데, 음. 좀 다혈질적인 성격이야.”

“다혈질?”

“아…, 솔직히 말할까.”

스팬담이 뺨을 긁적였다. 점원이 주전자에 데운 술을 가지고 와서 스팬담이 잠시 말을 멈췄다. 에르니가 주전자에 담긴 술을 잔에 따라 스팬담에게 넘겨주었다.

“웬 따뜻한 술?”

“자네가 춥다고 해서 말일세.”

“허참, 이 친구 사회 짬밥 괜히 먹은 게 아닌가 보네. 존나 센스있다. 야, 이 정도면 여자들이 줄을 설 것 같은데 결혼은 했냐?”

스팬담의 질문에 에르니가 낮게 웃었다. 그는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술잔을 살짝 기울여 술을 음미하곤 대답했다.

“바빠서 누굴 만날 시간이 없었다네.”

“애인도?”

“마찬가지지.”

“그 나이에 아깝게.”

스팬담이 쯔쯧, 혀를 차며 말했다. 퍽 평범한 대화에 에르니가 가볍게 웃으며 곧 입을 열었다.

“그리고… 자주 돌아다니는 직업 특성상 누굴 만드는 게 좀 그렇다네. 아이를 낳아도 아이가 혼자가 될 테고 연인이나 아내가 있어도 날 기다리기만 하지 않겠나.”

아. 작게 탄식한 스팬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확실히 맞는 말이다. 기다리는 사람한테 못 할 짓이지. 스팬담이 따뜻한 술을 한 번에 마셨다.

“맞다, 불쌍한 일이지.”

“그래서 후임 얘기나 계속해보게.”

“아아, 그 성격 좋은 게 다 연기 같아. 내가 그런 놈들을 좀 알거든……. 그래도 일 처리는 깔끔하고 배우는 것도 빨라. 내리는 판단도 보면 나쁘지 않아. 성격만 죽이면 좀 될 것 같긴 한데… 뭐 내 부하들도 호락호락하지 않으니 괜찮겠지.”

스팬담이 엄지로 미간을 가볍게 문지르며 말했다.

레온은 딱 조금만 자제할 줄 알아도 좋은 장관이 될 것이다. 아마 혈기 왕성한 건 아직 너무 어린 탓이겠지. 스팬담은 제 잔이 채워지는 걸 보다가 다시 술을 마셨다.

“믿어봐야지.”

“믿어보는 겐가?”

“기회는 누구에게나 공평해야 하니까. 그리고 그런 애들은 믿어주고 잘 밀어주면 그래도 비뚤어지진 않을 거야.”

레온이 이미 스팬담이 장관 직위를 차지한 시점부터 비뚤어져 있었음을 몰랐던 스팬담이 가볍게 말했다. 에르니가 고개를 끄덕이며 술잔을 기울였다.

“일을 관두면 뭘 할 생각인가?”

“아, 일단 한동안은 집에서 쓰레기처럼 누워서 쉴 거야. 그리고…….”

스팬담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 미친 시스템을 어떻게 할 방법에 대해 고민하고 시스템을 연구해야겠지. 왜냐하면 아는 거라곤 이제 코인샵에 들어가는 방법과 스킬을 머릿속으로 쓸 수 있다는 것과 머리가 움직이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잠깐 퇴사 기념으로 근처 섬에 나들이나 다녀올까 봐. 그거 빼곤 계획 없어. 뭐, 그 뒤엔 집에만 있기도 뭐하니까 아르바이트나 구해볼까 싶기도 하고.”

“……아르바이트? 무슨….”

“식당 서빙이나 주방 알바? 채소나 과일가게 점원도 나쁘지 않겠는데.”

스팬담이 예비 직장을 나열할 때마다 에르니의 표정이 미묘해지더니 종국엔 아예 이상하다는 얼굴을 숨기지도 않았다. 그에 스팬담이 퍽 불만스러운 낯을 했다.

“왜 그런 얼굴이야?”

“……공무원을 관두고 굳이 그런 험한 일을 한단 말인가?”

“나한텐 지금 일이 더 험한 것 같아. 그리고 우리 아버지 돈 많아서 나 하나쯤은 먹여 살려주실 테니 괜찮다.”

스팬담의 뻔뻔하기 짝이 없는 말에 에르니의 입가에 어색한 웃음이 맺혔다. 턱을 괸 스팬담이 검지 끝으로 술잔을 가볍게 톡 쳤다. 에르니가 말없이 술잔을 기울였다.

“애초에 어울리지도 않는 감투였어.”

“그래도 자네가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고 해서 회사가 뽑은 게 아니겠나.”

에르니의 말에 스팬담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는 잠시 고민하듯 말을 망설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에르니, 난… 솔직히 다치는 것도 아픈 것도 싫다. 엄살도 심하고 까놓고 겁도 많은 편이야. 근데 자존심은 세고 깡다구는 있어서 약한 소리는 죽어도 못하고 악바리로 센 척하는 타입.”

“…자네가 말인가?”

“뭐냐, 그 반응. 이 친구가 사람 서운하게 하네.”

스팬담이 미간을 좁히며 밉지 않게 퉁명스레 말하자 에르니가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설명을 덧붙였다.

“아니, 자네는 뭘 참는 법이 없는 것 같아서 그렇네. 저번에 해적 하나가 내게 시비를 걸었을 때도 주먹부터 내지르지 않았나.”

“그거야 너한테 시비를 걸었으니까 그렇지.”

스팬담이 포크로 음식을 찍어 먹곤 그 끝으로 에르니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에 에르니가 미묘한 낯을 했다.

“나 말인가?”

“어어, 하나밖에 없는 술친구 건드리는데 열이 안 받겠냐. 그것도 사람이 얘기하고 있는데 어디 싸가지없게.”

다시 생각해도 열 받는다고 말하며 스팬담이 튀김을 푹 찍어 입에 가져갔다.

“어쨌든, 나는 그거 있잖냐? 왜 상사가 혼낼 때 입 다물고 네네, 하고 있으면 적당히 하고 끝낼 거 따박따박 따지다가 결국 징계위원회까지 불려가는 타입. 딱 그거다.”

“요컨대?”

“사서 화를 부르는 타입이라는 거지. 그래서 여튼 단체 생활이랑은 잘 안 맞아. 저번에 출장 다녀왔을 때도 상사 새끼 하나가 사람 불러 앉히더니 얼마나 뭐라고 하던지.”

“……음.”

에르니가 낮게 신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스팬담이 술을 잔에 따라 그대로 술잔을 휙 기울이더니 주전자를 들어 에르니의 잔에 한 잔 따르고 제 잔에도 한 잔 따르며 다시 입을 열었다.

“함부로 몸 다룬다고 잔소리도 오지게 하더니 나중에는 무슨 가져오라고도 안 한 물건 가져왔다고 지랄지랄……. 시부럴.”

“……음, 그랬군.”

“아니, 애초에 사무관리직인 사람 등 떠밀어 현장으로 출장시켜 놓은 건 상사 새끼잖아, 아니냐? 힘이라곤 좆도 없는 내가 현장직 나가서 뭘 할 수 있었겠어.”

스팬담이 열받는다며 또다시 술잔을 휙 꺾었다. 에르니가 조용히 주전자를 들어 그 잔을 채워주며 슬쩍 입을 열었다.

“……뭐, 그 상사도 자네에게 뭔가를 기대해서 그런 게 아니겠나.”

“어쭈, 너도 관리자라고 상사 새끼 편을 드냐? 술자리 센스가 없네.”

“아닐세, 단지 그럴 수 있다고 말해준 것뿐이라네.”

“씨벌, 기대 두 번만 했다간 몸 작살나겠네. 내가 그거 때문에 얼마나 귀찮은 일에 휘말렸는지…….”

차분한 에르니의 말에 코웃음을 친 스팬담이 안주를 푹 찍어 입에 넣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에르니도 말없이 술잔을 두 번 채워 마시더니 다시 스팬담을 보았다. 스팬담은 말없이 한숨을 푹 내쉬고 있었다.

‘시스템이니 뭔지도 전부 에덴섬에서 시작된 거잖아.’

결국, 다 에덴섬이 시초였다.

따지고 보면 상사가 시초라고도 볼 수 있겠고 역시 사이퍼 폴에 입사한 것부터 문제였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어쨌든 여러모로 인생이 서글펐다는 말이다.

“그나저나 후임 때문에 관두고 신경 쓰이지 않겠나?”

“가끔 들여다보긴 해야지.”

뭐, 설마 다 큰 성인인데 유치하게 굴진 않을 테지. 술잔을 기울이며 스팬담이 가볍게 눈두덩을 비볐다.

“아아, 그래도 꽤 아쉽겠군.”

“응, 뭐. 나한텐 과분한 부하들을 뒀었지. 그래도 후회는 없다. 진즉 때려쳤어야 했어. 그런 개같은 악덕기업.”

스팬담이 으르렁거리자 에르니가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제 술잔을 앞으로 내밀며 입을 열었다.

“자네가 일을 관둬도 내 술 상대는 해주는 거겠지? 멀리 가지 않는다면 말이야.”

“그건 시발…….”

채앵- 스팬담이 에르니의 술잔에 제 술잔을 가볍게 부딪쳤다. 스팬담이 한 잔을 단번에 마셨다. 에르니도 드물게 그를 따라 술잔을 한 번에 비웠다.

“이쪽에서 부탁할 일이지. 친구가 없어. 일 관두면 친구도 사귈 거다. 반드시…….”

“저런, 나로는 부족한 모양이군 그래.”

“친구를 한 명만 사귀는 놈이 어딨냐?”

“난 자네밖에 없네만.”

“너도 나만큼 기구하냐. 어휴, 지금이라도 찾아봐라.”

끌끌 혀를 찬 스팬담이 고개를 저었다. 그 불쌍하기 짝이 없다는 눈빛에 에르니가 어깨를 으쓱였다.

“인수인계는 거의 다 끝낸 겐가?”

“응, 근데 퇴사 전에 끝맺고 갈 일은 있어. 계약 같은 거 후임이 손 못 대게 미리 내 선에서 처리하고 가려고.”

“음?”

“그놈 보니까 머리는 좋은데 좀 멀리 볼 줄 모르더라고. 우리 회사에서 쓸 배 납품처 바꿔버리지 않게 미리 연장계약 해두려고.”

스팬담의 말에 에르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계약서는 확실하니 도장이 찍혔다면 누가 와도 무를 수가 없었다. 후임이 손대길 바라지 않는 거라면 현명한 선택이었다.

“아, 배 얘기 하니까 말이다. 우리 회사에 다른 계열사가 있거든?”

스팬담이 어딘가 신이 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에르니가 퍽 흥미로운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배는 회사에서 통째로 계약하는 데 말이다. 이번에 우리 계열사 사장님이 회사에서 계약하는 데랑 안 하고 우리 계열사만 따로 다른 업체랑 배 수주 계약을 맺었거든?”

“따로 말인가?”

“응, 내가 조언하긴 했어. 다른 데랑 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에르니가 스팬담과 제 잔을 채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익숙하게 찰랑거리는 술이 담긴 술잔을 쥔 스팬담이 그걸 홀짝였다.

“왜 그런 조언을…?”

“그게…, 회사에서 계약한다고 하는 조선소가 암만 봐도 가라 장부를 올려서 삥땅을 친 것 같더란 말이지.”

“가라장부…? 삥땅은 또 무슨 말인가…?”

“아오, 이 샌님. 가짜 장부로 돈 빼돌렸단 얘기지.”

스팬담이 답답하다는 듯 에르니에게 말했다. 에르니가 그제야 고개를 주억였다. “어쨌든 말이야.” 스팬담이 술을 마시며 마저 말을 이었다.

“그 장부가 매출은 뒷자리가 0단위로 전부 똑 떨어지는데, 나간 돈은 숫자들이 더럽더라고. 존나 못 만든 이중장부란 말이지.”

“호오….”

“그리고 회사 소개하는 내용에 온갖 꾸밈말로 예쁘장하게 꾸며놨는데 실상 중요한 문장만 줄 쳐서 보면 좆도 별거 없는 조선회사였단 말이지.”

스팬담이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키득키득 웃었다. 짓궂은 장난이라도 친 어린아이처럼 유쾌해 보이는 모습에 에르니도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마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입찰한 다른 업체에 비해서 배의 가격이 존나 쌌어. 다른 업체들은 그래도 비등했는데 말이지. 존나 구린내가 풀풀 풍기지 않냐?”

“자네 이야기를 들으니 그런 것도 같네. 하지만, 내가 봤으면 눈치채지 못했을 수도 있겠어.”

“아아, 사실 회사 입장도 이해는 가. 배가 한 척에 존나 비싸니 돈이 아끼고 싶었겠지. 싼 게 비지떡이라는 말이나 빈 수레가 요란하단 말 아냐?”

스팬담의 말에 에르니가 고개를 저었다. 전혀 이해되지 않는 문장이었다. 그가 설명을 요구하듯 스팬담을 보았다.

“전자는 싼 건 구리다는 뜻이고 후자는 가진 건 좆도 없는데 있어 보이는 것처럼 군단 얘기다.”

“아아…….”

“어쨌든, 여기서부터가 재밌는 구간이다. 최근에 회사도 배를 납품받고 우리 계열사도 배를 납품받았거든. 근데 그 회사 배가 해적에게 한 번 습격당했는데 시발.”

거기까지 말한 스팬담이 큭큭 웃으며 테이블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에르니의 고개가 설핏 기울었다.

“배에 폭탄 하나 날아왔다고 구멍 존나 크게 뚫려서 간부까지 내려가서 물 퍼내고 지랄했다더라. 존나 웃기지 않냐?”

푸핫, 올라왔던 보고서와 협조 요청 공문을 떠올린 스팬담이 아예 룸에 드러누워 데굴데굴 굴렀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에르니도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그랬던 거였군.”

도대체 왜 회의에 나와서 굳이 다른 데랑 계약을 하겠다고 구는 건지 몰랐는데 말이다. 에르니가 턱을 문지르며 눈을 가늘게 뜨곤 스팬담을 내려다 보다가 그가 몸을 일으키려고 하자 다시 빙긋 웃었다.

“그래서 그놈들이 우리 계열사가 계약한 회사랑 계약하고 싶어서 연락 보냈던 모양인데 그쪽에서 거절했나 보더라고. 우리 계열사 배 만들기 바쁘니 이쪽이랑 조율하라고 말이야.”

“아아…….”

“그래서 조율 좀 해달라고 해서 며칠 뒤에 삼자대면하기로 했다는데…… 사장님한테 말해서 우리가 받는 납품가 좀 높여서 말하라고 하려고.”

스팬담의 말에 에르니가 설핏 인상을 찡그렸다. 그가 의아한 낯으로 입을 열었다.

“그건 어째서지?”

“어째서냐니…, 이쪽이 다 조율해둔 거 홀라당 가져가면 배알 꼴리잖냐. 그리고 분명히 문제 생길 거라고 했는데 굳이 계약했으니까 심술이다.”

“……자네, 호쾌한 것 같으면서 의외로 좀스러운 면이 있군.”

에르니가 묘한 표정으로 웃으며 말했다. 스팬담이 턱을 괸 채 퍽 불만스럽게 그를 바라보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 대신 우리는 지금이랑 같은 가격으로 연장계약 하려고.”

스팬담이 씩 웃었다.

“그러니까 회사는 일종의 우리 계열사를 위한 제물인 거지.”

그에 에르니의 눈이 커졌다. 그가 결국 커다랗게 웃음을 터뜨렸다. 스팬담이 웃으며 “어때, 이래도 좀스럽냐?”하고 덧붙이자 에르니가 대번에 고개를 저으며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자네는 정말 못 당하겠군.”

“그래서 싫냐?”

스팬담이 킥킥 웃으며 한 손으론 턱을 괸 채 꽤 껄렁하게 술잔을 내밀며 말했다. 에르니가 퍽 우아하게 잔을 부딪치며 입을 열었다.

“마음에 든다네.”

 

**

 

[코인샵 판매 목록]

<잠 깨는 약> – 10,000코인

→ 어떤 이유에서든 깊은 잠에서 깨어나지 않는 사람을 깨울 수 있습니다.

<희미하게 희석된 회복약> - 50,000코인

→ 물리적인 상처를 30% 정도 회복할 수 있습니다.

<희석된 회복약> - 100,000코인

→ 물리적인 상처를 50% 정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스팬담은 침대에 누워 심각하게 허공을 올려다봤다. 전부 존나 비싸다. 스팬담은 코인샵의 오른쪽 아래를 내려다봤다.

 

[소지 코인: 10,000코인]

 

스팬담은 거지였다. 스킬 <간섭> 어쩌고에 대한 대가로 1만 코인을 뺏기고 열 받아서 산 확성기인지 뭔지 하는 메시지 아이템으로 3만 코인을 날렸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쓰다가 시간제한이 초과돼서 말이 중간에 끊겼다는 거지만.

‘음성 인식으로 해주면 좀 좋아.’

볼수록 중년에겐 친절하지 않은 시스템이라는 사실만 깨닫고 있는 스팬담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라스키 내상이랑 외상은 나았다고 들었는데…….’

잠깨는 약으로 해결이 되는지가 문제였다. 따악, 만 코인이 있단 말이지.

‘이럴 줄 알았으면 이브인지 뭔지한테도 받아놓을걸.’

그냥 죽인 게 너무 아까웠다.

‘아니, 시발 무슨 소리야.’

스팬담이 머리를 흔들었다. 사람을 죽였는데 코인이 아깝다니, 미친 거지.

‘근데 어차피 죽일 거였으니까 코인 정도는 가져와도 됐었을 텐데.’

이중적인 마음에 고민하던 스팬담이 거칠게 머리를 흩뜨리곤 한숨을 푹 내쉬었다. 퀘스트도 당장 해결할 수 있는 건 없고 그 외에 코인이라는 걸 어떻게 벌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어렵다.”

스팬담이 멍하니 생각했다.

누구든 선생님이라도 모셔서 과외라도 받고 싶은 심정이었다. 스팬담이 버벅거리며 허공을 쿡쿡 찔렀다. 그가 끙, 앓는 소리를 냈다.

저 잠 깨는 약을 샀는데 효과가 없으면 그야말로 1만 코인을 날리는 거였다. 그러면 이제 스팬담은 거지새끼가 된다. 여차할 때 간섭인지 뭔지 스킬을 쓸 수가 없어진다는 거다.

‘코인을 대체 어떻게 모으는 거야.’

그때 그 중이병 말로는 사람을 죽이거나 퀘스트를 하면 코인을 준다는 것 같은데…, 다른 퀘스트는 없나? 스팬담이 이것저것 눌러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모르겠다, 도 아니면 모지.”

어차피 저 약 아니면 구매할 수 있는 약도 없었다. 그리고 자신이 언제는 뒷일 생각하고 일을 벌였던가. 고민하던 그가 잠 깨는 약을 구매하기 버튼을 눌렀다.

 

[잠 깨는 약 1개를 10.000코인에 구매하시겠습니까?]

 

구매한다는 버튼을 한 번 더 누르니 구매가 되었다는 알림이 떴다.

“……?”

스팬담이 자리에서 일어나 주머니를 뒤적였다. 주변도 한 번 둘러보고 침대 밑도 한 번 살폈다. 다시 한번 주머니를 뒤진 그가 약인지 뭔지를 대신해 담배를 꺼내 하나를 입에 물었다.

“……씨벌, 어딨는데.”

그가 낮게 신음했다.

 

[소지 코인: 0코인]

 

돈은 없어지고 물건은 안 나왔다. 자판기라면 주먹으로 때리기라도 하지, 홀로그램을 때려봐야 주먹이 통과할 뿐이다.

“……사기당했나, 시발.”

그때 확성기는 구매하자마자 뭔가 떠서 사용한다를 누르니까 바로 홀로그램 키보드가 떴는데.

‘설마 이것도 불러야 나오는 건가?’

팔짱을 낀 채 입에 담배를 물고 방을 왔다 갔다 하던 스팬담이 슬쩍 주변 눈치를 살폈다. 괜히 문도 한 번 잠겼는지 담배 연기가 빠져나갈 구멍도 없이 창문까지 꾹꾹 눌러 잠근 스팬담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지르곤 눈동자를 굴리며 슬쩍 입을 열었다.

“자, 잠 깨는 약.”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스팬담의 얼굴이 순식간에 시뻘게졌다. 그가 창문을 벌컥 열고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끄더니 그대로 침대로 다이빙해 제 얼굴을 베개에 처박았다.

“씨이바아…….”

베개에 눌린 목소리가 웅얼거리며 흘러나왔다. 스팬담의 목덜미는 물론이거니와 얼굴까지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

 

“장관, 괜찮습니까? 얼굴이 영 말이 아니신데.”

“아, 어어…. 그냥…….”

밤새 홀로그램 뒤져가며 잃어버린 잠 깨는 약을 찾아 헤매다 잠도 못자고 물건도 못 찾았다는 얘기는 차마 하지 못하고 스팬담이 말끝을 얼버무렸다.

“큭큭, 애인이랑 하룻밤이라도 보낸 겁니까?”

재브라의 질문에 스팬담이 허허 웃음을 흘렸다. 강제 아웃팅을 당한 그다음 날, 스팬담은 남자 애인이 생긴 장관이 되어 있었다.

다른 요원들도 그 소문을 들었는지 오죽하면 재브라와 카쿠가 후쿠로를 잡아다가 놨을 정도였다. 후쿠로가 미안하다고 사과한 데다가 사실 저게 천성에 가깝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가볍게 넘어갔다.

물론, 진짜 생긴 사람 됐다.

“오늘은 일정 이것뿐이냐는 거다, 챠파.”

“어어, 이거 선박 수주만 재계약하고 해군 본부랑 계약 조율만 해주면 돼.”

사실 본래 지지난 주에 하기로 한 거였는데 해군 본부도 논의할 게 많은지 계속 미루다가 결국 오늘이 되었다. 해군 본부에서 조율한다기에 또 여기까지 왔고 말이다.

‘아이스버그가 올 거라서… 다른 애들은 호위로 데려올 수가 없었지.’

잠입 임무 들어갈 놈들이 벌써 시장이랑 눈 마주치면 곤란하지 않겠는가. 스팬담이 초대받은 곳으로 걸어가며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레온이랑은 좀 어때?”

스팬담의 질문에 재브라가 멈칫했다가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가 눈치껏 후쿠로의 입이 근지러워 보이는 후쿠로의 옆구리를 찔렀다. 후쿠로가 “챠파.”하며 슬쩍 지퍼를 닫았다.

“뭘 어떱니까. 그냥 융통성이라곤 없는 답답한 상사죠.”

“그래? 너무 많이 혼내진 않고?”

“예, 그러니 신경 쓰지 마시고 장관은 퇴사나 잘하십쇼.”

스팬담이 흘긋 재브라를 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후쿠로도 괜찮은 거야?” 스팬담의 질문에 후쿠로가 재브라의 눈치를 살짝 살폈다. 재브라가 그를 흘겨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후쿠로가 슬쩍 지퍼를 열었다.

“그렇다는 거다, 챠파!”

후다다닥 생각한 말을 끝냄과 동시에 후쿠로가 다시 지퍼를 쫙 잠갔다. “그러냐? 다행이네.” 앞으로 걸어가며 대답한 스팬담의 입가가 퍽 부드럽게 호선을 그렸다. 재브라와 후쿠로가 그걸 보곤 키득키득 웃었다.

해군 본부 회의실에 들어가자 이미 아이스버그와 센고쿠와 보르살리노는 도착해 있었다. 스팬담이 꼴찌였다. 물론 지각은 하지 않았고 거의 정각에 도착했을 뿐이다. 그들이 예상보다 빨리 온 듯했다. 아이스버그가 스팬담을 보곤 눈을 살짝 크게 떴다.

스팬담이 가볍게 눈인사를 하곤 고개를 돌려 센고쿠를 보곤 씩 웃었다.

“내 말이 맞았지? 원수님.”

“…….”

센고쿠가 짜증스러운 얼굴로 스팬담을 노려보다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이야, 해군 중장들까지 물 퍼내느라 바빴다고 하던데. 하하하.”

“……쓸데없는 이야기는 삼가지.”

“으응? 쓸데없는 얘기? 우리 배 얘기하러 온 거 아니었나?”

스팬담이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이자 센고쿠가 입술에 힘을 주었다. 그가 퍽 유쾌하다는 듯 얄밉게 히죽거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뭐, 시작하죠.”

스팬담이 고개를 까딱였다.

요는 즉, 최대치로 만든다고 가정했을 때 현재 해군이 요구하는 기간에 요구하는 수량을 맞추긴 힘들다는 얘기였다. 그러니 더 원하면 사이퍼 폴의 납품 수량과 어느 정도 조절하라는 말이었고 말이다.

“뭐, 얼마나 바랍니까?”

“뭐어~ 1년에 20척 정도려나아?”

보르살리노가 가볍게 말했다. 회사가 커지면 물론 도크도 많이 생기고 인력도 많이 생겨서 가능하겠지만 그게 지금 가능한 수치인가? 스팬담이 설핏 미간을 찌푸리곤 고개를 돌려 아이스버그를 보았다.

“아이스버그 씨.”

“아….”

스팬담의 부름에 흠칫 놀란 아이스버그가 그를 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귀사가 이번에 제작해준 배 아주 마음에 들었습니다. 튼튼하더군요. 어떤 배는 포탄 한 방 맞고 중장들까지 내려가서 바가지로 물펐다는데 말입니다.”

“장관!”

스팬담이 하하, 웃는 낯으로 센고쿠를 보곤 다시 아이스버그에게로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사이퍼 폴이 요구한 건 1년에 대략 7-10척 사이였습니다. 좀 까다로운 요구사항이 들어가기도 했으니까 말입니다.”

스팬담의 답지 않은 정중한 말에 아이스버그가 눈동자를 데구루루 굴리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적으로 만날 때는 그렇게나 가볍고 껄렁해서 무슨 양아치 같더니 여기선 제법 태도도 말투도 멀끔하지 않은가.

“그럼 저희 주문만 최대로 잡았을 때 1년에 30척을 건조하게 되는 겁니다. 맞습니까?”

“엄머-, 그렇습니다만.”

“현재 갈레라 컴퍼니에서 1년에 최대 생산가능한 수량이 어떻게 됩니까?”

“충원 예정인 인력까지 포함해서 준비한다면 대략 30척입니다.”

“그럼 그거로 된 게 아닌가?”

아이스버그의 대답을 들은 센고쿠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스팬담이 검지로 가볍게 대리석 탁자를 톡톡 두드리더니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걸로 괜찮겠습니까?”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만.”

“모든 선박을 세계 정부의 것만 만들어도 괜찮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아이스버그가 설핏 미간을 좁혔다. 역시 갈레라 컴퍼니를 만든 일시가 자신 때문에 조금 앞당겨진 게 분명했다. 스팬담은 잠시 고민했다.

“사실 이건 사업가의 입장에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당신들은 신생 업체이니 물론 큰 거래처가 있는 것은 좋습니다. 다만, 큰 거래처 하나에 의지하는 건 여차할 때 좋지 않은 일이라고 봅니다.”

“아…….”

스팬담의 말에 아이스버그의 눈이 확 커졌다. 머리가 좋으니 여기까지만 말해도 이해한 모양이었다. 스팬담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특히나 생산 가능한 최대치를 전부 돌리는 건 한치의 실수나 오차도 용납하지 않을 거라는 말인데…, 인생은 사실 계획대로 안 되는 일이 더 많지 않습니까.”

“…….”

“그래서 제안입니다만…, 해군 본부 15척. 사이퍼 폴에 5척. 1년 납품은 그렇게 하시죠. 나머지 10척은 여유분으로 두시는 편이 좋을 듯합니다.”

스팬담의 말에 아이스버그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세계 정부에만 전부 납품하는 것보단 다양한 업체와 수주 계약을 맺는 것이 장기적으로 봤을 때 더 유리하다는 사실을 아이스버그도 깨달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홍보도 다양한 배가 다양한 곳을 돌아다니는 편이 좀 더 나을 것이다. 입소문이라는 게 괜히 있는 게 아닌데 해군이나 사이퍼 폴에서만 배를 돌려봐야 유명세를 타기는 어려울 테고.

“엄머- 확실히…, 그러는 편이 좋겠군요.”

“해군 본부도 15척이면 부족하진 않을 것 같은데, 어떻습니까?”

스팬담이 보르살리노와 센고쿠를 보면서 말했다. 아마 저들도 최대치로 부른 걸 테고 적당히 조율하면서 수정할 생각이었을 것이다.

“…흠, 뭐. 그렇게 하지.”

센고쿠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쪽에서 생각하는 적정선에서 맞춘 모양이었다. 그리고 어차피 올해는 예산이 그렇게 많이 남지도 않을 테지. 계약금을 꽤 줬을 테니.

“그럼 가장 중요한 가격이네만, 사이퍼 폴에는 얼마에 납품하고 있지?”

아이스버그가 입을 열려는 것을 스팬담이 가로채서 대신 말했다. 대략 갈레라 컴퍼니와 계약한 금액의 1.5배 수준의 값이었다.

“…그거언, 조오금 비싸지 않나아?”

보르살리노가 끼어들었다. 스팬담이 고개를 기울였다. 솔직히 2배 부르려다 참았다. 그리고 이렇게 해도 개개인이 의뢰하는 값보다는 여전히 저렴했고.

“에엥? 싸다고 계약했다가 우리 애들 배 위에서 푹 쉴 때 해군에선 무슨 일 있었더라……?”

“…….”

“그렇군, 부하들의 목숨값으로 그건 비싸다는 거구나. 재브라, 후쿠로 너희는 해군 안 가서 다행이다.”

스팬담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제 뒤에 서 있는 두 사람의 손을 붙잡고 툭툭 두드렸다.

“저도 장관님 옆이 좋습니다.”

“나도다, 챠파파!”

“역시 그렇지? 배에 돈 아끼는 해군 갔다간 바닥에서 물이나 퍼내고 있어야 했을 거야…….”

퍽 짓궂은 낯으로 재브라와 후쿠로가 장단을 맞췄다. 그에 센고쿠가 미간을 확 구겼다. 물론, 사이퍼 폴 장관이 한 말이 틀린 말은 아니고 예산을 조금 초과하지만 계약 못할 금액도 아닌데 저놈의 장관이라는 놈은 어린놈이 왜 저렇게 얄미운지 알 수가 없었다.

센고쿠가 한숨을 내쉬고 입을 열었다.

“……하지, 해. 그 가격에 계약하겠다.”

본인이 납품할 배에 대해 결정되는데 전혀 끼어들지 못하고 있던 아이스버그가 눈을 굴리며 고개를 끄덕이려는 때였다.

“엥? 무슨 소립니까. 그건 저희가 계약한 건데요. 그때랑 지금이랑 인건비에 재료비가 얼마나 올랐는데……, 대충 마지노선으로 계산해도 이 정돈 될 것 같은데……, 제 계산이 틀렸나요? 아이스버그 씨.”

스팬담이 계산하는 척을 하며 손가락을 내밀어 보였다. 1.5배가 아니라 1.8배의 가격이었다.

아이스버그는 스팬담이 대체 뭔 짓을 하나 잠시 보다가 그에게 크게 나쁜 계약은 아니었기에 그냥 조용히 입 다물고 장단을 맞춰주기로 했다.

“…엄머-, 뭐……. 맞습니다.”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하는 스팬담과는 달리 아이스버그의 목소리는 다소 뻣뻣했다. 다른 건 몰라도 이런 쪽으로 거짓말을 해본 적은 없기 때문이었다.

‘아니, 이러다가 계약이 잘못되면 어쩌려고 하는 거지?’

아이스버그가 생각하는 도중, 아니나 다를까 센고쿠의 얼굴이 확 굳었다.

“그 정도 가격은 어렵다. 됐네, 차라리 다른 조선회사를 알아보도록 하지.”

센고쿠가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아이스버그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그가 스팬담을 보자 스팬담이 그에게 조용히 있으라며 가볍게 눈짓했다. 아이스버그가 입술을 달싹이다가 팔짱을 낀 채 이내 꾹 닫았다.

“갈레라 컴퍼니가 워터세븐에 있는 조선소를 대부분 통합했는데…… 뭐, 어디서부터 조달하시려고 그러시는지……. 어딘진 몰라도 운송료니 뭐니 하면 더 비싸지겠는데. 뭐, 그러세요. 저희야 고맙죠.”

스팬담이 어깨를 가볍게 으쓱였다. 그에 센고쿠가 멈칫했다. 센고쿠가 스팬담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럼 20척 전부 사이퍼 폴에서 계약하는 걸로 할까요? 대신 이걸로 세계 정부쪽 계약은 더 받아주시면 안 됩니다~? 뭐. 이쪽도 배가 다 노후해서 변경할까 했는데 다행이네.”

스팬담이 재브라에게 손을 내밀었다. 재브라가 들고 있던 서류를 스팬담에게 주었다. 스팬담이 서류 봉투에서 서류를 꺼내 펜을 들더니 뭔가를 적는 듯하더니 그걸 다시 봉투에 넣어 아이스버그가 있는 곳으로 휙 밀었다. 테이블 위에서 미끄러지듯 움직인 서류가 아이스버그의 바로 앞에 멈춰 섰다.

“저희 쪽 수정 계약서입니다. 확인하고 도장찍으신 뒤에 이쪽으로 보내주시면 될 듯하고… 뭐, 대충 대화는 끝난 것 같으니 저는 이만…….”

“……이보게, 아이스버그 씨.”

센고쿠가 일으키던 몸을 다시 앉히며 말했다. 아이스버그가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네.”

“…사이퍼 폴이 제시한 가격이면 진행이 가능한 건가?”

“그렇긴 했습니다만…, 아. 근데 방금 계약서를 받아서 말입니다….”

아이스버그가 손에 쥔 서류 봉투를 보여주며 다소 난감한 듯 말했다. 그리고 실제로도 난감했다. 방금 수정한 계약서를 줬는데 다시 물러달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사이퍼 폴, 예산이 꽤 빡빡할 텐데 물러주는 게 어떤가.”

“아니, 필요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저희도 빡빡한데 그쪽이 사정해서 마련한 자리에서 파토를 내니까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스팬담이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사실 여러모로 해군의 태도가 너무하긴 했다. 물론 사업하는 인간들이 아닌 건 안다. 그래도 그렇지 만나서 중재하고 조율 좀 해달라고 부탁해두곤 면전에서 다른 데 알아본다고 하는 게 무슨…….

“무슨 계약이 애들 장난도 아니고 소개해서 중재 좀 해달라더니 사람 꼴을 면전에서 우습게 만들고… 금액이 문제였으면 미리 조율을 좀 보지 그랬습니까. 전 몇 척인지만 정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불쾌한 낯으로 스팬담이 말하자 센고쿠가 미간을 좁혔다. 확실히 그 부분은 예상하지 못한 그들의 문제였다. 해군 본부든 세계 정부든 항상 우위에서 뭔가를 결정해 계약하기만 했지, 이런 식의 계약은 처음이었던 탓이다.

그리고 뭣보다 센고쿠는 전술은 할 줄 알아도 사업은 할 줄 몰랐다. 그래서 그나마 좀 이익에 밝은 보르살리노를 데리고 오긴 했는데, 그도 사업이 전문은 아니었다.

그와 반대로 스팬담은 어쨌든 전생에는 형님 모시며 뒤에서 엿본 짬이 있었고 밀고 당기기를 할 줄 알았으며 현생에는 그래도 부잣집에서 태어나 돈이 돌아가는 구조를 알고 돈 냄새도 잘 맡았다. 사업에 재능이 있었단 말이다.

“그건, 우리가 실례했다. 아까 자네가 제시한 대로 15척으로 합의를 보고 싶은데, 어렵겠나?”

센고쿠도 제 무례함을 깨달았는지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스팬담이 흘긋 바짝 긴장한 것이 역력한 아이스버그를 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더 올리려면 올리겠지만, 저렇게 굳어서야….

“하는 수 없죠, 이쪽도 20척까진 예산이 빠듯했으니까 말입니다.”

스팬담이 머리를 긁적이며 슬쩍 약한 소리를 하고 물러났다.

“그럼 얼른 계약서 가져오십쇼.”

“보르살리노.”

“네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훌쩍 사라졌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훌쩍 나타났다. 사라졌다가 나타나는 게 퍽 신기해서 잠시 감상했다.

‘화장실 못 가서 지리는 일은 없겠군.’

스팬담이 생각하며 그들이 세부 내용이나 일정을 조율하는 걸 가만히 구경했다. 도장까지 다 찍은 뒤에야 센고쿠의 얼굴에서 시름이 사라졌다.

“그럼 잘 부탁하지.”

“물론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흐아암, 스팬담이 하품을 하며 눈두덩을 가볍게 비볐다. 아이스버그가 그 모습을 봤는지 다 식은 녹차를 입가에 가져다 대며 미묘한 낯으로 입을 열었다.

“스팬담…씨께서는 피곤해 보이시는군요.”

“아….”

스팬담이 막 대답하려는 데 뒤에서부터 지이익, 불길한 소리가 났다.

“장관은 어제 남자 애인이랑 밤새워 노느라 잠을 못 잤다는 거다, 챠파파!”

“푸흡-!”

“야, 이 미친 후쿠로 새끼야!! 지퍼 간수 좀 하라고 했지! 거, 아닙니다. 우리 장관이 남자 애인이 있긴 한데 어제 밤새워 놀진 않았……죠? 장관.”

불난 집에 물 부으랬더니 기름을 들이붓는 재브라를 본 스팬담이 웃는 낯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

“죄, 죄송합니다.”

아이스버그가 뿜어낸 녹차가 스팬담의 위로 분수처럼 쏟아져 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도 깜짝 놀랐는지 급히 일어나려는 걸 본 스팬담이 가볍게 손을 내젓곤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대충 머리를 털고 얼굴을 닦았다.

“하아…….”

이제 해군 본부에도 퍼지게 생긴 소문에 스팬담의 얼굴에 수심이 깊어졌다. 그가 말없이 아이스버그를 보았다. 아이스버그가 움칫 어깨를 떨더니 고개를 슬쩍 돌렸다.

“뭐얼~ 애들 겁주지마아~ 사람 취향이 그럴 수도 있지이~~”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보르살리노가 어깨를 도닥이며 퍽 관대하게 말했다. 노인의 반열에 오른 센고쿠는 그걸 도통 납득할 수 없다는 거무죽죽한 낯이었다.

“……너, 호모냐?”

스팬담이 관대하기 짝이 없는데 묘하게 친근해진 보르살리노의 말에 미묘함을 느끼고 물었다. 보르살리노가 눈꼬리를 살살 휘며 웃었다.

“뭐어~ 굳이 어느 쪽이냐고 묻는다면…, 둘 다 가능한 쪽?”

오케이, 열린 마음의 양성애자라는 거지. 스팬담이 고개를 끄덕였다. “원나잇은 안 하나아~?” 묻는 반쯤 장난이 섞인 목소리에 스팬담은 뻣뻣하게 굳어져 아이스버그를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난, 애인, 일편단심이라서.”

“아깝네~ 차이면 말해줘어~~”

눈도 마주치지 않는 스팬담의 말에 보르살리노가 미련 없이 물러났다. 센고쿠는 마치 젊은이들의 이해할 수 없는 문화를 마주한 사람처럼 입을 떡 벌리고 있었다. 보르살리노가 웃는 낯으로 손수 그 벌어진 턱을 툭 닫아주었다.

“아이스버그 씨. 저희 것도 사인하시죠. 갑자기 집 가서 씻고 싶어졌습니다.”

“아, 아…? 아! 네, 다시 수정해주시면….”

“열어보시고 읽어보시고 그냥 사인하시면 됩니다.”

스팬담의 경직되고 딱딱한 말에 지은 죄가 많은 아이스버그가 서류를 급히 꺼냈다.

“그래도 20척 부분은 수정을…….”

서류를 읽던 아이스버그가 미묘한 낯으로 고개를 들었다. 스팬담이 고개를 까딱였다.

“문제라도?”

“…아니, 없습니다.”

서류에 수정된 숫자라곤 계약 기간이 2년이라고 되어 있던 숫자가 10년으로 변경되어 있었다. 그나마도 가격은 2년에 한 번씩 조율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어서 딱히 그에게 해가 되는 내용은 없었다.

심지어 이미 저쪽의 사인과 도장은 찍혀 있었다. 아이스버그가 사인과 도장을 찍고 한 부를 스팬담에게 내밀었다. 재브라가 그걸 대신 받아왔다. 스팬담이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 20척은 어떻게 된 거지?”

젊은이의 충격적인 문화에서 간신히 벗어난 센고쿠가 물었다. 스팬담이 씩 웃었다.

“사이퍼 폴에 1년에 20척이나 필요 없습니다.”

센고쿠의 입이 또다시 떡 벌어졌다. 그는 가볍게 손을 흔들곤 회의실을 벗어났다. 스팬담이 사라진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이스버그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웃기는 남자군.’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

 

밖으로 나온 스팬담이 잠깐 화장실에 들러 손을 씻고 있는데 띠링- 알림이 울렸다.

 

[System 알림]

[플레이어 3 ‘정보상인 리비아’가 <채팅 걸기> 아이템을 이용하여 ‘심판자 ???’에게 ‘채팅’을 걸었습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 (10초 뒤 자동 수락됩니다.)]

 

뭔데, 이게.

스팬담이 미간을 찌푸리며 글자를 몇 번 읽는 사이 10초가 훌쩍 지났다. 홀로그램이 휙휙 바뀌더니 허공에 뭔가가 훅 떠올랐다.

 

[채팅창]

▶ 정보상인: 안녕하세요! 심판자님, 혹시 지금 잠깐 챗 ㄱㄴ한가요?? 긴히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챗 드렸습니다! (읽음)

 

허공에 퍽 낯익은 홀로그램 키보드가 떠올랐다. 그에 스팬담이 미간을 찌푸렸다.

“하, 챗?”

ㄱㄴ은 또 뭔데? 그가 세면대 앞에서 퍽 심각한 얼굴로 서서 양손의 검지 두 개를 쫙 폈다.

‘위치 발각된 건 아니겠지?’

그가 눈을 한껏 가늘게 뜨고 상체를 숙이곤 홀로그램 키보드 위에 검지를 톡톡 움직였다.

 

[너,,누구냐,,???챗?은,,뭐고,,ㄱㄴ,,은또무ㅓ]

 

띠링-!

열심히 쓰고 있는데 또 알림이 떴다.

 

▶ 정보상인: 제가 이상한 사기꾼처럼 보일 건 아는데 그래도 먹금하지 마시고 답 좀 부탁드릴게요! (읽음)

 

스팬담이 인상을 찡그렸다. 그가 마저 홀로그램 키보드를 두드렸다.

 

[너,,누구냐,,???챗?은,,뭐고,,ㄱㄴ,,은또무ㅓ고,,먹금은뭔데,,??]

 

너무 딱딱한가 싶어서 스팬담이 미간을 좁혔다.

‘그러고 보니 이러면 시비 거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고 했지.’

한숨을 내쉰 스팬담이 깨알 같은 홀로그램 키보드를 다시 살폈다. 그가 한참 만에 찾던 글자를 찾아서 다시 손가락을 움직였다.

 

[너,,누구냐,,???챗?은,,뭐고,,ㄱㄴ,,은또무ㅓ고,,먹금은뭔데,,??^^]

 

그가 막 특수 문자 두 개를 추가했을 때였다.

띠링-!

또다시 알림이 왔다.

 

▶ 정보상인: 저기요?? 님ㅜㅜ 대답 좀요. 시간 오래 안 뺏을게요. 얘기라도 쫌 들어주시면 안 되나요? 설마 차단한 건 아니죠? 저 딜 들어가는 스킬은 거의 없고 서폿 타입이라 위협도 안 될 거예요ㅜㅜ 버프 위주에요. PK 하려는 거 아니니까요...

 

스팬담의 얼굴이 와그작 일그러졌다.

“씨이벌…, 뭐라는 거야…….”

그가 일단 제가 쓴 채팅창의 보내기 버튼을 꾹 눌렀다. 쓰고 있다는 건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문제는…….

 

[System 알림]

[<채팅> 메시지 발송에는 1회 1코인이 소모됩니다. (현재 소유 코인: 0코인.)]

 

발송이 안 됐다는 거지만.

니미럴…….

울컥, 속에서 뭔가가 차오른 스팬담이 제 날려버린 10분 동안의 고생에 몸을 부르르 떨며 홀로그램 창을 전부 X버튼을 눌러 화면을 끄고 몸을 홱 돌렸다. 그리고 멈칫했다.

“……아, 그, 하도 안 나오셔서… 하던 일 계속 하십쇼.”

“…그런 거 아니다, 재브라.”

“아, 네.”

재브라가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스팬담이 입을 꾹 다물고 화장실을 막 나가려는 때였다. 허리를 숙여서 재브라가 눈치를 쓱 보더니 귓가에 입을 가져다 댔다.

“…장관. 거, 말입니다. 지건 연습은…, 그렇게 하진 않습니다.”

“…….”

스팬담의 목덜미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가 이윽고 비명을 지르며 해군 본부의 복도를 내달리다가 그대로 슬라이딩해 앞으로 자빠졌다.

퇴사까지 앞으로 7일 남은 시점이었다.

 

**

 

“거, 장관 미안하다니까요?”

“…….”

“장관이 좋아하는 닭튀김 사 왔습니다.”

“잘못했다는 거다, 챠파파.”

“…….”

소파에 무릎을 끌어안고 얼굴을 파묻은 채 1시간이나 움직이지 않고 있는 스팬담의 앞에서 재브라와 후쿠로가 발을 동동 굴렀다.

대차게 슬라이딩해서 무릎에 멍들고 코피 쏟아진 게 바로 사흘 전이다. 그래, 그건 둘째치고 스팬담이 우울해하고 있으니 요원들이 재브라를 추궁해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물었고 재브라는 있었던 일을 요원들에게 말해준 모양이다.

그래, 그것도 사실 차치할 수 있었다. 문제는 사흘 만에 어느새 사이퍼 폴에 또 소문이 퍼져 있었다는 거지만.

“스팬담씨, 괜찮으세요?”

레온이 스팬담의 옆에 앉아 그의 어깨를 토닥거리며 걱정스럽게 말했다. 그가 포크로 재브라가 사 온 닭튀김을 찍어 스팬담에게 가까이 가져다 댔다.

“자, 재브라가 사 왔대요. 닭튀김 드셔보세요.”

“…….”

스팬담이 슬쩍 고개를 들어 코앞에 있는 포크를 단숨에 물어 닭튀김을 입에 넣었다. 우물우물 씹던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맛있네…….”

“정말입니까?”

“다행이….”

“내 기분이랑 정반대로…….”

우울하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반색하던 재브라도 위로해주던 레온도 굳어버렸다. 레온이 어색하게 웃으며 하나 더 찍어서 스팬담의 입에 밀어 넣었다.

“자자, 우울해하지 마시고요. 스팬담 씨가 약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잖아요. 강한 사람을 동경하거나 강해지고 싶어 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죠.”

“……하아.”

시발, 그거 아니라고.

스팬담이 차마 그렇게 말하진 못하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는 홍길동의 마음이 이러했을까. 쓸데없는 생각까지 하던 스팬담은 이미 땅이 꺼지고도 남았을 한숨을 내쉬고도 나올 한숨이 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로 또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이제 며칠 뒤면 관두시니까 앞으론 위험한 일도 없을 거고 강해져야겠다는 압박감에 시달릴 일도 없으실 거예요.”

레온의 말에 스팬담이 목덜미를 손바닥으로 가볍게 문지르며 흘긋 레온을 보았다. 요원들의 시선이 레온에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스팬담도 묘해진 분위기를 느끼곤 고개를 끄덕이며 웅크렸던 몸을 폈다.

“그러냐.”

스팬담이 레온에게서 포크를 받아 닭튀김을 입에 넣었다. 맛있긴 맛있네.

“재브라, 나 술.”

“오, 오우! 잠시만 기다리쇼!”

지은 죄가 있는 재브라가 후다닥 탕비실로 뛰어 들어갔다. 로브 루치가 그걸 보더니 제 몫의 포크를 들며 입을 열었다.

“들개, 브랜디도 가지고 와라.”

“네가 가져다 먹지? 괭이 시키가.”

“앗, 그럼 나도 사케 가져다 줘! 재브라.”

“……어휴, 알겠습니다.”

예비 장관인 레온까지 나서자 재브라가 결국 한숨을 내쉬며 터덜터덜 품에 술을 잔뜩 안고 나왔다. 거기에 냉장고도 긁어왔는지 아주 안주까지 이것저것 꺼내왔다.

“거…, 일부러 한 거 아닙니다. 후쿠로 저놈이 또 저럴 줄 몰랐다니까요.”

“챠파파…….”

“그러게 처음 데리고 왔을 때 제대로 교육해두셨어야죠, 스팬담 씨. 첩보요원이 입이 가벼운 건 문제라고요.”

재브라가 가져온 술을 뜯은 레온이 웃는 낯으로 스팬담을 타박했다. 후쿠로가 움찔 어깨를 떨곤 스팬담의 눈치를 쓱 살폈다.

스팬담은 별다른 표정 없이 어깨를 가볍게 으쓱이자 칼리파가 술을 뜯어 술잔에 따르려고 했다. 스팬담이 냉큼 그걸 뺏어 제 손으로 술을 따랐다.

“……성희….”

말을 하던 칼리파가 아차 싶었는지 입을 다물었다. 스팬담이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레온도 스팬담의 옆에 앉아 제 잔에 술을 따라 마시며 닭튀김을 야금야금 먹었다.

“후쿠로는 충분히 임무를 잘 수행하고 있다. 딱히 사고 친 것도 없는데 굳이 뭐 하러 손을 대겠냐. 그리고 난 후쿠로가 수다 떠는 거 좋아해서 말이다.”

“챠파파….”

“에이, 그러니까 스팬담 씨를 개나 소나 다 무시하는 거라니까요.”

술이 들어가서 다소 머리에 힘이 풀렸는지 조금 적나라해진 레온의 말에 스팬담이 설핏 웃었다. 괜히 다른 요원들이 스팬담의 눈치를 살필 정도였다. 스팬담은 별 변화 없이 여상스럽게 닭튀김을 베어 물고 술을 마셨다.

“그러냐? 내가 그렇게 무시당하고 있는 줄은 몰랐네.”

“그렇죠! 일반 요원들이 말을 함부로 거는 것부터 시작해서 장관의 위엄이 전혀 없다는 증거라고요!”

“음, 그렇군.”

덤덤하게 영혼 없이 대답한 스팬담이 옆에 앉아 설핏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재브라의 입에 닭튀김 하나를 찍어 입에 밀어 넣었다.

“……뭡니까?”

“맛있냐?”

“뭐, 근방에서 유명한 데였으니까요.”

재브라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스팬담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무심하게 입을 열었다.

“나도 심히 맛있다. 그러니 얼른 먹어라, 다들.”

옆에 있는 말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있으니 너희도 신경 쓰지 말라는 듯한 태도에 결국 멈췄던 그들도 손을 뻗어 하나둘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애초에 말입니다~ 장관 자리는 제자리였단 말입니다……. 그걸 스팬다인이 어? 자기 아들이라는 이유로 낙하산으로 스팬담 씨를 꽂아 버리니까아…. 제가 얼마나 화가 났겠습니까아……!”

스팬담이 아예 제게 들러붙어 주정을 부리는 레온을 보곤 그러냐며 가볍게 대꾸했다. 술잔을 기울이며 그가 레온을 힐긋 보았다. 취해도 과하게 취했다.

‘술이 약하군.’

그가 짧은 한숨을 흘렸다.

“레온, 너 많이 취한 것 같은데 그만 들어가서 쉬는 게 어떠냐.”

“하아아? 무슨 소립니까! 아직 한창이라고요! 원래 내게 될 장관 자리였는데……, 아무 능력도 없는 바보가 올라가고…… 훌쩍, 내가 더 잘 할 수 있었는데…….”

“…….”

퍽 싸하게 가라앉은 술자리에 스팬담이 결국 잔을 내려놓았다. 그가 제게 들러붙은 레온을 보곤 미간을 가볍게 문질렀다.

“레온, 사흘 뒤면 네 자리가 될 거잖냐. 그때 잘해봐라.”

“잘할 겁니다아! 당신이 다 떨어뜨려 둔 장관 위엄도 제가 다 세워둘 거고…….”

레온의 말을 듣던 스팬담이 고개를 끄덕이며 재브라를 보았다.

“재브라.”

“앙? 뭡니까.”

“이 새끼 시끄럽다, 침대에 던져놓고 와라.”

듣던 중 퍽 반가운 소리에 재브라가 냉큼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기절시켜도 된다.” 스팬담이 덧붙였다. 재브라가 레온의 뒷목을 내리치더니 그대로 장관 집무실 안쪽에 있는 침대에 레온을 던지고 나왔다.

“이제야 좀 조용하네.”

스팬담이 퍽 시끄러웠다는 듯 불만스럽게 말했다. 재브라가 속 시원한 표정으로 스팬담의 옆에 다시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자 맞은편에 있던 카쿠가 입을 열었다.

“장관, 괜찮은 겐가?”

“뭐가?”

“저런 말 듣고도 괜찮냔 말일세.”

“아아…….”

스팬담이 닭튀김을 하나 더 베어 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열등감에 젖어 질투하는 인간들이야 사방에 널렸는데 뭘.

“딱히 나한테 뭐라고 하는 건 상관없지.”

스팬담이 자리에서 일어나 코트를 가져오더니 주머니에서 뭔가를 우르르 꺼냈다. 작은 선물상자들이었다. 스팬담이 그걸 하나씩 요원들에게 건네주었다.

“요요이~~?! 이게 무엇이오리까~~?”

“뭐, 일전에 주기로 했던 선물 못 줬잖냐. 그것도 있고 지금까지 부족한 상사 모시느라 수고했다. 뭘 줄까 고민했는데… 그냥 넥타이랑 손수건으로 다 통일했다.”

너희가 양복 입는 일이 많으니까 말이다. 말을 덧붙인 스팬담이 멋쩍은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뭐, 그래도 색은 다 다르긴 하니까 말이다. 아, 칼리파만 선글라스.”

스팬담이 그렇게 말하곤 로브 루치의 어깨에 앉아있는 비둘기에게 손짓하곤 제 허벅지를 툭툭 두드렸다.

“핫토리, 이리 와 봐.”

“크룻포~?”

푸드덕, 날아오른 핫토리가 스팬담의 허벅지에 내려앉았다. 스팬담이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핫토리에게 달아주었다. 붉은색 넥타이였다.

“자, 네 선물.”

“크룻포?!”

“앞으로도 루치랑 잘 지내라.”

날아오른 핫토리가 그대로 스팬담의 뺨에 얼굴을 한 번 비비적거리더니 로브 루치의 어깨로 날아가 가슴을 앞으로 쭉 빼 보였다. 로브 루치가 묘한 표정으로 스팬담을 보더니 제 비둘기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사실 칼리파한텐 선물 하나를 더 주려고 했는데…….”

스팬담이 팔짱을 끼곤 고개를 기울였다.

“기다려봐, 찾으면 줄게.”

그놈의 잠 깨는 약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아야만 했다. 그러려면 일단 코인을 벌어서 채팅인지 뭔지로 정보 어쩌고한테 물어봐야만 했다. 물론 나흘째 답변을 못 해주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코인…, 어떻게 벌지?’

스팬담이 잠시 고민하며 고개를 기울였다. 퀘스트라도 뭔가 하나 뜨면 좋겠는데 말이다. 그가 팔짱을 낀 채 고개를 기울였다. 분명히 일전에 죽인 중이병이 코인을 벌려고 사람을 죽였다고 했다.

‘…해적은 죽여도 되지 않으려나.’

아니, 그러다 잘못해서 자신이 죽을 수도 있다.

‘들키지 않고 한 명 정도라면…….’

어차피 해적들에겐 현상금이 걸렸으니까 말이다. 그것도 죽이든 살리든 상관없는 쪽이 아니던가.

“어-이, 장관.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십니까?”

재브라의 말에 스팬담이 아차, 눈을 끔뻑이며 머리를 흔들었다. 애들이 전부 그를 보고 있었다.

“어, 그냥…. 앞으로 뭐 해 먹고 살지?”

“뭐야, 먹고살 길도 생각 안 해두고 일단 때려치우는 겁니까?”

퍽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한 재브라가 키득키득 웃었다. 스팬담이 불퉁하게 술잔을 기울이며 입을 열었다.

“뭐…, 나야 아버지 있잖냐.”

“파더콤.”

“파파보이.”

“……아니, 이 자식들 진짜.”

칼리파와 카쿠의 말에 스팬담이 주먹을 꽉 쥐며 부르르 떨었다. 있는 부모님 돈 좀 열심히 쓰겠다는 게 뭐가 나쁘단 말인가. 불만스럽게 바라보자 블루노가 먼저 입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장관님.”

“아아, 뭐…. 별 것도 아닌데.”

블루노의 인사에 스팬담이 멋쩍은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는 그를 시작으로 다른 이들도 입을 열기 시작했다는 거지만 말이다.

“저도 감사합니다, 장관님.”

“잘 쓰겠구먼.”

칼리파와 카쿠가 인사를 건네고 재브라도 제 물건을 뜯어보더니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오우, 챙겨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음에 든다는 거다, 챠파파!”

“아으으!! 이 쿠마도리 감동하였사옵니다~~ 이 기분 할복으로 보답을~~!!”

“아니, 그건 보답이 아니라 사람 마음에 칼 꽂는 짓이니까.”

스팬담이 무릎 꿇은 쿠마도리를 보곤 급히 말렸다. 쿠마도리가 “으으음~~ 진심을 보여줄 기회였는데 아쉽도다~~”하면서도 순순히 일어나 제 넥타이를 바꿔서 착용했다. 연녹색의 넥타이가 꽤 잘 어울렸다.

“어떻소이까~~”

“음, 역시 내 안목 완벽하다 싶다.”

“장관께서는 스스로에 대한 평가가 높으시군요.”

“……너만 할까, 루치.”

“저는 객관적으로 봐도 뛰어납니다.”

자존감이 하늘을 찌르는 로브 루치의 말에 스팬담이 소파에 몸을 기대며 키득키득 웃었다. 애들 자존감이 높다는 데 딱히 나쁠 일도 없었고 말이다.

“그러냐.”

“그래도 이건 감사합니다. 피 안 묻도록 조심해야겠지만 말입니다.”

“비꼬는 거냐? 하지만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까만 색이잖냐. 하나쯤은 흰색으로 포인트 줘도 좋지. 핫토리랑 세트로 해주려다…….”

검은색에 붉은 넥타이라니 무슨 피의 사신 같아서 관뒀다.

‘코인샵에 괜찮은 것도 많던데.’

무슨 1회 방어 어쩌고 액세서리 같은 것 말이다. 코인이 없으니 거기서 선물을 사줄 수가 없었다. 역시 일을 관두면 해적 소탕이라도 해야겠다 싶었다.

‘천칭이랑 심판 썼을 때 즉사할 새끼들만 골라서…….’

며칠째 답을 안 해주는 것도 문제지만, 일단 1만 코인이나 날릴 순 없었고 말이다.

“얘들아.”

스팬담의 나직한 부름에 그들이 스팬담을 보았다. 스팬담이 힐긋 그들을 보더니 술을 몇 모금 마시곤 슬쩍 입을 열었다.

“뭐…, 썩 버거운 직책이었다만, 너희들 상사라서 즐거웠다. 편하게 대해줘서 고마웠다.”

“……오우, 뭘 이걸로 끝인 것처럼 말합니까.”

“아니, 어쨌든 직장에서 볼 일은 없으니까. 어쨌든 오늘은 술이나 마시자.”

낮부터 벌어진 술판이 끝이 난 것은 늦은 오후의 일이었다.

 

**

 

로브를 뒤집어쓰고 워터세븐까지 나온 스팬담이 흘긋 절벽 아래를 보았다. 해적들이 진을 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정말이었다.

‘코인 벌기 좆빠지게 힘드네.’

오늘부터 출근을 안 해도 되게 됐는데 코인인지 뭔지를 벌러 나와야 했다는 거지만 말이다. 스팬담이 한숨을 내쉬며 ‘채팅’을 생각하자 홀로그램 창이 떴다.

 

[채팅]

▶ 정보상인: 안녕하세요! 심판자님, 혹시 지금 잠깐 챗 ㄱㄴ한가요?? 긴히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챗 드렸습니다! (읽음)

▶ 정보상인: 제가 이상한 사기꾼처럼 보일 건 아는데 그래도 먹금하지 마시고 답 좀 부탁드릴게요! (읽음)

▶ 정보상인: 저기요?? 님ㅜㅜ 대답 좀요. 시간 오래 안 뺏을게요. 얘기라도 쫌 들어주시면 안 되나요? 설마 차단한 건 아니죠? 저 딜 들어가는 스킬은 거의 없고 서폿 타입이라 위협도 안 될 거예요ㅜㅜ 버프 위주에요. PK 하려는 거 아니니까요...(읽음)

▶ 정보상인: 정말 부탁드릴 게 있어서 그래요, 어느 쪽이든 반드시 사례하겠습니다. (읽음)

▶ 정보상인: 심판자님? (읽음)

▶ 정보상인: 싫으면 싫다고라도 대답해주시면 안 되나요?? ㅜㅜ (읽음)

▶ 정보상인: 혹시 바쁘신 거면 나중에라도 꼭 답변 주세요. 이 채팅창 7일권이라 일주일은 유효하니까요. 정보 상인용 특수 랜덤 아이템이라 코인샵에 때마침 올라와서 큰맘 먹고 산 거예요ㅠㅠ 30만 코인……. (읽음)

▶ 정보상인: 아, 읽씹 좀 그만하시고 답이라도 주세요!! 진짜 개너무하시네…. (읽음)

▶ 정보상인: 제가 1만 코인 드릴 테니까 답변이라도 주세요ㅜㅜ (읽음)

▶ 정보상인: 제 동료가 필요한 도움이 있으면 뭐든 도와준다고 하는데, 잠깐 챗이든 접선이든 어려울까요? (읽음)

 

지난 닷새간 쌓인 글자 수가 상당했다. 그리고 앞으로 채팅창 유효 시간이 14시간도 남지 않았다. 그러니까 코인을 벌어서 뭐라도 답변은 해줘야 했다.

뭣보다 잃어버린 잠 깨는 약도 찾아야 했고 말이다. 스팬담이 한숨을 내쉬었다. 답장을 안 하고 싶어서 안 하는 게 아니라고 말해야 하는데 말이다.

‘이 천칭은 근데 한 사람한테 한 번씩만 사용 가능한가?’

아래로 해적 무리가 보였는데 한 번에 사용할 수 있으면 딱 좋을 텐데 말이다. 스팬담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절벽 위에 바짝 엎드려 눈만 살짝 아래를 보며 스팬담이 스킬창을 보고 생각했다.

‘스킬, 판결의 천칭.’

동시에 스팬담의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해적의 머리 위로 천칭이 떠올랐다.

“오, 되네?”

다만 시야 밖으로 벗어난 이들에 한해서는 천칭이 생성되지 않았다. 시야에 들어와야 하는 조건이라도 있나 싶었다. 스팬담의 앞에 수많은 창이 생성되었다.

‘아, 어지러워.’

그가 시선을 내리고 있으려니 아래에 있던 해적들도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엥? 뭐, 뭐냐. 이게!”

“이상한 게 머리위에 떠올랐어!”

“저울…?”

이게 플레이어 외의 인물에게도 적용이 되는 모양이다. 그리고 사용하면 누구의 눈에든 보이는 모양이었고 말이다. 몰래 쓸 수는 없을 듯했다.

“누구냐! 누가 이런 짓을 하는 거야!”

“근데 이게 대체 뭐지? 잡히지도 않는데….”

“공격인가? 해군이냐!”

스팬담이 혹여나 들킬까 빼꼼 내밀고 있던 눈도 뒤로 물렸다.

모거니아 놈들이었는지 천칭은 대부분 왼쪽으로 기울었다. 개중에는 천칭이 완전히 새빨갛게 물든 놈들도 꽤 됐다. 이윽고 마지막 놈들까지 전부 죄목이 샅샅이 밝혀졌다.

흘긋 봐도 대부분 약탈과 살인, 방화, 절도 등의 질 나쁜 범죄뿐이다.

‘스킬, 심판.’

스팬담의 생각이 끝나기가 무섭게 갑자기 하늘에 먹구름이 몰리더니 비가 내리듯 번개가 여러 갈래로 나뉘어 내리쳤다. 콰앙-! 콰앙-! 산발적으로 뭐가 터져나가는 소리에 스팬담이 절벽 아래를 슬쩍 봤다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새까맣게 타죽은 시체와 죽진 않았지만, 상태가 썩 좋지 않은 해적이 보였다. 그가 한숨을 푹 내쉬곤 로브를 꾹 누르고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돌렸다.

빠르게 자리를 벗어나기 위함이었다.

‘시스템.’

집으로 돌아가며 홀로그램을 올려다 보자 다행히 코인이 좀 모여 있었다.

‘이거 진짜 시스템 개 같네.’

해적이든 뭐든 사람을 죽여야만 코인을 벌 수 있는 시스템이라니 말이다. 해적이라고 해도 불쾌한 건 불쾌한 것이었다.

 

[소지 코인: 106코인]

 

좋아, 106번은 메시지 할 수 있겠다.

걸음을 뚝 멈춘 스팬담이 제 새로운 보금자리를 올려다보았다. 분명히 아담하고 작은 방 3개짜리 집을 생각했는데, 웬 3층짜리 단독주택 하나가 완성되어 있었다.

“…어휴.”

스팬담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집으로 들어갔다. 적막한 집안을 한 번 훑은 그가 1층에 있는 제 안방으로 쏙 들어가 옷을 벗고 침대에 누웠다가 벌떡 일어나 문을 잠그고 창문도 닫은 뒤 커튼까지 쳤다.

스팬담이 비장한 얼굴로 채팅창을 열었다. 홀로그램 키보드가 떠오른 것을 본 그가 천천히 검지 두 개를 쭉 펴며 천천히 채팅을 치기 시작했다.

10분을 투자해 간신히 하고 싶은 말을 쓴 그가 이내 보내기 버튼을 눌렀다. 띠링- 작은 소리와 함께 그의 메시지가 전송됐다.

“드디어…….”

스팬담이 한숨을 푹 내쉬며 다음 문장을 적기 시작했다.

띠링-!

상대편에선 빨리도 답이 왔다는 게 문제였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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