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상병 엘런 x 지하도시 리바이

* 진격의 거인 스핀오프 《후회 없는 선택》 기반으로 전개되는 이야기인지라, 읽지 않으신 분은 내용 이해에 지장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도 누군가 두려워하는 나날.


지하 도시에서 나고 자란 이들은 외지인을 쉽게 알아보았다. 그들에게는 지하 도시에 만연하는 염세와 비관의 냄새가 비교적 덜 묻어 있기 때문이었다. 이 도시의 아이들은 어린 나이에 자포자기를 배웠고, 제법 머리가 굵어질 무렵이면 더 이상 내일을 생각하지 않고 살았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창백한 얼굴로 꾸역꾸역 명줄을 이어 나가는, 망자인지 산 자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 사람들. 그런 무리 가운데, 이 산 자들의 무덤 같은 도시를 제법 흥미롭다는 듯이 돌아다니며, 눈에 번들거리는 욕망을 숨기지 못하는 이들이 섞여 있으면 결코 몰라볼 수가 없는 법이었다.

당연하지만 그래서 이 도시에 들어온 외지인들은 쉬이 미움을 사곤 했다. 지상의 도시에선 그들 역시 딱히 형편이 좋은 편이 못 된다 하더라도 그랬다. 지하 도시의 사람들은 자기네를 구경거리쯤으로 여기는 외지인을 증오했고, 동시에 그들이 향유하는 평범한 삶을 질시했으므로. 지하에 몸담지 않은 이들은, 이곳에선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손에 넣을 수 없는 것을 너무 많이 갖고 있었다. 예를 들면, 적어도 오 년, 혹은 십 년쯤 뒤의 미래를 상정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 따위를.

그러나, 개중에도 예외란 존재하기 마련이었다. 이를테면 엘런 크루거가 그랬다. 어느 날 갑자기 지하에 나타난, 한 눈이 멀고, 한쪽 무릎 아래가 없는 상이군인. 비록 차림은 꾀죄죄할지언정 그가 이곳 출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이 지하 도시에서도 유난히 눈에 띄는 외양을 지니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가 지상에서 왔다는 걸 알아보면서도, 사람들은 그를 묵인했다. 외지인에게 으레 꽂히던 적대감이, 엘런 크루거에 한해서는 마치 투명인간을 상대하는 양 그대로 통과해 지나쳐 버렸던 것이다. 심지어 한두 사람만 그러는 것도 아니었다. 지하 도시의 거의 모든 사람이 그의 존재를 자연스럽게 수용하게 되는 데는 단언컨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곳은 외지인이 까닭 없이 린치를 당해 길거리에 널브러져 있는 광경도 흔히 볼 수 있는 도시. 그럼에도 엘런 크루거만은 어째서 예외일 수 있었던 것인지, 그 까닭을 알아차리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붕대 아래 드러난 그의 한쪽 눈이, 처음부터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도 이 도시의 사람들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거칠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직후 이쪽이 대답할 틈도 없이 벌컥 문이 열렸다. 대야를 들고 나타난 금발의 남자는 심기가 영 사나워 보였다. 그는 물이 든 대야를 침대 옆에 아무렇게나 내려놓았고 – 그 바람에 시트에 물이 적지 않게 튀었으나 개의치 않았다 – , 곧 퉁명스런 어조로 입을 열었다.

“세숫물. 물은 알아서 창문 밖으로 비워.”

부상당한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지만, 금발의 사내는 돌아보지도 않고 방을 나갔다.

대야 속에서 찰랑이던 물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남자는, 세숫물엔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여지껏 그랬던 것처럼 다시 눈을 감았다. 시각이 닫힌 만큼 예민해진 청각으로 나지막한 음성과 이따금 울리는 발소리가 스쳤다. 닫힌 문 너머로 들리는 아주 작은 소리 하나도 놓치지 않도록, 남자는 숨소리조차 가라앉히며 오로지 한 방향으로 귀를 기울였다.

지금 이 순간, 의미 있는 것은 오직 한 사람. 마침내 목격한 지옥의 끝의 끝에서조차 유일하게 저버릴 수 없었던. 그리하여 끝내는 자신을 이곳으로 이끈, 그 사람을 향해.


“우리가 무슨 일을 계획하고 있는지 알잖아.”

팔런 처치는 행여라도 자신의 말이 바깥에 들릴까 최대한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그럼에도 명명백백한 노기만은 숨길 수 없었다.

니콜라스 로보프가 이 더러운 지하까지 손을 뻗은 게 바로 얼마 전. 리바이에게도 이자벨에게도 계획은 충분히 설명했다. 허황된 공상도, 밑천도 없으면서 괜히 치는 허풍도 아닌 진짜 계획을. 로보프가 요구한 비밀 서류를 손에 넣어 역으로 귀족의 뒤통수를 친다. 다른 때면 몰라도 리바이라는 전력이 준비된 이상, 지하를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가까이 보였다. 해서 이제 곧, 그들이 영구적으로 지하를 벗어날 계획의 첫 수순을 밟을 차례였단 말이다.

그걸 알면서도 느닷없이 저 외다리 부상병을 데려오다니. 평소 같았으면 언쟁을 벌이다가도 순순히 수긍했을 리바이인데, 이상하게도 어제부터 리바이의 태도는 평소 같지 않았다. 이 지하도시에 몸이 성치 못한 사람이 한둘도 아닌데, 안면도 없는 상이군인을 무작정 데려오려 드는 게 말이 되냔 말이다. 팔런뿐만이 아니라 이자벨 역시 무슨 좋지 않은 낌새라도 느낀 듯 반대했으나 리바이는 듣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되레 이런 놈을 내버려두고 지나간다면 자기가 저 아래층의 쓰레기들과 뭐가 다르겠냐며 목소리를 높이는 거였다.

젠장…… 이자벨도 그렇게 데려오긴 했다지만, 아무리 그래도 정도가 있지. 자기가 무슨 자선 구호가라도 되는 줄 아냐고! 팔런은 씨근거리는 숨을 애써 가라앉히며 리바이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리바이는 이쪽의 시선을 뻔히 알아차리면서도 침묵을 지킬 따름이었다.

“리바이, 지금 이 상황의 심각성을 알고 있긴 한 거야!?”

결국 참지 못한 팔런의 입에서 고성이 튀어나왔다. 이자벨이 움찔하며 어깨를 움츠렸고, 리바이는 안쪽 방에 있을 부상병이 신경 쓰이는 듯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팔런은 즉시 큰 소리를 낸 걸 후회하며 입술을 깨물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화가 가라앉은 건 아니었다. 다만 지금으로선 무슨 말을 해도 벽에 대고 이야기하는 것과 다를 바 없기에 관두는 것뿐.

“아무튼, 네가 저 자식을 데려왔건 말건 난 나대로 계획을 진행할 거니까 그렇게 알아!”

“알겠으니까 목소리 좀 낮춰……. 나라고 저 녀석을 평생 책임지겠다는 게 아니잖아.”

“평생 책임질 생각이 없다면 더더욱……! 아니, 됐다…….”

울컥하여 달려들려던 팔런이 가까스로 화를 거두며 몸을 돌렸다. 이자벨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잔뜩 눈치를 보다가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비록 아무 말도 꺼내지 않기는 했지만, 얼굴색이 어두운 게 이자벨 역시도 웬 낯모르는 상이군인이 갑자기 안쪽 방의 침대를 차지한 것이 그리 마음 편한 일인 것 같지는 않았다.

“하여간, 그렇게 알고 저 부상병은 네가 알아서 해.”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내뱉는 팔런은 더 이상 자신의 냉소적인 태도를 숨길 생각도 없어 보였다. 그렇게 마지막으로 못을 박고 자리를 뜨려던 순간,

“……엘런 크루거야.”

“……뭐?”

“부상병이 아니라, 엘런 크루거라고.”

리바이가 나지막이 말했다.

“너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거냐?”

기가 막힌 팔런이 헛웃음을 흘렸으나, 리바이는 언제 저 부상병과 통성명을 했냐는 듯 쌀쌀맞게 무표정만을 유지할 뿐, 조금의 미동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지하 도시를 밝히던 가물거리는 등불도 거지반 꺼진 시각. 그 어둠 속에서도 여전히 닫히지 않은 눈들이 있었다. 붕대로 가려지지 않은 한쪽 눈으로 어둠을 응시하던 남자는, 문 밖을 서성거리는 들릴 듯 말 듯한 기척을 알아차리고 고개를 돌렸다. 과연 머지않아 나무 문의 경첩이 듣기 싫게 끼익거리는 소리를 냈다.

“……!”

들어온 사람은 놀랐지만, 남자는 놀라지 않았다. 예상한 결과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등 뒤로 문을 닫은 리바이가 손에 들고 있던 등불이 꺼지지 않게 주의하며 침대 옆으로 다가왔다. 이에 남자가 손을 뻗어 리바이가 들고 있던 등불을 넘겨받았다.

“……이 시간에 오실 줄은 몰랐는데요.”

엘런 크루거― 아니, 엘런 예거가 입을 열었다.

“나야말로 이 시간에 깨어 있을 줄은 몰랐는데.”

엘런이 등불을 조심스럽게 침대 옆으로 내려놓는 것을 바라보며 리바이가 대꾸했다.

“전 이렇게 된 이후로 잠을 잘 못 자서요.”

“…….”

“지하 도시는 그 특성상 낮밤의 구분이 분명치 않다고 들었습니다. 낮밤의 경계가 흐리면 사람은 잠을 제대로 못 이루기 마련이죠. ……혹시 당신도 그런 경우인가요?”

시종일관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을 잇던 엘런이 별안간 질문하자, 리바이는 약간 놀란 듯이 엘런을 마주보았다. 비록 방을 비추는 조명이라곤 조그만 등불 하나가 전부였으나, 그가 가까이 앉아 있었던 덕에 엘런은 그 틈을 타 리바이의 얼굴을 조목조목 뜯어볼 수 있었다.

햇빛을 제대로 못 받아 창백하지만, 그럼에도 젊은 나이에서 비롯된 생기가 완전히 사그라들지는 않은 안색. 그 얼굴엔 반항기는 어려 있어도 아직 특유의 피로한 기색은 없어, 엘런은 묘하게 낯설다고 생각했다. 수천 번도 더 보아 익숙하지만, 그럼에도 자신이 알지 못하는, 알 수 없었던 그의 얼굴.

“글쎄…….”

한데 상대의 얼굴을 살펴보는 건 엘런만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리바이 역시 엘런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대꾸했다. 엘런은 잠자코 그의 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엘런의 한쪽 남은 눈을 유심히 바라보던 리바이는, 이윽고 자신이 상대를 너무 뚫어져라 바라봤다고 생각했는지 서둘러 시선을 거두며 입을 열었다.

“뭐, 그 말대로일지도 모르겠다. 가끔 갈라진 천장 사이로 햇빛이라도 보면 또 모르지만, 그렇지도 않은 날은 잠을 자주 설치거든.”

“……그런가요.”

“뭐, 심각한 정도는 아니니 신경 쓰지 않아도 돼. 그보단 네 쪽이 더 문제인 것 같은데.”

“아뇨, 저도 걱정하실 정도는 아닙니다. 사실은.”

부상병의 입가에 느닷없이 희미한 미소가 맴돌았다. 리바이가 그 미소에 의문을 지닐 것도 없이, 엘런은 곧장 말을 이었다.

“다른 때는 억지로라도 잠을 청하지만, 오늘은 당신이 얘기하러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기다리고 있었거든요. 그래도 이렇게 늦은 시간일지는 몰랐습니다만…….”

“……아, 그런 거였나.”

리바이의 얼굴에도 비로소 안도했다는 듯한 빛이 퍼졌다.

“그래, 실은 아까 저녁에 했던 얘기도 들린 것 같고 해서…… 잠깐 와야겠다 싶었어. 그 녀석들이 잠들기를 기다리느라 좀 늦어졌지만.”

열없다는 듯이 눈을 돌린 리바이가 공연히 침대 시트를 잡아당겨 주름진 곳을 폈다. 엘런은 그저 조용히 웃었다.

“……아까, 다 들었냐?”

리바이는 여전히 눈을 침대 시트에 붙박인 채 물었다. 엘런은 잠시 주저하다가, 아직도 이불자락을 만지작거리는 리바이의 손 위에 제 손을 얹었다.

“……괜찮습니다. 저도 여기에 오래 있을 생각은 아니었으니까요.”

그 순간 리바이가 고개를 들었다. 상대의 손이 제 손에 얹힌 것보다도, 방금 들은 소리가 더 신경 쓰인다는 듯.

“그 몸으로 어떻게, 갈 곳이라도 있는 거냐?”

리바이의 손은 움직이지 않았다. 엘런의 손이 안중에도 없는 건지, 아니면 손이 닿은들 아무렇지 않은 건지. 어느 쪽인지는 본인만 알 테다. 엘런은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이며 슬그머니 손을 물렸다. 지금의 그는 자신이 아는 그 이전이라는 것을 의식적으로 상기하며.

“그보다는 당신 쪽을 신경 써야 할 것 같은데요. 뭔가 하실 일이 있는 거 아닙니까?”

그 질문에, 리바이는 비로소 자신이 상대하고 있는 자가 며칠 전만 해도 이름조차 모르는 타인이라는 걸 자각한 듯했다. 침대 위에 얹혀 있던 리바이의 손이 불현듯 주먹을 쥐었다. 이윽고 그 입술에서 얼버무리는 말이 흘러나오는 것을 엘런은 말없이 들었다.

“……그래, 우리가 사정이 생겨서 잠시 이곳을 떠나야 할지도 모르거든.”

“제가 방해가 됐군요.”

“아니, 그런 것까진 아니지만…….”

그 말에 설득력이 실려 있다고 보기엔 어려웠다. 하지만 엘런은 그 점을 굳이 지적하는 대신, 부드럽게 말을 돌렸다.

“……제가 걸림돌이 될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사실, 저도 이곳에 목적이 있어서 온 거거든요. 그것만 마치면 돌아갈 생각이고요.”

목적이란 말이 흘러나온 순간, 리바이의 눈매가 단번에 날카로워졌다. 그것이 리바이에게 어떤 뉘앙스로 들렸을지 모르지 않는다. 알면서도 소리 없이 이쪽을 향하는 시선을 엘런은 태연하게 받아들였다.

“……그 몸으로 여기까지 와야만 할 목적이 있다고?”

의중은 날카롭지만, 지금 그 말에 명확히 대답할 의무는 없다. 엘런은 그저 살짝 고개를 끄덕인 뒤, 불빛이 닿지 않는 어두운 구석으로 눈길을 돌렸다.

―자, 이제 제 입에서 흘러나올 말을 그는 어떻게 받아들일까.

“……혹시, 제가 조사병단 출신이란 건 알고 계십니까?”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조사병단, 이란 말에 파르르 떨리는 공기를. 흔들리고 있을 눈동자를. 예상한 결과기는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역시 동요를 감추는 데 익숙지 않은 시기가 있었다는 사실이 새삼 놀라웠다.

흔들리는 불빛에 리바이의 그림자 역시 몇 번이나 흔들렸을까. 얼마간의 침묵이 흐른 후, 리바이가 신중히 입을 열었다.

“내가 직접 알아본 건 아니지만…… 그런 얘길 들어본 적은 있어.”

“……그래요?”

“이 도시 녀석들이…… 네가 부상을 입은 정도로 봐서는 틀림없이 조사병단 출신일 거라고 떠들었으니까.”

벽 밖에 나가, 직접 거인을 대적하며, 벽 대신 지평선이 펼쳐진 세상을 그 눈에 담는 조사병단.

그 이름이 지금에 와서는 자신에게 어떤 의미가 되었는지를 씁쓸히 되새기며, 엘런은 눈을 감았다.

“어쨌든 알고는 계셨군요.”

“……그래.”

“그렇다면 하나만 더 묻겠습니다.”

이윽고 엘런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말이, 리바이의 고막을 꿰뚫었다.

“―혹, 조사병단에 들어갈 생각이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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