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 Turn



13

살아가는 길에 정답은 없는 거라고



온전함, 영원함, 완벽함. 일순 아름다운 울림으로 다가오는 그 수식어들을 신뢰하지 말 것. 0이라는 숫자가 가리키는 것은 공허와 불가능의 집합이 아니듯이, 100이라는 숫자가 가리키는 것 역시 영원 불변의 견고함이 아니다. 어떤 현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한 곳에 고정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결코 짧지 않은 세월동안 꾸준히 쌓아 온 단단한 지식의 반석은 종종 그런 유연한 사고를 방해하는 벽이 되곤 했다. 그러니 항상 의심하고, 고찰하고, 말도 안 되는 상상을 더하고, 때로는 있는 그대로 우주의 진리 앞에 서서 자신의 무력함을 받아들이자. 오만하게 치켜세우고 있던 고개를 숙이고 한 발 물러서는 순간 자애로운 지혜의 여신이 이 세상의 비밀을 아주 조금 알려 줄 지 모르는 일이니.


어눌한 한국말로 또박또박 자기소개를 해 냈던 호주의 어린 가이드. 생지옥이나 다름없던 곳에서 마음이 다 죽어버릴 때까지 홀로 견디고 있던 그를 서울로 데려오라 제안했던 건 다른 사람도 아닌 이민호였다. 어림잡아 2년 조금 넘는 시간동안 리더라는 사람이 호주를 몇 번이나 들락날락 하는지. 처음에는 고향의 오랜 친구에게 불행이 닥쳐왔다고 했다. 그리고 거기서 새 친구를 만들었다는 소식을 들고 돌아왔을 때는 이 양반이 또 오지랖을 부리는구나 하면서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었지. 승민과 동갑이라는 호주의 그 친구는 담당 센티넬이 생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가이드의 업을 내려놓지 않았다고. 특이한 녀석이네. 오로지 김승민을 곁에 두기 위해 지금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민호에게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두 번, 세 번, 네 번쯤 같은 이유로 찬이 호주에 가기 위해 출국 신청을 낼 때 즈음, 민호의 ‘이해할 수 없음’은 어떤 선을 넘어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될’ 과제가 되어버렸다. 걔는 왜 가이드를 안 그만 둔대요? 민호의 질문에 찬은 용복이 어릴 때부터 가이드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바람에 다른 삶을 생각해 본 적 없다는 작은 단서를 흘려 주었다. 그렇구나. 민호에게 그 단편적인 정보는 ‘이해’라는 상자를 열기 위한 단 하나의 열쇠가 되었다. 운명이라는 이름의 족쇄가 가지는 무게가 어떤 것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얼굴도 알지 못하는 먼 바다 너머의 가이드를 생각하며 가슴에 품은 이름 모를 동질감.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우주가 정해둔 길을 그저 걷기만 한다는 건 얼마나 무섭고 짜증나는 일인지. 그러니 인간은 나아가는 길 곳곳에 숨겨진 연속되는 선택의 기로를 찾아 삶의 주도권을 쥐고 있음을 스스로 확인해야 한다. 이용복이라는 가이드의 삶이 어떤 비극 속에서 놀아나고 있는지 체감할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 고단함을 이해해 버리고 만 이상, 자신의 리더가 걱정과 염려를 가지고 마음을 쓰기 시작한 이상, 그저 예견된 죽음의 길을 향해 무력하게 흘러가도록 두어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우연과 필연이 겹쳐 그 애가 방찬의 눈에 들었는지는 둘째치고 말이지. 민호는 과감하게 선택의 방아쇠를 당긴다. 그 때의 이민호에게 있어 왔던 많은 수수께끼의 갈림길 앞에서 그가 고른 방향은 대부분 옳았고, 결과적으로 정답에 가까웠다. 김승민이 그랬고, 한지성과 서창빈이, 방찬이 그랬다.


매칭율 최저점이 70 밑으로 내려간 적이 없다면서요. 그럼 누굴 붙여도 잘 받겠네. 거기 계속 뒀다간 사고 나게 생겼는데 그냥 여기서 일 하라고 합시다. 그쪽 지부 인간들도 감정이란 게 있으면 그지경이 난 애를 거기서 계속 구르라고 압박하진 않겠지.


당시의 1소대에는 지금 남은 인원을 제외하고도 센티넬과 내비게이터가 둘씩 더 속해 있었는데, 그들을 포함해 총 다섯의 센티넬 요원 중 페어 가이드가 있는 건 민호의 짝인 김승민 한 사람 뿐이었다. 전투 경험이 풍부한 유능한 가이드가 페어 등록까지 하면서 와 주겠다는데 쌍수 들고 환영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는 뜻이다. 당사자의 승낙이 떨어지자마자 전근을 위한 모든 절차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그렇게 여섯 번째 호주 방문을 마친 리더의 곁에는 새로운 가족이 될 인물이 서 있었다. 과연 정답이었을까. 지금의 민호에게 그 날의 풍경은 상기하기 괴로운 장면으로 남은 지 오래다.


새 식구를 맞이하고 얼핏 보기에 평화롭기 그지없는 일상을 보내기를 반 년쯤 되었을 때. 이제 막 서울에서의 업무와 숙소 생활에 적응을 마친 이용복이 밤만 되면 서창빈의 방을 찾기 시작했다. 혼자 있을 때 악몽을 꾸느라 잠을 설친다는 핑계를 대는 걸 창빈은 별 불만 없이 받아들이며 좁은 침대의 옆자리를 내주었다. 그렇지 않아도 볼륨이 작은 편인 용복의 소리가 승민에게 들리지 않기 시작한 것도 그 즈음이었다. 단 둘이든 여럿이든 한 자리에 있을 기회를 피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요즘 용복이가 날 불편해 하는 것 같아. 처음 만났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어지간해선 그런 화제를 나서서 꺼내지 않는 승민이 진정한 걱정을 담아 민호에게 상담을 청할 정도였다. 그를 기점으로 민호는 소대 안에서 용복을 중심으로 돌기 시작한 팽팽한 긴장을 주시했다. 바쁜 찬 대신에 용복의 주변을 가장 잘 챙겨주곤 했던 창빈은 진작 이상한 기류를 느끼고 있는 것 같았으나, 저가 나서서 원인을 파헤치기보다는 불안하기 그지 없는 용복의 상태를 보살피기를 우선하는 것 같았다.


작은 균열 하나라도 허락하는 순간 펑 하고 터져버릴 것 같은 압박감은 오래 가지 못했다. 용복이랑 요즘 어때? 그의 페어인 녀석에게 그렇게 물으니 별 일 없이 그럭저럭 잘 지낸다는 애매모호한 답이 돌아올 뿐이었다. 그 누구보다 가까운 거리에서 제 가이드를 살펴야 하는 치의 입에서 나올 말인가 싶었다. 그래, 별 일이 여기에 있었구나. 민호의 날카로운 감의 칼날이 올바른 방향으로 돌았다. 수 년이 지난 지금도 민호는 용복을 가족으로 받아들이기로 한 선택을 후회하지 않지만, 그의 곁에 둘 페어 센티넬을 처음부터 한지성으로 점지하지 않았던 것에 대해선 그의 인생에 있어 최악의 판단을 내렸다며 자책하길 망설이지 않는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지내던 놈들 중에 인두겁을 쓴 짐승새끼가 있을 줄은 몰랐지. 뒤돌아 냉정하게 판단하자면 당시의 이민호는 순진했다. 공존이라는 이상을 위해 건강한 정신을 가꾸는 것이 곧 생존을 위한 제 1 규칙이 되어야 하는 센티넬. 머리가 나빠 수준 맞추기 힘든 녀석들이 있는 게 전부일 거라 생각했지, 악의와 본능을 구분하지 못해 넘지 말아야 할 선을 건드리는 금수가 있을 줄은 감히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 날, 김승민이 사람을 때렸다. 한창 예민할 나이에 처음으로 민호와 떨어져 한지성과 룸메이트 생활을 하던 시절에도 폭력보다는 세 치 혀의 문제 해결 능력을 설파하던 얌전한 심성이, 처음으로 분노를 실어 주먹을 들었다. 용복이 달려가 그를 붙잡고 말렸다. 승민아, 그러지 마. 아무 일도 없었어. 정말이야. 아무것도 아니었으니까 제발…. 거짓말로도 괜찮다고 하지 못하는 용복의 애원을 앞에 두고 승민은 난생 처음으로 주체할 수 없는 절망을 느꼈다. 한동안 듣지 못한 듯하여 조심스럽게 찾아다니던 목소리, 이미 지난 일이 되어버린 자신의 상처보다 가족의 붕괴를 더 두려워하고 있는 떨림이 닿았다. 그 비틀려버린 어둠을 직면한 승민은 먹먹한 울음을 쏟으며 말했다. 여기 오지 말았어야 했는데 같은 생각 하지 마. 용복아. 우리가 사람이 아닌 걸 가족이라고 품고 있었던 거야. 네가 잘못한 거 하나도 없어. 용복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울지도 못하고 가쁜 숨만 괴로이 내쉬다가 까무러치듯 정신을 놓은 게 전부였다.


센티넬은 센터에 적을 두게 되는 순간 어떤 국가에도 속하지 않는 신분이 되므로, 범죄를 저질렀을 때의 사법처리는 오로지 센터 내의 규칙에 따라 이루어졌다. 가이드를 상대로 한 강간은 고의적 살인에 준하는 중범죄였다. 비록 미수에 그쳤을지라도 처벌의 내용이 크게 달라지는 건 아니었다. 그 죄목으로 유죄 판결을 받으면 요원 자격 박탈과 동시에 능력 발동을 막는 억제 가이딩 방출 장치가 설치된 형무소에서 평생을 갇혀 지내야만 했다. (혹자는 이것도 충분히 관대해진 처벌이라 한다. 억제 가이딩 방출 기술이 개발되기 전까지 센티넬의 강력범죄는 대부분 사형으로 종결되었으니.) 교화의 여지도 주지 않는 가혹함에 누군가는 인권의 문제를 들고 일어나기도 했으나, 어떤 가이드가 그들을 위해 몸과 마음을 내어 주고, 어떤 소대원들이 그들과 함께 목숨을 건 현장에서 일할 수 있겠는가 생각 해 본다면 지극히 타당한 무게의 벌이라는 주장이 지배적이었다. 형벌이 엄격한 만큼 재판의 과정 역시 단순하지는 않았다. 물리적 증거가 존재하지 않는 사건의 유무죄 여부를 가리기 위해선 기억과 생각, 과거의 추적이 가능한 S클래스 정신계 요원 3인 이상의 자문과 증언이 필요했다. 서울 지부에서 그 자격을 갖춘 인물은 이번 일의 참고인이 된 김승민 한 사람 뿐이었으므로 부산과 오사카, 상하이의 요원들이 때를 맞추어 서울의 내사국에 방문했다. 진실을 덮고 핑계와 변명을 일삼아 보아야 소용이 없다는 걸 잘 아는 죄인의 입에서 별다른 저항 없이 자백의 말이 나왔다. 일면식도 없는 이들이 용복의 기억을 파헤치는 비극을 피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형무소로 떠난 이가 일 주일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이 들렸다. 누구도 그 죽음을 애도하지 않았다.


자신의 선택이 타인의 앞길에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되었는지 최악의 방향으로 깨닫게 된 민호는 직접 용복을 설득해 데려온 소대장 방찬만큼이나 큰 충격에 휩싸인 나날을 보냈다. 용복에게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복은 굳은 심지로 다시 일어서야만 했다. 자신을 믿고 감싸주는 가족들을 두고 절망에 빠져 있어선 안 된다는 각오였다. 그 모습은 마치 마지막 힘을 쥐어 짜듯이 처절했고, 안타까웠다. 민호는 다시 한번 해 보겠다는 용복의 각오를 말릴 명분이 없었다. 그리고 4년 전의 그날, 태백산 줄기 하나가 거센 불길에 휩싸이는 광경을 보면서 관제석에 앉은 찬이 울부짖듯이 절규했다. 곁에 있던 민호의 머릿속도 새하얗게 타 들어갔으나, 그것은 이미 업화에 섞여 죽음의 선을 넘어가 버린 이를 향한 슬픔이 아니었다.


용복이, 용복이를 이제 어쩌면 좋지.


도저히 말로 되짚을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로 쓰디쓴 일련의 사건들을 뒤로 하고, 이민호는 과거 자신의 오만한 판단이 가져온 끔찍한 결말을 어느 때보다 온전한 정신으로 마주해야만 했다. 내가 순진했고 멍청했구나. 후회와 반성을 갖는 것으로 갈기갈기 찢어진 마음이 원래대로 돌아온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대로 같은 과오를 반복할 수 없었다. 그 날 이후 용복의 앞으로 올라오는 매칭 테스트 신청을 전부 반려했다. 현장 출장이나 백업 의뢰도 하나 빠짐없이 돌려보냈다. 걱정되는 건 알지만 아무 일도 안 맡기고 둘 수는 없어. 너도 알잖아. 누구보다 마음이 힘들었을, 그리고 누구보다 빠르게 마음을 추스르지 않으면 안 되는 자리의 찬이 나서서 민호를 간곡히 설득했다. 거기에 못 이겨 사후 가이딩과 훈련 보조의 업무만 용복을 위해 남겨두기로 했다. 결코 사라지지 않을 상처가 아물기를 기대하고 애쓰는 게 아니었다. 찬이형, 저는요, 쟤가 괜찮아 지길 기다리지 않을 거에요. 극복하고 이겨 내길 바라지도 않아요. 아무것도 하기 싫다 하면 그냥 그렇게 둘래요. 평생 센터에서 나갈 엄두도 못 내는 애, 적어도 우리 옆에 있을 때만큼은 마음을 놓을 수 있어야 하잖아요. 이대로 아픈 것들만 쐐기처럼 박아 넣은 채 무너지게 내버려 둘 수 없다고. 용복을 가족으로서 제 품에 담은 건 이민호의 선택이었으니, 민호는 그 선택이 가져다 준 결과와 책임의 무게 역시 온전히 자신의 몫이라고 생각했다. 그건 승민에게조차 나누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애를 쓴다고 해서 본 적도 없는 시절의 네 행복을 돌려받는 건 어려울 지도 모르겠지만, 용복아. 앞으로 아무도 널 다치게 두지 않을 거야.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널 지키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게.


혹자는 용복의 능력으로 더 많은 것들을 해낼 수 있는데도 앞으로 나서서 막고 보는 민호를 두고 제 식구만 챙기는 이기적인 사람이라 손가락질했다. 어떤 이들은 마음만 먹으면 전투원 둘은 한꺼번에 케어 가능한 S클래스 가이드가 소대원들의 뒤에 숨어 놀고먹기만 한다며 비아냥거렸다. 죽고 싶으면 무슨 말을 못 할까. 그런 놈들의 손가락을 꺾어버리는 데 망설임이 없는 민호는 거친 날것의 시선을 돌릴 생각도 없이 폭력으로 답을 주었다. 민호는 동급의 S클래스 사이에서도 억제력 하나만큼은 넘어설 이를 찾기 힘든 가이드였다. 고작 김승민 전용 음소거 버튼으로 써먹던 억제 가이딩에서 힘조절을 조금 놓는 것 만으로도 형무소에서 센티넬을 꼼짝 못 하게 만드는 고문 기술과 같은 결의 파장을 낼 수 있는 몇 안 되는 인물. 아파? 쟤는 이미 더 아플 곳도 안 남았는데 고작 이걸로 우는 소리를 하네. 가이드도 씨발, 사람이야. 너희가 인류를 위한다는 대의명분으로 목숨을 걸고 원하지도 않는 싸움에 뛰어드는 게, 이용복을 멋대로 공용 배터리처럼 취급할 이유가 되는 게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


동대장도 이기지 못한 민호의 지랄맞은 검열에 못 이겨 1소대에는 크리스토퍼 팀의 담당 내비게이터와 신입 교육생 외엔 어떤 대원의 충원도 이루어지지 못했다. 오로지 두 사람만이 민호가 두텁고 높게 세워 둔 벽을 넘어 민들레 홀씨처럼 날아와 용복의 곁에 찾아왔다. 이민호가 떠밀어 교육원으로 보낸 지성과 창빈에게 코가 꿰인 신입 내비게이터 양정인. 희대의 난제를 끌고 와 처음부터 다른 곳으로 보낼 선택의 여지조차 없었던 연구 대상 황현진.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두 사람 모두 민호의 입김이 없었더라면 애초에 1소대의 가족들과 인연조차 없을 이들이었다. 그것 또한 선택이었다고 치부해야 하는 걸까, 그도 아님 우주의 인력이 그렇게 하도록 이끌었다고 해야 하는 걸까. 그 기묘한 진실을 앞에 두고 민호는 제 곁에 바로 서서 새로운 시작의 걸음을 뗄 준비를 하는 용복을 바라본다. 형, 나는 괜찮아. 살아가는 길에 온전한 정답은 없는 거잖아. 형은, 우리는, 처음부터 틀리지 않았어. 마치 그런 위로의 말을 전해주는 것 같은 미소에, 민호는 가슴 한 켠이 허전하게 시림과 동시에 이루 말할 수 없는 따뜻한 온기를 느꼈다. 그랬지. 네가 가진 상냥한 마음이 무엇보다 강하고 단단한 네 성품의 근본이란 걸 진작 알고 있었는데, 나를 향한 분노에 못 이겨 그걸 바로 보지 못하고 지냈던 것 같아. 등 뒤에서 불어오는 청량한 바람이 상쾌하게 영혼을 씻어 주는 기분이 들었다. 그 바람이 저에게도, 용복에게도, 앞으로의 길을 헤쳐 나가는 데 힘을 실어줄 순풍이 되길 바랄 따름이었다.



❖❖❖



“잘 했어.”


그것 말고는 할 말이 안 나오는 스코어였다. 한 해에도 수십 번의 매칭 테스트를 해 왔던 이민호 수석 연구원에게도 목격한 경험을 찾자면 한 손에 꼽을 수 있는 기록. 솔직히 말 하자면 첫 테스트에서 무조정이 97점을 넘어섰을 때, 막연히 100이라는 점수를 기대하긴 했었다. 2.5 정도의 오차 따위 가이드 이용복의 앞에서는 있으나 마나 한 숫자였으니까. 그 모든 예상을 뒤집어 엎고 30이나 넘는 낙폭으로 떨어진 결과값은 실로 흥미로웠다. 김승민에게 그 원인으로 추정되는 이유를 들었을 때에도 감히 용복에게 흑심(으로 추정되는 감정)을 품은 현진을 향해 불쾌하고 화는 났을지언정 그 상관관계에 대해선 저도 모르게 진실 탐구를 향한 욕망이 솟아 났던 것이 사실이다. 사람이 사람을 향해 갖는 마음. 숫자와 수식으로 풀어내려 해도 도무지 해결할 수 없는 무지갯빛 베일 속 미지의 개념. 민호에겐 어울리고 싶지 않은 그 엉망진창의 별세계 속에서 현진과 용복은 기어코 답을 찾아내었다. 꼭 붙잡은 손을 타고 흐르는 감정의 물결을 언제 어느 때든 하나로 맞출 수 있게 되었다고 했다.


잘 했어. 그 한마디의 말에 용복은 결과를 확인하지도 않고 민호를 꼭 끌어안았다. 답지 않게 소리를 내면서 엉엉 울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을 한 달의 시간동안,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했던 마음 속 천 근의 짐이 설움이 되어 한 번에 터져 나오는 순간이었다. 민호는 부드럽게 용복의 등을 토닥이는 것 말고는 다른 말을 보태지 않았다. 복잡한 표정을 하고 있던 현진에게 곁에서 지켜보고 있던 정인이 결과 차트를 보여 주었다. 그제야 현진도 안심한 듯한 미소와 함께 후련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 얼굴을 눈에 담은 민호가 용복의 뒤통수를 쓰다듬으며 현진을 불렀다.


“현진아.”


“넵.”


“…앞으로 잘 해.”


여러가지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듣는 이가 적당하게 이해하기 편하도록 간결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니 찰떡같이 알아듣길 바라면서 내 놓는 경고 아닌 경고. 오늘부로 용복이 눈에서 눈물 뽑는 날에는 안 죽을 만큼 맞을 각오해라. 아프지 말고, 다치지도 말고, 걱정할 일 없게 잘 해. 현진은 말없이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로 충분했다. 모두가 원하던 답이 나왔으니 민호에겐 두 사람에게 더 바랄 것이 없었다. 한 시름 놓았다고 하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거겠지. 중간에 끼어들어 이렇다 저렇다 말을 얹을 기회는 이미 한참 전에 지나버렸고, 일전 승민이 말했듯이 이제부터야말로 민호가 가장 잘 하는 방법으로 그들을 지켜 주어야 할 차례인 것이다.


고작 매칭 테스트 재검사를 무사히 끝마쳤을 뿐인데 장기 프로젝트를 하나 마무리한 수준의 피로가 몰려왔다. 민호는 용복 일행을 돌려보낸 뒤 검사실의 뒷정리를 마치고 개인 연구실로 돌아와 입고 있던 가운을 대충 벗어다가 소파 위에 던져 놓고는 책상 앞에 앉았다. 이제 뭐 하지. 오후에는 훈련 참관 대신 다른 소대의 매칭 테스트 일정이 잡혀 있었다. 남는 자투리 시간을 그냥 넘기기엔 여유가 많은데. 틈틈이 손보고 있던 현진의 훈련 커리큘럼 파일을 뒤적거리다가 대충 책상 구석으로 던져 놓았다. 미뤄 두었던 연구 과제 리스트를 몇 번씩 훑어보아도 눈이 머무르는 곳 하나 없었다. 이 짧고 지독한 정적을 이겨내기 위해선 좀 더 신선한 자극이 필요하다는 의미였다.


“뭐해?”


때마침 짧은 노크를 뒤로 하고 승민이 등장했다. 그 역시 민호와 마찬가지로 갑자기 밀려온 한가로움을 보내기 지루했던 모양이다. 창 밖의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던 민호가 승민 쪽으로 시선도 주지 않은 채 대답했다.


“네 생각.”


“그건 늘 하는 거고.”


내 생각 하면서 뭐 하고 있었냐고. 굳이 안 해도 그만일 말을 덧붙이며 승민이 민호의 책상 위에 걸터앉아 민호의 의자를 발로 툭툭 건드렸다. 이것 봐라? 민호는 속으로 한 마디 던질 뿐 별 반응을 보이진 않았다. 살짝 엇나간 타이밍이었지만 오전의 햇살에 살살 녹아 긴장이 잔뜩 풀린 낯이 승민의 두 눈을 향했다. 민호는 조금 더 생산적인 대화를 하기로 했다.


“네가 싫으면 대답 안 해도 되는데.”


“응.”


“직접 들린 내용으로 유추할 수 있겠어? 오늘 매칭 테스트 스코어, 어떻게 단기간에 그만큼 끌어올릴 수 있었는지.”


어떻게. 단순하기 그지없는 단어는 함정이다. 민호의 질문은 마치 1더하기 1이 2가 됨을 증명하라는 과제나 다를 바 없었다. 답하기 어려울 건 아니지만 던지는 질문의 성의에 비해 내 놓아야 할 정보의 양이 비교가 무색할 정도로 많았기 때문이다. 가이딩 원리는 형이 더 잘 알잖아. 스스로 나서서 조율할 생각이 없을 뿐이지, 매칭률을 정방향으로 조정하는 이론적 방법론에 대해선 온 세상 누구보다 빠삭한 사람이 이민호가 아닌가. 그러니 다른 각도로 접근해야만 하는 질문이겠지. 승민은 어디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을지 곰곰이 생각하다가 조심스럽게 운을 떼었다.


“현진이는… 자기 관리 습관이 굉장히 잘 잡혀 있는 애잖아. 가이딩이 없을 때 어떤 식으로 마인드 컨트롤을 해야 방출 패턴이 안정되는지 경험으로 몸에 익혀버린 케이스라. 각성이 늦은 덕도 있다고 봐. 철도 안 든 상태에서 졸업하자마자 무작정 매칭 테스트부터 치고 보는 센터 애들이랑은 시작점이 다르니까.”


“응, 그건 나도 알지. 신입 애들이 비교가 되겠냐. 걘 현역 10년차 또래 애들보다 백 배 나아.”


“그게 이제, 사람에게 가이딩 받아본 적이 없다 보니 첫날에 더 극단적인 방향으로 달려 버린 거지. 가이드가 옆에 있다는 것도 의식하지 않고 평소 하던 대로 마인드 컨트롤에 들어가는 애를 두고, 용복이가 늘 하던 대로 파장을 맞춰 봐야 비슷하게 겹치는 결 하나 찾기도 힘들었던 거야. 보통 매칭 테스트 받는 애들은 생각하는 내용들이 비슷하잖아. 무섭고, 긴장되고, 불안하고, 자잘한 고통에 신경을 집중하게 되고.”


“걘 뭔 생각 했길래?”


“…아침에 먹은 샌드위치가 맛있었다, 뭐 이런 것부터 시작해서…”


“웃기는 놈이네 진짜.”


상상도 못한 내용의 답에 민호는 미간을 찌푸리며 눈동자를 굴렸다. 고작 그런 걸로 부끄러워하는 민호의 시끄러운 속을 뒤로 하고 승민은 현진을 위해 그 날 들었던 소리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슬쩍 감추어 둔 채 말을 이었다.


“여튼 그래. 당장 짧게 요약하겠다고 현진이가 용복이 좋아해서 그렇게 된 거라 말 하긴 했는데, 정말 중요했던 건 그런 간지러운 감정보다 다른 곳에 있던 거지.”


“요 한 달 동안 네가 듣기는 느낌이 어땠어?”


“시시때때로 비슷한 소리가 들리더라. 걘 언젠가 자기가 용복이를 힘들게 만드는 순간이 오게 될 거라고 계속 마음에 걸려 했어.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적어도 스스로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을 찾으려 했고. 그 마음을 잘 갈무리해서 전달하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을 뿐이지, 특별히 다른 생각을 했다거나 해서 결과가 달라진 건 아니야.”


황현진이라는 센티넬. 그 성품도, 생각하는 방식도, 용복을 바라보는 마음까지도, 이용복의 인생에서 더는 오지 않을 마지막 기회로 남을 것이라고. 승민은 그렇게 생각했다. 만약에 이번에도 실패로 돌아간다면, 그 때는 내가 누구보다 먼저 신에게 쫓아가 따질 게. 형이 혼자서 모든 걸 짊어지게 두지 않을 거야.


“현진이같은 요령을 가진 센티넬이 세상에 또 있을 지는 모르겠지만… 용복이에겐 잘 된 일이라고 생각해. 결국 그런 식으로 누구도 예상 못한 답을 찾아서 들고 왔는데, 이전이랑 결과값이 완전 뒤집히는 걸 예측하고 자시고 하는 의미가 있겠어? 둘이 진짜 천생연분인가 보다 하고 말아야지.”


승민의 말에 민호는 가볍게 수긍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천생연분, 참 듣기 좋은 울림의 말이다.


“…걔가 각성이 더 빨랐으면, 용복이가 조금 덜 고생했을까.”


해도 소용없는 가정이란 걸 알면서도 그런 소릴 하는 건, 아쉬운 마음이 큰 탓이다. 승민은 손가락 끝으로 책상 위에 얹은 민호의 손을 톡톡 건드리며 생각했다. 단순히 타이밍의 문제라 하기엔 통제할 수 없는 변수가 너무 많았다. 슬슬 테스트 뒤로 미루어 둔 현진의 특이점에 대한 연구 과제 리스트 정리를 재개해야 할 때가 온 것 같았다. 그리고 한 단계의 큰 벽을 넘어선 자신의 반려에게도 그만한 보상이 주어져야만 했다. 이민호가 책임감이라는 이름으로 위장한 자기혐오의 찌거기를 치워 버리지 않는다면, 분명 썩은 고름처럼 마음에 남아 그를 병들게 하고 말 것이다.


“형은 좀… 나쁜 습관이 있는 거 알아?”


“뭐가.”


“무슨 일이 생기면 형이 미리 대비하지 못한 탓이고, 전부 나서서 해결해 줘야 할 것 같지. 형은 그럴 여유가 있다고 생각 하니까. 왜 자꾸 주지도 않는 부담을 스스로 지려고 해. 그럴 땐 찬이형보다 더 심해.”


“뭐, 갑자기 그런 소리는 왜 하는데. 남들이 바보같이 낑낑거리는 거 답답해서 내가 해 치우겠다는 데 그게 무슨 부담이야. 넌 도대체 날 뭘로 보는 거냐?”


“형 인생은 그럼, 순탄하고 쉽기만 했나?”


“내 인생이 별거 있냐? 대충 살아도 잘 살아지더라. 하고싶은 거 다 하고, 원하는 거 다 누리고 살잖아 지금도.”


“정말 그랬어?”


“……”


민호는 따끔한 질문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후, 하고 내뱉는 짧은 한숨의 의미를 읽을 틈도 주지 않고 승민의 손이 민호의 턱 끝을 붙잡아 바로 당겼다. 책상 위에 앉은 채 몸을 숙여 시선을 맞춘 승민이 천천히 목소리를 내었다.


“민호야.”


“……”


“네 남편을 뭘로 보는 거야.”


“…너 이러는 거 진짜 짜증나.”


“그래서 좋은 거잖아.”


승민은 당장엔 말을 아끼기로 했다. 고집불통 이민호의 사고방식을 뜯어고치기 위해선 아주 길고 긴 물밑작업이 필요할 테니까. 형이 내 곁에 남기로 한 선택에는 그 손을 잡은 내 몫도 절반은 지분이 있다는 걸 명심해. 용복이가 여기 온 것도 마찬가지야. 모든 걸 혼자 책임지려 들면 안 돼. 그런 마음을 어떻게 어르고 달래서 깊이 납득할 정도로 전달할 수 있으려나. 이민호는 참 어려운 사람이다. 그 속내를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알 수 있는 승민에게조차 그랬다. 형은 날 긴장하게 만들어. 평생에 가까운 시간을 함께 지냈는데도 여전히. 그건 아마 저가 눈 앞의 이 남자를 너무도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승민은 천천히 상체를 숙여 입을 맞추었다. 민호는 별다른 반항 없이 순순히 그 키스를 받아 주었다. 입을 열어 아직은 말라 있는 호흡이 천천히 섞이길 기다린다. 부드럽고 말랑한 살덩어리가 서로의 치열을 간지럽히고, 이윽고 물기 어린 소리가 조용한 공간을 가득 채웠다. 한참을 그렇게 붙어 있던 입술이 떨어지고 한껏 나른한 눈을 한 민호의 입에서 기대를 한 스푼 담은 명령이 떨어졌다.


“……문 잠그고 와.”


“들어올 때 진작 잠갔지.”


어차피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층이 아니니까 누가 갑자기 들이닥칠 일은 없겠지만. 오늘은 바깥 사정도 궁금하지 않다는 듯 창문의 블라인드까지 내린 민호가 다시 제 자리로 돌아왔다. 어떤 방해의 가능성이든 모조리 차단하고 싶다는 의지를 엿보인 민호의 발칙함에 승민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내 생각엔, 센티넬이랑 가이드의 무조정 매칭률에는 속궁합도 포함되는 게 아닐까 싶다? 승민이 직접 확인할 길은 없었지만, 사람들이 감추고 싶은, 혹은 승민조차 별로 듣고 싶지 않은 깊은 속사정까지 모조리 들려 버리곤 하는 그의 능력으로 쌓인 데이터가 그렇게 말 하고 있었다. 어찌되었든 간에 승민과 민호의 궁합은 정말 찰떡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잘 맞았다. 막 성에 눈을 떠 자제력이라곤 찾을 수 없던 10대 때는 하루에도 몇 번은 몸을 붙이느라 침대 밖으로 나오지 못한 적도 있는데. 찬을 포함한 몇몇 소대원들이 민망했는지 모른 척하려고 애썼단 걸 이민호는 절대로 모를 것이다. 아니, 알면 또 어쩔 거야. 결국 울면서도 좋다고 더 해달라며 매달리는 이 인간도 공범인 걸. 어쨌든, 한바탕 화끈하게 만족스러운 정사를 치른 승민은 지친 척 엄살을 부리는 민호의 엉덩이를 톡톡 두드리고는 알아서 뒷정리를 시작했다. 안에 질러 버린 것들을 수습해 주고, 바닥에 흐른 것들을 닦아 내고, 창문을 열어 환기도 시키고. 승민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이 민호는 대충 옷을 추스른 뒤 한층 더 나른하게 녹아버린 몸을 이끌고 소파에 가 누웠다. 이대로 낮잠을 자면 꿈도 안 꾸고 푹 쉴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긴장이 풀어져서 그래. 그 날 이후의 한동안 민호의 모습은 일 년에 하루조차 보기 드문 말랑말랑한 모드가 계속되었다. 조심스럽게 눈치를 보던 현진과 용복도 며칠 지나지 않아 훈련 중에 자연스럽게 손을 잡거나 기숙사 소파에 꼭 붙어 앉아 시간을 보내는 등 한결 대담해진 애정표현을 아무렇지 않게 겉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재검사까지 두고 봐서, 라는 말로 딱 잘랐던 자신의 다짐에 대고 재검사 결과가 흠잡을 수 없는 점수를 내버린 만큼 민호에겐 용복의 곁에 꼭 붙은 현진이 못마땅할 이유가 없었다. 저 녀석이 이용복의 김승민이 되어 줄 수 있을까. 그 물음에 대한 답은 아직 미지수였지만, 적어도 가능성이란 걸 생각하자면 관대하게 마음을 열어 주어야 하는 게 맞는 일이고, 용복이가 좋다는데 어떻게 해. 원래도 긍정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거침이 없던 용복이니만큼 민호도 어느 정도 예상은 하긴 했으나, 요즘 이용복은 거의 사랑에 빠진 소녀라고 놀려도 할 말이 없을 정도였다. 야, 나도 저렇게 바보같이 웃고 그랬냐? 재검사를 무사히 통과한 기념으로 승민이 처음으로 참관하게 된 현진의 훈련 중, 눈에서 꿀이라도 뚝뚝 떨어질 것처럼 제 센티넬을 바라보고 웃는 용복을 두고 민호가 그렇게 물었었다. 승민에게선 어렵지 않게 즉답이 나왔다. 넘치는 애정을 주체 못 해서 감정이 새 나오는 모양도 사람마다 차이가 있거든. 표현의 문제라면 형은 안 저랬으니까 걱정하지 마. 뭐야, 표현이 그랬다는 건 그 속내는 똑같았다는 뜻이야? 민호는 굳이 그 질문까지 다시 던지지는 않았다. 괜히 말 해 봐야 본전도 못 찾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다음 월요일에 출장 신청 냈어.”


그렇게 평화로운 수 일의 시간이 지난 뒤, 기숙사의 방에 돌아와 책을 읽으며 저녁의 휴식시간을 만끽하던 승민이 오래간만에 바깥 일이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침대에서 느긋하게 티비나 보고 있던 민호가 물었다.


“어디 가?”


“뇌과학 연구소. 박교수님 시간 맞는 날이 그 날 밖에 없다고 해서.”


“월요일이면 현진이 첫 출장 아니야?”


“그건 오전 중에 끝내겠지. B클래스 임무에 다른 사람도 아니고 창빈이형이 붙는데.”


틀린 말은 아니야. 하루에 업무가 몰리는 게 조금 마음에 안 들어서 그렇지. 민호는 답 없이 어깨를 으쓱 하고 말았다. 그리고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친정집에 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민호의 입밖으로 한숨이 절로 터져 나왔다.


“아… 가기 싫다.”


승민이 코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왜 또. 저번엔 연락 못 드린 지 오래 됐다 어쨌다 귀여운 소리 하더니.”


“내가 왜 전화 한통이면 되는 연락을 오래도록 안 드리고 넘겼겠니.”


왜겠어, 안부 인사 뒤에 줄줄이 따라붙는 잔소리 듣기 싫어 그런 거지. 듣지 않아도 뻔히 알 민호의 속내에 승민은 고개를 까딱 기울이며 물었다.


“그럼, 다른 사람이랑 갔다 올까?”


“…됐어. 찬이형이랑 용복이 오전에 출장이라며, 하루에 두 타임 뛰라고 시키면 퍽이나 좋아하겠다.”


꿍얼꿍얼대는 말투가 영 시원치 않은 게 아주 잠시 승민의 제안을 두고 고민한 내색이 보였다. 교수님이 형을 특별히 아끼니까 그러시는 거야. 애지중지 키운 아들이 자꾸 거리 두고 그러면 엄마도 섭섭하지 않겠어? 반쯤 농담이 섞인 승민의 말을 두고 민호는 정색을 하며 받아 쳤다. 내 엄마 아니야. ‘우리’ 엄마야. 민호에게 이 괴상한 세 사람의 관계란 그런 것이었다. 교수님은 언제까지 김승민을 제 부록처럼 취급하실 거에요? 3년 전 VGS연구 협력 목적으로 교류할 적에도 민호는 여전히 틱틱거리며 제 스승에게 맞서길 주저하지 않았다. 결혼식 때 앙금 풀었다고 모든 게 다 괜찮아진 줄만 아셨다면 큰 오산입니다. 미운 마음은 시간과 함께 자연스레 사그라든 게 사실이고, 서투른 어머니의 애정표현 방식을 이해하려고 노력한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승민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오는 게 반가운 건 아니었다. 왜 네가 나서서 교수님을 감싸고 드는 건데. 겉으로 드러나지 못한 모성에 얽힌 사연을 전부 알고 있을 승민에게 해 봐야 소용없을 질문이란 건 민호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입으로 대답을 듣는 건 도리가 아닌 것 같아 그저 속으로 불평을 곱씹기만 할 뿐이었다. 흥이다 아주.


“그리고, 교수님 뵈러 가는 건 겸사겸사. 진짜 일은 내사국 수사 지원인 거 알지? 별거 없는 안부인사가 주목적은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어… 그래.”


건성건성 흘린 답을 뒤로 하고 며칠을 계속되었던 이민호의 말랑말랑 흐물흐물 상태이상 경고등이 꺼지고 말았다. 이거 원, 현진이 첫 출장 때 과한 잔소리만 안 나온다면 참 다행이겠는데. 승민은 괜한 걱정인가 싶은 생각을 속으로 감추며 출장 당일 민호를 달래기 위해 무슨 달콤한 미끼를 준비해야 할까 고민하는 데 노력을 더하기로 했다.


다행이라고 표현하는 게 맞는 것인지, 현진의 첫 견습 중 민호의 상태는 평소와 크게 다를 바 없어 보였다. 오히려 현진 덕에 살짝 긴장이 올라 오후에 있을 업무 생각은 저 멀리 밀어둔 것 같이 굴었다. 좋은 게 좋은 거지. 무사히 임무를 마치고 고기나 먹으러 가자는 창빈의 우렁찬 외침과 함께 관제실에서도 현진의 무사 데뷔를 축하하는 박수가 쏟아져 나왔다. 오래간만에 담당의 업무를 위해 내비게이터 자리에서 수고를 한 정인에게도 고생했다는 인사말이 오갔다. 걱정을 가득 담아 말없이 지켜보던 동대장은 그래도 필릭스 담당으로 일은 할 줄 아는 놈이 와서 다행이라며 고개를 몇 번 끄덕이곤 제 사무실로 들어갔다. 달려드는 쥐에 놀라 비명을 지른 일은 초보 센티넬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라 그런지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것 같았다.


“오후에 나간다며. 차 끌고 가?”


정인이 자리를 정리하고 이른 점심식사를 하자는 말과 함께 그들에게 물었다. 승민이 대답했다.


“아니, 이번 건은 경찰청 의뢰는 아니라 셔틀로 움직일 거야.”


정인은 옆에서 죽을 상으로 얼굴을 찌푸리는 민호를 살피며 물었다.


“민호형은 왜 이래?”


“친정집 가기 싫다고 저래.”


1소대에 들어온 지 2년이 갓 지난 정인에게 민호와 승민의 옛일은 아직도 흥미로운 화제였다. 그들이 뇌과학 연구소를 찾아가는 것도 약 3년 만의 일이라고 하니 정인에게 있어선 처음 보는 이벤트이기도 했다. 센터 바깥의 세상과 센티넬을 연결하는 몇 안 되는 고리인 과거의 인연들. 아직 알아야 할 것들이 더 많은 현진을 빼 두고 얘기하자면, 1소대에서 그 끈을 잃지 않은 센티넬은 오직 김승민 한 사람 뿐이다. 게다가 그 연을 함께 공유할 사람까지 곁에 있다는 건 분명 흔치 않은 케이스였다. 민호는 승민의 열 다섯살 되는 해의 일제 테스트에서 센티넬인 것이 적발되어 훈련소로 끌려가기 직전에 자진해서 센터 연구소로 입소 신청을 넣었다고 했다. 며칠만 미루었더라면 자신의 테스트에서 가이드 판정을 받아서 들어올 수 있었을 텐데. 그 판단의 이유를 물으면 나오는 대답은 지극히 민호 다웠다.


연구원으로 들어가는 쪽이 더 빨라서 그랬어. 가이드 자격으로 센터에 입소하려면 반 년 동안이나 교육원에서 썩어야 하는 데다가, 소대 배치 받아서 다른 놈들 케어 해 줘야 하잖아. 열 일곱이 돼서 소대 배치 받기 전까진 담당 가이드가 붙는 일이 없지? 쟤는 태생이 음소거 버튼 없이 난 애라서 가만히 숨만 쉬어도 가이딩 계수가 올라가. 적합 가이드 없이는 2년은 무슨 석 달도 못 버텨.


지금 와서 하는 생각이지만, 승민의 센터생활 첫 룸메이트가 그 때 그 시절의 한지성이었단 사실을 고려하자면 석 달은 무슨 한 달도 가기 힘들었을 것이다. 민호의 판단이 아주 날카로웠다는 뜻이었다. 그렇게 아주 영리한 방식으로 센터에 자리를 잡은 민호는 가이드로서가 아닌 연구원의 신분으로 센터의 학교에 드나들며 승민의 상태를 수시로 케어 해 주었다. 그가 가이드 교육을 받기 위해 교육원에 입학 신청을 낸 건 승민의 학교 졸업을 반 년 앞둔 시점의 일이었다. 당연히 센터에 거주중인 연구원이었으므로 교육원 생활 역시 센터에서 통학하는 것으로 무사히 수료할 수 있었다. 잘 맞은 타이밍, 아니, 치밀한 설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잘 짜여진 계획은 무사히 승민을 민호의 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었다. 형은 어떻게 그걸 다 알고 있었어? 정인이 무심코 물은 질문에 민호는 몰라도 되는 문제라며 답지 않게 말을 아꼈다. 정인은 시간이 지난 지금에 와서야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국제법으로 금지되어 있는 센터 바깥에서의 센티넬 가이드 연구. 뇌과학 연구소에서 평생을 보낸 어린 이민호가 자신이 가이드라는 사실을 알고 승민의 방출 패턴을 측정할 수 있었다는 건, 관련 자료를 손에 넣었든 본인이 나서서 파고들었든 당당하지 못한 짓을 했다는 뜻이었다.


어쨌든, 정인은 그런 사정을 따져 보자면 민호가 박교수의 이름이 나올 때 마다 보이는 괜히 툴툴대는 반응이 속 좁아 삐친 아들의 투정 정도로 넘기고 말 건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당장 저가 없으면 죽게 생긴 이를 두고 제발 돌아오라는 무심한 말이 단지 아쉬워서 하는 소리 정도로 들리진 않았겠지. 더군다나 그 사람이 목숨과 맞바꾸어도 아깝지 않을 만큼 사랑하는 이라면.


“근데, 평생 끌고 갈 사람이면… 그냥 섭섭하고 미웠던 거 전부 쏟아내고 부딪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 해. 어른들이니까, 충분히 이성적인 대화가 되지 않을까.”


그래도 키워 주신 어머니 같은 사람이라며. 정인은 도무지 의욕을 낼 생각이 없는 민호의 등을 두드리며 그렇게 말했다. 저기압 상태의 이민호에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는 건 아마 쟤 밖에 없을 거야. 때때로 냉정하고 날카로운 타이밍으로 답을 파고드는 정인의 통찰력을 보며 곁에서 말없이 눈치만 보고 걷던 지성은 그런 생각을 입 안으로 삼켰다.





혹시나 계실 미성년 독자분들을 위해 꾸금 장면은 편집한 내용입니다

https://spinspin.net/cu_siyu

https://twitter.com/cu_siyu

C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