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새벽 바람과 함께 찾아왔다.












편의점 야간 알바는 대부분 평화로운 편이다. 내가 일하는 이 동네가 부촌이라 그런지 그저 다른 이유인지 몰라도, 편의점 야간 알바들이 흔히 겪는다는 진상들을 나는 지난 몇달 간 만나 본 일이 없었다. 그랬기에 여기 점장님도 여자인 내게 야간 시간대를 맡긴 거였고. 남자들도 꽤 지원을 했던데 왜 절 뽑으셨어요? 하니 점장님은 예의 무표정으로 시크하게 말했다. '남자애들 잘못 뽑으면 사고 치더라고. 우리 가게는 사고가 없는 덴데 사람으로 사고나는 게 제일 문제니까.' 그녀가 내게 바라는 것이 일을 특출나게 잘하는 게 아니라 '사고 치지 않는 것'이란 사실에 묘하게 안도가 됐다. 뭔가를 잘할 자신은 없어도 튀지 않을 자신만큼은 있었으니까.


교대를 하자마자 먼저 하는 일은 빈 매대를 채우고 페이스업을 하는 것이었다. 손님이 가장 많은 저녁 시간대가 지나면 물건들이 훅 빠져 곳곳이 이가 빠진 것처럼 텅텅 비어 있었다. 신선도가 생명이라 그날그날 새벽 늦게 물건이 오는 유제품이나 도시락 등을 제외하고, 창고에 재고가 남아 있는 물건들을 하나씩 채우고 나면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나는 그동안 한 아르바이트 중 이 편의점 일이 꽤 적성에 맞았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몸을 움직이면 되는 간단한 일이면서도 엄청나게 큰 체력을 요하는 건 아니어서. 야간 알바가 끝나고 몇 시간 잔 후에 학원에 가는 것에 큰 무리가 없었다. 게다가 편의점에 오는 손님들 대부분은 딱히 큰 친절을 바라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제 퍼스널 스페이스를 해치치 않는 익명성을 기꺼워하는 부류의 사람들. 


매대 정리를 다 하고 보니 어느덧 새벽 두시가 넘어 있었다. 나는 계산대로 돌아와 잠시 의자에 앉아 쉬면서 음악을 바꾸었다. 평소엔 아이돌 음악들도 좋아하는데, 이 시간에는 가사가 바로 꽂히지 않는 분위기 좋은 팝송들을 주로 틀어놓는 편이었다. 일을 하는 중이긴 했지만, 이 시간이 가지는 특유의 공기를 해치지 않고 싶었다. 


노래를 막 선곡하고 일어섰을 때, 딸랑, 풍경이 울리며 문을 열고 손님이 들어섰다. 어서오세요- 자동적으로 인사가 먼저 튀어나왔고 그 다음으로 그쪽으로 시선이 갔다. 검은 모자를 푹 눌러 쓴 키가 큰 남자였다. 그는 잠시 주위를 두리번 거리는가 싶더니 곧장 음료가 있는 냉장 코너로 걸어갔다. 손님이 오면 별 수 없이 시선이 가지만 최대한 다른 쪽의 허공을 보도록 노력하는 편이었다. 누군가 나를 주시하는 느낌을 누구보다 내 스스로가 싫어해서 더더욱. 나는 남자가 물건을 다 고를 때까지 그가 선 반대편 과자 코너쪽을 보며 아무 생각이나 하고 있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가 다가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고민도 없이 살 걸 정하고 온 사람의 속도였다. 그가 꽤 가까이 다가섰다고 느낄 때쯤 고개를 들었다.


?!



내가 헉 소리를 내지 않은 건 정말이지 다행이었다. 계산대 위에 맥주 여덟 캔을 올려둔 남자는 곧장 모자 캡을 다시 내리 눌렀다. 그렇지만 그 행동이 무색하게, 모르려 해도 모를 수가 없었다. 그는 내 배경화면을 1년 넘게 차지하고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김선호. 그가 분명했다. 


"…봉투에 담아 드릴까요?"


그러나 나는 아는 척 하는 대신 그렇게 물었다. 내가 아는 김선호는 먼저 '안녕하세요' 하고 살갑게 인사를 건넬 사람이었는데, 그는 여느 손님들이 그러듯, '제발 말 걸지 좀 말아주세요' 하는 분위기를 풀풀 풍기고 있었다. 얼굴이 보이지 않도록 최대한 눌러쓴 모자가, 눈을 피해 아래만 보고 있는 시선이, 그가 내보이는 태도의 모든 함의가 그랬다. 


"네."


그는 짧게 대답했고 나는 봉투를 꺼내 담기 쉽게 입구를 벌려놓은 후 맥주를 스캐너로 찍고 담기 시작했다. 여덟개를 모두 담고, 이만 원입니다, 말하자 그가 카드를 내밀었다. 


"거기 아래 넣어주시면 돼요."

"아."

"포인트 적립 필요하세요?" 

"아뇨." 


봉투의 손잡이를 위로 여며 그쪽으로 건네자 그가 받아들면서 꾸벅 고개를 숙이더니 곧장 몸을 돌려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한시라도 빨리 저를 보는 시선에서 벗어나고 싶은 사람처럼. 나는 그의 뒷모습을 보다가 그가 문을 열고 나간 후에야 한 박자 늦게,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했다. 아무도 없는 편의점에 공허하게 내 목소리만 울렸다.


한참 가만히 그가 나간 문을 보고 있던 나는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바탕화면 한가득 그가 밝게 미소 짓고 있었다. 이 사람은 배우 김선호, 그리고 방금 내가 만난 그 사람은 그냥 김선호, 구나. 그 둘이 다르다는 것을 실감하자 왜인지 실망이 밀려 들었다. 나도 몰랐는데, 그를 좋아하면서 다른 연예인들은 다 그런다고 해도 이 사람은 그렇지 않으리라는 이상한 믿음을 갖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이 사람은 화면에 보여주는 모습과 실제가 같을 거라는 그런 제멋대로의 믿음. 


그동안 김선호 만났던 후기를 보면 다 친절하던데. 다 뻥인가. 아님 오늘 유독 기분이 좋지 않았나. 


바로 앞에 선 나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고 어떻게든 피하고 싶어 안달이던 그를 떠올리니 마음이 순식간에 침잠했다. 나는 핸드폰 액정을 물끄러미 보다가 그의 사진을 지우고 초기 화면으로 돌렸다. 그냥. 그를 당장 안 좋아하겠단 건 아니었지만 이런 순간마저 그를 배경화면에 두고 있는 건 어쩐지 비참한 기분이 들어서.  




















덕계못이라고 했던가. 덕후는 계를 못 탄다는데, 이것도 어쩌면 그런 일종이 아닐까. 직접 만나긴 했지만 계를 탔다기엔 마음에 상처를 약간 입었으니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 그렇게 생각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거나 마찬가지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며 그 날의 일을 대충 뭉개버리고 다시 그의 사진을 배경으로 돌려놨을 때. 그러니까 그 날로부터 겨우 나흘이 지났을 때. 그날과 비슷한 시간, 믿을 수 없게도 그가 다시 편의점엘 찾아 왔다. 나흘 전 사간 맥주 여덟 캔을 그새 다 마신 건지 그때와 똑같이 맥주 여덟 캔을 계산대에 내밀면서. 그때처럼 모자를 푹 눌러 쓴 채로, 말은 거의 하지 않고. 여전히 혹시 내가 말이라도 더 걸까 초조한 사람처럼.


그리고 놀랍게도 그의 방문은 그 후로도 그렇게 쭉 이어졌다.


보통 일주일에 한 번, 텀이 더 길면 2주에 한 번 정도. 사가는 것은 언제나 맥주. 다른 안주거리를 사는 일도 없었다. 그는 항상 맥주 여덟 캔을 사서 말없이 돌아갔다. 그런 일이 반복되니 나중에는 그에게 포인트 적립을 하겠느냐 묻지 않게 됐다. 그 정도는 알 수 있는 사이가 된 것이었다. 그는 까만색의, 질감도 보통의 카드와 다른 카드를 쓰고, 포인트 적립은 하지 않고, 라거를 좋아한다는 정도. 


또 하나 알게 된 것이 있다면 말이 없는 그의 태도는 날 무시하고 싶어서라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그의 방문이 아주 특별한 것에서 일상적인 일이 되어가자 나 역시 그를 몰래 살필 여유가 생겼다. 푹 내리 쓴 모자로도 가릴 수 없는 그의 반쯤 드러난 얼굴에서 느낀 건, 내가 아주 잘 알고 있는 감정이었다. 그래서 알 수 있었다. 그가 편의점에 오는 날은 매우 지친 날이라는 것을. 내 지레짐작인지도, 혹은 그가 내 생각과 달리 벽이 아주 높은 차가운 연예인이라는 걸 인정하기 싫어 만들어 낸 사연인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게 됐다. 그렇게 이해하기로 했다.


다른 누구에게 신경을 쏟기 어려울 정도로, 그저 자기 자신을 가누기에도 힘든 날들이 있는 모양이라고.


그렇게 이해하기로 하자 모든 게 좀 나아졌다. 나는 편의점에 찾아오는 그를 더이상 배우 김선호로 인식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는 그냥 이 새벽, 술에 기대지 않으면 잠들기 어려운 이 복잡한 도시의 여느 사람들 중 하나일 뿐이었다. 필요 이상의 관심이나 관계를 원치 않아 편의점을 찾는 수많은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저마다 남들이 짐작키 어려운 생의 무게를 지고 사는 법이니까.


그가 편의점에 온 지 세 달쯤 지난 어느 날. 평소보다 조금 더 늦은 시간에 그가 찾아왔다. 딸랑, 풍경 소리가 들리고, 여느 때처럼 모자를 깊게 눌러쓴 그의 모습이 보이자마자 나는 어서오세요- 기계적으로 되뇌면서 곧 우측으로 시선을 비꼈다. 이제 곧 맥주를 들고 나타나겠거니 싶어 스캐너를 바라보며 살짝 멍을 때리는데 갑자기 우당탕탕 하는 소리가 들렸다.


?!


놀란 나는 얼른 계산대에서 빠져 나가 오른쪽으로 돌아 냉장코너 쪽으로 뛰듯이 다가갔다. 맥주캔들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고 그가 주저앉아 발쪽을 잡으며 아… 신음하고 있었다. 


"괜찮으세요?"


그에게 필요 이상의 말을 걸지 않는 것은 이제 암묵적인 룰과 같았지만 모른 척 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얼른 그의 곁에 허리를 숙이고 다가서 맥주캔을 집어 들며 그의 안색을 살피려는데 훅- 진한 알콜 냄새가 끼쳤다. 이미 어디선가 술을 많이 마시고 온 사람의 체향이었다. 


"아, 괜찮, 그 캔이 떨어져서 발에 찧어서, 어,"


그는 숙였던 고개를 들고 허둥지둥 말을 하다가 갑자기 얼굴을 왈칵 일그러뜨렸다. 이상한 예감. 나는 놀라서 숨을 멈췄고 곧 그의 눈에서 눈물이 툭 떨어졌다.



"아니, 괜찮은데, 왜 이러지, 어 그니까-"


그는 스스로도 놀라 손으로 벅벅 눈물을 닦으며 괜한 변명을 이었다. 그러나 오히려 그것이 기폭제가 되었는지 연이어 툭 터지는 울음을 더이상 막지 못했다. 윽, 울음을 참기 위해 애쓰는 데도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분명 아주 오래 전부터 참고 참아왔을 거였다. 다들 이 정도는 아파하면서 살텐데 나 혼자 동동 거리는 게 어쩐지 우스워서 더욱 더 참아내렸을 마음들. 나는 주제 넘지만, 그의 속을 알 것만 같았다. 한번 둑이 터지자 도저히 제어가 되지 않는 저 순간을 나도 겪어본 적 있었으니까. 


어쩔 줄 몰라하는 그의 팔을 다짜고짜 붙들었다. 정신이 없는 채인 그가 내 손에  그대로 딸려 왔다. 읍, 윽, 울고 있는 그를 붙들어 바로 앞 창고 문을 열고 밀어 넣었다. 그리고 그대로 거기에 그를 둔 채 문을 닫았다. 꽤 무겁고 육중한 문이라 방음이 잘 되는 편인데도 문 너머로 그의 울음 소리가 새나왔다. 나는 얼른 계산대로 달려가 핸드폰을 집어 들어 음악의 볼륨을 있는 대로 높였다. 커다랗게 울리는 음악 소리에 그의 울음이 묻혔다. 이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나는 그를 모르고, 그의 삶도 모르고, 그러니 위로할 처지도 자격도 되지 않았으니까.


그가 떨어뜨린 맥주캔을 집어 들어 다 닦은 후에 내가 계산을 했다. 찌그러진 캔을 다시 팔 수는 없는 노릇이고, 사실 그에게 계산을 요구해야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이 새벽, 아는 사람도 없는 이 황량한 편의점에서 저를 더이상 어쩌지 못해 마음이 무너져내린 저 사람에게, 그런 것을 요구하고 싶지 않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맥주와 안주를 사러 온 다른 손님의 계산을 하고 있을 때 창고 문이 달칵 열렸고, 그가 곧 빠르게 저 뒤로 걸어서 문쪽으로 나섰다. 그리고 딸랑- 아무 말도 없이 인사도 없이 그렇게 사라졌다.


그렇게 가버린 그에게 서운하지 않았다. 


그저, 많이, 걱정이 됐다.


























중간 시재점검을 하고 늦게 들어온 유제품 정리까지 마친 새벽 네 시 반. 나는 뜨거운 커피를 한 잔 뽑아 편의점 앞 파라솔에 앉았다. 이 시간이면 가끔씩 이렇게 있곤 했다. 손님이 가장 없는 시간이어서 이렇게 여유를 즐기기에 알맞은 때였다. 복잡한 생각들을 떨쳐 내고 내 발목을 붙잡은 고민들을 지우고, 스스로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잘 될 거야. 괜찮아. 아주 캄캄하게 보이는 이 때야말로 해가 떠오르기까지 얼마 안 남은 시간이라고. 저 먼 곳의 새까만 하늘을 보며 스스로를 위로하곤 했다.


저벅저벅.


뒤쪽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리기에 손님인가 싶어 얼른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뒤쪽을 흘깃 보니 정말 검은 인영이 다가오고 있었다. 앗, 들어가야지. 정신을 차리고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안녕하세요-' 하는 목소리가 내 발걸음을 붙들었다.


나는 멈춰 서서 황급히 거두었던 시선을 다시 그쪽으로 돌렸다.


…그였다. 



"안녕하세요."


그가, 모자도 쓰지 않은 모습의 김선호가, 확인이라도 하듯 한 번 더 내게 인사를 건넸다. 지난 몇달 간 알았던 그런 얼굴이 아니라, 화면 속으로 보고 또 보던 예의 그 다정한 눈빛으로. 늘 기어들어가듯 하던 목소리로 겨우 하던 대답이 아니라, 생기가 실려 있는 언제나의 따뜻한 음성으로.


"아… 안녕하세요."


늘 기계적으로 하던 어서오라는 말 대신 나 역시 그에게 처음으로 건네는 진짜 인사였다. 내 인사에 그가 살풋 미소지었고 그러자 볼에 보조개가 폭 패였다. 곧 그의 시선이 내가 앉았던 자리 위 놓인 커피잔으로 향했다.


"저런 커피, 여기서도 팔아요?"


나는 평소와 다른 그의 태도에 조금, 아니 아주 많이 당황한 상태여서 네? 하고 되물었다가 뒤늦게 그가 한 말을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아, 네, 네… 하고 바보처럼 답했다. 


"그럼 저도 커피 주세요."

"…들어오세요."


문 앞으로 걸어가는데 그가 내 뒤에 성큼 다가서는 것이 느껴졌다. 찬 공기를 뒤집어 쓴 그의 체온이 느껴질 만큼 가까운 거리까지 훅 다가온 그의 기척에 순간 놀라 몸을 움츠리자 그가 앗 하고 살짝 당황하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놀래켜서 미안해요. 그게 아니라-' 팔이 쭉 뻗어 나와 내 머리 위를 가로 질러 문으로 향했다. 그가 문을 안으로 밀어 열더니 그대로 잡았다. 마치 먼저 들어가라는 뜻이었다고 변명하듯이. 


갑자기 그가 왜 이러는 건지를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나는 한순간 다른 사람처럼 구는 그의 태도에 고장난 로봇처럼 뚝딱 거리며 그를 데리고 계산대 앞으로 가 컵을 하나 꺼내 포스기에 찍었다. 그 다음 그에게 컵을 내미니 물음표 가득한 표정으로 날 보고 있던 그가 아! 하면서 지갑을 꺼내 내게 카드를 내밀었다. 


"아메리카노, 라떼 두 개 있는데."

"아메리카노요. 차가운 거."

"아, 아.. 차가운 거요? 그럼 컵을 이걸로 하면 안..되고."


맞다. 얼죽아였지, 이 사람. 매뉴얼대로 먼저 물어봤어야 하는 건데 잠깐 홀려서 물어본다는 걸 깜빡 했다. 그간 봤던 인터뷰 내용이 훅 뇌리를 스쳐 나는 그가 앞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머리를 한 번 털어냈다. 그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올랐지만 나는 모른 척 하고 아이스크림이 들어 있는 냉동고 쪽을 가리켰다. 


"저기 얼음컵 있어요."

"아! 그거 가져 오면 돼요?"

"네."


그는 신이 난 것처럼 헷, 웃더니 그 기다란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가 얼음컵을 꺼내가지고 왔다. 그리고 마치 칭찬이라도 해달라는 듯 잔뜩 기대한 표정으로 내게 컵을 내밀었다. …뭘 기대하는 거지? 나는 그의 감정을 따라가기 어려워 그냥 컵을 받고 포스기에 찍은 다음, 커피 메뉴로 들어가 아메리카노까지 올리고 계산을 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머릿속은 바삐 돌아가고 있었다. 아무래도 편의점에서 커피를 뽑아 마셔본 적이 한 번도 없는 것 같은데, 커피머신 앞에 가서 직접 커피를 뽑아 줄지 말로만 설명을 할지. 편의점 커피는 '셀프'니까. 셀프의 취지에 맞게 보통은 말로 설명만 하는 편이었고, 만약 그가 그동안 이곳을 숱하게 찾았던 그 '김선호'였더라면 역시 고민도 없이 말로 설명 했겠지만, 왠지 지금은 그렇게 하는 것이 영 껄끄러웠다. 그는 지금 배우 김선호의 얼굴을 하고 있었고, 나는 배우 김선호의 팬이었으니까. 게다가 얼마 전 그런 일도 있었고. 


…그래서 이러는 건가.


계산을 마치고 영수증이 드륵드륵 올라오는 것까지 확인한 후, 결국 짧은 고민을 마쳤다. 


"따라오세요."


그는 말 잘 듣는 강아지라도 되는 양, 내 뒤를 졸졸 따라왔다. 진짜 왜 이러지. 갑자기 이러면 어쩌라는 거지. 신경이 쓰여 미칠 것만 같았다. 커피를 뽑으면서 내내 그의 시선이 내 옆쪽 뺨에 닿는 것이 느껴졌다. 눈 한 번 마주칠까 스스로를 꽁꽁 숨길 땐 언제고, 대체 왜 이러는 건지. 그렇지만 왜 그러냐고 물을 용기 같은 건 내게 없었다.


"여기요."


완성된 아메리카노를 그에게 건네자 그가 받으면서, 감사합니다- 하고 대답했다. 정말 내가 지금 꿈이라도 꾸는 것 아닐까. 180도 달라진 그의 태도는, 언제나 내가 상상했던 그의 모습 딱 그대로였다. 다정하고 친절하고 어른스러우면서도 장난스러운.


"커피, 같이 마셔도 돼요?"

"…네?"

"커피 마시고 있었잖아요. 같이 마시면 안 돼요?"


그동안 그가 나와 시선을 맞추지 않았던 걸 감사해야할 지경이었다. 내 눈을 들어다보며 허락을 구하는 그와 눈을 맞추자 심장이 속절 없이 마구 뛰어댔다. 나는 겨우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했다. 그러자 그가 오케이! 하고 말하며 싱긋 웃었다. 나는 시선을 피하며 뺨이 붉어지지 않았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늘 나 혼자 앉던 자리에, 그와 나란히 마주하고 앉았다. 그가 쪼롭, 커피를 한 모금 마시더니 곧 내려 놓았다. 그리고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할 말이 있는 건가? 나는 이 자리가 못내 불편하고 어색해서 커피를 집어 들고 손으로 컵 주변을 만지작 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그, 고마웠어요."

"…네?"


그가 툭 꺼내놓는 말에 뒤늦게 다시 시선을 들어 그를 봤다. 그러자 그가 조금 멋쩍은 듯 웃으며, 아, 이것부터 확인을 해야하나, 하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웃긴 질문이긴 한데…"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그가 말을 골랐다. 음, 어, 몇 번이고 고민을 하다가 결국 꺼내놓은 말은,


"나 누군지 알아요?"


거기서부터였나. 하긴, 내가 그를 모르기에 그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내겐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지만 그에게 나는 그저 거리에 다니는 수많은 사람 중 하나일 뿐이었다. 그를 알 수도 모를 수도 있는, 그가 언제나 상대하고 있는 '대중'이라는 이름, 그 중의 하나.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죠. 어떻게, 몰라요…."

"그럼 모른 척 해준 거 맞구나."


그가 고개를 끄덕끄덕 알겠다는 듯 하더니 곧 나를 똑바로 바라봤다. 그리고 또 예의 그 배우 김선호의 얼굴로, 그러니까 미소가 어린 다정한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그럼 부탁 하나만 더 해도 돼요?"

"?"

"나, 며칠 전에 그거…"


그가 쑥스럽다는 듯이 눈을 찡긋하며 한 번 웃더니 이내 조금 긴장한 눈빛으로 물었다.


"계속 모른 척 해줄 수 있어요?"


사실 어느정도 예상한 이야기였고 또 아주 정중한 태도였다. 웃는 얼굴, 다감한 말투, 쑥스럽고 어려워하는 듯한 몸짓. 그런데 왜 기분이 이렇게 좋지 않은 걸까. 조금 전까지 멋대로 설레던 마음이 산산이 깨지고, 순식간에 추락했다. 알만한 일이었다. 한밤중에 편의점에서 술에 취한 채 엉엉 울었다는 얘기가 인터넷에 나돌기라도 하면 별별 소문이 이어지겠지. 


평소와 다른 그의 태도는 결국 내 입을 막기 위한 거였나.


그는 인내를 가지고 내 대답을 기다리는 듯 나를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목구멍이 콱 막혀 왔지만 억지로 입을 뗐다.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내가 듣기에도 지나치게 쌀쌀맞은 목소리였다. 그의 눈빛이 살짝 달라지는 것이 보였고, 그 당황스러움이 나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아 자리에서 달싹 일어났다.


"그런 걸 어디다 떠들고 싶었으면 처음 편의점 오셨을 때 진작 그랬을 거예요. 저, 그렇게 경우 없는 사람 아니에요."


그 말을 끝으로 그대로 몸을 돌려 그를 지나쳤다. 그는 어- 소릴 내며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지만 나를 붙잡지는 않았다. 문을 열고 편의점 안으로 들어서는데 뒤에서 부우웅 하며 차가 서는 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지 않기 위해 노력하면서 계산대 앞까지 왔지만, 계산대에 서자 저 너머 투명한 문으로 까만색 밴이 그 앞에 선 게 보이는 것까지 안 보이는 척 할 순 없었다. 


보이는 걸 어쩔 수 없으니 그럼 시선을 차단하는 수밖에.


나는 안쪽 창고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문앞에 기대어 서서 한참을 기다렸다. 그가 사라졌다고 여겨질 때까지. 그리고 한참 뒤 문을 열고 나왔을 때, 문밖에는 까만색 밴도, 그도 없었다. 


이상하게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나는 그가 사과라도 하러 따라와주길 바랐던 걸까. 마음이 엉망진창으로 구겨졌다.




























2주가 지나도, 3주가 지나도, 그는 다시 편의점에 나타나지 않았다. 마지막에 그렇게 그에게 쏘아붙였으면서도 나는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기대를 하는 건지 내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었다. 새벽 두 시 언저리, 문에 달린 풍경이 소리를 내기만 하면 심장이 툭 툭 아무렇게나 떨어졌다. 그리고 그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면 그 날 하루의 일과가 엉망이 됐다. 그는 그저 손님이었을 뿐이고, 나는 그저 아주 찰나, 그의 진짜 얼굴을 본 것에 불과했다. 그가 허락해서가 아니라, 그도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우연히, 그는 원하지 않았을 텐데도 불구하고. 그런데도 왜 멋대로 그에게 연민을 느끼고, 동질감을 느끼고, 그걸 넘어서 이렇게 서운한 걸까. 왜 그가 다시 내게 찾아와 사과라도 해주길 바라는 걸까. 사실 그가 사과할 게 뭐가 있다고. 그로선 당연한 부탁이었을 것이다. 그는 나를 모르고, 그래서 그렇게 일부러 찾아와 어렵게 부탁을 꺼내놓은 것일 터였다. 그런데도 나는 우습게도 그가 나를 몰라준다며 이렇게 서운해하는 것이었다.  


그가 나를 모르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인데.


나는 결국 편의점을 그만뒀다. 그만두겠다 말했을 때 점장님은 서운한 얼굴로, '1년은 한다 그랬잖아' 하는 말을 하며 내 죄책감을 들쑤셨지만 그보다는 내가 괜찮아지는 것이 먼저였다. 죄송하다는 말로 그렇게 편의점을 관뒀다. 그러고나니 생계가 문제였다. 편의점에서 받는 월급은 내 생활비의 전부였다. 학원비와 집세는 그동안 모아뒀던 돈을 야금야금 까먹으며 내고 있었지만 생활비는 벌어야 했다. 먹고 사는 게 전부 돈이었으니까. 아르바이트 자리는 쉽게 구해지지 않았다. 몇 번을 떨어지고 또 떨어지다가 겨우, 저녁 콜센터 자리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미 편의점 알바에 생활이 맞춰져 있어서 다시 그걸 바꾸는 것이 힘들었다. 학원을 마치면 허겁지겁 회사로 가 갖가지 종류의 진상들을 상대해야했고, 그 후엔 돌아와 밀린 복습을 해야했다. 그렇지만 공부를 하는 건 쉽지가 않았다. 콜센터 업무는 체력뿐 아니라 감정도 같이 소진하는 일이어서 집에 돌아오고 나면 구겨진 마음을 수습하기 바빴다. 그러다 보면 울다 지쳐 잠들기 일쑤였다. 내가 대체 뭘 하는 거지. 이렇게 있다가 올해 시험 망치면 어떡해. 조급한 마음이 들었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그럴 때면 원망이 아무 죄도 없는 그에게로 뻗어갔다. 내 인생이랑 상관도 없는 연예인 때문에 뭐하는 거야. 그 사람은 대체 왜 잘 지내고 있는 내 세상으로 불쑥 들어와서 내 삶을 엉망으로 만드는 거야.


점장님에게 급한 전화가 온 것은 후회를 한 지 한 달이 지났을 때였다. 


정말 부탁할 데가 없어서 그래. 다음 사람 구할 때까지만, 한 일주일 만이라도 해주면 안 될까?

…점장님, 그럼 제가 다시 하면 안 될까요?


돈을 다 가지고 달아났다는 전임 알바 덕에, 나는 다시 편의점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점장님은 1년을 채우겠단 약속을 저버렸던 걸 다 잊기라도 한 것처럼 나를 반겨주었다. 한 달만이었지만, 몇 달은 지난 기분이었다. 편의점을 떠나기 전엔 그 때문에 죽겠단 생각이 들었는데, 편의점에 돌아오니 이제는 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 마음이라는 게 참, 간사하구나. 이렇게 다시 돌아왔으니 그에 대한 원망 같은 것도 털어내자고 그렇게 마음 먹었다. 그렇지만 지워버린 그의 배경화면 사진을 도로 복구하는 일은 없었다. 그의 드라마를 보며 마음을 달래는 일도 더이상은 없었다.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때. 두 계절이 뒤엉켜 코끝에 스미는 바람에도 두 가지 정취가 풍기는 때가 찾아 왔다. 나는 이맘때를 가장 좋아했다. 덥지도 않고 습하지도 않고 서늘하지도 않고 건조하지도 않은 기분 좋은 공기. 나는 기존의 생활을 다시 되찾은 참이었다. 커피를 들고 편의점 앞 테이블에 앉으면 어김 없이 그의 생각이 났지만 내 기분까지 좌지우지하게 되지는 않았다. 마음 한구석엔 여전히 짜르르한 감정이 남아 있었지만 무시하고 누를 수 있을 정도는 됐다. 


끼이이익-


테이블 앞에 앉아 커피를 한 모금 막 마시는데 앞을 지나던 차가 갑자기 저만치에서 급하게 섰다. 지면을 긁는 타이어의 소리가 귀를 째지게 울렸다. 뭐야? 음주운전이라도 한 건가? 놀라움 반, 당황스러움 반으로 멈춰 선 차를 쳐다보는데 금방 문을 열고 내려서는 건 너무나 익숙한 사람이었다.


성큼성큼 내쪽으로 뛰듯이 걸어오며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그의 표정이 금세 밝아졌다.



"맞네요."

"..."

"다행이다."


바로 앞까지 다가 선 그가 숨을 들이키며 환하게 웃었다. 나는 눈을 끔뻑끔뻑하며 그를 올려다 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여긴 어떻게 있어요?"


그건 내가 물어볼 질문 아닌가. 나는 질문의 뜻을 쉬이 파악하지 못해서 눈썹만 삐뚜름하게 기울였다.


"그만뒀다면서요."

"아…."


그 말을 듣는 순간 단번에 마음이 스르르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왔었구나, 다시. 그리고 묻기까지 했구나. 전에 있던 사람은 어디에 갔느냐고. 너무나 쉽게 풀려버린 내 마음에 스스로도 좀 어이가 없어서 나는 그의 시선을 모로 피하며 우물거리듯 대답했다.


"다시 하기로 했어요."


그가 내 앞에 의자를 드르륵 빼내더니 그 자리에 앉으며 테이블 가까이 상체를 기울여 내게 몸을 가까이 했다.


"진짜요? 잘 됐다."

"…뭐가요?"


마음이 분명 다 풀렸는데, 내 말투는 마치 시비조인듯 해서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니까, 그런 뜻은 아니구… 내가 말끝을 흐리자 그가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그리고 이내, 눈빛이 진지하게 바뀌었다. 잠시 뜸을 들인 그가 곧 입을 열었다.


"사과하러 왔었는데… 내가 너무 늦었는지 관뒀다고 그래서요."

"..."

"계속, 사과하고 싶었어요."


귓가가 뜨끈해졌다. 사과를 받고 싶단 마음마저 이미 다 사라진 후여서 그랬을 것이다. 나는 이미 그 일을 잊어가는 참이었고, 사실 사과를 했으면 좋겠다는 내 마음이 도가 지나친 것이라는 것도 인정한 참이었고. 그랬는데, 내 속을 다 안다는 듯이 사과를 해오니 부끄럽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과하실 일 아니에요. 그땐 제가 과하게 반응한 거였어요."

"아뇨."


그가 단호하게 답했다.


"내가 잘못한 거 맞아요. 속을 다 들켜서 얼마나 부끄러웠는데. 그래서… 바로 사과했어야 하는데 용기가 없어서 사과도 바로 못 했구."

"..."

"미안해요. 처음부터 나 배려해준 사람한테, 내가 너무 무례했어요. 배려해주는 거 다 느꼈는데도, 그냥, 좀 부끄러웠나봐요. 그래서 멋대로 판단하고, 기분 나쁘게 해서 미안해요."

"정말 괜찮은데……."

"그럼, 사과 받아주는 거예요?"


다시 마주친 눈빛은 여전히 진지하고 올곧았다. 이제는 뺨까지 붉어졌을 게 분명했다. 목을 움츠리며 겨우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참았던 숨을 탁, 하고 뱉으며 다행이다 하고 웃었다. 


"나 이제 맥주 사러 다시 와도 되죠?"


웃는 얼굴에, 발끝이 간지러워졌다. 






























그 후로 그는 일주일에 한 번씩 꼬박꼬박 편의점에 들렀다. 요일은 일정하지 않았지만 시간은 언제나 새벽 두시쯤, 사는 것도 언제나 맥주. 달라진 게 있다면 전처럼 8캔씩 사지 않고 두 캔씩 산다는 점이었다. 그 갯수가, 그의 요즘 상태를 말해주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전보다 나아졌구나 그래도. 직접 물은 적은 없었지만 혼자 멋대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여전히 모자를 깊숙이 눌러 쓰고 오지만, 계산대 앞에 설 때면 캡을 조금 들어 보이며 나와 눈을 맞추고 인사했다. 잘 지냈어요? 별 일 없죠? 점점 날이 쌀쌀해지네요. 감기 조심해요. 아주 일상적이고 특별할 것 없는 말들이었지만 그가 전보다 나를 가깝게 느끼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계산을 하고 봉투에 담고 난 후 1-2분 정도, 우리는 짧은 대화를 했다. 가끔은 그의 작품을 잘 보고 있노라는 감상을 전하기도 했고 새로 나온 신상 맥주를 권하기도 했다. 단골 편의점 알바와 손님. 설명하자면 그것 외에 설명할 길이 없었지만 나는 그것보다는 조금 더, 아주 조금 더 친밀하게 그를 느꼈다. 그러지 않으려고 마음을 다잡고 다잡아서 그 정도였다. 만약 내가 조금 더 어렸다면, 이렇게 방어적인 성격이 아니었더라면, 진작에 이뤄질 수 없는 것들을 그리며 허우적댔을 거였다. 그렇지만 다행히 나는 세상을 알 만큼은 아는 나이였고, 객관적으로 나를 볼 수 있기도 했다. 더 바랄 게 없잖아. 좋아하는 배우가 단골 손님이 되었다니.


시간이 흐르고 흘러 계절이 바뀌었다. 하얀 입김이 눈에 보이고 찬 바람이 금방 뺨을 얼리는 계절. 시험을 칠 때가 다가온 것이었다. 전부터 점장님에게 미리 시험 치기 전 2주 동안은 일을 빼달라고 말해둔 참이었다. 시험 시간에 몸을 적응시켜야 하는데 아침에 자고 열 두시에 일어나는 생활을 해서는 안 될 것 같아서. 점장님은 흔쾌히 허락을 해줬고, 문제될 건 아무 것도 없었다. 다만 걸리는 게 하나 있었다. 그러니까 이걸 그에게 이야기 해야하는 건가 하는.


그가 매주 우리 편의점에 오는 걸, 나 때문이라고 생각해도 될까. 너무 주제 넘은 생각 아닐까. 그가 여기에 오는 건 집에서 가깝고, 맥주를 사고 싶기 때문일텐데. 그 이유에 내가 추가되었다고 생각하는 건 너무 나간 생각 아닐까.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로, 편의점에 나오지 않기로 한 날의 바로 이틀 전. 그가 편의점에 나타났다. 오늘은 처음 보는 민트색 모자였다. 매번 블랙, 네이비 같은 어두운 색의 모자만 쓰고 다니더니 저런 밝은 색의 모자를 다 쓰고, 웬일이지? 저런 모자는 '배우 김선호'일 때만 쓰는 줄 알았는데. 의아한 내 시선을 눈치 챘는지 그가 멋쩍게 웃으며 다가왔다. 


"너무 튀어요?"

"아뇨. 잘 어울리는데…."

"진짜?"


그가 조금 기쁜 듯한 표정으로 제 모자 쓴 머리 위를 슥슥 매만지고는 곧 맥주를 가지러 걸어갔다. 그동안 나는 아직도 어떻게 하지 고민을 했다. 그가 그걸 왜 알려주느냐는 듯 반응하면, 그걸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그냥 멋쩍은 걸 넘어 섭섭하고, 서운하고, 전처럼 삽질을 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나는 내 감정에 확신이 들지 않았다. 


"나 알콜 중독은 아니에요."

"? 네?"

"나 보는 표정이 심각하길래."


그가 맥주 두 캔을 내려 놓으며 장난스레 웃었다. 나도 모르게 인상을 쓰고 있던 모양이었다.


"아, 그래서가 아니라……."


내가 말끝을 흐리자 그가 계산대 위를 짚으며 눈을 둥그렇게 뜨면서 내 쪽으로 고개를 살짝 가까이 들이 밀었다. 


"무슨 일 있어요?"

"아뇨. 아니에요."


고개를 저으며 그의 시선을 피하자 그가 흐응, 소리를 내며 고개를 더 가까이 했다. 내 표정을 샅샅이 살피는 시선이 느껴졌다.


"아니, 진짜 아니에요."

"아니면 다행인데."


나는 그의 신경을 돌리기 위해 얼른 맥주를 계산했다. 내가 스캔을 하자 그가 자연스럽게 카드를 내밀었다. 이제 그에게 가격 고지도 따로 하지 않게 돼서 그가 결제기에 카드를 꽂기를 기다리고만 있는데, 그가 카드를 꽂을 듯 하다 위로 들어 올렸다.


"?"


뭐지? 카드만 쳐다보고 있자니 그가 카드를 그 위에서 흔들흔들 하며 도무지 꽂을 것 같지 않게 행동했다. 결국 그와 결국 시선을 맞출 수밖에 없었다.


"할 말 있죠?"

"..."

"진짜 아니에요?"

"아니…."


눈치가 빠른 사람이구나. 나는 더 버티기를 포기했다. 그가 어떤 반응을 하든, 어쨌든, 말하고 싶었다. 정말 혹시라도 그가 당황할 수 있는 일이잖아. 그가 이곳을 찾는 이유가 꼭 나를 보기 위해서는 아니겠지만, 적어도, 내가 다른 편의점의 알바생들 보다는 편하기 때문일 거라는 자신감 정도는 있었다. 그러니까, 그의 불편을 미리 덜어줄 수 있는 거 아닌가. 


"저 이제 2주 동안 안 나와요."

"? 왜요? 진짜 무슨 일 있어요?"

"아니, 그런 건 아니구…… 시험을 치거든요. 그래서 2주 동안만 쉬기로 했어요."

"아. 그렇구나. 다행이다. 난 또 무슨 일 있는 줄 알구."

"…그래서 혹시, 그 오셔서 혹시…"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 말을 고르느라 더듬거리자 그가 다 안다는 듯이 씨익 웃었다.


"말해줘서 고마워요. 와서 없었으면 나 엄청 놀랐을 거야. 그때처럼 또 관뒀나 하구."


나는 안도하는 속내를 들키지 않기 위해 시선을 내리 깔며 결제기 쪽을 바라봤다. 카드, 카드요, 하고 괜히 건조한 목소리로 말하자 그가 그제야 카드를 꽂아 넣었다. 계산이 끝나고, 영수증이 나오는 소리가 지이잉 들리고 나서야 나는 시선을 들었다. 마치 내가 다시 봐주기를 기다렸다는 듯 곧장, 나를 바라보고 있던 그와 시선이 마주쳤다. 


나를 본 그가 다감한 눈빛으로 말했다.



"시험, 잘 쳐요."

"…네."


조금 더 환하게 밝아지는 얼굴.


"그럼 2주 뒤에 봐요."




























그때 난 분명히 '네'라고 대답했지만,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시험 다음 날, 아빠가 쓰러졌다는 연락이 온 탓이었다. 아빠 집으로 빨리 내려가야 했다. 정신 없이 내려가기 전 편의점에 들러 점장님을 만났다. 우느라 엉망이 된 내 얼굴을 본 점장님이 놀라며, 일을 더 못할 것 같다는 나를 되려 위로해줬다. 그렇게 서울을 떠나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다. 지긋지긋한 고향, 지긋지긋했던 나의 아빠. 아빠는 뇌졸중이었다. 의사는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라고, 다행히 어려운 수술은 아니라고 했지만, 아무도 없이 혼자 무서운 내용이 가득 적힌 수술동의서에 사인을 하는 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어려웠고, 버거웠다. 그러나 의사의 말처럼 다행히도 수술은 잘 끝이 났다. 큰 말싸움을 마지막으로 연락도 거의 하지 않고 어색하게 지내던 우리는, 지난 감정을 해소할 새도 없이 우선 그냥 닥친 상황을 헤쳐나가기 급급했다. 재활만 잘 하면  전과 비슷한 생활로 돌아갈 수 있다는데도, 아빠는 당장의 답답한 제 몸을 견디기 어려워했다. 이전의 싸움을 갈무리 하기도 전에, 새로운 싸움이 시작됐다. 제발, 재활 안 하면 그냥 평생 그렇게 살 거야? 난 아빠 수발하면서 평생은 못 살아! 주워 담을 수도 없는 그런 말을 던지고서야 우리의 싸움은 잠시 소강 상태에 접어 들었다.


종종 그를 생각했다. 아니, 정확히는 무너지듯 흐느끼던 그의 모습을 생각했다. 모든 걸 다 가진 것 같은 그 사람이 그토록 갑작스레 무너져내리던 모습을. 그에게는 너무나 미안하지만, 그때를 생각하면 어쩐지 위로가 됐다. 내게만 세상이 지옥인 게 아닌 거 같아서. 부족할 게 없어보이는 그에게도 때로는 세상이 지옥일 수 있다는 것이, 그 잔인한 공평함이, 위로가 되었다. 내가 그렇게 위로받았다는 걸 알면 그는 진저리를 칠까, 아니면 웃을까.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고, 또 봄이 지나고 여름이 찾아 왔다. 봄과 여름이 뒤섞인 그 애매한 계절. 절대 나아질 것 같지 않던 아빠는, 거짓말처럼 많이 나아졌다. 일을 다시 시작한 아빠가 그날 저녁, 식탁에서 문득 말했다. 그만 서울 올라 가. 1년을 휴학할 순 없잖아. 서울에 가는 걸 그토록 반대해서 이뤄졌던 우리의 싸움이 그렇게 허무하게 마무리 됐다. 나는 고맙단 말도, 미안하단 말도 하지 않았다. 아빠 역시 미안하단 말도, 잘 하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아빠는 3일 뒤 버스정류장까지 나를  직접 데려다 줬다. 아직 방학인 시기였고 더 집에 있을 수도 있었으나 나는 그냥 그렇게 올라왔다. 버스를 타기 직전 아빠가 봉투를 건넸다. 30만 원이 들어 있었다. 그것이 아빠의 사과라는 걸 알았다. 마음을 다독이고 상처를 어루만지는 법 같은 건 잘 모르는 사람이라는 걸 너무도 잘 알면서도, 나는 그 30만 원이 마냥 감격스럽지는 않았다.


서울에 올라와서 이틀은 잠만 내리 자다가 그 다음 날, 한가할 시간에 편의점엘 찾아갔다. 점장님도, 편의점도 그대로였다. 점장님은 예의 시크한 표정으로, 무사히 올라왔으니 됐어, 하며 내 사과를 그냥 모른 척 건너 뛰었다. 점장님의 그 담백한 방식이 좋았다. 나도 저런 어른이 될 수 있었으면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내가 하던 야간 알바 자리는, 성실한 사람으로 채워져 있었다.


개강까지는 시간이 남았고, 전처럼 시간을 쪼개 생활하진 않아도 되어서 나는 저녁 타임의 카페 아르바이트를 구했다. 개강 후에도 할 수 있도록 생각한 시간대였다. 전에도 카페에서 일해본 적이 있어 적응하는 데 크게 어렵진 않았다. 장사가 잘 되는 사거리에 위치한 2층짜리 카페여서 다만 매우 바쁘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랄까. 정신 없이 바쁜 건 그 나름의 미덕이 있었다. 시간이 안 가나 세보지 않아도 되었고, 쓸데없는 생각이 비집고 들어올 틈 같은 것도 없었고.


그렇게 한 달을 지내고 나니 개강이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개강 전에 옷이라도 좀 살까.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내내 인터넷을 붙들고 쇼핑을 했다. 버는 건 어려워도 쓰는 건 쉬웠다. 원피스 몇 벌, 청바지 하나, 블라우스와 티 몇 벌. 그렇게 사고 나니 한 달 월급의 반이 날아갔다. 너무 충동적이었나… 결제창을 보면서 고민하고 또 고민하다가, 한 번의 충동도 그대로 넘기지 못하는 내 자신에 속이 답답해져 모자를 집어 들고 밖으로 나섰다. 


새벽 두 시였다. 집에서 편의점까지는 걸어서 30분 거리. 5분만 걸으면 그가 사는 부촌으로 동네 이름이 바뀌는 그곳에서 난 살았다. 그럴 생각으로 나온 건 아니었는데 발걸음이 그쪽으로 향했다. 무작정 편의점까지 걸었다. 가는 도중에 점점 '혹시나' 하는 기대가 밀려 들었다. 우리가 운명이라면, 우연처럼 그곳에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그의 생각을 잊고 살았다고 여겼는데 아닌 모양이었다. 


딸랑, 문을 열고 들어가니 자리에 앉아 있던 남자가 일어나며 '어서오세요' 하고 인사를 했다. 들은 대로 성실한 타입인 듯 했다. 편의점 안엔 나 말고 손님은 아무도 없이 텅 비어 있었다. 너무나도 익숙한 그곳의 문 앞에서 길이라도 잃은 사람처럼 가만 서 있던 나는, 알바생의 의아한 눈빛을 뒤늦게 느끼고 더듬더듬 음료코너로 걸어갔다. 그리고 맥주 8캔을 꺼냈다. 할 수 있는 한 천천히 하나씩 꺼냈다. 그가 늘 마시던 걸로, 그가 늘 마시던 갯수대로. 계산을 마치고 나올 때까지, 그리고 잠시 편의점 앞을 서성일 때까지도, 그 누구도 편의점 앞을 지나지 않았다. 


운 좋게 다시 편의점 알바를 하는 일도, 다시 그를 마주치는 일 같은 것도 더이상은 없는 거였다. 그래, 그런 운명 같은 일이 어떻게 계속 반복되겠어. 그렇게 생각하며 걸음을 옮기면서도 마음이 텅 빈 듯 했다. 몇 달이나 지났으니 그는 분명 나같은 건 잊고 지내겠지. 우리의 사이는 여전히 편의점 알바생과 손님, 혹은 연예인과 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데, 왜 난 자꾸 이상한 기대를 버리지 못하는 걸까. 


이제야말로 그만 헛된 마음을 접어야 한다는 걸 아는데도.


집으로 향하던 걸음을 돌려 한강 둔치로 가는 길로 접어들었다. 집에는 아직도 그가 그 날 바닥에 흩트렸던 맥주 8캔이 남아 있었다. 오늘은 이 캔만큼만, 그리고 다음에는 그 맥주들까지. 미련처럼 남겨두지 말고 남김없이 다 마시는 걸로 그만 접자. 그렇게 마음을 먹었다. 우선 오늘은 집이 아닌 곳에서 털어내고 싶었다. 한강변에 자주 가보지는 않았지만 충동적으로 그리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드라마 보면 많이들 그러잖아. 한강 가서 다짐하고, 한강 가서 흘려보내고. 강물 따라 마음도 그렇게 실어 보내고 싶다는 뜻이 담긴 거겠지.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한강을 따라 이어진 산책길로 접어들어도 사람들이 없었다. 가로등이 드문드문 있었지만 좀 컴컴해서 무서운 기분이 살짝 들었다. 너무 안쪽까지 가진 말고 근처에 자리를 잡아야겠는데… 그렇게 생각하며 주위를 둘러볼 때였다. 저 멀리 걸어오는 한 남자가 보였다.


저렇게 모자를 푹 눌러 쓰고 땅을 보며 걷는 그를, 나보다 더 빨리 알아볼 사람은 없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나는 단번에 그를 알아봤다.


'우리가 운명이라면 우연처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왜, 내 헛된 기대를 그는 이렇게 충족시켜 주는 건지. 


멈춰 선 나를 눈치채지 못하고 느린 걸음으로 터벅터벅 걸어오던 그는, 우리 사이 거리가 열 발자국쯤 남았을 때에야 앞에 선 내 기척을 느낀 건지 걸음을 멈추고 땅만 보던 시선을 아주 조심스레 들었다. 얼굴을 보이지 않으려고 하는 방어적인 몸짓이었다. 내가 너무나도 잘 아는. 


슬쩍 들렸던 고개가 이내 뻣뻣하게 정면으로 쳐들어지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그는 나를 빤히 바라봤다. 마치 믿을 수 없는 걸 봤다는 듯이. 조금 전 내가 그랬듯, 멍하니 그렇게. 나는 천천히 그의 앞으로 몇 걸음 다가갔다. 


"…오랜만이에요."


어색하게 웃었지만 그는 웃지 않았다. 나를 빤히 보던 그의 눈이 어느 새 발개지고, 곧 촉촉해졌다. 더이상 그에게 무슨 말을 건네야 할지 몰라 입이 딱 붙었다. 


한참만에야 그가 입을 열었다.

"2주라면서요."


원망스러운 목소리였다.


"2주만이래놓고……."


아.


나는 울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죄송해요. 일이…."


이상하게 목이 메었다. 그 역시 마찬가지인지 이를 악 물어 턱 끝이 자잘하게 떨리는 것이 보였다. 우리는 말없이 한참을 더 그렇게 마주보고만 있었다. 마주 선 채로 터질 것 같은 감정을 추슬렀다. 그도 나처럼 너울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있다는 걸 느꼈다. 그 마음의 정체가 과연 나와 같은지는 알 수 없었지만 우리는 분명, 당장 토해내고 싶은 무엇을 참고 또 참아내는 중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가 내가 든 봉지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거, 맥주예요?"


그 말에 나는 들고 있던 봉지를 얼른 들어보이며 어색하게 웃었다.


"역시 바로 알아보시네요."


억지로 쥐어짜내느라 그리 자연스럽지 않은 농담이었지만 그 역시 반쯤은 아직 경적된 표정으로 농담을 받아주었다.


"나 알콜 중독 아니라니까-"


그 덕이었을까. 전에 없던 용기가 생긴 건. 씁쓸한 미소가 감도는 그의 입꼬리를 보던 나는 전부터 하고 싶었던 말을 했다. 사실 그가 맥주를 사갈 때마다 하고 싶은 말이었지만, 일을 하는 중이라는 처지를 핑계로, 그와 나는 엄밀히 따지고 보면 아무 사이도 아니라는 냉철한 자각으로 삼키고 삼켰던 그 말을.


"…같이, 드실래요?"





























이 늦은 시간에도 저 멀리 보이는 빌딩들에는 불이 켜져 반짝거렸다. 누군가에겐 이 시간이 잘 시간이 아니라 한창 일을 할 시간이겠지. 시간은 모두에게 똑같이 나누어져 있지만 모든 이에게 각기 다르게 흐른다. 나의 지난 몇 달과 그의 몇 달이 다르듯이. 그 시간 동안 나는 아빠를 수발한 것 외에 아무 일도 하지 못했지만, 그는 영화 하나의 촬영을 끝냈다. 그 밀도만큼이나 우리는 달랐다. 


"어떻게 지냈어요?"


맥주 한 캔 씩을 따서 나눠 가진 후, 오래도록 먼 곳만 바라보고 있던 우리의 침묵을 먼저 깬 것은 그였다.

 

"그냥…."

"그냥 이유 없이 관두고 사라졌다고 하는 거면 난 좀 속상한데."


그렇지만 그가 훅 던지는 말은 꼭 내 마음과 그리 다르지 않은 것만 같아서. 아니라고 스스로를 다잡아도 자꾸 빼꼼히 기대가 고개를 들어서. 


우리가 서로 통한다는, 서로를 알고 있다는 그런 착각이 자꾸 비집고 나와서.


"난 그게 약속이라고 생각했는데. 2주 후에 보자는 거."

"…죄송해요."

"사과 말구."


그래서, 지금껏 그 누구에게도 그런 적이 없는데, 내 속을 꺼내놓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나란히 앉아 있던 그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여 나를 물끄러미 응시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 눈빛이 꼭, 당신 이야기가 듣고 싶어요,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아빠가 쓰러져서, 고향에 내려갔었어요."


그가 가만히 내 말에 집중했다. 말문을 한 번 트자 말이 술술 나왔다. 엄마가 돌아가신 후 원만치 않았던 아빠와의 관계가 더욱 어려워졌다는 것. 고향을 늘 벗어나고 싶었고 그건 결국 아빠를 벗어나고 싶었던 것 같다는 내 이기적이고 못된 속내. 하나하나 다 꺼내고 보니 어느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중간 중간 끅끅 거리기도, 한참 말을 잇지 못하기도 했지만 그는 내 이야기 중간에 끼어들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대충 말을 흘려듣지도 않았다. 내 말 하나하나를 꼼꼼히 들어주면서도 그는 섣불리 아무 위로의 말도 꺼내지 않았다.


"내가 그렇게 착한 사람은 못 되는구나 싶네."


내 말을 모두 다 듣고 난 후 그가 꺼낸 말은 그랬다. 선뜻 이해하기 어려워 이어질 그의 다음 말을 기다리자 그가 나를 흘긋 보면서 옅게 웃었다.


"우리 못 보는 동안 나도 좀 힘들었거든요. 근데 나만 힘들었던 게 아니라 거기서 같이 힘들었다니까, 괜히 좀 위안이 되구……."

"…"

"너무 못됐어요?"


그의 말에 나도 웃음이 나왔다.


"아뇨. 사실 저도 그랬는데요."

"진짜?"

"네."

"그럼 쌤쌤."


동시에 짧은 웃음이 터졌다. 시선이 마주치고, 곧 누구도 서로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부드러운 웃음기가 남아 있던 그의 눈동자가 이윽고 진한 빛으로 가라앉았다.


"한동안 너무 힘들었는데, 그때 앞에서 그렇게 엉망으로 울고 나니까, 그 다음부터 이상하게 괜찮아지더라구요. 나."

"..."

"그래서, 사실, 맥주도 더이상 안 마시게 됐는데, 그래도 자꾸 편의점에 갔어요. 갈 때마다 그곳에 변함없이 있다는 게 이상하게 좋아서요. 바보같은 모습을 먼저 다 보여줬어서 그랬나. 그냥 마음이 편했어. 사람들 틈에서 갑자기 덜컥 무서운 마음이 들면 술 마시는 대신에 편의점엘 갔어요. 그럼 거기에 항상 있으니까… 그냥 다들 아는 나 말고, 진짜 내 모습을 알고 있으니까… 그게 좋았나봐."



"그래서, 못 보게 되고 나서 너무 힘들었어요, 나."


눈물이 차올랐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제 속을 꺼내어 보여주는 그의 마음이 정말 내 마음과 다르지 않았다는 걸 확인해서였을까. 그에게도 내가 특별한 무엇이었다는 게 기뻐서였을까. 그에게도 내가 위로였다는 게 다행이어서였을까. 알 수 없었다. 그저 나는…



일렁이는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던 그의 손이 곧 내 뺨에 닿았고.


나는 더이상 참지 못하고 그의 뺨을 끌어당겼다. 언제나 닿고 싶었던 그 마음 그대로를 그에게 던졌다. 우리가 얼마나 다른지, 얼마나 먼지, 우리에게 다음이 있을지, 그런 모든 생각들은 접어 두었다.


그저 나는 그에게 닿고 싶었고, 그에게 마음껏 위로이고 싶었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이라도. 이게 찰나에 불과하다고 해도.


그의 입술이 주저함 없이 기꺼이 내 입술에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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