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은 실제 인물, 사건, 지명, 역사 등과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도망, 임신물 주의


















 

황제의 진노는 대단했다. 백현과 함께 날을 지새웠다는 것을 들어 알고 있던 그는 대놓고 경수를 지목하지는 못하였으나 당장이라도 경수를 찢어 죽일 듯 노려보았다. 아비인 태사가 죽었을 때는 이렇다 할 위로의 말 한마디 건넨 적 없는 그가 서윤에게는 어수御手까지 내어주며 울음을 허락하였다. 경수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쇠약한 얼굴로 자리를 지키고 선 서윤을 바라봤다. 의식하지 않으려 했으나 백현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한 것이 느껴졌다. 경수는 그것을 기밀하게 살피는 스스로가 더 불쾌해 얼굴을 구겼다. 애초 이 혼인의 목적이 무엇이었는가. 잊어서는 안 된다. 평생의 반려니 뭐니 아무리 다정한 말을 쏟아내도 백현의 마음을 차지한 것은 자신이 아니었다. 그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이 또한 자신이 아니었다. 그까짓 사탕발린 말에 넘어가 내주어선 안 된다. 경수는 소매 사이로 숨긴 주먹을 꽉 쥐었다.

대외적으로는 처소에 찾아온 백현과 동침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폐 태자를 죽인 사람이 누구인지 황제는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태사의 죽음 때문에 대놓고 폐 태자에게 마음 쓰지 못하던 황제가 이렇게 화려한 장례를 치르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었다. 게다가 지난 밤, 경수와 생사고락을 함께하던 동료들이 찾아와 경고하지 않았던가. 황제께서 대장을 주시하고 있으니 몸을 조심하라고. 황제의 명에 따라 목숨을 바치는 은군은 정에 흔들려서는 아니 된다 그리 가르쳤거늘 기어코 자신을 찾아온 아이들은 여전히 자신을 대장이라고 불렀다. 황제의 행동이 옳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를 거역할 힘이 없으니 몰래 경수를 찾아온 것이었다.

경수는 그들을 볼 때마다 마음이 답답했다. 아버지에게 가지 못하도록 자신을 막은 것은 그들이었으나 그 또한 황제의 명일 뿐이었다. 그들이라고 한 점의 괴로움도 없었겠는가. 당장에 자신을 찾아왔던 이들의 얼굴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갑작스러운 일로 대장이었던 경수가 은군을 그만두고 떠나자 그들은 혼란을 감추지 못했다. 몇몇은 경수를 따라 은군을 그만두었으며 몇몇은 자취를 감추었다. 남은 이들은 가진 것이나마 지키려 하는 것뿐이었다.

 

 



“태자.”

“예, 부황.”

 



 

경수와 혼례를 올린 뒤 백현은 더 이상 황제를 아바마마라고 부르지 않았다. 관례를 치렀으니 어린 애가 아니라는 이유였으나 그 함의는 기실 적대감이었다. 백현은 태사의 일을 겪으면서 폐 태자의 잘못을 감싸기에 바쁜 황제를 보고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 형님의 폭력성은 이미 오래전부터 궁인들 사이에 알려진 일이었다. 그 잔인한 성정을 모를 리 없는 황제께서 오랜 세월 그것을 눈감아주고 묵과하여 작금의 사태가 벌어진 것이 분명한데도 황제는 잘못을 뉘우칠 줄 몰랐다. 백현은 되려 경수를 원망하는 황제를 보며 더할 수 없는 실망을 느꼈다.

게다가 꼿꼿한 자세로 황제의 눈길을 받아내는 이 자는, 생각만큼 냉정하거나 매서운 자도 아니었다. 조금의 다정만 보여줘도 남자는 겁을 냈다. 이런 온기는 느껴본 적 없다는 듯 경계심을 감추지 못한 채 날을 세우는 경수를 보며 백현은 점점 그에게 기우는 스스로를 느꼈다. 손을 잡은 이유가 무색하도록, 시선이 자꾸 그에게만 머물렀다.

 

 



“강의왕비의 안색이 좋지 않구나. 네가 화용전까지 함께 가주거라.”

 



 

죄를 짓고 태자의 자리에서 내려온 자였으나 황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죽은 폐 태자를 강의왕에 봉하고 장례 또한 왕에 걸맞게 화려하게 진행했다. 백현은 그것만으로도 황제의 분풀이는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황제는 성에 차지 않은 모양이었다. 어제부로 강의왕비가 된 서윤을 처소까지 직접 바래다주라는 말에 놀란 백현이 황제를 불렀으나 황제는 눈길 한번 주지 않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재차 불러도 걸음을 멈추진 않았다. 백현은 난감한 얼굴로 황제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경수를 돌아봤다.

 

 



“왕비의 안색이 좋지 않습니다. 갑작스러운 변고에 많이 놀란 듯하니 걸음을 서두르시는 게 좋겠습니다.”

 



 

도움을 청하는 듯한 태도였으나 경수는 되려 백현을 종용했다. 어렴풋이 그의 얼굴에 실망이 보이는 것이 싫지 않았다. 서윤과 함께 가는 것을 반기지 않는 태도는 은밀한 기쁨까지 느끼게 했다. 경수는 치졸한 속내를 들키고 싶지 않아 먼저 등을 돌렸다. 여전히 느껴지는 시선이 좀 전의 언짢음을 모두 잊게 했다.

 

 

 

 














 

 

 














황제의 복수는 쉬이 끝나지 않았다. 시중을 받아 옷을 갈아입던 경수는 박 상궁이 전하는 소식에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어떻게든 제게 물을 먹이고 싶어 하는 것은 알았다. 그런데 생각해낸 것이 고작 후궁이라니. 대외적으로 몸이 약하다고 알려진 경수를 위해 후궁 셋을 들이기로 한다는 소식은 저보다 서윤에게 더 나쁜 소식이었다. 걱정스러운 얼굴로 자신을 살피는 박 상궁에게 별것 아니라는 듯 고개를 까딱인 경수는 옷차림을 한 번 더 점검한 뒤 궁을 나섰다.

한동안 두문불출하던 황후는 폐 태자의 죽음을 기점으로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애초에 그녀가 와병을 핑계 삼은 것도 실은 아들을 내쫓을 수 없다는 항의의 뜻이었으나 희 공주가 궁에 오면서 그 뜻이 꺾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들의 죽음으로 희망을 모두 잃었으니, 그녀는 더 이상 무서울 게 없는 사람처럼 굴었다. 황제의 태도에서 단서를 얻은 것인지 그녀의 적의는 백현보다는 경수를 향했다. 그녀는 대놓고 경수는 배척하지 않으면서도 교묘하게 그를 백현과 떼어놓았다. 아직 미령한 몸을 핑계로 함께 산책을 하자고 제안하고는 그 자리에 서윤을 끼워 넣는다든지, 서윤과 함께 다과를 즐기면서 백현을 부른다든지.

 



 

“태자비.”



 

 

황제는 더 노골적이었다. 강의왕의 장례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경수는 백현을 만나지 못했다. 미래를 위해 정무를 배워야 한다는 핑계로 황제가 백현을 놓아주지 않은 탓이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희 공주를 배웅하는 자리였으나 황제는 자기 대신 자리를 지키라며 백현이 오는 것을 막았다. 덕분에 홀로 선 경수의 앞으로 다가온 희 공주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공주자가.”

“그대는 잘 헤쳐나갈 수 있을 거예요.”

 



 

예고도 없이 경수를 끌어안은 그녀는 다정한 말로 그를 위로했다. 기분 좋은 걱정이었으나 그녀의 걱정은 기우였다. 경수는 말없이 미소만 지었다. 두려운 것은 없었다. 황제가 무슨 수작을 부리든, 황후가 저를 미워하든. 그 무엇도 거리낄 것이 없었다. 희 공주가 떠나기 무섭게 등을 돌려 사라지는 황제를 바라보던 경수는 무표정한 얼굴로 걸음을 돌렸다. 떠나기 전, 희 공주가 알려준 소식이 썩 반갑지 않았다. 차라리 몰랐다면 모를까. 백현이 정무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서윤을 만나고 있다는 얘기에 마음이 소란한 것이 싫었다. 이런 감정에 휘둘리는 건 우습다고 생각해놓고.

경수는 내딛는 걸음에 힘을 주었다. 발끝에 실리는 것이 너무 무거웠다.

 

 

 

 
















 

 

 
















 

폐 태자의 장례를 치르던 날 서윤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처소로 돌아가는 내내 제대로 걷지 못해 곁에 선 상궁에게 그녀를 부축하라고 명해야 할 정도였다. 백현은 그녀와 걷는 내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비틀거리는 그녀에게 손 한번 뻗지 않은 채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눈이 몇 번이고 저를 향한 것을 알았으나 아는 체하고 싶지 않았다. 황제의 의도가 너무 눈에 보였기 때문이다.

황제에게는 더 이상 후계가 없었다. 폐 태자는 죽었고, 하나 남은 아들인 백현은 경수와 부부의 연을 맺었다. 경수를 없애고 싶어도 백현과 연을 맺은 이를 깔끔히 끊어내기는 어려우니 어떻게든 두 사람 사이를 벌리려는 것이었다. 백현은 그 의도가 불편했다. 오늘도 그랬다. 황제는 정무를 배우라는 핑계로 경수와 만나지 못하게 하더니 오늘은 기어코 서윤을 불러왔다.

 



 

“전하.”

 



 

하지만 이미 망가진 것을 어찌 다시 쓸 수 있을까. 백현은 여전히 그녀가 소중했고 애틋했지만 그립지는 않았다. 이미 형님과 부부의 연을 맺었고 아이까지 가진 사람이다. 무엇을 남겨둘 수 있을까. 설혹 남겨두었다 해도 스스로 태워 없애야 할 것들뿐이었다.

 



 

“어리석은 제가 폐하의 심중을 모두 헤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나 그것이 전하께서 원하는 바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습니다.”

“···.”

“저라고 모를까요. 전하와 저 사이에는 다시 건널 수 없는 강이 있다는 것을. 부서진 찻잔은 다시 고칠 수 없고 끊어진 인연도 마찬가지겠지요.”

“···아신다면.”

“하지만 전하.”

“···.”

“제게 약조하셨잖아요.”

“···.”

“저와 제 아이를. 지켜주겠다고 하셨잖아요.”

“···.”

“연인을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을 욕심내는 게 아니에요. 구중궁궐 의지할 것이라고는 이 몸뚱이 하나인 제가 의지할 수 있는 지붕이 되어 주신다 하셨으니 그 약조를 지켜달라 청하는 겁니다.”

“약조는 잊지 않았습니다.”

“정녕 잊지 않으셨습니까? 제 발밑에는 여전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황후께서, 태자비께서 나가라 손짓 한 번만 하셔도 저는 이 궁을 나가야 하는 처지입니다. 전하께서 약조하신 날부터 지금까지, 그것은 단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어요.”

“태자비께선 그대를 궁에서 내보내지 않을 겁니다.”

“그걸 어찌 확신하십니까? 태자비께서 회임이라도 하신다면-”

“형수님께서 관여하실 일이 아닙니다.”

“···.”

“약조는 지킬 겁니다. 그러니 형수님께선 선을 넘지 마세요.”

“···송구합니다.”

“부황과 모후께서 자리를 마련하는 일이 잦을 겁니다. 피할 수 있는 만큼 피하는 것이 서로에게 좋을 듯합니다.”

“예.”

“알고 계신지 모르겠지만, 궐뿐만 아니라 바깥 도성에서도 저와 형수님을 둘러싼 소문이 흉흉합니다. 놓으려 했던 손이 아니었으니 미련이 남는 것은 당연한 일이나, 이젠 시간이 많이 지나지 않았습니까.”

“···.”

“제게도 평생을 함께할 사람이 생겼으니 형수님께서는 부디 저를 어렵게 대해주셨으면 합니다.”

 



 

백현의 눈은 곧고 맑았다. 서윤은 그 눈을 볼 때마다 그것을 갖고 싶으면서도 망가트리고 싶었다. 온전히 제게만 주어지는 다정이 과연 어디까지 갈지. 이렇게 해도 망가지지 않을까. 이렇게 해도 무너지지 않을까. 궁금했다. 당신은 어디까지 나를 사랑할 수 있을지. 태자비의 자리에 올랐을 때 저를 바라보는 백현의 눈을 보고 더할 나위 없는 충족감을 느낄 정도였다. 그래도 여전히 나를 사랑하는 게 보여서. 당신의 눈이 여전히 나를 향하는 걸 느껴서.

그러나 영원할 줄만 알았던 그의 애정은 조금씩 고개를 돌렸다. 그럴 리가 없는데. 당신이 그래선 안 되는데. 뒤늦게 몸부림쳐봐도 돌아간 시선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백현의 시선이 머무는 곳은 더 이상 자신이 아니었다. 서윤은 그것이 못 견디게 끔찍했다. 게다가 하필이면 그 상대가 태사의 아들이라는 게.

서출, 그것도 시녀의 딸로 태어난 그녀는 평생을 고개 숙인 채 살았다. 서녀라는 꼬리표는 그녀가 무슨 짓을 해도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라 어디를 가도 사람들의 무시가 당연하다는 듯 이어졌다. 백현은 그런 그녀의 눈을 처음으로 마주 봐준 사람이었다. 출신으로 그녀를 평가하지 않고, 오로지 그녀 자체만으로 그녀를 봐준 사람. 처음에는 서윤도 그것이 순수하게 기뻤다. 이런 사람의 사랑을 받는다는 게 행복했고, 즐거웠다. 그러나 백현과 서윤의 사이가 알려지자 사람들의 태도가 돌변하기 시작했다. 하인들은 그녀를 깍듯이 대했고 심지어 아버지는 그녀를 내 딸이라며 공공연히 칭하였다. 서윤에게 달라진 것은 없었는 데도. 사람들의 태도가 변하자 서윤도 점점 욕심이 났다. 고작 황자와 연인이 된 것만으로 이런 대접을 받는데 좀 더 높은 자리에 오르면 어떨까? 좀 더 높은, 좀 더 고귀한.

황후가 되면?

고민은 짧았다. 서윤은 사주단자를 바꿔치기했다. 아버지가 알게 된다면 경을 칠 것이 분명했기에 부러 태자가 자주 가는 사냥터에서 그의 눈에 띄었다. 태자 호는 성질이 급하고 생각이 짧아 몇 마디 말로도 쉽게 그를 사로잡을 수 있었다. 백현과 돈독한 사이라는 것을 밝히자 지루한 얼굴로 자리를 피하려던 이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 뒤로는 아주 쉬웠다. 그녀는 손쉽게 태자비의 자리에 올랐다. 뒤늦게 사주단자가 바뀐 것을 눈치챈 아버지가 펄쩍 뛰며 화를 냈으나 태자의 입에서 그녀의 이름이 거론되자 곧장 태도를 바꾸었다. 그는 서윤의 어깨를 두드리며 너 같은 복덩이가 따로 없다 칭찬했다. 우스운 일이었다.

서윤은 태자비가 된 뒤 만족했다. 이대로만 있으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여인 황후가 될 것이니 더 욕심부릴 것도 없었다. 성질 고약한 태자 호가 걱정스럽긴 했으나 예상과 달리 그는 그녀를 끔찍이 아꼈다. 이유는 오로지 하나였다. 그녀로 인해 백현이 괴로워했으므로. 귀비를 붙잡고 아이처럼 울음을 터트렸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호는 배를 잡고 웃었다. 조금 자라고 나서는 호가 아무리 괴롭혀도 바닥에 납작 엎드린 채 숨만 죽일 뿐이었으니. 이렇게 괴로워하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른다며 기뻐하는 호를 보며 서윤 또한 조금 웃었다.

이제 됐어. 완벽해. 서윤은 생각했다. 이제 모두 됐다고. 그러나 그 행복은 얼마 가지 못했다. 궁인들의 시선을 즐기며 궁을 거닐던 중 우연히 들은 이야기로.

 

 



‘그래봤자 서출이잖아.’

 

 



누구의 목소리였는지는 모르겠다. 고약한 태자의 총애를 받는 그녀가 신기하다며 머지않아 황후에 오를 그녀를 부러워하는 말에 떨어진 퉁명스러운 목소리. 고작 그 짧은 단어에 모든 것이 완벽한 듯 보였던 그녀의 유리성이 부서졌다. 서윤은 분노로 떨리는 손을 감춘 채 처소로 돌아가기 위해 등을 돌렸다. 서출. 그게 뭐가 어때서. 니들은 그렇게 고귀해? 나는 태자비야. 이 나라에서, 두 번째로 고귀한 여인이라고.

반쯤 나간 정신으로 허겁지겁 걸음을 옮기다 눈이 마주쳤다. 저를 알아본 그는 얼굴을 구기는 듯하더니 등을 돌려 오던 길을 다시 돌아갔다. 서윤은 그 꼴을 보고서야 우뚝 멈춰 섰다. 먼 거리였음에도 돌아서 가는 뒷모습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태사. 태자와 백현을 가르쳤던 스승. 그는 서윤이 궁에 들어오기 전에 만난 적이 있었다. 백현이 소중한 사람이라며 소개하는 말에 그가 어떤 표정을 지었더라. 먹칠을 한 것처럼 그 얼굴이 자세히 기억나지는 않았지만 저를 반기지 않았던 것만은 확실했다. 그녀가 태자비로 거론되자 반대하기도 했었지. 서윤은 서늘하게 굳은 얼굴로 태사가 사라진 길을 바라봤다.

호를 움직이는 일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는 예전부터 여러 차례 태사에 대한 흉을 늘어놓았다. 주된 이야기는 그가 백현과 자신을 차별했다는 것이었다. 어린 백현을 더 귀여워하며 자신에게는 엄하게 굴었다는. 이미 악감정을 가지고 있는 이에게 그 악의를 드러내라고 말하는 것은 또 얼마나 쉬운 일일까. 서윤은 거창한 준비를 하지도 않았다. 평소처럼 백현이 제게 보냈던 연서를 호에게 보여주고 그것을 비웃는 호를 지켜보다 한마디를 흘려보내면 끝이었다.

 


 

 

‘그러고 보니 태사께서 칭찬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태사가?’

‘황자님의 필체는 따라올 사람이 없다고요.’

‘뭐?’

‘자신이 본 서체 중 가장 뛰어나다며 극찬하셨지요.’

‘내 서체도 뒤지지 않아. 태사가 나에 대해선 뭐라고 안 해?’

‘···으음.’

 

 



일그러진 호의 얼굴은 그의 성정처럼 고약했다. 서윤은 곤란하다는 듯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황자님이 제일이라고 하셨어요.’

 



 

말릴 새도 없이 탁상 위에 올려져 있던 서신이 구겨졌다. 호는 곱게 써진 서신을 모두 망가트리고도 성에 차지 않는다는 듯 발로 짓밟았다. 씩씩거리며 자리를 떠나는 호를 보고도 두렵거나 화가 나지 않았다. 서윤은 고요한 얼굴로 망가진 서신들을 내려다봤다. 아깝게.

감상은 그게 다였다. 다음날 태사를 부른 호가 그를 때려죽였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인상을 조금 찌푸리긴 했지만 별 감흥은 없었다. 만약 백현이 그 아들을 정실로 맞을 줄 알았다면, 자신이 아닌 그 사람을 옆자리에 세울 줄 알았다면 그런 얕은 수로 태사를 처리하진 않았을 것이다. 삼족을 멸해 궁에는 얼씬도 하지 못하는 신세로 만들어버렸겠지. 서윤은 그것이 유일하게 아까웠다. 태사와 꼭 닮은 아들이 있을 줄 모르고, 그자와 꼭 같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자가 또 있을 줄 모르고 쉽게 태사를 치워버린 것이.

 



 

“걱정하지 마세요. 태자비 마마께 심려를 끼칠 일은 없을 겁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서윤이 직접 나설 필요가 없을 것이다. 상처받기 전에 죽을 테니까. 황제의 미움을 산 그가 얼마나 살 수 있을지 서윤도 궁금했다. 고고한 척 구는 얼굴이 일그러지면 어떨지. 버릇처럼 배를 감싸 쥔 그녀는 표정을 숨기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미소를 감추는 일은 언제나 능숙했다.




 

 

 

 













 

 

 

















 

후궁을 들이기로 했다는 말은 예전에 들었건만 그를 위해 황후가 다과회를 열었다는 소식을 듣자 기분이 이상했다. 황후의 부름을 받고 다과회에 참석한 백현이 성실히 자리에 응해 후보가 꽤 추려지기도 했다는 이야기는 굳이 전할 필요 없었건만. 경수의 마음을 알 리 없는 강우는 백현이 마신 차 종류까지 세세히 고해바쳤다. 나보다는 서윤이 더 속상할 일이라고, 나는 아무렇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던 것이 무색하게 경수는 밤이 늦도록 잠들지 못하고 뒤척였다. 대화를 나눌 때 표정은 어땠는지, 혹 자주 눈길이 닿던 여인은 없었는지 물어볼 걸 그랬나.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난 경수는 불을 붙여 방을 밝혔다. 아무리 애를 써도 잠이 오지 않으니 차라리 글이라도 한 자 보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그러나 낮에 읽다 만 책을 펼쳐도 집중이 되지 않았다. 분명 오전에는 흥미롭게 술술 읽히던 글자가 몇 번을 읽어도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자 치미는 답답함에 견디다 못한 경수가 창을 열었다. 탁상 근처의 창은 앉은 자리에서도 바깥의 풍경을 한눈에 볼 수 있을 정도로 크고 넓었다. 창을 열자마자 불어오는 바람에 눈을 감았다 뜬 경수는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것에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그림 같은 풍경이었다. 매일 보던 나무와 꽃인데 그 안에 서 있는 사람만으로 모든 것이 새로워졌다. 혹시 꿈은 아닐까. 너무 꿈 같은 순간이라 실감이 나지 않았다. 경수는 숨을 쉬는 것조차 잊은 채 풍경 안에 자리한 백현을 바라봤다. 두 사람 모두 한참이나 말을 꺼내지 못한 채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이상하게 그 순간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입을 열면 날아가 버릴 것만 같은 순간. 먼저 벗어난 것은 백현이었다.

 

 



“오랜만입니다.”

 



 

꺼내놓은 말이 고작 이것이라니 후회하는 빛이 얼핏 비추었으나 순식간에 사라졌다. 경수는 섣불리 입을 열지 못한 채 침묵했다.

 

 



“폐하의 부름이 잦아 보러 오지 못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 해도 되는 말이 무엇인지 알지 못해 두 사람 다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소매 끝에 드러난 손이 주먹을 쥐었다 펴는 것을 보던 경수는 충동적으로 백현을 불렀다.

 

 



“춥진 않으세요? 부르셨다면 채비를 했을 텐데.”

“불이 꺼진 것을 보고 돌아가려 했습니다. 가려던 차에 다시 불이 켜지기에.”

“···.”

“혹 창문을 여실까 하여 잠시 기다렸습니다.”

“제가 창문을 열지 않았다면 어쩌시려고요.”

 



 

서로가 서로답지 않다는 것을 몰랐다. 이 괴상한 순간이 다시 오지 않을 기회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기라도 했는지, 두 사람은 서로에게 정신이 팔려있었다.

 

 



“오늘은 제 운이 좋았던 것이지요. 허나, 요새는 날이 추우니 창을 너무 자주 열지는 마세요.”

“열린 창에서 마주할 것을 기대하게 만드셔 놓고요?”

“···.”

“그리 걱정되신다면 닫으러 오세요. 열어 놓을 테니, 언제든.”

“조금 불공평하진 않습니까?”

“무엇이요?”

“안에서는 언제든 밖을 볼 수 있지만, 밖에서는 그렇지 않으니까.”

“안이 궁금하세요?”

 



 

단순히 풍경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두 사람 모두 그것을 알았다. 백현은 대답하지 않은 채 경수의 눈을 맞췄다. 경수 또한 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두 사람은 한참이나 서로의 얼굴을 바라봤다.

 

 



“수야.”

“···!”

“내가 그대를 부르면 그대도 나를 불러주길 바라는데. 너무 큰 욕심인가?”

 

 



내가 그대를 대하는 만큼, 그대도 내게 내주어야 한다 말하던 백현의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모르진 않았지만 두 사람 사이에 성립해도 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런 것이 당신과 나 사이에 가능할까. 벌어진 입술 새로 나오던 말이 몇 번이나 머뭇거렸다.

 



 

“수야.”

 

 



두 번째 부름은 얼핏 재촉하는 듯 굴었지만 간절했다. 입안에 품은 채 망설이던 경수는 저도 모르게 그를 좇았다.

 



 

“백현.”

 



 

백현처럼 다정한 부름도 아니었다. 고작 이름 두 글자를 토해낸 것에 불과한데도 백현은 환하게 웃어 보였다. 본 것 중 가장 밝은 미소였다. 경수는 저도 모르게 소매 사이로 손을 숨겼다. 굽어진 손가락이 손바닥 안으로 파고들어 저를 숨기려 들었다.

 



 

“경수야.”

 



 

무너진 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주먹을 아무리 쥐어봐도 손아귀 사이로 빠져나가는 것은 막을 도리가 없었다. 숨을 참으면 멎을까 싶었지만 변하는 것은 없었다. 경수는 참았던 숨을 작게 내쉬었다. 목줄을 내준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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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주말 보내세여^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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