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동안 비어있었을 집 안 공기가 서늘했다. 신발이 어수선하게 흩어진 현관을 지나쳐 깜깜한 집 안으로 들어섰다. 손에 들린 짐들을 내려놓고 어두운 거실 불을 켰다. 하마터면 놀라 큰 소릴 낼 뻔 했다. 숨소리 한 번 내지 않고 소파에 우두커니 앉은 인영이 그제서야 보였다. 당연하게도, 민재였다. 나는 짜증을 부리는 대신 인상을 찡그렸다. 미친놈이라고 욕을 하기도 이젠 입이 아플 지경이다. 그런 나 대신 민재가 입을 벌린다.


"연우야."


 담담한 표정과 그에 걸맞는 차분한 목소리가 바닥에 무겁게 가라앉는다. 문득 방금까지의 내가 너무 호들갑을 떨었던 것은 아닌가 생각마저 든다. 별 시답잖은 이야기를 할 것을 알고 있는데도 괜히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다. 살짝 달싹이다가 이내 열리지 않는 입술을 빤히 본다. 언제나 내 상식으로 예상할 수 없는 행동만을 하는 민재라 괜히 입술이 바싹 말랐다. 이름을 불러 놓고 더 말할 생각이 없어 보이는 민재를 두고 돌아섰다. 갑갑하게 날 내리누르고 있던 외투를 벗으며 방으로 들어가려 한 발을 떼었다.


"너 섹스 해 봤어?"


 이내 들려오는 물음에 나는 멈춰섰다. 뭐? 물으며 돌아서는 얼굴이 잔뜩 찡그려진 것은 당황한 것을 감추기 위한 방어기제였다. 


"너 술 마셨냐?"


 차를 가지고 나가서 술을 안 마실 거라고 했던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오늘따라 이상하다. 집에 돌아오면 가장 먼저 옷을 갈아입던 민재가 외출복 차림이었다. 언제부터였는지 가늠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오래 그 자리에 앉아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돌았냐? 갑자기 그게 왜 궁금해."


 이미 당황한 목소리 톤이 제 높이를 잃었다.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도 같다. 민재는 그런 내 얼굴을 빤히 본다. 그리곤 고갤 젓는다.


"아니. 별로 궁금하진 않아."


 미친 새끼인가. 나는 다 들리게 혼잣말을 했다. 민재가 고개를 푹 숙인다.


"내가 궁금한 건 그게 아니고."

"어디 아파?"


 평소와 다른 행동에 걱정이 먼저 앞선다. 나는 민재 앞으로 다가갔다. 민재의 얼굴을 들어 올린다. 살짝 상기된 볼, 어딘지 초점이 살짝 나간 듯한 눈동자. 이내 또렷해지는 시선이 내게로 와 닿는다. 킁킁 냄새를 맡아도 술 냄새는 나지 않는다. 손으로 이마의 열을 재 본다. 그런 내 손을 민재가 잡아 내린다. 내 손을 잡은 채, 술에 취한 것도 아니고 아픈 것도 아닌 멀쩡한 얼굴의 민재가 말한다.


"너 남자랑 자 봤어?"

"...."

"너 남자 좋아해?"

"....."

"왜 난 몰랐지?"


 악의 하나 담기지 않은 그 물음에 나는 할말을 잃는다. 이번엔 무슨 소리냐고 묻지 않았다. 대신 나는 크게 한숨을 쉬었다. 차라리 민재가 취했거나 아픈 거였다면 나았을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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