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니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은 모두 기억한다. 그것이 얼마나 오래된 기억인지, 그렇지 않은지는 상관없다. 특히나 몸으로 직접 경험한 것은 그저 보고 들은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뇌리에 깊숙이 자리 잡는다. 물론, 토니도 사람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 배로 많은 기억을 모두 끌어안고 사는 것은 아니다. 가끔은 필요에 의해서 기억을 저기 구석 어딘가에 숨겨두기도하고, 그 기억을 다시 찾아오기도 한다. 때에 따라 다시 찾지 않는 기억이 존재하지만, 그렇다고 그 기억을 잊은 것은 아니다. 다만 오랜 시간 구석 어딘가에 박혀 있던 기억을 다시 꺼내기에 다른 기억보다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할 뿐이다. 그것이 토니가 지금 로비 한 가운데 멍청하게 서 있는 이유이다. 분명 어디서 본 사람이다. 심지어 뒤에 있는 배경과 웃고 있는 옆모습이 어디서 본 것 같은 기시감마저 들었다.

 

“우리 회사에 저런 얼굴이 있었나?”

“이번에 새로 뽑은 신입입니다. 면접에서 미혼부가 저 직원 혼자여서 기억합니다.”

 

회의 직후 내려온 것이라 함께 내려온 임원 중 한 명이 잽싸게 대답했지만, 토니는 그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굳이 나서서 설명을 보충하지 않았다. 제 상관은 남들이 하나도 집중해서 하기 힘든 일을 2-3개씩 해내는 사람이니 말이다.

 

“신입? 근데 왜 익숙하지...”

 

해피는 한 번 본 얼굴은 잘 기억한다. 확실히 토니가 좋아하는 얼굴이기는 했다. 말간 얼굴로 잘 웃는 것이 꼭 몇 년 전 이 로비에서 본 그 배달부랑 비슷했다. 토니의 첫 남자였던, 그 남자. “그 남자!” 비슷한 것이 아니라 그 남자가 맞았다. 갑자기 소리를 지른 해피를 짜증스레 쳐다본 토니가 시큰둥한 얼굴을 했다.

 

“그 남자 뭐.”

“왜, 그 사람이잖아요! 보스의 처음이요!”

 

누가 들을 새라 함께 있던 임원들에게서 한 발짝 멀어진 해피가 토니에게 속닥거렸다. 그제야 가물가물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던 기억이 잡혔다. 지금은 돌아가신 여사님과 즐겁게 이야기 하던 배달부의 신음이 귓가에 맴돌았다.

 

“그게 5년 전이던가.”

“여사님 돌아가신 해니까 맞아요.”

“그런데 애가 있다고?”

 

웃으며 사라지는 뒤통수를 보며 토니가 중얼거렸다. 해피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설마 오메가였어요?”

“응. 히트싸이클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세상에세상에세상에.”

“시끄러워, 피임 확실히 하는 거 알잖아.”

 

찜찜한 얼굴의 토니가 일정을 위해 걸음을 옮겨 준비된 차에 올라탔다. 마음같아서는 약속된 일정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랩실에 처박혀서 자동차 조립이나 하고 싶었다. 예상치 못한 자식의 존재 여부에 찝찝해진 얼굴을 굳이 숨기지 않으니 룸미러로 슬쩍 눈치를 본 해피가 토니가 평소 자주 듣는 음악을 틀었다. 시끄럽게 쾅쾅 울리는 음악에 오히려 머리가 차분해졌다.

 

“자비스, 아까 그 직원에 대해서 좀 보여줘.”

“70초 전.”

 

자비스의 판단인지, 자동차 속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던 음표들이 잠잠해졌다. 잠깐의 침묵 끝에 눈앞에 떠오른 푸른 홀로그램을 이리저리 넘겨보던 토니가 파티션을 내렸다. 이미 도착했는지 시동이 꺼진 것도 몰랐다.

 

“제 3의 의견이 필요해.”

 

알 수 없는 말을 끝으로 자신의 앞에 나타난 푸른 홀로그램에 한 번, 그 안에서 보여주고 있는 작은 여자아이의 모습에 두 번 놀란 해피가 입을 쩍 벌린 채로 눈앞의 홀로그램과 뒷좌석에 있는 자신의 보스를 번갈아봤다.

 

“네가 봐도 맞는 것 같아? 난 부정 중이고 자비스는 확인사살 했는데 아직 1:1이니까 네 의견도 물어보는 거야.”

“시속 200km로 밟으면서 커브 돌다가 봐도 보스 자식이잖아요!!”

 

아예 뒤를 돌아 소리치는 해피에 토니는 복잡한 얼굴로 털썩- 시트에 기대 밋밋한 천장을 바라보았다. 부정한다고는 했지만, 누가 봐도 자신과 똑 닮은 얼굴이었다. 진하게 쌍꺼풀이 진 눈과 곧으면서도 둥글둥글한 코 끝이 특히나 자신과 닮았다. 자비스는 계속해서 새로운 모습의 피터(신입사원이자 자신의 아이아빠)와 아이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 중 어느 것은 누가 찍어주었는지 정면에서 장난치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을 담았고, CCTV를 해킹한 듯 멀리서 찍힌 듯 좋지 못한 화질에 손을 꼭 잡고 걸어가는 두 사람의 모습이었다. 분명한 것은 두 사람의 사이 매우 좋아 보인다는 것이었다.

토니는 고민에 빠졌다. 굳이 나서서 자신이 저 아이의 생부가 맞음을 확인사살 해야 할지, 그것도 아니면 지금처럼 모른 척 지내야할지. 정관 수술을 조금 빠르게 할 것 그랬다. 5년 전, 피터와 만났던 해부터 전 세계에서 알파와 오메가로 발현하는 사람들이 생겨났고, 토니도 그 중 한 명이었다. 당시에는 알지 못하는 새로운 병이라고 생각했지만 많은 연구 끝에 지금은 알파와 오메가, 베타의 개념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이 연구에는 토니의 자본과 지식이 큰 역할을 했다) 당시 피터는 이미 발현한 오메가였으나, 토니는 그와 만난 이후 얼마 되지 않아 발현한 케이스였다.

 

“어떻게 하실거에요?”

“일단 만나봐야겠어. 약속 좀 잡아놔.”

“알겠어요.”

 

 

***

 

 

피터는 초조했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일부러 이 회사를 선택했건만 그 선택이 잘못됐음을 깨달았다. 아침에 깨트린 컵에 베인 손이 따끔거려 괜스레 주먹을 꽉 쥐었다. 출근하자마자 회장님의 호출이 달갑지 않은 것은 모든 직원이 마찬가지일 테지만, 피터는 특히나 더 그랬다. 이는 그가 신입사원이라는 사회적 위치 때문만이 아니라, 그가 자신의 아이 아빠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분명 그가 자신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머리가 좋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하루에 수백명을 마주하는 사람이 자신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라고는 감히 생각지도 못했다. 4-5년 정도 조용히 회사를 다니다 경력이 쌓이면 다른 회사로 이직 할 생각이었는데, 출근 일주일도 되지 않아서 불려가다니 예감이 좋지 않았다.

 

“무슨 일로 오셨나요?”

“회장님 호출로 왔습니다. 연구 2팀의 피터 파커입니다.”

“바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기다리고 계세요.”

 

커다란 문은 소리 없이 활짝 열렸다. 사무실의 몇 배는 돼 보이는 넓이의 공간이 알 수 없는 위압감을 주었다. 손톱이 살을 파고드는 느낌이 들어 반사적으로 손을 쫙 폈다가 다시 가볍게 손을 쥐었다. 긴장한 것을 티 내지 않으려 살짝 쥐고 있는 손에 힘을 주지 않기 위해 온 신경을 손에 집중했다.

 

“일단 앉지.”

 

그는 변한 게 하나도 없어 보였다. 단정하면서도 자유분방해 보이는 옷차림이며, 단단한 손과 반듯하니 잘생긴 얼굴에 주름도 늘지 않은 것 같다. 그에 비해 아이를 품고 있느라 튼 자국이 가득한 자신의 배가 떠올라 저도 모르게 손으로 배를 만졌다가 급히 내렸다. 토니의 눈이 피터의 손을 따라 움직였다가 아무렇지도 않게 피터의 눈으로 향했다. 토니는 5년 전에 만났던 피터와 지금의 모습이 많이 달라졌다고 생각했다. 그때는 웃지 않아도 말간 얼굴에 빛이 났는데 지금 마주하고 있는 얼굴에는 고단함이 가득하다.

 

“갑자기 부른 이유는 알고 있겠지?”

“..모르겠습니다.”

“아이가 있다던데. 이제 4살이라지?”

 

빙빙 돌리지 않고 본론을 이야기 하는 토니에 피터는 숨이 턱 막혔다. 티를 내지 않으려 해도 절로 덜덜 떨리는 손을 감출 수 없었다. 토니 스타크는 결코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스타크 인더스트리를 이만큼 성장시킨 것도, 잘난 얼굴과 머리로 여기저기 영향력을 끼치고 있기 때문이다. 피터는 아이를 가진 날부터 토니가 리아의 존재를 알게 될 날을 상상해왔다. 불행하게도, 그 끝은 항상 같았다. 다시는 아이의 손을 잡지 못하는 자신과 핏줄의 존재를 알게 된 토니 스타크가 아이를 데려가는 모습. 피터는 몇 번이고 상상했지만 막상 토니가 리아의 존재에 관해 물으니 입이 딱 붙은 듯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리아의 나이를 알고 있는 것을 보면 분명 자신의 아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내 아이인가?”

“아니요! 아이는, 리아는 제 딸이에요!”

 

벌떡 일어나서 소리치는 피터의 모습이 불안해 보였다. 100% 확신한 것은 아니었는데 반응을 보니 맞는 것 같다. 토니 스타크 애 아빠 확정 땅땅땅! 토니는 복잡한 마음을 숨기며 말 없이 눈을 마주했다. 거칠게 숨을 내쉬던 피터가 털썩 주저앉았다. 조금 전보다는 진정돼 보였지만 불안한 듯 손을 꼼지락거렸다. 틱, 틱 소리에 눈길을 주니 하얗게 질린 두 손은 기도하듯 깍지를 꼈다가 배어난 땀을 숨기려 허벅지 위로 올라와 비벼졌다.

 

“아이를 억지로 데려갈 생각은 없으니 안심해.”

“제가 그 말을 어떻게 믿죠?”

“원한다면 각서라도 써주지. 법무팀이 아래에 있으니 이 자리에서 공증을 받아줄 수도 있어.”

“원하는 게 뭐에요.”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은 채 묻는 얼굴에 토니는 미소 지었다. 예전부터 생각했지만 참 제 취향을 그대로 옮겨온 사람이다. 예상치 못한 자식의 존재에 당황스러웠던 것도 사실이지만 이대로 정착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두르지 않아야 한다. 토니는 여유롭게 등을 기대고 있던 몸을 떼고 피터 쪽으로 가까이 했다.

 

“아이에게 아빠 노릇을 하게 해줘.”

 

피터의 얼굴이 단번에 구겨졌다. 토니는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꾹 참았다. “뭐라고요?” 분명 제대로 들었으면서 되묻는 사람에게 천천히 또박또박 다시 한번 제 뜻을 전했다.

 

“부부 사이에 문제가 없다면 양 쪽이 같이 있는 편이 아이한테도 좋지 않겠어? 나도 첫 자식이라 그런지 애틋한 마음이 생기거든. 아이를 양육하는데 물심양면으로 힘쓰지. 물론 자네가 생활하는데도 부족함이 없을 거야.”

 

혹하는 제안이기는 했지만 찜찜했다. 토니 스타크가 굳이 아빠 노릇을 찾아서 할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해서 더 그랬다. 피터가 말이 없자 토니가 면접관에게 자기 어필을 하는 지원자마냥 입을 놀렸다. 어려서부터 바쁜 부모님 밑에서 지내다 보니 자식이 생긴다면 꼭 많은 시간을 함께하고 싶었다는 둥 이미 있는걸 알았는데 힘들게 지내는 것을 두고 볼 수 없다는 둥 궤변을 늘어놓았지만 피터의 귀엔 왈왈하는 시끄러운 잡음으로만 들렸다. 그럼에도 사람인지라 토니의 제안이 마냥 나쁘게 들리지만은 않았다. 아이를 데려가지 않는다고 이야기 했고, 공증을 받아놓는다면 나중에 정말 만에 하나 그런 일이 생겨도 리아를 지킬 수 있을 것이다. 토니의 지원으로 생활이 여유로워진다면 리아 몫의 돈을 더 모을 수도 있고, 무엇보다 자신도 일찍 부모님을 잃었기 때문에 토니가 아빠 노릇을 제대로 해준다면 리아에게도 좋은 영향을 끼칠 것이다.

피터의 얼굴이 구겨졌다. 필시 자신을 믿을 수 없다는 생각과 궤변에 넘어간 생각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는 것일 것이다. 토니는 여유롭게 웃으며 입을 꾹 다물었다. 느긋하게 소파에 기대 앉아 준비된 커피를 마시며 저이가 갈등하는 꼴을 지켜봤다. 여기서 입을 더 놀리면 바로 넘어오겠지만 토니는 피터가 자신을 선택하기를 바랐다.

 

“좋아요. 대신 약속한 데로 각서 쓰고 공증 받아주세요.”

“좋아. 자비스 들었지? 법무팀에 전해.”

“Yes sir.”

“워낙 바쁘신 분이니 매주 못 만나는 건 이해해요. 대신 만날 때 행동만 조심해주세요.”

“아, 그래서 말인데 그냥 내 집으로 들어오는 건 어때?”

 

갑자기 들리는 자비스의 음성에도 당황하지 않던 피터가 토니의 말에 딸꾹질을 했다. 그 모습을 보며 굳이 웃음을 숨기지 않은 토니가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잘 알다시피 내가 바빠서 아이를 자주 볼 수 없으니 그냥 같이 살자고. 그럼 더 자주 볼 수 있잖아? 애 교육에도 이쪽이 더 좋을 것이고. 아이랑 함께 있는 동안 행동은 조심하도록 하지.”

“...알겠어요.”

 

생각보다 흔쾌히 허락한 것은 놀랐지만 어쨌든 자신이 원하는대로 됐으니 거슬릴 것은 없었다. 피터와 말을 맞추자 일은 빠르게 진행됐다. 그날로 피터와 리아의 집이 토니의 집으로 옮겨졌고, 퇴근후 토니와 함께 도착한 집엔 새로 구입한듯 아이에게 필요한 물건들과 피터와 리아의 짐이 싹 정리되어 있었다. 하루아침에 가족이 되었다.

 

 

***

 

 

리아는 생각보다 토니의 존재에 금방 적응했다. 오히려 적응하지 못하는 것은 피터였다. 아직도 메이가 있는 좁지만 안란한 집이 아닌 커다란 저택에서 사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고, 무엇보다 아이에게 다정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며 토니와 한방을 쓰고, 다정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불편했다. 정장 걱정했던 토니는 아이와도 잘 놀아주고, 자신과 함께 지내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였다. 이 집에서 지낸 지 한 달이 지났지만 적응하지 못한 건 피터, 자신 하나였다.

 

“파파! 우리 색칠공부해요!”

“그럴까? 어디보자-”

 

리아가 가져온 것은 토니가 사 온 것 중 하나였다. 예전엔 12색 색연필 하나로 그림 그리기를 즐겼었는데, 이제는 아이가 쓰기엔 조금 무리인 재료들까지 집 안에 가득하다. 확실히 토니와 함께 하는 것이 아이의 생활환경 개선에 큰 역할을 했다. 그리고 피터 자신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삶의 질이 높아진 것은 당연한데 이상하게 몸이 안좋아진 것 같기도 하다. 그렇지 않으면 간헐적으로 빠르게 뛰는 심장을 설명할 길이 없다.

 

“피터- 리아, 우리 딸 어디있어?”

“여기요! 대디, 리아 여기 있어요!”

 

아, 또 심장이 빠르게 뛴다. 피터는 눈을 꾹 감고 천천히 숨을 쉬었다. 오도도 뛰어가는 리아의 발소리와 잦아들고 두 사람의 말소리가 가까워졌다. 눈을 감고 있으니 모든 소리가 더욱 선명하게 들렸다. 파파와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는 리아의 목소리와 “그랬어? 대디도 같이 해도 돼?”라며 다정히 묻는 토니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니 심장이 쿵쿵 빠르게 뛰었다. 역시 몸에 이상이 있는 것 같다.

 

“이따 저녁은 나가서 먹자.”

 

토니는 아이에게만 다정한 것이 아니었다. 사소한 이야기도 지금처럼 피터와 눈을 마주하며 하곤 했다. 피터는 어색함에 고개만 끄덕이곤 했지만, 그 모습에도 활짝 웃어주었다. 신나서 대답하는 리아의 볼에는 꾹꾹 눌러 입을 맞춰주는 모습은 자신이 상상하던 가정의 모습과 매우 흡사했다. 그래서 더 복잡했다. 토니가 이 정도로 맞춰줄 것이라고는 생각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외식을 하고 돌아온 뒤 졸려서 칭얼거리는 리아를 재우고 방으로 돌아오니 침대 헤드에 걸터앉아 서류를 보던 토니가 말 없이 잘 준비를 했다. 빛이 있으면 쉽게 잠들지 못하는 피터를 배려한 행동이었다. 조금은 익숙해진 그의 옆에 누워 멀뚱히 천장을 바라보던 피터가 물었다.

 

“왜 이렇게까지 해요?”

“왜, 싫어?”

“아뇨, 그건 아니지만... 그냥 그렇잖아요. 토니가 마음만 먹으면 예쁘고 좋은 사람 만나서 원할 때 아이도 갖고 할 수 있을 텐데 굳이 저희한테 이렇게까지 하는 게 이해가 안 돼요.”

 

담담한 목소리가 내내 품고 있던 의문을 풀어놓았다. 피터의 물음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무의식적으로 나온 행동들에 의문을 품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이 절로 피터를 좇았다. 밋밋한 천장을 향해 끔벅이는 눈이 좋았다. 피터와 리아가 집으로 들어와 함께 지내는 동안 스스로 물었다. 어떻게 해도 대답은 항상 같았다. 피터와 함께 있는 시간이 좋고, 리아가 주는 행복을 놓치고 싶지 않다. 그래서 불편해하는 피터를 모른 척 제 옆에 묶어두고 있는 것이다. 분명 피터가 안다면 이기적인 인간이라고 욕할 것이다. 그럼 뭐 어때.

 

“굳이 마음먹지 않았는데 너를 만났고, 리아를 만났으니까.”

“우리가 밉지는 않아요? 갑자기 나타나서 원래의 생활을 다 망쳐놨잖아요.”

“전혀. 행복해서 깜짝 놀랄 지경이야. 그러니까 그런 마음 갖지 마.”

“...잘 자요.”

“참고로 말해두는데 너는 나한테 예쁘고 좋은 사람이야. 네가 말한 완벽한 미래를 나는 이룬 거지.”

 

고백같지 않은 고백에 피터는 몸을 웅크려 두근두근 빠르게 뛰는 심장을 꼭꼭 숨겼다. 잘 자. 다정한 목소리가 이불 위로 내려앉았다. 피터는 꿈을 꾸었다. 몽실몽실한 구름나라에서 방방 뛰어노는 달콤한 꿈이었다. 리아의 손을 잡은 토니가 건네준 커다란 솜사탕을 먹으며 세 사람은 구름나라 이곳저곳을 구경했다. 잠에서 깨고도 한참 동안 입이 너무 달았다.

이 날 이후 토니와 피터 사이의 분위기는 조금 달라졌다. 두 사람 사이에 은근한 스킨쉽도 오갔고, 내내 어색해하던 피터가 집에 완전히 적응했다. 하지만 여전히 두 사람의 관계는 조금 애매하다. 알파의 입지가 점점 상승함에 따라 리아의 성을 ‘스타크’로 바꾸기 위해 두 사람은 혼인신고를 했다. 갑작스러운 토니 스타크의 결혼과 자녀의 등장으로 세상이 발칵 뒤집혔지만 피터와 리아의 존재를 꽁꽁 감춘덕분에 피터는 평소와 다름없는 일과를 보낼 수 있었다. 정식적인 부부가 되었지만 두 사람은 아직 각인하지 않았다.

갑작스레 나타났던 알파와 오메가에 대한 발현 증상이 자리 잡으면서 불규칙적이던 것들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러트와 히트싸이클이 모든 알파와 오메가들에게 규칙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고, 이에 대한 영향에 대해서도 많은 연구가 진행되어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문제는 여기에 있었다. 불규칙적이던 토니와 피터의 러트, 히트싸이클이 규칙적으로 돌아오기 시작한 것이다. 한 달에 한 번씩 돌아오는 것이 벌써 세 번째이다. 처음과 두 번째는 실험용으로 나온 억제제를 통해 넘어갔으나 아직 완성단계가 아닌 탓에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 것이다.

 

“괜찮아? 내가 잠시 다른 곳으로 가 있을까?”

“끄응- 아니에요. 그냥, 여기 있어요.”

“리아는 숙모 댁에 잠시 맡겼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나는 랩실에 있을 테니까 그, 너무 참기 힘들면 그냥 날 이용해.”

 

히트싸이클 때문에 몸을 베베 꼬며 어쩔 줄 모르는 피터를 보고 있자니 괜히 자신이 더 동하는 것 같아 토니가 급히 걸음을 옮겼다. 어제부터 안방 침대에서 내려오지 못하는 피터를 배려해 토니는 자신의 페로몬을 최대한 없애기 위해 노력했다. 랩실로 내려가 멀쩡한 자동차 한 대를 모조리 분해하고 다시 조립하기를 반복하며 시간을 보내길 몇 시간, 자비스를 통해 피터가 자신을 찾는다는 알림을 받았을 때, 토니는 기쁘기도 하면서 조금 망설여졌다. 예전처럼 피터를 안기엔 그가 자신에게 너무 소중해졌기 때문이다. 토니는 피터를 안게 된다면 그것이 두 사람의 마음이 통한 다음이기를 바랐다. (아닌 것 같지만 로맨틱한 부분이 있다) 때문에 지금 히트싸이클을 견디고 있는 피터를 안는 것이 망설여지는 것이다. 욕구에 지배당해 ‘알파’를 찾는 피터와 섹스를 한다면 말 그대로 욕구해소를 위한 것 밖에 안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과거의 자신이 그랬듯 말이다.

 

똑똑-

 

“피터?”

“토니...”

 

이불에 얼굴을 묻고 자신을 부르는 피터에 문가에 서 있던 토니가 주춤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몹쓸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말로는 이용하라고 했으면서 막상 이용하려니 주춤거리는 건 또 무슨짓인가. 피터는 아득해지는 정신을 꽉 붙잡으며 손을 뻗었다. 볼품없이 떨리는 손이 창피해 힘을 주었지만 그 꼴이 더 이상해 그만두었다. 힘이 빠진 손으로 시트를 꾹 부여잡고 열이 오른 얼굴을 이불에 비볐다. 아무래도 토니의 도움을 받기에도 그른 것 같다는 마음에 화가 났다. ‘이럴 거면 말이나 말지!’ 이런 핑계로도 자신과 섹스하고 싶지 않은가보다. 알파인 주제에 히트싸이클의 오메가를 눈앞에 두고도 저렇게 망설이는 것을 보니 분명하다. 정말 오롯이 아이만을 원한 것이라는 생각에 눈물이 찔끔 나왔다.

 

“내가 가도 될까?”

 

답지 않은 말에 피터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누구 놀리는 것도 아니고! 당장 나가라고 소리를 빽 지르려다가 그의 얼굴을 보곤 다시 이불에 고개를 파묻었다. 토니 앞이라 최대한 참고 있었지만 금세 방 안을 가득 찬 그의 페로몬에 더는 한계이기도 했다.

 

“빨리 와요..”

 

웅얼거리는 피터의 귀가 붉게 물들었다. 다행이라는 얼굴로 다가온 토니는 망설였던 것과는 달리 능숙했다. 5년 전에도 그랬지만 그때와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그가 내내 읊조리던 사랑 고백이 아직도 귓가에 맴돌았다. 두 사람은 각인을 했다. 각인 이후에도 두 사람 사이엔 한동안 어색함이 맴돌았지만, 예전과는 달리 이제 막 연애를 시작한 연인 사이의 느낌이었기 때문에 토니는 익숙하지 않은 행복함에 웃었고, 피터는 상상만 했던 행복이 현실이 되었다는 사실에 웃었다. 내 아이와 저 사람이 눈앞에서 웃고 있는 모습이 마치 꿈만 같았다. 상상속의 완벽한 가족 안에 자신이 있다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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