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밤샘 촬영은 기본이었고 온 몸에서 파스 냄새가 진동했다. 피곤에 쩔어서 집에 들어가면 제노는 이따금씩 거실에 멍하니 앉아있거나 아예 방에서 자고 있었다. 거실에 있을 때는 딱히 나에게 할 말이 있다거나 용건이 있어서 나를 기다리는 건 아닌 것 같았고 그저 할 일이 없어서 멍을 때리고 있는 것 같았다. 들어오는 나를 보고 딱히 말을 걸지는 않았으니. 왜 그러고 있냐 묻고 싶었지만 나 또한 너무 피곤해 그냥 간단하게 인사를 건네고 각자 방으로 흩어지는 게 일상이었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였다. 또 서로 바빠졌고 한 집에 살면서 이렇게 잠깐이라도 만나기가 힘들었다. 가끔 전화나 문자로 생사확인을 하는 정도. 그러다 우연찮게 나도 촬영이 일찍 끝나고 제노도 촬영이 없는 날. 정말 며칠 만에 한 집에서 얼굴을 마주했다. 이 날도 제노는 조명만 켜놓은 채로 가만히 앉아 나를 반겼다. 아니, 반겼다기보다는 그냥 안부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네요.”

“그러게. 촬영 잘 하고 있어?”

“네. 누나는요?”

“보다시피. 나한테 파스 냄새 엄청 나지 않아?”

“네. 힘들겠어요.”



이건 위로인지 놀리는 건지 모를 말투였다. 원래 위로에 인색한 스타일인가. 고개를 갸웃 거리며 냅다 바닥에 주저앉았다. 오늘은 대화라도 좀 나눌까 해서. 그래도 나름 여기가 집이라고 아늑하고 마음이 안정 되는 느낌이었다. 제노는 소파 위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있었고 나는 그 소파를 등받이 삼아 다리를 쭉 뻗고 앉았다. 도대체 볼 때마다 불도 다 켜지 않고 티비도 안 켜고 하다못해 노래도 안 틀어놓고 혼자 뭐하고 있는지. 몸을 휙 돌려 망부석마냥 앉아있는 제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너는 왜 맨날 그러고 가만히 앉아있어?”

“그냥요.”

“참 재미없게 산다 너도.”

“영화 볼래요?”

“아니. 나 너무 피곤해.”

“들어가서 쉬어요.”



앓는 소리를 내며 어깨를 통통 쳤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또 터덜터덜 제 방으로 걸어 들어갔다. 뭐야, 이게 끝인가. 원래 무뚝뚝하고 말이 그렇게 많지 않은 성격인 건 알고 있었는데 아주 가까이에서 보는 제노는 더욱이 그래보였다. 진짜 재미없게 사는 애. 이 정도. 나도 지칠 대로 지친 몸이라 꾸역꾸역 2층으로 올라가 샤워를 하고 머리까지 말리고 침대에 딱 눕자마자,



“아, 신경 쓰여 죽겠네 진짜.”



오랜만에 얼굴을 본 건데 이상하게 낯빛이 어둡고 어째 살도 더 빠진 것 같은 제노의 모습이 신경 쓰여 죽을 것 같았다. 예전부터 계속 혼자 외롭게 거실에 앉아있는 모습이 신경 쓰이기는 했는데 오늘은 그게 더욱이 그랬다. 어디 아픈가. 힘든가. 아까 영화 보자고 할 때 그냥 알겠다고 할 걸 그랬나. 하여튼, 동정심도 많고 생각도 많아서 문제야. 근데 이미 시간도 다 지났으니까 자고 있지 않을까? 이미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고 있는 거 아닐까? 싶어서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고 수면안대를 눈 위로 살포시 덮었다. 그렇게 노곤노곤 잠이 오기 직전이었는데.



“....자?”



도대체 쓸데없는 생각 멈추는 법은 어떻게 하는 건지. 결국 조심조심 1층으로 내려와 제노의 방 문 앞에 서서 조용히 노크를 했다. 물론 제노가 대놓고 힘들다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냥 정말 혹시나 해서. 대략 한 시간 정도 지난 시각인데 아직 자고 있지 않았는지 안에서는 부시럭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문이 벌컥 열리고 아까와 똑같은 모습으로 멀뚱하게 서있는 제노의 모습이 보였다. 제법 꼬순내가 날 것 같은 강아지같이 생겨가지고는 비누향이 은은하게 풍겨왔다. 머쓱하게 잠옷의 소맷단을 돌돌 말며 말했다.



“아니, 잠이 안 와서. 아까 영화 보자고 했잖아. 볼래?”

“....좋아요.”



생각보다 흔쾌히 제안을 받아들였다. 아, 뭐야. 짜식이. 이게 목적이었구만. 그렇게 보고 싶었으면 같이 보자고 좀 징징대지. 이렇게까지 보고 싶어 하는 줄은 몰랐지. 솔직히 무지 피곤했지만 그래도 한 지붕 아래 살아가는 동거인으로서 이 정도는 해줄 수 있지 않을까 싶어 냉장고에서 맥주 두 캔을 가지고 와 아까처럼 같은 포지션으로 자리를 잡았다. 소파 위, 그리고 아래. 그러면 제노는 내가 앉을 자리를 만들어주다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누나는 왜 거기 있어요?”

“엉? 원래 한국인은 다 이렇게 앉는 거야.”

“그럼 저는 한국인 아니에요?”

“그런가보다. 뭐 네 팬들이 그러던데, 천상계랑 지상계랑,”

“누나가 그런 말 하면 좀 그래요.”

“뭐 어때용. 부부끼리.”



저번에 이런 농담을 좋아 하는 것 같길래 눈을 게슴츠레 뜨고 이야기하니 역시나 이번에도 적중이었다. 아무 표정 없던 낯 위에 두 개의 반달이 생기고 입꼬리는 초승달처럼 시원하게 올라갔다. 웃으니까 훨 낫구만.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구태여 이유를 묻지는 않았다. 뭐, 나와 비슷한 이유이지 않을까. 사람들에게 욕을 먹었거나 본인 연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거나. 그리고 말하고 싶지 않을 수도 있으니 대놓고 건네는 위로보다는 이렇게 옆에 있어주는 게 더 좋지 않을까 싶었다. 


솔직히 볼 영화가 그렇게 많지는 않았기에 그냥 내가 좋아하는 영화를 다시 한 번 보기로 했다. 이거 또 봐도 돼? 물으니 제노는 그렇게 하라며 맥주를 마시며 눈을 감고 암묵적 동의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그렇게 재밌어요?”

“응. 일단 내용이 엄청 흥미롭지 않아? 어떻게 저런 소재를 생각했을까? 내 시간만 거꾸로 흐른다는 게 뭔가, 끔찍하면서도 새로울 것 같아.”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누군가에게는 최악의 영화라고 그랬고 누군가에게는 최고의 영화라고 그랬다. 나에게는 사실 내 인생의 명작 정도의 영화는 아니지만 꽤나 흥미롭게 본 작품이기도 하고 오늘은 이게 또 끌리기도 해서 틀게 된 영화였다. 분명히 아까 수면안대를 쓸 때 까지만 해도 너무 피곤해서 수마를 이길 수가 없는 정도였는데 지금은 또 멀쩡하게 앉아 화면을 응시했다.



“만약에, 시간이 거꾸로 가면 어떨 것 같아?”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왜 그렇게 상상해요?”

“으. 지독한 현실주의자.”



만약에 놀이를 좋아하는 나에 비해 제노는 꽤나 현실적이고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우우, 엄지 손가락을 아래로 내리며 야유를 보내자 진심 어이없는 표정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아니, 상상이야 해 볼 수 있지. 무슨 저렇게 단호하게 일어나지도 않을 거라고 벽을 치냐고. 그럴 수도 있지. 뾰로통한 표정을 짓자 뒤에서 피식 거리는 소리와 함께 장난스레 내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이게, 어디 누나한테. 주먹으로 살짝 무릎을 내리치자 아얏. 하는 소리를 내며 내 손등을 찰싹 내리쳤다. 그렇게 영화도 보고 티격태격 하다가 문득, 진짜 문득 사적인 질문이 하고 싶어졌다. 그냥 더 친해지기 위한 노력이랄까.



“너 있잖아.”

“네.”

“연애는 해봤어?”

“....그게 왜 궁금해요?”



참나, 궁금할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제노는 또 이 누나가 왜 이래. 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아니, 연기하는 거 보면 세상 멜로눈깔이 따로 없기는 한데, 너 좀 성격 무뚝뚝하고 약간 싸가지 없는 거 알지.”

“제가요?”

“모르면 유감이네. 무튼, 그래서 좀 궁금했어. 아, 참고로 사적인 마음 제로. 나는 너처럼 배려심 없고 무뚝뚝한 사람은 딱 질색이야.”

“무슨 험담을 그렇게 대놓고 해요?”

“쏘리. 나 취했나봐.”

“멀쩡하거든요.”

“그럼 더 미안. 아니, 그래서 왜 대답 안 하는데?”



많이 무례한 질문인가. 그냥 궁금했을 뿐인데. 머쓱하게 머리를 긁었다. 내가 먼저 패를 보여주면 되려나. 아, 아니면 그냥 이런 질문 자체가 싫은가. 그래 그럴 수 있지. 술도 마셨겠다, 새벽감성에 취했겠다. 너무 선을 넘었나 싶어서 다시금 영화에 집중을 하려는데 뒤에서 뭐라고 웅얼대는 소리가 들렸다.



“....요.”

“어? 뭐라고?”

“....다구요.”

“제노야 안 들려. 잠시만, 소리 좀 줄일게.”

“....안 해봤다구요.”


“연애요.”



세상에. 지금 벤자민이 문제가 아니야. 이제노가 문제였어. 사실 제노랑 원래 친했던 사이도 아니고 인터넷에 이름 석자를 쳐 본 적 또한 단 한 번도 없고 소문을 들을 일도 없으니 저런 사적인 것에 대해서는 단 하나도 알지 못했었다. 그런데 아예 연애를 안 해봤다니. 조금은 의외라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도 모르겠어서 짧은 탄식만 내뱉었다. 오히려 내 반응이 민망했는지 제노는 굉장히 머쓱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렇다고 뭐, 어디 문제 있는 건 아니고요.”

“그렇게 생각 안 했는데. 찔려?”

“.....저 놀리려고 그러는 거죠.”

“쏘리. 아, 근데 뭐. 안 할 수도 있지. 뭐 어때용. 연애 안 하고 결혼 먼저 한 남자가 된 거야. 괜찮아 제노야.”

“괜히 말했네.”



여기서 진지하게 왜 연애를 안 해 봤냐, 이유가 뭐냐 묻는 것 보다는 그냥 가볍게 웃고 넘기는 게 나을 것 같아 장난을 치자 이렇게 놀리려고 물어봤냐며 한숨을 쉬었다. 그런 건 아니고 진짜 아무 이유 없이 궁금했던 건데.



“미안. 기분 나빴니?”

“아니요. 그런 건 아니고. 그냥 누구한테 이렇게 말한 건 처음이라.”

“오, 영광이네.”

“누나는요?”

“연애? 아마 너보다는 많이 했을 것 같은데.”



손으로 입을 막고 킥킥대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자리를 뜨려고 하길래 아아, 장난이야. 하며 팔을 붙잡자 또 힘 없이 털썩 소파에 주저 앉았다.



“농담, 농담. 근데 나 생각보다 그렇게 연애 많이 안 했다? 혹시 내 기사나 찌라시 같은 거 들었을지 모르겠지만 나 엄청 연애 많이 하고 다니고 허구한 날 남자 갈아치우고 그런 이미지거든.”

“몰랐어요.”

“근데 나 안 그래. 진짜야.”

“저 그렇다고 한 적 없어요. 그렇게 본 적도 없고요.”

“그렇다면 땡큐네. 무튼, 나 진지하게 연애 해 본 건 성찬이가 끝이야.”

“그래서 걔 표정이 그렇게 구렸구나.”



결혼식장에서 뾰로통하게 있던 게 제노의 눈에도 보였던 모양이다. 걔가 왜 표정이 그렇게 구렸는지 알아? 하며 수다스럽게 말을 내뱉었다. 나도 이동혁 말고는 이렇게 내 연애사에 관해 구구절절 이야기를 꺼내 본 건 처음이었다. 게다가 누구를 붙잡고 사실 그 기사들은 다 헛소문이라고 해명을 해 본 적도 처음이었다. 그냥 회피하고 혼자 힘들어하기 바빴지.


정말 웃기게도 제노가, 이 공간이 주는 안정감이 있기는 있었다. 진짜 결혼한 것도 아니고 한 방을 쓰거나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이도 아니면서. 게다가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부터 이런 편안함이 느껴지는지. 아마 다른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이 공간에서 나만 볼 수 있는 제노의 처연함 때문에 동정심이 생기고 제노 또한 나를 보고 똑같은 동정심이 생겼으리라 생각했다. 그 동정심이 똘똘 뭉쳐서 생긴 게 아마 서로를 향한 동료애일 것이라고 단정 지었다.


졸음은 달아난 지 오래였고 영화에서 눈을 뗀 지도 오래였다. 러닝타임이 꽤나 긴 영화인데 우리는 그 시간 내내 수다를 떨었다. 물론 말을 하는 쪽은 나였고 들어주는 쪽은 제노였다. 자연스레 소파에서 내려와 내 옆에 자리했고 내 앞에 빈 맥주캔들은 점점 늘어났다. 그리고 내가 뭐라고 했더라.



ironic show window






“....큰일 났다.”



어느 지점부터 하나도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냥 눈을 뜨니까 내 방 침대라구요. 그러니까, 어제 맥주를 마시고 내가 와인까지 마시자고 했지.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어쨌더라. 찹, 소리나 나게 양손으로 볼따구를 내리쳤다. 맥주와 와인을 한 번에 마신 게 잘못이었다. 보나마나 신체적으로 큰 실수는 하지 않았을 테지만 말실수를 했을까봐 그게 걱정이었다.


머리 안에서 누가 냅다 망치질을 하는 것 같았다.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그러면 더 머리가 쨍하게 울려올 것만 같아 그럴 수도 없었다. 진짜 미쳤나봐. 오늘 밤에 있을 촬영도 생각 안 하고 분위기에 취해서 주정뱅이처럼 굴었다니. 어깨에 몇 톤 짜리 짐이라도 얹은 사람 마냥 힙겹게 자리에서 일어나 벽을 짚고, 문을 짚고, 계단 난간을 짚고 거의 기어가듯 1층으로 향했다. 


어제 제노가 몇 시에 나간다고 했더라. 그것마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니, 그런 대화를 했는지도 확실치 않았다. 꾸역꾸역 1층에 도착하니 집은 쥐 죽은 듯 잠잠하기만 했다. 그저 내 입에서 나는 앓는 소리와 배에서 나는 꾸륵 거리는 소리뿐. 아무래도 제노는 스케줄을 간 것 같았,



“일어났어요?”



는데. 아니었네. 일단 냉장고를 열어 물 먹는 하마 마냥 냉수를 들이키고 있었는데 현관문이 열리고 검은색 캡모자를 눌러쓰고 마스크까지 야무지게 챙겨 착용한 제노가 양 손에 뭔가를 들고 들어왔다. 누가 봐도 스케줄을 가는 사람의 모습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스케줄을 하고 들어 온 모습도 아니었다. 내가 뭐라 묻기도 전에 모자와 마스크를 벗고 바리바리 사온 무언가를 식탁 위에 턱 소리 나게 올려 놓았다.



“어디, 어디 갔다와?”

“누나가 아침에 육개장 대령하라고 그랬잖아요.”



.....내가?



“아침에 얼큰한 육개장으로 해장하고 싶다고. 근데 알다시피 제가 요리는 잘 못해서 사왔어요.”

“....내가 그랬어?”

“나 죽는 꼴 보기 싫으면 꼭 해줘. 라고 정확하게 또박또박 이야기 했어요.”



“누구 죽는 꼴 보는 게 취향은 아니라서.”



미친새낀가. 주어, 김여주. 해장은 꼭 얼큰한 국물로 하는 게 내 취향이 맞기는 한데, 저렇게 취해가지고 제노를 붙잡고 진상을 부렸다는게 믿기지 않았다. 내가 사오라고 명령을 했다고? 혹시 제노가 나 놀리려고 거짓말 치는 건 아닐까? 내 약점 잡으려고 그러는 건 아닐까? 의심 했지만, 저 표정은 진짜였다. 그리고 제노가 저렇게 시시콜콜한 농담을 칠 애도 아니고, 그리고, 백프로 내가 주정을 부렸을게 분명했다.


제노는 포장해 온 두 개의 육개장을 세팅하고 입으로 젓가락을 문 채로 뚜껑을 열고 나에게 앉으라는 눈빛을 보냈다. 일단 먹기는 먹어야지 싶었지만 아주 가시방석이 따로 없었다. 그 와중에 또 이걸 먹고 속이 얼큰하게 풀리는 내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왜 이렇게 맛있는 데서 사온 거야 진짜. 염치 없게 어디서 사왔냐 물으려고 하던 찰나에 먼저 열린 건 제노의 입이었다.



“내일 은퇴 기사 낼 거예요.”

“에?”

“어제 얘기 했잖아요.”

“....그런 얘기까지 했어?”

“어디부터 어디까지 기억나요?”

“모르겠어. 진짜 미안. 혹시 내가 실수한 건 없지?”



정말 미안한 듯 내뱉는 말과는 다르게 행동은 거의 육개장에 홀린 듯 숟가락을 들고 있었고 반대쪽에서는 조용히 숟가락을 놓고 나를 빠안히 바라봤다. 왜, 왜 그렇게 쳐다봐. 입에서 흘러내리려는 고사리를 젓가락으로 냅다 집어넣고 멀뚱거리는 표정만 지었다. 나 진짜 기억 안 난다고. 내가 뭐 심한 장난을 쳤나. 나에 대한 무슨 이야기를 꺼냈나 싶었는데 제노가 꺼낸 말은 의외였다.



“왜 저희 엄마가 연락한 거 미리 말 안 했어요?”

“....내가 그걸 얘기했니?”

“그런 일 있으면 바로 말 해줘요. 누나한테 절대 연락하지 말라고 얘기 했었는데, 하. 이럴 줄 알았어요. 무튼, 제가 대신 누나 회사 측에도 연락 해놨어요. 아마 빠르면 내일 늦어도 이번주내로 기사 날 거예요.”

“취해서 말했구나. 기억이 안 나네. 무튼, 미리 말 안 한 건 미안. 조금 고민했어 얘기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근데 벌써 기사 내는 건 조금 이르지 않아?”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아직 나도 제노도 촬영을 진행하고 있는 중이었고 어쩌면 우리의 은퇴 기사로 인해 촬영에도 지장이 갈 것 같았기에. 물론, 무시 하라면 무시 할 수야 있겠지만 아직은 이른 것 같다는 내 의견이었다. 그러면 제노는 머리를 한 손으로 몇 번 쓸어 넘기고 잔뜩 피곤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면 누나 매번 저희 엄마 전화 받을 수 있어요?”

“.....아,”

“저 은퇴 못 하게 막아 달라. 둘이 손잡고 동반 예능 좀 나가라. 은퇴 하지 말고 리얼리티 촬영이나 해라. 이런 것들이요.”

“아니. 솔직히 좀 이해 안 가. 그렇게까지 참견 하시는 게.”

“저도 그래요. 그러면 그냥 최대한 못 박는 게 낫잖아요.”



순간 그 날 통화 했던 어머니의 목소리가 귀에 까랑까랑하게 울리는 듯 했다. 아, 절대 안 돼. 솔직히 우리 엄마도 나한테 뭐라고 안 하는데 남의 엄마, 그것도 가짜 시어머니의 전화를 받아가며 스트레스 받고 싶지는 않았다. 이렇게 생각하니 제노의 의견이 더 옳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아까와 다르게 곧장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며 네 의견에 동의한다는 표시로 엄지손가락을 치켜 들었다. 촬영이야... 어떻게든 되겠지. 차마 어머니와 사이가 정말 좋지 않은 거냐 묻지는 못했다. 화제전환을 위해 어제의 일을 입에 올렸다.



“혹시 내가 말실수 한 거는 그거 말고는.... 없니?”

“다른 건 없고 업어서 침대까지 데려다 달라고, 아니, 누나는 술 마시면 원래 사람을 그렇게 부려먹어요?”

“부려먹다니! 부탁이지.”

“기억은 나요?”

“아쉽게도 안 나는구나.”



얘기를 하다 보니 어이가 없었는지 진심 억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약간 비스듬하게 하고서는 나에게 따지고 들었다. 아침에 꼭 육개장 차려달라고 명령하고, 일어나기 힘드니까 당장 방으로 데려다 달라고 징징댔다고. 아니, 뭐, 취하면 그럴 수도 있지. 속으로는 겁나 쪼잔하네 생각해놓고 밖으로는 또 미안한 기색을 보이기는 했다. 왜냐면 저렇게 따지고 들면서도 어쨌든 결론은 다 해줬으니까. 꾸역꾸역 밤에 나를 업어다가 방에 눕혀다주고 아침에 나보다 일찍 일어나 육개장도 사다주고. 어쩌면 천성은 조금 다정한 면이 없잖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 애인 생기면 잘 해 줄 것 같아.”

“생각 없어요.”

“그래. 1년 동안 내 수발이나 들어줘.”

“저를 그냥 종으로 생각하는 건 아니죠?”

“아니지 아니지. 소중한 남편이지.”

“비꼬지 말고요.”

“비꼬는 거 아니야. 어, 대표님이다.”



놀랍게도 깨질 것 같았던 머리가 점점 괜찮아지고 정신이 맑아질 때 쯤 대표님에게 연락이 왔다. 오전에 제노에게 연락을 받았다고. 아직 반 정도 남은 육개장을 식탁에 두고 제노에게 통화를 하고 오겠다는 신호를 주자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고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수화기 너머 대표님은 끊임없이 한숨을 내리 쉬었다. 



- 근데 아직 촬영 중인데 벌써 은퇴 기사 내는 건 좀 이르지 않니?

“제노가 그렇게 하자고 해서요.”

- 너가 언제부터 남의 말을 그렇게 잘 들었다고?

“남이라뇨. 제 남편인데요.”

- 얼씨구. 사랑꾼 납셨네.

“아무튼, 저는 제노가 하자는 대로 할 거라. 그렇게 해주세요.”



대표님 또한 나와 같은 생각이었지만 적게는 몇 번, 그리고 많게는 몇 백번이 될지 모를 시어머니의 전화를 받을 생각을 하니 머리가 지끈 거렸다. 그러면 제노 말마따나 공식적으로 못을 박는 게 낫겠지. 그렇게 서로 동의하고 회사에도 이야기를 끝낸 후, 생각보다 빠르게 우리의 은퇴 기사가 메인에 떡하니 걸렸다. 




이제노♥김여주, 은퇴를 위한 결혼이었나...

이제노♥김여주, 은퇴 후 계획은?




자극적인 제목의 기사들도 있었고 간단하게 적힌 기사들도 있었다. 회사 내에서 사람들이 많이 오지 않는 비상계단에 비스듬히 몸을 기대고 서서 기사에 나란히 뜬 나와 제노의 사진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아, 반응을 봐? 말아? 아니야, 보지 말자. 아, 그래도 궁금한데. 아, 아닌가. 핸드폰 액정 위에서 반응을 살필까 말까 고민하던 찰나 딱 제노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아무래도 보지 말라는 신의 계시겠거니 생각하며 주변을 살피고 나름 반가운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 댓글 보고 있죠.

“아니야. 보려다가 너한테 딱 전화 왔어. 아주 귀신이야.”

- 보나마나 안 좋은 댓글만 눈에 띌 텐데 그런 거 그만 봐요.

“여보, 지금 저 걱정 해주시는 거예요?”

- 누나는 그런 말이 참 잘 나오나 봐요.

“야, 쇼윈도인거 들키기 싫으면 너도 아등바등 노력 좀 해봐. 알겠지?”

- 충분히 하고 있는데.

“더 다정하게 대해주세용.”

- ....알겠어요.

“하여튼, 무뚝뚝해서. 나 오늘도 새벽 촬영이라 많이 늦어. 먼저 자.”

- 네.



가차 없이 짧은 대답 후에 전화를 끊었다. 하여튼 조금 귀여워 해주려고 하다가도 그래, 본질이 싸가지지 싶어서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나중에 또 육개장 사다달라고 해야지. 놀려야지. 생각하며 신나게 뒤를 돌았는데 갑작스레 가까이 다가온 얼굴 때문에 하마터면 발을 헛디뎌 뒤로 굴러 떨어질 뻔 했다. 아, 진짜. 은퇴 전에 사망기사부터 날 뻔 했잖아.



“아 깜짝이야! 너 왜 여기 있어!”

“나 재현이형 만나러 왔는데.”

“무슨 여기가 너네 회사야? 밥 먹듯이 오네.”

“밥도 이렇게 자주 안 먹기는 해.”

“농담이 나오냐.”



얘는 이럴 거면 여기로 소속을 옮기지. 넘어질뻔한 내 팔을 붙잡은 정성찬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얄궂은 표정을 지었다. 



“누나 은퇴해?”

“응. 가정에 충실하려고.”

“재수 없어.”

“이게, 못하는 말이 없어.”

“근데 무슨 가정에 충실하게?”

“무슨 가정이라니? 내 가정이지.”



음. 그렇구나. 정성찬은 턱을 살살 어루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 한 번만 더 여기 와서 진상 떨기만 해봐. 콱. 가만 안 둬. 나름의 경고를 보내고 자리를 뜨려는데 아주 대놓고 얼굴을 내 앞에 갖다 대고서는 당황스러운 말을 꺼냈다.



“쇼윈도도 가정이라고 볼 수 있어? 그래?”



3, 2, 1. 

딱 3초 동안 싸한 공기만이 이 곳에 가득했다. 얘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절대 알 리가 없었다. 진짜 이건 나랑 제노 단 둘만 아는 사실인데 왜 정성찬이 저런 말을 입 밖으로 내뱉는 지가 의문이었다. 떠보는 건가? 그래 떠보는 거겠지. 그래도 살짝 소름이 돋기는 했다. 그래, 아직 나한테 쌓인 게 많으니까 떠보는 거겠지 싶어 나를 잡고 있던 팔을 내치고 굉장히 기분 나쁜 표정을 지으며 호통을 쳤다.



“야. 너 무슨 소리를 그렇게 해? 쇼윈도? 나 되게 기분 나쁘려고 하거든? 무슨 생각으로 그런 걸 묻는지 모르겠지만 너 진짜 무례한 거야. 네가 아무리 나를 아직 못 잊었다고 해도,”

“못 잊은 건 아주 맞는 말이기는 한데, 아니, 본인 입으로 뱉어놓고. 통화 다 들었어. 들으려고 한 건 아닌데.”

“....야, 너 미쳤어?”

“빨리 해명해. 나 진짜 현기증 날 것 같아, 누나.”



“그깟 쇼윈도 왜 나한테 해달라고 안 했는지, 해명해봐.”



얘 입을 어떻게 단속 시키지, 벌써부터 그게 걱정이었다.













소소하고 미지근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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