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증(愛憎)


W. 율이




3.




"함양군(咸陽君)을 복직시키는 게 어떻겠소."

"전하! 절대 아니 될 말씀이옵니다!"



정전(正殿). 은의 돌발적인 언구에 조회에 참석하고 있던 신하들이 즉각적으로 반대하며 나섰다. 함양군이라 함은 선왕의 후궁 숙빈 정씨(肅嬪 鄭氏)의 아들이 아닌가. 분명 전 좌의정 정수공(鄭秀恭)과 숙빈 정씨가 역모를 꾀하였단 죄로 그들을 참형(斬刑)에 처하도록 하고 그 아들인 함양군에게 귀양형을 내리게 한 자가 바로 은이었다. 그런데 함양군의 복직이라니. 말도 안되는 소리였다. 심지어 숙빈 정씨와 정수공의 죄목이 무엇이었던가. 은 즉위 1년 만에 함양군을 새로운 왕으로 옹립하려 했다는 것 아니었는가. 



"전하, 참형으로 다스려도 모자랄 반역 죄인입니다. 복직이라니 가당치도 않은 말씀이옵니다."



윤만형이 입을 열었다. 바로 3년 전, 그들의 역모를 밝혀내고 처벌에 가담했던 실질적인 주인공이 바로 영의정 윤만형이었다. 이어 그 사건으로 새로이 좌의정으로 승격된 윤만형의 동생 윤완의도 한 마디 얹었다.



"맞습니다. 전하, 함양군을 복직시킨다면 왕권 또한 심히 흔들릴 것입니다. 부디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전하!"



신하들의 외침에 은이 살짝 웃었다. 기뻐서 웃는 것 따위가 아니라 조소 같은 것이었다. 숙빈 정씨와 정수공을 참수시키고 함양군을 유배 보낸 게 은이라고 했었던가. 어느 정도는 맞고 어느 정도는 틀린 말이었다. 그리고 틀린 그 어느 정도를 바로잡자면, 실은 당시 은이 이십 세가 안 되어 수렴청정(垂簾聽政)으로 권력을 잡고 있던 대비 윤씨의 업적이었다는 것. 그러니 그들의 역모죄가 악랄한 누군가가 꾀어낸 누명이었다는 것을 은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악랄한 누군가가 윤씨 일가였다는 것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터다. 하지만 그들이 꾸며낸 증좌가 너무나도 확실하여 어찌할 다른 방도가 없었던 것이다. 하여 억울하게 참수당한 그들을 보고만 있었으니 '어느 정도 맞다'라는 말도 옳은 말이었으리라. 


은은 그 일에 대해 꽤 깊은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다. 더군다나 그 함양군이 누구인가. 비록 소생은 다르지만 어릴 적 은과도 각별히 지냈던 형제가 아니었던가. 허나 이 신하들을 보라. 왕권을 미약하게 만든 게 어느 누구인데 대체 저딴 언구로 왕의 의견에 반대나 하고 나서는가. 참으로 웃긴 일이 아닌가. 그러니 은이 조소를 내보였던 연유도 이에 있었다.



"경들의 의견은 잘 알겠소. 허나 그 역모가 거짓이었다면 어떻겠소."



그러자 신하들이 기함을 하며 나섰다. 제일 먼저 나선 것은 다름 아닌 윤완의였다.



"역모가 거짓이라니 말도 안 되는 것이옵니다! 이미 다 밝혀진 일이 아니옵니까!"

"그렇소, 바로 그대의 공이 아니오."

"헌데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시옵니까 전하!"

"만약을 묻는 것이오. 만일 역모가 거짓이었다면 어찌 될 일일지 말이오. 과인이 답해볼까요?"



은이 웃으며 말했다. 이번에는 비소 따위가 아니라 진정 웃음이었다. 허나 윤완의는 오히려 그 웃음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은의 생각을 전혀 읽을 수가 없었기에 피어난 두려움이기도 하였고, 진정 역모가 거짓임을 들통난다면- 에서 자라난 두려움이기도 하였다. 윤완의가 윤만형을 은근히 응시했다. 무엇이라도 도움을 달라는 눈빛이었다. 하여 가만히 있던 윤만형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에 은이 한 쪽 눈썹을 까딱 치켜올리며 윤만형을 직시했다. 사실 은이 기다리던 건 윤만형의 답이었다.



"그럼··· 전하의 말씀대로 함양군을 복직시키고 역모를 밝혀냈던 좌상을 다시 조사해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소?"

"그리된다면 말입니다."



덧붙인 말에 은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과연 그리되게 놔둘 것 같으냐고 되묻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불편한 기색을 더 내비치는 게 좋은 판단은 아니었기에 단순 고개를 까딱이는 걸로 끝을 지었다. 그러니 윤만형이 빠르게 다음 안건에 대해 언급했다.



"전하, 곧 길(吉)일이 정해진다 하였사옵니다. 이제 후사를 생각하셔야 할 때입니다."



그러니 좋은 말로 할 때 중전과 합방을 하라는 말이었다. 무표정을 유지하던 윤만형의 낯빛에 어딘가 미소가 띄워졌던 것 같음은 은의 착각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허나 애석하게도 은의 머릿속에 즉각 떠오른 인물은 합방의 주인인 중전이 아니라 다른 여인이었다. 



'기방의 이름을 묻는 것이 아니다. 진짜 이름이 무엇인가 물은 것이다.'

'··· 그런 것은 없습니다. 그저 제 이름, 홍련일 뿐이지요'



어찌 그 기생 따위가 떠오르나. 달빛을 받은 낯이 유난히 고와 보였던 탓인가, 아니면 겁도 없이 면식도 없는 사내에게 덜컥 사연이 깊어 보인다 참견했던 그 성정이 은근 마음에 들었기 때문인가. 해서 죽은 제 생모가 떠올랐다. 어미도 그러했을까. 그러해서 선왕의 총애를 받아 이 궁까지 들어오게 되었을까. 그러니 문득 그 여인이 또 한번 보고 싶었다. 교각 근처 기방의 기생일 것이다. 찾는다면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었다. 홍련이라 하였나. 제 진짜 이름 따위는 없다고 말하던 여인의 사정(事情)은 무엇인가. 얼마나 보았다고 이리 궁금한 게 끝도 없이 떠오르나. 사람의 감정이란 게 참 그러한 것이었다. 한 번 의문을 품기 시작하면 끝도 없어지는 것. 한 번 좋아지기 시작하면 끝도 없어지는 것처럼 말이다.



"전하 후사를···."

"알겠으니 이제 그 일은 합방일까지 함구하도록 하시오."






중궁전.



"마마 영상 대감께서 드셨사옵니다."



자리엔 정갈히 앉아서는 영 어울리지 않는 초조함으로 손톱을 물어뜯고 있을 때쯤이었다. 아버님이라고 했다. 그래, 조회(朝會)가 끝난 것이겠지. 드시라 하라. 영의 답에 문이 드르륵하고 열렸다. 하여 보인 것은 예의를 갖추어 서 있던 윤만형이었다. 



"잘 말씀드린 것입니까."



영이 그토록 초조히 기다렸던 이유를 곧바로 드러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물음이었다. 그러니까 합방에 대해 전하께 잘 말씀드렸냐 이 말이다. 당장의 영에게는 그것밖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지금은 비록 찬밥신세일지 몰라도 은의 아이라도 갖게 된다면 지금과는 같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니 그 아이는 반드시 왕자여야 했으며 곧 세자여야 할 것이었다. 허나 이것 또한 영의 바람일 뿐이었지만.



"마마."

"예."

"후사를 생각하시는 게 좋을 것이라 일렀더니 전하께서도 알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이번은 이 아비를 믿어 보십시오."



윤만형의 답에 영의 낯빛이 금세 해사해졌다. 그 얼굴이 누가 보아도 아름답다 칭할 정도였으니 영의 외관은 구구절절 장점만을 읊지 않아도 여인의 태가 나는 것이었건만, 왜 은에게만은 아닌지 참으로 의아할 따름이었다. 



"그렇습니까."

"예, 마마."

"허나 또 그냥 넘어가면 그땐 어찌합니까?"



허나 맑은 낯빛과는 반대로 그 소리는 약간 징징거리는 어투였다. 윤만형에게는 그 소리가 저를 완연히 의지하고 있다 하는 물음처럼 들려왔다. 그래서였나, 왕이 영을 마음에 두지 않은 것이. 제힘으론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약한 아이라서 그런 것인가. 허나 그것뿐만은 아니라는 걸 윤만형도 잘 알고 있던 터였다. 아마도, 제 여식이라서 그러했던 거겠지. 그 생각까지 닿으니 영이 참으로 가여워 보였다. 그러니 이번 합방만큼은 성사시켜야 한다. 그 길만이 제 가문과 제 딸의 평안을 위한 거라고 생각되어 굳은 결의를 다지게 했다.



"믿어 보세요, 마마."








4.




"아니 형님 아무리 만일이라지만 다시 조사라니요! 진짜로 그리되면 어찌하려고요! 혹 다른 방도가 있는 것입니까?"



윤완의가 떨리는 손으로 탁자를 내리치며 말했다. 윤만형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으니 그에 윤완의가 민망한 듯 흠흠 목을 가다듬었다. 누군가 쫓아오듯 매우 불안해 보이던 윤완의와 달리 윤만형의 속은 매우 고요해 보였다. 형제답지 않은 상반된 모습이었다. 하긴 영상의 입으로 역모가 거짓임이 드러난다면 함양군을 복직시키고 그들의 역모를 밝혀낸 저 윤완의를 다시 조사해봐야 하지 않겠냐고 하지 않았던가. 



"형님 무슨 말이라도 해주십시오!"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니 걱정하지 말거라. 어찌 밝혀낸단 말이냐? 증좌도 확실했고 되려 꼬리라도 밟힐 증좌는 이미 다 인멸했던 걸 잊은 거냐."

"하긴··· 증좌가 없으니 아무리 왕이라 하더라도 어찌 못 할 테지요?"



그러면서도 속으로 어딘가 불안한 마음은 가시질 못하는 윤완의였다. 저 형님의 성정으로는 그렇게 된다면 정말로 저를 내칠 수도 있다는 생각까지 들게 하였다. 어릴 적부터 그런 인간이었으니 못할 것도 어디 있겠냔 말이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윤만형을 뼛속까지 따르는 것뿐이 살길이라 생각되었다.



"혹시라도, 만에 하나 밝혀지더라도 형님께선 절 버리면 안 됩니다."



윤완의의 말에 그동안 닿지 않던 윤만형의 눈길이 직접적으로 닿아왔다. 찌릿 째려보는 듯한 눈길이었지만 차라리 이렇게 표정을 드러내 보이는 형님의 모습이 윤완의로서는 한결 나을 것이었다. 



"쓸데없는 소릴. 허튼소리 말고 가서 일이나 보거라!"



예예···. 하며 윤완의가 서둘러 자리를 떴다. 하긴 믿지 못할 양반도 아니다. 그러면서도 발걸음은 초조히 대비전으로 향하고 있었다. 






대전(大殿).



대체 무슨 생각에 저리 깊게 빠진 것인지 턱에 손을 괴고 앉아있는 은의 모습이 혹 불편해 보여 고내관이 불쑥 여쭈려던 참이었다. 허나 고내관이 소리를 채 내기도 전에 바깥에서 호위무사가 전하를 찾는다는 궁녀의 말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그리하여 든 것이 은의 호위무사 해무였다. 



"그래, 알아보았느냐."

"예. 연화관(嬿花館)이라는 기방의 기생이랍니다."

"전하, 혹 그 기생이 전하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 것인지요. 어찌···."



선(先)은 호위무사 해무의 답이었고, 후(後)는 고내관의 물음이었다. 평소 여색(女色)을 밝히던 은이 아니었기에 기생을 찾는다는 언구에도 이리 물은 것이었다. 허나 고내관의 물음에 은의 답 대신 돌아온 것은 이러한 것이었다. 



"잠행을 나갈 것이니 준비하여라."



너는 알 필요 없으니 궁 안에서 일이나 보라고 말하는 것인가. 서운함도 이런 서운함이 없다. 전하의 곁에 4년을 붙어 다녔는데 어찌 이리 서운하게 군단 말인가. 하긴, 부부로 8년을 산 중전마마께도 그리 모진 사내인데 어찌 자신에겐 다정할 것이겠나- 하는 생각까지 닿으니 안 그래도 가엾어 보였던 중전이 더 불쌍해지는 것이었다. 



"연화관으로 행하실 겁니까."



고내관이 혼자 끙끙 앓고 있던 차에 해무가 여쭈었다. 그에 은이 답하였다.



"교각으로 갈 것이다."



은의 대답에 해무가 대답의 대신으로 고개를 숙였다. 이미 달이 밝아 차오르고 있던 참이었다. 분명 교각에 도착하면 그때와 닮은 시간이리라. 









소설 속 등장인물은 모두 허구의 인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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