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택은 뭐든 늦었다. 어릴 때는 걸음마부터 첫 말을 떼는 것까지 다 늦돼서 정말 애한테 무슨 문제가 있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며 택의 아버지는 옅은 미소를 띤 얼굴로 종종 말하곤 했다. 택도 가끔은 자신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곤 했다. 쌍문동 애들이 하는 말을 한 박자씩 놓칠 때라든지 습관적인 두통에 알약을 물 없이 잘도 꿀떡꿀떡 삼켜낼 때나 발에 닿는 땅이 허공처럼 느껴져 자꾸만 몸을 휘청거릴 때…….

야, 최택.

느닷없이 방문이 벌컥, 열리자 택은 어깨를 잔뜩 경직시켰다. 이미 문 틈새로 흘러들어온 안녕하세요, 하는 인사말에 누가 들어올지를 미리 알고 있었으면서도. 아니 어쩌면 그래서 더? 넋을 빼고 딴생각에 잠긴 택의 앞까지 성큼성큼 밀고 들어온 정환이 손을 뻗어 택의 머리를 슬쩍 밀며 타박을 놓았다. 뭘 그렇게 놀라냐. 사람 무안하게. 그래도 택은 꿈쩍을 않았다.


*


덕선아.

응?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건…… 뭐야?

언젠가 택이 늦은 밤, 평상에 걸터앉아 애꿎은 두 발을 까딱이며 덕선에게 물었었다. 덕선은 택이 사다 안긴 연분홍색 앙고라 장갑에 두 볼을 비비다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누구야?

…어?

좋아하는 사람 생긴 거 아냐? 누구냐고. 응? 내가 아는 애야?

아니야. 택은 한 박자 늦게 손을 내저었다. 덕선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역시. 그럼 그렇지. 쌍문동 애면 내가 모를 리가 없지. 

넌 드라마도 안 보냐? …아, 안 보지. 아무튼, 좋아한다는 건 말이야? 그 사람이 언제 오나 목이 빠지게 기다려도 하나도 안 지루하고, 저 멀리서 목소리만 들어도 좋고, 어? 암튼 그런 거라고, 알겠어?

…응.

좋아하는 사람도 없는 게, 희동이 니가 알긴 뭘 아냐? 

뚱하게 눈을 흘긴 덕선은 곧 꿈꾸는 표정으로 돌아가 두 손을 맞잡고 조잘거렸다. 덕선은 완전히 사랑에 빠진 소녀, 그 자체였다. 연분홍색 앙고라 장갑을 꼭 닮은. 택은 언제나 그랬듯 덕선이 말하는 모두를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무언가 희미하게나마 알 것 같다고 생각했다. 덕선이 말하는 것처럼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게 손을 잡고 같이 있고만 싶고, 어쩌다간 입을 맞추고 싶기도 한 그런 종류의 마음이라면.

야, 너 또 내 말 안 듣고 있지.

도끼눈을 한 덕선이 대뜸 말을 끊었다. 

어? 아냐. 

택 자신이 듣기에도 영 매가리 없는 목소리였다. 에이, 내가 너한테 뭘 바라냐. 어? 버럭 소리를 높인 덕선이 괜히 씩씩거리며 파란 대문 집으로 들어가는 걸 보며 택은 덕선의 뒤통수를 향해 천천히 손을 흔들었다. 슬리퍼를 신어 시린 발을 꼼지락대며 택은 덕선이 가고도 좀 더 머물렀다. 사실은 덕선의 잘 자라, 하는 목소리가 워낙 컸던 탓에 혹시 택이 잘 아는 얼굴이 한 번쯤 나오지는 않을까, 택은 기다렸었다. 정말. 혹시나.


택이 아는 건 지극히 단순한 사실이다. 최택은 김정환을 좋아한다. 같은 쌍문동 골목에서 자란, 서로 볼 꼴 못 볼 꼴 다 보여주고 할 말 안 할 말 가리지 않던 소꿉친구를 새삼스레 좋아하게 됐다는 말이다. 처음에는 낯설다 느꼈다. 자신이. 정환이 야, 최택, 하고 부를 때 잘만 나오던 목소리가 목구멍이 딱 말라붙어버린 듯 왜, 하는 대꾸가 좀처럼 나오지 않는 거며 답지 않게 누구 하나 웃겨주는 사람 없는 방에서조차 웃음이 헤퍼졌다는 거며. 허나 설레지만은 않았다. 덕선이 말하는 사랑이라든지 애들이 자주 듣는 라디오에 등장하는 연애 사연과 같은 두근거림은 존재하지 않았다. 정말 어디가 잘못된 게 아닐까 싶을 만큼 심장이 오그라들고 숨이 가빠왔을 뿐이었다. 

야, 최택. 너는 집에 있으면서 왜 대답을 안 하냐.

이상하지. 택은 비디오를 뒤적거리는 정환을 물끄러미 올려다봤다. 정환은 제집 마냥 택의 방에 쳐들어와 남의 비디오를 고르는 데 집중했다. 이상한 놈. 뭘 보냐? 정환이 퉁을 놨지만 택은 그냥 배시시 웃었다. 거 봐, 이상하지. 정환은 자연스레 선반 위에서 택의 이불 두 장을 꺼내와 한 장은 바닥에 깔고 한 장은 덮고 누웠다. 택보고 어서 누우라는 듯 자기 옆의 빈자리를 손바닥으로 가볍게 팡팡 치면서.

정환아, 나 내일 대국인데…….

알어.

비디오 좀만 보다 갈 거니까, 하고 정환이 덧붙였다. 아, 안 누울 거냐? 정환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나서야 택은 잔뜩 꾸무럭거리며 이불 아래로 들어갔다. 꺼진 불 밑, 어둠에 익숙해진 시야에 정환의 각진 얼굴이 얼핏 보였다. 

야.

어, 어?

택은 숨을 죽였다. 자기도 왜 그랬는지 모르게.

나, 덕선이 좋아해.

그다음엔 숨이 턱, 막힐 일이 벌어지리라는 걸 또 택 자신만 몰랐나 보다. 최택이 늘 그렇지. 등신. 머저리. 바보. 천치. 

……알어.

정환이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는지 이불이 요란하게 구겨지는 소리가 났다.

알어? 언제부터. …티 나냐?

그냥……. 알아.

계속 보니까 알아. 택은 생각보다 잠잠한 가슴팍을 손바닥으로 꾹 세게 눌렀다. 덕선이 알았다면 원래 첫사랑은 안 이뤄진대, 하고 말해줬을까. 아, 왜 하필 덕선이야. 덕선이…… 덕선의 생각을 하면 택은 되레 상처 입었다. 사실 택은 덕선이 좋았다. 덕선을 싫어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다만 택은, 택만은 정환이 '좋았'다. 가끔은 덕선을 좋아하는 자신이 싫어질 만큼.

성덕선한테는 말하지 마. 어?

알았어.

하긴, 니가 말 안 해줘도 눈치가 없어서 모를 거야, 걔는.

다시 자리에 누운 정환이 덥석 택의 허리에 팔을 감아왔다. 하여간, 성덕선……. 중얼거림에 섞여드는 애정 어린 웃음기. 최택도 알 건 다 안다. 김정환은 가끔 택에게도 그런 짓을 했다. 하여간, 최택…… 맹해가지곤. 그러고 한심하다는 듯 택을 쳐다보는데 꼭 그럴 때마다 입술은 웃고 있어서, 택은 욕을 먹으면서도 웃었다. 지금 택은 어쩐지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코가 시큰하니 아팠다. 

야, 최택.

……응.

근데 너는 좋아하는 애 없냐.

없어.

너 좋다는 애들은 많을걸? 하긴, 너는 가만 보면 애가 바둑 빼고는 아는 게 없더라. 바둑 아니면 좋아한다는 감정이 드는 게 있긴 하냐?

정환이 이불 속에서 낮게 웃었다. 웃음소리가 들려서가 아니라 팔에 바짝 붙은 정환의 가슴팍이 잘게 떨려서 택은 정환이 웃고 있구나, 했다. 

있어.

어?

나도 있다고.

좋아하는 사람. 택은 금방이라도 울음이든 고백이든 튀어나올까 봐 입을 꾹 다물었다. 사랑에는 이기고 지는 게 없다지만 택은 아니었다. 사랑이 바둑처럼 좋아할 수 있는 거라면 택은 단 한 수도 물리지 않았을 거다. 먼저 고백할 걸, 하고 지금처럼 후회하는 일은 없었을 거란 얘기다. 아마추어 김정환을 상대로 최택은 오늘 자충수를 뒀다. 몸을 돌려 누워 창밖을 올려다보니 가로등이 모조리 꺼져 있었다. 새벽인가 보다. 택은 시린 눈을 손바닥으로 마구 비볐다.

정팔아.

어쭈.

……내일 대국 지면 다 너 때문이야.

져도 돼.

너가 내일 져도 안 떨어진다며. 정환의 얄팍한 입술이 슬쩍 올라가는 걸 보며 택은 내일 대국은 이길 수 없으리라고 확신했다. 평소처럼 옷을 차려입고 안경을 쓰고 시합장에 들어가겠지. 원래 식사도 잠도 거르고 살았으니 내일의 대국이라고 딱히 평소와 다를 건 없을 거다. 다만 밥을 거르고 잠을 거르고 잠깐 담배 한 개비를 몰래 피울 때도 택은 정환을 생각하겠지. 상대에게 미안하리만치 머리가 바둑이 아닌 딴생각으로만 가득 차서 금방 승기를 내주고 말 거였다. 택은 원래 그런 애였다. 늦되고 유독 낯을 가리는 아이는 저가 좋은 게 아니라면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 좋아하는 걸 꼽아보라면 열 손가락으로도 충분해서 떼를 쓰려거든 두 주먹을 꼭 쥐고 펴지 않으면 그만이었던 아이. 내일은 대국에서 질 것이다. 택은 이불을 턱 끝까지 끌어올려 덮었다. 정환에게 조금의 죄책감이라도 되지 않을까, 싶어서 택은 일부러 너 때문이라고 했다. 여느 때처럼 정환은 신경도 쓰지 않겠지만. 

언제나 불만족하는 자기만족형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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