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9년 1월 12일 예정된 미야카게 교류회 「제왕의 宮전」 을 위해 작성한 글의 샘플입니다.













롯폰기로 이사를 하고 두 번째로 맞는 주말이었다. 첫 주는 밖으로는 나가지도 못했지만 이번주에는 고향에 다녀올까 싶어 신칸센에 올랐다. 턱을 괴고 창밖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던 눈이 깜빡였다. 넓은 차창 너머로 탁 트인 논이 가득 들어찼다. 하얀 눈이 소복하게 쌓인 겨울의 땅은 보기만 해도 어깨가 움츠러들 만큼 시린 빛을 냈다.


- 다음 역은 센다이역, 센다이역입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짐이랄 것도 없이 가벼운 백팩을 짐칸에서 꺼내어 어깨에 메었다. 출입구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열차로 갈아타고, 다시 시내버스를 타고 조금만 가면 미야기는 금방이었다. 매연을 내뿜고 지나가는 버스의 뒤꽁무니를 잠시 쳐다보던 카게야마가 어깨에 둘러 맨 가방끈을 잡아당기며 발걸음을 옮겼다.

항상 붐비는 도쿄의 거리와는 달리 시골답게 노상 카페도 굉장히 한적했다. 매서운 겨울바람을 막기 위해 두꺼운 천막을 댄 테라스를 쳐다보며 걷던 카게야마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발걸음이 절로 느려졌다. 유리창처럼 깔끔하게 보이지 않는 두꺼운 비닐천 너머를 들여다보려 애를 쓰던 카게야마가 눈썹을 찌푸렸다. 카페의 내부가 한적했음에도 굳이 외부 테이블에 자리를 잡은 이가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두꺼운 후드 끝자락으로 비죽 튀어나온 앞머리 아래 드러난 얼굴이 낯익었다. 남자를 알아보고도 한참이나 뚫어져라 쳐다보던 카게야마의 얼굴 위로 아리송한 표정이 떠올랐다. 남자는 스니커즈를 신은 발을 까닥거리며 테이블의 다리를 건드리고 있었다. 두꺼운 후드티의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채 노트북을 쳐다보고 있는 남자를 한참이나 노려보던 카게야마가 결심한 듯 입술을 꾹 말아물었다. 카페의 출입문을 열어젖히자 후끈한 공기가 언 뺨을 간질였다. 추위에 잔뜩 움츠렸던 어깨를 느슨히 푼 카게야마가 테라스 쪽에 홀로 자리한 남자의 앞으로 다가갔다.


“…….”


남자의 바로 지척까지 다가간 이후에야, 카게야마는 그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기척을 느낀 남자가 모니터에 박고 있던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카게야마가 주저하며 입술을 달싹였다.


“그… 키츠네씨…?”


그 말에 남자가 완전하게 고개를 들고 눈을 마주쳐왔다. 방해물 없이 선명한 시야로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먼 외지에서 아는 이를 만났다는 반가운 마음이 피어오름과 동시에 어딘지 모르게 낯선 기분이 들었다. 항상 멋스럽게 넘긴 머리카락 아래 빼꼼이 드러나있던 잘생긴 이마 위로는 부스스한 앞머리가 무겁게 내려와 있었다. 번듯하게 각이 떨어지는 수트 대신 활동이 편해보이는 평상복을 걸친 몸을 어색하게 바라보던 카게야마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여기서 뵙네요.”


남자는 카게야마를 빤히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오늘은 좀… 평소랑 다르신 것 같습니다.”


옷 때문인가. 중얼거리며 어색한 표정을 짓는 카게야마를 남자는 대답 없이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카게야마는 입술을 꾹 다문 채 저를 쳐다보는 시선에 멀뚱거리며 눈을 깜빡였다. 먼저 이런 저런 이야기를 걸어 대화를 이어나가는 것은 항상 남자의 쪽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조용히 서로를 마주보고만 있는 것은 처음이었다. 사교성이 좋은 편은 아니었기에 카게야마는 둘 사이에 내려앉은 침묵에도 딱히 불편한 점은 느끼지 못했다. 그저 오늘따라 남자가 이상하도록 가라앉아있다는 생각을 잠시 했을 뿐이었다. 멀뚱히 의아한 낯을 한 채 앉아있던 카게야마가 불쑥 입을 열었다.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도쿄랑은 거리 좀 있잖아요.”


내내 입을 다문 채 카게야마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남자가 피식 웃었다.


“응. 멀지.”


남자의 대답은 평소와 달리 짧고 무뚝뚝했지만 울림만큼은 익숙했다. 발갛게 언 뺨에 손등을 대고 녹이며 카게야마가 질문을 이어나갔다.


“일로 오신겁니까?”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꿀 빨라고 나왔다.”


뭘 빤다고? 마주 앉은 이의 머리 위로 물음표라도 그려질 듯 선명한 표정이 떠오르자 남자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농땡이 피우러 나왔다는 말이야.”

“아… 네.”


납득하지 못한 괴상한 표정을 지으며 어렵사리 고개를 주억거리는 카게야마를 재밌다는 눈으로 쳐다보던 남자가 툭 내뱉었다.


“그러니까 여기서 만난 건 비밀.”


별달리 누구에게 말하겠나 싶어 더 이상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카게야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이지 이상한 남자다, 속으로 생각하고 있으면 남자가 고갯짓을 해 그의 맞은편 의자를 가리켰다.


“서 있지 말고 앉아.”


청유도 아닌 요상한 지시였다. 뭐하고 섰냐는 듯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말투에 얼떨결에 자리에 앉은 카게야마가 우물쭈물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그가 쭈뼛거리며 자리에 앉자마자 남자가 의자를 끄는 소리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운터로 향한 남자는 손가락으로 진열대를 가리키며 무어라 주문을 하더니 이내 트레이를 들고 돌아왔다. 그 위에 올려진 것은 김이 나는 따끈한 우유가 담긴 머그잔, 그리고.


“뭘 웃노.”


숟가락을 물고 포장을 뜯던 무뚝뚝한 얼굴에 의아한 표정이 떠올랐다. 카게야마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거. 진짜 좋아하시나봐요.”


남자는 흘끔 제 손에 들린 푸딩을 쳐다보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뭐. 그렇지.”


남자가 푸딩을 듬뿍 퍼올린 숟가락을 입에 넣는 것을 쳐다보던 카게야마는 그가 제 앞에 밀어준 머그잔을 양 손으로 잡아들었다. 따뜻한 온기에 빨갛게 얼었던 손끝이 조금 풀리는 것 같았다.


“감사합니다.”


그는 대꾸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카게야마는 달콤한 맛이 나는 스팀밀크를 홀짝이며 언 몸을 녹였다. 후룩, 음료를 마시는 소리와 남자가 키보드를 두들기는 소리만이 한적한 테라스를 맴돌았다. 이상하게도 그와 썩 잘 아는 사이가 아님에도 단 둘이 있는 것이 불편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또 다시 찾아온 적막을 깬 것은 이번에는 남자의 쪽이었다.


“너는 여기까지 무슨 일인데.”


테라스 너머를 바라보고 있던 카게야마가 머금고 있던 우유를 삼켰다. 턱을 괴고 노트북을 바라보던 남자의 눈동자가 카게야마를 향했다.


“그냥… 뭐. 답답해서요.”

“맞나.”

“뭐가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은 남자가 빈 통을 내려놓으며 고개짓을 했다.


“나가자.”


남자는 테이블 한켠에 올려져있던 두꺼운 비니를 눌러쓰고 그 위로 또 후드를 뒤집어썼다. 노트북을 옆구리에 끼고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남자가 어깨로 문을 받치고 눈짓을 했다. 그가 만들어 낸 틈으로 스쳐지나가자 포근한 비누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남자와 나란히 걸어가면서 카멜색 어그부츠를 신은 발을 곁눈질하던 카게야마가 입술을 우물거렸다.


“그렇게 입으시니까 꼭… 학생 같습니다.”

“맞나.”


대답을 하려는 찰나 바람이 불어 눈을 질끈 감았다. 추위로 얼얼한 코로 은은한 비누향이 스며들었다. 남자가 추워 죽겠네, 투덜거리며 옷깃을 여몄다. 문득 향수 냄새가 아닌 깨끗한 섬유유연제의 냄새가 나는, 평소와 다른 차림새의 남자와 이 소박한 거리의 풍경이 꽤나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저. 이제 이쪽으로 가봐야해서요.”


고개를 끄덕인 남자가 저를 물끄러미 보다가 손을 뻗어왔다. 멍하니 그가 손을 내밀어 제 언 뺨에 손바닥을 대는 것을 바라보던 카게야마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남자가 피식 웃었다.


“얼겠다. 따뜻하게 입고 다녀.”


남자가 멋대로 제 목에 둘러주었던 머플러가 생각났다. 아마 정리되지 않은 방 어딘가에 널부러져 있을 테지. 코를 훌쩍이며 고개를 끄덕이는 카게야마를 바라보던 남자가 입술을 미미하게 끌어올렸다.


“오늘 만난 거. 비밀이다.”

“딱히 말 할 사람도 없는데요.”


인상을 찌푸리고 말하는 것에 남자는 조용히 미소지었다. 고개를 꾸벅이고 횡단보도를 건너는 카게야마의 등 뒤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쁜아.”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홱 돌리자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로 목도리에 코를 묻고 있는 남자와 곧장 눈이 마주쳤다.


“그렇게 부르지 말라니까요.”


미간을 구기고 쏘아붙이는 말에 어깨를 들썩이며 웃는 남자의 입가로 하얀 입김이 번졌다. 건널목에 도착해 뒤를 돌아보았을 때 남자는 이미 사라진 후였다. 하얗게 피어오르는 입김 뒤로 달싹이던 입술의 모양이 떠올랐다.


“또 보자…?”


중얼거리는 카게야마의 입으로 숨이 연기처럼 번져나갔다.

 

 

 

 

 

 

* * *

 

 

 

 

 


“봉투 필요하신가요?”


젊은 여자는 고개를 젓고 물건을 가방에 넣었다. 핸드폰의 시계를 확인하며 서둘러 나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던 카게야마도 손목에 찬 전자시계를 확인했다. 어느덧 자정이 가까운 시간이었다. 그는 카운터 밑에 놓여져 있는 플라스틱 바구니를 꺼내들고 느릿하게 냉장 진열대로 향했다. 유통기한이 임박한 샌드위치와 주먹밥 따위를 던져 넣고 체크리스트에 숫자를 적어넣던 카게야마가 유제품 코너 앞에 이르러서 손을 멈칫했다. 유제품을 골라내던 손이 잠시 주저하다가 이내 익숙한 포장지로 감싸인 푸딩으로 향했다. 그러고보니 항상 제게 던져주기만 했지, 직접 먹는 것을 본 것은 지난 주말이 처음이었다. 우물거리며 먹던 남자의 얼굴이 떠올라, 손 안에 든 것을 주머니에 밀어넣었다.





 

“여기 있었네.”


쪼그리고 앉아 바구니 안을 정리하던 카게야마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찬기운이 묻어나는 얼굴을 한 남자가 씩 웃고 있었다. 체크리스트를 바구니에 던져 넣으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남자의 시선이 빠르게 쫓아왔다. 타이 없이 느슨히 풀어 낸 깃 사이로 곧게 뻗은 쇄골을 힐끔 훔쳐보던 카게야마가 고개를 꾸벅였다. 남자는 오늘은 짙은 밤색 코트 속에 옅은 색의 와이셔츠를 걸치고 있었다. 남자의 외모에서 지난 주말에 보았던 편안한 느낌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이 못내 신기해 카게야마는 그를 은근히 곁눈질했만 남자는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비밀로 해달라던 남자의 말이 떠오르자 굳이 아는 체를 하기도 뭐해 카게야마가 몸을 돌려 카운터로 향했다. 담배 진열대를 붙잡은 채 고개를 빼꼼이 내밀자 남자가 기다란 다리를 뻗어서 늘어놓은 바구니를 요리조리 피해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카게야마는 피식 웃으며 남자가 항상 사가는 브랜드의 담배를 카운터 위에 올려놓았다. 한참을 안에 서 있다가 나온 남자가 내려놓은 팩 요구르트의 계산을 마친 카게야마가 남자의 얼굴을 힐끔 쳐다보았다. 어쩐지 풀이 죽은 듯한 얼굴이 조금 우스웠다. 푸딩 진짜 좋아하나보네. 속으로 생각하던 카게야마의 앞으로 불쑥 팩 요구르트가 들이밀어졌다. 눈을 커다랗게 뜨고 남자를 바라보자 그는 여느때처럼 눈을 찡긋거렸다.


“…주시는 겁니까?”

“뭘 묻노. 새삼스럽게.”


왜요? 목 끝까지 차고 올라온 말은 내뱉지 못했다. 남자에게 건네주려 챙겼던 마지막 푸딩이 든 주머니가 묵직했다. 항상 푸딩을 찾는 남자의 생각이 나서 아무 생각 없이 챙겼던 것이건만 그가 제게 요구르트를 내민 순간, 카게야마는 주머니 속의 손을 뺄 수가 없게 되어버렸다. 그가 푸딩 대신 들고 온 요구르트는 한 개였다. 왜. 굳이? 자기 것을 사는 김에 자신에게 주는 줄로만 알았는데. 요구르트를 받아든 채로 우물쭈물하는 카게야마를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보던 남자가 고개를 갸웃했다.


“토비오군?”

“…….”


남자의 얼굴을 쳐다보기가 힘들었다. 의문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한참을 더 우물거리던 카게야마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피곤하나.”


고개를 끄덕인 카게야마의 귀끝이 발갛게 물들었지만 남자는 물론 카게야마 자신조차 그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푹 쉬어라. 앓지 말고.”


다정한 목소리로 건네는 말에 대꾸하지 못한 채 고개를 숙이자 남자가 손을 뻗어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손을 거둔 남자가 가게를 나설 때까지 카운터만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던 카게야마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하얀 입김을 흩뿌리며 새카만 SUV로 다가간 남자가 차 안으로 사라졌다. 좁은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차를 쫓던 푸른색 눈동자가 천천히 떨어졌다. 가게 벽면에 붙어 있는 자그마한 거울로 비추인 뺨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주머니 속에 손을 넣어 결국 건네지 못한 푸딩을 만지작거렸다. 적막 속에 남겨지자 끝없는 의문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저 남자는 왜 나에게 굳이? 그리고 나는 왜. 저 남자에게 굳이?

왜? 뭘 하고 싶었던거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답하지 못할 의문만이 허공을 떠돌았다.


손끝에 닿은 푸딩은 미지근하게 식어있었다.





 

남자는 그 뒤로도 몇 번을 더 왔다. 카게야마는 남자가 왔다 갈 때마다 손에 남은 푸딩을 보며 건네지 못하고 집 냉장고에 푸딩을 넣어 놓았던 그 날 밤을 떠올렸다. 슬슬 올 시간이라 생각하며 유리문 너머를 흘끔대던 카게야마의 표정이 미세하게 밝아졌다.


“토비오군. 내 왔다.”

“안녕하십니까.”


남자는 오늘도 한겨울답지 않게 코트 차림이었다. 그 때는 털모자에 털신까지 꽤나 중무장을 했던 것 같은데. 잠시 의아했지만 이내 그곳은 미야기였고, 이곳은 도쿄라는 생각이 뒤를 잇자 쉽게 납득할 수 있었다. 이곳도 춥기는 마찬가지지만, 미야기의 추위는 유달리 더했다.


“집은 어떻게 가.”

“걸어서요.”

“밖에 억수로 추운데.”


푸딩을 내려놓은 남자가 하는 말에 카게야마가 힐끔 창밖을 쳐다보았다. 웅웅거리는 바람소리가 심상치 않은 소리를 내고 있었다. 집에 가는 길이 막막해져 미간을 찌푸리는 카게야마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남자가 불쑥 물었다.


“데려다 줄까.”

“예?”


푸른색 눈을 커다랗게 뜬 카게야마가 입을 작게 벌렸다. 남자의 황금색 눈동자를 멍하게 쳐다보던 카게야마가 입술을 달싹였다. 주머니에 들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는 손에는 망설임이 묻어났지만 쉽사리 거절할 수가 없었다. 남자는 말없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초조하게 핸드폰을 손 안에서 굴리던 카게야마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근처까지만 부탁드립니다.”


씩 웃은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끝나는 시간에 다시 올게.”

“네.”


어느덧 남자는 자신의 마감 시간까지 꿰고 있었다. 이래도 괜찮은가 싶어 입술을 꾹 물었지만 고민은 길지 않았다. 남자는 평소와 다름없이 이번에도 푸딩을 건네고 출입구로 향했다. 다만.


“이따 봐.”


잠시 후를 기약하며 눈웃음을 치는 것만큼은 달랐다.



.

.

.


 

“여기서 내려주시면 됩니다.”


딱봐도 주변에 살 법한 맨션이 딱히 있어보이지는 않았지만 남자는 별 말 없이 차를 세웠다. 카게야마는 언젠가 남자가 제 목에 둘러주었던 목도리를 턱까지 끌어올렸다. 남자의 목도리는 기분좋게 보드랍고 따뜻해서 마음에 들었다.


“감사합니다.”

“응. 들어가.”


고개를 꾸벅이고 안전벨트를 풀던 카게야마가 작게 신음을 흘렸다. 안전벨트가 모자에 걸려 목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더듬더듬 꼬인 부분을 찾아 낑낑거리고 애를 쓰는 카게야마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남자가 상체를 숙였다.


"괜찮….”

“있어봐라.”


카게야마가 눈알을 굴리며 목을 움츠렸다. 바로 눈앞에 아담스애플이 도드라진 남자의 목이 다가왔다. 항상 남자에게서 나는 시원한 향이 후각을 자극했다. 저도 모르게 꿀꺽 침을 삼키고 주먹을 꾹 쥐었다.


“고 잠깐 오는데 뭐 이리 꼬았노.”


웃음기가 서린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서 들리자 카게야마가 어깨를 흠칫 떨었다. 남자의 숨결이 닿은 왼쪽 귀가 화끈거렸다. 남자가 안듯이 양 팔을 뻗어 바짝 다가왔다. 카게야마는 얼어붙어 숨소리조차 죽인 채 눈을 내리깔았다. 후드 모자가 끼인 틈을 살펴보던 남자가 벨트 사이로 꼬인 것을 풀어내려 모자를 들었다 놓았다를 반복했다. 답답했던 조임이 사라져 카게야마가 목을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들자, 남자의 황금색 눈동자와 곧장 눈이 마주쳤다. 속눈썹이 얽힐 듯한 거리에 있는 남자의 눈동자가 빨려들어갈 듯 고고한 빛을 내고 있었다. 기울였던 상체를 일으키던 남자 또한 그대로 시간이 멈춘 듯, 겨울밤을 닮은 눈동자를 말없이 응시했다. 눈도 깜빡하지 못하고 서로의 눈동자를 바라보는 것은 마치 눈으로 하는 입맞춤과도 같았다. 뜨거운 열을 내는 혀가 얽히는 것처럼, 열기를 품은 두 쌍의 눈동자가 정신없이 얽혀들어갔다. 끈덕지게 늘어지는 시선을 먼저 거둔 것은 남자의 쪽이었다. 눈가를 곱게 휘어뜨리며 웃은 그가 천천히 물러나자 폐 안을 가득 채우던 남자의 향도 희미하게 멀어졌다.


“쉬어라.”


머리 위에 커다랗고 따뜻한 감각이 내려앉았다. 가볍게 머리카락을 쓰다듬은 남자는 자신을 쳐다보는 카게야마에게 장난스럽게 눈가를 찡긋했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다시 한 번 꾸벅여 인사한 후 차에서 내렸다. 두 블록을 더 들어가 도착한 맨션에서 엘리베이터에 오르던 카게야마가 흠칫 멈추어섰다. 창백한 조명이 달린 엘리베이터의 거울 안에 비추인 얼굴이 토마토마냥 새빨갰다. 그는 입술을 꾹 문 채 거울을 외면하며 층수의 버튼을 눌렀다. 숫자가 바뀌어가는 것을 노려보던 카게야마의 고개가 천천히 떨어졌다. 경쾌한 소리와 함께 도착지에 다다른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고 자리에 선 채 제 발끝을 궤뚫을 듯 노려보았다. 활짝 열린 문은 닫힐 줄을 몰랐다. 카게야마가 닫힘 버튼을 꾹꾹 연이어 누르자 그제서야 문이 느릿하게 닫히기 시작했다. 가볍게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외부와 차단된 좁은 공간 안에는 엔진소리조차 없이 숨막히는 고요만이 가득했다. 한참을 가만히 서 있던 카게야마가 버튼 보드에 쿵소리가 나도록 머리를 박았다.


“…….”


시선을 피하는 것으로 외면해보려 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젠장.”


심장의 떨림이 멎지를 않았다. 움튼 싹을 감추기엔 어느새 가슴 안쪽에 뿌리를 내리고 단단히 선 감정이 요란하게도 쿵쿵거렸다. 내가 여기에 싹을 틔워 자라고 있노라고 생명을 요동치며 시끄럽게 굴어댔다. 몇 번을 더 보드에 머리를 찧던 카게야마가 옷깃을 파고드는 한기에 고개를 들었다. 버튼이 눌린 듯, 엘리베이터의 문이 어느새 다시 활짝 열려있었다. 오도카니 선 채로 복도의 센서등이 깜빡이며 점등되는 것을 쳐다보던 카게야마가 천천히 목도리 속으로 코를 파묻었다. 장난스레 웃는 남자의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남자의 향기가 코끝을 떠나지 않았다.








-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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